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부인의 침묵The Reticence of Lady Anne

에그버트는 널찍하고 어두컴컴한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때 그는 자기가 비둘기장에 들어가고 있는지 폭탄 공장에 들어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태도 각오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점심 식탁에서 벌어진 사소한 부부 싸움은 아직 확실한 결말이 나지 않았고, 문제는 앤 부인이 싸움을 재개하거나 그만둘 마음이 얼마나 강한가였다. 차 탁자 옆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자세는 좀 부자연스럽게 딱딱했다. 12월 오후의 어스름 속에서 에그버트의 코안경은 아내의 얼굴 표정을 분간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둘 사이에 놓인 냉랭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그는 희미한 종교적 빛에 대해 자기 소견을 말했다. 겨울이나 늦가을 오후 4시 반부터 6시사이에는 에그버트나 앤 부인이 그 말을 하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것은 그들 결혼 생활의 일부였다. - P11

거기에 대해 특별히 정해진 대답은 없었고, 앤 부인은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돈 타르퀴니오‘는 페르시아 융단 위에 몸을 쭉 뻗고 누워서 난롯불을 쬐고 있었다. 언짢을 수도 있는 앤 부인의 기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혈통은 융단만큼 흠잡을 데 없는 순종 페르시아 고양이였고, 그의 목털은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여 보기 좋게 풍성해지고있었다. 고양이한테 돈 타르퀴니오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르네상스를 좋아하는 급사 아이였다. 에그버트와 앤 부인이었다면 플러프‘라고 이름을 지었을 테지만, 그들은 굳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에그버트는 직접 차를 따랐다. 앤 부인이 먼저 침묵을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또다시 마음을 다잡고 시베리아를 정복한 예르마크와 같은 노력을 해 보기로 했다.
"점심때 내가 한 말은 순전히 학문에만 적용되는 거야. 그런데 당신은 거기에 불필요하게 개인적인 의미를 덧붙인 것 같아."
엔 부인은 침묵의 방벽을 고수했다. 피리새가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에 나오는 가락으로 간격을 메웠다. 에그버트는 그 가락을 당장 알아들었다. 피리새는 그 가락밖에 부르지 않으며, 또한 애초에 그 피리새를 사온 것도 그 가락을 부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 P12

에그버트와 앤 부인은 좋아하는 오페라인 런던탑의 근위대에 나오는가락을 불러 주기를 더 바랐다. 그들은 예술적인 문제에서는 취향이 비슷했는데, 예술에서는 정직하고 명백한 그림, 예를 들면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는 그림을 좋아했다. 마구가 채워져 있지만 기수가 타지 않은 군마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안마당으로 들어온다. 안마당에는 기절하여 창백한 얼굴로 쓰러진 여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그림의 가장자리에 ‘나쁜 소식‘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으면, 그것은 어떤 군사적 이변을 설명하는 그림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암시해 주었다. 그들은 그 그림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고, 더 둔감한 지성을 가진 친구들에게 그것을 설명했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앤 부인의 불만은 4분 동안 예비적인 침묵이 계속된 뒤 분명히 표출되고 현저하게 유창해지는 것이 통례였다. 에그버트는 우유병을 집어 들어 돈 타르퀴니오의 접시에 우유를 조금 따랐다. 접시는 이미 가장자리까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지저분하게 넘쳐흐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리 와서 흘러넘친 우유를 핥아 먹으라고 에그버트가 호소하자 돈 타르퀴니오는 놀라움과 흥미가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흥미는 곧 스르르 사라지고 고양이는 일부러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돈 타르퀴니오는 삶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진공 카펫 청소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가 좀 어리석게 굴고 있다고 생각지 않아?" 에그버트가 쾌활하게 말했다. 앤 부인은 설령 그렇게 생각했다 해도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 P13

