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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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위풍당당'이 피가 섞인 온전한 가족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 모여 가족을 이루었기에 읽을 수 있었다. 아니,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한 울타리로 감싸인 곳은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가족사에 얽힌 사건들이 꽤 많음에도 치명적이고 위험한 사태에 이르러서야 세간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만큼 폐쇄적인 것이 이유이며, 행복한 일상을 가꾸어 가는 가족들 역시 타인에게 그 영역을 드러내거나 내어 놓지 않으므로 그저 무심히, 담담하게 지나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었지만 가족이라 멋대로 이름 붙인 것 뿐이었던지 정묵이 보스로 있는 조폭들이 강마을에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영필은 드라마 세트장에서 기거하는 이들을 '가족'이 아니라 했다. 이들이 기거할 터전을 지킬 필요가 있고 새미와 준호가 나중에 돌아올 곳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조폭인 세동이 새미와 준호에게 당한 사연은 뻔하다. 아름다운 새미를 어찌 어찌해 보겠다는 음심을 품어서였는데 현실적으로 조폭이라면 응당 이런 짓을 할 만하다. 그러나 세동의 위협에 즉각적으로 대응한 새미와 준호의 행동은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세동의 보스 정묵과 그의 부하들이 모두 죽여버리겠다며 강마을에 나타날 정도로 사태는 점점 위험해진다. 아름다운 꽃은 그냥 두고 보는 것이란 철학을 가진, 아니 보스는 당연히 이러해야한다고 생각하는지 근엄하게 앉아 있던 정묵이 새미가 눈 앞에 있었을 때도 얌전하게 있었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 정묵에겐 이미 새미는 안중에도 없다. 다만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강마을로 쳐들어갈 수 밖에 없음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정묵은 예전에 비해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고 중얼중얼 거리며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부하들과 함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

 

익살, 재담, 해학이 가득한 성석제의 작품을 읽을 때면 언제 웃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있다. 가슴이 뭄클하며 뭔가 끓어 오르려고 하는데 웃음이 난다. 이럴 땐 흠흠, 하며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행동하나 어쩔 수 없이 정묵이 세동의 똥을 밟았을 때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지금 웃어도 되는 건가 조심스러워지지만 도저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다. 이럴 땐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을 수 밖에. 그나저나 강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되려나. 살인이라도 저질러 감옥에 가거나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못 심각하다. 머릿속은 이런 생각으로 가득한데도 이 상황이 왜 이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지 속에서 뭔가 간질간질 터져 나오려고 한다. 참 난감하다.   

 

조폭들이 몰려오는 위험한 상황에서 서로의 삶에 무심한 듯 살아가던 강마을 사람들이 몇 잔의 술에 의해 취기에 의해 마음을 열어간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자신을 둘러싼 껍데기를 휙휙 던져 버린다. 읊조리듯 이어지는 강마을 사람들의 삶은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를 향해 폭풍처럼 몰아친다. 여산, 소희, 이령, 영필, 새미, 준호, 이들은 이곳에서만 숨을 쉴 수 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서로가 마음을 나누었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건 아니다. 강마을 사람들에게 조폭들과의 싸움은 그 계기가 되어줄 뿐 지금 이들이 가족이 되었다고 단언할 순 없다. 그런데 여산과 정묵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준호의 입에서 "아와삐이! 아와빠이!"가 터져 나오는 순간 강마을 사람들은 피보다 진한 끈끈한 것으로 연결된다. 새미와 준호에게 엄마, 아빠가 생기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긴 것이다. 이제 '위풍당당'에서 작가 성석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조폭들과 강마을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결말을 선사하는 것 뿐이다. 계속 이어질 삶은 강마을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 할 터이니.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인간을 제외한 숲에 사는 생명들은 이 일에 무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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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헌트 1 - 구교사 괴담
오노 후유미 지음, 박시현 옮김 / 북스마니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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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유령이 나오는 걸까. 책 중반쯤 넘어가서도 유령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뭐, 꼭 유령을 봐야한다 그런 것은 아닌데 무서우면서도 아무 일 없이 끝나면 뭔가 허전하고 섭섭해서 말이지. 그렇게 되면 이곳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별로 할 일이 없어질테니 뭔가 일어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분명 구교사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불려온 영능력자들은 그들 눈 앞에 보여야 할 유령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무녀님과 쿠로다 여사는 '영'이 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상한 느낌만 받을 뿐 '영'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구교사에 유령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것인지 스님, 무녀님, 마사코, 쿠로다 여사의 토론을 넘어선 논쟁을 보고 있으려니 답답해진다. 무엇보다 쿠로다 여사의 구교사에 대한 집착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구교사에 꼭 유령이 있어야 한다는 듯 그 기세가 상당하다. 

