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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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계절을 뇌계 혹은 신계라 부른다. '온'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그 곳은 선택받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 온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들을 '귀신조'라고 부른다. 천둥계절이 오면 마을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한명씩 사라진다. 자체적으로 사람들의 묵인 아래 응징을 하는 것이지만 그 속에 사적인 감정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보기에 아주 사적인 이유로도 죽음을 당하니까. 온에서는 시체를 풍장한다. 그저 바람에 실려 날아가게 놔두는 것을 보면서 이 사회가 그리 문명국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겐야'는 이 천둥계절에 누나를 떠나보냈다. 누가 데리고 갔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 채 가미쿠라 부부와 함께 살아간다. 누나가 사라진날 겐야에게 바람와이와이가 씌운다. '빙의'의 개념과는 다른 것 같고 풍령조라고 불리우는 새 한마리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아 함께 한다. 불러서 왔다는 이 새는 무엇일까. 마을의 주술사는 이 새를 보고 분명 "도바...설마?"라는 말을 했다. 도바...가 누구인지 귀신조에서도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는 그와 겐야가 만날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에 갑자기 무서워진다.

 

온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 솔직히 나는 혼령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 눈에 다 보일줄이야. 원령을 다스리는 능력이 탁월하여 원귀가 마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책임을 지고 귀신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들어주는 문지기. 실종 되었던 히나가 이 문앞에 다가와 자신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말하는데 겐야가 좋아하는 호다카의 오빠 나기히사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지금까지 죽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죽음에도 관련이 있는 나기히사로 인해 이후 겐야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아니, 이미 온에 들어올 때 겐야의 운명을 바뀌었을 것이다. 상인들을 따라 온으로 왔다는 겐야, 그의 출생을 아는 이가 없다. 함께 있었던 누나도 사라지고 단지 하계에서 들어온 사람이라는 사실밖에 모른다. 하계에서 겐야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가족들이 죽어야 했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겐야가 도바와 대결을 할 때 바람와이와이의 원한을 갚아주는 이유가 커져 보여서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겐야의 이야기에 이어 갑자기 등장하는 아카네의 이야기. 물론 나중에야 아카네와 겐야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도바와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지만 조금 생뚱맞긴 했다. 이야기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어 몰입이 쉽지 않았으니까. 도바가 쇠사슬로 자신의 어깨에 묶어둔 바람와이와이를 풀어주는 아카네, 도바가 끝까지 쫓아와 죽이려 들텐데 죽어도 계속 살아나는 도바를 어찌 물리칠 것인지 걱정이 된다. 결국 온으로 피신하는 아카네와 겐야가 계속 이 곳 온에 살았다면 도바와 만날수 없었을텐데 나기히사를 칼로 찌르고 온에서 도망가게 하여 도바와 부딪치게 하는 설정은 억지로 만든 듯하여 마음이 불편해진다. 

 

바람와이와이, 아카네, 도바 무네키, 겐야. 이들은 만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고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작 "야시"의 느낌이 지속되지만 이들의 얼킨 운명에 대해 명확한 설명이 없어 야시에서 느꼈던 몽환적인 분위기를 이 곳에서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하계에 당도하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 자유롭게 행동하던 호다카와 겐야. 분명 우리와 다른 존재들이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에야 책 표지를 이해하는 나. 바람와이와이의 눈을 보며 도바에게 묶여있었던 그 새의 삶이 떠오른다. 온을 등지고 겐야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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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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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밤에 읽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이 몽환적인 분위기에 기분이 이상해져 버린다. 안개가 나를 감싸고 내가 있는 이 세계를 가로지르는 '고도'가 눈앞에 떠오른다. 요괴와 죽은자들이 다니는 곳, '고도'. 어린시절 나도 여러번 길을 잃어 눈물, 콧물 줄줄 흘린적이 있는데 그 때 시장 한모퉁이에서 나에게 길을 가르쳐준 아주머니께 감사해야겠다. 요괴의 길인 '고도'로 안내하지 않았으니. 아니, 죽은사람들의 땅과 우리가 사는 이 곳에 '구멍'이 생겼다면 나도 한번쯤 그 길로 들어서고 싶다. 나쁜 요괴한테 잡혀서 잡아먹히는 위험이 있긴 하지만 갈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큰소리 치는지도 모르겠다.

