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만큼 널리 알려진 동시에 많은 오해를 받는 사상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 일컫는 권모술수의 대가로 여겨지는데, 이는 그의 악명 높은 책 『군주론  때문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이 대개 그렇듯 『군주론』도 명성에 비해 실제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과연 『군주론』이 목적을 위해서라면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마키아벨리즘을 역설하는 처세서일까? 오늘날 우리가 마키아벨리와 마키아벨리즘을 너무 간단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아닌지 짚어볼 일이다.
그를 둘러싼 오해는 또 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자인가 아니면 공화론자인가 하는 문제다. 이 논쟁이 쉽게 해결되지 않아서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군주론』 이 제목에서 드러나듯 정치의 중심에 군주를 두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설파한다면,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로마사논고‘는 고대의 로마공화정을 모범으로 삼아 공화주의를 지지한다. 두 책을 쓴 사람이 같은데 이렇게 주장이 상반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11


베키오다리 남쪽으로 가다 보면 마키아벨리의 생가 터가 나온다.
아쉽게도 그의 집은 2차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고 표석만 붙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사실을 접하게 된다. 생가 표석에서 그가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 정치사상의 시조가 아니라 피렌게의 역사가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군주론』의 저자보다는 고향의 역사를 담은 『피렌체사Istorie Farmite 의 저자로서 기리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대한 그의 탄식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한 편지에 "나는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되었다"고 쓰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세금을 제때 못 내기도 했다. 하지만 책 읽기를 좋아했고, 장서가 많았다. 곤궁한 형편이라도 이런 환경 덕에 마키아벨리는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고 사색을 즐길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당시 피렌체에서 유행한 그리스어 교육은 못 받았지만 라틴어 지식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가 색인 작업을한 대가로 어렵게 구한 리비우스의 『로마사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가 집에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정성 들여 갖춘 책은 당연히 아들의 지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군주론』에 펼쳐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방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통찰은 어린 시절부터 쌓은 고전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아버지 덕에 『로마사』를 읽지 않았다면 나중에 『로마사 논고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 P25

 공식적인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마키아벨리가 탄탄한 글솜씨로 다양한 분야에서 빼어난 작품을 남겼고, 그 작품들이 500년 세월을 넘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작품을 탄생시킨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교육의 변화다. 중세의 교육은 일원론적 세계관에 기반했다. 유일신이 진리와 보편 법칙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은, 논리적으로 완벽한 유일신의 본질과 보편 법칙을 탐구하는데 있었다. 원리가 자명한 논리학과 수학이 교양 학문의 중심이 될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기에는 수사학의 위상이 높아진다. 중세 논리학이 보편 진리를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면, 수사학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한 언어 기법을연구하는 학문"(『한국현대문학대사전)이다. 다시 말해, 수사학은 언어의 상호성에 중점을 둔다.
원래 수사학은 웅변에 기반한 것으로 시민의 정치 참여가 활발하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달했다. 당시에는 동료 시민들에게정책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웅변이 정치 활동의 핵심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모여 정견을 발표하고 경청하는 주요 공간인 광장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수사학도 그 힘을 잃었다.
중세는 명확한 위계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는 달랐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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