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새빌 경의 범죄 - 오스카 와일드 단편소설전집
오스카 와일드 지음, 최성진 옮김 / 북이데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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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책 제목을 보고 추리소설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단편 [행복한 왕자]를 읽으면서 애니메이션으로 자주 봤었던 이 이야기의 작가가 오스카 와일드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어 부끄러웠다. 저자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좀 특이하고 혐오스러운 동성애자로 불리어졌다는 글을 이 책을 읽기 전에 봤지만 단편소설들을 읽으면서 이런 편협한 시각에 대한 글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어쩌면 이렇게 유쾌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찬탄하며 저자의 이력을 다시 한번 읽어보게 되었을 뿐이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아서 새빌 경의 범죄], 맞다 제목처럼 아서 새빌 경이 저지르는 범죄이야기가 맞다. 아서 경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는 말을 수상술사 포저스에게 들은 후 오로지 사랑하는 시빌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후 결혼을 하겠다 결심한다. 어쩌면 이렇게 꽉 막힌 사람일 수 있을까. 아서 경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하기 보단 거기에 순응하여 오히려 적극적으로 살인을 계획하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이러다 정말 살인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얼마나 정확하게 사람의 운명을 볼 수 있는지 모르지만 포저스는 자신의 운명은 볼 수 없었나 보다. 전과 후를 따져보면 복잡해지기만 해서 아서 새빌경의 범죄에 대해 논하는 것은 머리만 아파 이쯤에서 정리하자면 그의 완전 범죄로 인해 아서 경은 시빌과 함께 아주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이 그냥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해서 얻는 것이라는 생각에 아서 경은 삶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고 시빌을 더 많이 사랑한다. 수상술의 믿음을 논하기에 앞서 이 결과를 놓고 볼 때 아서 경이 이 수상술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서 경이 살인을 저지른 것은 맞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아서 경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 단지 유쾌하게 이 상황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가슴이 뻥 뚫린 듯 유쾌하게 웃고 나니 나도 심각한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저자의 행복한 글을 읽은 듯 마음까지 가벼워졌다. 물론 다른 단편들에 마음이 뺏겨 아서 경의 죄에 대해선 금세 잊고 말았지만 말이다.

 

[행복한 왕자] 단편부터는 단편소설이기 보다는 동화책을 읽는 듯 한데 단편 [나이팅게일과 장미]에서 인간의 사랑을 위해 심장에 가시를 박고 밤이 새도록 노래를 하며 죽어간 나이팅게일을 보며 그 죽음이 인간의 물질적인 욕심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슬퍼 가슴이 아팠다. 가볍게 읽을 동화라고만 생각했다면 단편 [백만장자 모델]을 끝으로 읽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짧은 단편들이 어떻게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지 알고 싶다면 계속 읽어 보기를 바란다.

 

단편 [캔터빌의 유령]을 읽으면 유령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 행동에 처연함마저 느끼게 되고 쌍둥이 형제에 의해 유령이 골탕을 먹을 때면 즐거워지기까지 한다. 캔터빌의 유령이 자신이 저지른 악행으로 안식에 들지 못할 때 버지니아가 그를 어떻게 구원해줬으며 그에게서 받은 보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아 서운함마저 들지만 이솝우화 같은 단편 [헌신적인 친구]와 단편 [공주의 생일]을 읽다보면 그 서운함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책 "아서 새빌 경의 범죄"의 단편들속에는 사람이 빠지고서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이유가 있든 사악한 행동을 하는데 있어 그 중심에 인간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죽어간 나이팅게일을 보라. 배고파 하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행복한 왕자 또한 인간의 모습에 반하여 선한 존재로 보여진다. 오해속에 그 사랑을 의심하는 단편 [비밀 없는 스핑크스]는 나도 제럴드와 같이 앨로이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긴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란 늘 그렇지 않은가. 편견과 오해, 거짓속에서 홀로 자신을 높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새나 동물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해도 그 행동은 인간의 모습을 닮았을 것이다. 사람들에 대해 논하지 않고는 그 어떤 이야기도 세상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겠지만 이 단편들을 읽으며 조금은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그속에 나도 포함되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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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1
스제펑 지음, 차혜정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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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삼국지를 7권까지 읽다가 관우와 장비가 죽는 것을 보고 흥미가 떨어져 손에서 놔 버렸지만 이 '적벽대전'만큼은 확실하게 기억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가장 재밌는 부분을 발췌하여 따로 '적벽대전'이라는 책이 나온 것에 대해 사실 조금은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왠걸, 뒤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기억이 안나는 거다. 거기다 삼국지보다 쉽게 현대적으로 쉽게 풀어쓴 이 책의 책장이 왜그리 빨리 넘어가던지, 나는 점점 영웅들의 싸움에 몰입해가기 시작했다. 이 책에 표현된 "까놓고 말해서"라든가, "강동의 여자들이 주유를 보면 쓰러진다"는 표현은 확실히 요즘에서야 볼 수 있는 표현이라 삼국지의 그 묵직한 무게감을 떨어뜨리긴 하지만 영화의 스틸 사진이 들어 있어 이 싸움의 승자를 알고 있음에도 빠져들게 만든다.

