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의 발전으로 학문의 중심이 달라진 것은 진리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논리학은 보편타당성을 지향하며 영원불변의 진리를 추구한다. 반면에, 수사학은 시간과 공간에 구속되어 있다. 논리학은 진리라는 대전제를 벗어나지 않는 연역적 논리 구조가 핵심이다. 반면에, 수사학은 진리라는 대전제가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는 서로 다른 의견의 교환과 대립 속에서 구해진다는 것이 인문주의적 진리관의 핵심이다.
이렇게 볼 때 인문주의는 세 가지를 강조하게 된다. 인간, 언어,
역사다. 인간은 세계의 주체로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교육을 통해 진리를 창조해간다. 이런 인간에게만 있는 특성이자 수단이 언어다. 언어는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진리를 구성해내는 수단이다. 역사는 인간의 행적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할 때 인간의 역사는 무의미하다. 중세의 역사는 구원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르네상스기에 세속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P28

 역사를 이해하려면 과인간의 행위와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을 현재에 적용해야 한다.
결국 언어를 통한 세대 간 소통이다.
이런 르네상스 인문주의 분위기에서 자란 마키아벨리는 말하고,
쓰고,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을 포함한 세상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깨달은 바를 글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을 그냥 담아두기만 하지 않고 표현했다는 것은 그가 어떤 식으로든 대중과 소통하기를 즐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쓴 희곡 「만드라골라 La Mandragola」와 친구들에게보낸 편지들을 보면 르네상스적 인간, 마키아벨리의 특징이 나타난다. 특히  만드라 골라」는 그를 인기 있는 희곡 작가로 만든 작품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이탈리아의 각 도시에서 무대에 올려져 인파를 모았으니, 희곡 작가로서 그는 같은 시대 사람들과도 잘 통한 모양이다.
마키아벨리가 쓴 편지들도 그의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사고와 채치를 보여주는데, 그중에는 『군주론』 집필에 관해 알린 것도 있다.
- P29

마키아벨리의 희곡, 만드라골라」와 「클리치아」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군주론』 『로마사 논고 같은 정치서와 역사서뿐 아니라 여러 희곡 시를 남겼다. 그의 연극을 본 피렌체 관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그는 생전에 다른 무엇보다도 희곡 작가로서 널리 알려졌다.
대표작  만드라골라」에서 마키아벨리는 사랑의 묘약으로 불리던 만드라골라를 통해르네상스 시기 사회를 풍자한다. ......한 청년이 나이 많고 부유한 법률가와 그의 정숙한 부인을 찍어 불륜을 저지르게 하는 내용인데, 그녀를 꾀어내는 데 타락한 세속적 인간들이 동원된다. 우선 남편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을 건드린다. 아이를 확실히 낳게 하는 만드라콜라라는 묘약이 있는데, 이 약을 먹고 관계를 맺으면 남자가 꼭 죽는 단점이 있다고한 것이다. 죽기는 싫고 아이는 갖고 싶던 남편은 부랑자를 배불리 먹인 뒤 아내의 침실에 들여보내면 괜찮을 것이라는 꼬임에 넘어간다. 그의 정숙한 부인을 꾀기가 가장 힘든데, 여기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교회의 신부가 돈의 유혹을 받고 힘을 보탠다. 결국 저마다 욕망을 통해 도덕심과 죄책감을 잠재우는 데 성공한 청년은 법률가의 부인과 합방한다. 게다가 그 부인에게 남편의 어리석음과 제반 상황을 설명하는데, 이야기를 들은 부인이 청년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불륜이라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끝을 맺는다.

