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마지막 잔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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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영원히 현재에 머물러 있다. 1949년 생 작가에게 이것은 힘일까 독일까. 하루키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현재로 느껴질까? 그럴 거라고 믿는다. 그의 소설이 전하는 상실, 인과 없는 미끄러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허물을 벗고 변태 하는 경험. 이것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흉터이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좋은 점은 이 흉터를 요란하지 않게 여겨서다. 아, 이거 얼마 전에 좀 다쳤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내리꽂는 태양에 구름은 잔잔히 흐르고 침묵은 길어지지만 어색함이 끼어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의 영혼은 어딘가 틀어져 있다. 원래 향하던 방향에서 조금 어긋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여전히 똑같이 흘러간다. 하루키는 기본적으로 그 똑같이 흘러가는 세계를 기술한다. 벌어진 영혼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미묘한 감정을 그 위에 섬세하게 내려놓는다.


나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가 그의 이야기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한 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그림이 비어있다는 점에서는 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오후의 마지막 잔디>와 함께 가기에는 너무 거칠다. 이 소설은 이렇게 뾰족하지 않다. 대충 그린 것처럼 보이는 멋있음이 아니다. 깎아넣은 정교함이다. 하루키 단편의 맛은 거기서 나온다. 까다롭지 않아 보이지만 지은 사람은 대단히 까다롭게 단어를 고르고 이야기를 이어 붙인 것이다. 이음새가 하나도 눈에 띄지 않게, 마음을 하나도 거스르지 않게, 그래서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게.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가 어울리는 건 하루키의 에세이다. 그의 에세이는 정말로 아무것도 담지 않으니까.


<오후의 마지막 잔디>는 1982년에 나온 소설이다.

하루키는 영원히 현재에 머물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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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의 해부 - 이상한 자들의 이유
존 E. 더글러스.마크 올셰이커 지음, 김현우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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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의 해부>는 <마인드 헌터>의 존 E. 더글라스가 지은 책이다. <마인드 헌터>보다는 내용이 훨씬 풍부하다. 프로파일링 케이스 스터디로 아주 좋고 범죄 소설을 준비 중이라면 여러모로 참고할 부분이 많다. 여기에 몇 가지 유용한 내용을 정리해 둔다.


피살자의 시체가 담요로 덮여있거나 얼굴이 가려져 있다면 범인은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범죄자라면 성격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용의자를 면식범으로 한정해 지인이나 이웃을 먼저 의심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소심한 성격일 수 있고 인간관계에 미숙한 외톨이, 주변에선 수줍은 사람으로 평가될 가능성도 높다. 처음부터 살인을 계획한 게 아닐 수도 있다. 피해자가 반항을 심하게 했거나 범인을 당황하게 만들어 벌어진 우발적 살인도 가정해야 한다.


범죄 수단도 아주 중요한 단서다. 총, 칼, 교살, 독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총, 칼, 교살은 범인이 피해자를 직접 마주해야 한다(저격 총이 아니라면). 반면 독살은 그럴 필요가 없다. 죽이려는 사람의 눈을 바라볼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는 범인의 성격과 동기에 큰 차이를 만든다. 살인범들은 피해자를 완벽히 통제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 나아가 성적 쾌락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독살에서는 이런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독살은 좀 더 정교할 필요도 있다. 누군가의 음식에 독을 타거나 주사를 하기 위해서는 은밀히 접근했다 빠져나와야 한다. 피해자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을 명확히 알고 있거나 지속적으로 관찰 가능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를 제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독살의 큰 장점이다. 독살은 여러모로 여성 살인범이 택하기 쉬운 수단이다.


범죄 현장을 묘사해 보자. 탁자 위에는 다 마신 오렌지 주스 병과 케이크를 담았던 것으로 보이는 접시가 있다. 냉장고에는 정확히 한 조각이 반듯하게 잘린 홀케이크가 있다. 주스 병과 포크에서 피해자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걸 범인이 먹었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범인이 이 장소를 아주 편안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범인은 아주 대범한 놈일 수도, 이게 첫 번째 범행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쉽게는 이 집을 자주 방문했던 사람, 피해자가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망자들은 자기에게 친숙한 장소를 은신처로 삼는 경향이 있다. 온 가족을 살해하고 도망친 가장은 자기가 어릴 때 살았던 지역, 주재원으로 오래 근무했던 나라, 대학 시절을 보낸 곳, 아내를 처음 만난 도시, 군복무를 했던 지방 등으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아주 평범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다시 가정을 꾸릴 수도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아마도 망상이겠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면 범인은 아주 홀가분한 상태일 것이다. 살인으로 인해 범죄자의 삶은 다시 살아갈 에너지로 충만해진다.