 

삼국지보다 '적벽대전'에서 좀 더 많이 다루어지는 내용이 있다면 대교와 소교 두 여인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조조를 흠모해 온 대교가 손책의 여자가 되어 아들까지 낳았어도 여전히 그를 마음속에 품고 사는 비련의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소교는 주유의 아내가 되어 그를 사랑하며 언니 대교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솔직히 대교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들까지 낳았건만 조조를 영웅으로 여기며 손책을 간신배 대하듯 하는 그녀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모성조차 찾아볼 수 없는 대교의 모습은 오히려 형수를 사랑하는 손권의 마음으로 인해 일편단심 조조를 향한 마음마저 진실성이 없게 만들 뿐이다.  

 

소교를 데리고 전장에 나갈 수 있게 허락한 손권의 명으로 주유는 소교와 함께 '적벽대전'에 임하게 된다.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장에 한 떨기 꽃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그것도 이 세상 그 누구의 미모와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소교가 이곳에 있음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많을 것이다. 조조는 왕실의 이름을 걸고 나섰다는 명분이 있긴 하지만 사실 속마음은 대교, 소교를 손 안에 넣기 위한 마음도 있을 터, 눈 앞에 소교가 있다는 생각에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는 자만심과 함께 가슴마저 들뜬다. 주유 또한 만약 이 싸움에 진다면 소교와 함께 죽으리라는 어찌 보면 슬픈 사랑의 결말을 보는 것 같지만 그런 마음으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으니 누가 이길지는 이 싸움을 지켜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당연히 이 '적벽대전'의 볼거리는 주유와 제갈공명의 계략으로 조조와 싸우는 내용일 것이다. 제갈공명이 없었다면 이 싸움의 승패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서로 속고 속이는게 전쟁이라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계책을 쓰는 것을 보면서 아마, 이같은 내용은 사실이 아닐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독자들도 눈치챌만큼 뻔한 수법이라니 영웅들도 이런면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제갈공명과 비교되는 조조와 주유의 계책을 보고 있자면 한 편의 '쇼'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제갈공명도 동풍을 불어오게 할 수 있다며 제단을 쌓게 하여 자신의 손으로 동풍을 불러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사실 이 장면은 독자들이 제갈공명의 생각을 알고 있긴 하지만 과연 때맞춰 동풍이 불어줄까란 생각에 긴장감마저 들게 하여 가볍게 느껴지는 장면이 아니었다.

 

'적벽대전'만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보니 싸움이 끝나고 손권과 대교의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 것이 뜬금없이 느껴져 많이 아쉽긴 하지만 영화도 함께 본다면 오롯이 영웅들의 싸움에 함께 있는 듯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적벽대전'이라 책을 읽는 것이 저어되었다면 이제는 그런 생각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영화에서는 더 완벽하게 '적벽대전'을 재현했겠지만 영웅, 전쟁, 사랑이야기 등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소재들이 들어있는 책 또한 영화 못지 않은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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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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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버지 안조 세이지의 죽음을 파헤치던 다미오 또한 죽음을 맞고 다미오의 아들 가즈야에 이르러서야 이들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가 밝혀진다. 당연하게도 나는 안조 세이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져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살인사건의 희생자들과 안조 세이지의 죽음은 철저하게 그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수를 지켜내기 위한 희생이었다면 나는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경관의 피'의 저자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이란 없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일까.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사람만이 죄가 있는 사람을 단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모르겠다. 아아,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럽다. 60여 년에 이르는 3대에 걸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쉼없이 달려왔는가. 사건을 파헤치던 세이지가 죽고 그 죽음이 자살로 처리되고 순직이 되지 못했을 때 나는 오로지 정의감에 불타올라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이 꼭 잡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권의 마지막장까지 읽은 나는 다시 되묻게 된다. 정말 범인이 누구인지 밝힐 이유가 있었을까.

