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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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무식하다고 한마디 들을지 모르지만 13계단은 교수형에 처해질 사형수가 올라가게 되는 계단을 말하는 것인줄 알았다. 근데 실제 사형수가 형이 확정되어 사형집행되는 그 결정이 나기까지 단계가 13단계이라 그렇게 이름붙여진 것이라니 그 시간은 보통 3개월, 한사람의 인생을 놓고 과연 사형하는 것이 옳다 그르다라는 판단조차 내릴 권한이 없는 약하고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다 보니 그런 관점에서 책을 읽진 않았다. 단지 살인을 한 사람에겐 평생 감옥살이를 하게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저 원죄(억울한 죄)로 인해 사형당하는 것을 막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결말을 향해 나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고 보니 법을 정하여 범죄에 대해 대처할 필요가 있어 형을 집행하는 것에는 이해가 가지만 법이 생긴이래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을때 "분명 그러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지 못하겠기에 최소한 죄를 지은사람이 자신의 죄를 닦는 그런 올바른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교도관인 난고가 두명의 죄수를 사형집행 하고 오랜시간동안 고뇌에 차서 과연 범죄자에게 갱생의 길이 있는지 응보형 사상의 진실에 가장 근접한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사형수의 목에 줄을 걸때의 그 느낌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자면서도 신음소리를 내는 그에게 어쩌면 익명의 독지가가 사카키바라의 원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의 무죄를 밝혀달라고 의뢰한 일은 자신에 손에 의해 죽어간 470번, 160번의 생명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행한 살인에 대한 죄 닦음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우츠기 게이스케와 요시에가 살해 당했다. 사건 현장과 가까운 곳에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고 누워있는 사카키바라가 용의자로 떠오른다. 그 주변에 B형 혈액형의 섬유조각도 나왔지만 증거로 제시하지 않았고 살해할때 사용한 손도끼와 인감, 통장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그에게 여전히 혐의를 두고 사형수로 복역하게 된다. 사카키바라는 그 사건의 전후 시간이 전혀 기억에 없기에 자신이 살인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 어쩌면 원죄의 가능성도 있다. 이 사람의 무죄를 밝히는 일에 난고가 함께 할 사람으로 지목한 이는 바로 준이치. 이 사건이 일어난 10년전에 그 지방에 있었고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 혼자힘으로 자신의 죄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모습과 갱생의 희망이 보인다는 점에서 그가 함께 하길 권하게 된다. 더구나 난고가 처음 사형집행을 하며 사람을 죽인 나이가 준이치가 상해 치사로 사람을 죽인 나이와 똑같지 않은가. 거기에서 우연성과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우스울지 모르지만 교도관 생활로 아주 정확하게 사람을 고른 것 같다.  


