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없는 밤의 도시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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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연 작가의 소설은 편차가 심해 솔직히 좀 화가 난다. 첫 문장은 괜찮았는데 갈수록 이야기의 비약이 도드라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한다. 문제가 되는 놈들이 갑자기 죽거나 죽이면 다 마무리되고 뭔가 아쉽다 생각하면 에필로그까지 등장하는데, 이러면 좀 당황스럽다. 에필로그가 꼭 필요했다면 이야기 안에 녹이면 됐을 텐데...


정해연 작가의 책은 세 번째고 세 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홍학의 자리>가 99.99999999%의 지분을 차지한다. 셋 중 가장 짜임새가 있다. 아니 가장이라는 말보다는 유일하다는 말이 더 맞다.


<불빛 없는 밤의 도시>는 단편선이다. 1.6만 자로 제단 한 단편들이 아니었다는 점은 좋았다. 근데 실린 작품이 4개에 머물다 보니 조마조마한 마음이랄까, 다음 것도 이러면 2개밖에 안 남는데... 원인이 다른 초조함은 과연 스릴러를 읽는 새로운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인생이 다 그렇듯 작가에게도 모든 작품은 펜을 놓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과정에 불과하다. 이번 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네, 다음엔 좀 더 잘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다시 백지를 펼치는 태도를 존경한다. 지구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걸 제일 잘하는 것 같다. 꿋꿋이 이어지는 그의 작품 세계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지속 때문에 존경받을만하다.


정해연 작가의 이번 책은 새로 쓴 게 아니라 과거에 내놓았던 것들을 다듬어 재출간한 것이다. 아마 여기저기 이렇게 낳아 놓은 것들이 엄청나게 많겠지? 그것들이 힘이 되어 때로는 <홍학의 자리>로 피어나는 거니까, 나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사서 읽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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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회 - 왜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추방하는가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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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억 년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이 생존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의 아키텍처가 처음 만든 버전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냥 행복하기만 하면 세상이 잘 돌아갈 거라 생각했지만 어쩐 일인지 인간은 모두 죽어버렸다. 그렇게 몇 번의 디버깅을 거쳐 아키텍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완전히 똑같은 세계를 만들었다. 아키텍처는 네오에게 말한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현실을 인지한다'라고.


인간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고통을 지배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중세 시대에 성행했던 고문은 고통을 야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는 전근대, 대한민국에서는 현대에도 널리 사용됐다. 군부독재 시기 이들은 고문기술자 혹은 고문전문가로 불리며 일종의 장인으로 대우받았다.


한국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고통을 구사하는 방식은 육체적 폭력에서 규율이라는 간접적 폭력으로 대체됐다. 이제 인간의 행동을 제어하는 것은 고문이 아니라 분위기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직감. 규율은 명문화된 지침으로 존재하지만 더 넓게는 불문율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정신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성과사회에 이르러 규율은 완전히 내면화한다. 외부에서 강요된 게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게 가능한 사회에서 실패는 오롯이 자기 것이 된다. 내가 뚱뚱한 이유는 입맛을 조종하는 식품회사의 전략 때문이 아니라 자기 관리가 부족한 나의 게으름 때문이고 내가 가난한 이유는 구조적 불평등이 아니라 노력의 부족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착취를 내면화했지만 거기에 고통이 없는 건 아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우리는 이 현실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우리의 행동을 바꿀 때가 왔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자각은 현재를 유지하려는 권력에게 치명적 위협이다.


고통은 혁명의 씨앗이기 때문에 부정하고 억압해야 한다. 의학과 심리학은 완벽한 부역자였다. 아픈 걸 왜 참아야 하나? 고통을 부정하라는 명령에 의학은 완벽한 해답을 내놓았다. 미국은 질릴 정도로 마약에 고통받아왔지만 최근 더 큰 문제를 일으킨 건 병원에서, 완전히 합법적으로 처방한 마약계 '진통제'였다. Painkillers kill people.


의학이 외과적 처방이라면 심리학은 정신적 처방이라 부를만하다. 오늘날 온 세상을 뒤덮은 위로와 긍정의 심리학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위로는 고통이 드러낸 현실의 결함을 가리고 그것이 분노로 전환되는 것을 막는다. 긍정은 좀 더 적극적인 사람들을 위한 처방이다. 긍정은 아주 교묘하다. 고통을 긍정함으로써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난은 기회다. 성공은 절박함에서 잉태된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고 진주는 고통을 먹고 자란다.