 

'고도'에는 규칙이 있다. '고도'의 물건은 돌멩이 하나라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가 없다.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점, 그럼 고도에서 먹은 음식물은? 그러나 다행히도 이 곳의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이 세계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단편 "바람의 도시에"에 등장하는 '나'는 가즈키에게 고가네이 공원 근처에 무사시노 시까지 연결되는 산책로가 있다고 이야기 하고 가즈키와 함께 이 곳에 들어서게 된다. 우연히 고도를 통하는 문을 발견하고 가게 된 것 같지만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 운명적이지 않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고도에서 태어난 '렌'을 만나 고모리와 렌의 싸움에 휘말린 아이들, 그와중에 가즈키가 총상을 입고 죽은 사건은 이 일이 꿈이 아니고 현실임을 느끼게 한다. 저 너머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즈키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가즈키를 업고 내가 속한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고도에서 죽은 가즈키는 고도의 것,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다.

 

렌이 제안하는 소생의 비의가 전해지는 곳으로 향하는 '나'는 렌의 전생과 출생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광대한 세상에 남고 싶어진다. 자신으로 인해 죽음을 맞은 가즈키를 보며 도망치고 싶지만 용기있게 대처하며 고도에서 보낸 열흘간의 일을 가슴에 묻는다. 조금은 섬뜩한 이 이야기는 귀신, 유령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사실화 하고 우리를 한발 한발 다가오도록 끌어당긴다. 그래서인지 단편 "야시"는 "바람의 도시"의 연작은 아니지만 요괴들의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거래라는 점에서 나를 빠져들게 한다.

 

고도나 야시에서도 남겨진 자들의 인연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 것일까. 물건을 사야만 벗어날 수 있는 이 '야시'에서 유지는 납치업자에게 동생을 팔아버리고 '야구선수의 그릇'을 산다. 동생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리고 5년마다 열리는 야시를 기다리며 동생을 다시 찾아올 결심을 한다. 야시에서 아무 물건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사야만 하는데 그 가격이 만만찮다. 결국 야시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유지는 이즈미를 데리고 십년 전에 헤어진 동생을 찾아 납치업자에게로 간다. 죽은자와의 거래, 유지는 과연 동생을 데리고 나올 수 있을까.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제시하고 십년 전의 헤어진 동생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 유지는 삶을 살아갈 의욕조차 없는 것 같다. 철없는 어릴 때의 일이지만 동생을 팔아버렸다는 죄책감은 늘 자신을 눌러왔다.

 

동이 트면 이 '야시'가 파할까, 기다려 보지만 그 곳을 맴돌기만 할 뿐 이 '야시'를 빠져나갈 수 없다. 내가 이 곳에 간다면 어떤 물건을 살까. 역시 나이가 들어가는게 무서우니 '젊음'을 달라고 할까. 그렇다고 영원한 젊음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조금 느리게 갈 뿐이다. 나는 그 대가로 무엇을 내어놓을 것인가. 이것은 욕심 많은 인간에게 경고를 하는 것 같다. 한가지를 원하면 또 다른 한가지를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게 맞을게다. "바람의 도시"나 "야시", 어디에도 인연의 끈이 묶이지 않은 곳이 없다. 나도 눈을 감으면 그 곳으로 한발 들여놓고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곳에 홀로 남겨질 것 같다. 꿈인것 같지만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실들, 과연 당신은 이 곳에 발을 들여놓을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이 당신을 끌어당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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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찾은 아이들 - 열세 살 딩카족 소년의 기적과도 같은 19년간의 여정
존 불 다우.마이클 S. 스위니 지음, 오정아 옮김 / 미디어윌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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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수단을 휩쓴 내전으로 가족도 없고 정착할 곳도 없는 아이들을 "잃어버린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1987년 둑 빠유엘에 폭격이 시작되었을 때 존 다우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착각하고 그 뒤를 따라 도망친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젤라바(아랍계 군인)를 피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죽을 것 같이 힘든 길을 걸어간다. "정녕 신은 우리들을 버린 것일까" 존은 끊임없이 자문하며 젤라바의 공격을 피하여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기고 남민캠프에 도착한다. 그 곳은 집이나 울타리는 물론 사람들이 정착해 사는 곳이라는 흔적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지만 안전한 장소에 오게 되어 얼마나 안도했던가. 하지만 존에게 내려진 시련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피난처 제공과 유엔의 식량 전달을 허락했던 에티오피아도 내전에 휘말렸던 것이다. 군인들을 피해 길로 강을 건너 도망치던 난민들 중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았다.