솔직히 검찰쪽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사를 다 했을텐데 단지 사카키바라의 기억속의 한조각, "죽음이라는 공포심을 안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라는 단서 하나가지고 그 일대 계단을 수색하는 작업은 너무 바보 같다. 그러나 제대로 짚어나가고 있기에 그들이 탐문해 가며 만나는 이들중 점점 사건의 핵심으로 좁혀져 나도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닐까?'라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죄를 짓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과연 사카키바라가 무죄선고를 받고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10년간 자신의 인생은 어찌되는 것인가. 그저 목숨을 건졌다고 기뻐해야할까. 세간의 시선들이 그렇지 않기에 난 그 뒷일까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진범이 밝혀지는 과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증거물이 묻힌 곳을 찾아내고 그것이 수면위에 오를것이라는 것을 알고 난고를 공격하다니 가슴이 두근거릴정도로 정신을 차릴수가 없다. 그런데 또 다른 움직임, 준이치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의 동기에 대해서 사실 100% 다 이해하기 어렵다.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그런 위험한 일을 자식을 위해서 한다는 것에 솔직히 동조하기 쉽지가 않다. 사카키바라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돌아와 왜 그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고 그 곳에 쓰러져 있었는지 그 사고로 인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명쾌한 답변이 없어 답답하다. 10년간 사형대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매일같이 느끼며 살아왔으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닐텐데 그때 죽지 않고 살아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준이치가 난고와 함께 하여 결국엔 준이치의 생명을 건지게 되지만 이런 우연들이 모여 점점 진범의 목을 조이는 결과를 보여 다른쪽에서 사카키바라의 사형확정을 위해 3개월동안의 13계단을 나아가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사건의 핵심에 다가가는 모습이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선사한 것도 맞지만 너무 우연들이 겹친다. 준이치가 저지른 10년전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게 일어난 상해 치사사건이 준이치를 사카키바라의 무죄 해명과 연결되어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모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결말에 대핸 정확한 해명도 없다.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만 있을뿐. 그것이 너무 아쉽다. 모든 것이 다 잘된 것은 아니기에 가슴이 답답하다. 정말 세상에는 명확한 선과 악은 없는 것일까.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 권한은 과연 누가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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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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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이란 곳은 그래 아마도 앞치마를 두르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엄마의 공간일 것이다. 칼질 하는 소리, 냄비안에서 음식이 끓어 넘치는 소리, 물소리가 어우러지고 코속으로 밀려드는 달콤한 냄새들이 있는 곳. 그래서 부엌을 떠올리면 엄마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음식하는 소리를 들으면 즐거운 나의 집이 떠오른다? 이건 명백히 가사노동은 여자에게만 국한된다는 의사표현일수도 있겠지만 이 공간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만큼 편안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미카게는 왜 음식냄새 떠다니는 부엌에서 늘 자고 싶은 것일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엄마의 향기가 그리워졌을까. 그 그리움이 부엌에서 자는 잠자리의 편안함을 제공하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살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유이치의 집으로 들어가서 살지만 물론 그곳에서도 부엌과 가까운 소파가 그녀의 자리다. 음식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음식이 만들어지고 유이치의 엄마, 실은 성전환 수술을 해서 예전엔 아빠였던 에리코와 세 명이서 속이 빈것 같지만 여느 평범한 가족같이 단란하게 보낸다. 이것이 나중에 그리움이 되고 슬픔이 되어 맘속을 온통 휘저어 버리지만 지금이 나중에 기억했을때 참 행복했다라는 것은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니.  

유이치를 낳은 엄마가 죽고 더이상 남자로 살기 싫어진 에리코. 파인애플 화분을 집에 가지고 가면서 맘껏 울지도 못하는 남자란 것이 싫어져 훌훌 벗어던지고 싶었을까. 에리코가 죽었을때 유이치는 또 한번 엄마와 아빠를 보낸게 되어 버렸으니 그 슬픔이 오죽 컸을까.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여전히 숨쉬고 먹고 세월을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에겐 잔인한 일이다. 유이치와 미카게가 함께 한다면 그들의 슬픔을 견디기 훨씬 쉬워지겠지만 오히려 슬픔이란것이 때때로 치밀로 올라와 힘들게 되지 않을까. 나혼자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 오히려 더 서로 의지하기 위하여 맘을 열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더 나은 삶을 택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에리코는 없지만 변함없이 대하는 두사람의 모습은 가슴아프지만 이쁜 사랑을 하게 되길 바란다. 

여기에 등장하는 단편들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보내는 연습을 시키려고 그러는지 온통 눈물과 슬픔만 보이는 것 같다. 죽은사람과 살아있는 사람 사이에는 늘 강이 존재하는 것 같다. 히토시가 교통사고로 죽고 다리 위에서 늘 그를 추억하는 사츠키. 갑자기 떠나간 그가 몹시도 그립다. 조깅으로 맘을 달래어 보지만 늘 가슴속에 머물고 있는 그 때문에 점점 초췌해지는 사츠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히토시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를 보는 사츠키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츠키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라라라는 사람으로 인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던 것. 이런 능력은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괴물같아 보인다고 피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연인들에게 작별인사정도는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내 마음에 머물러 가슴이 따뜻해진다.  

