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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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온유의 쇠맛을 보고 싶어 골랐는데 몽글몽글 따뜻하다. <유원>은 2019년에 제13회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받았는데 요즘 청소년들은 수준이 참 높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섬세한 소설을 이해하고 즐겼다는 얘기니까.


유원이라는 여고생이 주인공이고 그녀의 학창 생활이 주무대다. 유원은 특별한 아이인데, 그 언니가 아주 특별했기 때문이다. 유원의 이름도 언니가 지었다. 원할 원, 외자. 빨리 나오기를 너무 원해서 그렇게 지었다. 두 사람은 터울이 컸다.


윗 층의 할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 그 재가 유원의 집에 떨어진 게 화근이었다. 원이 언니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고 베란다에 한 가득이었다. 무식한 담뱃재는 그 교양을 씹어 삼키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집에는 언니와 둘 뿐. 여기는 아파트 11층. 언니는 똑똑한 사람. 자기는 살 수 없을 거라 판단. 원이는 아직 어리고 가벼우니까. 이불을 적신다. 그 안에 원이를 싼다. 꽁꽁. 창문을 열고 원이를 던진다. 원이는 살았다. 언니는 죽었다.


덤으로 얻은 삶. 원이는 좀처럼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 삶은 늙지도 않고 실수할 일도 없고 나쁜 짓을 저지를 수도 없는 영원히 빛나는 존재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영혼은 너무 눈부셔 원이의 삶을 가린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영광을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원이를 아는 모든 이들은 원이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원이가 아니라 그녀에게 삶을 주고 떠난 언니를 본다.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유아적 환상을 찰나로 스친 뒤 어른으로 멸렬하는 것이 인생인데, 그 짧은 순간조차 누리지 못한 고등학생의 영혼은 얼마나 약하고 불안한가.


소설은 안 그래도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마음이 무너지고 일어나고 무너지고 일어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눈빛만 닿아도 부러질 것 같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쌓아 지은 이야기. <유원>은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아슬아슬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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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착각
로버트 M. 새폴스키 지음, 양병찬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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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무지무지 어려운 책이지만 이해가 안 되는 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을 만큼 흥미롭다. 작가는 냉소적이고 지적으로 대단히 날카롭다. 이런 류의 인간은 비아냥과 조롱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싸가지가 없다고 말하고 개인적으로는 유머러스하다고 평가한다. 인식론, 인지 심리, 뇌과학, 신경망, 카오스 이론, 창발, 양자역학, 심지어 부의 불평등과 능력주의 신화까지 꺼내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게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 나는 뇌과학, 카오스 이론, 양자역학 따위를 좋아한다. 이 학문들은 전반적으로 보통의 인간이 상식이라 믿어온 것에 철퇴를 가하기 때문이다. 나는 싸가지가 없다는 평가를 자주 받는데 그 이유는 대개 누군가가 하는 말을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어서다. 많은 사람들이 강하게 믿을수록 내 마음은 반대로 간다. 이 태도는 본능적이다. 타고났다는 말.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타고 왔을까? 나는 나와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을 한 명 안다. 그것은 바로 내 아버지다.


이 책을 고른 결정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방목 자생을 강조하며 울타리 안에 가두기를 싫어했던 엄마 아빠의 양육 태도, 우연한 인스타그램 광고 노출과 서점 방문이 총체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다. 이 사이에 자유의지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납득하기 어렵다면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 떠올린 뒤 이렇게 써보라.


나는 자유의지로 성천 막국수를 좋아하기로 결정했다.


왜 성천 막국수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이런저런 이유를 댈 수는 있을 것이다. 말하면서도 느끼겠지만 그건 사후에 구성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사랑은 이유를 동반하지 않는다. 첫 젓가락을 뜨는 순간 그냥 알 수 있다. 나는 이 음식을 사랑하는구나. 그럼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음식을 좋아하기로 결정한 나의 자유의지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럼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 만약 서점에서 이 책을 집었을 때, 내가 나의 지적 편향을 비판하며 이런 류의 책을 그만 보겠다고 결정했다면, 이것을 자유의지라 부를 수 있을까? 확실히 자유의지는 무언가를 하려고 결정할 때 보다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에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 유전자의 힘을 인지하고 거부할 정도면 생물학 체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실체, 즉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는 인간을 자극을 투입하면 행동을 내놓는 생물학 기계로 정의한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저자의 주장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오직 나의 생각이니 주의하기 바란다. 자극을 처리하는 알고리즘은 앞서 얘기했든 유전자, 문화, 교육, 각종 경험과 우연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구성된다. 우리가 동일한 자극에도 다른 행동을 하는 이유는 첫째, 알고리즘이 확률을 기술하기 때문이고 둘째, 자극이 알고리즘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확률을 기술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나에게 A라는 자극을 투입하면 C라는 행동이 나올 확률이 60%, D는 25%, E는 15%라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 행동이 일관성을 보이는 이유는 특정 자극에 대한 주된 행동이 높은 확률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이 확률이 여러 개의 행동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변덕스럽다', '예측할 수 없다' 또는 '우유부단'하다고 부른다.