여기까지가 내가 읽고 이해한 <고통 없는 사회>의 일부다. 이 책은 선언으로 가득하기에 전부를 이해하는 건 대단히 어렵다. 한병철의 문장은 자기가 깨달은 진리에 취해 듣는 사람이 이해를 하든 말든 쏟아내는 방언 같다.


오늘날 우리는 탈서사적 시대에 살고 있다. 이야기가 아니라 계산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서사는 몸의 우연성을 극복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모든 병을 치유할 수도 있다는 벤야민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p. 39)


고통 없는 사회에 왜 갑자기 서사가 나오고 발터 벤야민이 등장하는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나도 엄청 애를 먹었다. 현대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진단하는 제목에 깊이 깊이 깊이 깊이 깊이 깊이 깊이 공감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완독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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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가 너무 많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랜달 개릿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릭시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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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셜록 홈즈 이야기다. 물론 홈즈가 쓰는 건 아니다. 영원한 그의 조수 왓슨이 마술사로 등장한다. 로드 다아시와 마스터 숀 오로클린. 셜록과 왓슨을 빼다 박은 콤비가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방법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작가의 수만큼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세계관을 창조하는 것 같다. 영화 <스타 워즈>는 제목부터 구린내가 진동하고 연출 수준이 심형래와 자웅을 겨룰 정도지만 그 세계관의 크기와 매력은 D-War가 넘볼 수 없다. 캐릭터는 죽고 에피소드는 망할 수 있어도 세계는 영원하다. 기다리면 <만달로리안>과 <아소카> 같은 게 나오는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나 아서 코난 도일이 창조한 것도 세계다. 포와로나 홈즈의 무게를 이기고 고개를 돌리면 그 아래 놓인 땅이 보인다. 두 작가는 그런 살인과 그런 살인을 해결하는 탐정이 존재하는 세계를 창조했다. 다른 말로는 '장르'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장르가 있기에 <마술사가 너무 많다>도 탄생할 수 있었다. 랜들 개릿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장르는 OS고 개별 소설은 애플리케이션이다. 애플리케이션을 잘 만드는 사람은 OS를 완벽히 이해한다. 이 소설에는 장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득하다.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그 마음까지 다가오니 뭐랄까, 친밀한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아는 이야기를 조곤 조곤 나누는 느낌이다.


나는 원래 이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 번 얘기했는데, 단어 하나하나에 부스러기처럼 흩어 놓은 단서를 꼼꼼히 따져가며 읽는 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탐정 소설의 살인 사건은 오직 그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만 해결할 수 있게끔 조작되어 있다. 장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460페이지가 순삭 된 이유는 '마술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장르에 첨가한 이 조미료 한 줌이 완전히 다른 맛을 냈다. 마스터 숀 오로클린은 오직 홈즈에게 조롱당하기 위해 창조된 것 같은 왓슨과 달리 명확한 역할을 갖는다. 심지어 그는 홈즈에게 월권을 주장하며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다. 마술사의 힘이다.


매리언 짐버 브래들리는(나도 모르는 작가다) <마술사가 너무 많다>를 "판타지와 탐정소설의 가장 좋은 점만을 결합한 작품이다."라고 평했다. 새로운 장르는 서로 다른 장르를 영리하게 결합하는 것으로도 탄생한다. 랜들 개릿은 단순한 애플리케이션 개발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소설로 OS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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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 종교를 바라보는 또 다른 눈
오강남 지음 / 김영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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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교수의 책을 처음 읽은 건 20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골수 감리교인으로 매우 열심히 교회를 나가는 건 당연하고 청년부 활동까지 수행하던 신앙인이었다. 그렇게 신실한 사람이 비교종교학자의 책을, 그것도 <예수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의 교양 수업이었다.