 

존 다우는 카쿠마에서 희망을 느낀다. 열여덟 살에 초등학교 1학년이 된 것이다. 공부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존은 행복하다. 난민 캠프에 있지만 딩카족의 전통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아이들, 그 속에서 존은 미국 입국의 꿈을 키운다. 가족과 친척들 중 그 누구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존에게 미국은 입국을 허가하고 미지의 나라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다. 미국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어리둥절한 존, 그러나 그는 눈을 빛내며 모든 것에 적응하며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이런 혜택을 받는 것은 분명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시러큐스에서 열심히 살아간다. 이젠 존에게 시련은 없는 것일까. 존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져 남부 수단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계에 알려지고 생존해 있는 가족들도 찾게 되어 이젠 더 이상의 고통과 아픔은 없는 것 같다. 매일 밤 아브라함과 도망치는 그날 꿈을 꾸지만 딩카 족들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던 옛 기억은 늘 가슴속에 남아있다.

 

존이 가게 되는 미국은 이 책에서 꿈의 나라로 여겨진다. 모든 기회가 열려져 있는 곳, 노력하는만큼 살 수 있는 곳으로 보여져 읽는 동안 조금 불편하다. 기독교에 대한 종교이야기도 남부 수단이 그렇게 되고 종교에 의지하여 희망을 보는 그들이기에 뭐라 말할 순 없지만 존의 이야기가 영화화 되고 책 또한 미국의 울타리 안에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살아가는 것조차 힘에 겨웠을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행복을 다시 찾아준 미국이니 존에게는 물론 난민 캠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곳은 낙원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낳고 자란 곳을 잊지 못하고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모습은 아무리 좋은 곳에 살지만 늘 고향을 그리워하기에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존이 살아 생전 자신의 고향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니 행복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니리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그들은 행복했다. 이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한사람이라도 더 알아준다면 남부 수단인들은 앞으로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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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미
비페이위 지음, 백지운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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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롄팡과 스구이팡은 딸 일곱 명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물론 이것만 보더라도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우리나라도 남아 선호사상때문에 아들을 낳기 위해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덕분에 딸들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한 동네에 사는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는 왕롄팡, 그런 남편을 간섭하지 않는 스구이팡. 솔직히 왕롄팡의 행동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한 동네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완롄팡의 권력이란 것이 그렇게 대단한가. 결국 이 왕롄팡의 행동이 화를 불러와 집안이 일시에 기울어지지만 왕롄팡의 큰 딸 '위미'만이 아버지와 관계를 가지는 여자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그저 여자들의 집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쳐다보고 있는 것이지만 죄를 지은 그녀들은 이런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 

 

일곱 명의 딸들이 있지만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아이들은 세 명이다. 위미, 위슈, 위양. 아버지 왕롄팡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는 위미, 위슈. 위미가 결혼을 약속한 펑궈량에게 버림받고 선택할 수 있는 삶이란 "어떤 작자든 상관없어. 힘만 있으면 돼!" 소리치며 권력있는 궈자싱에게 시집가는 것이었다. 이것만이 왕씨촌 사람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계속 보여줄 수 있으니까. 위슈와 위예가 영화를 보러가서 많은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한 사건은 정확하게 누가 그랬는지 사건을 파헤치지 않지만 왕롄팡에게 버림 받은 여자들 중 한을 품은 여자의 소행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분명 위슈는 위예에게 자리를 내어 준 차이광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했다. 정말 왕롄팡의 정부였던 차이광네가 계획한 일이었을까.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 그동안 왕롄팡에게 아내를 빼앗긴 사람들이 왕롄팡이 저지른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대항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그 앙갚음을 하지 않았을까. 그 외 다른이들은 분명 묵인했을 것이다.

 

