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 도시를 세운다면 - 인류가 우주에 진출하려면 꼭 해결해야 하는 숨은 난제들
잭 와이너스미스.켈리 와이너스미스 지음, 지웅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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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위어가 환장할만하다. 이 한 권만 있으면 우주 장편 드라마 한 편은 후다닥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젝트 헤일메리>까지 가기에는 좀 멀지만, 우주 정착 소설을 과학에 근거해 쓰고 싶다면 이 책은 가히 꺼지지 않는 등대가 돼줄 것이다.


일론 머스크는 향후 20년 안에 100만 명 규모의 도시를 화성에 짓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뭘 해왔는지 알고, 스타쉽이 인류의 무지를 비웃듯 화염을 쏟아내며 우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허풍이 아니구나 싶지만, 그래도 우주에서 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미디어, 특히 영화가 그리는 우주는 이미 정착지가 대규모로 건설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에서 철근을 세우고 콘크리트를 부어 건물을 짓듯 우주에서도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고, 인간의 우주 진출을 두 손 들어 찬성하는 쪽이지만, 자기 생애에 그 일이 현실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우선 태양계에서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거주 후보는 사실상 달과 화성뿐이다. 문제는 두 행성 모두 자기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 말은 인류에게 치명적인 물질을 주기적으로 뱉어대는 태양풍을 막아줄 보호막이 없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초기 정착민의 주거지로 용암 동굴을 지목한다. 태양풍 방어에서 보온, 보습까지 얻는 이득이 많으니까. 그럼 동굴을 찾아 무작정 들어가 살면 될까? 다들 알겠지만 인간은 쉴 새 없이 먹고 디스거스팅한 물질을 배출하는 단백질 기계다. 식물처럼 이산화탄소와 광자를 흡수해 산소를 뿜어내는 우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는 어디에서 올까? 그나마 달은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하니 머스크의 스타쉽이 하루에 수백 번 떠올라 자재를 퍼 나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달은 물을 구할 수 있는 지역이 한정적이다. 그 근처에 용암 돌굴이 없으면 똑똑한 로마인처럼 긴 수도교를 지어야 할 것이다. 그 수도교는 대기가 없어 직격으로 떨어지는 운석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중력이 없어 흐르지 않는 물을 이동시키기 위해 펌프를 돌려야 할 것이다. 그 펌프는 얼마나 힘이 세야 하며 전기는 얼마나 먹어치울까?


아, 맞다 전기!


달은 한 달의 반을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 365일 내내 해가 내리쬐는 곳은 극지방의 아주 작은 지역뿐이다. 태양광 발전이 아무리 우주에서 유리한다 한들 해 자체가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화성은 물이 꽤 풍부한 것으로 보인다. 대기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고(대부분 이산화탄소지만) 특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양의 존재가 거의 신의 선물처럼 느껴질 정도다. 물론 그 토양에서 맹독성 과염소산을 제거할 필요는 있다. 기억이 안 나는데 마크 와트니가 이 작업을 했던가? 동료들의 똥으로 거름을 줬던 건 기억나는데.


화성의 하루는 지구와 거의 비슷하다. 주기적으로 어둠에 숨어들어 장기간 칩거하는 달만큼 내향적이지는 않다. 문제는 태양의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화성은 샤이하지 않은데 거기선 태양이 샤이 하다. 게다가 툭하면 불어오는 전 화성 규모의 모래폭풍 때문에 하늘을 가리는 경우가 많다. 화성의 모래가 거의 유리처럼 날카로워 부딪히는 물건을 심하게 할퀸다는 사실과 태양광 패널에 쌓이는 모래를 누군가 계속 쓸어줘야 한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겠다.


그래도 이런 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에는 머스크처럼 미친 천재들이 많다. 게다가 그들은 클로드 미소스 정도는 갓 태어난 병아리의 옹아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AI 기술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5년 전만 해도 LLM이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금융보안의 취약점을 발견해 공격용 코드를 작성하는 세상을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류의 기술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저자들은(부부다) 우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상당수는 그걸 문제라고 인지하지도 못하는 부분에서 가로막힐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우주에서 차지한 영토는 어디에 속하는 것이며 누구의 법으로 지배하는가? 우주적 분쟁은 무엇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UN? NATO? 미국-러시아-인도-중국-일본 연합? 우주에서 각축을 벌이는 주요 국가들은 무한에 가까운 핵탄두를 보유한 데다 그걸 우주 어디든 정교하게 꽂아 넣을 수 있는 로켓 기술까지 가지고 있다. 인류가 지구에서 망나니였다면 우주에서도 그러리라 생각하는 게 논리적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우주로 나가기만 하면 인간이 피스를 외치며 인류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합을 맞출 거라 생각한다.


