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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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전 남편과 전 처를 가진 사람이 부모를 모두 가진 사람보다 많아 보이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콜이나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것 같다. 소설과 드라마 영화만 보면 그렇다. 그들에게 이것은 '노멀'인가?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나의 작은 무법자>의 주인공은 더치스와 로빈, 일명 래들리 가족이다. 로빈은 아주 어리고 래들리는 우리 나이로 치면 중2 정도로 보인다. 둘은 남매다. 더치스가 누나, 로빈이 동생. 더치스는 상당한 문제아다. 머더 퍼커를 입에 달고 사는 데다 온갖 곳에 시비를 털고 자기 엄마의 남자 친구가 될 것 같은 사람의 술집에 불을 지르기까지 한다. 당장 소년원에 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반전은 이 작은 무법자가 가족을 아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이 문제아의 발작 버튼은 가족이다. 누구든 자기 가족을 건드리면 소녀는 언제든 악마로 변한다.


래들리 가는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오자크>에 나오는 랭모어 가족과 많이 닮았다. 더치스 래들리는 아빠가 없고 루스 랭모어는 엄마가 없다. 랭모어는 호숫가에 살고 래들리는 해변에 산다. 래들리는 운전을 못하고 랭모어는 한다. 루스는 학교를 안 다닌 지 한참 됐지만 더치스는 그래도 아직 학교는 다닌다. 더치스가 돌보는 건 자신의 친동생이고 루스는 사촌이다. 루스는 랭모어 가를 위해 멕시코 카르텔의 돈세탁을 돕고 더치스는 래들리 가를 위해 클럽에 불을 지른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우나, 둘 다 심도 있게 바라본 바, 루스에 비해 더치스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무법자라고 칭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루스라면 그런 헛짓거리 대신 상대방의 대가리에 총을 겨눴을 것이다.


아무튼 이 나이브한 무법자 덕분에 가족은 점점 더 진창으로 빠져든다. 제발 정신 차리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런 말이 통할 거 같았으면 진작에 이야기는 끝났겠지. 엄마는 알콜중독자에 아빠는 누군지조차 모르며 돌봐줄 친척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식당에서 케첩을 훔쳐야 할 정도니 열심히 살라는 말이 귀에 찰지 모르겠다.


래들리가의 비극은 래들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이 죽거나 파멸하거나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끝이 난다. 그래도 이 결말을 해피엔딩이라 부를 수 있으니, 이 소설이 얼마나 우중충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보다는 속도가 좀 더 아쉬운 소설이었다. 분량을 100페이지만 줄여줬다면 누가 진범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트릭도 훨씬 잘 먹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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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관찰자를 위한 가이드 - 경이롭고 유쾌한 파동의 과학 관찰자 시리즈
개빈 프레터피니 지음, 홍한결 옮김 / 김영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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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관찰자라는 문장을 봤을 때, 진정 나를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아닌 동작들을 끝도 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모습이나,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이 조용히 움직이는 모양. 그런 것들에는 시간을 녹이는 힘이 있다.


괜한 기대를 할까 말해두겠다. 이 책은 파도가 아니라 파동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 교양서와 수필 사이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데 과학에 팔 할 이상의 힘을 주고 있다. 갑자기 파도가 차갑게 느껴졌나? 이 엄청난 배신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파도라는 현상의 껍질을 벗겨 그 뒤에 숨은 힘의 존재를 꺼내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접근은 늘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걸 돕는다.


우리는 파동 자체를 지각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감각이 받아들이는 건 파동이 이동하는 매질의 변화다. 파동이 바다를 선택하면 파도가, 공기를 선택하면 음악이 된다. 그런 면에서 파동은 서로 호환이 가능하다. 동해 바다로 밀려오는 파도의 주파수가 동일한 리듬으로 공기를 통과하면 어떤 소리가 들릴까? 그것은 파도가 바위에 맞아 부서지는 것과는 또 다를 것이다.


