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이발소 1
하일권 글.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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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학창시절에 두 명씩 100m 달리기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 나와 함께 뛰었던 애도 넘어졌었는데 순간 움찔하여 도와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몇 초를 허비하고 그냥 뛰었던 기억이 있다. 체육 선생님께서 그대로 기록을 하는 것을 보고 넘어진 애를 일으켜주고 안뛰어야 했던게 아닌가, 잠시 고민했었었다. 함께 뛰었던 그애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데 예뻤었나?

 

얼굴도 잘생긴 녀석이 이름이 삼봉이가 뭐야. 너무 구수하잖아. 박장미는 이름때문에 더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의 삶도 무채색이 아닐까. 아직 무슨 색을 넣어야 할지 결정을 못내리고 살아온 세월이 벌써? '외모 바이러스' 나도 이 병원균을 가지고 있는 보균자다. 언제 발병할지 모른다. "역겹다"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침을 뚝뚝 흘리며 잡아 죽일듯이 덤벼들지 않을까. 그 땐 누가 다치지 않도록 경습경보라도 울려줘야 할텐데 고민된다.

 

주근깨 가득한 장미는 늘 자신감이 없다.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어 더 주눅이 드는 것이겠지만 자신도 '외모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봐 겁이 난다.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보다 이제는 삼봉이발소에서 그 자신감을 찾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는데 그게 삼봉이발소에서 근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일 청소만 시키는 건 곤란한데, 손님들을 다치게 하는 일이 많은 것을 보니 많은 노력을 해야 하겠다.  

 

'외모 바이러스' 환자들을 치료하는 주술사 같은 삼봉이, 그런데 사람 키보다 더 큰 가위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고양이(말하는 고양이)와 함께 치료하다니 조금 무섭다. 사람의 몸에 가위를 꽂아도 죽지 않는 것을 보면 흉기는 아닌 모양인데 '외모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이 꼭 좀비처럼 변하는 것은 너무 과장된 것 같다. 안그래도 추하게 생겼는데 더 보기가 딱할 정도로 변해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삼봉이는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찢어 놓는다. 너무나 솔직하게 말하기에 그 말에 가슴이 예리하게 난도질 당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삼봉이로 인해 팽창할 듯 부풀어오른 마음이 어느 순간 '펑'하고 터져버리고 마음의 빗장이 풀어져 자신을 괴롭히던 악한 기운들이 다 쏟아져 나오게 된다.

 

삼봉이는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을까. 늘 외롭고 아파 보여서 꼭 안아주고 싶다. 대체 이 고양이는 어떤 존재인거야. 고양이 인간이라니 참 담배도 맛있게 피운다. 삼봉이랑 나란히 걸어가며 담배를 피우는 뒷모습은 정말 멋져 보이니 내가 이상하게 변해가는 건 아닐까. 이발소가 바쁠 땐 고양이 '믹스'도 변장을 하고 손님들을 상대한다. 얼굴에 있는 털은 어떻게 처리한다지? 참 궁금하다. 내면의 아름다운 모습을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삼봉이. 넌 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냐.

 

나는 초등학교만 남녀공학을 다니고 중학교, 고등학교는 여자들만 있는 곳을 다녀서 이 만화책 안에 악한 남학생의 모습이 낯설게 다가온다. 저렇게까지 친구들을 괴롭힐까? 생각해 보다가도 왕따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들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더 섬뜩하고 아픔을 지닌 아이들의 모습에 내 마음까지 저려온다. 삼봉이가 장미의 교실로 들어오면서 1권이 끝이 났는데 그 뒤의 내용은 무엇일까. '외모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보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응징해야 하는게 아닐까. 잘생긴 삼봉이가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그렇다고 장미처럼 침까지 흘리진 않는다구. 빨리 만나길 기대해 본다. 누구? 삼봉이. 아 그리고 고양이 인간 '믹스'도. 그래그래 장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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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끽연자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8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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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에 있는 이 남자 왜이리 처량해 보일까. 츠츠이 야스타카의 전작 '헐리웃헐리웃'으로 조금 실망했던터라 이 책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책장을 넘긴다. 그런데 막 터져나오는 웃음, '하하하하' 너무 크게 웃어서 괜히 민망해진다. 이 글이 정녕 20년도 훨씬 지난 글이란 말인가. 너무나 기발하고 유쾌한 웃음을 주지만 가볍지 않은 내용에 누구든 놀라게 될 것이다.

