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분 직관하기 1 - 눈으로 푸는 미분의 비밀
박원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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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에 대한 나의 집착은 병적이다. 나는 그의 역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뜬구름 잡는 헛소리들에 비해 그의 말은 현실감이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 매력이다. 진정한 역설이다. 실제와는 다르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지만 그의 역설은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오류가 없어 보인다.


처음으로 해답을 제시한 건 앙리 베르그송이었다. 그는 '지속'이라는 개념으로 이 천재의 역설을 돌파해 나갔다. 이론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나를 설득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음을 고백한다. 사실 나는 베르그송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손에 잡힐 정도로 현실감 있는 천재의 역설을 뚫기에 그의 말은 지나치게 복잡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처럼.


나는 0.999... 같은 무한소수가 사실은 1과 같다는 수학적 증명을 보고 나서야 제논의 역설을 박살 낼 수 있었다. 내게는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증명을 다른 글에서도 지겨울 만큼 언급했다.


카를로 로벨리의 <화이트홀>을 읽고 난 뒤엔 그동안 이렇게 쉬운 해결 방법을 왜 찾지 못했는가를 두고 한탄하기도 했다. 공간은 양자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연속적으로 보이는 이 세계가 실은 아주 작은 픽셀, 한 없이 작은 모눈종이 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0.1 또는 0.5 픽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정확히 한 픽셀씩 전진한다. 공간은 무한히 쪼개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최소 단위를 '플랑크 길이'라고 부른다.


<미적분 직관하기>는 새로운 개념으로 풀이를 시도한다. 바로 정사각형을 한 없이 쪼개는 것이다. 그 작은 조각들을 모두 더했을 때의 넓이는 무엇이겠는가? 제논은 무언가를 무한히 쪼개 무한히 더하면 그 결과가 무한해지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지만, 쪼개지기 전에 존재했던 정사각형의 넓이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한다. 조각을 아무리 잘게 나눠도 그 모든 것의 합은 결국 원래 정사각형의 넓이다. 그보다 한 치도 더하거나 뺄 수 없는 바로 그 자체.


물론 억지를 부릴 수는 있다. 당신이 조각들을 모두 모아 넓이를 더할 수 없게 계속 정사각형을 쪼개겠다고 말이다. 더 있나요? 네 여기 하나 더 있습니다. 끝인가요? 아니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이제 정말 끝인가요? 아니요 여기 하나가 더...


이 책은 미적분을 추상적으로 탐구하지 않는다. 저자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고, 시험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다. 책 속에는 무려 '수능 기출문제'가 거의 매장 등장한다. 솔직히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문제를 직관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이 무척이나 신선했다. 같은 수식끼리 나누고 곱하고 이항 해서 더하고 빼고가 아니라 공책에 그림을 그려 해결한다. 일찌감치 이런 방법을 알았더라면 나는 수십 년 전 수능 시험에서 수학 문제를 찍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인생은 비단길 위를 달렸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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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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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유는 인간 세상에서 재림 예수로 불렸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그는 감독관이었다. 예수와 상의해 이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지 말지 결정하는 사람. 1999년의 소동은 나도 정확히 기억한다. 연도를 두 자릿수로 인식하는 옛 시대의 프로그램들이 있었고, 이것들이 기간 산업계에 두루 사용되고 있다 보니 99에서 00으로 넘어가는 순간 프로그램들이 1900과 2000을 구분하지 못해 시스템이 오작동, 비행기는 추락하고 핵미사일이 자동으로 발사되어 지구에 대혼란이 닥친다는 시나리오였다. 음모가 아니라, 뉴스에 등장하는 이야기였다. '밀레니엄' 혹은 'Y2K'라 불리던 버그.


종말론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1999년 7월에는 앙골모아 대왕, 일명 공포의 대마왕이 지구에 강림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의사로서 페스트 감염 원인을 정확히 알고 전염을 막았던, 그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었다. 그는 미래를 알쏭달쏭한 시로 표현했다. 그 시는 해석의 힘을 빌어 앙골모아 대왕의 강림을 1999년 7월로 확신했다.


대한민국에는 '휴거'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개신교의 종말론 중 하나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던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하여 저리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행위였다. 산 자들은 당연히 예수와 함께 천국으로 가고 죽은 자는 필멸의 지옥행이었다. 한 교회는 1992년의 어느 날을 휴거일로 정했고, 이는 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왜 92년이었을까? 사실 1999년의 대재앙은 한 번에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7년에 걸친 환란의 피날레였다. 따라서 휴거는 1992년 이미 진행되고 이와 같이 등장한 파멸의 짐승들이 각자 고유한 기술을 발휘해 7년간 환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1992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999년도 마찬가지였다. 현대 기술이 이 속도로 발전한다면 나는 2099년까지 무리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종말을 예측하지 못한 사이비 종교들이 수명을 연장하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확한 날짜 예측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믿는 자들, 그러니까 자기들의 열렬한 기도에 응답한 하나님이 종말의 계획을 철회하여 온 인류를 구원했다는 것이다. <피와 기름>은 이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인간을 긍휼히 여긴 예수가, 그는 악한 자든 선한 자든 모두 사랑하는 대인이니까, 7년의 환란과 심판으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그저 이 세계가 영원토록 계속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럼 이미 죽은 사람들과 앞으로 죽게 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종말과는 별개로 죽은 뒤에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다. 교리에 따르면 생물학적으로 죽은 인간들의 영혼은 심판의 날까지 잠들어 있다. 판결은 일상이 아니라 일괄 처리 되는 것이다. 바로 종말의 그날에.


