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미래 - 편혜영 짧은소설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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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여왕이 침묵을 끝냈다. 11개의 짧은 소설과 함께, 간지에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라고 적었다. 뻔뻔하다 말할 수는 있겠지만 맞는 말이다. 이 일을 관둘 게 아니라면 결국엔 다시 일어나 걸어야 한다. 편혜영은 표절이라는 멍에를 지고 평생을 걸을 것이다. 그 실수와 반성과 회복은 계속의 과정이 될 것이다.


국내에서 끔찍과 섬뜩으로 줄을 세우면 편혜영을 따를 자가 없다. 문체도 문체거니와 이야기 자체가 싸하다. 밝은 세상만을 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문이다. 사람들은 '그로테스크'라 부르는데 나는 '리얼리즘'이라 말하고 싶다. 편혜영의 소설은 리얼하다. 그런 면에서는 의외로 김애란과 닮았다. 둘이 친하다는 소문이 과연 그럴법하다. 둘 다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뜨거운 덩어리가 현실에 남기는 그림자를 가져다 이야기를 짓는데 발라드로 치면 김애란이 김동률이고 편혜영은 이소라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면 아프고 죽을 것 같아도 '다시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편혜영은 평생 어둠에 처박혀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공포는 옷이고, 때로는 피부 같다.


그런 면에서 <어른의 미래>는 귀엽다. 스티븐 킹의 단편들, 혹은 <궁금한 이야기 Y>, 조금 더 표현하면 <실화탐사대>까지도 나아간다. 마음의 부담을 벗고 가볍게 써나간 것 같다. 그래서 읽기 즐거웠고, 또 반가웠다. 똑같이 인상을 쓰고 깊이 들어와 버리면 좀 뻔뻔해 보일 뻔했는데, 일종의 전환점 같기도 하고, 예열 같기도 하고, 준비 운동이랄까? 그녀가 그녀의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알린 복귀 소식으로 상당히 깔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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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이후의 중국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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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정치와 경제가 한 몸인 나라다. 이 거대하고 야만적인 독재 국가를 이해하려면 이 점을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하지만 좀 더 간단한 도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딱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공산당.


정치와 경제가 한 몸인 중국에서 정치는 공산당으로만 구성되므로 중국은 곧 공산당, 공산당은 중국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중국의 현대사를 밝히는 <마오 이후의 중국>은 사실상 인민의 역사가 아닌 공산당의 역사를 기술한다. 마오쩌둥, 화궈펑,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한 세기에 이르는 공산당의 역사는 앞서 언급한 이 인물들의 개인사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집단 지도 체제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최고 권력자 1인과 그 측근들의 권력 독점이 공산당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 지도자들은, 성향과 출신은 조금 다를지언정 당이 추구하는 최우선적 가치만큼은 줄곧 유지해 왔다. 그것은 바로 일관된 거짓말, 일관된 시민 탄압, 일관된 독재다. 나는 늘 궁금했다. 십억이 넘는 중국 인민들은 왜 한 줌도 되지 않는 공산당의 독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가? 그들의 마지막 저항은 1989년 6월 4일이었던 것 같다. 천안문 사태로 불리는 이 시위는 몇십만에 이르는 군대의 투입과 총격으로 무자비하게 진압됐고 이후 중국은 대규모 시위가 불가능한 불구가 됐다.


중국 공산당의 장점은 역사를 공부한다는 점이다. 공산당은 80년에 광주를 짓밟았음에도 87년의 직선제 개헌을 막지 못한 대한민국을 철저히 분석한 것이 틀림없다. 중국 공산당은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시민운동의 붕괴를 원했다. 그들은 더 높은 강도로 인권을 탄압했고 중국의 누런 땅을 다시는 자유가 뿌리내릴 수 없는 불모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가 바로 시진핑의 3 연임이다.


시진핑의 '공동부유'가 실상은 민간 기업을 탄압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는 건 모두가 알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 국가 내에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는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민간 기업을 잡아 죽이기로 결심했다. 목숨을 담보 잡힌 경영자들은 결국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당의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구 사회는 중국에 경제의 자유를 심으면 정치의 자유가 뒤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의 공장으로 일해온 중국은 막대한 달러를 축적하고 선진국의 기술을 훔치고 저개발 국가를 약탈해 얻은 이득을 시민을 탄압하는 데 이용해 왔다. 환경 규제도 노동법도 준수할 필요 없는 중국은 서구의 기업들에게 낙원이었다. 이제 와서 난리를 치지만 실상 전 세계는 중국의 범죄를 방조한 공범이라고 볼 수 있다.