"아마 잘못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나한테 있을 거야." 에그버트가 말을 이었지만 쾌활한 태도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인간일 뿐이야. 당신은 내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아."
그는 사티로스의 피를 이어받아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염소라는 암시라도 있었던 것처럼 그 점을 강조했다.
피리새는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에 나오는 가락을 다시 부르기시작했다. 에그버트는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앤 부인은 차를 마시고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몸이 찌뿌듯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이 찌뿌듯할 때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앤 부인의 버릇이 아니었다.
"내가 소화불량으로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아무도 몰라." 이것이 그녀가 즐겨 쓰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소화불량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무도 그녀의 말을 제대로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에 대한 정보량은 연구 논문 한 편을 충분히 쓸 수 있을정도로 어마했다.
분명히 앤 부인은 몸이 찌뿌듯한 게 아니었다.
에그버트는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는 양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벽난로 앞에 깔아 놓은 융단으로 걸어가서 돈 타르퀴니오에게 자리를 좀 비켜 달라고 설득하여 최대한 깔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나서 말했다.
"내가 책임을 져야 마땅한지도 몰라. 그렇게 해서 상황을 좀 더 행복한 쪽으로 돌릴 수 있다면, 나는 더 나은 생활을 하겠다고 기꺼이 약속하겠어." - P14


과연 그게 가능할지는 좀 의심스러웠다. 중년에 접어든 뒤 그에게도 이런저런 유혹이 다가왔다. 하지만 모두 집요하거나 강렬하지 않은 일시적인 유혹뿐이었다. 그 유혹은 12월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못한 푸줏간 아이가 새삼 희망을 가질 이유도 전혀 없는데 2월에 그리스마스 선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는 여자들이 1년 내내 광고 매체를 통해 사도록 강요당하는 생선용 나이프와 모피 목도리를 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그런 유혹에 굴복할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래도 누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그 잠재적인 죄를 이렇게 자진해서 포기하는 것은 꽤 감동적이었다.
앤 부인은 감동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에그버트는 안경을 통해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내와의 말다툼에서 지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백에서 지는 것은 처음 맛보는 굴욕이었다.
"나는 저녁 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가겠어." 그는 의도적으로제 목소리가 약간 엄격하고 단호한 울림을 띠게 했다.
문간에서 결국 마음이 약해진 그는 한 번 더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말 어리석게 굴고 있지 않아?"
에그버트가 나가고 문이 닫혔을 때, 돈 타르퀴니오는 속으로 ‘바보!‘
하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앞발을 허공으로 들어올리더니, 피리새 새장 바로 밑에 있는 책꽂이 위로 가볍게 훌쩍 뛰어올랐다. 그가 새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사실 녀석은 오랫동안 공들여 세운 행동 방침을 신중하고 정확하게 실행하고 있었다. 자신을 절대 군주로 여겼던 피리새는 갑자기 몸의 배기량을 평소의 3분의 1로 줄였다. - P15

그런 다음 무력하게 날개짓을하면서 새된 소리로 울었다. 새장을 뺀 그의 몸값은 27 실링이었지만,
앤 부인은 전혀 개입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죽은 지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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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많은 고객들이 나와는 다르게 존슨의 편지를 기다렸고, 답장을 보냈다. 그들은 존슨에게 자신의 삶, 고통, 부상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존슨은 깊은 위로의 뜻을 전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려고 했다. 특히 부상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1960년대에는 육상 선수 혹은 운동선수의 부상에 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존슨의 편지에는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소중한 정보가 많았다. 나는 부상에 대한 법적 책임 문제로 잠깐 걱정하기도 했다. 또한 언젠가 버스를 빌려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싣고서 병원에 갈 계획이라는 편지를 받게 되지 않을까도 걱정했다.
고객들 중에는 타이거에 대한 의견을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존슨은 고객들의 피드백을 모아 새로운 디자인을 고안했다. 예를 들어, 타이거 운동화의 쿠션이 얇다고 불평하는 고객이 있었다. 그는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할 계획인데, 타이거를 신으면 완주할 수 있을 것 같지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존슨은 구두 수선공을 찾아 샤워용 신발의 고무창을 타이거 운동화에 대달라고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존슨이 임시방편으로 만든 운동화에는 바닥전체에 최신식 중창 쿠션이 장착됐다 오늘날 이것은 육상 선수들이 신는 트레이닝화의 표준이 됐다. 존슨이 임시로 만든 밑창은 대단히 역동적이고 부드럽고 기발해서 존슨의 고객은 보스턴 마라톤에서 자신의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존슨은 나에게 이런 성과를 전하고 오니쓰카에 알려야한다고 주장했다. 몇 주 전 바우어만 코치도 나에게 자신이 작성한 노트를 전해줄 것을 부탁한 터였다. 나는 ‘맙소사! 미친 천재가 한 번에한 사람씩 나타나고 있군!‘ 이라고 생각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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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아주 빨리 달려야만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어.
만약 다른 곳에 가려면 여기서보다는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 - P15