 

나르는 정밀하고 비싼 기계를 다루고 있어 영능력자라는 생각이 안들지만(물론 본인도 고스트 헌터라고 했지만) 나르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이 괴상한 집단이 영능력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모두들 개성이 강하고 실력도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구교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교장이 불러들인 존재일 뿐이라 해도 그들은 이대로 물러날 순 없을 것이다. 부끄러워서라도 무언가 해내지 않는다면 이곳을 떠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 이들 중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제령에 실패하고 지박령이니 어쩌니 매번 말을 바꾸는 무녀님? 아니면 가만히 보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말만 많은 파계승 스님? 다른 곳은 멀쩡한데 한 곳에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데도 이것이 전부 지반이 약해 건물이 무너지는 것 뿐이라는 나르를 믿어야 할까. 아니야, 이상한 일이 일어난 이곳에는 분명 나르가 폴터가이스트의 짓이라고 했었지. 마이가 무너지는 신발장을 만졌을 때 따뜻했었으니까. 폴터가이스트가 맞을 것이다. 그나마 실력이 있어 보이는 존을 믿어볼까. 그의 사투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구교사 일 같은 건 잊게 되고 말지만 영능력자들 중에서 그나마 실력이 있어 보이는 존을 믿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냉철한 표정의 아니 냉혹하기까지한 표정의 시부야(아니 나도 '나르'라 부르련다) '나르'는 구교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지반이 약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모든 현상을 논리적으로 대답해 버리니 얄밉긴 하지만 나르의 의견이 가장 믿을만 하긴 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곳에 유령의 존재가 없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이대로 학교괴담이 사라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쨌든 이 일이 해결되긴 한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르에게 명쾌한 해답을 듣고 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냉혹하고 까칠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니 고스트 헌트라고 해도 그리 매정한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고스트 헌트'에서는 마이가 대부분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지만 그녀에게 특별한 능력은 보이지 않는다. 나르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기 위해 숨겨진 영능력자였었다, 라고 하면 좋으련만 잡다한 일에나 부려먹을 딱 그정도의 인물로 등장한다. 적당하게 나르과 마이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새로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나 본데 설마 영능력자들 모두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존과 마사코까지는 괜찮지만 스님과 무녀님은 성격이 까칠해서 별로다. 나르도 까칠하긴 하지만 잘 생겼으니까 봐 준다. 매 사건마다 두 사람의 토론을 넘어선 논쟁을 보고 있으려면 머리가 아플 것이다. 제대로 사건을 해결하면 그나마 다행일텐데, 나르보다 실력이 없으니 이것도 기대하긴 힘들터, 앞으로 어떤 활약을 할지는 두고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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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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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의 배경이 되는 미래가 지금보다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인지 알 순 없으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보다 좀 더 많이 문명화 되고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고 해서 지금보다 행복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대규모 생물학 폭탄으로 중장년층 대부분이 죽고 70, 80대의 노인인 '엔더'들과 십대 이하의 아이들인 '스타터'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미래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기 보단 결코 오지 않기를 바라는 미래의 끔찍한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곳이 지금보다 미래라고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인격이 말살된 이곳은 프라임 데스티네이션에서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현재보다 문명화 된 것이 없다.