덩샤오핑은 공산당을 향해 늘 '겸손하고 때를 기다리라'라고 했는데 현대의 공산당은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기점으로 중국은 서구의 정치, 경제 제도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단정했다. 강력한 환율 통제와 무한에 가까운 대출 제공으로 그 누구보다 빠르게 2008년의 경제 위기를 돌파했다고 자칭한 중국. 그러나 인위적인 경기 부양책은 늘 거품을 만들기 마련이고 막대한 시민의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정보 통제로 이 사실을 가리고 폭력으로 불만을 잠재운다. 그럼에도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평양의 상류층만 통제하는 것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중국 공산당도 사회를 통제하는 핵심계층을 파악하고 이들을 달래는 정책을 정교하게 설계한다. 여기에 필요한 돈은 농촌 인구나 취약 계층에 부과하고, 국내의 강제 노동 수용소, 저개발 독재 국가와 결탁한 자원 수탈, 홍콩, 대만 같은 민주 사회를 압박해 얻어낸다. 중국 공산당은 전반적으로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등장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을 닮아있다. 그들은 확실히 역사에 정통하다.


지금 중국은 상당한 위기다. 거품으로 연명하던 부동산 시장이 붕괴하고 소득 감소로 인해 내수 시장은 성장이 더디고 외국인의 투자도 예전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중국의 공장들에게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라 요구한다. 몇몇 기업은 벌써 베트남 등으로 주요 생산기지를 옮긴 상태다. 미국의 첨단 기술은 더 이상 중국에 제공되지 않는다.


정보를 독점해 세계를 통제하겠다는 계획은 역사상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정보의 양이 그 처리 기술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AI를 필두로 한 기술의 발전은 이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지금은 미국의 방해로 그 속도가 주춤했지만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데이터 활용, 광범위한 간첩 행위에 능통한 중국이 대만이라는 세계 최대, 최고의 반도체 생산 공장까지 차지하면 중국은 더 이상 옛날의 중국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정말 독재가 무궁한 우주 역사상 전무후무한 국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을 러시아가 따라 하지 않을까? 인도나 브라질은?


악행은 윤리와 도덕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이 물질적 이득, 민족, 애국심과 연관되어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의 눈에는 중국의 방식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내로남불은 인간의 본성이다. 중국이라는 존재는 내로남불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명분이 될 수 있다. 주저하는 민주 국가의 지도자에게 누군가 속삭인다.


'이 싸움에서 중국에게 지고 싶습니까? 당신은 중국에게 패배한 첫 번째 지도자로 기록되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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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은 말한다
필리프 복소 지음, 최정수 옮김 / 민음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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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삶을 유추하는 건 멋진 일이다. 죽음이 안타깝긴 하지만,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경우도 많으니 이렇게 저렇게 더하고 빼볼 여지가 있다.


법의학이 대중의 눈에 들어온 데는 단연코 드라마의 힘이 컸다. 그 대장은 뭐니 뭐니 해도 제리 뽈록 하이머의 <CSI>다. CSI는 발음이 시원시원하고 입에 잘 붙어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을 것 같지만 풀어보면 Crime Scene Investigation에 불과하다. 번역하면 범죄 현장 조사. 허무하리만치 군더더기가 없는 말이다.


당연하지만 드라마 <CSI>와 실제 CSI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 세계에서는 터무니없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 반대? 예컨대 드라마에서는 절대 그리지 않을 황당한 사건이 현실 세계에서는 버젓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현실은 원래 이야기보다 논리가 부족하고 해괴망측한 법이다. 현실은 그 자체가 존재의 근거이므로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것이다.


<죽은 자들은 말한다>는 후자를 읽는 재미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절대 나올 리 없는 에피소드를 듣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살의 성공률은 의외로 낮다고 한다. 준비 부족, 생에 대한 본능적 집착 등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래서 자살에 성공하는 사람은 그 짓을 여러 번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오랜 기간에 걸쳐 시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루, 몇 시간, 몇 분 동안 수차례 시도한다는 말이다. 목을 맸는데 죽지 않고 눈을 떴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에게 그 짓을 다시 시도할 용기가 남아있을까? 심지어 총을 쐈는데도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은 죽기 위해 자신의 몸에 여러 발의 총알을 꽂아 넣어야 했다. 맨 정신으로, 고도로 집중하면서, 이번에는 반드시 죽어야 해,라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솔직히 이 책을 아주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놀라운 이야기 Y>나 <사건반장>, <세상에 이런 일이> 정도의 놀람과 흥미를 담고 있다. 물론 이런 글을 쓰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피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간 상처를 보며 형사가 말했다.