자극에 따른 행동의 피드백은 알고리즘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이 세상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존재인데 그 대상이 쉴 새 없이 변하므로 우리의 특정 행동이 항상 동일한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 점심 메뉴로 평양냉면을 고를 확률이 99%인 내가 그걸 먹고 심하게 체했다면 당분간 이 확률은 0%에 가깝게 떨어질 것이다. 이는 결코 나의 의지가 아니다. 경험에 맞춰 행동 양식을 바꾸는 건 아주 유용한 생존기제기 때문에 진화가 이걸 놓쳤을 리가 없다.


다시 이 책을 읽지 않기로 결정한 가정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서점을 방문하기 전 나의 싸가지 때문에 누군가와 심한 갈등을 겪었고 이런 삶에 염증을 느꼈다면 책을 선택하는 알고리즘도 영향을 받는다. 이 책을 거부한 순간에는 그것이 마치 나의 자유의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선택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했는지 곰곰이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생물학과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초월적 의지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인생을 돌이켜보면 변하기로 결심한 것보다 그냥 변한 경우가 더 많았다.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모든 것들, 목숨을 바칠 정도로 좋아했던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는 지금 내 마음 어디에 있을까? 나는 언제부터 그들을 좀 덜 좋아하기로 결정한 걸까? 혹시, 좀 더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을 접해야겠다는 내 자유의지의 힘일까? 살다 보면 매일 똑같이 하던 행동의 결과가 전혀 다르게 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은 여러 번을 읽어야 겨우 겨우 이해되고, 가까운 글자가 흐릿해지고, 분당 천타를 넘게 치던 손가락이 삼백타에 머문다. 우리의 신체는(특히 호르몬이) 변한다. 주변의 사람도, 환경도, 마음도.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시험을 제시한다. 이 시험에 통과하면 여러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나는 이 책을 읽고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명이다.

2. 억만장자 브라이언 존슨은 젊음을 되찾기로 결심한 뒤 실제로 노화를 늦추는 결과를 얻고 있다. 이것은 브라이언 존슨의 자유의지인가?

3.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일란성쌍둥이 중 하나는 변호사가 됐고 다른 한 명은 범죄자가 됐다. 유전자와 환경의 힘을 뛰어넘는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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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가
김진영 지음 / 반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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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가>는 장재현이 좋아할 것 같지만 그가 영화로 만들지는 않을 소설이다. 이야기가 별로라서가 아니라 '일제'라는 소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파묘>를 만들고도 반일 종족주의자 취급을 받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연달아 내놓으면 친일극우주의자들과의 전쟁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 샤머니즘이 없는 나라는 없겠지만 일본은 그 정도가 좀 달라 보인다. 물론 미디어의 영향이 상당하다는 건 인정한다. 아베노 세이메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음양사>라든가 클램프의 <X>, <도쿄 바빌론>, 주술을 모에화 한 <카드캡터 사쿠라>, 아쿠타미 게게의 <주술회전> 등등. 하지만 이런 창작물이 큰 인기를 얻는다는 건 그 땅을 지배하는 주술의 정서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여우가 뱀의 허리를 물었다'는 대사는 그래서 더 귀에 꽂힌다.


원혼은 어떤 한가? <링>, <주혼>, <착신아리>. 강렬한 이미지가 눈을 채운다. 일본의 원한은 그들이 가진 주술의 정서로 더 강화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원귀들은 축축한 가시를 몸 깊이 박아 넣은 것처럼 음침하고 서늘한 느낌이 있다. 한국의 처녀 귀신과는 대화할 의사가 있지만 사다코라면 글쎄, 도망가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일본 귀신이 군산 땅에 뿌리를 박았다. 이순신 때문에 발도 딛지 못했던 한을 풀듯 일제는 군산을 통해 전라도에서 생산한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군산은 착취의 본거지였고 군산에서 돈을 번 일본인들은 근사한 집을 짓고 살았다.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남겨진 이 건축물은 아직도 그 땅에 남아있다. 착취의 유산이 이제는 관광 자원이 됐다.


