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연대기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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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에게는 500명의 부인과 후궁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부인은 다섯 명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 째 부인 부르테 푸진은 모든 아내들 가운데 첫 째였으며 명망 높은 네 아들과 다섯 딸의 어머니였다. 네 아들의 이름은 주치, 차가다이, 우구데이, 톨루이였다.


톨루이는 가장 중요한 아들이었다. 막내였고, 몽골은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승계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톨루이에게는 뭉케와 바로 그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부케라는 아들이 있었다.


훌레구의 첫째 아들은 아바카였고 아바카의 첫째 아들은 아르군이었으며 아르군의 첫째 아들은 가잔이었다. 가잔 칸은 이슬람의 제왕이라 불리며 중동을 지배했다. 그는 재상 라시드 앗 딘을 시켜 몽골의 역사를 작성토록 명한다.


가잔 칸은 세계사를 남기기 위해 몽골사를 기록했다. 이 자신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몽골은 지구 영토의 대부분을 실제로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하지 못한 땅에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망할 때까지 라시드 앗딘은 집필을 완료하지 못했다. 그는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울제이투에게 그간의 작업을 헌정했고, 칸은 신속하게 집필을 완료할 것을 명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책이 <가잔 축복사>다.


책을 본 칸은 자신의 기특한 신하에게 세계의 주요한 민족들의 역사와 지리서를 덧붙이라고 명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 민족지>와 <세계 경역지>가 만들어졌다. 이 세 개의 책을 엮은 것이 <집사>이며 <몽골제국 연대기>는 그중 1부인 <가잔 축복사>를 편역한 책이다.


서양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몽골은 파괴신이었고 세계를 황폐화시킨 주범으로 묘사되었다. 칭기즈칸은 '신의 채찍'이라 불렸다. 본인들의 죄를 깨우쳐주기 위해 신이 보낸 이교의 사도로 간주한 것이다. 종교인들의 과대망상과 자기 합리화는 정말로 놀랍다. 채찍이라 부르는 악마가 통치하는 제국에서 재상도 하고, 군인도 하고, 장사도 하면서, 대대손손 삶을 이어가는 동안 그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졌던 걸까?


학살과 파괴는 전략적으로 행해졌다. 칭기즈칸의 부인이 500명이었던 이유는 그들의 수가 늘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의 속도는 점령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점령지마다 지킬 사람을 남기고 간다면 국경에서 만나는 새로운 적과의 대결에서 열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들은 항복하랄 때 말을 들으면 꽤 괜찮은 자비를 베풀었다. 끝까지 싸우고도 존속을 허락받은 건 '고려'가 유일했지 않나 싶다.


몽골을 학살의 신으로 보는 것만큼 큰 오해 중 하나는 만주, 중국, 몽골, 중동, 러시아, 소아시아(터키)를 아우르는 이 전무후무한 국가를 단일 제국으로 보려는 생각이다. 모든 땅은 칭기즈칸의 아들들이 지배했다. 이 말은 몽골제국이 중국 땅에 자리한 대 칸의 명령을 받들어 그가 파견한 관리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의미다. 각자가 지배한 영역을 '울루스'가 부르는데, 울루스 안에서도 여러 울루스가 존재했고 그들은 사실상 자치 비슷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자가 많다는 건 전쟁에 나갈 아들이 많다는 점에선 유리했지만 왕위를 두고 다툴 자들이 많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몽골제국의 역사는 반란의 연대기로 불러도 좋을 정도로 크고 작은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왕자들이 각자의 땅에서 각자의 칙령을 남발하는 바람에 대 칸은 주기적으로 주변을 청소하고 대 칸 외에는 아무도 마음대로 칙령을 내리지 말라는 칙령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말로 지배가 된다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대제국을 하나의 단일 국가로 유지하기엔 통신, 교통 등의 기술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무리 칸이 추상같아도, 말로 달려 몇 달은 걸리는 거리에 있으면 그 존재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가 지배한 민족의 반란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넓을 땅을 메우기에 몽골인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집사>의 주장과는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면이 있다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단적인 예로 이 '역사'를 쓰라 명한 것은 본진의 대 칸이 아니라 이란 땅을 지배했던 이슬람의 제왕 가잔 칸이었으니까. 그들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완전히 다른 땅에 살고 있어도 공유하는 민족의식은 강했을 것이다. 원래 권력투쟁은 같은 식구끼리 벌이는 것 아니었던가.