아! 생각해 보니 매질이 없어도 볼 수 있는 파동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빛이다. 인간이 빛을 파동으로 이해한 역사는 아주 먼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옛날에 빛의 본질을 이해했다는 게 참 놀라워 소름이 돋는데, 그래도 이들에게는 약간 귀여운 데가 있었다. 바로 매질이 없어도 빛이 이동할 수 있다는 건 몰라 에테르라는, 빛의 전용 도로를 하나 가정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우주에는 붕괴해야만 존재하는 파동도 있다. 바로 슈뢰딩거의 파동 함수. 현실은 여러 개의 파동으로 중첩되어 있다가 관찰자가 마주하는 순간,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야겠다고, 울리는 알림을 끄며 눈을 떠야겠다고 결정한 순간 모든 가능성은(파동) 붕괴하고 오직 하나의 파동만이 드러난다. 우리는 그걸 현실이라 부른다.


어떤 파동은 우리 삶에 중요한 흔적을 남기고 어떤 것들은 고속도로를 스쳐 지나가는 배경처럼 조용히 흘러간다. 때로는 그 흐름을 거꾸로 탈 방법을 찾아 남은 밤을 뒤척이기도 한다. 파도 관찰은 파동을 보는 것이고, 결국엔 산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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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 사건지평선 너머의 닿을 수 없는 세계
브라이언 콕스.제프 포셔 지음, 박병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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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행복했다. 이렇게 쉬운 블랙홀 책이 있다니. 펜로즈 다이어그램을 만나면서부터 이 행복은 산산조각 났고 그것이 자전하는 블랙홀과 만나 최대로 확장되면서 내 이해력은 특이점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의 아주 작은 단편, 그것도 핵심과는 아주 먼 이야기로 변죽을 올릴 수밖에 없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블랙홀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현대 물리학의 소산처럼 느껴지지만 이 개념은 1783년에 영국의 목사이자 과학자인 존 미셸이 최초로 떠올렸다. 1798년에는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도 돌멩이를 던지면 다시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빛 까지도 추락할 정도의 강력한 중력을 가진 천체'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블랙홀의 존재를 가장 격렬히 부정한 사람은 당연 아인슈타인이었다. 물리학계는 1905년을 '위대한 해' 라틴어로는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라고 부르는데 당시 26세의 스위스 특허청 직원이었던 아인슈타인이 '광양자 가설'과 '브라운 운동 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과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a.k.a E=MC스퀘어)'라는 4편의 논문을 발표해 그때까지 '물리학'이라 불리던 모든 이론 체계를 '고전 물리학'으로 바꾼 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인슈타인이 머지않아 퇴물 취급을 받은 이유는 그가 자신이 활짝 열어젖힌 세계가 뿜어내는 이론적 결과물들을 모두 부정했기 때문이다. 슈바르츠실트는 블랙홀을 발명한 게 아니었다. 그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논문에 적은 방정식을 풀어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블랙홀을 부정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유일한 블랙홀 혐오자는 아니었다. 학계는 두 파로 나뉘어 맹렬히 싸웠고 이 전쟁을 끝낸 건 인류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능력을 쥐어준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였다. 이후 우리는 연료를 소진한 별이 내부의 압력이 사라짐에 따라 자체 중력에 의해 붕괴되어 블랙홀이 만들어진다는 걸 당연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됐다.


1973년 스티븐 호킹은 조지 엘리스와 공동 집필한 <시공간의 거시적 구조>에서 '우리의 우주는 아득한 과거에 특이점에서 시작됐다.'라고 썼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특이점은 모든 걸 빨아들여 무로 돌리는 시간의 끝 아닌가? 그곳에선 새 우주가 탄생하는 게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나? 나는 이 해답을 카를로 로벨리의 <화이트홀>에서 얻었는데 그때의 전율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많은 천재들이 블랙홀을 부정한 이유는 특이점이 모든 이론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블랙홀 안에서 시간은 뒤죽박죽 섞이고 현실은 환상과 자리를 바꾼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 우주의 절대 반지 또한 여러 개의 반지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때로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황당한 과학자들의 낙관과 긍정이 이해된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하는 이유는 창조주의 섭리와 기적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 아직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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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 하다 앤솔러지 4
김엄지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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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의 <사송>은 미지근해진 연애를 얘기한다. 내게 소설가들은 죄다 INFP에 장기 연애를 할 거 같은 선입견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연인이 비슷한 인상이다. 장기 연애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이미 죽어버리 관계를 한쪽에 치워두고 애써 외면하는 시기가 온다는 걸. 이러니 저러니 핑계를 대 보지만 사실은 끝난 것이다. 이걸 다잡아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 <사송>의 남자도 비슷하다. 그는 이야기의 끝에서 알듯 모를듯한 결의를 다지는데 그건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확실한 끝과 관계의 재발견. 할 수만 있다면 소설 속에 들어가 정신이 번쩍 들도록 전자를 소리치고 싶다. 떠나야 해. 새로운 기회를 찾아. 꺼져버린 사랑은 다시 붙일 수 없어.