대치동 논술 학원에서 보조 강사로 일하는 도박중독자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장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지만 그 비정상성이 두드러지지 않고 착 붙어가는 게 이 소설의 매력이다. 사람들에게 신물이 나 도망치려는 이도유를 빼앗기 위해 두 세력이 충돌하고, 어릴 때 그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주인공이 소동에 빠져든다. 도박 중독으로 완전히 망가진 인생이었으나, 그래서 그는 과감했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모험 활극이라 부를만한 고속도로 추격전. 관리자가 내려주는 기적의 현현.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루한 교리 문답이 이어질 때도 있지만, 재미가 부족한 소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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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와 팩트 - 왜 합리적 인류는 때때로 멍청해지는가
데이비드 로버트 그라임스 지음, 김보은 옮김 / 디플롯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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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다. 인간의 멍청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이 바닥을 좀 기어 다녀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사례들이 나오기는 한다. 그게 식상할 수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딱 200페이지만 줄여줬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핵심은 과학적 사고와 건강한 회의주의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사회생활이 어렵다는 점이다. 과학적 사고는 곧 비판이고, 건강한 회의는 말대꾸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모두가 다 좋다는 영화에 고고히 1점을 날리는 평론가를 떠올려보자. 정말 꼴 보기 싫지 않은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쓴소리를 싫어한다.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의 문제라서 바뀌기가 더 어렵다. 우리 뇌는 자기 신념과 맞지 않는 정보를 취득하면 이 부조화를 봉합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래서 괴롭고, 괴롭기 때문에 자기 신념을 더 강화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지각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정치적 극단주의자, 경제 사기에 지속적으로 말려드는 사람들과 얘기해 봤다면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논리는 명제 자체가 허튼소리인 거짓의 세계에선 종이호랑이처럼 나약하다.


왜 진화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까? 과학적 사고는 근대 교육의 산물이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능력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생존에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자기에게 달콤한 말만 하는 아첨꾼만 주변에 뒀다 모가지가 날아간 인간의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난다. 그런데도 진화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다.


생식의 관점에서 인간이 어떤 짝을 선택하느냐를 돌아보면 답이 나올 것도 같다. 나한테 쓴소리만 하는 사람과 연인이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틀려도 공감하고, 나빠도 지지하는 게 관계 유지의 황금률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나. 매사에 똑 부러지고, 관계를 칼 같이 자르고, 뭐 하나 시원하게 응원하지 않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흠, 지금 내 집 거울에 그런 남자가 하나 서 있다.


현대 사회가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는 '매스 미디어'는 '매스'라는 접두어를 달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알고리즘 덕분이다. 누르기가 곧 돈인 세상에서 절대 누를 법하지 않은, 내 성향과 정반대의 콘텐츠를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화약보다 설탕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분노는 여전히 성황이다. 아니, 성황이 아니라 히스토리컬 하이, 치솟은 불기둥이 오존을 뚫고 하늘을 날아 우주를 불태우고 있다.


우리가 유튜브를 그만 보라고, 인터넷 뉴스를 없애라고, SNS를 끊으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이 허락하는 내에서 떠올려보면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회의주의자로 살아왔다. 지금의 나는 거의 비관론자에 가깝다. 물은 반밖에 남지 않았고, 그 누구도 채우지 않을 것이며, 머지않아 다 말라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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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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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은 카를로 로벨리가 쓴 책 중에 가장 읽기가 쉽다. 동양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라 안 그래도 어려운 물리학의 세계를 메타포로 덧발라 모호함을 가중하는 분인데, 어쩐 일인지 이 책은 쉽다. 물론 중간중간 사족이 등장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사족도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끝까지 즐겁게 읽었다.


아인슈타인이 중력의 원인을 밝힌 방정식을 내놓은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해를 구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처음으로 답을 찾아낸 사람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독일에서 전쟁 중인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참호 위로 빗발치는 포탄의 선율을 들으며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풀어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슈바르츠실트의 해다.