책에 등장하는 지명과 이름이 모두 몽골식이라(한자로 병기하지만) 읽기 어려운 점이 있다. 땅과 나라의 이름이 생소하다 보니 기존에 알고 있던 세계사, 세계 지리가 잘 연상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


칭기스 칸은 순티주이라는 큰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그리고 타인푸로 갔는데, 그곳에는 과수원과 정원이 많고 술도 풍부했다. (중략) 가을에 칭기스 칸이 몸소 후일리라는 도시로 갔다. 알탄 칸의 중요한 장군인 기우기 충시가 대군과 함께 그곳을 방어했지만, 전투 끝에 그를 격파하고 참치말이라는 협곡까지 추격했다. (p.118)


마치 이세계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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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햣켄 기담집 - 공포와 전율의 열다섯 가지 이야기
우치다 햣켄 지음, 김소운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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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유명세 탓에 나쓰메 소세키를 말랑말랑한 소설가로만 아는 경향이 있는데, 소세키의 걸작은 사실 환상 문학이라는 장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난 단 하나의 단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그 충격은 소세키의 모든 작품을 다 합쳐도 부족할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그 소설은 글로 닿을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한계는 오직 작가의 재능에 달린 것일 뿐, 글이라는 수단이 갖는 문제는 아니었다.


과거에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유명한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어야만 했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스승의 추천으로 등단한다. 나쓰메 소세키라 함은, 한 때 천 엔짜리 지폐에 인쇄될 정도로 일본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작가다. 얼마나 많은 문하생을 거느렸겠는가. 우치다 햣켄은 소세키의 문하생이었고, 환상 문학의 가지를 이어받는 사람이다.


이 소설들에는 분위기가 있다. 스승의 걸작에 미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스산하고 담담한, 잡내 없는 문장들은 독보적이다. 아주 이상한 상황과 간결한 기술 사이의 괴리가 불안과 기괴를 증폭시키는 것 같다. 부족한 재주를 끌어 모아 굳이 예를 들자면 이런 느낌.


달리던 전철이 서지 않고 몇 개나 역을 지나치는데 사람들은 태연이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훅 끼쳐 들어온 냄새에 코를 막고 말았다. 동물의 사체가 썩는 냄새에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일어나 자리를 옮기려는데 다른 칸으로 넘어가는 문 앞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땅바닥을 보고 서 있었다. 맨발이고, 손톱에는 붉은 때가 가득했다. 몸을 앞 뒤로 흔들며 주문인지 저주인지 모를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니 이런 얘기였다.


"저기요, 제 아이를 보셨나요?"


그녀는 눈, 코, 귀에서 검붉은 피를 쏟아내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녔다. 여자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화면을 응시했다. 여자가 내 앞에 오기 전 나는 전철에서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 역을 출발한 지 한참 된 전철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나는 다음 칸으로 옮겼다. 다시 다음 칸으로, 또 다음 칸으로. 나는 마지막 출입구 앞에 서서 전철이 서기만을 기다렸다. 여자는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거리를 줄이며 내게 다가왔다. 냄새가 점점 진해졌다.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가까웠다.


전철은 멈추는 걸 잊은 듯했다.


다 쓰고 보니, 햣켄의 글과는 영 분위기가 다르다. 그의 문장은 이렇게 요란하지 않다. 훨씬 은근하고, 섬세하다. 겉보기엔 휙휙 쓰는 듯해도, 역시 대가의 붓끝은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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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돼지 아작 YA 2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황희선 옮김 / 아작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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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페이지는 사랑받지 못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p.9)


괴상하게 짓눌린 돼지코가 문제였다. 의대생이 분만 중 코를 눌러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단순히 코가 들린 수준이 아니었다. 코털과 점막이 모두 보일 정도였으니까. 캐롤 페이지를 자라는 내내 '코범벅'이라 불렸다. 엄마는 출산 중 사망했다.


캐롤 페이지가 금수저였다면 성형수술을 고려했을 것이다. 과학 문명이 초고도로 발달해 우주를 원하는 만큼 여행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도 부의 불평등은 여전했고 캐롤은 가진 게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캐롤의 별에 출장온 운영자에게 '배정된' 여자였다.


그 운영자가 캐롤에게 해준 것을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기 캐롤은 국정 거주 구역에 체류권을 얻었고 기본적인 의료지원을 받았으며 고아 학교에 배정됐다. 캐롤의 강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명석, 부지런, 집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불릴만한 성장 환경이었지만 캐롤은 모든 일에서 상위 1%에 속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녀가 가진 능력 중 전문가라고 부를만한 영역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산술, 미적분, 벡터 수학, 금속학, 전자 공학, 컴퓨터 공학, 금속세정, 영양학, 천문학, 우주조리학, 간호학, 지압법, 27가지 기초 성애술, 각종 장치들의 수리법, 우주의학, 엔진 공학, 궤도 비행.


캐롤은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결국 일반 승무원 훈련 과정에 입교할 수 있었다. 양자적 도약이라 부를만한 성과였다.


그렇다고 코범벅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는 없었다. 인간 세상에선 여전히 외모가 중요했다. 물론 출신 성분의 문제도 있었지만, 캐롤은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같이 비행하는 승무원들이 가진 능력 모두를 가뿐히 압도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동료들은 캐롤을 무시하고 그녀의 인권을 유린하고, 정서적, 육체적 폭력을 가했다. 그 많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캐롤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고 우주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해다 바쳤다. 이 겁 많고 순종적인 동물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냉정한 돼지>는 200p도 안 되는 책이다. 캐롤의 짧은 성장사와 음모의 발현까지 빠르게 달린 뒤 후반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이 종장은 가히 '아름답다'라고 부를만하다. 캐롤이 인간 세상에서 받아야 했던 편견과 차별은 이 장면들 속에서 완전히 소멸한다.


