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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
기류 미사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의 장례 풍속도를 보면 아무리 호상이어도 꺼이꺼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외할머니인데 옆에서 곡을 할때마다 생전에 살갑게 느낀 할머니가 아니었어도 괜시리 눈물이 났다. 화장을 한 뒤 남겨진 유해를 보기 위해 가족들과 참관했을때는 "삶이란 무엇인지" 얼마나 허무하던지 철학적인 생각까지 다 들 정도였었다. 화장할때 아플거 같아 몸서리 치기도 했다. 죽으면 생명이 없는데 아플까만은 도저히 돌아가셨다는게 실감나지 않아 그랬던 것이다. 그저 내 눈앞에 안보일 뿐인데. 어디로 여행을 떠난 것 같은데 죽었다니 인정하며 살아야겠지.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보통은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며 기억이 잊혀질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다들 평소 일상생활로 돌아가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생활한다. 정말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이 딱 맞는것 같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가슴 언저리가 늘 묵찍한 슬픔의 덩어리이다.
뼛속깊이 유교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러이러 해야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는바 죽음이 매혹적일 수도 있다니 책 제목이 참 생경스럽다. 하지만 납골당이나 묘지가 거의 외곽에 위치하는 우리나라보다 외국에는 집 가까이에 묘지를 둔다고 하니 산자와 죽은자가 같이 있고 죽은 자를 묻은 곳에서 새 생명이 탄생되는 것을 보면 '죽음'이란 것이 굳이 슬퍼해야만 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책장을 넘기면 정말 죽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죽음의 의미나 종류가 이렇게 많을 수 있다는게 놀랍고 죽음과 에로스, 욕망, 자살, 임종에 이르기까지 역사 이야기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책장을 넘기게 된다. 사람은 저마다 모습이 다르다. 가족들은 유전자로 인해 물론 닮긴 하지만 쌍둥이조차도 완전하게 똑같이 태어나진 않는다. 그러니 죽음 또한 어느것 하나 같을 수는 없다. 물론 장례문화는 원하거나 정해진바에 따라 하긴 하지만 죽음에 임하는 모습이나 죽는 순간은 어느것 하나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평범하게 보이는 죽음도 물론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죽음조차도 말이다. 나의 태어남과 죽음도 단 한번이므로.
유명한 사람들의 마지막 유언을 보면서 거창한 유언을 하지 않았음에 놀라게 된다. 괴테의 "덧문을 열어줘. 좀 더 빛을"이라든지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그냥 내버려두세여", 퀴리부인은 "아니,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저곳은 참 멋진 것 같군"하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유언을 남길 수 있다는건 어쩌면 갑자기 죽는것보다는 괜찮을지 모르겠다. 난 어떤 유언을 하고 죽게 될까. 아마 죽기 싫다고 몸부림 치지나 않을지. 그렇게 될까 두려워진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살고자 하는 욕망, 재물을 두고 죽지 않으려는 욕망은 지극히 본능적인 것이니. 예전 왕족이나 귀족, 성직자의 경우 시신과 닮은 모형을 만들어 석관위에 올렸다고 전해지는데 횡와상이 대부분이었다가 나중에는 말을 타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나 가족이나 부하들까지 잔뜩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 대목에선 웃음이 나온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이란 죽어서까지 쥐고 싶어하는 것이니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이긴 해도 이것이 나의 일이 되고 보면 결코 매혹적인 것이 아니지 않을까. 왜? 살고 싶으니까. 살고 싶은데 왜 매혹적이라고 하느냐고 반문할 것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