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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련
미셸 뷔시 지음, 최성웅 옮김 / 달콤한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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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직전에 읽은 <너는 모른다>에 비하면 대단히 훌륭한 책이다. 평범한 장르 소설임에도 나름의 문체가 존재한다. 4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를 끌고 나갈 만큼 짜임새도 있다. 작가가 준비를 많이 했다. 노력이 깃든 작품이다.


이런 류의 소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스릴러, 다른 하나는 미스테리. 범인이 누군지 독자가 아는 걸 스릴러라고 한다. 범인이 누군지 아는데 그게 뭐 재밌냐고? 영화 <추격자>를 봐라. 이 영화는 처음부터 하정우를 숨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정우가 나타나는 순간 관객은 누군가 또 죽을것이라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다. 두근두근 pit a pat! 큰일났다. 어떡하지? 초조와 불안 그리고 마침내 두개골을 부수고 들어오는 범인의 망치질. 범인이 가면을 쓰면 <13일의 금요일>같은 공포 스릴러가 된다. 그러나 대개 진짜배기들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내가 아는 최고의 스릴러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다.


반면 미스테리는 범인이 누군지 모른다.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은 '누가 범인이지?'라는 궁금증이다. 사람들은 궁금한 걸 참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든 사건의 끝을 보려하지. 그래서 평범한 관객들은 열린 결말을 싫어한다. 누가 범인인지 정확하게 집어 주지 않으면 화를낸다. 미스테리의 카타르시스는 마침내 드러나는 사건의 전말에 있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어련 하실려구.


간혹 미스테리 스릴러라고 불리는 명작들이 탄생할 때도 있다. <셔터 아일랜드>나 <살인의 추억>이다. 주인공은 첩첩이 쌓인 연쇄 살인마의 위협을 뚫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진실을 향해 전진한다. 여정은 스릴러고 종착은 미스테리다.


<검은 수련>은 미스테리에 속한다. 긴장감은 거의 없다. 그닥 개성있는 캐릭터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프랑스 소설임에도 이야기 중간 중간을 헐리웃 영화의 클리셰들이(상투적 표현) 채운다. 지적이고 잘생긴 경찰, 엄청난 미모의 용의자,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 작가는 <다빈치 코드> 열풍에 자극을 받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영화 <식스 센스>를 보고 <검은 수련>을 구상했다고 한다.


미스테리의 단점은 사건의 인과가 납득되지 않을 때 맥이 탁! 풀려버린다는 점이다. "이게 뭐야?", "끝이 허무해", "남는 게 없어". 작가는 미스테리를 구성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트릭을 사용한다. 소설의 배경은 인상파 화가 모네가 살던 지베르니.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사람들은 가로수 하나도 마음대로 바꿔 심지 않는다. 시간이 봉인된 곳. 작가는 시간 트릭을 완성하기 위해 이처럼 특수한 공간을 사건의 무대로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이같은 트릭은 글보다는 카메라를 사용할 때 훨씬 교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함없이 오래된 건물, 거리, 풍경,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을 같은 시간에 벌어진 것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거기에 과거와 대과거 현재를 교묘하게 연결하는 편집 기술, 화면 전환, 마침내 진실을 드러내는 화려한 카메라 워크! 소설은 이 모든 걸 오로지 글로 해결하기에 돋보기로 훑어보지 않는 한 좀처럼 시간의 균열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결말이 다가왔을 때 아! 하고 무릎을 치기 보다는 그냥 사기를 맞았다는 기분이다.


이 작품은 확실히 영화 제작자들이 군침을 흘릴만한 소설이다. 이 책이 영화화 된다면, 나는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그 영화를 볼 의향이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 책을 다시 읽을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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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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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흰색 테두리 안에 현대풍 일러스트가 있다. 좌우 상단 여백은 1센티, 하단은 2센티로 보인다. 출판사는 밝은세상이다. 제목은 <너는 모른다>.


일러스트 스타일을 보니 한 때 유행했던 <빅 픽쳐>가 떠오른다. 아니나다를까 뒷표지 날개에 <빅 픽쳐> 광고가 나온다. 같은 출판사의 책이다. 미스테리 스릴러 계열의 브랜딩 전략으로 디자인에 일관성을 준 것 같다. <빅 픽쳐>가 꽤 잘 팔렸으니 이 비슷한 디자인으로 다른 책들은 후광 효과를 얻을 것이다. 요즘 책은 거의가 마케팅이다.


가격은 13,800원. ISBN은 978-89-8437-243-6. 바코드 넘버는 9 한칸 띄고 788984 한 칸 띄고 372436 그 옆에 짧은 바코드 하나 더. 03860.