미국은 고작 이란 하나와도 의견 일치를 못해 전쟁을 벌인다. 러시아도, 중국도, 인도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들이 한데 모여 평화적이고 인류애가 넘치는 합의를 이뤄 다 함께 우주로 날아간다고? 나는 내가 죽기 전에 분명히 인류 최초의 우주 정착지가 건설될 거라 확신한다. 그전에 지구가 멸망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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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전쟁 - 글로벌 제약 산업의 패권 경쟁과 K-바이오의 생존 전략
윤태진 지음 / 바다출판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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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하면 개잡주 냄새가 심하지만 대한민국의 두 번째 성장 동력은 제약일 가능성이 높다. 신약 개발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생산이다. 삼성이 바이오로직스를 시작한 건 수십 년 간 웨이퍼를 갈고닦아 만든 초미세공정 기술 덕분이다. 분자의 크기가 대충 0.1~1nm쯤 하니 트랜지스터를 3nm 간격으로 배치하는 삼성전자의 기술은 가히 분자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분자를 조립하는 일 중에 가장 가치가 높은 건 제약이니, 안 할 수가 없는 거지.


위고비와 마운자로는 제약의 경계를 넓혔다. 자기 관리의 실패로 여겨지던 비만은 이제 질병으로 인정된다.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사람에게 "그러게 자가 면역 관리 좀 잘하지 그랬어"라고 말하지 않듯 이제 비만인에게 보내던 비난의 눈초리는 세심한 진단으로 변했다. 살 빼는 약은 비만 '치료제'가 됐다. 전자는 식단과 운동을 견딜 의지가 없는 사람이 선택하는 꼼수지만 후자는 정당한 처방이 된다. 약을 먹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암을 이길 의지가 없어서 항암제를 처방받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제약 BD라면 이점을 반드시 파고들어야 한다. 이미 있는 질병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건 민망할 정도로 정직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더 좋은 건 질병을 창조하는 것이다. 긴장과 소화불량, 게릴라성 똥마려움은 불안장애와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향후 10년 안에 질병이 될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단언컨대 '노화'다. 노화를 치료하겠다는 야심만만한 회사를 눈여겨보라. 당신에게 부와 영생을 가져다줄 테니까.


<신약의 전쟁>은 제약 BD가(Business Developer) 쓴 책이다. 단순히 제약 산업을 소개하는 걸 넘어 약의 기전과 무려 무려 BD 실무지침서까지 담았다. 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약의 기전이 훨씬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데다 내용도 어렵지 않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어떤 회사가 생산에 강하고 또 어떤 회사가 신약 개발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덤이다. 회사명이 그대로 나온다.


202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는 알파고의 창조주 데미스 하사비스였다. 구글의 제미나이 개발을 총괄하며 남는 시간에 취미 삼아 연구하던 결과물이 이뤄낸 성과였다. 그의 연구는 제약 업계를 송두리째 뒤집어놨는데 수년에 걸치던 단백질의 구조 규명을 몇 분 만에 밝힐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약의 기전은 단백질의 구조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제약회사는 데미스 하사비스의 도움을 받아 치료제의 후보 물질을 손쉽게 찾을 수 있게 됐다. 하사비스는 2억 개에 달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모두 밝혀 무료로 배포했다.


그러니 여러분이 AI에 투자하겠다며 팔란티어나 앤트로픽, 스페이스X만 보고 있다면 이 쪽으로도 눈을 돌려보기 바란다. 제약과 AI는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제약 회사와 그런 제약사에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원래 이런 얘기를 하려고 시작한 글은 아니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꾸 이런 쪽으로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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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글 오늘의 젊은 작가 57
전예진 지음 / 민음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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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집어삼켜야 할 게 너무 많다. 살려면 많은 걸 삼켜야 한다. 음식 얘기가 아니다. 분노, 시기, 질투, 나를 싫어하는 것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숨기고 싶은 것들, 없애고 싶은 것들. 먹다 보면 체할 때도 있다. 체하다 보면 삼켰던 게 다시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나온 것들은 들어갈 때보다 끔찍해 보인다. 그러니 뭔가를 삼킬 땐 각오해야 한다. 다시는 꺼내지 않으리라. 끝까지 소화시켜 없애리라.