- 총상일까요?

- 현장에서 수거한 탄피들이 있었나요?

- 없었습니다.

- 몸 안에 박혀 있던 탄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검의는 시체를 돌려 형사에게 등을 보여줬다. 잘생긴 경주마의 엉덩이처럼 매끈한 모습이었다.


총을 쐈다면 범인은 정말로 깔끔한 놈이다. 현장에 떨어진 탄피를 모조리 수거하고 죽은 놈의 살 속까지 쑤셔 탄두를 챙긴 셈이니까. 살해 도구는 총이 아니었다. 형사의 머릿속엔 문득 그녀의 집에 있던 얼음송곳이 떠올랐다.


그건 그렇고, 소설 쓰기는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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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양산숙 - 역사가 숨긴 충격적인 진실
양성현 지음 / 매거진U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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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놀라울 정도로 어리석은 왕이었다. '그' 이순신을 두 번이나 파직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선조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이순신의 모든 업적이 날조라고 가정해야 한다. 완전히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건 이 책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다.


<유성룡 양산숙>은 유성룡의 <징비록>을 순도 높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서애 유성룡, 몰아치는 당쟁과 왜란의 와중에도 조정의 요직을 두루 겸직한 남자. 외교, 국방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어리석은 왕 선조 밑에서 고군분투한 신하. 이순신을 천거한 안목의 사나이. 그는 정말 거짓말로 무장한 간신이었을까?


당시 조선은 이른바 붕당 정치의 씨앗이 맹렬히 뿌리를 내리던 혼돈의 시대였다. 이기가 하나냐 둘이냐를 놓고 성리학이 갈렸고 이 중 어디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임진왜란 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두 신하가 완전히 다른 의견을 내놓아 양병에 실패, 결국 그 난리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당쟁의 결과물이었다. 한쪽은 다른 쪽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도 무조건 반대를 해야 한다. 오히려 일리가 있을수록 반대는 더 심해진다. 그 일리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열쇠기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확실히 동인이 우세했다. 그 수장은 유성룡과 퇴계 이황으로 볼 수 있는데, 유성룡이 현실 정치에 발을 디딘 행동파 간신이었다면 이황은 그들에게 학문적 토대를 제공하는 철학적 간신이었다. 유성룡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퇴계 이황이 율곡 이이(서인) 보다 우세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임금의 안색을 더 잘 살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학문적으로는 동아시아에 어깨를 나란히 할 인물이 전무하고 오랫동안 관료로 일하며 실무에 숱한 손때까지 묻힌 당대의 먼치킨 율곡마저 한 손으로 지그시 눌러 제압할만한 힘이었다.


이 책은 유성룡을 완전히 부정하므로 정당한 평가를 위해 확실한 사실만 나열해 보자. 우선 유성룡이 왜란을 맞아 자기 식구를 먼저 피난 보낸 건 사실이다. 유성룡은 자신의 친형을 파직시켜 어머니를 돌볼 수 있게 해 달라며 선조에게 울며 애원했다. 그리고 난 중에 그를 다시 피난지의 수령으로 임명한 뒤 면세권까지 부여했다. 그는 김시민의 진주대첩으로 큰 상처를 입은 일본군이 복수를 위해 총 집결한 2차 진주성 싸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체찰사로 왕을 대신한 군통수권자였음에도 말이다. 이것을 더 큰 승리를 위한 전략적 판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남은 조선의 전부였고 진주는 그 호남의 문이었다. 진주를 내준다는 건 살 대신 뼈를 주는 것이었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모두 서인계 인물이었다는 것도 정황의 힘을 더한다. 원군을 보내기는커녕 군대를 더 뒤로 물려 안전을 도모한 권율과 홍의장군 곽재우도 모두 동인이었다.


유성룡은 다른 의미에서 확실히 전략적이었다. 2차 진주성 싸움은 후퇴하던 일본군의 분풀이였다. 유성룡은 이 싸움이 끝에 다다랐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명군은 수륙 양면으로 일본을 압박했고 그들이 동래(부산)로 후퇴해 장기전을 각오한다면 기꺼이 그 땅을 내어줄 준비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성룡에게 중요한 건 결국 전후의 정국이다. 정쟁 없이도 서인계 인사를 한 번에 몰아 죽일 수 있다면, 그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 있겠는가?


