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그의 빛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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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그의 빛>은 <위대한 개츠비>의 오마주다. 완전히 동일한 구조에 동일한 캐릭터를 배치하고 똑같은 주제로 감아올려 그 유명한 그린 라이트 위에 올린다. 개츠비가 그랬듯, 그의 빛은 서서히 하강하여 어둠 가득한 지하로 가라앉는다.


개츠비의 롱아일랜드는 성수로, 데이지의 웨스트에그는 압구정으로 변한다. 밀수업자였던 개츠비는 미국에서 혈액 한 두 방울로 주요 암을 조기 진단하는 기술로 크게 성공한 뒤 암호화폐를 개발해 국민적 영웅이 된 벤처 사업가로 활약한다. 테라노스와 테라폼랩스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 성공이 얼마나 위태로운 난간 위에 서 있는지 알 것이다.


개츠비가 위대했던 이유는 그 모든 성공이 전부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전설적 소설의 배경은 1920년대의 미국이었고, 때는 바야흐로 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번영 속에서 소비와 유행을 숭배하던 시기였다. 향락과 탐닉. 매일 밤 터지는 샴페인 속에서 오히려 정신은 굶어 죽어갔다. 이러한 시대에도 개츠비는 '사랑'이라는, 냄새나고 촌스러운 가치를 자신의 심장과 바꿔 넣었다. 오로지 데이지를 위해,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개츠비는 부와 소문을 쌓아 올렸다.


한국의 개츠비, 제이 강도 똑같다. 대학 시절 딱, 한 번 만난 여자에게 완전히 반해 사귀던 여자 친구마저 버리고 도피 행각을 벌였다. 똑똑하지만 가난했던 그는 결국 데이지(연지)를 포기하고 입대한다. 연지는 몇 년 뒤 부자를 만나 결혼한다. 벤틀리를 몰고, 80억짜리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사는 남자를 만나서.


이제 차이점을 얘기해 보자. 성수와 압구정의 인간들은 미국의 그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 50대 초. 제이 강의 심장 연지는 심지어 스무 살이 훌쩍 넘는 아들을 하나 두고 있기까지 하다. 닉 캐러웨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지만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는 여자. 식당 종업원을 하다 와인에 빠진 건 다행이었다. 조그마한 양조장에서 꽤 중요한 일을 맡았던 경험을 살려 한국에서 와인바를 차린다. 그곳이 바로 제이 강의 본사가 있는 성수동이었다.


<위대한 그의 빛>에서 개츠비는 전혀 위대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 왕관의 무게를 견디는 건 연지다. 제이 강은 사랑과 성공을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에 늘 성공을 쫓아 도망가지만 연지는 반대였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1920년대 미국의 개츠비도, 현시대 대한민국의 연지도 뭐가 위대한지 잘 모르겠다. 사랑이 그렇게 대단한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상황이 바뀌고, 처지가 달라지는데도 끝까지 하나의 가치를 고수하는 건 아마 두 부류만이 가능할 것이다. 아주 멍청이 거나, 자기 행동이 곧 법이 되는 사람이거나.


우리가 왜 이 복사본을 읽어야 할까? 아무리 잘나도 원작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두 번이나 읽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위대한 그의 빛>이 저 잘난 소설에 비해 딱 100배 더 재밌다. 롱아일랜드와 웨스트에그가 성수와 압구정으로 바뀐 게 좀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이 소설,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한 번 지나간 문장에도 자꾸만 눈이 간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하자. 우리 중에 <위대한 개츠비>를 정독한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말고.


사다 놓고 읽지 않아 개츠비가 목에 걸린 사람이라면, 그냥 갖다 버리고 이 책을 새로 사 읽을 것을 추천한다. 웹소설처럼 술술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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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의 힘 - 복잡한 세상을 푸는 단순하고 강력한 도구
스티븐 스트로가츠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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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게 '극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남긴 채 끝난다. 나는 극한을 설명하는, 15페이지가량을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읽었으나 결국엔 이해하지 못했다. 수학적으로 전혀 모순일 수 없는 이 현상이 나에게는 완벽한 미지로 남아있다. 지금부터 이 혼란을 몇 가지 공유해 보겠다.


1을 3으로 나누면 0.333... 과 같이 3이 무한히 계속되는 소수가 된다. 이 자체로는 놀라울 것이 전혀 없다. 공포를 드러내는 건 각 항에 3을 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1 / 3 X 3 = 0.333... X 3

1 = 0.999...


