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아나다
다카세 준코 지음, 박우주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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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머리가 빠졌다. 여자고 남자고 가리지 않았다. 전염병처럼 번진 탈모가 세상 대부분의 머리카락을 삼켜버렸다. 살아남은 건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들뿐.


못 생겨도 돼, 가난해도 돼, 하지만 대머리는 안 돼.


무분별한 대머리 혐오를 멈추는 방법은 모든 사람을 대머리로 만드는 것이다.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이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 됐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민머리를 대놓고 다니는 사람도 나타났다. 맨들맨들 번쩍이는 민머리를 새로운 기회로 보는 산업도 등장했다. 가발, 문신, 기타 등등. 대머리는 더 이상 숨길 일이 아니었다. 대머리가 수치스럽다면, 인간이 수치스러운 거니까.


장님 세상에선 외눈박이가 신이다. 하지만 외눈박이 세상에서도 과연 두 눈 박이가 신이 될 수 있을까? 모두가 대머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맹렬히 자라 숲을 이룬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왜 대머리가 아니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혼란에 빠졌다. 자기만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주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이 사회가 '다름'을 다루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탈모에 관한 이 놀라운 생각이 <돋아나다>의 줄거리를 이룬다. 하지만 소설은 이토록 흥미로운 소재를 간도 맞추지 않고 산만하게 버무린다. 170 페이지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 사이를 단단히 여미지도 않는다. 대사건을 맞은 개인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뤘다는 얘기는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이야기의 폭발력이 억제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스파이더맨이 뉴욕을 날아다니는 장면은 하나도 없이 그저 친절한 이웃과 암흑의 거미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피터 파커의 일상만 나오는 셈이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아마 대다수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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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는 왜 실패했는가 -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대분석
노구치 유키오 지음, 김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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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봤다. 한국인이라면 그 몰락에 야릇한 쾌감을 느껴 더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실패를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플라자 합의와 엔고, 공포스러운 자산 가격의 상승, 도쿄 땅을 모두 팔면 미국을 몇 번이나 살 수 있었다는 꿈같은 이야기들. 잃어버린 10년은 단순한 가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겪게 될 미래일 수도 있다. 안 그래도 미쳤다고 했던 부동산 가격이 전고점을 뚫어버린 지 오래고 박스피라 조롱받던 주가지수가 6,000을 넘어선 게 잃어버린 10년이 겪은 버블의 전조는 아닐까?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철저히 일본을 따라 했기 때문에 병폐도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헤이세이의 실패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


작가가 말하는 제1 원인은 산업 구조 개편의 실패다. 영국과 미국, 세계를 지배했던 초 강대국의 흥망성쇠는 제조업이 주인공이었다. 제조업으로 흥했던 그들은 결국 제조업으로 망했다. 높아진 임금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일본 같은 신흥 산업국에게 기술면에서도 추격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때 영국은 금융이라는 해답을 찾았고 미국은 금융에 IT 서비스를 더해 선두를 지킬 수 있었다. 냉전이 끝나고 Made in China가 폭격을 시작하자 제조업의 저주가 일본을 덮쳐왔다. 긴급한 국가 재난 상황에서도 매뉴얼을 먼저 찾아보는 일본인들은 정말 어울리게도 끝까지 제조업에 국운을 걸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가 한 일은 환율 개입을 통한 엔저와 초저금리 정책이다. 엔저는 외국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의 공산품을 가성비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러나 엔저는 두 가지 문제를 끌고 들어온다. 하나는 매출 증가가 상품 경쟁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 노력을 안 해도 매출이 증가한다면 연구 개발 의욕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이 가난해진다는 점이다. 엔화로 살 수 있는 물건과 서비스가 낮아진 엔화의 가치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는 소비 저하를 불러일으켜 경제에 장기적인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초저금리 정책은 보통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조달 비용이 싸지니 과감하게 돈을 빌려 자산을 매입하거나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일을 벌일 의욕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면 문턱이 낮아진다 한들 넘어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제조업 샌드위치 론은 90년대부터 대한민국에도 제기되던 문제였다. 중국에는 따라 잡히는데 선진국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것. 이 문제가 30년 넘게 지속되는데도 한국 경제는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완전히 손을 놓아버린 조선은 멸망 직전까지 갔다 부활의 시동을 걸었고 메모리 반도체는 전 우주에서 경쟁자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디스플레이는 중국에 넘겨줬지만 대신 2차 전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유래없는 전쟁의 도래로 방산 또한 새로운 기둥이 되고 있다.


