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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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은 카를로 로벨리가 쓴 책 중에 가장 읽기가 쉽다. 동양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라 안 그래도 어려운 물리학의 세계를 메타포로 덧발라 모호함을 가중하는 분인데, 어쩐 일인지 이 책은 쉽다. 물론 중간중간 사족이 등장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사족도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끝까지 즐겁게 읽었다.


아인슈타인이 중력의 원인을 밝힌 방정식을 내놓은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해를 구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처음으로 답을 찾아낸 사람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독일에서 전쟁 중인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참호 위로 빗발치는 포탄의 선율을 들으며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풀어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슈바르츠실트의 해다.


슈바르츠실트가 밝혀낸 해에는 블랙홀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의 풀이가 맞다면, 블랙홀은 필연적이었다. 밝게 빛나던 별이, 그 광채의 연료였던 수소를 모두 소진한 뒤 자기 자신의 무게(중력)를 이기지 못해 작게 작게 수축하다가 결국 임계점을 넘어 빛마저도 빠져나갈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는 것. 아인슈타인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 이론은 수많은 증명과 관측에 의해 사실로 드러난다. 이제 블랙홀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이트홀>이 던지는 질문은 그럼 그 블랙홀이 어디까지 수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엔 수많은 이론이 존재한다. 가장 쉬운 건 0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0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공간에서 사라진다는 걸까? 그 말이 맞다면 블랙홀이 빨아들인 그 수많은 물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질량은 보존된다고 배웠고 이는 블랙홀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수축의 어느 순간 블랙홀이 다른 공간과 연결되어 먹어치운 것들을 다 토해낸다고 주장한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카를로 로벨리의 화이트홀은 이것과는 좀 다르다. 우주에 대한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으면서도 내 생각은 왜 여기까지 닿지 못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공간에도 최소의 단위라는 게 존재한다. 마치 양자가 그런 것처럼, 공간은 플랑크 영역이라 부르는 크기보다 결코 작아질 수 없다. TV를 떠올리면 된다. 지금 시청 중인 드라마의 화면을 점점 줄인다고 생각해 보자. 아무리 해상도가 높은 3840 X 2048의 4K TV라도 결국 1 X 1, 즉 단 한 개의 픽셀 이하로는 줄어들 수가 없다. TV를 끄지 않는 한!


공간이 이 크기에 다다르면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양자적 요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는 말로는 형용조차 불가한 미시의 세계로 진입한 공간은, 그 순간 반전하여 비디오를 거꾸로 돌린 듯, 바닥을 치고 튀어나와 모든 것을 뱉어내는 화이트홀이 된다. 여기서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면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것은 빅뱅 아닌가?


우리가 사는 우주는 어쩌면 한 별의 소멸 이후 시작된 부활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잿더미 속에서 계속 되살아나는 피닉스처럼. 명멸을 반복하는 우주. 정말 신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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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 인피니트 - FTX 창립자 샘 뱅크먼프리드는 어떻게 55조 원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는가
마이클 루이스 지음, 박홍경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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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만 해도 5천만 원을 하던 비트코인이 어느새 1억 4천만 원을 넘었다.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성격인데,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이것이 무엇이길래, 도대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돈은 상호주관적실재가 됐다. 예전엔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기 위해선 반드시 새로 발행할 화폐 가치만큼의 금을 보관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과거에는 은행에 돈을 들고 은행이 정확히 그만큼의 금을 내줄 수 있어야 했다. 돈은 유통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금 자신이 낳은 분신이었다.


각국의 중앙은행은 이것이 너무나 불편했다. 코로나 대재앙으로 시민 1명당 30만 원의 돈을 주고 싶은데 갑자기 그 정도의 금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새로운 금맥이 발견될 리도 없고, 금광의 생산량을 갑자기 늘릴 수도 없다. 그나마 이런 고민은 금광을 가진 나라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부는 내키는 대로 돈을 찍고 싶었고(이것이 바로 통화정책이다) 금본위제는 사라졌으며 돈의 실재적 가치도 같이 날아가버렸다. 돈에게 남은 건 실질적 가치뿐인데 이것은 100% 우리의 믿음에서 나온다. 돈이 가치를 갖는다는 우리의 믿음. 그 돈을 발행하는 국가에 대한 믿음. 그 돈의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될 거라는 믿음. 그러나 믿음이란 언제든 지옥으로 떨어질 준비가 되어있는 연약한 존재 아니던가?


비트코인의 창시자 나카모토 사토시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대응하는 정부의 방식에 신물이 났다. 월가에 엄청난 구제금융이 쏟아져 들어갔는데, 그건 부자들의 파산을 막기 위해 가난한 납세자들의 돈을 쓰는 것이었다. 누군가 중앙에서 이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한 이러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판단한 사토시는 그 어떤 기관의 보증도, 관리도 필요 없이, 그 돈을 소유한 사람들끼리 상호 보증하는 화폐인 비트코인을 창시한다.