 

1대 안조 세이지, 2대 안조 다미오, 3대 안조 가즈야까지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가 이어져 마지막에 가서야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기에 이 책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세이지가 파헤치던 두 건의 미해결 살인사건과 그 자신의 죽음이 큰 축이 되지만 다미오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덴노지 주재소에 와서야 아버지의 죽음을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그전까지는 다미오가 경찰이 되어 자신에게 부여된 업무인 스파이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그 외에 자신에게 맡겨진 사건들에 대해 간간이 서술할 뿐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지만 아버지가 걸어간 길을 따라 경관이 된다는 것은 어떤 운명의 힘이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안조 세이지의 죽음이 발판이 되었겠지만 이상적인 경찰관이 되고 싶은 사명감이 다미오는 물론 가즈야를 경찰관이 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다미오는 경찰관이 되어 아버지 세이지의 죽음을 알아보겠다는 포부가 있었지만 막상 경찰관이 되어 맡게 된 스파이 활동으로 인한 인격파괴 장애로 자신의 의지를 제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세이지의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또한 아버지 세이지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못한 채 충분한 복선만 깔아두고 안타깝게도 자신 또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때문에 가즈야의 역할이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해지는 것이다.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 냉혹한 사회에서 정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살아가는 경찰관들의 이야기는 3대에 걸쳐 경관이 되어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 세이지, 다미오, 가즈야의 삶을 통해 선과 악은 물론 정의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저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여 이 책을 펼쳤다면 가슴이 답답하여 좀처럼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불의에 타협하고 정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저자가 만든 결말에 동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다수를 위한 희생이라도 선이 될 수 있다면 다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선이 될까, 악이 될까. 이 물음에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아직도 머릿속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미해결 된 두 건의 살인사건에 대한 설명이 너무 미흡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이 결말에 더 동조가 안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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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씨의 맛
조경수 외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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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는 델바터 가의 오래된 집으로 돌아온다. 외할머니 베르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왔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던 이 슬픔의 덩어리를 삼켜 버릴 수 있을까. 이 집을 떠올릴 때면 늘 달콤한 사과향기와 함께 지독한 아픔이 생각난다. 때론 망각이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지만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외할머니 베르타는 자신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살아온 생애를 하나씩 잊어간다. '추락'은 망각과 함께 한 사람의 인생을,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버리지만 오히려 타인에 의해서 사라져 버릴 모든 것들이 세상에 향해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타인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드러날 때면 마음속에 있는 아련한 느낌과 함께 모든 것을 손으로 쓸곤 했던 외할머니의 모습도 떠오르게 한다.  

 

3대에 이어지는 신비로운 사랑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현재의 사랑에 가슴이 더 설레인다. 이리스와 미라의 동생 막스의 사랑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본 막스로 인해 한층 더 그 사랑이 단단해 보인다. 물론 이리스가 보츠하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사랑이라는 점에서 소극적이긴 하지만 결국 이곳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이리스의 상황을 볼 때 이 사랑이 운명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독일의 젊은 여성 작가 카타리나 하게나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책을 읽기전 간략한 줄거리를 읽고 이리스가 들려줄게 될 3대에 걸친 한 집안 여성들의 마법과도 같은 사랑이야기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판타지 장르의 성향이 강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 이유는 집안의 물건을 만지면 그 상황이 떠오르면서 현실처럼 눈앞에 펼쳐진다든가, 아마도 그런 상황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달콤한 사과향기속에 '사랑'을 가슴속에 품은 여인들의 사랑을 이렇게 깊이있게 그려냈을 줄은 처음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손끝에서 전류가 새어나오는 둘째 잉가 이모, 아름다운 외모로인해 뭇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지만 자신만을 위한 온전한 사랑을 품에 넣지 못한다. 손끝에서 전류가 나오다니 물론 이 상황이 판타지의 느낌을 전달하긴 하지만 로스마리에 의해 부서진 그녀의 사랑은 독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서로 마주보는 사랑을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봐야만 했고 그 사랑의 열병으로 일찍 죽게 된 안나 이모 할머니와 결혼한 후 늘 친정을 그리워했던 엄마, 이들 모두의 마음이 집안 곳곳에 녹아있다.