뒷표지 그림은 지하 감옥이다. 책을 다 읽어봤는데 이런 류의 감옥은 나오지 않는다. 


'새벽에 눈을 뜬 브누아 경감은 지하실 철창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잡아 넣으려면 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이 그림대로 따르면 지하실 한 켠의 벽을 부순 뒤 납치한 브누아 경감을 넣고 철창을 댔다는 얘긴데 일러스트 작가가 이 책을 보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에디터라도 지적했어야지. 어이 거기 사소한 거 가지고 시비걸지 맙시다. 넵.




다시 앞표지로. 빨간 머리의 여자가 분명 브누아 경감을 납치한 리디아다. 눈매가 날카롭고 입꼬리가 처졌다. 미인이라고 볼 수 없을 뿐만아니라 쉽게 다가가기 조차 어려워 보인다. 브누아 경감은 무슨 생각으로 이 여자에게 빠져 납치를 당한 걸까? 책에선 리디아가 동침을 미끼로 경감을 유혹했고 스카치에 약을 타 일을 처리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 여자 한테선 그런 은근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술을 한 잔 걸치고 주차장으로 나와 차문을 여는데 뒤통수를 5킬로그램짜리 렌치로 후려쳐 잡아온 것 같은 얼굴이다. 나라면 절대 이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장담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지만.


리디아의 옆에 거꾸로 선 남자가 브누아 경감이겠지. 이렇게 봐선 경찰이 아니라 동네 양아치 같다. 그런데 체크 무늬 남방이라니. 이건 또 읍내 바에 나온 미국 시골 아저씨의 복장 아닌가. 반쯤 가린 얼굴에서 얼핏 영화 배우 크리스토퍼 월켄의 모습이 비친다. 그가 출연한 뮤직 비디오 <Weapon of Choice>는 꼭 보자.


앞 표지를 넘기면 책 날개에 예의 그 작가 소개가 있다. 프랑스에서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국까지 왔겠지. '이 책의 한국어 저작권은 신원 에이전시를 통한 Fleuve Noir와의 독점 계약으로 도서출판 밝은세상에 있습니다. 신 저작권 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은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 및 복제 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아마존 프랑스는 이 책이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청소년 동화 정도로 정락시킨 무시무시한 소설!'이라고 했다. 여기서 아마존이란 미국에 본사를 둔, 제프 베조스가 이끄는 인터넷 공룡 기업이 아닐 것이다. 이 아마존은 브라질에 위치한 열대 우림, 지구의 허파로 불리나 심각한 삼림 파괴로 몸살을 겪는 그곳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존 프랑스란 그 열대 우림 내의 한 원주민 혹은 결코 그 지역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는, 유럽의 프랑스와 동명인 작은 부족일 것이다. 이런 가정 없이는 코그니티브 디스오넌스(Cognitive Dissonance) 즉, 인지 부조화로 인한 정신적 괴로움을 감당할 길이 없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에 대한 감상이 책의 재미있고 없음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것을 깨달았다. 나는 정말 행복하게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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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 4 - 폭력의 근대화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4
황석영 엮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땐 시큰둥했다. 첫 권을 보니 실존 인물인가 싶을 정도의 까마득한 대선배들의 등장. 채만식, 현진건, 염상섭, 김유정, 이상. 물론 한국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이분들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겠지마는 한편으로는 좀 화석 같은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절대 만지거나 책장을 넘겨선 안되고 유리장 밖에서 눈으로만 봐야하는 유물들.


두 번째, 세 번째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 <한국 단편 문학선 1,2>에 이미 등장한 바 있는 유명한 작가의 익숙한 작품들. 이렇게 겹치기 출연을 해도 되는거에요? 눈을 흘기며 지나갔지.


무려 황석영 선생님이 고르셨고 내가 좋아하는 단편집임에도 시큰둥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역시 만날 놈은 만나고 마는게 세상의 이치인가 보다. 퇴근길, 다가오는 전철 시간을 분 단위로 체크하며 서점에서 집어든 책이 이 4권이었다. 황석영, 이문구, 이청준, 조세희, 김원일. 익숙히 들어온 이름의 익숙하지 않은 작품들. 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1970년대, 대한민국이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터져 나온 고름을 원료로 삼은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석영 선생님의 작품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건 탁월했다. <몰개월의 새>는 베트남 파병 군인의 훈련소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데 박정희 정권은 월남전에 대한민국 청년들을 바친 대가로 산업화를 위한 대규모 차관을 얻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문구, 송기숙의 소설은 산업화 시대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농촌의 풍경을 그린다. 