슈바르츠실트가 밝혀낸 해에는 블랙홀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의 풀이가 맞다면, 블랙홀은 필연적이었다. 밝게 빛나던 별이, 그 광채의 연료였던 수소를 모두 소진한 뒤 자기 자신의 무게(중력)를 이기지 못해 작게 작게 수축하다가 결국 임계점을 넘어 빛마저도 빠져나갈 수 없는 괴물로 변한다는 것. 아인슈타인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 이론은 수많은 증명과 관측에 의해 사실로 드러난다. 이제 블랙홀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이트홀>이 던지는 질문은 그럼 그 블랙홀이 어디까지 수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엔 수많은 이론이 존재한다. 가장 쉬운 건 0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0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공간에서 사라진다는 걸까? 그 말이 맞다면 블랙홀이 빨아들인 그 수많은 물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질량은 보존된다고 배웠고 이는 블랙홀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수축의 어느 순간 블랙홀이 다른 공간과 연결되어 먹어치운 것들을 다 토해낸다고 주장한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카를로 로벨리의 화이트홀은 이것과는 좀 다르다. 우주에 대한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으면서도 내 생각은 왜 여기까지 닿지 못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공간에도 최소의 단위라는 게 존재한다. 마치 양자가 그런 것처럼, 공간은 플랑크 영역이라 부르는 크기보다 결코 작아질 수 없다. TV를 떠올리면 된다. 지금 시청 중인 드라마의 화면을 점점 줄인다고 생각해 보자. 아무리 해상도가 높은 3840 X 2048의 4K TV라도 결국 1 X 1, 즉 단 한 개의 픽셀 이하로는 줄어들 수가 없다. TV를 끄지 않는 한!


공간이 이 크기에 다다르면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양자적 요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는 말로는 형용조차 불가한 미시의 세계로 진입한 공간은, 그 순간 반전하여 비디오를 거꾸로 돌린 듯, 바닥을 치고 튀어나와 모든 것을 뱉어내는 화이트홀이 된다. 여기서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면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것은 빅뱅 아닌가?


우리가 사는 우주는 어쩌면 한 별의 소멸 이후 시작된 부활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잿더미 속에서 계속 되살아나는 피닉스처럼. 명멸을 반복하는 우주. 정말 신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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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 인피니트 - FTX 창립자 샘 뱅크먼프리드는 어떻게 55조 원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는가
마이클 루이스 지음, 박홍경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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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만 해도 5천만 원을 하던 비트코인이 어느새 1억 4천만 원을 넘었다.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성격인데,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이것이 무엇이길래, 도대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돈은 상호주관적실재가 됐다. 예전엔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하기 위해선 반드시 새로 발행할 화폐 가치만큼의 금을 보관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과거에는 은행에 돈을 들고 은행이 정확히 그만큼의 금을 내줄 수 있어야 했다. 돈은 유통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금 자신이 낳은 분신이었다.


각국의 중앙은행은 이것이 너무나 불편했다. 코로나 대재앙으로 시민 1명당 30만 원의 돈을 주고 싶은데 갑자기 그 정도의 금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새로운 금맥이 발견될 리도 없고, 금광의 생산량을 갑자기 늘릴 수도 없다. 그나마 이런 고민은 금광을 가진 나라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부는 내키는 대로 돈을 찍고 싶었고(이것이 바로 통화정책이다) 금본위제는 사라졌으며 돈의 실재적 가치도 같이 날아가버렸다. 돈에게 남은 건 실질적 가치뿐인데 이것은 100% 우리의 믿음에서 나온다. 돈이 가치를 갖는다는 우리의 믿음. 그 돈을 발행하는 국가에 대한 믿음. 그 돈의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될 거라는 믿음. 그러나 믿음이란 언제든 지옥으로 떨어질 준비가 되어있는 연약한 존재 아니던가?


비트코인의 창시자 나카모토 사토시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대응하는 정부의 방식에 신물이 났다. 월가에 엄청난 구제금융이 쏟아져 들어갔는데, 그건 부자들의 파산을 막기 위해 가난한 납세자들의 돈을 쓰는 것이었다. 누군가 중앙에서 이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한 이러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판단한 사토시는 그 어떤 기관의 보증도, 관리도 필요 없이, 그 돈을 소유한 사람들끼리 상호 보증하는 화폐인 비트코인을 창시한다.


비트코인이 허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돈, 은행 어플에 찍힌 그 숫자가 얼마나 허상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 가치를 마음대로 조정할 중앙기관이 없고, 심지어 발행량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비트코인은 실물 화폐보다 훨씬 믿을만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용자는 창시자의 예상을 넘어선다. 땅속에 묻혀 아무도 모르던 비트코인을 발굴한 건 창시자의 숭고한 의도에 이끌린 열정이 아니라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FTX의 샘 뱅크먼프리드는 그 욕망이 가장 활발하게 타오르기 직전 우연히 이 세계에 발을 디뎠고, 우연히 전 세계 30대 미만의 사람 중 가장 많은 부를 거머쥐었다가, 하루아침에 25년형을 선고받은 범죄자가 되었다. <고잉 인피니트>는 마이클 루이스의 책답지 않게 구성이 산만하고 느닷없이 끝나버린다. 절정을 향해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는 저자 특유의 드라마틱 저널리즘의 힘이 약하다. 나는 이것이 의도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샘 뱅크먼프리드가 벌어들이는 돈, 그가 쓰는 돈, FTX와 알라메다 리서치와 바이낸스와, 기타 암호화폐 시장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쏟아내는 돈의 단위는, 마치 가장 큰 단위의 수를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게임을 보듯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도저히 가슴에 와닿지 않는 그 숫자들, 그러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숫자들. 독자가 느끼는 그 당혹스러움, 그 헛헛함, 그 어리둥절이 바로 당시 암호화폐라는 로켓을 타고 우주로 향하던 사람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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