준비된 이별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앞으로 살아가는 사람 둘다 힘들다. 이처럼 백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그리운 사람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도 참 위안이 될텐데. 세상을 살아가는데 좀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가까운 이들이 내 곁에 있지만 세월이 흘러 하나둘 떠나간다면 그 다리에 서서 난 어떤이를 불러내고 싶을까. 아니 날 보고 싶어하는이가 있을까. 웃으면서 떠날 수 있다면 남아있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텐데. 비록 소설속이었지만 현실과 혼동이 되어 나도 함께 히토시를 본 듯 현실인지 꿈속인지 구별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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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살인사건 - 람세스 최후의 비밀 2
브래드 기글리 지음 / 따뜻한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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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권력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는가 보다. 권좌를 향한 욕망이 어김없이 부른 살육. 나에게 왕의 자리를 권한다면 잘 통치하지도 못하겠지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중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라 스스로 자멸할지도 모르겠다. 람세스 4세에게 믿음직한 충신인 세메르켓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는 람세스 3세인 아버지가 아내 티야 왕비의 손에 죽고 왕이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 위에 앉은 왕좌. 과연 그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날 날아든 라미의 편지, 그것은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메네프의 집에..엘람의 왕자..나이아..살해당함 라미" 툭툭 끊어지는 편지였지만 세메르켓을 바빌론으로 부를 충분한 이유가 되어준다. 사랑하는 아내 나이아 비록 헤어진 부인이지만, 그녀가 죽었다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몸안에 병을 가진 람세스4세가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바빌론에서 '악의 신상'을 가져오라 명령하면서 잃을 것이 많은 세메르켓에게 나이아와 라미도 찾아오라 명한다. 람세스 3세의 사건에 연류되어 이집트에서 추방당한 나이아와 라미. 정말 이들은 살해당한 것일까. 그들이 세메르켓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고 바빌론으로 부르고 있다.  

파라오가 가져오라 명한 이방의 신상보다 아내 나이아를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는 세메르켓. 솔직히 직무를 소홀히 하는 듯 하여 이해할 순 없지만 모든 사건들이 톱니바퀴처럼 물려가는 것을 보며 결국 나이아를 찾아야만 피니키르 공주를 찾을 수 있고 쿠티르왕이 여동생 피니키르 공주를 찾으면 악의 신상을 준다는 약속을 했기에 이 신상을 이집트로 가져갈 수가 있게 된다. 모든 문제들은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달려오는 것 같다. 

죽음의 그림자에서도 여러 차례 벗어나는 세메르켓, 벌레들의 방에서조차 타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는 그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빌론에 도착하자 감시를 하며 따라붙는 첩자들.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이 흑두단 첩자 갈주, 쿠리 형제에게 목숨을 몇번 빚지게 되니 참으로 어설픈 첩자들이라 미행을 따라붙어도 늘 들키는지라 조금은 인간적으로 보여지더니 역시 세메르켓을 도와주는 존재가 되는구나.   

결코 뛰어난 수사력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닌 우연에 의한 그리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어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사건이 하나씩 하나씩 눈 앞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피니키르 공주가 있던 농원에 도착하여 아직 그자리에 박혀있는 화살을 보곤 그것이 이집트의 것이라 경악하고 람세스 3세때의 일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되는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없지만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이아를 찾는 점에 전력을 다하고 그녀의 존재가 부각될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 또한 힘이 빠지고 진정이 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의 열쇠는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막연해지고 만다. 