식은땀이 흐르는가? 0 다음 9가 무한히 계속되는 소수는 1에 무한히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절대 1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나같이 평범한 인간들의 직관이다. 우리의 수학 체계는 이 사실을 간단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대수학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x = 0.999... 일 때,

10x - x = 9.999... - 0.999...

9x = 9

x = 1

그러므로 1 = 0.999...


문제는 이것이 무한히 작아졌을 때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0.000...1은 결코 0과 같지 않다. 10cm 길이의 자에 눈금을 새긴다고 가정해 보자. 자를 10 등분하면 눈금 사이의 간격은 1cm, 100 등분하면 0.1cm, 1000 등분하면 0.01cm... 이렇게 무한히 작은 조각으로 나눈다 해도 눈금 사이의 간격은 무한히 0에 가까워질 뿐 절대 0이 되지 않는다. 만약 무한히 작게 나뉜 눈금 하나의 간격이 0이라면 이 0에 눈금의 개수를 곱했을 때 10cm가 된다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맞다면 10cm = 20cm = 30cm...라는 대혼란의 세계가 우리를 집어삼킨다.


우리의 세상을 무한히 작은 것으로 나눌 수 있다는 가정, 그래도 이 세상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확신, 바로 여기서 미분이 탄생했다. 미분은 아주 복잡한 것들을 아주 작은 단위로 나눠 계산을 단순화한다. 그런 다음 그 조각들을 더해 처음에 존재했던 대상을 복원한다. 나누는 것은 미분, 더하는 것은 적분, 우리는 이 둘을 합해 미적분이라 부른다.


책에 수식이 등장할 때마다 판매 부수가 절반으로 감소한다는 속설이 있다. 이 책에도 다수의 수식이 등장하지만 사실 그렇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미적분의 힘>은 미적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미적분이 탄생하기까지 창발 한 사고의 역사를 훑으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다량 소개한다.


시작은 곡선의 넓이를 구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아마 당시 사람들은 아주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을 것이다. 그 주인공 중 하나가 '아르키메데스'라는 사실이 이 가설에 힘을 실어준다. 그는 순수 수학자라기보다는 발명가에 가까웠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이 만든 각종 기계의 실현 가능성과 성능을 측정하기 위해 이 수학들을 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찾기 위해 미적분을 선택했다. 이 책의 저자도 비슷한 관점을 취하는 것 같다.


응용수학자가 되려면, 바깥의 현실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고, 지적으로 문란해야 한다. 응용수학자의 눈에는 수학이 순수하고 불가사의하게 봉인된 정리와 증명의 세계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철학, 정치, 과학, 역사, 의학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주제를 다룬다. 내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바로 그것으로, 곧 미적분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를 보여준다. (p.16)


지적으로 '문란'해져야 한다니, 근 10년 간 이렇게 멋진 문장은 읽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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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연대기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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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에게는 500명의 부인과 후궁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부인은 다섯 명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 째 부인 부르테 푸진은 모든 아내들 가운데 첫 째였으며 명망 높은 네 아들과 다섯 딸의 어머니였다. 네 아들의 이름은 주치, 차가다이, 우구데이, 톨루이였다.


톨루이는 가장 중요한 아들이었다. 막내였고, 몽골은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승계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톨루이에게는 뭉케와 바로 그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부케라는 아들이 있었다.


훌레구의 첫째 아들은 아바카였고 아바카의 첫째 아들은 아르군이었으며 아르군의 첫째 아들은 가잔이었다. 가잔 칸은 이슬람의 제왕이라 불리며 중동을 지배했다. 그는 재상 라시드 앗 딘을 시켜 몽골의 역사를 작성토록 명한다.


가잔 칸은 세계사를 남기기 위해 몽골사를 기록했다. 이 자신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몽골은 지구 영토의 대부분을 실제로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하지 못한 땅에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망할 때까지 라시드 앗딘은 집필을 완료하지 못했다. 그는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울제이투에게 그간의 작업을 헌정했고, 칸은 신속하게 집필을 완료할 것을 명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책이 <가잔 축복사>다.


책을 본 칸은 자신의 기특한 신하에게 세계의 주요한 민족들의 역사와 지리서를 덧붙이라고 명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 민족지>와 <세계 경역지>가 만들어졌다. 이 세 개의 책을 엮은 것이 <집사>이며 <몽골제국 연대기>는 그중 1부인 <가잔 축복사>를 편역한 책이다.


