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밴드 Dorothy Band 1
홍작가 글 그림 / 미들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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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리까리 아주까리 말죽거리 보도블럭 껌딱지같은 기분이지!"

도로시 밴드의 보컬인 도로시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다. 도로시가 "버스 손잡이에 누가 껌딱지 붙여놨냐!"고 목청껏 소리지르는 것을 보면서 어느 새 나도 "까리까리...."를 따라부르고 있었다. 때론 살아가면서 특별함을 선물받을 때가 있는데 도로시와 남자친구 토토에겐 이곳에서 겪은 모든 일들이 스스로가 진실에 다가가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살아가는데 있어 힘이 불끈 솟게 만드는 큰 선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음치 대마왕, 노래를 못 불러 비틀려진 자아로 인해 음악을 금지시키는 녀석이다. 원작인 "오즈의 마법사"에서의 도로시가 이상한 나라로 오면서 마녀를 죽였다면 "도로시밴드"의 도로시는 이 음치 대마왕을 죽인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새 삶을 준 영웅이 된 도로시. 지금 그녀는 허수아비, 사자, 강철나무꾼을 만나 록 밴드를 결성하고 이 세계에 음악을 뿌려대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막혔던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고 내 마음을 열광시킨다. "쿵쿵, 쾅쾅" 대체 무슨 음악인지 모르지만 "음음, 야야......." 어느새 흥얼거리게 되어 나도 이젠 그들과 한패가 되어 음치 대마왕을 무찌르는 전사가 되어 있었다. "무엇으로? 그냥 응원하는거지. 무슨 재주가 있나. 전단지라도 붙여주고 싶지만 그 곳으로 갈 수 없으니 그저 구경만 할 밖에. 아, 슬프다"

 

허수아비에게 생명을 준 사람, 약한 아이를 괴롭혀 강철머리를 쓰게 된 강철나무꾼, 그리고 사자. 이들은 모두 인연이든, 악연이든 엮여 있었다. 원인과 결과를 따지기 전에 서로가 상처를 주지만 마지막엔 화해하는 것을 보면서 음악은, 모든 이들의 마음까지 녹여내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간다. 허수아비는 뇌가 없어 애드리브의 달인이 되었지만 꼭 머리에 남기는 것이 아닌 가슴 어딘가에 남겨지는 것을 위하여 음악을 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지만 키스도 못하는 강철나무꾼은 한순간 서러워지지만 점점 가슴이 뜨거워지며 용서하는 마음도 갖게 된다. 사자? 무술의 달인인 그는 엄청 소심하다. 가면을 써야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그도 유감없이 열정을 발휘하니 이 "도로시 밴드"는 그 누구도 깨버릴 수 없는 강력한 밴드다.

 

만화책이라고 우습게 보지 말자. 제대로 내 감정을 울린다. 웃으며 읽다 보니 어느 새 마지막 장을 이르게 되어 무지 아쉽지만 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유쾌하고 즐거웠다. 나도 도로시 밴드가 해체되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도로시와 토토가 영원히 이 곳에 남길 바랬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마음속 키가 커지고 세상을 알아갈 때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도로시, 모든 것은 꿈이었을까. 아, 꿈이라면 너무 안타깝다. 음치 대마왕이 환생한 이야기는 너무 웃겨서 꿈이라고 하면 속상할 것 같다. 악당조차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 곳에서 "도로시 밴드"는 희망을 선물하고 열정을 남겼다. 만화책에서 모두 생동감있게 살아있는 존재들로 만나는 기쁨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행복이다. 흑백의 모습들을 하고 있지만 이미 이들은 내 마음속에서 화려하게 색이 입혀져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우울할땐 "까리까리......."를 부르게 될 것 같다. 그러면 삶이 조금은 유쾌해질테니까. 더불어 강철나무꾼의 숨겨진 얼굴이 궁금하지 않은가? 강철나무꾼을 보기 위해서 이 책을 펼칠 이유는 충분하다. 자, 모두 준비되었는가? 1, 2! 1, 2, 3, 4! "까리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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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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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그냥 "힘들다"라고 이야기 하면 안되나? 감정을 한마디의 말로 딱 잘라 표현한다는 것은 말이 안될지도 모르지만 이 책 "엄마의 집"을 읽고 있으니 호은과 호은의 엄마(호은은 엄마를 '미스 엔' 이라고 부른다)의 감정의 무게때문에 내 어깨까지 아파온다. 공지영님의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나서 이 책을 본 탓일까, 비슷한 시대로 설정한 때문인지 "즐거운 나의 집"의 연장선에서 책을 읽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조금은 식상하고 "즐거운 나의 집"과 다르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 적응이 안되는 것 같다.