 

학교나 회사에 있을때면 지루해서 "시간 빨리 안가나" 한숨짓게 될 때가 많았는데 단편 "급류"를 보면서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지루했던 시간 뿐 아니라 잠자는 시간은 물론 나의 여가시간도 같이 빨리 흘러간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녁에 화장실을 가면 동이 터서 나오고, 맥주 두 잔에 두 시간이 흐르는 것은 이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다. 며칠 뒤에 있을 약속을 위해서는 3-4일전에는 출발해야 하고 기차가 도착하여 문이 열려 타려고 하면 기차는 떠나고 철로위에 몸이 떨어질 정도의 스피드로 달린다. 온 세계가 이렇게 급류에 휘말리고 있었다. 정말 세상이 이렇게 변한다면 금세 늙어서 죽지 않을까. 너무나 끔찍하다. 역시 물 흐르듯이 주어진대로 천천히 사는게 제일이다.

 

"최후의 끽연자"는 사회풍속도를 제대로 담아내고 있다. 요즘엔 끽연자들을 위한 자리가 줄어들고 있어 흡연자들을 무슨 전염병 환자처럼 대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정도의 시대가 분명 올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담배연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물론 담배냄새를 극히 싫어하고 혐오한다. 지상에 몇 명 남지 않은 끽연자들이 테러를 감당하지 못해 한 건물에 모였다. 모두 가지고 있는 담배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피우고 죽으리라 결심을 하게 된다. 테러범들을 막기 위해 집 울타리에 철망을 두르고 전기를 흘려 보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이것이 전쟁의 한 형태임을 알게 된다. 담배 피우는게 이렇게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가 놀라게 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최후의 끽연자를 천연기념물로 보고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서늘해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이렇게 이기적일까. 참 무서운 세상이다.

 

누가 타잔이 정의의 기사라고 이야기 했던가. 이것 또한 우리가 만든 허상일 것이다. 노경의 타잔은 기력이 쇠하여 나무에서 자주 떨어지고 몸이 안쑤시는데가 없다. 눈이 점점 나빠져 원숭이 꼬리를 나무로 보고 잡아당기기도 하니 말 다했다. 동물들과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순수 그 자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타잔이 늙어가면서 이렇게 변하다니, 단편 "노경의 타잔"을 보면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삶의 의욕을 얻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늙어가는 타잔의 모습을 그렸다. 나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타잔이 관광상품이 되어 여행사에서 보낸 탐험단의 구경거리가 되는 모습이 안타깝고 타잔의 아들이 여행사에 근무하며 탐험단들을 보내는 모습은 과히 충격적이다. 탐욕스럽게 변한 제인의 모습도 마찬가지. 정글에 살고 있는 이들이 우리와 다름없이 변해가는 모습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SF를 좋아하며 열광하는 내게 "혹천재"는 에일리언에 등장하는 그 끔찍한 생물을 등 뒤에 심어 머리가 좋아져서 성공하려는 인간의 모습에서 답답한 가슴이 일시에 무너져 내린다. 이젠 기대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꼭 내 등에 그 벌레가 붙어있는 듯 끔찍한 느낌이 들어 '성공'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숙주에게 붙어 기생하는 럼프티 험프티를 스스로 붙여야 하나, 아주 기분이 이상해진다. 유쾌하게 웃다보면 가슴은 서늘해지고 입은 굳게 다물어진다. 점점 더 뒤로 갈수록 그 충격이 줄어들긴 하지만 "야마자키", "상실의 날" 등을 읽으면서 작품들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점점 사회는 무섭게 변해가고 이 책속에 있는 일들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동안 시간의 급류에 휘말리고, 최후의 끽연자의 모습을 보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블랙코미디라고 마음을 위로해봐도 답답한 마음이 풀어질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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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해도 참 맛있는 나물이네 밥상 2
김용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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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원으로 밥상차리기"로 나물이네를 처음 만났다. 성별을 따지면서 여자가 꼭 음식을 해야한다고 정해진 것은 없지만 이 땅의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집안에서 음식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나물이네가 남자인 것을 알고 왜그리 부럽고 부끄러워지던지 맛깔스러운 음식을 먹고 싶은만큼이나 나의 요리솜씨 없음에 한탄하게 된다. 그래도 세월이 좋아서 나 같은 초보자들을 위한 간단하고 쉬운 요리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다행스럽다.