일본이 여전히 반도체 일인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 튼튼한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역량과 함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첨단 제조업의 위치를 구축했을 것이다. 삼성전자, 하이닉스, ASML이 한 나라에 존재하는 건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영국은 금융으로 성공했음에도 세계 경제의 주도권에서 멀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미국은 자신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제조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단순화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좀 아쉽다. 대해부니 뭐니 부재를 달았지만 분석의 심도가 깊진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위기는 한 두 개가 원인일 수 없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첨단 제조업의 붕괴, 늦은 IT 혁신, 고령화, 고착화된 정치 등등. 변화가 쉽게 받아들여지고 그 보상이 충분하다면 사람들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다양한 행위를 하게 된다. 80년대 일본은 자신이 세계의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야망이 좌절됐을 때 그들은 새로운 꿈을 찾았어야 했다. 현실이 언제나 진창이라면, 나에게 지금 꿈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한국이 경계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다. 뭘 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쌓여 신념이 되는 것. 대한민국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기로를 넘어 이미 방향을 정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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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랜지션, 베이비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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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랜지션, 베이비>가 나에게 맞는 소설인지 알아보려면 등장인물의 관계를 살펴보면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세 명의 '여자'다. 세 명은 확실히 전부 '여자'다. 이 말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독자들을 위해 먼저 용어를 정리해 보겠다.


시스 젠더란 생물학적 성별과 자신이 인지하는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성별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시스 젠더를 갖고 산다. 고민할 것도, 고통받을 것도 없는 성별이다.


반면 생물학적 성별을 자신이 인지하는 정체성에 따라 트랜스 한 것을 트랜스 젠더라 한다. 남녀, 여남의 구분은 없다. 트랜스에는 내, 외과적 방법이 존재한다. 내과적 방법은 원하는 성별의 특징을 발현시키는 호르몬을 장기적으로 투여하는 것이다. 외과적 방법은, 말 그대로다.


디트랜지션은 트랜스를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가 되고 싶었던 여자가 다시 여자로 돌아가거나 여자가 되고 싶었던 남자가 다시 남자로 돌아간다. 트랜스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디트랜지션은 치유, 회복, 나아가 회개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그들은 '정상인들'의 세상에서 트랜스로 살아가는 게 너무나 힘들어,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여자, 정확하게 말하면 1명의 시스 젠더 여성, 1명의 트랜스 여성, 1명의 디트랜스 남성이다. 그중 핵심 인물은 디트랜스 남성 에임스. 그는 제임스였다 에이미가 된 뒤 지금은 다시 에임스로 살아가는 디트랜스 남성이다. 카트리나라는 아시아계 시스 젠더 여성과 연애 중인데 오랜 시간 호르몬 치료로 불임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적이 일어나 그녀를 임신시켰다.


이 축복을 알리는 자리에서 에임스는 자신이 한 때 트랜스 젠더였다는 사실을 밝힌다. 여러분은 카트리나가 받았을 충격에 쉽게 공감할 것이다. 비난의 창끝은 대부분 에임스에게 향할 확률이 높다. 트랜스 젠더라는 사실을 숨기고 연애를 한 것도 모자라 피임을 소홀히 하다니. 도대체 한 시스 젠더 여성의 인생을 어디까지 망칠 셈인가? 하지만 만약 그가 책임을 지겠다면, 남편이 되어 평생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겠다면 당신은 에임스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문제는 이 에임스라는 '남자'가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시스 젠더 남성이 갖는 흔해빠진 부담과 혼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자신이 평생 아버지로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에임스가 아빠로 시작해 언젠가 엄마가 된다면 카트리나는 이런 생각을 할 게 분명하다.


내가 왜 그때 저 새끼를 죽이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혼란에 빠진 에임스가 전 트랜스 여자 친구 리즈를 만나 숨이 막힐 정도로 야심적인 제안을 던지면서 대막장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난 너에게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걸 고려해 달라고 말하는 거야."(p. 60)


리즈가 늘 어머니가 되고 싶어 했던 건 맞다. 문제는 에임스가 리즈의  전 '여자' 친구이자 시스 젠더 여성을 임신시킨 디트랜스 남성이라는 것이다. 리즈는 말한다.