 

외할머니는 세 딸들을 놔두고 왜 이리스에게 이 집을 상속하겠다고 했을까. 렉소브씨가 들려주는 말을 토대로 외할머니 생애를 더듬어 보아도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이유를 짐작해보자면 떠났던 이리스를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곳을 떠올릴 때면 슬픔이 먼저 떠올랐던 이리스에게 새로운 추억을 안겨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뿐이다.

 

늘 그 자리에 머물며 가족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델바터 가의 오래된 집은 이제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된다. 새롭게 탄생되는 이야기들이 사랑이야기일 수도 있고 죽음 또는 망각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삶이란 그렇게 반복됨으로써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의미가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달콤한 사과향기가 코끝을 스미고, 세월이 어김없이 흘러간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슬프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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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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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처럼 여행하는데 권리가 어디 있나. 그냥 무작정 떠나면 되지. 물론 국경안으로 발 들이기 힘든 곳이 있음을 알고 있다. 저자 김연수에게 '국경'의 의미란 단순히 나라와 나라사이를 구분짓는 경계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글을 쓰는 작가로써 자신의 문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극대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에게 '국경'이란 쉽게 넘어설 수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지금까지 읽은 김연수의 책들은 앞서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아주 암울하고 슬프게 그려 놓았다면 이 책 '여행할 권리'는 때론 유쾌하고 때론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살아가던 우리의 옛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의 발길 따라 걷다 보면 내가 처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긴 하지만 역시 그가 집필한 "밤은 노래한다'의 자료를 구하기 위한 여정이 자주 등장해 이 여행길 또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웃으며 할 수 있는 여행은 아니었다.

 

'민생단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아마 그래서 이전에 읽은 "밤은 노래한다"와 이어지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만 오랜만에 무거운 주제를 던져주지 않는 유쾌한 에세이를 기대한 나는 책장을 넘길 수록 역시 이전에 느꼈던 김연수의 문학세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책장을 넘기는 것이 힘겹기도 했다. 리얼리티를 논하고 '국경'을 이야기 하던 저자도 자신의 문학세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에게도 '국경'은 쉽게 넘을 수 없는 단단한 장벽이었다. 

 

여행하면서 왜 이곳으로 떠나오게 되었는지 자세히 언급되지 않은 곳이 많아서 여행한 곳을 급하게 오려붙인 듯한 느낌이 강해서 조금 아쉽긴 하지만 책속에 실려 있는 사진을 보면서 낯선 공간이 갑자기 낯익은 곳으로 바뀌고 그곳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저자에게 여행이란 그저 기념물을 보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자신의 문학적 세상을 넓혀가기 위한 여행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여 힘들겠다는 생각도 해 보지만 이렇게 발길 닿는대로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이 부럽다. 국경 너머의 세상으로 가는 길은 일단 서류를 준비하는 것에서 시작되겠지만 그보다 마음을 움직여 한발짝 내딛는 것부터 시작되니 그냥 훌쩍 떠나고 싶다고 가고 싶은 나라의 국경을 쉽게 넘어갈 수는 없어 세계를 향한 여행은 늘 어렵게 다가온다.

 

남과 북이 나뉘어 대치중인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작가가 왜 그토록 '국경'에 큰 의미를 두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의 문학적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고 출발선과 가는 방향이 달라 전혀 다른 세상을 바라보기에 '국경'을 넘어 나아간다는 의미는 역시 상상력의 자유로움을 말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문학적 한계를 느끼게 된다.

 

단순히 떠남을 뜻하는 '여행'이 아니어서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어 책의 무게가 가슴을 짓누른다. 늘 비슷비슷한 소재를 다룬 우리나라의 문학책들을 접하면서 그 반복성에 지겨움을 느끼게 되어 오히려 작가가 보여주는 문학세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 책 또한 이야기들의 무거움으로 책을 던져 버리고 일상을 벗어나고 싶게 만든다. 일탈을 꿈꾸게 만드는 '여행할 권리', 어쩌면 이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속한 일상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만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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