 

'엄마의 집'이라는 말은 단어 자체에서도 외로움이 묻어나는 것 같다. 우리 집, 나의 집이 아닌 '엄마의 집'은 엄마 홀로 그 집에 있는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전남편의 아이인 승지, 승지와 함께 온 아빠는 호언에게 승지를 맡기고 떠나 버린다. 이혼한 전부인에게 재혼한 여자의 딸을 맡기는 아빠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나도 어이가 없고 황당하기만 하다. 괜시리 승지를 맡으면 안된다고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너무도 현실적인 생각때문이리라. 호은은 승지가 아빠의 피가 섞인 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엄마와 살고 있을때부터, 오래전부터 알아 온 승지의 엄마이기에 그렇게 생각해 기어코 호은은 아빠에게 승지에 대해 물어본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엄마가 승지를 맡은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전남편의 아이를 맡으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전남편과 합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될 터인데 외할머니가 승지를 맡는다고 해도 굳이 자신이 돌보는 이유가 나는 승지와 호은이 같은 피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선의 눈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옛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편을 떠난 것에 대한 미안함일까. 마음을 닫고 감정을 숨기는 미스 엔에게 이유를 듣지 못하니 그저 짐작만 할 밖에.

 

"승지와 호은의 눈빛이 닮았다"고 미스 엔은 말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눈빛에서 성숙함이 묻어나는가 보다. 이제는 언니, 동생으로 자매가 되어 잘 지내는 승지와 호은, 엄마도 만나는 아저씨와 냉전을 끝내고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며 산다면 삶의 무게 또한 줄어들텐데, 말없이 짊어진 이들의 삶에 가슴이 답답해지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아래 잘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프다, 기쁘다, 힘들다.......감정 표현하면서 살자. 참다가 병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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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이상운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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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시적인 제목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긴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하게 하는 제목인 것 같은데 설레임과 함께 한쪽 가슴을 뻐근하게 하는 아픔도 느껴진다. 첫 눈에 반한 "박은영", 이 여인을 평생 네 번 밖에 만나지 못한다고 누군가가 이야기 한다면 "사랑"에 대한 설레임이 오래도록 남을까, 아니면 가슴 아파하며 괴로워 하게 될까. 마지막에 만났을 때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것이 마지막인줄도 모르고 그대로 떠나보내야 하지 않았던가. 세월이 많이 흘러 청년시절처럼 저돌적으로 "좋아합니다. 만납시다"라고 고백할 열정은 없지만 가슴 한쪽에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음으로 핑크빛 첫 사랑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세월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고 있었다. 

 

목소리 듣고 싶으면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만날 약속을 정하는 요즘 시대와 다르게 박정희가 살아있었던 시대의 "사랑"은 더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연하남과 연상녀의 사랑을 주위에서 차갑게 바라보던 그 때 그 시절 첫 눈에 반한 그녀이고 보니 아직은 풋풋하고 어색한 모습이 남아 있어 참 순순해 보였다. 기타를 든 그녀, 십 만명의 군중 앞에서 노래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을 망상으로 치부해 버려 그 첫 만남은 끝이나고 만다. 뒤에 '오르페우스'에서 박은영, 그녀를 다시 만나지만 제대로 이야기도 나눠보지 못한채 울음을 터뜨린 그녀의 얼굴만 보았을 뿐 이야기도 나눠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후, 그 시절 늘 지니고 다녔던 관제엽서에 떠오르는 대로 낙서한 '시'를 그녀에게 전해달라 오르페우스의 털보에게 부탁한 뒤 그 '시'가 그녀의 손에 전해졌다는 말을 들으니 이 둘의 인연이 참으로 신기하고 그 이어짐에 가슴이 아파온다.