한승원의 <목선>과 이청준의 <눈길>도 시골을 배경으로 하지만 앞선 두 작품과는 좀 다르다. <목선>은 부대끼는 삶을 꾸역꾸역 삼키고 살아야만 하는 어민들의 비애를 당대사와 느슨하게 연결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편성을 갖는다<눈길>도 마찬가지. 비록 새마을 운동이 발단이긴 하지만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이를 애써 외면하다 결국 그 커다란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아들의 이야기가 별빛처럼 은은하게 흐르는 작품이다. 

  

윤흥길과 송영의 작품은 폭격을 피해 시골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의 슬픈 군상을 훑는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고향을 버리고 서울 변두리에 무허가 날림집을 짓고 살아야 했던 노동자들, 환경 정화라는 명목으로 실행한 철거에 맞서 싸우다 완전히 거지가 되고마는 개털들의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송영의 <중앙선 기차>는 입에 풀칠할 방도를 찾아 변두리에서 도심지로 떠나는 기차칸의 정경을 그린다.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기차칸은 그야말로 세상의 축소판이다.


이 책에서 다소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건 이병주와 김원일이다. 이병주의 <겨울밤>은 너희가 목숨 걸고 이루려 한 공산주의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이념이란 얼마나 무의미한지 조롱해 은근히 신경을 긁는다. 김원일의 <어둠의 혼> 또한 이념이 뭔가요? 내 아버지를 죽게해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 그것인가요? 라고 묻는듯 그 무상함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이들은 어찌보면 다른 작품들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선다고 볼 수 있지만 좌우를 불문하고 훌륭한 작품을 실었다는 점에서 이 단편집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 대목이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은 조세희가 장식한다. 기획의 맺고 끊음이 얼마나 탁월한지. 조세희가 누구인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제목 그대로 쏘아 올린 뒤 그대로 전설이 된 사나이다. <난쏘공> 이후 조세희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는 못하지만 고뇌의 끈을 놓고 허송세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80년대의 치열한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자기 '문학을 오롯이 삶으로 살아내기' 위한 시도를 감행한다. 조세희는 70년대를 끌고 80년대로 나아간다.


재미의 여하를 떠나 소설이 끝날 때 마다 등장하는 황석영의 덧붙임 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작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낚시를 떠나고, 바둑을 두고 어쩔때는 감옥에서 만나기도 하는 황석영 선생의 일화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이야기가 된다.


이 분은 정말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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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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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수필은 진짜 수필이다. 그야마로 신변잡기, 목적불명, 무게제로. 머리가 복잡해 생각없이 읽으려 산 책임에도 순식간에 후루룩 지나가버려 멍. 하루키 본인도 어깨에 힘을 쭉 빼고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거 너무 뺐잖아...


<앙앙>이라는 패션 잡지에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1년 치 글을 모은 책이 바로 이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다. 패션 잡지였으니 진지한 글은 어울리지 않았을 것. 하고 싶어도 편집자가 절레절레 손을 흔들었겠지.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


내가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아직 소설이 되기 전의, 파릇파릇 돋아난 소재의 새싹을 목격하는 것. 그러니까 소설이라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어떤 재료를 어떻게 키워내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두 번째로 글의 맛을 느끼는 것이다. 머리를 쥐어싸매고 토해내는 뜨거운 쇳물이 아니라 부담없이 시원하게 쏟아내는 입담. 세 번째는 작가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이다. 소설가의 탈을 벗은 인간은 뭘 먹고 뭘 마시며 뭘 하고 놀까? 일상적으로 쏟아내는 일화에 내가 아는 유명인이 등장하는 쾌감. 도스토옙스키가 톨스토이를 만나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주사를 부리는 모습은 상상만해도 짜릿하지.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이 중 어느 하나도 없다. 그저 제목에 당했다는 기분이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니. 이렇게 멋진 제목에 멋진 표지에 멋진 삽화가 든 책이 이렇게 재미 없어도 되는 거냐? 한 마디로 근사하게 데코가 된 우동을 받아들었는데 한 젓가락 들고 후루룩 빨았더니, 세상에 면이 다 사라진 기분이다. 맛을 느낄 새도 없었어. 이게 무슨 식후 우동이냐? 그럼 왜 그렇게 멋을 낸거야? 그러고보니 이 남자의 수필은 하나도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1973년의 핀볼>이라든가 <회전목마의 데드히트>같은 것들. 여기도 제목만 근사했지 도통 내용을 알 수 없는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나만은 아닌 것 같다. 하루키 자신도 수필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세간의 풍문을 은근히 신경쓰는 것 같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수필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수필을 대하는 작가의 근본 태도 때문이다. 하루키는, 자신은 소설가이므로 그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룽차'라는 생각을 갖는다. 게다가 소설에 쓸 재료를 에세이 같은데서 쭉쭉 뽑아써 버리면 정작 소설가로서의 알맹이는 탈탈 털리고 말아요라고 하루키가 걱정한다.