나는 두 켤레를 오리건대학교 시절 나의 육상 코치인 빌 바우어만 코치에게 보냈다. 바우어만 코치는 내가 사람들이 신고 다니는 신발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도록 해주신 분이다. 그래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일본에서 보내온 신발을 보냈다. 바우어만은 천재적인 코치이자 동기부여의 대가로, 젊은 선수들을 가르치는 데 타고난 지도자였다. 그는무엇보다 젊은 선수들의 기록을 향상시키는 결정적인 도구는 신발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간이 신고 다니는 신발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나는 오리건대학교에서 4년 동안 육상 선수로 뛰었는데, 당시 바우어만 코치는 로커룸에 들어와 선수들이 신는 신발을 몰래 가져가기로 유명했다. 그는 며칠 동안 선수들의 신발을 뜯어서 개조하고는 다시 꿰매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우리는 바우어만 코치가 개조한 신발을 신고 더 빨리 질주할 때도 있었지만, 발에서 피가 날 때도 있었다.
바우어만 코치는 결과에는 상관없이, 신발 개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신발의 발등 부분을 떠받치고 중창midsole. 신발 바닥을 더 두껍게 하기위해 안창과 결창 사이에 삽입한 창 -에는 쿠션을 대고 앞발에는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선수들의 신발을 좀 더 날렵하고 푹신하고 가볍게 만들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특히 신발을 가볍게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마일- 1.6킬로미터을 달릴 때 신발이 1온스-28그램만 가벼워져도 55 파운드킬로그램의 충격 완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의 계산은 정확했다. 보통 선수가 6피트- 183 센티미터의 보폭으로 달린다.
면, 1마일을 달릴 때 880 스텝을 밟게 된다. 각 스텝에서 1온스를 덜어 내면, 정확하게 55파운드가 나온다. - P68


판매 전략은 간단했다. 그리고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나는 몇몇 스포츠용품점에서 거절당하고는 여보게, 세상에 흔해빠진 게 운동화야!", 북서태평양 연안을 누비고 다니면서 육상 대회가 열리는 경기장은 모조리 찾아다니기로 결심했다. 나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코치, 선수, 팬 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가져온 신발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반응은거의 똑같았다. 나는 주문서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포틀랜드로 차를 몰면서 림버 업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백과사전을 제대로 팔지 못했다. 게다가 그일을 싫어했다. 그나마 뮤추얼펀드는 좀 더 많이 팔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일도 싫었다. 그런데 신발을 파는 일은 왜 좋아하는 것일까?
그 일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달리기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매일 밖에 나가 몇 마일씩 달리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파는 신발이 달리기에 더 없이 좋은 신발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믿음에 공감했다. 믿음, 무엇보다도 믿음이 중요했다. - P86

1962년 - 미친 생각
1963년 - 성공할 수 있을까?
1964년 · 자동차에서 신발을 팔다.
1965년 - 자기자본 딜레마
1966년 · 말보로 맨과의 전쟁
1967년 · 신발에 미친 괴짜들
1968년 - 나의 파트너, 팍스 나이트
1969년 . 사장으로 산다는 것
1970년 · 현금, 현금, 현금이 필요해
1971년 - 부도 위기, 그리고 나이키의 탄생
1972년 - "우리의 방식, 아이디어, 브랜드로 승부합시다"
1973년 - 프리폰테인 정신 : 내일이 없는 것처럼 뛰어라
1974년 - 오니쓰카와 결별하다.
1975년 - 돌려막기 인생
당신은 슈정을 깬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1976년-버트레이스:나이키가 문제를 해결하는 법
1977년-에어 쿠션,스포츠스타, 미국 판매가격
1978년-급격한 성장,그리고 좌충우돌
1979년-내부의 적과 중국이라는 기회
1980년-결승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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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의 발전으로 학문의 중심이 달라진 것은 진리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논리학은 보편타당성을 지향하며 영원불변의 진리를 추구한다. 반면에, 수사학은 시간과 공간에 구속되어 있다. 논리학은 진리라는 대전제를 벗어나지 않는 연역적 논리 구조가 핵심이다. 반면에, 수사학은 진리라는 대전제가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는 서로 다른 의견의 교환과 대립 속에서 구해진다는 것이 인문주의적 진리관의 핵심이다.
이렇게 볼 때 인문주의는 세 가지를 강조하게 된다. 인간, 언어,
역사다. 인간은 세계의 주체로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교육을 통해 진리를 창조해간다. 이런 인간에게만 있는 특성이자 수단이 언어다. 언어는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진리를 구성해내는 수단이다. 역사는 인간의 행적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할 때 인간의 역사는 무의미하다. 중세의 역사는 구원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르네상스기에 세속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P28