살인에는 분명 트리거가 존재한다. 직장을 다니며 피해망상에 빠진 사람 모두가 동료를 살해하는 건 아니다. 삶에는 붕괴를 막는 여러 기둥이 존재한다. 피해망상에 낮은 고과 평가, 실직, 파산, 이혼, 공개 모욕, 묻지마 살인을 보도하는 뉴스, 그것을 주제로 한 영화 등이 겹쳤을 때 툭, 하고 끊어지며 와르르 무너진다. 안톤 쉬거처럼 순수악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당신은 코맥 매카시가 아니다. 쌈마이가 되지 않으려면 얘는 그냥 싸패야라고 말하는 대신 인물을 다층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동기의 해부>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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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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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스 킹>의 농담 30%에 시의성을 70% 섞어 <말뚝들>을 만들어냈고 한겨레가 골랐다. 적절하다는 말은 참으로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싶다. 김홍 바모스!


나는 <프라이스 킹> 같은 소설을 좋아했다. 뼈대를 생각하기보다는 펀치 라인에 집중하는 이야기. 모르긴 몰라도 김홍 소설의 상당수는 단 1개의 문장에서 시작된 것들이 꽤 있을 것이다. 문장이 이야기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문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 이런 류의 소설은 확실히 장편에 취약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어떤 미학자가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다. '예술은 없어져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사라지는 것이다.'


펀치 라인이 너무 많으면 라인이 더 이상 펀치의 역할을 못한다. 농담은 길면 지루해진다. 그럼에도 이걸로 장편을 기가 막히게 잘 지었던 사람과 작품을 언급해 보겠다. <넛셀>의 이언 매큐언, <하이 피델리티>의 닉 혼비, <고래>의 천명관, <지구 영웅 전설>의 박민규. 이 중에 작품으로 보면 첫 손에 꼽는 게 <넛셀>이냐 <고래>냐... 솔직히 <고래>는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 레전드 오브 전설인데 작가가 물색없이 영화판을 기웃거리는 데다(그럴 거면 성공이라도 좀 하든가) 나의 <뜨거운 피>를 개망작으로 만든 죄까지 지었으니 <넛셀> 우승! 하지만 작가로 보면 고민할 거 없이 박민규다.


박민규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표절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문학계는 좀 더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한국 소설을 읽기 위해 편혜영이나 김애란만 찾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예전에는 정세랑도 있었는데 이 쪽은 거의 탑 텐처럼 돼서(나 탑 텐 진짜 좋아한다. 매년 텐텐 데이만 기다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탑 텐을 가지는 않잖냐) 맛이 좀 슴슴하다.


어쩌면 김홍이 박민규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프라이스 킹>은 이런 류의 소설을 진지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읽기에도 좀 지나친 면이 있었다. <말뚝들>은 그 지나침을 70% 도려낸 소설이다. 그래서 뭔가가 보이고, 재미있게 읽었다. 중간에 지루한 부분들은 단첫문(단락의 첫 문장만 읽기) 신공으로 건너뛰었음을 고백한다. 그중에는 김홍이 벼르고 깎아 넣은 금쪽같은 펀치 라인도 있었을 것이다. 뭐, 미안.


<말뚝들>은 내가 아니라 우리 집주인(세대주)이 골랐다. 김홍 소설인지는 몰랐다. 마침 서점을 못 가 책이 떨어져 책상 가장 위에 있던 놈을 읽은 것이다. <프라이스 킹>을 읽은 내가 <말뚝들> 아래에 적힌 김홍을 봤다면 절대로 서점에서 데리고 오지 않았을 책이다. 인연이란 참 신기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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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 없는 밤의 도시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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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연 작가의 소설은 편차가 심해 솔직히 좀 화가 난다. 첫 문장은 괜찮았는데 갈수록 이야기의 비약이 도드라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한다. 문제가 되는 놈들이 갑자기 죽거나 죽이면 다 마무리되고 뭔가 아쉽다 생각하면 에필로그까지 등장하는데, 이러면 좀 당황스럽다. 에필로그가 꼭 필요했다면 이야기 안에 녹이면 됐을 텐데...


정해연 작가의 책은 세 번째고 세 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홍학의 자리>가 99.99999999%의 지분을 차지한다. 셋 중 가장 짜임새가 있다. 아니 가장이라는 말보다는 유일하다는 말이 더 맞다.