 

이전의 책보다 이 책 "나물이네 밥상 2"는 조금 더 다양해지고 전문성을 띠고 있다. 나물반찬을 좋아하는 신랑을 위해 늘 시금치나물만 해주는 나는 이렇게나 많은 나물요리들을 보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 신랑도 옆에서 같이 책장을 넘기며 언젠가 이 많은 나물반찬들을 해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미소를 짓는다. 욕심이 생겨서 "나물이네 밥상 1"도 구입해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본다. 요리연습은 등한시 하면서 요리책만 모으고 있는 내 모습, 그래도 언젠간 어릴적 먹어 본 친정어머니께서 해 주신 깊은 맛을 내는 음식들을 상 위에 내어 놓으리라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요리책이라 대체적으로 실패할 확율이 적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깊은 맛은 내지 못하는 것 같다. 입맛도 제각각이라 집안마다 레시피가 다르니 나의 입맛에도 안맞기 일쑤라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며 실패를 여러 번 하면서 우리 집 입맛에 맞는 요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설탕과 소금, 조미료 쓰는 것을 자제하지만 맵고 새콤한 요리를 좋아하는지라 고추장을 많이 쓰게 되어 신랑이 속이 쓰려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식탁의 일대 대 변신을 도모해야하지 않나 생각하는 참이다.

 

나물이네 요리책에는 그릇 이름은 물론 요리노트라고 하여 어떤 상품을 쓰면 되는지 세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역시 광고효과를 노린 것이다. 초보주부들에게는 이런 정보도 아주 유익하긴 하지만 그릇이름까지 표시하는 것은 보는 것이 조금 불편하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두 군데 요리노트가 중복되는 곳이 있어 사전에 충분한 체크를 하지 못하고 책을 낸 것 같아 괜시리 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날아간 느낌이 들어 아쉽다. 재료손질부터 어드바이스까지 꼼꼼히 요리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을 보며 혼수품으로 꼭 필수적으로 장만해야하는 요리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집에 요리책들이 많지만 요즘은 늘 하는 요리만 하고 이제는 다양하게 하고 싶은 의욕조차 버렸는데 요리책을 보면서 여러가지 해보고 싶은게 생겼다. 책장이 넘기며 '콩나물 장조림'이 나왔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어릴 때 그 맛이 혀끝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요리책을 보며 아무리 노력해봐도 어릴 때의 그 맛은 쉽게 만들 수가 없었다. 언제쯤이면 친정어머니의 손맛을 따라갈 수 있을까.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요리솜씨가 더 좋아 늘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아버지. 요리 못하는 딸을 늘 타박하신다. 사위 밥은 잘 챙겨주는지 늘 걱정하신다. 생선을 먹지 않아 요리를 하지 않게 되니 음식을 더 다양하게 만들지 못하는지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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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펭귄클래식 19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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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에 대한 환상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라" 누가 정해놓은 법칙인지 모르지만 첫사랑에 실패하면 나름 이 말로 마음을 다독거려 본다. 열 여섯살 첫사랑의 열병을 앓은 후 이제 마흔살의 희끗희끗한 새치가 있는 중년의 나이가 된 블라디미르가 들려주는 첫사랑을 들어보자. 그는 자신의 첫사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이웃집 곁채로 이사 온 공작부인의 딸 '지나이다'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하지만 그녀에게 블라디미르는 어디까지나 어린애로 보일뿐 성숙한 남자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사실 얼마전까지 까마귀를 맞추며 시간을 보낸 소년인 것이다.

 

아름다고 매력적인 지나이다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그것을 즐기기까지 하는 모습이란, 솔직히 제목에서 보여지는 "첫사랑"의 풋풋한 모습이 아니기에 불편한 기분이 든다. 어느날부터인가 사랑에 빠진 듯 변해가는 지나이다를 보는 블라디미르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다. 누구일까. 견제도 하고 고민도 해 보지만 누군지 알수가 없다. 그러다 간간이 아버지와 함께 하는 모습을 보이는 지나이다. 그렇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블라디미르는 이미 아버지가 그녀의 상대인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유일하게 블라디미르에게 죄책감을 가지는 지나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기에 그녀를 사랑하는 블라디미르의 마음을 외면해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그녀가 성숙된 사람이었다면 블라디미르에게 거리를 두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고백해야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이다.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어 침묵했겠지만 블라디미르에게는 이것이 가장 잔인한 형태의 고문일 것이다. 물론 그녀 자신도 이 사랑에 괴로워 했기에 다른 이의 마음을 살펴 볼 여유같은 것은 없었을 테지만.