이 책을 읽게 된 건 사실 백온유의 <나의 살던 고향은> 때문이었다. 덫에 걸려 발가락이 잘린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에 내려온 여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놓칠 수 있을까? 예상했던 대로 이 소설은 서늘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기괴하기까지 하다. 영지는 똑똑하다고 소문난 여자였지만 고등학생 때 불의의 사고를 저질러 쫓기듯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다. 도망쳐온 서울에서도 당연히 안식을 찾을 수는 없었다. 왜? 회사라는 곳을 다녔기 때문이다. 영지는 자기 어머니를 덫으로 해친 산주와 맞서 싸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자신이 그 싸움에서 얼마나 싱겁게 패배할지를 바로 알아차린다. 그 순간 영지는 산주의 소름 끼치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음을 놓을 곳이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모든 걸 파괴하는 것. 잿더미 위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자기 자리를 다시 찾아야 하니까.


서이재의 <폭음이 들려오면>은 그나마 가장 희망적인 소설이다. 며칠간 가출한 조카를 돌보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기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을 그린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요즘에는 이런 고민도 굉장히 드물지 않은가 싶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돈벼락이나 맞을 생각뿐인데, 어디서 내면의 소리가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 소설이 가장 희망적인 것이다. 희망은 현실과 가장 먼 것이니까.


김혜진의 <하루치의 말>은 다음의 문장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그러면서 다시금 말을 간직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매일 밤, 차갑고 딱딱한 마음을 파서 하루치의 말을 묻는 일. 조금씩 더 깊이 파고, 오래 파는 행위에 단련되는 일. 말들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하게 잠그는 일. 그러니까 안전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영위하는 현명한 사람들이 매일 되풀이하는 일들. (p.64)


<듣다>에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영위하기 위해 매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 '되풀이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되풀이하려는 사람'이라고 고쳐 써야 할 것이다. 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는 않는. 그래서 늘 외롭고 고독한, 질릴 정도로 짜증 나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는, 바로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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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김훈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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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이 늙었다. 많이 늙었다. 이 늙은 소설가는 소설 쓰기라는 고된 밥벌이를 떠나 잠시 허송세월하는 중인 것 같다. 일산 호수 공원에 자주 나가 철새들을 구경하고 눈이 내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산에 오르기도 한다. 최근엔 그 산마저 끊었다는데, 늙음이란 모든 뜨거웠던 것들과의 안녕이란 생각이 든다. 들뜨고 성말랐던 마음은 차갑게 굳어 아래로 내려앉는다. 끝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고, 세상을 제대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다. 태풍과 싸우는 중일 때는 그 밑이 얼마나 고요한지 모른다. 싸움에 지고 나서야, 물속에 가라앉고 나서야, 그것이 패배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저 보는 곳을 달리 한 것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김훈은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우는 여동생들을 향해 울음을 그치라며 으르렁대던 사람이다. 요망하다고 했는지, 요사스럽다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1948년 생이니 옛날 사람이라 볼 수 있겠지만 김훈의 언어는 40년이 아니라 30년, 20년대까지 거슬러 오르는 옛 됨이 있다. 나는 그 옛 됨이 주는 새로움을 좋아했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을, 김훈은 했다.


심장이 안 좋아 병원을 들락거린다고 한다. 술도 마시지 못하고, 심지어 혼수상태에 빠졌던 적도 있다고 하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걸 느낀다. 장편소설 1개 정도가 남았을까? 여의치 않으면 이런 산문 한 두 개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새로운 글은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서 했던 연설, 강의, 썼던 글을 모아놓은 정도.


아직도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쓰는 김훈이 간다고 생각하면 아쉽고 아깝다. 김훈이 좋은 소설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 유일한 소설가였다. 글로 밥을 버는 무서움을 이해하고, 어느 쪽이냐 묻는 말에 제 가는 길로 대답하는 사람. 김훈이 마지막에 가게 될 그곳은 세상을 뒤흔드는 요망한 말들이 없는 곳이다.


그러니 가는 것을 너무 슬퍼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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