 역사를 이해하려면 과인간의 행위와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을 현재에 적용해야 한다.
결국 언어를 통한 세대 간 소통이다.
이런 르네상스 인문주의 분위기에서 자란 마키아벨리는 말하고,
쓰고,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을 포함한 세상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깨달은 바를 글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을 그냥 담아두기만 하지 않고 표현했다는 것은 그가 어떤 식으로든 대중과 소통하기를 즐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쓴 희곡 「만드라골라 La Mandragola」와 친구들에게보낸 편지들을 보면 르네상스적 인간, 마키아벨리의 특징이 나타난다. 특히  만드라 골라」는 그를 인기 있는 희곡 작가로 만든 작품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이탈리아의 각 도시에서 무대에 올려져 인파를 모았으니, 희곡 작가로서 그는 같은 시대 사람들과도 잘 통한 모양이다.
마키아벨리가 쓴 편지들도 그의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사고와 채치를 보여주는데, 그중에는 『군주론』 집필에 관해 알린 것도 있다.
- P29

마키아벨리의 희곡, 만드라골라」와 「클리치아」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군주론』 『로마사 논고 같은 정치서와 역사서뿐 아니라 여러 희곡 시를 남겼다. 그의 연극을 본 피렌체 관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그는 생전에 다른 무엇보다도 희곡 작가로서 널리 알려졌다.
대표작  만드라골라」에서 마키아벨리는 사랑의 묘약으로 불리던 만드라골라를 통해르네상스 시기 사회를 풍자한다. ......한 청년이 나이 많고 부유한 법률가와 그의 정숙한 부인을 찍어 불륜을 저지르게 하는 내용인데, 그녀를 꾀어내는 데 타락한 세속적 인간들이 동원된다. 우선 남편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건드린다. 아이를 확실히 낳게 하는 만드라콜라라는 묘약이 있는데, 이 약을 먹고 관계를 맺으면 남자가 꼭 죽는 단점이 있다고한 것이다. 죽기는 싫고 아이는 갖고 싶던 남편은 부랑자를 배불리 먹인 뒤 아내의 침실에 들여보내면 괜찮을 것이라는 꼬임에 넘어간다. 그의 정숙한 부인을 꾀기가 가장 힘든데, 여기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교회의 신부가 돈의 유혹을 받고 힘을 보탠다. 결국 저마다 욕망을 통해 도덕심과 죄책감을 잠재우는 데 성공한 청년은 법률가의 부인과 합방한다. 게다가 그 부인에게 남편의 어리석음과 제반 상황을 설명하는데, 이야기를 들은 부인이 청년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불륜이라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끝을 맺는다.

마키아벨리가 쓴 또 다른 희곡 『클리치아Clizia」도 만드라골라처럼 사랑과 속임수에관한 것이다. 니코마코가 자기 집에서 자란 고아 소녀 클리치아에게 연정을 품는다. 그런데 니코마코의 아들 클레안드로도 클리치아의 미모에 반했다. 니코마코는 클리치이를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하인과 결혼시키고는 첫날밤에 하인으로 분장해 그녀를기다린다. 하지만 다음 날 침대에서 발견한 사람은 클리치아가 아니라 다른 하인이었다.
니코마코의 부인이 모든 것을 눈치채고 일을 꾸민 것이다. 욕망을 위해 속고 속이는 적나라한 인간사를 해학으로 풀어낸, 르네상스기의 전형적인 희곡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드라골라」와 「클리치아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흑사병과 끝없는 전쟁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희곡이다. 이 작품들에 드러난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은 그보다 앞선 피렌체 출신 작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이어진다고수 있다. 세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기존 종교와 도덕의식은 흐려져가는 가운데 갖가지 욕망을 품은 인간의 행복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은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라 욕망이라고 본......그에 대한 추구가 과연 나쁜가를 묻는다. - P3233

