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공식품, 음식이 아닌 음식에 중독되다
크리스 반 툴레켄 지음, 김성훈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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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으면 도대체 뭘 먹어야 하나, 걱정이 들면서도 그게 너무 크다 보니 오히려 포기를 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세상 자체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굴러가는데 나 혼자 무슨 힘으로 내 길을 가겠는가. 건강식이라고 불리는 저칼로리, 저당, 저탄수, 고단백 식품들조차 초가공의 중심에 서 있는 게 현실이다. 입맛은 정직해서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식품 업계는 빠르고 영리하다. 그들은 우리보다 몇 수는 앞서간다.


어떤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 몸에 그 음식이 제공하는 영양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너무 그럴듯해서 믿기 힘든 이 이야기는 사실인듯하다. 진화 과정에서 식욕이 생존에 얼마나 유리한 욕망이었는지 상상해 보자.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는 욕망은 좀처럼 꺼뜨리기 어려운 뜨거운 감정이라는 걸 잘 알 것이다. 이걸 이용해 우리 몸이 부족한 영양소를 채운다는 생각은 멋짐을 넘어 우아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과거와는 다르게 거의 항상 과영양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식욕이 아주 유용한 욕망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식품 업계가 이 메커니즘을 너무 잘 이용한다는 게 우리의 비극이다.


초가공식품의 특징은 크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부드럽다. 그래서 먹는 속도가 빠르고 분당 섭취 칼로리가 높으며, 혈당을 급격히 올리고, 섬유질이 적어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아 금방 허기가 진다. 음식이 부드러운 건 치과적 문제까지 야기하는데, 이빨이 운동을 안 하니 골밀도가 낮아져 쉽게 깨지거나 썩는 것이다.


초가공식품은 원물의 영양소를 흉내 내어 화학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양소가 정확히 우리 몸에서 어떻게 흡수되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지 못한다. 레몬에서 추출한 비타민C를 먹는 것과 레몬을 먹는 것 사이에는 영양학적 관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영양소는 음식이라는 맥락에서 떨어지는 순간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 초가공식품이 건강을 위한답시고 여기저기서 영양소를 떼와 붙인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미각 신호와 영양소의 불일치는 폭식의 원인이 된다. 선술 했듯 뭔가가 당길 때는 그 음식에 담긴 영양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가공식품은 맛과 영양을 흉내 낼 뿐이기 때문에 몸은 여전히 영양소가 결핍된 상태로 유지되고, 끊임없이 먹으라는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다. 초가공식품은 우리 몸을 해킹하고 있다!


감미료, 유화제, 방부제 등이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까지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이 모든 걸 단번에 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익히지 않은 채소와 생선, 고기 등으로 식단을 꾸린다. 물론 양식 생선과 고기에는 항생제라는, 채소에는 농약이라는 빌런이 남아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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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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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 배우의 말처럼 넷플릭스를 대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재미있다. 그간 한국 문학계에서 잘 보이지 않던 궤가 그려진다. 잡다한 일상의 비루함을 연로로 삼아 이 시대의 문학을 이끌어가던 부류가, 이제는 그게 보편적 현실이 되어버린 시대를 만나, 모두의 마음을 관통하는 감성을 얻은 것 같다.


물론 자기 세계를 시대와 연결하는 재능을 모두가 가진 건 아니다. 아마 비범과 평범의 차이는 그 한 끗일 것이다. 그 작은 다리를 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 그걸로 세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허물을 벗는다. 그러니 얼핏 과소평가로 들릴 수 있는 이 문장들에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딱 하나만 고르라면 못할 짓이고 두 개를 고르라면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와 <혼모노>다. 선택이 더 주어진다면 <스무스>까지. 하지만 차례에 멈춰 하나하나 소설의 이름을 짚어나가다 보면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도 눈에 밟히고 <메탈>도 발목을 잡는다. 그만큼 괜찮은 소설집이다.


'덕질'이라는 소재가 특별한 건 아니다. 하지만 성해나의 <길티 클럽>은 좀 더 날카롭다. 덕질이 만든 커뮤니티의 속성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아무도 모르는 무언가를 혼자서만 좋아하는 마음. 이런 마음은 필시 설명을 부른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걸 좋아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후의 세계는 죽림칠현의 뺨따귀를 날릴 정도로 현학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공고해진 세계는 역설적으로 더 큰 담을 쌓아 '일반인'의 출입을 허락지 않는다. 덕후들이 배교하는 순간은 우리 '작은 것들의 신'이 대중의 시야에 들어올 때다. 뭣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나의 신을 만지고 환호한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이를 계기로 덕의 세계는 둘로 나뉜다. 입덕이 뜨기 전이냐 후냐. 나는 진짜 너는 가짜. 진또배기를 가르는 기준은 하나 더 있다. 나의 신이 윤리와 도덕의 늪에 빠져 추락했을 때조차 그것을 신으로 섬길 수 있느냐!


