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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서 ㅣ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평점 :
대만은 왜 퀴어의 땅이 되었나. 지정학적 위험 때문에 사회는 보수적이기 쉽고 실제 정치는 수십 년간 그래왔다. 이런 땅에서 퀴어가 뿌리를 내리려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역시 사람의 힘인가? 강철같이 단단한 사회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 구부리고 접고, 조금의 공간을 만들어 몸을 끼워 넣고, 그렇게 생긴 틈으로 계속해서 넘어가는 용기. 아마도 이런 사람의 힘이 작은 대만 땅에 자유와 포용을 가져다줬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대만 작가는 딱 두 명이다. 천쓰홍과 천쉐. 천쓰홍은 <귀신들의 땅>을 지었고, 천쉐는 <악녀서>의 주인이다. 천쓰홍과 천쉐모두 동성애자다. 천쓰홍은 남자, 천쉐는 여자.
두 사람의 결은 비슷하다. 분열적 인물이 등장하고, 정말 정말 우울하다. 성정체성이 엇갈린 사람들이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떤지를 보려면 이 두 소설을 읽으면 된다. 아무도 자기 세계를 이해해주지 않는 세상에 사는 느낌이 어떤지 상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가슴이 내려앉는다던가, 사방에서 벽이 조여온 다든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상자에 갇혔다거나, 뭐 이런 걸로 는 쉽게 표현이 되지 않는다. 동성애자 본인조차 자신의 특별함을 곧바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는 시기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의 '배려'로 이성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때도 있다. 이때 그들의 분열은 정점을 찍는다. 영혼은 두 개로 찢겨 하나는 이쪽 지하 깊숙이, 하나는 저쪽 지하 깊숙이 묻힌다. 캐낼 엄두도 나지 않는 깊이에. 다시 하나가 되리라는 소망은 바다 저 건너로 날아가버리고.
<악녀서>의 특징은 레즈비언의 성애를 과감하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넘치는 성욕을 갖고, 이제 막 사랑에 눈 뜬 사람들처럼 서로를 온전히 탐험한다. 이로써 천쉐는 동성애자라는 낙인과 함께 변태라는 올가미까지 덮어썼다. <악녀서>는 교수형에 처해 절판되었다가 바로 그 잔인한 처형 덕분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악녀서>는 완전히 부활했다. 타이완에 내린 자유와 포용은 <악녀서>가 흘린 피와 살점을 먹고 자란 것이다.
나는 이 소설들을 즐겁게 읽지는 못했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는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기분이다. 솔직히 몇 번이고 책을 덮고 싶었다. <악녀서>를 읽으면서 행복한 기분을 느낀다면 어딘가 고장 난 사람일 것이다. <악녀서>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즐거움이 아니라 힘이다. 내가 넘어진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등을 밀어준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느새 보면 그들이 나를 부축해 길을 걷고 있다. 동성애자의 사랑을 구경하고 싶어 들어온 사람도, 결국엔 하나가 된다. 동성애자, 이성애자가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하나의 친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