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은 말한다
필리프 복소 지음, 최정수 옮김 / 민음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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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삶을 유추하는 건 멋진 일이다. 죽음이 안타깝긴 하지만,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경우도 많으니 이렇게 저렇게 더하고 빼볼 여지가 있다.


법의학이 대중의 눈에 들어온 데는 단연코 드라마의 힘이 컸다. 그 대장은 뭐니 뭐니 해도 제리 뽈록 하이머의 <CSI>다. CSI는 발음이 시원시원하고 입에 잘 붙어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을 것 같지만 풀어보면 Crime Scene Investigation에 불과하다. 번역하면 범죄 현장 조사. 허무하리만치 군더더기가 없는 말이다.


당연하지만 드라마 <CSI>와 실제 CSI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 세계에서는 터무니없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 반대? 예컨대 드라마에서는 절대 그리지 않을 황당한 사건이 현실 세계에서는 버젓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현실은 원래 이야기보다 논리가 부족하고 해괴망측한 법이다. 현실은 그 자체가 존재의 근거이므로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것이다.


<죽은 자들은 말한다>는 후자를 읽는 재미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절대 나올 리 없는 에피소드를 듣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살의 성공률은 의외로 낮다고 한다. 준비 부족, 생에 대한 본능적 집착 등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래서 자살에 성공하는 사람은 그 짓을 여러 번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오랜 기간에 걸쳐 시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루, 몇 시간, 몇 분 동안 수차례 시도한다는 말이다. 목을 맸는데 죽지 않고 눈을 떴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에게 그 짓을 다시 시도할 용기가 남아있을까? 심지어 총을 쐈는데도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은 죽기 위해 자신의 몸에 여러 발의 총알을 꽂아 넣어야 했다. 맨 정신으로, 고도로 집중하면서, 이번에는 반드시 죽어야 해,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솔직히 이 책을 아주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놀라운 이야기 Y>나 <사건반장>, <세상에 이런 일이> 정도의 놀람과 흥미를 담고 있다. 물론 이런 글을 쓰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피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상처를 보며 형사가 말했다.


- 총상일까요?

- 현장에서 수거한 탄피들이 있었나요?

- 없었습니다.

- 몸 안에 박혀 있던 탄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검의는 시체를 돌려 형사에게 등을 보여줬다. 잘생긴 경주마의 엉덩이처럼 매끈한 모습이었다.


총을 쐈다면 범인은 정말로 깔끔한 놈이다. 현장에 떨어진 탄피를 모조리 수거하고 죽은 놈의 살 속까지 쑤셔 탄두를 챙긴 셈이니까. 살해 도구는 총이 아니었다. 형사의 머릿속엔 문득 그녀의 집에 있던 얼음송곳이 떠올랐다.


그건 그렇고, 소설 쓰기는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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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양산숙 - 역사가 숨긴 충격적인 진실
양성현 지음 / 매거진U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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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놀라울 정도로 어리석은 왕이었다. '그' 이순신을 두 번이나 파직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선조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이순신의 모든 업적이 날조라고 가정해야 한다. 완전히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건 이 책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다.


<유성룡 양산숙>은 유성룡의 <징비록>을 순도 높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서애 유성룡, 몰아치는 당쟁과 왜란의 와중에도 조정의 요직을 두루 겸직한 남자. 외교, 국방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어리석은 왕 선조 밑에서 고군분투한 신하. 이순신을 천거한 안목의 사나이. 그는 정말 거짓말로 무장한 간신이었을까?


당시 조선은 이른바 붕당 정치의 씨앗이 맹렬히 뿌리를 내리던 혼돈의 시대였다. 이기가 하나냐 둘이냐를 놓고 성리학이 갈렸고 이 중 어디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임진왜란 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두 신하가 완전히 다른 의견을 내놓아 양병에 실패, 결국 그 난리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당쟁의 결과물이었다. 한쪽은 다른 쪽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도 무조건 반대를 해야 한다. 오히려 일리가 있을수록 반대는 더 심해진다. 그 일리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열쇠기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확실히 동인이 우세했다. 그 수장은 유성룡과 퇴계 이황으로 볼 수 있는데, 유성룡이 현실 정치에 발을 디딘 행동파 간신이었다면 이황은 그들에게 학문적 토대를 제공하는 철학적 간신이었다. 유성룡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퇴계 이황이 율곡 이이(서인) 보다 우세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임금의 안색을 더 잘 살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학문적으로는 동아시아에 어깨를 나란히 할 인물이 전무하고 오랫동안 관료로 일하며 실무에 숱한 손때까지 묻힌 당대의 먼치킨 율곡마저 한 손으로 지그시 눌러 제압할만한 힘이었다.