바빌론으로 들어갈때 자신을 도와준 마르두크의 존재에 대해서 대충 생각했었지만 그가 바빌론의 새 왕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렇듯 이 사건은 세메르켓이 해결하도록 하늘조차도 돕는가 보다. 메네프 대사와 마야텀의 결탁은 다음 보위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많은 이들을 죽였으니 그 끝이야 어찌 될지 자명한 일이나 큰 벌을 받았으면 했다. 메네프 대사에게 가해진 벌은 정말 속이 후련할 정도이나 마야텀에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화가난다. 모든 일의 원흉이 그이거늘 왜 미행이라도 붙이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람세스 3세를 죽이고 종적을 감춘 왕비 티야를 찾아가는 마야텀을 그대로 둠으로써 람세스 최후의 비밀 3편이 나올 서막을 알리는 것이 아닐지. 갑자기 이야기가 툭 끊어져 버러 정신을 차릴 수 없지만 선이 악을 이김으로써 이야기가 갈무리 되니 밤을 새워 책을 읽은 보람을 느끼게 된다.  

진정 한 여인만을 이렇듯 사랑할 수 있을까. 일전에 시누헤를 읽으면서도 뇌수술을 하는 이집트인에게 놀라움을 느꼈는데 라미의 머리를 열어 수술하는 것은 정말 다시 보아도 놀랍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지혈자라는 것도 그렇다. 존재하는것만으로도 피가 멈추게 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주술적인 의미이든 아니든 악의 신상을 통해 굽었던 등이 세워지고 강인한 모습의 람세스 4세를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아직 세자가 6세라 어리므로 왕위를 탄탄하게 다질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제발 세자가 무럭무럭 자라 마야텀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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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이르는 다리
카린 D. 케다 지음, 박상덕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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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용서에 이르는 다리가 있을까. 나 스스로가 놓아야할 다리겠지만 이곳을 지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치는 것이 '분노'의 다리다. 정확한 수순을 겪는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놓아버리면 되겠지만 이것이 독이 되어 나의 마음을 갉아먹기에 방치할 수 없다. 용서와 분노는 가를 수 없는 존재여서 사는 것이 다 그렇다고 해도 놓아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알면서도 안되는 용서. 지금도 난 마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욕하고 할퀴고 있다. 이것은 부메랑과 같아서 내가 한번 때리면 나를 때리고 내가 죽이면 나를 죽이는 비수가 되어 박혀버린다.