<혼모노>는 이미 제목부터 진짜와 가짜가 무엇인지 묻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소재는 무속이다. 어려운 무속은 아니고 점집의 이야기다. 자기가 모시던 신이 앞집으로 이사 온 새파랗게 젊은 여자의 몸으로 옮겨가면서 발생하는 몰락과 질투의 이야기. 지질하고 구차하게 흐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대마신전쟁 급의 에픽으로 만든 건 전적으로 성해나의 재능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결투씬'은 염력이 난무하고 부적이 날아다니는 판타지가 아님에도 숨죽여 집중하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다. 승부가 갈리는 순간엔, 약간 소름이 돋을 정도다.


나는 박정민 배우가 완전 오버를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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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에 따랐을 뿐!? - 복종하는 뇌, 저항하는 뇌
에밀리 A. 캐스파 지음, 이성민 옮김 / 동아시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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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명령에 복종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경험적으로 이는 더 이상 증명이 필요치 않은 명제다. 아우슈비츠, 르완다, 캄보디아, 베트남, 광주. 대학살의 서사는 늘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에필로그로 이야기를 닫는다. 아무리 들어도 끔찍한 결말이다.


유대인과 유럽인들이 한나 아렌트에게 단단히 화가 난 이유는 그녀가 나치는 전혀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던져 넣으려면 웬만한 마음으로는 불가능해야만 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우리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평시였다면 그는 유능하고 존경받는 정부 관료가 됐을 것이다. 그보다 더 명령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악이 평범함에서 나온다는 아렌트의 말은 틀렸다. 아이히만은 비범했다. 악은 평범과 비범 모두에서 나올 수 있다. 필수 조건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 '명령에 따르는'것. 머릿속에서 비판적 사고를 제거하는 것.


사람들이 어떻게 끔찍한 명령에 그토록 쉽게 따르는지 연구하는 건 의외로 찬반이 따른다. 우선 반대하는 쪽은 이런 연구가 가해자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개인의 책임을 줄이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혹여나 이 연구가 복종이 인간 본성에 내재된 불가항력적 성향이라는 과학적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 모두가 같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동일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가해자는 그저 운이 없는 사람, 오히려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복종의 지옥에서도 늘 불복의 영웅들이 존재하는 것 역시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따라서 이 연구는 결국 어떻게 하면 우리가 복종의 사슬을 끊고 선을 행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을지 밝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를 대학살의 예방주사라고 부르자.


<명령에 따랐을 뿐>이 특별한 점은 이 과정을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명령을 따를 때, 부당한 명령을 이행할 때, 실제로 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추적한다는 것이다. 얼핏 들어도 쉽지 않은 연구라 느꼈는데 내용을 보며 확신했다. 정말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재현의 문제로 골치를 썩는 심리학계거늘 뇌파를 측정한다고 동원된 기계, 그 인위적 실험 환경에서 획득한 결과들을 어떻게 다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의 재미는 핵심 주제를 말할 때보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이리저리 실험을 비틀 때 발생한다. 참 애쓴다. 결과는 비록 녹록지 않더라도, 그 노력에는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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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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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첫 번째가 중요하다. 거짓말은 카드로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모든 게 무너진다. 이유를 만들어 붙일수록 기둥은 무게를 더한다. 끝까지 속이려면 아무도 뒷 이야기를 물을 수 없게 깔끔한 거짓말을 던져놓은 뒤 끝까지 입을 다무는 것이다. 그러니 거짓말은 역시 첫 번째가 중요하다.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남부.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젊은 남자에게 여자 하나가 붙었다. 남부의 분위기가 원래 그런지 남자에게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동네 친구들이 가득하다. 다들 유복하고, 시간이 많고, 그래서 자기 베프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이 여자를 경계한다. 여자의 이름은 루카. 남자에게는 애비 포터라 불린다.