위미가 왕씨촌을 떠나고 더 이상 비빌언덕이 없어진 위슈는 동네에서 놀림거리가 된다. 피해자이건만 강간당한 일로 동네 사람들에게 수모를 겪는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은 가족인 위후이였다. 가족조차 등을 돌려 위슈가 있을 곳은 왕씨촌이 아닌 위미가 있는 곳 뿐이어서 위슈는 위미가 있는 곳으로 떠나게 된다. 위미와 위슈의 세력 다툼은 어린시절부터 이어온 일이라 이 곳에서도 친자매이지만 유리한 고지를 잡기 위해 두 사람은 치열한 싸움을 한다. 그러나 역시 이 일에는 위미가 한수위다. 어쩌면 가혹하다 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위미와 위슈의 싸움을 보는 것이 편하지가 않았다. 궈자싱의 아들 궈주어에게 버림받고 그의 아들을 낳는 위슈의 인생은 작은 행복조차 바랄 수 없는 것인지. 분명 궈주어에게 이모가 되는 위슈가 그를 사랑한 것은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궈주어에게 위슈가 강간당한 일을 이야기 한 위미의 행동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위슈와 궈주어의 사랑이 위미의 말로 끝이났으니까. 사랑인지도 모르고 궈주어가 떠나가고 나서야 아들을 가진 것을 알게 되는 위슈, 아들을 낳은 후 위슈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위미에 이어 위슈, 그리고 위양의 이야기들은 이 땅의 여자들의 이야기들이다. 어느것 하나 선택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던 그녀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갔던가. 위슈의 삶이 아버지 왕롄팡에 의해 바뀌고 그 사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애처롭다. 좀 더 당당하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위미는 그런 위슈에게 권력을 주려 했지만 위슈가 선택한 것은 궈주어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위미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간다. 왕씨촌에 있는 가족들에게 예전의 부를 제공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나이가 많은 궈자싱을 선택한 위미의 가슴도 찢어지게 아팠겠지만 그녀가 선택한 삶으로 더 당당하게 그들앞에 설 수 있었다. 그 어떤 삶을 선택하든 그것은 본인의 몫이겠지만 선택의 폭이 크지 않은 그녀들의 인생에 마음이 쓸쓸해진다. 삶이란 이렇게 가슴이 아픈것일까. 위양의 이야기까지 읽은 지금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인생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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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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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오구라는 괜히 우울해진다. 기타와 엠프를 처분하고 나니 이십대가 끝나고 서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가오기 때문이다. 늘 간직해 왔던 꿈이 사라지는 기분, 어떤 기분인지 나도 알 것 같다. 나는 이십대 때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고 서른은 어떤 마음으로 맞이했던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역시 젊다는 것은 특권이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이 책은 주인공 히사오의 10년간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풋풋함과 설레임을 가지고 있던 그가 어떻게 사회의 한 일원으로써 적응해 나가는지 그 변화를 보여준다. 나의 십년도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굵직한 사건들을 토대로 인생을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을텐데, 이마저도 귀찮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예전의 풋풋함과 순수했던 지난날을 돌이키기엔 역시 힘든 일인가 보다.

 

역시 오쿠다 히데오다. "스무살 도쿄"를 읽기전에 읽었던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에 실망하여 내심 이 책도 기대감이 떨어질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여전히 유쾌하고 감동과 웃음을 주던 오쿠다 히데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억지 웃음을 짓게 하고 시종일관 변비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처녀작인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의 기억이 이젠 희미해지고 "스무살 도쿄"로 인해 가슴이 벅차오른다. 물론 팝스타 존의 사망소식을 이 책에서도 다뤄 저자의 관심을 완전히 벗어나진 않지만 이런 큰 사건들로인해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 잠시 추억에 잠길 수 있어 괜찮았다.

 

도쿄대에 입학하여 좋아한다고 고백해온 여자에게 가슴이 설레는 히사오, 세월은 흘러 학교를 중퇴하고 '신광사'에 입사하여 친구들보다 먼저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캠퍼스에서 청춘을 즐기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히사오는 그들에게 안됐다는 말을 듣지만 좀 더 시간이 흘러 업계에서 성공을 하면서 그 나이때의 친구들에게 자신은 어른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마주하게 된다. 도쿄대에서 만난 고야마 에리와 잘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이 책이 끝났다면 그 사랑의 여운으로 가슴이 설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났을 때 히사오의 곁에는 고야마 에리가 없고 히사오는 어머니의 소개로 선을 보러 나간다. 선을 보러 가다니, 히사오도 어느덧 나이를 먹는구나 싶어 내 가슴까지 쓸쓸해지게 된다.

 

히사오가 이십대와 서른살을 맞이하는즈음 그 10년간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성공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만 그가 가졌던 꿈을 잃어가기에 히사오가 말하는 청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청춘이 시작되었던 도쿄대에서 히사오가 얼마나 빛이났던가. 순수하고 열정이 있는 히사오의 모습을 보며 내 지난날 학창시절이 떠올랐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히사오와 함께 나이가 들어가고 그가 맞이하는 삼십대에 이르러 나의 인생을 또 한번 돌이켜 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의 내 마음은 그저 쓸쓸하고 허무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만 들게 된다. 아직도 늦지 않았을텐데, 중년을 향해가는 나이지만 청춘이라고 우기면 되지 않을까.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꿈을 가지고 있다면 젊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난 내 꿈이 무엇이었는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겠다. 이 책을 통해 모두들 잃어버렸던 꿈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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