'세계 종교와 철학'. 이 과목에서 우리 조는 '악마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맡았다. 때마침 개인 미디어 붐이 일어 촬영 장비가 꽤 흔했던 탓에 나는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의 민낯을 샅샅이 밝힐 포부를 가득 담고. 그 성전의 결과를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개신교의 종교 교육에 완전히 실망했다. 아니, 수치심이 들었다. 그때의 경험은 야훼가 알라와 같은 신인줄도 모르고 신실하다 믿었던 내 신앙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로 종교란 무엇인가에 깊이 빠져들었다. 종교의 종류를 수집하는 단순한 정보 섭렵에서부터 교리의 논리적 탐구, 철학적 검증, 역사 되짚기까지, 믿음이 충만한 이들이 흔히 무시하듯 마음이 아닌 머리로 보았고 그 때문에 다행히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는 않았다. 나는 신을 믿을 수는 있어도 종교를 믿을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종교를 질병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혼자서는 신과 대화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의존형 인간이 스스로 구속과 착취를 선택하는 게 종교를 갖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강남 교수는 "종교란 본질적으로 '궁극 실재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각과 변화의 체험'"(p. 105)이라고 말한다. 종교인에게 궁극 실재란 대부분 자기의 신이다. 자기 신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각이란 내가 딛고 선 이 세상이 결코 실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그 자체가 변화이면서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어렵다면 중간을 몽땅 떼어낸 뒤 이렇게 읽어도 좋다. 종교란 궁극 실재를 통한 변화의 체험이다.


문제는 궁극 실재다. 기독교인에게 이는 하나님이고 이슬람교도에게는 알라, 불교도에게는 부처, 힌두교도에게는 브라만, 비슈누, 시바, JMS 교도에게는 정명석, 신천지 교도에게는 이만희다. 열거한 사례를 보면 명쾌하게만 보였던 종교의 정의가 쓰레기 가득한 똥통에 빠져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걸 느낄 것이다.


모든 종교는 변화의 체험보다는 궁극 실재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변화의 체험은 '실재를 통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으면 그것을 통해 변화를 체험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야훼는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야훼는 질투가 많은 신이고 다른 신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야훼를 통한 변화의 체험은 모스크를 볼 때 분노에 치를 떠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강남 교수는 종교가 궁극 실재를 정의하는 말이나 글이 아닌 궁극 실재 그 자체를 보고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일을 아주 훌륭하게 해낸 사람을 여럿 안다. 정명석과 이만희, 문선명, 아사하라 쇼코, L. 로널드 하버드, 제임스 워런 존스, 죠셉 스미스. 이들은 기존의 종교가 정의하는 궁극 실재를 훌쩍 뛰어넘어 자신만의 실재를 만들어냈다.


궁극 실재를 객관적으로 정의하려 들면 우리는 끝나지 않는 피의 성전을 보게 되고 그것을 주관적 체험의 영역에 놔두면 사이비 종교의 늪에 빠지게 된다. 앞뒤를 포위한 적을 뚫는 정의는 한 가지뿐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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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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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온유의 쇠맛을 보고 싶어 골랐는데 몽글몽글 따뜻하다. <유원>은 2019년에 제13회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받았는데 요즘 청소년들은 수준이 참 높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섬세한 소설을 이해하고 즐겼다는 얘기니까.


유원이라는 여고생이 주인공이고 그녀의 학창 생활이 주무대다. 유원은 특별한 아이인데, 그 언니가 아주 특별했기 때문이다. 유원의 이름도 언니가 지었다. 원할 원, 외자. 빨리 나오기를 너무 원해서 그렇게 지었다. 두 사람은 터울이 컸다.


윗 층의 할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 그 재가 유원의 집에 떨어진 게 화근이었다. 원이 언니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고 베란다에 한 가득이었다. 무식한 담뱃재는 그 교양을 씹어 삼키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집에는 언니와 둘 뿐. 여기는 아파트 11층. 언니는 똑똑한 사람. 자기는 살 수 없을 거라 판단. 원이는 아직 어리고 가벼우니까. 이불을 적신다. 그 안에 원이를 싼다. 꽁꽁. 창문을 열고 원이를 던진다. 원이는 살았다. 언니는 죽었다.


덤으로 얻은 삶. 원이는 좀처럼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 삶은 늙지도 않고 실수할 일도 없고 나쁜 짓을 저지를 수도 없는 영원히 빛나는 존재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영혼은 너무 눈부셔 원이의 삶을 가린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영광을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원이를 아는 모든 이들은 원이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원이가 아니라 그녀에게 삶을 주고 떠난 언니를 본다.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유아적 환상을 찰나로 스친 뒤 어른으로 멸렬하는 것이 인생인데, 그 짧은 순간조차 누리지 못한 고등학생의 영혼은 얼마나 약하고 불안한가.


소설은 안 그래도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마음이 무너지고 일어나고 무너지고 일어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눈빛만 닿아도 부러질 것 같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쌓아 지은 이야기. <유원>은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아슬아슬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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