"너 완전히 맛이 갔구나."(p. 63)


누군가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을을 마련하는 게 어렵다면 세 명의 엄마는 어떤가? 에임스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창조하려 한다. 과연 세 여성은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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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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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미술, 문화 비평이다. 제목만 보면 다른 방식으로 보는 법을 가르쳐 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가 이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을 메타적으로 해석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긴장을 놓고 있으면 그저 그 해설을 감탄하며 따라가게 된다.


이 책은 7개의 비평을 실었다. 저자는 에세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단어가 의미하는 무게를 떠올려볼 때 전혀 합당치 않다. 심지어 번역이 굉장히 어색하다. 쓴 지는 50년이 넘었다. 여러모로 편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니 단단히 경고해 둔다. 나는 7개의 비평 중 제7번, 광고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기에 여기에 그 해설을 옮겨둔다.


광고가 온 힘을 다해 전하려는 이야기는 딱 하나다. 당신의 현재가 '불충분'하다는 것. 광고는 소비를 통해 우리가 더 아름답고, 더 편한 삶을 얻거나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광고는 우리가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기를 촉구한다. 그 끝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불만족이다. 이 우울한 현재는 광고가 제시하는 대상, 우리가 아직 갖지 못했고, 소비를 수락했을 때 얻게 될 것이라 속삭이는 환상을 확고한 미래로 만들어준다.


광고가 실제로 제공하는 것과 광고가 약속하는 미래 사이의 간극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이 느끼는 현재의 처지와 그가 되고 싶은 처지 사이에 벌어진 간극과 일치한다.(p. 172)


문제는 소비가 이 간극을 채워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비 순간의 만족감은 사실 환상일 뿐이다. 환상은 쉽게 무너지고 폐허 속에서 간극은 더 깊어진다. 그 허망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소비를 준비한다. 그런 관점에서 광고는 멈춰 선 안 된다. 우리가 이동을 하든, 멈춰 있든, 일을 하든, 휴식을 하든 눈앞으로 이미지를 쏟아내야 한다. 무너진 환상의 폐허 속에서 허무의 근원을 찾아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영구적인 소비의 사슬을 통해 자본가는 이중의 이득을 얻는다. 우리는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점하는 잉여가치는 생산에서 한 번, 소비에서 한 번 창출된다. 흔히 주님이라 불리는 그들이 광고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가 되기를 열망한다. 하지만 소비하는 자아가 획득하려는 욕망은 우리를 노동하는 자아에 가둬두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소비를 위해선 노동이 필수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광고주에게 더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가 소비의 굴레를 끊어낼 수 있다면 노동의 기회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들과의 협상에서 더 우위에 설 수 있다는 말이다. 소비와 예속, 이 정교한 전략이 지속될수록 우리의 분노는 거세되고 정치적 투쟁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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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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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가 돌아왔다. 당당한 발걸음은 아니었다. 다소 수줍은 듯도 보였다. 따라온 이들은 그의 이름을 깔끔하게 닦아 눈이 부시는 은쟁반에 담아왔다. 혹시 모를 걱정이었을 것이다. 10년이 지났으니까. 스물한 살에 그를 읽은 사람은 서른 하나가 되었고, 서른 하나에 만난 사람은 마흔한 살이 되었다. 스물 하나와 서른 하나, 서른 하나와 마른 하나는 다르다. 10년은, 한 인간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새로 세워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마음의 변화에 비하면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겉모습의 변화는 오히려 느린 편에 속한다. 변한 몸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어도 변한 마음은 다르게 읽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은 같은 힘으로 밀어도 상대의 마음이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하물며 더 약한 힘이라면? 대안은 힘의 모양을 바꾸는 것이다. 탕자는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코디언>은 그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었을까? <고래>는 그랬다. 물론 <고래>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소설이라는 건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소설을 살아생전에 다시 읽을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아코디언>이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이야기는 나태하다. 성의가 없다. 소설을 읽고 난 뒤 그들이 가져온 은쟁반을 다시 쳐다보면 쓸쓸하게 숨이 죽은 이름만 보인다.


천명관.


1950년대, 전후 앵벌이들의 삶에서 그가 어떤 이야기를 본 건지 헤아려본다. 모르겠다. 소설은 깊숙이 파고들지 못하고 표면을 겉돈다. 유일한 장점은 겉돌기 때문에 술술 읽힌다는 것이다. 천명관의 이름을 마음이 새긴 사람 중에 <아코디언>을 기대한 사람은 단언컨대 아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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