 

이름 외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신비에 싸인 그녀, 박은영. 세월이 많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또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는 그녀, 왜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이제는 세월이 지나며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그가 작가가 된 것은 어쩌면 풋풋했던 그 시절 그녀를 만남으로써 마음속에 있던 감성이 깨어난 것이 아닐까. 몇 십년이 지나 그녀의 기억마저 희미해질 때 그를 찾아온 김수영이라는 사람은 그저 '편지'라는 이름의 까페로 초대를 한다. 거기서 그는 예전 박은영에게 적어 주었던 시를 가사로 만든 노래를 듣게 되는데, 그 때의 충격이란, 아마도 그 순간 그의 기억은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시절로 돌아갔을 것이다.

 

약속한 날 나타나지 않은 박은영을 기다리며 마음 아팠을 그에게 몇 십년이 흘러 그녀의 아들이 나타나 어머니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바람 따라 왔다 가던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그를 기다리는 세월들이 얼마나 힘에 겨웠을까. 끝내 아이의 아버지는 오지 않고, 홀로 아이를 키웠을 그녀를 생각하면 두 사람이 맺어졌으면 좋지 않았을까 지금 이순간 아주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다. 분명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훗날 그가 준 시를 간직하고 노래로 만들었을테니까. 드라마로 만들었다면 운명적인 만남, 사랑으로 보여졌을 두 사람의 인연이 너무 짧게 끝나버려 아쉽기만 하다. 이제야 그녀가 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가고 세월이 많이 흐른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난다면 좀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나길 기대했겠지만 이렇게 한 사람의 빈자리를 느껴야 하는 상태가 된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였을 것이다.

 

별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는 아주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라는 책은 인연에 대해, 사랑에 대해, 사람들의 기억속에 각인 될 나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 나 둘.......별과 나의 분별이 아닌 그 별과 나의 인연에 대해 잔잔히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빠져 가만히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나는 세월이 흘러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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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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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내가 지냈던 집이 "친정"이 되고 남편과 함께 하는 보금자리가 "우리 집"이 되었을 때의 기분이란, 설레기도 했지만 뭔가가 가슴속에서 빠져나간 듯 마음 한구석이 시리기도 했었다. "즐거운 우리집"이 아닌 "즐거운 나의 집"은 역시 "우리"라는 말 보다 조금 덜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이것이 나의 기분탓인지, 이 책을 읽고나서 든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즐거운 나의 집"을 반 넘게 읽다 보니 이 책은 위녕의 성장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세 번의 이혼, 아빠와 새 엄마 사이에 태어난 동생 위현, 엄마가 아빠와 이혼한 뒤 두 번의 결혼으로 낳은 동생 둥빈과 제제, 상처 많은 가족들이 한 집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느 새 위녕이 가족의 의미를 알아가는 한편의 성장 소설이 되어 있었다. 위녕의 엄마는 작가다. 그래서인지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질 수 있게 가르친다. 내가 어린 시절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현실에서 나의 친정 엄마는 위녕의 친구 쪼유의 엄마처럼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여 자신이 바라는대로 커 주기를 바라는 분이셔서 자라면서 갈등도 많이 겪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를 낳으면 위녕의 엄마처럼 자식을 키울 수 있을 것인가. 아마 내가 살아온 시각에 맞춰 쪼유의 엄마처럼 소유욕을 한껏 드러내며 키우지 않겠는가. 조금 걱정이 된다.

 

세 번의 이혼을 하고 다니엘 아저씨와 풋풋한 연애를 하고 있는 엄마,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말도 안된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홍조 띤 볼을 보는 것이 좋다. 부끄러워 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이 부럽다. 참고 살수도 있지만 불행하게 살지 않기 위해 세 번의 이혼을 했지만 함께 사는 동안은 최선을 다했으니까, 또 다른이를 만나 사랑을 한다고 해도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섯 계절을 보내는 동안 위녕이 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하는 생활,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보내지 못하고 아빠와 새 엄마와 함께 하는 세월동안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위녕이 큰 결심을 하고 아빠와 새 엄마를 찾아가는 모습은 솔직히 나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단 몇줄 만으로, 설거지를 해 놓지 않아 야단 맞고, 훔치지 않았다고 이야기해도 믿어주지 않는 아빠에게 맞았다는 글을 보며 위녕의 아픈 마음을 이해 할 순 없었다. 조금은 억지스러웠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엄마와의 감정의 깊은 골도 단 몇 마디로 해결되는 것을 보면 반쪽자리긴 해도 "가족"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빠를 두고 새 엄마와 같은 편이된 듯한 느낌은 생경했지만 가족이었으니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정말 위녕의 가족과 같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현실에 살고 있을까. 너무나 드라마적인 이야기라 현실적이지 않아 낯설기까지 한데, 그 이유는 아마도 위녕의 엄마가 아이들이 원하는 삶을 살게끔 자유롭게 키우는 것을 보며 너무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바라는 어머니의 모습이면서도 그런 부모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지어 생각하고 있었다니 나란 인간도 참 어지간히 배타적인 삶을 살고 있나 보다.  