장원 경제에 기반을 둔 중세와 달리 르네상스는 도시의 상공업에서 싹텄다. 중세에 수도원이라는 지식 독점 공간에서 라틴어라는 성경의 언어를 배타적으로 습득한 수도사들은 유일신의 진리 속에서만 사고한 반면, 도시의 자유로운 상공인들은 경험적 지식으로 이익을 추구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만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시의 발달은 유럽인들이 살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피렌체는 피사를 통해 지중해로 흘러드는 아르노강을 끼고 있어서 공업용수의 공급과 상업에 유리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가 일찌감치 발달했다. 사실 중세 이탈리아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도시가 주도한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위험에 대비한 보험을 만들어냈고, 자산의 증가를 적는 차변과 자산의 감소를 적는
대변을 통해 이익과 손실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할 수 있는 복식부기를 도입하기도 했다. 『군주론』의 서술 방식을 보면, 한 행동이 일으킬 수 있는 여러 결과를 도출하고 비용과 이익에 따라 비교 분석한다. 더 유용하고 이익이 큰 쪽을 선택하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마키아벨리가 실리를 추구하는 상인의 감각을 정치에 적용했다고 할 수도 있다.  - P42


부를 쌓는 데 심혈을 기울인 피렌체 사람들은 이익에 민감한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7장에서 이들이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고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 P51

교황청의 타락은 종교에 대한 일반 민중의 믿음까지 흔들리게 했다.
그리고 이런 세태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13세기부터 이단에 반대하며 제대로 된 믿음을 설파하기 위한 운동이 있었는데,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프란체스코수도회나 도미니크수도회의 운동이다. 사보나롤라는 도미니크수도회의 일원으로 피렌체에서 도시의 타락과 교황청의 부패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이 설교가 시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1497년에는 ‘허영의 소각‘이라는 피렌체판 분서갱유가 일어났다. 피렌체 사람들에게서 경건한 신앙심을 빼앗고 죄를 불러일으키는 화장품, 옷, 도서, 예술품 등을 광장에서 불태웠다. 이것은 피렌체의 세속 문화에 대한 거부였다. 앞에서본 것처럼 세속적인 쾌락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화는 메디치가가 주도했다.
한편 알프스 이북에서 신의 심판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보나롤라의 예언처럼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런 위기상황에 메디치가는 프랑스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서 몰락하고,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사보나롤라의 추종자들은 정권을 잡는다.
사보나롤라는 유일신을 섬기는 가톨릭 신자답게 정부 형태에서도 공공선을 추구하는 왕정이 가장 좋은 체제라고 보았지만, 유연하게 사고할 줄 알았다. 각 나라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가장 좋은 정부 형태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공화제의 전통과 역사가 깊은 피렌체에는 시민 정부 형태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대평의회 제도를 제안했다. 대평의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의회였다.
.....사보나롤라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황청의 타락을 대놓고 비판했다가 교황의 견제를 받았으며 ......친메디치 귀족들의 훼방도 거셌다.......사보나롤라와 측근들은 화형장으로 내몬 것이다. - P7071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8장에서 사보나롤라를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라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시기의 상황에 유연한 대처를 역설한 것이다.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위해 정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당연히 정치의 논리를 따랐어야 했는데 사보나롤라는 여전히 수도원에서 설교라는 수단에만 의지했다. 그사이 반대파와 교황은 갖가지 정치적 수단을 동원해 그를 압박했고, 결국 그는 실패했다. 물론 그가 교황청의 타락을 비판한 점에서 나중에는 루터로 이어지는 종교개혁의 선지자로 추앙받기도 한다.
사보나롤라의 몰락을 알리는 동판을 보면서 인간이 유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본다. 성직자가 정치가로 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는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여러 저작에서 정치가는 끊임없이 질료의 상태를 잘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 P72

마키아벨리는 1498년 사보나롤라가 죽은 다음 달부터 메디치가가 복귀하는 1512년까지 피렌체의 제2서기관과 10인위원회 위원을 맡아 일한다.  - P76