<유성룡 양산숙>은 개인 출판으로 보인다. 저자는 양성현이란 분인데, 공교롭게도 이 책에 영웅으로 등장하는 양산숙과 성이 같다. 어쩌면 저자 본인이 양산숙의 후손일 수도 있겠다. 오탈자도 많고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내용이기에 모든 걸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저자가 참고한 책들이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이고 그 출처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왕조의 기록 또한 결국 사관의 사관이 개입할 여지가 충분한 것이지만, 시비를 가르는데 이만한 구심점도 없는 게 사실이다.


논란을 떠나 다시 한번 기록의 힘을 느껴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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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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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이물감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가장 탁월한 작가. 나는 김애란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


<안녕이라 그랬어>는 7편의 소설을 담았다. 주제는 자산이다. 구체적으로는 부동산이다. 김애란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두 단어의 조합이 얼마나 낯선지 느낄 것이다. 우주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도 김애란이 네이버 부동산을 뒤지고 호갱노노의 주민 댓글을 찾아보는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작가가 감히 부동산을 주제로 소설을 썼다. 결국은 관찰력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서 멈췄다면 이 작가는 사회학자가 됐을 것이다. 팔자가 사나운 김애란은 예민한 관찰력과 함께 쓰기의 저주를 받았고, 소설가라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 그녀의 부동산에 축복이 있기를.


자산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로 변해가는 세상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는 막을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흔히 중간이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사회의 모든 분야는 양극화됐고 우리가 기본적으로 평등하게 누릴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장 뼈아픈 배신을 하는 중이다. 주거나 의복 교육, 섭식에 이르기까지. 양극화는 양쪽에 속한 사람들에게 각각 부스터를 달아주는 데 그 방향은 당연히 반대다. 잘 먹어야 잘 사는 법이거늘, 잘 살아야 잘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는 벌어지는 속도를 막을 방법이 없다. 중간은 그렇게 완전히 찢어졌다. 당신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대한민국은 그것을 부동산이 결정했다.


같은 나이에 비슷한 직장을 다니며 비슷하게 살았는데 눈을 뜨고 보니 한 사람은 전세를 전전하고 다른 사람은 수십억짜리 콘크리트 상자를 갖게 됐다.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싶어도 막상 전세 만료일이 다가오면 그 설움이 차가워 온몸이 오그라든다. 어렵게 새집을 구해 이사를 마치고 나서도 불안은 씻기지 않는다. 제 때에 부동산을 사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하루하루 조금씩 추락한다. 부동산의 상승 속도를 월급의 다리로는 쫓아갈 수 없다. 그때 살걸. 무리를 해서라도 살 걸. 할 수 있는 건 후회뿐이지만 후회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마음을 갉아먹을 뿐이다.


추락한 중간계의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진통제는 스스로를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잘못된 건 세상이지 내가 아니다. 약효가 오래가지 않는 건 '대출 상상력'이나 '금융 감수성'이 필수 능력으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성실하고 정직했는데도 자산을 불리지 못했다면 그건 성실하고 정직한 게 아니라 멍청하고 무능한 것이다. 미쳐버린 세상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도덕적 우월감도 지인의 아파트가 수억이 올랐다는 이야기에 박살이 나고 만다. 세 번째 소설 <좋은 이웃>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공부방을 운영하는 '나'는 몸이 불편한 시우를 위해 적은 돈을 받고도 멀리 방문 교육을 간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부모는 시우를 돌볼 여력이 없는데 시우가 워낙 '나'를 따르는 탓에 사정사정을 한 것이다. 거리가 조금 되고, 방문까지 하는데도 나는 돈을 더 받지 않았다. 이것을 일종의 봉사로 여겼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 불쌍한 아이를 보살피는 일. 그러던 어느 날 시우의 어머니가 장사를 일찍 마치고 돌아와 나를 찾는다.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별로 비싸지도 않은 자신의 과외비를 낼 형편이 안 돼 그만해야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는 돈을 받지 않고도 이 일을 할 생각이었다. 시우는 불쌍한 아이니까. 어머니가 말한다.


'저희 요 앞 아파트로 이사하게 됐어요.'


요 앞의 아파트라면 아마 신축일 것이다.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잘 됐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은 휑하고 허전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 남편은 말한다.


'그야 당연히 이 집 계약할 때지.'


조금 무리해서라도 사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전세로 들어온 그 집. 이사를 준비하며 나는 오래된 책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낡은 책장을 넘겨보았다. 거기에는 이십여 년 전 남편이 연필로 밑줄을 그어놓은 문장이 보였다.


'저희들도 난쟁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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