 

위녕이 스무살이 되어 대학을 가기 위해 또 한번 엄마의 곁을 떠나지만 이제는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인 "즐거운 나의 집"이 있으니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세월이 지나면 아빠의 죽음을 힘들어하는 둥빈이 상처를 딛고 좀 더 성숙한 모습을 보일 것이고, 제제는 조금 있으면 사춘기를 겪겠지. 위녕의 엄마말대로 그때쯤이면 그녀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간다. 죽을때 "심심하지 않게 즐겁게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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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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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 좋을까.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 아무래도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게 되면 내 머릿속에 인식된 영화의 장면들로 인해 책을 읽으며 상상할 수 있는 즐거움은 여지없이 깨어지게 되어 무척이나 아쉽지만 영화에서 만났던 주인공을 책으로 다시 만나는 기쁨은 상상의 세계를 빼앗긴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주는 것 같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했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공포? 아니 무서운것 보다 외로움을 느끼게 되어 정신적으로 황폐해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공포도 이것일 것이다. "밖으로 나와, 네빌"을 외치는 동료 벤 코트만의 목소리, 이젠 익숙해질때도 되었건만 들을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죽은 아내가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피를 원하는 것을 보고 말뚝으로 처리한 고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자신을 짓누르고 늘 함께 출근했던 벤 코트만은 해가 지면 나타나 네빌을 부르는 흡혈귀가 되어 있다. 왜 자신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얼마나 많이 했을 것인가.

 

영화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었을 때 주인공이 느꼈을 상실감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책에서도 개가 등장하지만 흡혈귀에게 당한 개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괴감, 치료약이 없어 개를 살리지 못하고 죽여야 하는 심적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치료약을 만들어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원하며 자신의 생명을 던져 전설이 되었다면 책에서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람들이 진화했다고 해야할까. 이제는 또 다른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옛 기억을 가진 네빌의 존재는 죽여야 할 대상일뿐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함께 하길 원하지만 이방인으로 인식되어 그들에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 네빌, 이제는 신 인류가 이 땅의 주인이 되는 곳에서 사라져야 할 전설이 되어 있었다. 나는 책의 내용보다 영화가 더 마음에 든다. 인류를 구하고 죽어 전설이 된 사내, 아마 영웅을 원하는 나의 마음이 반영이 된 것이겠지만 또 다른 내용인 진화하며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내용도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라 동조하며 읽게 된다. 인간이라면 충분히 신 인류가 될 수 있을테니까. 내가 네빌처럼 되었다면 아마 두려움에 질려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나는 영웅도 아니고 그저 한 평범한 시민일뿐이니까.

 

"나는 전설이다"외의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들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이 책은 각 단편들조차 나에게 제대로 공포심을 느끼게 만든다. '죽음의 사냥꾼"에서 칼을 가지고 죽이려 드는 인형, '전화벨소리'는 SF적인 내용도 가지고 있어 다양한 장르를 접할 수 있고 '장례식'에서는 괴물과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뤄주는 클루니 장의사를 보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실크라인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겠지만 웃음이 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이미 죽었지만 자신의 장례식을 멋지게 치르고 싶은 소망을 안고 온 죽은이들이 가져오는 금화를 물리치지 못하는 실크라인은 아직도 그들을 상대하며 기절도 몇번 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를 읽으며 작아졌던 나의 가슴이 이제는 보이지도 않지만 가끔 이런 내용의 책을 보며 활력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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