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대중문화 이해
박종균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불 꺼진 창, 시대의 아픔

 

   

 

 지난 가을 학기에 시간을 내어 밤시간에 두 시간씩 강의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와 대중문화의 이해>라는 강좌였습니다.

교회 '장로'인 두 전현직 대통령 때문에 '안티' 기독교가 팽배해 있지만 본질로 돌아가면 '예수님의 기독교'는 지금 행해지는 교회의 사역과는 많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을 높이시고 높은 곳을 낮추시고자 이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강물은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고(다스리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마에 흘린 땀으로 정직하게 살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공법이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뜻대로 살아간다면 '자연'은 절대 사람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학기 공부를 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문제들이 사실은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쟁이인 저의 관점에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의 제일 관심사는 바로 '사람'입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요즈음은 인간의 존엄성은 그저 빛 바랜 구호처럼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요즈음 가족의 부재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가족은 있어도 가정은 없습니다. 불 꺼진 창에 다시 환하게 불을 밝힐 수 있어야 가정이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어야 사회가 치유되고, 사회가 치유되어야 국가가 힘을 얻습니다.

국민소득이 몇 만불이 된들, 가장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어린 학생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젊은이들은 몇 년 째 취업 재수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허상 위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느 회사에서 100의 일을 다섯 명이 합니다. 한 사람당 백만원의 월급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그 백만원으로 아이들 공부를 시키고 가정을 꾸려갑니다. 어머니는 열심히 살림을 합니다. 검소하게 살며 절약을 해서 조금씩 저축도 합니다. 아이들은 집에 가면 언제든지 엄마가 맞아줍니다. 하일없이 거리를 방황할 필요도 없습니다. 친구들을 데려가서 놀기도 합니다. 그런 세월이 분명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작은 냉장고인데 옆집에서 새로나온 양문 냉장고를 샀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양문 냉장고를 샀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집에서 화면이 큰 텔레비전을 샀습니다. 그러자 옆집에서는 우리집보다 더 큰 텔레비젼을 샀습니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드럼 세탁기를 사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으로는 충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돈을 벌러 나갑니다. 옆집에서 얼음이 나오는 정수기를 샀습니다. 우리집 아이는 거의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로 말합니다. "엄마, 우리 집은?"

그래서 아들도, 딸도 다 돈을 벌러 나갑니다.

그쯤되자 100의 일을 스무 명이 하겠다고 덤빕니다. 회사에서는 한 사람당 백만원을 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육십만원, 칠십만원으로도 얼마든지 일할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현대의 소비는 생산의 과잉성을 필요한 생산으로 바꾸고 더 큰 과잉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의사생산이며 필요소비가 아닌 과잉소비만이 진정한 소비가 된다. 이러한 의사소비를 위한 전략이 욕구와 욕망을 조직해 나가는 소비사회의 자본전략으로 등장하게 된다.

 

 

저는 불꺼진 창에 다시 불을 밝히는 것이 가정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꼭 어머니가 집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집안 구성원 중 누구라도 바깥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바깥일을 하면 됩니다. 아버지가 살림을 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일차적으로 가정에서 돌아보아야 하는데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는 양문냉장고, 더 선명한 텔레비전, 드럼세탁기, 더 좋은 스마트폰을 사느라 쉴 틈이 없이 일을 합니다.

그것들을 갖고 나면 기업에서는 더 좋은 물건들을 개발하여 소비를 부추일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갖지 못한다면 너는 사회적인 낙오자, 실패자라고 끊임없이 괴롭힐 것입니다.

 

소비자는 물건 자체가 갖는 물리적 효용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물건의 모습을 바깥으로 들어내보여주는 디자인(외형, 외관, 모습), 물건에 붙은 라벨과 브랜드네임, 물건을 쓸 때 만들어지는 분위기와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물건이 보내는 신호와 자신과 물건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함께 소비한다는 것으로서 이러한 과정에서 소비자 개인이 욕망을 함께 소비한다는 것으로서 이러한 과정에서 소비자 개인의 욕망이 함께 연소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소비사회에서 소비된다는 것은 물리적 특성을 가진 상품자체가 아니라 의미, 기호, 상징, 이미지, 분위기가 된다는 것이다.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저는 누구 한사람이라도 - 아버지나 어머니가 - 가정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혼자 벌어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풍족하게'는 살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욕심을 줄이고, 욕망을 다스리면 조금 모자란 듯이, 조금 불편하게 사는 것도 살아가는 한 방법일 터입니다.

무분별한 소비, 과소비는 우리의 자원을 빠르게 고갈시키고 맙니다.

더 좋은 것, 더 편리한 것, 더 빠른 것을 추구하는 삶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궁극에 우리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온 가족이 다 나가서 돈을 벌어야 사는 세상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귀가했을 때, 불을 밝히고 있다가 맞아줄 따뜻한 손길이 너무 그립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1-12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8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주 2012-01-18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감입니다. 저도 어머니(때에 따라서는 아버지)가 집에서 가족들을 맞아주면 좋겠어요. 어느 정도 물질의 빈곤을 감수하고서라도 맞바꿀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 소신대로 그렇게 살려고 일을 고를 때도 온종일 매여야 하는 일보다는 시간이 자유로운 걸 더 우선시 했고요....20년 그렇게 가족 돌보며 살았는데 정작 우리애들은 엄마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엄마가 얼마나 희생을 치루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어요 ㅎㅎ 아직 철이 안 든거지요. 철 들려면 마흔은 넘어야 할 듯.
'불 밝힌 집'- 다 좋은데 단점이라면, 애들이 아무래도 독립심이라든지 생활의지가 약한 것 같고 철이 늦게 드는 것 같아요....이긍...ㅡ.ㅡ;;

gimssim 2012-01-18 20:44   좋아요 0 | URL
엄마가 하신 위대한 일들을 아이들이 알고는 있겠죠.
좀 당연한 듯이 여기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저는 사회의 이런저런 문제들이 '불꺼진 창' 때문이라는 생각은 여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