<여기서 나가>는 착취를 관광으로 바꾸는 조선인의 욕망을 씨앗 삼아 다시 이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일본 귀신과의 싸움을 그린다. 그들은 원혼이 추동하는 욕망을 쫓아 서로를 물어뜯다가 마침내 누가 원흉인지를 깨닫고는 퇴마를 거행한다. 너무 늦었나 싶지만, 모든 시작에 너무 늦은 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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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광고 카피 도감
오하림 지음 / 서교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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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안에 마음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점이 광고의 매력이다. 사실은 상업 자본주의의 천박한 선동꾼에 불과하지만, 역시 돈만큼 사람의 창의력을 자극하는 것은 없다. 광고는 마음을 흔드는 걸 넘어 전율을 강타할 때가 종종 있다. 완벽한 카피 하나가 완전한 문학 하나를 뛰어넘기도 한다.


카피라이터인 저자가 살면서 착실히 모아 온 카피가 이 책에 실렸다. 일본. 하이쿠의 전통을 이어가는 나라답게 촌철에 담긴 기지가 눈부시다. 나는 소설의 첫 문장을 만드는 취미가 있는데 이 카피를 읽으며 몇 개나 썼는지 모르겠다. 일상에 절여진 뇌를 깨끗이 닦아 돌려놨다. 자극은 언제나 옳다. 이런 식이라면, 중독으로 죽는다 한들 여한이 없다.


카피 하나에 작가의 이야기 하나. 뒤쪽은 사족에 가까워 과감히 건너뛰어도 괜찮다. 애쓴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가끔 괜찮은 알맹이가 나오기도 하니 이걸 놓치고 싶지 않다면 꼼꼼히 읽어도 좋다.


인상 깊었던 카피를 몇 개 적는다.


사랑이라든지, 용기라든지, 보이지 않는 것도 함께 타고 있다.

- JR큐슈(p. 36)


습관이 된 노력을, 실력이라 부른다.

- 입시 전문 학원 가와이(p.44)


별이 되어도, 달을 걷고 있을 거야.

- 마이클 잭슨 유품 전시회(p. 70)


사랑에 피의 연결이 필요없다는 것은 부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 특별양자제도(p. 96)


쉬지 않으면, 쉬게 된다.

- 라쿠텐 트래블(p. 108)


우리들은 훌륭한 과거가 될 수 있을까?

- 산토리(p. 120)


등을 밀어준 것은, 그때 도망가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 칼로리메이트(p. 284)


어려운 문제를 사랑하자.

- 혼다(p.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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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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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물리학에 따르면 이 세계를 존재하게 만드는 건 관측이다. 관측을 '보다'로만 한정하면 쓸데없는 형이상학이 끼어들 여지가 있으니 각자의 상상력을 총 동원해 그 범위를 넓혀보기 바란다.


관측하기 전까지 세계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우리가 만지고 느끼는, 이른바 물질세계는 관측하는 순간 그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에 대해 그저 대리석이 갖고 있는 형상을 끄집어낸 것뿐이라고 말했다. 대리석이라는 가능성의 덩어리가 피렌체인의 관측을 통해 피에타가 된 것이다.


새로운 책을 사서 손에 올려놓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미켈란젤로처럼, 내가 이 책이 가질 수 있는 이야기 중 하나를 꺼내준 건 아닐까? 첫 장을 펼치기 전까지 이야기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책장에 손을 올리고 그 책이 들려줄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귀담아듣는다. 이야기 앞에서 설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이야기의 파동 함수는 붕괴한다. 무한의 가짓수는 맹렬히 잘려나가고 두 번째 문장이 붙는 순간 붕괴는 가속도를 얻는다. 평범한 이야기는 한 단락을 넘기도 전에 결말이 좁혀진다. 뛰어난 이야기는 마지막 문장을 읽는 그 순간까지도 여러 가능성을 내놓는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문학도 양자적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는 정의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 책을 읽었다고 얘기하는 건 미친 소리일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존재했을, 존재할 모든 책들을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나아가면 책장 맨 앞에 쓰여 있는, 무슨 수를 써도 끌어내릴 수 없는 최고 존엄, 이른바 저자의 존재도 위태로워진다. 내가 읽은 <슬픔의 물리학>은 정말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쓴 게 맞을까? 이야기를 좀 더 작은 단위로 지속해서 환원하다 보면 결국 무의미한 소리,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가닿는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에 우리의 존재를 담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약속일 뿐이고, 그 무의미한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서 의미를 만들어낸 건 독자인 우리다.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가 도움을 준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우리가 뭔가를 캐낼 수 있도록 일련의 규칙에 따라 글자를 배열한 건 맞으니까. 하지만 마침표를 찍는 건 결국 우리다.


<슬픔의 물리학>을 읽으면 이 책의 줄거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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