이 책은 유성룡을 완전히 부정하므로 정당한 평가를 위해 확실한 사실만 나열해 보자. 우선 유성룡이 왜란을 맞아 자기 식구를 먼저 피난 보낸 건 사실이다. 유성룡은 자신의 친형을 파직시켜 어머니를 돌볼 수 있게 해 달라며 선조에게 울며 애원했다. 그리고 난 중에 그를 다시 피난지의 수령으로 임명한 뒤 면세권까지 부여했다. 그는 김시민의 진주대첩으로 큰 상처를 입은 일본군이 복수를 위해 총 집결한 2차 진주성 싸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체찰사로 왕을 대신한 군통수권자였음에도 말이다. 이것을 더 큰 승리를 위한 전략적 판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남은 조선의 전부였고 진주는 그 호남의 문이었다. 진주를 내준다는 건 살 대신 뼈를 주는 것이었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모두 서인계 인물이었다는 것도 정황의 힘을 더한다. 원군을 보내기는커녕 군대를 더 뒤로 물려 안전을 도모한 권율과 홍의장군 곽재우도 모두 동인이었다.


유성룡은 다른 의미에서 확실히 전략적이었다. 2차 진주성 싸움은 후퇴하던 일본군의 분풀이였다. 유성룡은 이 싸움이 끝에 다다랐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명군은 수륙 양면으로 일본을 압박했고 그들이 동래(부산)로 후퇴해 장기전을 각오한다면 기꺼이 그 땅을 내어줄 준비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성룡에게 중요한 건 결국 전후의 정국이다. 정쟁 없이도 서인계 인사를 한 번에 몰아 죽일 수 있다면, 그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 있겠는가?


<유성룡 양산숙>은 개인 출판으로 보인다. 저자는 양성현이란 분인데, 공교롭게도 이 책에 영웅으로 등장하는 양산숙과 성이 같다. 어쩌면 저자 본인이 양산숙의 후손일 수도 있겠다. 오탈자도 많고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내용이기에 모든 걸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저자가 참고한 책들이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이고 그 출처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왕조의 기록 또한 결국 사관의 사관이 개입할 여지가 충분한 것이지만, 시비를 가르는데 이만한 구심점도 없는 게 사실이다.


논란을 떠나 다시 한번 기록의 힘을 느껴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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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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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이물감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가장 탁월한 작가. 나는 김애란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


<안녕이라 그랬어>는 7편의 소설을 담았다. 주제는 자산이다. 구체적으로는 부동산이다. 김애란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 단어의 조합이 얼마나 낯선지 느낄 것이다. 우주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도 김애란이 네이버 부동산을 뒤지고 호갱노노의 주민 댓글을 찾아보는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작가가 감히 부동산을 주제로 소설을 썼다. 결국은 관찰력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서 멈췄다면 이 작가는 사회학자가 됐을 것이다. 팔자가 사나운 김애란은 예민한 관찰력과 함께 쓰기의 저주를 받았고, 소설가라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 그녀의 부동산에 축복이 있기를.


자산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로 변해가는 세상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는 막을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흔히 중간이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사회의 모든 분야는 양극화됐고 우리가 기본적으로 평등하게 누릴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장 뼈아픈 배신을 하는 중이다. 주거나 의복 교육, 섭식에 이르기까지. 양극화는 양쪽에 속한 사람들에게 각각 부스터를 달아주는 데 그 방향은 당연히 반대다. 잘 먹어야 잘 사는 법이거늘, 잘 살아야 잘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는 벌어지는 속도를 막을 방법이 없다. 중간은 그렇게 완전히 찢어졌다. 당신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대한민국은 그것을 부동산이 결정했다.


