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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년 전 쯤 텔레비전에서 이어령 선생님의 인터뷰 하시는 모습을 뵈었다.
마악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직후인 것 같았다.
평소에도 이 분의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들으면 특유의 달변으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단한 집중력을 가지게 한다.
신문 보도를 통해서 선생님의 소식을 접한 터라 세기의 지성이고, 거칠 것이 없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잠깐 본 텔레비전에서도 굉장한 설득력으로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곧 그에 대한 책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기다렸다.
알라딘에서 신간 안내 메일이 왔다. 바로 주문했다.
그 책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담담한 필지로 내면의 소리를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직선적이고, 분명하고 솔직한 것은 여전하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해서 당장에 바뀌는 것은 없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 영혼은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게 된다. 말하자면 중생이다. 거듭나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화의 삶이다. 그 다음이 영화의 삶이다. 한발짝씩 간다. 거기에 절대 월반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되 다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들을 이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다.
책의 오른 쪽 아래 귀퉁이에는 이런 그림이 있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는 이 그림이 다 말해주고 있다.
책을 읽다가 선생님이 젊은 시절에 자코메티 조각처럼 말랐다는 대목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서재를 뒤져 선생의 20대의 초상을 찾아내었다. 고뇌하는 청년의 모습이다. 내가 느끼기에는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유연해 보인다.
오래 전에 밑줄을 쳐가며 읽던 선생님의 책이다.
책의 처음은 교토에서 시작한다.
혼자 있으면서 따님으로 인해 자신에게 바짝 접근하기 시작하는 예수님을 거리를 두고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단상이 잡힌다. ‘골목길의 어둠’, ‘예수님의 옷자락 소리’ 같은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다.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다.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한 사전 작업인 셈이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각본은 너무 치밀하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꼭 맞는 방법으로 접근을 한다. 사유하고, 분석하는 것이 주특기는 선생님에게는 예수님은 그렇게 '작업'을 거신다. 좀 단순무식한 분들은 다리나 팔 하나 정도 부러뜨려 놓으실 지도 모른다. 딸의 고난의 삶을 통해서 '아버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셨다. 이것은 예수쟁이로서의 나의 고백이다.
딸이 거의 맹목에 가깝게 믿는 '영' 의 아버지와 자신인 '육'의 아버지에 대한 사유 내지는 분석에서 진도가 많이 나갔다. 그런데 몸이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의 내면의 울림도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서울에 돌아와 나는 옛날의 나로 돌아와 있었고 나는 더 이상 내가 먹을 법을 내 손으로 지어먹거나 쌀자루를 메고 밤길을 걸어 빈방을 찾아가는 그런 허망한 일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117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원위치가 아니다. 그 영혼에 신의 흔적은 남아있다. 우리가 결핵을 앓고나서 나아도 그 흔적이 남듯이 우리 영혼에도 흔적이 남는다.
잠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모습도 언급되어 있다.
한국의 어떤 교회가 이렇게 초라하고 가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서로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합니다. 자기가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립니다.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도 그들은 모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달 라고 빕니다. 경건하게 아주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아이나 어른이나 늙은이나 젊은 사람이나 살찐 사람이나 야윈 사람이나 엎드려 기도를 드립니다. 122
따님을 따라서 가본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교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의 교회는 ‘교회이기주의’ ‘물량주의’, 더 나아가서 ‘예수’ 가 없는 교회로 지탄 받고 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실 때에 말구유에 몸을 누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가장 낮고, 힘 없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다. 더 낮아질수 없을 만큼.
지금, 우리 사회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낮은 자를 높이고 한껏 높아있는 자를 낮출 것이다.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베풀고 나누고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법칙이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그 반대로 가고 있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여지게.
아마 이런 문제들이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하고,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요인일 것이다.
그런 머뭇거림이 책에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가슴이 폭발하는 기쁨과 함께 가슴이 천근 무게로 철썩 떨어지는 불안을 동시에 느꼈지요. 망막박리로 실명하리라던 민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빛을 잃지 않게 되었다 하니 그랬고 또 다른 면에서는 민아가 실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내 여생을 바치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26
그리고 선생님이 고뇌하는 인간다운 모습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내가 아는 사람들과도 사랑을 제대로 못한 내가 어떻게 영성을 지닌 낯선 것들과 쉽게 마음을 열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더 방황하게 하소서. 내 거처를 찾을 때까지 길에 노숙자로 버려두지 마시도 옛집 뜨락에서 조금만 더 머물 수 있도록 하락해 주소서 136
성 어거스틴도 회심하고 기독교에 귀의하고자 작정하면서 이런 절규를 했다하지 않는가.
‘나를 온전하신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소서. 그러나 아직은 마소서, 아직은 마소서’
책은 이렇게 5부로 나누어져 있다.
문지방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자신이 딱할 때도 있습니다. 293
선생님은 이렇게 지금의 심경을 고백하고 있지만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행보가 기대된다.
4부는 선생님의 딸 이민아씨의 간증으로 되어있다. 고난을 통해서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모든 주제는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