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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는 왜 실패했는가 -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대분석
노구치 유키오 지음, 김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평점 :
잃어버린 10년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봤다. 한국인이라면 그 몰락에 야릇한 쾌감을 느껴 더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실패를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플라자 합의와 엔고, 공포스러운 자산 가격의 상승, 도쿄 땅을 모두 팔면 미국을 몇 번이나 살 수 있었다는 꿈같은 이야기들. 잃어버린 10년은 단순한 가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겪게 될 미래일 수도 있다. 안 그래도 미쳤다고 했던 부동산 가격이 전고점을 뚫어버린 지 오래고 박스피라 조롱받던 주가지수가 6,000을 넘어선 게 잃어버린 10년이 겪은 버블의 전조는 아닐까?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철저히 일본을 따라 했기 때문에 병폐도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헤이세이의 실패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
작가가 말하는 제1 원인은 산업 구조 개편의 실패다. 영국과 미국, 세계를 지배했던 초 강대국의 흥망성쇠는 제조업이 주인공이었다. 제조업으로 흥했던 그들은 결국 제조업으로 망했다. 높아진 임금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일본 같은 신흥 산업국에게 기술면에서도 추격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때 영국은 금융이라는 해답을 찾았고 미국은 금융에 IT 서비스를 더해 선두를 지킬 수 있었다. 냉전이 끝나고 Made in China가 폭격을 시작하자 제조업의 저주가 일본을 덮쳐왔다. 긴급한 국가 재난 상황에서도 매뉴얼을 먼저 찾아보는 일본인들은 정말 어울리게도 끝까지 제조업에 국운을 걸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가 한 일은 환율 개입을 통한 엔저와 초저금리 정책이다. 엔저는 외국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의 공산품을 가성비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러나 엔저는 두 가지 문제를 끌고 들어온다. 하나는 매출 증가가 상품 경쟁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 노력을 안 해도 매출이 증가한다면 연구 개발 의욕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이 가난해진다는 점이다. 엔화로 살 수 있는 물건과 서비스가 낮아진 엔화의 가치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는 소비 저하를 불러일으켜 경제에 장기적인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초저금리 정책은 보통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조달 비용이 싸지니 과감하게 돈을 빌려 자산을 매입하거나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일을 벌일 의욕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면 문턱이 낮아진다 한들 넘어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제조업 샌드위치 론은 90년대부터 대한민국에도 제기되던 문제였다. 중국에는 따라 잡히는데 선진국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것. 이 문제가 30년 넘게 지속되는데도 한국 경제는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완전히 손을 놓아버린 조선은 멸망 직전까지 갔다 부활의 시동을 걸었고 메모리 반도체는 전 우주에서 경쟁자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디스플레이는 중국에 넘겨줬지만 대신 2차 전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유래없는 전쟁의 도래로 방산 또한 새로운 기둥이 되고 있다.
일본이 여전히 반도체 일인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아마 튼튼한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역량과 함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첨단 제조업의 위치를 구축했을 것이다. 삼성전자, 하이닉스, ASML이 한 나라에 존재하는 건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영국은 금융으로 성공했음에도 세계 경제의 주도권에서 멀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미국은 자신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제조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단순화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좀 아쉽다. 대해부니 뭐니 부재를 달았지만 분석의 심도가 깊진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위기는 한 두 개가 원인일 수 없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첨단 제조업의 붕괴, 늦은 IT 혁신, 고령화, 고착화된 정치 등등. 변화가 쉽게 받아들여지고 그 보상이 충분하다면 사람들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다양한 행위를 하게 된다. 80년대 일본은 자신이 세계의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야망이 좌절됐을 때 그들은 새로운 꿈을 찾았어야 했다. 현실이 언제나 진창이라면, 나에게 지금 꿈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한국이 경계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다. 뭘 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쌓여 신념이 되는 것. 대한민국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기로를 넘어 이미 방향을 정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