맞는 말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써야 한다. 소설을 쓰지 않고 수필로 연명하는 소설가만큼 꼴 보기 싫은 게 없다. 이런 남자에게 소설만큼 수필도 좀 단단히 채워주세요라고 말한다면 맛있는 우동을 내오라는 말을 들은 라멘 장인의 표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동은 우동집에서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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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풍크 2016-10-12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우동은 우동집에서 먹자, 라니 :-)

한깨짱 2016-10-13 13:13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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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깨짱 2016-10-13 13:13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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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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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찌 <노인과 바다>를 건너 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노인의 시선을 외면해왔다. 그가 청새치를 잡든 말든, 상어에게 먹히든 말든.


도서 정가제 이후 신중하게 구간을 골라 5만원을 채우고 할인 쿠폰을 적용 받고 2,000원 추가 마일리지를 받을 수 없는 탓에 회사 근처 서점에서 한 권 한 권 야금 야금 책을 샀는데, 이게 은근한 맛이 있다. 쓱 훑어보다 괜찮은 책 한 권을 들고 첫 문장을 읽는다. 선택은 대개 여기서 판가름 난다. 그 때 <노인과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걸프 해류에서 조각배를 타고서 혼자 낚시하는 노인이었고,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 이제 84일이었다. 고기를 못 잡은 처음 40일 동안에는 한 소년이 그와 함께 배를 탔다. 하지만 고기를 못 잡은 지 40일이 지나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이 틀림없이 가장 불길한 살라오일 거라고 말했다(p.9).


<노인과 바다>는 이 가장 불길한 살라오가(재수 없는 자) 마침내 그 어떤 어부도 잡아 본 적 없는 거대한 청새치를 낚고 배에 실을 수도 없는 그 물고기를 끌고 오는 동안 상어떼의 습격을 받아 모조리 뺏기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을 해석하는 틀은 노인을 고난 받는 예수 그리스도로, 고군분투 작품을 창조하는 소설가로, 산티아고 노인을 죽음의 신으로, 그에게 걸려든 청새치를 헤밍웨이 자신으로 보는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공감이 가는 건 역시 노인을 소설가로 해석하는 것이다. 노인이 소설가라면 청새치는 소설, 무자비하게 물고기를 뜯어 먹는 상어는 여지없이 비평가가 된다.


1950년 헤밍웨이는 십년 만에 <강 건너 숲속으로>라는 작품을 내놨지만 "이제 헤밍웨이는 끝났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혹독하고 끔찍한 비평에 시달려야했다. 그 후 2년을 절치부심한 끝에 탄생한 소설이 <노인과 바다>다. 그러니 어찌 저 해석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밍웨이는 1954년 그러니까 이 소설을 출간한 2년 뒤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을 것이다. 돌팔매를 이겨내고 꿋꿋이 일어서 자신을 둘러싼 불한당, 고기를 스스로 잡지는 못하면서 남이 공들여 잡은 고기만을 탐욕스럽게 뜯어 먹는 비평가들을 하나 하나 노려보며 꽉 쥔 두 주먹을 치켜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산티아고 노인을 헤밍웨이 자신으로 해석하는 건 1961년까지만 유효하다. 이 남자는 그 해 엽총으로 자살한다.


헤밍웨이의 삶과 <노인과 바다>의 정수는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라는 문장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은 실패할 수는 있지만 포기하지는 않는 거야 라는 진부한 진리를 해밍웨이 식으로 표현한 것일테다. 그렇다면 자살은 어디에 속하는 걸까? 헤밍웨이는 파괴된 걸까, 아니면 패배한 걸까?


그의 막내 아들 그레고리는 "아버지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었다"라고 했고 역자는 이 해석에 동의한다고 했다(p. 302).


헤밍웨이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불길한 살라오였고 마침내 거대한 청새치를 낚은 위대한 어부일 수는 있겠지만 상어떼에게 고기를 모조리 뺏긴 뒤에 또다시 바다로 나가는 산티아고 노인은 아니었다. 그는 대작을 써야 한다는 부담과 초조에 시달리다 엽총을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에겐 자살을 패배에서 파괴로 비약시킬 용기가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이 지루했다. 나에게 <노인과 바다>는 딱 거기, 


그러니까 산티아고 노인이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한 가장 불길한 살라오일때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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