 

200세 이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곳에서 부유한 엔더들이 꿈꿀 수 있는 미래는 젊은 신체을 빌려 지나가 버린 젊음을 다시 즐기는 것일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부유한 엔더 중 한 명이라면 충분히 유혹을 느낄만 하다. 그러나 물건을 고르듯 자신의 취향에 맞게 십대 아이들의 몸을 대여하는 엔더의 모습은 역겹기만 하다.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상원의원과 대통령 그리고 프라임 데스티네이션의 올드맨이 만든 세상을 환호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데는 무한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런 곳에서 십대인 캘리는 생물학 폭탄에 의해 부모를 잃고 남동생 타일러와 거리에서 살아간다.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며 집행관들을 피해 살아가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 타일러의 몸이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 캘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프라임 데스티네이션을 찾아가는 것 뿐이다.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 돈을 받을 수만 있다면 타일러의 아픈 몸을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하게 돈을 받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캘리가 계약서에 사인하길 바라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틴넨바움을 보니 무언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캘리가 이대로 거리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겠지만 그래서는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에 변화가 없고 더 이상의 희망도 가질 수가 없다. 세 번의 신체 대여이후 타일러와 좀 더 편안한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만이 모든 것을 견딜 힘을 준다. 그런데 캘리는 프라임 데스티네이션의 위협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빌린 헬레나의 계략에 의해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어 무사히 계약이 끝나 돈을 받을 희망이 점점 사라져 간다.

 

헬레나가 캘리의 몸을 빌린 이후의 모든 일은 예정된 것이었다. 블레이크와의 사랑까지도. 블레이크의 마음은 어떨까. 캘리를 사랑했을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랑까지도 꾸민 행동일까. 사랑이었을 것이다. 캘리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게 보였으니까.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의 존재가 캘리를 아프게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나 결국 운명은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할 것이다. 헬레나가 약속한 것들이 캘리와 타일러를 보호해 주지만 올드맨은 이 모든 것들을 잃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맞는 말이다. 하루 아침에 다시 거리에서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올드맨에게는 그 정도의 힘이 있고 캘리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니까.

 

올드맨과 캘리, 그리고 블레이크, 이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날 수가 없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지, 생물학 폭탄이 터질 수 밖에 없었던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올드맨과 캘리 두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들려줘야 할 이야기도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지금보다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이든 캘리를 친구로 생각하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준 사라를 위해 견뎌낼 것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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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1
허영만 지음 / 월드김영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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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보고 '엇, 칭기즈칸의 이야기인가?' 짐작했다. 최근에 읽은 김형수의 '조드'에서는 테무진의 삶을 영웅이 될 이야기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12~13세기 몽골에서 일어난 일들과 함께 그 속에서 살아내야 했던 테무진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영웅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웅으로 만들어졌다 할 수 있는 삶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허영만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는 예언에 의해 이미 테무진이 어떤 인물이 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결론은 같을 것이다. 영웅이 될 것이다 예언이 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테무진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결말을 맞을 것이고 그 과정 또한 변하는 것이 없을 것이나 지금까지 읽어왔던 당연하게 생각했던 영웅들의 이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가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테무진이 대몽골을 정복할 텡그리 신의 아들이 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게 되는 즐거움이 더 클 것이다.

 