이 일이 생각처럼 잘 된다면 사는 데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그대로 들고 갈 수도 있고 같이 선 사람에게 나눠줄 수도 있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대부분 고통을 불러일으키지만 가끔, 아주 가끔 마음에 쌓인 눈을 녹일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 행운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다.


<보글>의 두 자매는 삼키는 걸 아주 잘했다. 둘이 뺨을 맞대고 무언가를 삼키기로 마음먹으면 두 입이 합쳐져 엄청나게 커졌고 많은 걸 삼킬 수 있었다. 때로는 엄청나게 큰 걸 삼키기도 했는데 그럴 땐 입이 찢어지지 않도록 주변에 바셀린을 발랐다. 먹고 나면 이상한 것들이 나올 때도 있었다. 온몸 여기저기에 수포 같은 게 생기고, 터지면 무언가가 나왔고, 심으면 악취가 심한 열매를 맺었다. 언니는 이런 게 나올 때마다 전부 갈아서 없애버렸다.


자매는 엄마가 죽고 고아가 될 뻔했지만 할머니와 연락이 닿았다. 할머니에게는 안정적인 직장과 아파트가 있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집안 여기저기 똥을 싸고, 자매를 못 알아보기 시작하고, 그래서(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있다) 죽여버렸다. 집에 돌아온 언니가 봤고, 언니에게는 단 한 가지 방법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자매는 오한과 경련, 메스꺼움을 견디며 생각했다.


다시는,

다시는,

먹지 말자,

인간을,

인간은.

(p.77)


사람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단순한 고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뒤에 나오는 게 문제였다. 동생의 물집이 터지면서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사람이 나왔다. 사람은 쭉쭉 커서 말도 하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사람은 점점 자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 별 수 있나. 다시 삼키는 수밖에. 다시는, 다시는, 인간을 먹지 말자 다짐했으면서도.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합쳐서 크게 벌어지던 입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알아야 한다. 세상은 나 혼자고, 모든 걸 내 힘으로 해야 한다는 걸. 이것이 성장이고, 철이 든다는 것이고,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쩌면 인간의 외로움은 성장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온 게 아닐까? 꾸역꾸역 슬픔을 삼키고, 눈물을 가두고, 어깨에 메고, 등에 지고, 침묵하는 것. 어른이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고 다짐한 것들. 이 모든 게 우리의 오해는 아니었을까?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지를 깨닫는 것이다. 나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손을 내미는 것, 도움을 청하는 것, 함께 해결할 사람을 찾는 것. 그러니 이제 무작정 삼키는 일은 하지 말자.


우리는 어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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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마지막 잔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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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영원히 현재에 머물러 있다. 1949년 생 작가에게 이것은 힘일까 독일까. 하루키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현재로 느껴질까? 그럴 거라고 믿는다. 그의 소설이 전하는 상실, 인과 없는 미끄러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허물을 벗고 변태 하는 경험. 이것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흉터이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좋은 점은 이 흉터를 요란하지 않게 여겨서다. 아, 이거 얼마 전에 좀 다쳤어,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내리꽂는 태양에 구름은 잔잔히 흐르고 침묵은 길어지지만 어색함이 끼어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의 영혼은 어딘가 틀어져 있다. 원래 향하던 방향에서 조금 어긋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여전히 똑같이 흘러간다. 하루키는 기본적으로 그 똑같이 흘러가는 세계를 기술한다. 벌어진 영혼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미묘한 감정을 그 위에 섬세하게 내려놓는다.