비트코인이 허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돈, 은행 어플에 찍힌 그 숫자가 얼마나 허상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 가치를 마음대로 조정할 중앙기관이 없고, 심지어 발행량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비트코인은 실물 화폐보다 훨씬 믿을만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용자는 창시자의 예상을 넘어선다. 땅속에 묻혀 아무도 모르던 비트코인을 발굴한 건 창시자의 숭고한 의도에 이끌린 열정이 아니라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FTX의 샘 뱅크먼프리드는 그 욕망이 가장 활발하게 타오르기 직전 우연히 이 세계에 발을 디뎠고, 우연히 전 세계 30대 미만의 사람 중 가장 많은 부를 거머쥐었다가, 하루아침에 25년형을 선고받은 범죄자가 되었다. <고잉 인피니트>는 마이클 루이스의 책답지 않게 구성이 산만하고 느닷없이 끝나버린다. 절정을 향해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는 저자 특유의 드라마틱 저널리즘의 힘이 약하다. 나는 이것이 의도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샘 뱅크먼프리드가 벌어들이는 돈, 그가 쓰는 돈, FTX와 알라메다 리서치와 바이낸스와, 기타 암호화폐 시장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쏟아내는 돈의 단위는, 마치 가장 큰 단위의 수를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게임을 보듯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도저히 가슴에 와닿지 않는 그 숫자들, 그러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숫자들. 독자가 느끼는 그 당혹스러움, 그 헛헛함, 그 어리둥절이 바로 당시 암호화폐라는 로켓을 타고 우주로 향하던 사람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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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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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정말로 신비하다. 전개만 보면 진작에 책장을 건너뛰며 후루룩 넘겼을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평범하고 지루한 이야기가, 짧지도 않다. 형사는 대단한 추리력도, 체력도 없다. 그는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고, 전철로 출퇴근을 하며, 택시비를 걱정하는 소시민이다. 그가 이 사건의 해결에 기여한 점이라고는 그저 끝까지 견디며 자리를 지킨 것뿐이다.


저자는 두 사람이다.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 한 회사에서 서로 다른 잡지를 담당하던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전기가 통했고, 연인으로 발전했다. 셰빌에게는 아이가, 발뢰에게는 아내가 있었기에 두 사람은 발뢰의 이혼 후에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결혼제도에 대한 불만으로 부부가 되진 않았지만 발뢰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함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썼다.


소설을 같이 쓴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내 눈에는 갈등과 싸움의 광경만이 끝없이 펼쳐진다. 줄거리는 누가 짓고 인물은 누가 만드는가. 모든 걸 같이? 아니면 서로 나눠서? 이 힘든 일을 두 저자는 시리즈의 마지막까지 해냈다. 무려 10권이다. 발뢰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두 사람의 작업은 비로소 매듭을 지었다.


셰발과 발뢰는 처음부터 10권을 생각했고 그때부터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았던 게 분명하다. 이야기엔 분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한 필의 비단처럼 매끈하다. 두 사람이 기자 출신이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현실의 경찰이 현실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사실을 엮어내면 된다. 취재를 나눠하기도 좋고, 이야기를 붙이는데도 문제가 없다. 이게 바로 <로재나>의 핵심이다.


<로재나>는 소설이지만 마르틴 베크의 사건 일지, 혹은 일기, 혹인 관찰기의 성격을 띤다. 사건은 간간이 들어오는 단서를 기점으로 약간의 진전을 보이지만 여전히 느릿느릿 움직인다. 다만 우연을 다루는 방식이 절묘하다. 피해자가 찍힌 사진이 나타나고, 8mm 필름이 발견되고, 거기에 용의자가 찍혀있고, 순찰을 돌던 순경이 우연히 용의자를 발견하고. 전혀 극적이지 않아 이야기의 풀을 죽일법한 고약한 우연들이 아주 매끄럽게 붙어있다. 오! 하는 느낌과 함께 독자는 마르틴 베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부분이 정말로 신비롭다.


<로재나>는 1965년에 출간 됐다. 당시 스웨덴에서는 이언 플레밍의 007 같은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 장르의 틈바구니에서 이런 가미되지 않는 맛이 어떻게 독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출간 즉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중장년 층은 당혹스러웠고 젊은 세대는 열광했다고 한다. 외부에는 부르주아 복지 국가로 알려진 유토피아 스웨덴. 그 그늘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건조한 소설은 도대체 어떤 힘을 숨기고 있는 걸까?


두 작가가 이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서였다고 한다. 골치 아픈 기사는 눈에서 멀리하고 싶지만 같은 얘기도 소설로 풀어내면 여름휴가에도 따라갈 수 있다. 이 영리한 작가들의 위대한 시작이,


바로 <로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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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어스 포커 (완역본) - 월스트리트 천재들의 투자 게임, 《빅 쇼트》 작가의 대표작!
마이클 루이스 지음, 장진영 옮김 / 이레미디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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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어스 포커>는 마이클 루이스의 씨앗이자 뿌리이다. 이 책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데, 이 작가의 시작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아직 모든 작품을 읽어본 건 아니지만)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유일한 책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당연히 후기작들에 비해 부족한 점은 많다. 나는 영화 <머니볼>을 적어도 10번 이상 봤고 감독 베넷 밀러(베스트는 <폭스 캐쳐>다)를 무지하게 좋아하지만 해티버그가 역전 홈런을 때리며 오클랜드를 20연승의 고지에 올려놓는 장면에선 두고두고 땅을 쳤던 사람이다. 원작 <머니볼>에서의 묘사가 훨씬 생생하고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루이스는 그런 남자다. 오로지 글만을 이용해 영화보다 생생하게 장면을 연출하는 사람.


