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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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이란 곳은 그래 아마도 앞치마를 두르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엄마의 공간일 것이다. 칼질 하는 소리, 냄비안에서 음식이 끓어 넘치는 소리, 물소리가 어우러지고 코속으로 밀려드는 달콤한 냄새들이 있는 곳. 그래서 부엌을 떠올리면 엄마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음식하는 소리를 들으면 즐거운 나의 집이 떠오른다? 이건 명백히 가사노동은 여자에게만 국한된다는 의사표현일수도 있겠지만 이 공간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만큼 편안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미카게는 왜 음식냄새 떠다니는 부엌에서 늘 자고 싶은 것일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엄마의 향기가 그리워졌을까. 그 그리움이 부엌에서 자는 잠자리의 편안함을 제공하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살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유이치의 집으로 들어가서 살지만 물론 그곳에서도 부엌과 가까운 소파가 그녀의 자리다. 음식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음식이 만들어지고 유이치의 엄마, 실은 성전환 수술을 해서 예전엔 아빠였던 에리코와 세 명이서 속이 빈것 같지만 여느 평범한 가족같이 단란하게 보낸다. 이것이 나중에 그리움이 되고 슬픔이 되어 맘속을 온통 휘저어 버리지만 지금이 나중에 기억했을때 참 행복했다라는 것은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니.  

유이치를 낳은 엄마가 죽고 더이상 남자로 살기 싫어진 에리코. 파인애플 화분을 집에 가지고 가면서 맘껏 울지도 못하는 남자란 것이 싫어져 훌훌 벗어던지고 싶었을까. 에리코가 죽었을때 유이치는 또 한번 엄마와 아빠를 보낸게 되어 버렸으니 그 슬픔이 오죽 컸을까.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여전히 숨쉬고 먹고 세월을 계속 살아야 하는 사람에겐 잔인한 일이다. 유이치와 미카게가 함께 한다면 그들의 슬픔을 견디기 훨씬 쉬워지겠지만 오히려 슬픔이란것이 때때로 치밀로 올라와 힘들게 되지 않을까. 나혼자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 오히려 더 서로 의지하기 위하여 맘을 열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더 나은 삶을 택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에리코는 없지만 변함없이 대하는 두사람의 모습은 가슴아프지만 이쁜 사랑을 하게 되길 바란다. 

여기에 등장하는 단편들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보내는 연습을 시키려고 그러는지 온통 눈물과 슬픔만 보이는 것 같다. 죽은사람과 살아있는 사람 사이에는 늘 강이 존재하는 것 같다. 히토시가 교통사고로 죽고 다리 위에서 늘 그를 추억하는 사츠키. 갑자기 떠나간 그가 몹시도 그립다. 조깅으로 맘을 달래어 보지만 늘 가슴속에 머물고 있는 그 때문에 점점 초췌해지는 사츠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히토시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를 보는 사츠키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츠키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라라라는 사람으로 인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던 것. 이런 능력은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괴물같아 보인다고 피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연인들에게 작별인사정도는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내 마음에 머물러 가슴이 따뜻해진다.  

준비된 이별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앞으로 살아가는 사람 둘다 힘들다. 이처럼 백년에 한번이라도 좋으니 그리운 사람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도 참 위안이 될텐데. 세상을 살아가는데 좀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가까운 이들이 내 곁에 있지만 세월이 흘러 하나둘 떠나간다면 그 다리에 서서 난 어떤이를 불러내고 싶을까. 아니 날 보고 싶어하는이가 있을까. 웃으면서 떠날 수 있다면 남아있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텐데. 비록 소설속이었지만 현실과 혼동이 되어 나도 함께 히토시를 본 듯 현실인지 꿈속인지 구별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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