부르테를 좋아하는 자다란족 수장의 아들 자무카의 모습은 테무진의 모습보다 더 멋져 보인다. 이들이 순정만화 속의 등장인물들이었다면 독자들은 자무카와 부르테의 사랑에 더 큰 기대를 하며 지켜보겠지만 냉혹한 세상은 자무카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부르테의 마음을 얻을 기회를 주진 않는다. 세상을 통치하는 능력을 가진 자무카의 당당함은 사랑하는 여인 부르테 앞에서 작아지지만 부르테의 사랑을 받는 테무진을 시기하여 질투하기 보다는 부르테의 바람대로 테무진과 의형제를 맺어 세상을 함께 바라본다. 허나 대몽골을 정복할 텡그리 신의 아들이라는 예언을 받은 테무진과 몽골 제국을 통치할 욕심을 가진 자무카가 오랜 세월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지는 못할 것이다. 태생부터 선택되어질 수 밖에 없는 테무진과 그렇지 못했던 자무카는 이미 그 싸움의 승패가 어떻게 될지 예정된 수순을 밟게 되겠지만 자무카는 현재 테무진에게 초원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없어서는 안될 조력자가 된다.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고 난 후 테무진은 그의 배다른 형 벡테르의 견제를 받는데 테무진을 증오하는 벡테르가 그에게 어떤 존재가 될지 눈 앞에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증오심은 대단하다. 벡테르가 증오심을 가질 정도로 테무진은 예수게이에 의해 철저하게 그 정통성을 인정받으며 자랐고,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할까 싶을 정도로 벡테르를 대하는 예수게이의 행동에는 애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테무진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벡테르를 왜 그리 대했는지 모를 일이다. 테무진보다 먼저 낳은 벡테르를 인정하지 않고 테무진이 그의 후계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겠지만 한 명의 적만 키운 셈이다. 그러나 벡테르는 그리 큰 위협은 되지 않을 것이다. 테무진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어린 시절 힘으로 제압하려 했을 뿐 영웅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탓에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예수게이가 더 오래 살았다면 테무진의 삶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많은 역경들을 딛고 부족에 의해 칭기즈칸에 추대되었던 일이 지금보다 더 빨라졌을지도 모르나 훗날 사람들이 그에 대해 기억하는 많은 것들은 다르게 평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사랑도, 권력도 쉽게 얻는 사람보다는 수많은 역경들을 딛고 영웅이 되는 모습을 기대한다. 라이벌인 자무카와의 싸움, 그리고 부르테의 사랑을 얻기까지 테무진에게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지켜보는 즐거움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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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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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제이의 울음소리가 터졌을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제이를 향해 뛰어갔다.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던 제이와 세상 사람들과의 첫 만남은 그랬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읽으며 가끔 김연수의 '원더보이'를 떠올렸는데 그 이유는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김연수의 '원더보이'의 김정훈과 제이가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책장을 덮은 지금 이제는 그들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다. '사랑'의 열병이 지나간 후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 정훈과 다르게 타인의 고통을 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제이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질주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마저도 떨쳐 버리고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세상이 원더보이라고 기억하는 것조차 거북해했던 정훈과 달리 세상을 향해 달려나간 제이를 세상은 오랫동안 기억했고 이제는 활자속에서 그 모습을 영원히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훈과 제이가 외로움과 슬픔, 고통을 안고 살았온 것은 닮아 있었다.

 

내게 처음부터 제이의 모습이 보인 것은 아니었다.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의 한 화장실에서 출생한 제이의 모습을 두 눈 속에 담은 이후로 나는 제이가 아닌 동규가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었다. 함구증에 걸린 동규를 위해 동규가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와 감정을 제이가 대신 전달해줬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동규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마주보고 있는 거울을 통해 악마를 잡겠다고 하는 제이는 이제 나의 기억속에서조차 머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갔다. 그렇게 간단하게 그를 밀쳐내 버렸었다.

 

그런데 어느날 제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나의 집에서 뛰쳐나온 후 그가 느낀 고통의 실체를 들여다보면서 제이는 결코 내가 가벼히 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돼지엄마가 제이를 품에 안은 날 보게 된 양쪽 어깻죽지 부근의 뼈, 이것은 그가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겼다. 소리를 내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천사'라고. 소리내어 내뱉는 순간 판타지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겁이날 정도였다.

 

거리를 떠돌며 거리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 가까이에 있는 제이가 폭주족들의 리더가 될 것이라는 전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한나의 집에서 뛰쳐 나온 이후로 도를 닦는 양 생쌀을 씹으며 살아가는 제이를 보면서 그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표현할 방법으로 선택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제이의 목소리뿐 아니라 그의 몸짓 하나까지도 보이게 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어릴 적 서로의 그림자처럼 살았던 동규와 제이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경찰 같지도 않은, 아니 경찰이 되어서는 안될 인물인 승태가 등장하는 일도 없었을 것인데 가출, 집단 난교 등의 십대 소년, 소녀들의 문제들과 다르게 승태의 내면까지 바라봐야 하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제이와 대면하는 이로 그가 선택되었다는 것이 화가날 정도였다. 그러나 승태가 아니면 제이의 몸짓을 바로 눈 앞에서 바라볼 수 없기에 그의 등장을 그냥 내버려둘 수 밖에 없다. 

 

세상을 소통하는 방법이 이것 밖에 없었는가. 제이의 삶은 이렇게 되어갈 수 밖에 없었는가.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 의해 선택한 삶이기에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가란 질문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은 다루지 않았으나 제이가 마지막까지도 벗어날 수 없었던 그곳, 자신이 태어난 고속버스 터미널은 그의 두 눈 속에 담겨져 작게 나뉘어진 영혼들이 그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분명하게 알 정도로 그 장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길 위에서 태어났으니 길 위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고 길 위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소년, 제이. 그는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을 것이다. 다른 삶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은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삶은 그렇게 흩어져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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