같은 나이에 비슷한 직장을 다니며 비슷하게 살았는데 눈을 뜨고 보니 한 사람은 전세를 전전하고 다른 사람은 수십억짜리 콘크리트 상자를 갖게 됐다.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싶어도 막상 전세 만료일이 다가오면 그 설움이 차가워 온몸이 오그라든다. 어렵게 새집을 구해 이사를 마치고 나서도 불안은 씻기지 않는다. 제 때에 부동산을 사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하루하루 조금씩 추락한다. 부동산의 상승 속도를 월급의 다리로는 쫓아갈 수 없다. 그때 살걸. 무리를 해서라도 살 걸. 할 수 있는 건 후회뿐이지만 후회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마음을 갉아먹을 뿐이다.


추락한 중간계의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진통제는 스스로를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잘못된 건 세상이지 내가 아니다. 약효가 오래가지 않는 건 '대출 상상력'이나 '금융 감수성'이 필수 능력으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성실하고 정직했는데도 자산을 불리지 못했다면 그건 성실하고 정직한 게 아니라 멍청하고 무능한 것이다. 미쳐버린 세상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도덕적 우월감도 지인의 아파트가 수억이 올랐다는 이야기에 박살이 나고 만다. 세 번째 소설 <좋은 이웃>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공부방을 운영하는 '나'는 몸이 불편한 시우를 위해 적은 돈을 받고도 멀리 방문 교육을 간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부모는 시우를 돌볼 여력이 없는데 시우가 워낙 '나'를 따르는 탓에 사정사정을 한 것이다. 거리가 조금 되고, 방문까지 하는데도 나는 돈을 더 받지 않았다. 이것을 일종의 봉사로 여겼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 불쌍한 아이를 보살피는 일. 그러던 어느 날 시우의 어머니가 장사를 일찍 마치고 돌아와 나를 찾는다.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별로 비싸지도 않은 자신의 과외비를 낼 형편이 안 돼 그만해야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는 돈을 받지 않고도 이 일을 할 생각이었다. 시우는 불쌍한 아이니까. 어머니가 말한다.


'저희 요 앞 아파트로 이사하게 됐어요.'


요 앞의 아파트라면 아마 신축일 것이다.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잘 됐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은 휑하고 허전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 남편은 말한다.


'그야 당연히 이 집 계약할 때지.'


조금 무리해서라도 사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전세로 들어온 그 집. 이사를 준비하며 나는 오래된 책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낡은 책장을 넘겨보았다. 거기에는 이십여 년 전 남편이 연필로 밑줄을 그어놓은 문장이 보였다.


'저희들도 난쟁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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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2 : 남조와 북조 이중톈 중국사 12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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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웠던 위진을 거쳐 드디어 왕조라 부를 수 있는 시대, 그것이 바로 남조와 북조다. 남조와 북조는 말 그대로 남쪽의 조정과 북쪽의 조정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남조는 무엇인가?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사마씨가 쿠데타로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가 진이다. 이 진은 봉건시대로 회귀해 중원을 여러 사마씨 왕족들에게 나눠줬다가 팔왕의 난을 맞아 완전히 무너진다. 그 잔당이 중원에서 쫓겨나 남동쪽 귀퉁이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동진, 이른바 남조다. 그렇다면 북조는 무엇인가?


허약한 남조가 지리적 이점을 살려 연명하는 동안 중원은 수차례 주인을 바꿨다. 그 주인공은 흉노, 갈인, 저인, 강족, 선비였다. 오랑캐 중의 오랑캐라 중화의 그 누구도 세세히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뿌리조차 모호한 야만인들. 그 야만인들끼리 피 터지게 싸워 최종전에 승리한 나라가 북위, 그것이 바로 북조의 시작이었다.


주인은 바뀌어도 뿌리는 바뀌지 않는 게 정복의 딜레마다. 힘으로 눌러두었으나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여전히 한족으로 오랑캐와는 풍습과 습성, 언어가 완전히 달랐다. 대한민국이 일제에 주권을 침탈당한 뒤에도 끝까지 저항해 다시 나라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문제였다. 민족은 쉽사리 섞이지 않는다. 그 반발력은 점점 뿌리와 줄기를 반대쪽으로 밀어내 거대한 간극을 만들어낸다. 야망을 가진 이들은 그 간극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북위는 결국 스스로를 한족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가지야 다시 나면 그만이었지만 뿌리가 없으면 재생이 불가하지 않은가? 문제는 모든 가지가 뿌리를 향하고 싶지는 않다는 데 있다. 어찌 됐든 오랑캐는 지배계급이 됐다. 자신이 주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주인이 주인의 옷을 벗고, 주인의 음식을 버리고, 주인의 집을 버려야 한다는 말인가?


