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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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어리 소년이 벵갈 호랑이와 작은 구명보트를 나눠 타고 300일 넘게 태평양을 표류한 조난기는 이 책보다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로 더 유명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그 영화를 보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그랬다면 전율하는 마지막을 보지 못한 채 지루한 조난기를 덮어버렸을 것이다. <파이 이야기>는 마지막 수십 페이지가 계시처럼 내리꽂히는 작품이다. 그 압도적 충격을 그대로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지 말것을 당부한다.


<파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진실이 존재한다. 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아니라 두 가지 '진실'이라고 썼다. 그 이유를 상세히 논하는 건 이 글의 역량을 한참이나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나는 이야기라는 단어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허구'라는 편견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싶다. 세상은 수 많은 이야기의 집합에 불과하고 사람들은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한 뒤 그것을 사실로, 나아가 진실로 규정하면서도 그게 이야기였다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진실이란 결국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규정될 따름이다. 이 말은 허구든 사실이든 모두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열한 조난기는 정확히 이 과정, 이야기가 탄생하고 사람들의 선택을 받고 그들의 삶에 흡수되는, 인생의 구성 원리를 이야기한다.


가까스로 구조된 파이는 그를 찾아온 조사관들에게 두 가지의 진실을 들려준다. 하나는 파이가 다리를 다친 얼룩말과 암컷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리처드 파커라는 벵갈 호랑이와 함께 태평양을 표류한 이야기다. 하이에나는 다리를 다친 얼룩말을 잡아먹었고 그 행위에 분노해 싸움을 걸어온 암컷 오랑우탄까지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 사악한 짐승도 결국 리처드 파커에게 물려 죽고 만다. 파이는 마지막 남은 짐승과 함께 태평양을 표류하다 멕시코에서 구조된다.


자, 이제 잔혹한 진실을 들어보자. 파이가 말한 암컷 오랑우탄은 사실 그의 어머니였고 하이에나는 가라앉은 배의 프랑스인 요리사였다. 얼룩말은 다리를 다친 선원, 리차드 파커는 파이의 내면에 도사린 분노. 프랑스인 요리사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선원이 죽을거라며 그의 다리를 잘라버린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선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리를 먹는 것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엄마는 요리사의 비윤리에 분노하며 한사코 그 고기를 거부하지만 파이는 엄마 몰래 인육을 받아먹으며 조난을 버틴다. 결국 그 사실이 밝혀지며 엄마와 요리사는 심하게 다툰다. 요리사는 거칠게 항의하는 엄마를 죽여 바다 밑으로 떠밀어버린다. 파이의 귀에 엄마의 비명과 그녀가 바다 속에 빠지며 내는 물소리가 들린다. 파이는 귀를 막고 현실에서 도피한다. 후에도 파이와 요리사는 한참을 같이 있었지만 마침내 나타난 리차드 파커가 요리사를 살해하고 그의 위 속에 든 음식물을 발라먹는다.


파이 이야기의 진실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소설은 열린 결말을 지향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안정시켜줄 마지막 문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먼저 '진실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진실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복무하는 시종일까? 그렇다면 역시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파이의 거짓말은 파이의 삶을 지켜줬고 그에게 미래를 선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사실과 동일시하는 사람이라면 비극을 이겨내지 못하고 환상으로 도피한 파이의 나약함에 구토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후자의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아무리 단호하고 끔찍해도 언제나 사실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치밀어오는 안도를 막을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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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가격의 경제학 - 바코드 속에 숨겨진 소비자와 판매자의 치열한 심리싸움
노정동 지음 / 책들의정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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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가격의 경제학>은 유통에 대한 책이다. 가격이란 곧 원가 + 유통마진이기 때문에 가격에 대한 책은 곧 유통에 대한 책일 수 밖에 없다. 유통이라는 걸 쭉 훑어보면 대충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된다. 돈이 어디서 나와 어디로 흘러 어디에 고이는지, 왜 저쪽은 이쪽보다 더 빨리 고일 수 밖에 없는지 왜 저쪽에 가뭄이 들 때 이쪽에 홍수가 나는지, 돈이 도는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있으면 상황의 변화에 맞춰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돈의 흐름을 파악하기에 유통만큼 확실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이 책은 저자가 2012년 부터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한 내용 중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을 추려 쉽게 풀어낸 경제학 책이다. 경제학, 이라고 하면 좀 거창할 수 있는데 그냥 주요 산업별 인기 상품들의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쉽게 풀어쓴 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유통은 우리같은 일반 사람들의 눈에 쉽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속을 해부한 모습을 보면 신기한 게 참 많다. 쿠팡은 매년 4조가 넘는 넘사벽 매출을 기록하면서도 왜 맨날 조 단위의 적자에 시달리는 걸까? 매년 망한다 망한다 위기가 도는데도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는 왜 2조가 넘는 돈을 이 밑빠진 독에 채워 넣었을까? 작가는 말한다.