우주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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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김원영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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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개인들로 이뤄진 공동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평등이고 무엇이 차별인지 정의해야 한다. 평등은 좋고 차별은 나쁘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럼 왜 지극히 차별적인 세상이 필요한 걸까? 인간은 각자가 가진 고유한 능력을 갈고닦아 다른 사람과는 차별적인 존재가 돼야 한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하루키나, 봉준호나, 엘론 머스크가 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차별적인 존재란, 내가 무엇이 돼야 할지를 스스로 정의하고, 그 모습에 다가가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평등은 무엇이 차별적인 존재인가를 정의하는 힘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보장하는 개념이다. 지체장애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러시아 국립 발레단의 무용수가 될 수 없다. 이 장애인의 무용이 일반적 춤이 가진 예술적 가치를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다는 이야기는, 현실을 박박 긁어 버린 뒤 낭만을 가득 채운 소년 만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이 대책 없이 낙관적인 이야기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장애인의 춤은 다르다. 맹목적인 비교와 경쟁에 익숙한 우리는 차이를 우열로 바꾸는데도 익숙하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의 무의식에 숨어, 은연중에 드러난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무용수가 무대를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공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춤에는 어떤 예술적 가치가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이걸 정말로 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춤을 돈 주고 관람할 가치가 있을까?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인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 당신이 나를 배려해 내 앞에서 발레를 추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온전히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발레를 잘 추는 '능력'으로 당신은 내가 모르는 세계에 접속하는 다양한 방법을 나에게 제안할 수 있다. 내게도 춤출 '힘'이 있음을 깨달은 지금 나는 발레를 추는 당신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데 좌절하지 않는다." (p.9)


탁월함이란 내가 잘하는 영역을 섬세하게 이해할 때 쏟아져 나오는 능력의 폭풍우다. 내게 춤출 '힘'이 있다는 믿음은 나를 탁월함의 경지로 올려놓고자 하는 동기이자 당신의 '힘'을 긍정하게 만드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힘을 믿으며 자신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할 방법을 고안한다.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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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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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후는 평범한 고등학교 교사였다. 부인과 별거를 위해 최근 다른 도시로 전근을 왔다. 고인 물들이 가득한 학교였기에 준후의 회사 생활은 쉽지 않았다. 어렵고 힘든 일은 젊다는 이유로 모두 준후에게 쏟아졌다.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다. 무미한 그의 인생에 유일한 맛은 다현과의 연애였다.


다현은 준후의 제자였다.


유부남 고등학교 교사와 학생의 사랑. 범죄였고, 그래서 준후의 구미를 당겼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깊은 관계를 맺었지만 그 관계를 지속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준후는 다현이 자신의 삶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건 싫었다. 다현은 준후가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과 새 삶을 꾸리기를 원했다. 부모는 일찍 죽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까지 세상을 떠났다. 다현은 따뜻한 가정을 원했다. 준후에게 다현은 일탈이었다.


이 문제로 크게 다투고 난 뒤 어느 날 다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준후는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다현이 기댈 곳은 자기밖에 없었으니까. 준후는 자신의 교실에서 다현과 뜨거운 정사를 나눴다. 야근을 마친 뒤 다시 한번 만나자고 약속까지 하면서.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준후는 다현의 전화벨 소리가 교실에서 울리는 걸 들었다. 준후는 교실로 올라왔다.


다현은 나체로 목을  채 죽어있었다.


<홍학의 자리>는 <2인조>의 작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빡빡한 소설이다. 이것저것 따질 거 없이 도대체 범인이 누구야, 왜 죽인 거야 라는 궁금증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뿜어져 나온다. 멈출 수가 없다.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기 위해 독자는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소설은 야금야금 매듭을 풀어나간다. 잘 꾸민 미드처럼, 에피소드 끝자락마다 새로운 단서를 뿌려놓고 독자가 덫에 걸리기를 기다린다. 하나둘씩 용의자가 등장한다. 충격의 연속이다.


소설은 잡기술을 쓰지 않는다. 프릭쇼처럼 보이는, 고양이도 물고 가지 않을 덜 떨어진 트릭으로 완전범죄 같은 걸 꿈꾸지 않는다. 억지 반전은 없다. 장담컨대 소설의 최종장에서 당신은 꽤 충격적인 반전을 맞닥뜨릴 것이다. "And like that... he's gone"(Usual Suspect)이나 "I see dead people"(Sixth Sense) 만큼은 아니겠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설이 이 반전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무거운 진실을 들어 올리기에 그 대사는 힘이 부족했다. 영화라면 다른 연출이 가능했을 것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미도의 앨범을 한 장씩 넘기는 씬처럼. 좀 더 고조시키는 묘사가 있었다면, "I see dead people."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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