본명을 숨겨야 할 이유가 뭘까? 여자는 유산을 노리고 들어온 흔한 사기꾼일까? 파보니 건실한 청년인 줄만 알았던, 그러니까 우리가 미국인이라고 하면 떠올릴법한, 고속도로 대형 옥외 광고판의 흰 이빨을 드러낸 채 밝게 웃는 전형적 금발 미남이, 사실은 남부의 숨겨진 어둠을 지배하는 실력자인 것 같다. 그렇다면 루카의 접근을 사기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루카는 임무를 받은 것이다. 임무를 받았기에, 그녀는 애비 포터가 된 것이다.


다음 질문은 누가 그 임무를 줬냐는 것이다. 건실한 청년의 경쟁 조직? 쿠데타를 위한 내부의 이인자? FBI? 경쟁 조직이나 내부의 이인자가 고객이라면 루카는 프리랜서나 에이전시에 소속된 회사원일 수 있다. FBI가 고객이라면 그녀의 정체는 FBI일 것이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상대할 때는 CIA가 개입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규모도 작고, 또 FBI 같은 국내 요원이 동반하지 않는 이상 CIA는 자국 내에서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 루카가 어떤 사람이면 이 이야기가 더 재밌어 질까?


FBI는 식상하고 프리랜서나 에이전시 소속이라면 좀 판타지 같은 면이 있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는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전직 군인이나 정보부 요원이 전문적으로 약탈, 파괴, 정보를 수집하는 시장이, 정말로 존재할까?


뭐 어쨌든 소설은 꽤 잘 굴러간다. 부분 부분 반전이 있고 완전히 뻔하지는 않게 적당한 긴장과 호기심을 유지한다. 키워드는 배신이다. 더 이상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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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함께 춤을 - 시기, 질투, 분노는 어떻게 삶의 거름이 되는가
크리스타 K. 토마슨 지음, 한재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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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분노, 시기, 질투, 슬픔, 우울,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포장지를 걷어낸 순수한 감정들. 나는 이걸 '부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우리는 감정에 이중잣대를 들이민다. 기쁨과 환호 행복은 늘 갖고 싶은 최고가의 명품이지만 그 반대에 있는 것들은 진열대에도 오르지 못한다. 이것들은 모두 어떻게 해서든 버리고 싶은 쓰레기들이다.


나는 화를 잘 낸다. 하지만 가장 화가 날 때는 화를 내는 나에게 화내지 말라고 할 때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다 너만 손해다. 화내서 이룰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화를 내는 게 아니다. 화를 내고 싶어서 화를 내는 것이다. 모욕을 당하거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는 화가 난다. 그건 내가 나와 내 일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의미다. 사랑하는 것이 망가졌을 때 화를 내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럴 때 웃으면 일류가 된다는데, 나는 일류가 되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자신에, 내 감정에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


당신은 부정적인 감정이 당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채울 때 어딘가에 그걸 버리거나 깨끗이 씻어내고 싶을 것이다. 이해한다. 그 감정이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많이 뜨는 것 같다. 마음 수련이니 명상이니 긍정적 사고라든지 낙천이 몰고 오는 행운 같은 것들. 내게는 부정적 감정들이 오히려 연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 마음은 실로 부정을 태워 태양을 만드는 핵융합 용광로다. 나의 부정은 중력을 만들어 부정을 끌어모으고 끌어모은 부정의 힘으로 더 큰 중력을 만든다. 나는 이 구덩이를 '공'으로 비워두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집착을 벗어던지고, 오욕칠정을 끊어내고, 고통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욥이 되고 싶지 않다. 내 꿈은 성인이 되는 게 아니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다. 인간을 초월한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위버멘시가 아니다. 나는 자라투스트라가 아니다. 나는 석가가 아니다. 나는 예수가 아니다. 나는 공자가 아니다. 나는 나다. 나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다. 소리 지르고, 울고,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으르렁 대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분노로 입을 닫고 싶다.


이것이 악마와 함께 사는 법이다.


저자는 간혹 모호한 태도를 보여 나를 화나게 한다. 이 감정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이겨내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끼라고 하면서, 어느 순간 너무 지나친 건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를 비판하면서 은근슬쩍 중용의 도를 밑장에서 빼든다. 나는 지나친 분노가 터지는 이유는 지나친 분노가 터질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로 인해 마음에는 구멍이 나고 인간관계는 파괴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삶 아닌가? 그렇게 뚫린 구멍들을 평생 기우며 살아가는 게, 인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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