서양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몽골은 파괴신이었고 세계를 황폐화시킨 주범으로 묘사되었다. 칭기즈칸은 '신의 채찍'이라 불렸다. 본인들의 죄를 깨우쳐주기 위해 신이 보낸 이교의 사도로 간주한 것이다. 종교인들의 과대망상과 자기 합리화는 정말로 놀랍다. 채찍이라 부르는 악마가 통치하는 제국에서 재상도 하고, 군인도 하고, 장사도 하면서, 대대손손 삶을 이어가는 동안 그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졌던 걸까?


학살과 파괴는 전략적으로 행해졌다. 칭기즈칸의 부인이 500명이었던 이유는 그들의 수가 늘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의 속도는 점령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점령지마다 지킬 사람을 남기고 간다면 국경에서 만나는 새로운 적과의 대결에서 열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들은 항복하랄 때 말을 들으면 꽤 괜찮은 자비를 베풀었다. 끝까지 싸우고도 존속을 허락받은 건 '고려'가 유일했지 않나 싶다.


몽골을 학살의 신으로 보는 것만큼 큰 오해 중 하나는 만주, 중국, 몽골, 중동, 러시아, 소아시아(터키)를 아우르는 이 전무후무한 국가를 단일 제국으로 보려는 생각이다. 모든 땅은 칭기즈칸의 아들들이 지배했다. 이 말은 몽골제국이 중국 땅에 자리한 대 칸의 명령을 받들어 그가 파견한 관리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의미다. 각자가 지배한 영역을 '울루스'가 부르는데, 울루스 안에서도 여러 울루스가 존재했고 그들은 사실상 자치 비슷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자가 많다는 건 전쟁에 나갈 아들이 많다는 점에선 유리했지만 왕위를 두고 다툴 자들이 많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몽골제국의 역사는 반란의 연대기로 불러도 좋을 정도로 크고 작은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왕자들이 각자의 땅에서 각자의 칙령을 남발하는 바람에 대 칸은 주기적으로 주변을 청소하고 대 칸 외에는 아무도 마음대로 칙령을 내리지 말라는 칙령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말로 지배가 된다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대제국을 하나의 단일 국가로 유지하기엔 통신, 교통 등의 기술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무리 칸이 추상같아도, 말로 달려 몇 달은 걸리는 거리에 있으면 그 존재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가 지배한 민족의 반란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넓을 땅을 메우기에 몽골인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집사>의 주장과는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면이 있다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단적인 예로 이 '역사'를 쓰라 명한 것은 본진의 대 칸이 아니라 이란 땅을 지배했던 이슬람의 제왕 가잔 칸이었으니까. 그들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완전히 다른 땅에 살고 있어도 공유하는 민족의식은 강했을 것이다. 원래 권력투쟁은 같은 식구끼리 벌이는 것 아니었던가.


책에 등장하는 지명과 이름이 모두 몽골식이라(한자로 병기하지만) 읽기 어려운 점이 있다. 땅과 나라의 이름이 생소하다 보니 기존에 알고 있던 세계사, 세계 지리가 잘 연상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


칭기스 칸은 순티주이라는 큰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그리고 타인푸로 갔는데, 그곳에는 과수원과 정원이 많고 술도 풍부했다. (중략) 가을에 칭기스 칸이 몸소 후일리라는 도시로 갔다. 알탄 칸의 중요한 장군인 기우기 충시가 대군과 함께 그곳을 방어했지만, 전투 끝에 그를 격파하고 참치말이라는 협곡까지 추격했다. (p.118)


마치 이세계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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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햣켄 기담집 - 공포와 전율의 열다섯 가지 이야기
우치다 햣켄 지음, 김소운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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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유명세 탓에 나쓰메 소세키를 말랑말랑한 소설가로만 아는 경향이 있는데, 소세키의 걸작은 사실 환상 문학이라는 장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난 단 하나의 단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그 충격은 소세키의 모든 작품을 다 합쳐도 부족할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그 소설은 글로 닿을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한계는 오직 작가의 재능에 달린 것일 뿐, 글이라는 수단이 갖는 문제는 아니었다.


