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 - 고은 산문집
고은 지음 / 신원문화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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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궁핍의 시대에 대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런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의 고민과 성찰들은 결코 궁핍하지 않은 인간 정신의 풍요를 열어주었다. 이제 고개 숙인 자기 자신의 본연으로 돌아가 있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18쪽

형식론의 이런 체험은 형식에의 부정을 넘어서야 할 의무가 있다. 형식이 없이는 어떤 내용도 담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은 정신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정신의 몸이 곧 형식일 것이다.
-24쪽

우리나라의 경우는 교육을 교육 정책으로만 가능하다고 믿는 교육 관료주의가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34쪽

사람이 스스로 돌아보거나 닦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스스로 쉬는 시간을 다 빼앗기는 것이 오늘이라면 이 오늘은 꼭 고쳐져야 하겠습니다.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동안 서 있는 모습이 그립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47쪽

누군가가 저 언덕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아 좀 어리석어라, 어리석어라."
-54쪽

시를 풀어라, 시가 풀려야 아름과 상처도 풀리는 것이다.
시의 무능, 그것만이 시의 전능이다.
-95쪽

시가 찾아옴으로써 나는 제대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105쪽

내가 시인이라는 것, 다시 태어난 시인이라는 행복이 그 암담한 감옥 생활에서 생겨났다.
-106쪽

시로 죽고 싶었던 사실, 시로써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사실의 그 절체절명적인 내 삶의 한 극점이야말로 시인이라는 천직에 내가 충실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시는 세속적인 직업이나 취향으로 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마루턱에서 쓰인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한국의 감옥은 70년대의 김지하 80년대의 김남주를 시인으로 단련시켰다. 아니 김남주는 감옥에서 승화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더욱 치열해진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문이 아니라 무로 되었다.
-108쪽

시는 사람의 가슴 속에 있다.
"시는 심장의 뉴스다"
-121쪽

한 시인은 꿈에 다섯 빛깔의 붓들을 빌려 오랫동안 시를 써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꿈에 그 붓을 돌려준 뒤로는 아예 시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시인은 시가 나오지 않자 더 살 이유가 없었는지 곧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39쪽

모든 시인들이 꿈꾼 것이 바로 내가 저 세상과 이 세상에서 꾼 꿈이 아니었을까. 이렇듯이 시인에게는 꿈이 생시이고 생시가 꿈이다. 시인에게 넋은 물질이다. 시인에게 세상살이 전체는 그 하나하나가 영감이다.
-140쪽

그러나 나는 시인이란 이제 시와 시인만의 존재가 아니라 이제까지 있어온 몇 천 년 동안의 ‘인간’의 그 마지막을 지켜 내는 큰 임무가 숨겨져 있는 존재라고 믿고 있네. 여기에서 시인은 인간의 비인간화를 한사코 막아 내는 비극적인 역할이 있었는지 모르겠네.
-147쪽

새로운 세상이란 통일 그 자체를 넘어서 이제까지의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의 영혼적 충만의 터전이다. 이데올로기에 인간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인간에게 따뜻한 도구로 말해질 때 그것이 새 세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이 총구멍에서 나온 수많은 시대에도 불구하고 권리와 의무가 문화의 꽃송이로 태어나는 통일의 시대를 바라보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통일에 이르는 길이 통일 자체보다 더 위대한 것인지 모른다.
-166쪽

지금 우리는 너무 빨리 총체성으로부터 개체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공동체 대신 핵가족 내지 자기 자신만의 작은 세계에의 집착이 어제오늘의 자화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자기가 진정한 자아라면 자아란 끝내 사회와 세계 그리고 우주에의 일치 없이는 자기일 수 없는 것이다.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은 반드시 철학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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