제2서기관은 외교, 10인위원회는 국방을 맡는 자리였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1502년에 종신직 정의의 기수로 임명된 소데리나 Pierosalenni의 총애를 받았다. 정의의 기수는 피렌체 정부의 최고위직이었다. 전통적으로 공화국에서는 폭군의 출현을 우려해 임기를 엄격히 제한했다. 피렌체에서 공화국의 개혁이라는 과제를 앞에 두고 행정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귀족파와 더 많은 참여를 바라는 인민파간의 대립이 큰 문제였다. 그리고 양측이 타협한 결과가 바로 종신직인 정의의 기수다. 귀족파는 귀족 출신인데 야망이 없어 보인 소데리니를 그 자리에 앉혔고, 소데리니는 지지 세력이 미비한 자신에게 힘이 될 심복으로 귀족이 아니고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지만 능력이 출중한 마키아벨리를 발탁했다. 어쨌든 마키아벨리는 외교와 국방을 맡은 뒤에 이탈리아의 각 도시국가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까지 돌아다니며 정세를 보고했다. 그의 보고서는 간결한 데다 핵심을 잘 담아, 당시 정부의 많은 인사들이 돌려 읽었다고 한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권대사가 되지는 못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외교의 핵심 업무 중 하나인 정세 파악과 보고였다. 피렌체를 대표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정치적식견이 피렌체의 통치자들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수 있었다. 그는 이때 얻은 경험을 통해 정치적 지혜와 실용적 사상을 형성했다.
- P77

그의 외교 업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피렌체 정부를 대신해 다른 국가의 황제나 군주를 만나 의견을 교환하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피렌체 영향하에 있는 지역에 가서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교황군 총사령관이자 전제군주였던 보르자, 프랑스왕 루이 12세,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교황 율리우스2세 등이 다 이런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이다. 이들을 만난 경험은그의 저작에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예컨대 1502년 피렌체 정부가 당시 위협적 존재이던 보르자의 속마음을 파악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파견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때 만난 보르자의 행적과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나중에 『군주론』 7장에 담았다. 당시 마키아벨리가 쓴 편지 가운데, 용병대장들을 사로잡은 세니갈리아 사건에 대한 박진감 있는 묘사가 눈에 띈다.

발렌티노공(보르자)의 군대가 세니갈리아로 쳐들어가 오르시니와 비텔리를 잡아들였다. 도시는 계속 약탈당하고 있다. 지금은 밤 11시다. 내 명령을 수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 편지를 부칠 수있을지 아주 불안하다. 다음에 더 자세히 쓰겠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오르시니와 비텔리)이 내일 아침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1507년에는 마키아벨리가 전권대사 베토리 Francesco Vetori 를 보좌해 독일로 파견된다. 막시밀리안 1세가 밀라노를 침략하려고 했기때문이다. 밀라노는 이미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막시밀리안 1세의 침략은 프랑스와 독일의 대결을 의미했다. 프랑스와 동맹 관계에 있던 피렌체로서는....
그가 보기애 독일의 힘은 자유로운 도시에서 나왔다. - P79

승자도 패자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전투가 많았다. 게다가 고용국이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대개 안하무인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전투를 앞에 두고 사보타주에 나서면서 돈을 더 요구하는 것이다.
문제는, 정치와 경제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이탈리아에서 북쪽의 밀라노공국과 베네치아공화국, 중부의 피렌체공화국과 교황국, 남쪽의 나폴리왕국 등이 강대국으로 꼽혔다.
이 나라들이 영토 확장 경쟁을 벌인 탓에 군대가 필요하고 전쟁이 잦았다. 피렌체는 용병을 쓰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고 이득을취해야 했지만, 지루하게 이어지는 전쟁 탓에 용병에게 지급하는 보수만 늘어났다. 결국 재정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세금을 내는 시민들이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정권의 동요와 국가의 위기를 낳았다. 용병 문제는 국방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문제였다.
이런 상황을 일찍이 인식하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사람들을 모아 훈련해서 군대를 구성했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 누가 가려고 하겠는가? 피렌체 시민들은 생계를 핑계로 댔다. 가장 크게 반대한 집단은 귀족이었다. 인민에게 무기를 주었을 때 그것이 자신들을 향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피렌체 근교 농촌에서 군인을 모으는 것이다. 그들의 생계에 손해를 끼치지 않게 확실히 보상한 결과 군대를 구성할 수 있었다. 소데리니의 전폭적인 지지와 마키아벨리의 노력에 힘입은 결과였다. 이 군대로 피렌체가 1509년에 피사를점령한다.  - P81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기 피렌체에는 공화국을 떠받치는 시민적요소와 그것을 대체하는 대가문들의 과두제적 요소, 1인 지배의 군주제적 요소가 혼재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1469년에 피렌체는 명목상 공화국이면서 메디치가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때는 특히 병약하던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고 로렌초 데 메디치가 스무살 나이로 권좌에 오른 해다. 로렌초가 지배하는 피렌체에서 성장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몰락 그리고 사보나롤라의  집권과실각을 목도한다. 그 뒤 피렌체공화국의 공무원이 된 마키아벨리는 잘사는 나라,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민병대를 구성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 시민은 공동체의 핵심 세력이었다.
.......힘 있은 가문과 개인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늘날에는 이를 대중과 엘리트, 일반 시민과 지도자 또는 팔로워와 리더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82