요순시대는 신화로 남겨두고 하, 은상, 주를 중화의 시작으로 본다면 북조는 이미 한족이 이천 년 넘게 주인으로 살던 땅에 들어선 셈이다. 넘을 수 없는 시간의 벽. 이중톈 선생은 대중화 민족으로서는 삼키기 힘든 이 위진남북조를 소화하기 위해 그 의의를 오호의 소멸에서 찾는다. 이 시대를 기점으로 민족의 경계는 사라지고 남방과 북방의 차이만 남았다는 것이다. 민족은 완전히 섞여 결국 모두 중화인이되었으며 그래서 남은 건 남쪽의 김치가 짜고 북쪽의 김치가 심심한 정도의 문화적 차이뿐이라는 것. 이런 점에서 선생은 역시 중화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남북조를 무너뜨린 건 수와 당이었다. 이들의 뿌리 역시 오랑캐인 선비족이다. 당이 세계적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완전히 한화된 선비족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당나라의 성공이 민족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로 변질되는 것을 막은 데서 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을 그렇게나 괴롭혔던 고구려 유민에게 군권을 맡길 정도로 능력 중심의 사회를 만들었다. 장안의 서시는 페르시아인, 신라인, 고구려인, 흉노, 갈인, 저인, 강족, 선비들이 모두 모여 각자의 춤을 추던 민족의 용광로였다. 융합은 차이를 지워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차이를 그대로 놔두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남북조와 당나라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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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
리처드 파인만 지음, 정무광.정재승 옮김 / 승산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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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이 어쩌다 내 인생에 들어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양자역학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만났을 것이다. 이론을 전개하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 때문에 빠져들었을 테고. 나는 늘 독특한 사람들에 끌려왔다. 아무리 위대해도 개성이 없으면 마음이 가지 않는다. 리처드 파인만은 별들의 전쟁이라 볼 수 있는 양자역학의 우주에서도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의심과 불확실성이다. 완전무결한 궁극의 이론은 모든 과학자들의 꿈이지만 역사상 이것이 실현된 적은 아직껏 없었다. 뉴턴은 양자역학의 시작과 함께 고전으로 물러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블랙홀의 특이점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진정 최종인가? 이것이 특정 환경에서 여전히 의도한 대로 동작하는가? 과학의 역사란 의심이 역사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단언컨대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의심이다.


불확실성은 의심을 낳는 토대다. 과학의 정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법칙이, 이 진리가 현시점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결과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그 복잡하고 정교해 보이는 이론들이 우리가 알고 경험한 것들에 한해서만 참이라니. 그런데도 세상은 굴러간다. 마치 멈출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브레이크를 단 채 시속 100km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다.


무엇을 완전히 알았다고 말하는 순간 과학은 종말을 맞이한다. 의심은 더 이상 사라지고, 과학은 종교가 된다. 과학은 확실히 확신을 경계한다. 모든 것은 과정일 뿐이다. 뉴턴은 그 모든 위대한 업적을 이룬 비결에 대해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세상을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학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거다. 누군가에게 거인의 어깨가 되어주는 것. 자기 자신이 그 어깨 위에 올라서는 정복자가 되지 않는 것.


과학이 봐도 봐도 재미있는 이유. 확실과 불확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불확실을 불안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모호한 대답을 잘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답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과학보다는 종교를 갖는 것이 낫다. 정해진 결말을 원한다면 영화를 보자.


아,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이 책에 지금까지 내가 기술한 이런 내용들이 나오리라 확신해선 안 된다. <과학이란 무엇인가>는 파인만의 강연을 옮긴 책이다. 잠시 과학적 태도를 버리고 확신을 하나 들려주겠다. 지금까지 읽은 파인만의 강연록 중 인상적이었던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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