종교적인 냄새가 짙게 드러나는 이런 장르의 책을 반가워하지 않지만 현대인의 '화'를 다스리고 마음을 풀어버리는 '용서'는 필요한 일이기에 굳이 종교에 귀의하지 않더라도 공감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내 마음도 다스려지길 바란다. 파란 하늘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다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한발짝 내딛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가 자문해 보면 발을 뗄수가 없다. 뺨을 맞았을때 다른쪽 뺨도 내어주는 행동을 나는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은 기억도 못할 일을 난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꼽씹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못났다. 나의 미워하는 감정을 어느 순간 풀어냈을때 상대방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뭘 그런것을 가지고 그러냐는 반응을 보일때 참으로 슬퍼진다. "난 이정도의 인간인가" 하는 자괴감을 가지게 되니 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실천하고 싶을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두 손을 부르르 떨고 진정되지 않은 가슴이 두방망이질 칠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니 정말 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싶은데 용서가 되지 않아 기억의 한편을 뜯어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희노애락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에 분노를 뿜어낼 수 있는 문을 언제나 열어둘 필요가 있다. 다정한 목소리로 용서에 이르는 다리에 이르게 이끌어주지만 아직 내안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들은 그것을 거부한다. 책 한권으로 떨쳐버릴 것들이 아닌 것이다. 뼈에 새겨진 기억들이 누가 죽은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생각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에 쉽사리 놓아버릴 수가 없다. 용서하면 마음에서 놓여나면 편안해진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웃고 있지만 내 영혼은 웃지 않고 있음을 왜 모르겠는가. 이렇게 내가 성장하고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을 위안삼아 기억이 점점 퇴색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지나 용서란 것을 하지 않아도 용서에 이르는 다리에 나도 모르게 한발 내딛고 있지 않을까. 비겁하다고? 내 기억이지만 내맘대로 되지 않으니 어쩌란 말인가. 이런 장르의 책들을 읽으며 심신을 단련하다 보면 그럴때가 오지 않을까.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누군가 용서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 말에도 귀를 기울여 보련다.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 이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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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생 모임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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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 모임에 참여할 자격이 되는데 초등학교 시절 두번의 전학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문의 한부분에 전학생 모임란이 있다고 해도 아마 참석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겠지. 그래 이런 소심함이 전학 두번을 하는 동안 나의 본래의 활달한 성격을 죽여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게 튀지도 않아야 하지만 입학하고 함께 하는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끈에 자연히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뭐 그렇다고 가와하라 신조처럼 누굴 사귀는데 1년이 한계라는둥, 한 장소에 게속 있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는 증세는 전혀 없다. 단지 어느날 갑자기 툭 끊어져 나의 의견조차 물어보지 않고 내 인생은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 추억을 날려버렸다. 난 오히려 이 전학생 모임을 통해 나와 같은 맘들을 먹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궁금증이 일어난다. 가와하라를 이해해 보기 위해 전학생모임에 들어간 그녀와 다른 이유로 말이다.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여기 다 데려놓은 것일까. 핑크빛 사랑을 하는 커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쓸쓸히 한쪽 마음을 도려낸 사람, 이제껏 내가 있었던 공간이었지만 어느날 낯설게 느껴지는 공간이 되어버려 생소한 공간에 부려진 몸이 처연하게 느껴진다. 인연이란 무엇이고 운명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한 인연이란 것도 운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한번의 우연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면 쉽게 용납할 수가 있을 것인가. 반지를 가지고 청혼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 있고 나는 다른 이와 결혼을 하기 위해 하와이의 인적 드문 곳에 서 있다니 또한 처음 만나는 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나는 이 곳 하와이에 왔다니 생일휴가를 떠나온 목적이란 이것이었던가. 정말 얽힌 인연의 실타래의 끝은 어디인가 묻고 싶어진다. 아마 그 끝을 찾는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어둠의 긴 터널을 터벅터벅 걷고 있을때 분명 터널의 끝은 있을것이라고 자위하지만 솔직히 점점 더 나락으로 가라앉음을 느낀다. 인생은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아직 살아갈날이 창창한 나이 그래도 내가 상상하는 세상은 꽃들이 만발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보면 삶의 원동력은 아직 있다고 위로받게 된다. 인생 한고비 한고비 넘어갈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좀 더 견디기 쉬울까. 어느날 문득 기억속에서 튕겨져 나온듯한 익숙한 거리를 만났을때 아름다운 풍경이 떠오른다면 좋겠다. 

일곱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기 다른 내용을 품고 있는 듯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왠지 비슷하게 닮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듯 생각된다. 아마 이곳에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나와 닮은 모습도 있을 것이고 때론 이렇게 자신을 편하게 놓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다른 공간에 있는 낯선 느낌이 아닌 친숙하게 느껴짐은 아마도 이런 이유겠지. 학창시절 바닷가에 연을 묻어두고 남자친구와 함께 연을 찾아 날리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그녀는 늘 연이 날아오르는 그 끝을 보았기에 함께 했던 남자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세월은 이렇게 내가 무언가를 바라보지만 퇴색된 기억만을 안겨줄 뿐이라 나조차도 누군가의 기억속에는 그저 형태만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형태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연을 날리는 손을 그리고 연이 날아오르는 것을 환한 미소로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함께 했다는 기억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도 누군가에게 명확한 존재이고 싶다면 눈을 마주보고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들 있을까. 때론 이런 시간이 필요함을 나도 이제야 알게 된다. 내가 끊어져 버렸다고 생각한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이런식으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기에 앞으로 기억해야할 많은 시간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각인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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