나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가 그의 이야기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한 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그림이 비어있다는 점에서는 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오후의 마지막 잔디>와 함께 가기에는 너무 거칠다. 이 소설은 이렇게 뾰족하지 않다. 대충 그린 것처럼 보이는 멋있음이 아니다. 깎아넣은 정교함이다. 하루키 단편의 맛은 거기서 나온다. 까다롭지 않아 보이지만 지은 사람은 대단히 까다롭게 단어를 고르고 이야기를 이어 붙인 것이다. 이음새가 하나도 눈에 띄지 않게, 마음을 하나도 거스르지 않게, 그래서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게.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가 어울리는 건 하루키의 에세이다. 그의 에세이는 정말로 아무것도 담지 않으니까.


<오후의 마지막 잔디>는 1982년에 나온 소설이다.

하루키는 영원히 현재에 머물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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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의 해부 - 이상한 자들의 이유
존 E. 더글러스.마크 올셰이커 지음, 김현우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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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의 해부>는 <마인드 헌터>의 존 E. 더글라스가 지은 책이다. <마인드 헌터>보다는 내용이 훨씬 풍부하다. 프로파일링 케이스 스터디로 아주 좋고 범죄 소설을 준비 중이라면 여러모로 참고할 부분이 많다. 여기에 몇 가지 유용한 내용을 정리해 둔다.


피살자의 시체가 담요로 덮여있거나 얼굴이 가려져 있다면 범인은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범죄자라면 성격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용의자를 면식범으로 한정해 지인이나 이웃을 먼저 의심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소심한 성격일 수 있고 인간관계에 미숙한 외톨이, 주변에선 수줍은 사람으로 평가될 가능성도 높다. 처음부터 살인을 계획한 게 아닐 수도 있다. 피해자가 반항을 심하게 했거나 범인을 당황하게 만들어 벌어진 우발적 살인도 가정해야 한다.


범죄 수단도 아주 중요한 단서다. 총, 칼, 교살, 독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총, 칼, 교살은 범인이 피해자를 직접 마주해야 한다(저격 총이 아니라면). 반면 독살은 그럴 필요가 없다. 죽이려는 사람의 눈을 바라볼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는 범인의 성격과 동기에 큰 차이를 만든다. 살인범들은 피해자를 완벽히 통제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 나아가 성적 쾌락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독살에서는 이런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독살은 좀 더 정교할 필요도 있다. 누군가의 음식에 독을 타거나 주사를 하기 위해서는 은밀히 접근했다 빠져나와야 한다. 피해자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을 명확히 알고 있거나 지속적으로 관찰 가능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를 제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독살의 큰 장점이다. 독살은 여러모로 여성 살인범이 택하기 쉬운 수단이다.


범죄 현장을 묘사해 보자. 탁자 위에는 다 마신 오렌지 주스 병과 케이크를 담았던 것으로 보이는 접시가 있다. 냉장고에는 정확히 한 조각이 반듯하게 잘린 홀케이크가 있다. 주스 병과 포크에서 피해자의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걸 범인이 먹었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범인이 이 장소를 아주 편안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범인은 아주 대범한 놈일 수도, 이게 첫 번째 범행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쉽게는 이 집을 자주 방문했던 사람, 피해자가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망자들은 자기에게 친숙한 장소를 은신처로 삼는 경향이 있다. 온 가족을 살해하고 도망친 가장은 자기가 어릴 때 살았던 지역, 주재원으로 오래 근무했던 나라, 대학 시절을 보낸 곳, 아내를 처음 만난 도시, 군복무를 했던 지방 등으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아주 평범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다시 가정을 꾸릴 수도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아마도 망상이겠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면 범인은 아주 홀가분한 상태일 것이다. 살인으로 인해 범죄자의 삶은 다시 살아갈 에너지로 충만해진다.


살인에는 분명 트리거가 존재한다. 직장을 다니며 피해망상에 빠진 사람 모두가 동료를 살해하는 건 아니다. 삶에는 붕괴를 막는 여러 기둥이 존재한다. 피해망상에 낮은 고과 평가, 실직, 파산, 이혼, 공개 모욕, 묻지마 살인을 보도하는 뉴스, 그것을 주제로 한 영화 등이 겹쳤을 때 툭, 하고 끊어지며 와르르 무너진다. 안톤 쉬거처럼 순수악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당신은 코맥 매카시가 아니다. 쌈마이가 되지 않으려면 얘는 그냥 싸패야라고 말하는 대신 인물을 다층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동기의 해부>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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