 

그녀와 아버지의 사랑은 아직은 어린 블라디미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채찍을 휘둘러 그녀의 손에 상처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 글을 읽는 나도 블라디미르도 이미 "첫사랑"의 열정, 풋풋함, 순수함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가정에 위협을 가한 지나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 없이 결혼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에게 찾아온 그 사랑을 용납하기 쉽지 않다. 다만 아버지가 너무 일찍 갑작스럽게 죽었기에 그렇게 짧게 살다 가려고 세상을 떠나기전 사랑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지나이다는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뭇 남성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사랑의 모습에 진실성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사랑의 아픔에 못견뎌하는 그녀를 보며 그 열병에 휩싸인 지나이다를 욕하며 손가락질 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에게든 사랑은 사랑이니까. 어떤 모습의 사랑이든 이것으로 블라디미르의 마음도 한층 성숙해졌을 것이다. 한 소년이 어떻게 한 남성으로 변해가는지 그 심리적인 묘사는 탁월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사랑'을 파괴라도 한 듯 별로 유쾌한 기분을 가질 수 없어 아쉽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서만이 비로소 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나 큰 형벌이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려야 하는 일이므로 늘 견제하며 멀리해야겠지만 오늘도 이 세상의 많은 이들은 사랑 앞에 다가서며 그렇게 현실에 맞서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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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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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 편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이 책 한권이 모두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중간쯤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가 끝나고 등장하는 '시체도둑'과 '오랄라'를 보며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혹 이어지는 내용인가 싶어 계속 넘겨보지만 아쉽게도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는 짧게 끝이 나고 만다. 한 사람이 두 가지의 자아를 가진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마음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화학약품을 먹고 생김새는 물론 키까지 작아지며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모습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지금의 모습과 전혀 다른 낯선, 다른 사람으로 변신이 가능하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하이드처럼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분출시키며 거리낌없이 살인도 저지를 수 있을까. 지금 내 안에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아직은 선이 악을 누르고 있기에 "그래선 안된다"고 마음속에서 속삭인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하든 지킬 박사의 몸으로 숨을 수만 있다면 하이드처럼 하지 못하리라 장담하진 못하겠다. 지킬 박사의 오랜 친구인 변호사 어터슨은 지킬 박사가 작성한 유언장을 보며 불안한 마음을 느낀다. 실종되거나 사망시 하이드에게 재산을 넘긴다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혹 하이드란 사람에게 협박을 당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걱정이 된다.

 

하이드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그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악의 기운에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안에 있는 악의 기운이 하이드에게서 나오는 그 비숫한 기운과 만나 나의 깊은 속마음을 들킨 듯 불편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약물로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한 지킬 박사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린다. 하이드로 변신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잦은 약물의 사용으로 이제는 하이드에게 자신의 몸을 잠식당하고 지킬 박사로써 지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급기야는 자기 전에 지킬 박사였으나 일어났을 때 하이드로 변해있을 때도 있다. 이 모습을 직접 보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지킬 박사의 친구 래니언 박사는 인류가 있어온 이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 현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되니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하이드의 말에 넘어가 그가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된 래니언 박사는 이후로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하이드가 가진 악의 단편적인 모습이지만 이 상황은 참으로 섬뜩하다.

 

지킬 박사를 완전히 장악하는 하이드, 이제 이 세상에서 지킬 박사는 사라졌다. 헨리 지킬의 삶에 종지부를 찍은 그는 하이드를 막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몸에서 악이 사라지게 만든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되는 이 이야기는 약물에 의해 변신하는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선과 악의 모습을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내 안에 있는 '악'의 실체의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나게 만든다. 하이드의 모습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기에 지킬 박사를 더욱 가련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성이 존재할 때 우리는 밝은 햇살아래 충분히 악을 누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까.

 

이후에 이어지는 '시체도둑', '오랄라' 단편들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비해 몰입하게 하는 힘은 약하지만 충분히 재미를 선사한다. 해부에 사용되는 시체들이 살해되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페츠는 맥팔레인과 그레이의 죽음에 공범이 되어 버린다. 물론 그레이를 죽인 사람은 맥팔레인지만 돈으로 매수당해 이 일을 함구해 버린다. 그날 이후 해부학에 쓰일 시체를 구하기 위해 도굴해온 여자시체를 담은 자루에서 오래전에 죽어 해부당한 그레이와 마주하게 되는 페츠와 맥팔레인. 초자연적인 현상인 이 사건은, 그 상황을 상상하면 끔찍하지만 그레이의 한 맺힌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맥팔레인은 그 후로 런던에서 유명한 의사가 되어 그 이상 벌을 받은 것 같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페츠는 죄책감에 점점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 단편 '오랄라'는 현대에 살고 있는 내가 이해하기엔 조금 어렵게 다가온다. 흡혈귀와 저주 받은 가문의 이야기라 그 인과관계에 현실성이 없어 책 속에 빠져들기가 쉽지 않아 많이 아쉬웠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세 편의 단편들은 선과 악,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함으로써 나를 오롯이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 주어 마음속의 악을 보이지 않도록 숨기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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