'가격은 욕망을 투영하는 거울'이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거의 99퍼센트 맞다. 가격표를 들어다보면 거기에는 제품의 내재가치 뿐만 아니라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전략, 의도, 심리, 욕망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 작가 서문 중


우리의 눈에 드러나는 건 가격뿐이다. 이 말은 우리가 가격을 통해 그들의 욕망과 전략을 읽어내지 못하면 그들의 호갱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책을 한 권 읽었다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심심한 몇 시간을 흥미로 바꾸기에는 충분한 책이다. 이 쪽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뇌의 한 구석에 반짝하고 불이 들어오는 걸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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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듀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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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은 겉으로 보기엔 내가 좋아할만한 것들로 가득차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까놓고보면 별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기술의 발달이 증폭시키는 인간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들을 파악하는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머리가 나쁘다는거지.


내게 SF란 <아이언맨>과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와 <인피니티 워>다. 하지만 아무도 이 영화들을 SF라고 부르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블레이드 러너>쯤은 되야 그 바닥 사람들은 인정해줄 것이다. 나는 한번도 재미있게 본 적이 없는 영화지만(드뇌 빌뇌브가 리메이크한 최신작은 매우 흥미로웠다).


SF란 장르가 원래 그런건 아닌 것 같은데 최근들어 읽는 SF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우중충하다. 작가들은 인간 세계에 대한 희망을 동전 한 닢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잃어버린 것 같다. 수성으로 가든 화성으로 가든 인간은 똑같이 사악하고 어리석다. 그렇게 사악하고 어리석은 인류가 어떻게 그렇게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지? 라고 물으면 아마 그 사악하고 어리석은 욕망이 답이라고 말할 것 같다. 요약하면 몇 천 년이 지나도 인간은 여전히 그지같고,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희망 따위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추동하고 거대해진 욕망이 다시 기술 발전의 연료가 되는 영원의 악순환이 완성된다.


아, 나는 활극이 보고싶다.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고 인지적 충격을 줄만한 새로운 생명체와 그 생활 방식을 목격하고, 때로는 우주 악당들과 총싸움을 벌이는 이야기 말이다. 문명의 발달과 전혀 비례하지 않는 인간의 누추함은 이 유아적 상상력에 찬물을 끼얹을 뿐이다. 수준이 낮든, 그건 SF가 아니든, 난 좀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단 말이다.


SF 작가들이 자꾸 문학을 하려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 워낙에 시장이 없다보니 비빌 언덕이 거기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다양성을 죽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단편집에도 참여한 작가 듀나가 그나마 그런 울타리를 개의치 않는 대범함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우울한 건 변함이 없다.


차라리 뭐냐, 타임 슬립? 미래로 간 중세 검객이라든가 조선시대로 간 현대 의사 이야기, 뭐 이런 걸 읽어야 하는 걸까? 이대로 가다간 SF는 손도대지 않을 것 같다. <헬보이>랑 <엔드 게임>이나 보러 가야지. 맞다, 넷플릭스에 <한 솔로>도 나왔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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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피뢰침
헬렌 디윗 지음, 김지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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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일상화되어 있어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 불붙기 시작한 여성의 목소리에 많은 남성들이 분노를 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일상화된 차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차별 철폐를 '여성 우대'로 착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대우를 집어치우라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미국의 여성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성에게 특혜를 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달라는 것 뿐입니다."


코넬대 정치학 학사에 컬럼비아 대학 로스쿨을 공동 수석으로 졸업한 긴즈버그에게도 차별은 일상이었다. 로펌은 그녀보다 성적이 낮은 남학생을 스카우트했고 판사가 된 이후에도 그녀는 재판연구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차별은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행해진다. 무서운건 이 차별이 많은 경우 성적 착취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모 항공사 회장이 자사의 여자 승무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유력 정치인이 자신의 비서를 어떻게 '길들였는지'를 보고 있으면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이 비단 차별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직장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성추행 및 폭행 사건들은 그 충격이 더하다. 이 사회에서 가장 공적으로 여겨지는 곳에서조차 여성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 그들의 안식처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남성과 동일한 능력을 지녔음을 증명했고, 그들과 똑같은 일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 동안 수행하고 있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남자들이 여성의 권리를 여전히 자신의 호의로 여기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내가 너희를 허락했기 때문에 너희가 여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의 목은 내 말 한마디에 달려있다. 끈질기게 수청을 들라 강요하는 변사또의 폭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피뢰침>은 이러한 여성의 위기를 극단까지 몰고 간다. 블랙코미디 치고는 농담의 센스가 떨어지고 좀 지루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문제를 바닥까지 끌고 들어가는 뚝심만큼은 인정해줄만 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사내 성추행 문제가 남자들이 적당한 때에, 충분한 만큼 성적 욕구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내 섹스 서비스'를 제안한다. 욕구를 느끼는 남성이 인트라넷에 접속해 신청을 하면 회사에 재직 중인 여성 한 명이 특수 제작된 화장실로 이동해 치마를 벗고 대기한다. 그러면 곧 신청한 남자가 들어와... 물론 여성의 신분은 철저한 비밀이 보장되며 주인공의 회사는 이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노하우를 앞세워 시장을 지배한다.