1520년에 메디치가의 의뢰를 받아 집필하기 시작한 ‘피렌체 사‘다. 마키아벨리는 가문이 아니라에 피렌체를 중심에 두고 이 책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메디치가의 역사와 그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 조국을 위해 다시 일하고 싶었지만 메디치가가 의심을 거두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그의 역사 서술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피렌체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메디치가 사람은 살베스트로다. 1378년에 정의의 기수가 되기도 한 그는 인민 편에서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려고 했다. 메디치가의 그다음 수장은 비에리 또는 비에리 디 캄비오로 불린 사람이다. 마키아벨리의 서술에 따르면,
귀족들의 억압에 불만을 품은 인민들이 무기를 들고 그에게 찾아가 자신들을 위해 권력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마음만 먹었으면 피렌체의 지배자가 됐을 그가 오히려 사람들을 설득해 무기를내려놓게 한다. 내전 탓에 불어닥칠지 모를 피바람을 막으려고 한것이다. 한편 교환, 환전을 뜻하는 ‘캄비오‘가 이름에 붙은 데서 알수 있듯 그는 은행을 세워 유럽 각지에 지부를 두었다. 그와 동업한 친척 중 한 명이 우리가 앞에서 본 조반니 디 비치다.
사업 수완이 좋던 조반니는 특히 교황청의 금고 관리를 맡으면서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유럽 곳곳에서 교황청으로 모이는자금은 엄청난 것이었다. 조반니는 큰 부자인데도 귀족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우는 재산세 형식의 새 조세제도를 도입하는 데 찬성하면서 인민의 지지까지 얻었다.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코시모고 둘째가 로렌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코시모와 그 자손들이 메디치가의 힘을 강화했다면, 로렌초 집안에서는 코시모 1세가 나왔다.
- P85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가 몸은 낮췄지만 피렌체의 선거제도를 무의미하게 하면서 사실상 지배자로 군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견제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명문 귀족인 알비치 (Rinaldo degli Mira)도  코시모를 제거해야 피렌체에 안정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족파가 정부의 주요 구성원이 되자 코시모를 잡아들여 처형하라고 전했다. 하지만 코시모가 매수를 비롯한 여러 방법을 동원해 사형대.
신 추방형을 받았고, 얼마 있다 피렌체로 복귀했다. 메디치가가 우위를 유지했지만 귀족파의 위세도 여전했기 때문에 메디치파와 귀족파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사』에서 당시 귀족파를 이끈 카포니 Neri Capponi 와 코시모를 비교한 대목이 흥미롭다.
카포니는 공적인 방식으로 명성을 얻어서 친구가 많고 당파의 추종자는 적은 반면, 코시모는 권력을 위해 공사의 구분 없이 온갖 방식을 다 써서 친구뿐만 아니라 당파의 추종자도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물 평가에 앞서 그의 시민관과 국가관을 알아보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대목도 있다.
피렌체사 7권 1장에 따르면, 시민이 명성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방식이다.
공적인 방식은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한 도시를 획득하거나, 조심히 사려 깊게 임무를 완수하거나, 공화국에 현명하고 알맞은 조언을 하는 것 등이다. 사적인 방식은 "이런저런 시민을 이롭게 하게나, 그를 행정관으로부터 보호하거나, 그를 돈으로 도와주거나, 그에게 분에 넘치는 명예를 수여하거나, 놀이나 공적 증여를 통해 평민들의 환심을 사거나 하는 등으로 명성을 얻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사적인 방식에서 파벌과 당파가 나타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얻은 명성은 많은 해를 끼친다. - P86