<불빛 없는 밤의 도시>는 단편선이다. 1.6만 자로 제단 한 단편들이 아니었다는 점은 좋았다. 근데 실린 작품이 4개에 머물다 보니 조마조마한 마음이랄까, 다음 것도 이러면 2개밖에 안 남는데... 원인이 다른 초조함은 과연 스릴러를 읽는 새로운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인생이 다 그렇듯 작가에게도 모든 작품은 펜을 놓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과정에 불과하다. 이번 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네, 다음엔 좀 더 잘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다시 백지를 펼치는 태도를 존경한다. 지구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걸 제일 잘하는 것 같다. 꿋꿋이 이어지는 그의 작품 세계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지속 때문에 존경받을만하다.


정해연 작가의 이번 책은 새로 쓴 게 아니라 과거에 내놓았던 것들을 다듬어 재출간한 것이다. 아마 여기저기 이렇게 낳아 놓은 것들이 엄청나게 많겠지? 그것들이 힘이 되어 때로는 <홍학의 자리>로 피어나는 거니까, 나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사서 읽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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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회 - 왜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추방하는가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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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억 년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이 생존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의 아키텍처가 처음 만든 버전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냥 행복하기만 하면 세상이 잘 돌아갈 거라 생각했지만 어쩐 일인지 인간은 모두 죽어버렸다. 그렇게 몇 번의 디버깅을 거쳐 아키텍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완전히 똑같은 세계를 만들었다. 아키텍처는 네오에게 말한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현실을 인지한다'라고.


인간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고통을 지배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중세 시대에 성행했던 고문은 고통을 야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는 전근대, 대한민국에서는 현대에도 널리 사용됐다. 군부독재 시기 이들은 고문기술자 혹은 고문전문가로 불리며 일종의 장인으로 대우받았다.


한국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고통을 구사하는 방식은 육체적 폭력에서 규율이라는 간접적 폭력으로 대체됐다. 이제 인간의 행동을 제어하는 것은 고문이 아니라 분위기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직감. 규율은 명문화된 지침으로 존재하지만 더 넓게는 불문율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정신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성과사회에 이르러 규율은 완전히 내면화한다. 외부에서 강요된 게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게 가능한 사회에서 실패는 오롯이 자기 것이 된다. 내가 뚱뚱한 이유는 입맛을 조종하는 식품회사의 전략 때문이 아니라 자기 관리가 부족한 나의 게으름 때문이고 내가 가난한 이유는 구조적 불평등이 아니라 노력의 부족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착취를 내면화했지만 거기에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우리는 이 현실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우리의 행동을 바꿀 때가 왔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자각은 현재를 유지하려는 권력에게 치명적 위협이다.


고통은 혁명의 씨앗이기 때문에 부정하고 억압해야 한다. 의학과 심리학은 완벽한 부역자였다. 아픈 걸 왜 참아야 하나? 고통을 부정하라는 명령에 의학은 완벽한 해답을 내놓았다. 미국은 질릴 정도로 마약에 고통받아왔지만 최근 더 큰 문제를 일으킨 건 병원에서, 완전히 합법적으로 처방한 마약계 '진통제'였다. Painkillers kill people.


의학이 외과적 처방이라면 심리학은 정신적 처방이라 부를만하다. 오늘날 온 세상을 뒤덮은 위로와 긍정의 심리학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위로는 고통이 드러낸 현실의 결함을 가리고 그것이 분노로 전환되는 것을 막는다. 긍정은 좀 더 적극적인 사람들을 위한 처방이다. 긍정은 아주 교묘하다. 고통을 긍정함으로써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난은 기회다. 성공은 절박함에서 잉태된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고 진주는 고통을 먹고 자란다.


여기까지가 내가 읽고 이해한 <고통 없는 사회>의 일부다. 이 책은 선언으로 가득하기에 전부를 이해하는 건 대단히 어렵다. 한병철의 문장은 자기가 깨달은 진리에 취해 듣는 사람이 이해를 하든 말든 쏟아내는 방언 같다.


오늘날 우리는 탈서사적 시대에 살고 있다. 이야기가 아니라 계산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서사는 몸의 우연성을 극복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모든 병을 치유할 수도 있다는 벤야민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p. 39)


고통 없는 사회에 왜 갑자기 서사가 나오고 발터 벤야민이 등장하는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나도 엄청 애를 먹었다. 현대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진단하는 제목에 깊이 깊이 깊이 깊이 깊이 깊이 깊이 공감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완독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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