소설 속에서 섹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들에겐 애초에 그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얻지 못할 고소득이 보장된다. 몇몇 여성들은 이렇게 번 돈으로 로스쿨에 입학하여 성공한 법조인이 되기도 한다. 이 성공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 착취를 정당화하는 구실이고, 이를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는 되지만 읽는 순간 역겨운 감정이 드는 걸 막을 수는 없다.


<피뢰침>은 너무 적나라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일상화된 폭력, 그 은은하고 투명한, 그러나 명백히 존재하는 구조의 윤곽을 드러냄으로써 보는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야 하는데, 행위 자체가 너무 추잡하고 자극적이다보니 그거 밖에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 차라리 단편이었으면 훨씬 좋았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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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반물질 :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질 이야기 (체험판) -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질 이야기
프랭크 클로우스 지음, 강석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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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물질을 처음 접한 건 만화 <암즈>에서였다. 주인공이 변신하는 '자바워크'라는 괴물이 이 반물질을 무기로 사용하는데, 보고 있는 소년의 마음이 두근두근할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반물질은 어떤 특정한 물질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의 또 다른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컨대 수소가 있으면 반수소가 있고 알루미늄이 있으면 반알루미늄이 있다. 물질과 반물질은 그 내부를 구성하는 원자핵이 다를 뿐 쌍이되는 녀석들끼리 완전히 동일한 성질을 지닌다. 따라서 홍합탕을 끓이고 간을 맞추기 위해선 소금을 넣든 반소금을 넣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반소금을 섭취했을 때 우리의 몸이 원자폭탄처럼 폭발하며 밥상과, 집과, 나아가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 전체를 우주 먼지로 만들어버린다는 게 차이일 뿐이다. 반소금 5g이면 대략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10배에 해당한다.


이게 바로 반물질이 각종 SF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유다. 반물질은 초고효율 에너지원으로 만약 인류가 효율적으로 통제하게 된다면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무기를 가져 뭐하냐고? 폭발은 무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피스톤은 흡입-압축-'폭발'-배기의 4사이클 공정을 반복하며 자동차를 앞으로 밀어낸다. 우주를 누비는 스타트랙의 엔터프라이즈호가 바로 이 반물질을 우주선의 연료로 사용한다.


우주 어딘가엔 반물질들로만 이뤄진 지구나 인간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와 완벽히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반갑게 악수를 나누는 순간 우주 대재앙이 벌어질 것이다. 반가워 친구 나는, 펑! 사랑하지만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 영 헛소리로만 들리는 사람이라면 반물질 여자나 남자를 만나 연애 감정을 키워보는 것을 추천한다.


과거에는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었던 우주의 신비가 과학적 사실로 드러날수록 나는 오히려 이 세상을 만든 '누군가'의 존재를 느끼곤 한다. 언젠가는 이 우주에 반물질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밝혀지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도대체 이놈들이 왜 우주에 남아있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반물질이 어쩌면 우주를 창조한 누군가의 리셋 버튼이 아닐까 하는 상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우리의 우주 옆에는 완전히 동일한 질량을 가진 반우주가 존재한다. 양 끝엔 각각 물질과 반물질 유리벽이 세워져 있고 그 사이는 진공이다. 일종의 어린이 과학도구 같은 모습인데, 한참을 가지고 놀던(한 130억년 정도?) '그 존재'가 '에잇, 이번 우주도 글렀어!' 하며 유리 벽을 제거해 두 우주를 충돌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마치 Ctrl + N을 누른 것처럼 새 캔버스가 나타나는거지. 일일이 부수고 치우고 하기엔 먼지도 날리고 어지간히 손이 가는 일이니까. 어쩌면 이 우주의 끝에는 일종의 버전 정보 같은 게 적혀있을지도 모른다.


반물질로 시작해 엉뚱한 곳으로 빠져버렸지만 이게 또 과학책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우주는 너무 광활해서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책으로 돌아와 중요한 얘기를 몇가지 하자면, <반물질>은 그렇게 친절한 책이 아니다. SF적 지적호기심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설명이 하드코어하다. 흥미진진한 우주 이야기가 친절한 단어와 방법으로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간 5페이지도 가지 못하고 던져버릴 것이다. 다행인건 번역이 꽤 괜찮다. 이 말은 다소 어폐가 느껴질 수도 있는데, 문장이 뚝뚝 끊어지며 흐름을 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전문 서적의 경우 원저자의 뉘앙스를 살리려 노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단순 무식하게 끊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아예 독해가 되지 않는 것보다는, 그래도 읽을 수는 있는 게 더 나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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