마키아벨리는 코시모의 뛰어남과 업적을 다 인정하면서도 그가 사적인 방식으로 권력과 명성을 얻어 공화국에 해를 끼쳤다고 본다. 시민들이 국가가 아닌 메디치가에 충성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을 부패시켰다는 가장 큰 죄를 메디치가가 지었다.
"위대한 자‘로 칭송받은 로렌초는 어떤가? 파치가의 끔찍한 습격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사건 때문에 메디치 군주국이 빨리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시민들의 마음이 자유보다는 호혜와 영웅을 바라는 쪽으로 기울었다는것이다. 두 번째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군주가 될 가능성이 더커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 배경과 비슷한 예를 로마공화국 말기 카이사르 암살 사건에서 볼 수 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권력의 집중때문에 자신들의 자유정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를 비난했다. 카이사르의 영웅적 행위와 풍모와 그가 시민들에게 베푼 호혜에 더 마음이 끌린 시민들은 공화국보다 군주국을 선호했으며 이런 상황이 결국 로마공화정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공화정이 군주정으로 바뀌려면 시민들이 자유보다 복종에 익숙해져야 하며 군주가 되려는 인물 또는 가문이 있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경쟁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경쟁자는, 공화정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엘리트일 수 있으며 스스로 군주가 되려고 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 군주가 될 수 있다. 흔히 모반은 경쟁에서 불리한 쪽이 일으키는데, 그것이 실패하면 역풍이 기존 관계를빠르게 강화한다. 마키아벨리는 고금의 사례를 통해 이런 현상을 강조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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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만큼 널리 알려진 동시에 많은 오해를 받는 사상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 일컫는 권모술수의 대가로 여겨지는데, 이는 그의 악명 높은 책 『군주론  때문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이 대개 그렇듯 『군주론』도 명성에 비해 실제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과연 『군주론』이 목적을 위해서라면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마키아벨리즘을 역설하는 처세서일까? 오늘날 우리가 마키아벨리와 마키아벨리즘을 너무 간단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아닌지 짚어볼 일이다.
그를 둘러싼 오해는 또 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자인가 아니면 공화론자인가 하는 문제다. 이 논쟁이 쉽게 해결되지 않아서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군주론』 이 제목에서 드러나듯 정치의 중심에 군주를 두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설파한다면,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로마사논고‘는 고대의 로마공화정을 모범으로 삼아 공화주의를 지지한다. 두 책을 쓴 사람이 같은데 이렇게 주장이 상반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11


베키오다리 남쪽으로 가다 보면 마키아벨리의 생가 터가 나온다.
아쉽게도 그의 집은 2차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고 표석만 붙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사실을 접하게 된다. 생가 표석에서 그가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 정치사상의 시조가 아니라 피렌게의 역사가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군주론』의 저자보다는 고향의 역사를 담은 『피렌체사Istorie Farmite 의 저자로서 기리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대한 그의 탄식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한 편지에 "나는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되었다"고 쓰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세금을 제때 못 내기도 했다. 하지만 책 읽기를 좋아했고, 장서가 많았다. 곤궁한 형편이라도 이런 환경 덕에 마키아벨리는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고 사색을 즐길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당시 피렌체에서 유행한 그리스어 교육은 못 받았지만 라틴어 지식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가 색인 작업을한 대가로 어렵게 구한 리비우스의 『로마사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가 집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성 들여 갖춘 책은 당연히 아들의 지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군주론』에 펼쳐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방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통찰은 어린 시절부터 쌓은 고전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아버지 덕에 『로마사』를 읽지 않았다면 나중에 『로마사 논고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 P25

 공식적인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마키아벨리가 탄탄한 글솜씨로 다양한 분야에서 빼어난 작품을 남겼고, 그 작품들이 500년 세월을 넘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작품을 탄생시킨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교육의 변화다. 중세의 교육은 일원론적 세계관에 기반했다. 유일신이 진리와 보편 법칙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은, 논리적으로 완벽한 유일신의 본질과 보편 법칙을 탐구하는데 있었다. 원리가 자명한 논리학과 수학이 교양 학문의 중심이 될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기에는 수사학의 위상이 높아진다. 중세 논리학이 보편 진리를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면, 수사학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한 언어 기법을연구하는 학문"(『한국현대문학대사전)이다. 다시 말해, 수사학은 언어의 상호성에 중점을 둔다.
원래 수사학은 웅변에 기반한 것으로 시민의 정치 참여가 활발하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달했다. 당시에는 동료 시민들에게정책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웅변이 정치 활동의 핵심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모여 정견을 발표하고 경청하는 주요 공간인 광장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수사학도 그 힘을 잃었다.
중세는 명확한 위계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는 달랐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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