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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씨의 맛
조경수 외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이리스는 델바터 가의 오래된 집으로 돌아온다. 외할머니 베르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왔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던 이 슬픔의 덩어리를 삼켜 버릴 수 있을까. 이 집을 떠올릴 때면 늘 달콤한 사과향기와 함께 지독한 아픔이 생각난다. 때론 망각이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지만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외할머니 베르타는 자신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살아온 생애를 하나씩 잊어간다. '추락'은 망각과 함께 한 사람의 인생을,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버리지만 오히려 타인에 의해서 사라져 버릴 모든 것들이 세상에 향해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타인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드러날 때면 마음속에 있는 아련한 느낌과 함께 모든 것을 손으로 쓸곤 했던 외할머니의 모습도 떠오르게 한다.
3대에 이어지는 신비로운 사랑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현재의 사랑에 가슴이 더 설레인다. 이리스와 미라의 동생 막스의 사랑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본 막스로 인해 한층 더 그 사랑이 단단해 보인다. 물론 이리스가 보츠하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사랑이라는 점에서 소극적이긴 하지만 결국 이곳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이리스의 상황을 볼 때 이 사랑이 운명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독일의 젊은 여성 작가 카타리나 하게나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책을 읽기전 간략한 줄거리를 읽고 이리스가 들려줄게 될 3대에 걸친 한 집안 여성들의 마법과도 같은 사랑이야기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판타지 장르의 성향이 강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 이유는 집안의 물건을 만지면 그 상황이 떠오르면서 현실처럼 눈앞에 펼쳐진다든가, 아마도 그런 상황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달콤한 사과향기속에 '사랑'을 가슴속에 품은 여인들의 사랑을 이렇게 깊이있게 그려냈을 줄은 처음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손끝에서 전류가 새어나오는 둘째 잉가 이모, 아름다운 외모로인해 뭇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지만 자신만을 위한 온전한 사랑을 품에 넣지 못한다. 손끝에서 전류가 나오다니 물론 이 상황이 판타지의 느낌을 전달하긴 하지만 로스마리에 의해 부서진 그녀의 사랑은 독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서로 마주보는 사랑을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봐야만 했고 그 사랑의 열병으로 일찍 죽게 된 안나 이모 할머니와 결혼한 후 늘 친정을 그리워했던 엄마, 이들 모두의 마음이 집안 곳곳에 녹아있다.
외할머니는 세 딸들을 놔두고 왜 이리스에게 이 집을 상속하겠다고 했을까. 렉소브씨가 들려주는 말을 토대로 외할머니 생애를 더듬어 보아도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이유를 짐작해보자면 떠났던 이리스를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곳을 떠올릴 때면 슬픔이 먼저 떠올랐던 이리스에게 새로운 추억을 안겨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뿐이다.
늘 그 자리에 머물며 가족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델바터 가의 오래된 집은 이제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된다. 새롭게 탄생되는 이야기들이 사랑이야기일 수도 있고 죽음 또는 망각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삶이란 그렇게 반복됨으로써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의미가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달콤한 사과향기가 코끝을 스미고, 세월이 어김없이 흘러간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슬프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