그래도 풋풋한 맛이 있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대가의 젊은 시절을 바라볼 때 나오는 흐뭇한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라이어스 포커>에는 이후 마이클 루이스가 펼쳐나갈 세계의 단편들이 곳곳에 박혀있다.


우선 강을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런던 경제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이력 때문일까? 마이클 루이스는 예측 가능한 경로를 따라 번듯한 세계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우편물 관리팀의 야간 당직자로 취업했다 세계 최고의 채권 트레이더가 된 남자나 아무도 망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 채권을 공매도하기 위해 직접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 남자의 주요 먹잇감이다. <라이어스 포커>는 이 맛이 조금 연하긴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루이스 라니에리가 <빅 쇼트>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을 <빅 쇼트>의 프리퀄이라고 하기엔 양심이 허락지 않지만 설정집 정도로는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이클 루이스가 살로몬 브라더스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빅 쇼트>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살로몬 브라더스에 다니며 경험한 일을 기록한 르포이자 에세이다.


둘째는 이게 이야기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현장감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에서 오는 것 같다. 하나는 깊이 있는 정보, 둘은 구성 능력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마이클 루이스의 책에는 거의 삼국지 수준으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그들에겐 모두 고유한 서사가 존재한다! 저자는 수많은 정보들이 어느 순간에 어느 순서로 나와야 하는지 절묘하게 아는 것 같다.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가, 그것도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펼쳐지는데도 불구하고(영화 <빅 쇼트>를 떠올려보라. 주요 인물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이야기는 늘 극적인 방식으로 한 곳을 향해 수렴한다. 문장력이 좋은 건 당연한데, 문장 자체를 잘 지어낸다기보다는 문장을 늘어놓는 순서를 잘 안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평가일 것이다. 사실을 가지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라이어스 포커>는 마이클 루이스의 농익은 작품들에 비해 모든 스탯에서 하나 둘 정도가 빠진 느낌을 주는 책이다. 구성의 탄탄함도, 인물의 매력도, 사건의 흥미 측면에서도 다 그렇다. 하지만 마이클 루이스라는 이름을 지우고, 처음이라는 말에 담긴 이해를 몇 움큼 꺼내보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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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드
힐러리 맨틀 지음, 이경아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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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로 둘러싸인 페더호튼은 과거에 박제된 야생의 마을이다. 주민들은 몽매하고 미신에 빠져있다. 그곳에 가톨릭 교회가 존재한다는 건 기적이었다. 교구 신부는 무신론자였다. 수녀원장은 폭군이었다.


어느 날 홀연히 페더호튼에 들이닥친 주교는 이 어리석은 마을을 개조하기 위해 변화를 요구한다.


"현지어 미사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나? 생각해 본 적은 있고? 나는 그런 미사에 대해 생각 중이네." (p.20)


교구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사람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는 뜻입니까?"

"바로 그걸세."

"라틴어 미사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곳 사람들이 영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고생 중입니다." (p.21)


이상의 대화는 결코 과거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교구 사제의 보수성과 페더호튼 주민들의 무지, 그리고 현지 사정도 모르고 무리한 행정을 펼치는 주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구 신부가 반항하는 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이 어리석은 돼지야."(p.39)


정말 막장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주교가 파견한 젊은 신부 플러드(Fluud)가 나타난다. 그의 등장 이후 페더호튼에서는 주교의 바람대로 '변화'가 나타난다. 새까만 신부복에 깃든 이 신부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모를 신비한 행동을 거듭한다. 잠들어 있던 페더호튼이 깨어나고 그 기지개와 함께 우연인지 기적인지 모를 사건들이 한데 뒤엉켜 쏟아진다. 마치 홍수(Flood)처럼.


나는 예전부터 종교를 만든 건 악마라고 생각해 왔다. 종교는 인간이 신과 직접 소통하는 것을 이단으로 간주한다. 종교는 교리 없이는 신앙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기독교가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을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로 간주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이교도가 아니라 늘 팬데믹이었다.


사제복은 왜 검을까? 나는 속을 드러내지 않는 그 칠흑의 빛을 볼 때마다 악마가 떠올랐다. 그들은 끊임없이 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죄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자비로운 신은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하여 주지만, 사제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다시 죄인이 된다.


전통적 관점에서 플러드는 악마처럼 보인다. 아무도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설교인지 유혹인지 모를 묘한 말들. 나는 플러드가 악마 코스프레를 하는 천사 측의 스파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라는, 악마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들을 유혹해서, 울타리를 넘어, 다시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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