과거에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유명한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어야만 했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스승의 추천으로 등단한다. 나쓰메 소세키라 함은, 한 때 천 엔짜리 지폐에 인쇄될 정도로 일본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작가다. 얼마나 많은 문하생을 거느렸겠는가. 우치다 햣켄은 소세키의 문하생이었고, 환상 문학의 가지를 이어받는 사람이다.


이 소설들에는 분위기가 있다. 스승의 걸작에 미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스산하고 담담한, 잡내 없는 문장들은 독보적이다. 아주 이상한 상황과 간결한 기술 사이의 괴리가 불안과 기괴를 증폭시키는 것 같다. 부족한 재주를 끌어 모아 굳이 예를 들자면 이런 느낌.


달리던 전철이 서지 않고 몇 개나 역을 지나치는데 사람들은 태연이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훅 끼쳐 들어온 냄새에 코를 막고 말았다. 동물의 사체가 썩는 냄새에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일어나 자리를 옮기려는데 다른 칸으로 넘어가는 문 앞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땅바닥을 보고 서 있었다. 맨발이고, 손톱에는 붉은 때가 가득했다. 몸을 앞 뒤로 흔들며 주문인지 저주인지 모를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니 이런 얘기였다.


"저기요, 제 아이를 보셨나요?"


그녀는 눈, 코, 귀에서 검붉은 피를 쏟아내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녔다. 여자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화면을 응시했다. 여자가 내 앞에 오기 전 나는 전철에서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 역을 출발한 지 한참 된 전철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나는 다음 칸으로 옮겼다. 다시 다음 칸으로, 또 다음 칸으로. 나는 마지막 출입구 앞에 서서 전철이 서기만을 기다렸다. 여자는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거리를 줄이며 내게 다가왔다. 냄새가 점점 진해졌다.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가까웠다.


전철은 멈추는 걸 잊은 듯했다.


다 쓰고 보니, 햣켄의 글과는 영 분위기가 다르다. 그의 문장은 이렇게 요란하지 않다. 훨씬 은근하고, 섬세하다. 겉보기엔 휙휙 쓰는 듯해도, 역시 대가의 붓끝은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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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돼지 아작 YA 2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황희선 옮김 / 아작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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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페이지는 사랑받지 못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p.9)


괴상하게 짓눌린 돼지코가 문제였다. 의대생이 분만 중 코를 눌러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단순히 코가 들린 수준이 아니었다. 코털과 점막이 모두 보일 정도였으니까. 캐롤 페이지를 자라는 내내 '코범벅'이라 불렸다. 엄마는 출산 중 사망했다.


캐롤 페이지가 금수저였다면 성형수술을 고려했을 것이다. 과학 문명이 초고도로 발달해 우주를 원하는 만큼 여행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도 부의 불평등은 여전했고 캐롤은 가진 게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캐롤의 별에 출장온 운영자에게 '배정된' 여자였다.


그 운영자가 캐롤에게 해준 것을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기 캐롤은 국정 거주 구역에 체류권을 얻었고 기본적인 의료지원을 받았으며 고아 학교에 배정됐다. 캐롤의 강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명석, 부지런, 집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불릴만한 성장 환경이었지만 캐롤은 모든 일에서 상위 1%에 속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녀가 가진 능력 중 전문가라고 부를만한 영역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산술, 미적분, 벡터 수학, 금속학, 전자 공학, 컴퓨터 공학, 금속세정, 영양학, 천문학, 우주조리학, 간호학, 지압법, 27가지 기초 성애술, 각종 장치들의 수리법, 우주의학, 엔진 공학, 궤도 비행.


캐롤은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결국 일반 승무원 훈련 과정에 입교할 수 있었다. 양자적 도약이라 부를만한 성과였다.


그렇다고 코범벅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는 없었다. 인간 세상에선 여전히 외모가 중요했다. 물론 출신 성분의 문제도 있었지만, 캐롤은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같이 비행하는 승무원들이 가진 능력 모두를 가뿐히 압도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동료들은 캐롤을 무시하고 그녀의 인권을 유린하고, 정서적, 육체적 폭력을 가했다. 그 많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캐롤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고 우주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해다 바쳤다. 이 겁 많고 순종적인 동물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냉정한 돼지>는 200p도 안 되는 책이다. 캐롤의 짧은 성장사와 음모의 발현까지 빠르게 달린 뒤 후반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이 종장은 가히 '아름답다'라고 부를만하다. 캐롤이 인간 세상에서 받아야 했던 편견과 차별은 이 장면들 속에서 완전히 소멸한다.


우주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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