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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평점 :
이와이 슌지의 소설은 영화보다 못하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처음 봤을 때를 잊지 못한다. <러브레터>의 '오겡끼 데스까?'가 너무도 오겡끼한 덕분에 이 영화 말고는 기억하는 게 거의 없어 이와이 슌지를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 전문 감독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이 남자는 빛바랜 필름 사진이 전하는 따뜻함 속에 약간의 B급 감성, 그 부조화가 마음속에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기는 독보적 영화를 만드는 인간이다.
역시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이와이 슌지는 소설도 꽤 썼다. 대부분은 영화를 옮긴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도 참 특이하다. 보통은 그 반대로 하지 않나? 아무튼 <러브레터>도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도 소설로 있다. <러브레터>는 그렇다 쳐도 '그' 소설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누워있던 나를 벌떡 일으켜, 다시는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소설은 평범했다. 지독히도 평범했다. 이와이 슌지의 글 솜씨가 형편없는 건지 상대적으로 그의 영화가 너무 뛰어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소설은 별로 오겡끼하지 않았다.
나는 <제로의 늦여름>도 그러리라는 걸 알았다. 책장을 손에 대는 순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들고 타임스퀘어 교보문고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책은 비닐포장 되어있었다. 한 문장도 읽어볼 수 없었다.
그냥 아주 친했는데, 살다 보니 이런저런 시간에 치여 한 동안 잊고 살다, 먼지 덮인 창고에서 발견한 옛날 앨범, 잠자코 앉아 몇 시간이고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등 뒤에선 이와이 슌지 특유의 태양광이 쏟아져 들어오고, 세상은 뿌옇게 흐려지다 적당한 농도에 멈춰 아스라이 눈에 남는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 한 두 마디 물어본 뒤, 뒤따르는 정적 속에서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줄곧 옛이야기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공백이 얼마나 컸는지는 상관없이, 우리가 나눈 과거는 너무나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하다. 무언가를 더하지 않아도 좋다. 지난 것만으로도 마음은 넘쳐난다. 꺼내고 또 꺼내도, 줄지 않는다.
아, 책 얘기는 거의 할 게 없다. <제로의 늦여름>은 화가에 대한 얘기다. 일본 사람들이 흔하게 찍어내는 미스터리 장르다. 다시 옛이야기로 돌아가자.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에는 아게하라는 여자가 나온다. 그리꼬가 나오고, 그리꼬는 노래를 잘한다. 암살자들도 등장한다. 폭력단 두목이 있는데, 나쁜 놈인데도 불구하고 무지하게 멋있다. 마지막엔 줄이 끊기듯 툭하고 끝난다. 암전과 함께, 내 마음도 툭, 떨어진다.
이 장면은 설산을 향해 수백만 번 오겡끼를 외쳐도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