마키아벨리가 쓴 또 다른 희곡 『클리치아Clizia」도 만드라골라처럼 사랑과 속임수에관한 것이다. 니코마코가 자기 집에서 자란 고아 소녀 클리치아에게 연정을 품는다. 그런데 니코마코의 아들 클레안드로도 클리치아의 미모에 반했다. 니코마코는 클리치이를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하인과 결혼시키고는 첫날밤에 하인으로 분장해 그녀를기다린다. 하지만 다음 날 침대에서 발견한 사람은 클리치아가 아니라 다른 하인이었다.
니코마코의 부인이 모든 것을 눈치채고 일을 꾸민 것이다. 욕망을 위해 속고 속이는 적나라한 인간사를 해학으로 풀어낸, 르네상스기의 전형적인 희곡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드라골라」와 「클리치아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흑사병과 끝없는 전쟁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희곡이다. 이 작품들에 드러난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은 그보다 앞선 피렌체 출신 작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이어진다고수 있다. 세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기존 종교와 도덕의식은 흐려져가는 가운데 갖가지 욕망을 품은 인간의 행복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은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라 욕망이라고 본......그에 대한 추구가 과연 나쁜가를 묻는다. - P3233

장원 경제에 기반을 둔 중세와 달리 르네상스는 도시의 상공업에서 싹텄다. 중세에 수도원이라는 지식 독점 공간에서 라틴어라는 성경의 언어를 배타적으로 습득한 수도사들은 유일신의 진리 속에서만 사고한 반면, 도시의 자유로운 상공인들은 경험적 지식으로 이익을 추구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만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시의 발달은 유럽인들이 살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피렌체는 피사를 통해 지중해로 흘러드는 아르노강을 끼고 있어서 공업용수의 공급과 상업에 유리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가 일찌감치 발달했다. 사실 중세 이탈리아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도시가 주도한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위험에 대비한 보험을 만들어냈고, 자산의 증가를 적는 차변과 자산의 감소를 적는
대변을 통해 이익과 손실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할 수 있는 복식부기를 도입하기도 했다. 『군주론』의 서술 방식을 보면, 한 행동이 일으킬 수 있는 여러 결과를 도출하고 비용과 이익에 따라 비교 분석한다. 더 유용하고 이익이 큰 쪽을 선택하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마키아벨리가 실리를 추구하는 상인의 감각을 정치에 적용했다고 할 수도 있다.  - P42


부를 쌓는 데 심혈을 기울인 피렌체 사람들은 이익에 민감한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7장에서 이들이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고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 P51

교황청의 타락은 종교에 대한 일반 민중의 믿음까지 흔들리게 했다.
그리고 이런 세태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13세기부터 이단에 반대하며 제대로 된 믿음을 설파하기 위한 운동이 있었는데,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프란체스코수도회나 도미니크수도회의 운동이다. 사보나롤라는 도미니크수도회의 일원으로 피렌체에서 도시의 타락과 교황청의 부패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이 설교가 시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1497년에는 ‘허영의 소각‘이라는 피렌체판 분서갱유가 일어났다. 피렌체 사람들에게서 경건한 신앙심을 빼앗고 죄를 불러일으키는 화장품, 옷, 도서, 예술품 등을 광장에서 불태웠다. 이것은 피렌체의 세속 문화에 대한 거부였다. 앞에서본 것처럼 세속적인 쾌락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화는 메디치가가 주도했다.
한편 알프스 이북에서 신의 심판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보나롤라의 예언처럼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런 위기상황에 메디치가는 프랑스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서 몰락하고,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사보나롤라의 추종자들은 정권을 잡는다.
사보나롤라는 유일신을 섬기는 가톨릭 신자답게 정부 형태에서도 공공선을 추구하는 왕정이 가장 좋은 체제라고 보았지만, 유연하게 사고할 줄 알았다. 각 나라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가장 좋은 정부 형태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공화제의 전통과 역사가 깊은 피렌체에는 시민 정부 형태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대평의회 제도를 제안했다. 대평의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의회였다.
.....사보나롤라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황청의 타락을 대놓고 비판했다가 교황의 견제를 받았으며 ......친메디치 귀족들의 훼방도 거셌다.......사보나롤라와 측근들은 화형장으로 내몬 것이다. - P7071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8장에서 사보나롤라를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라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시기의 상황에 유연한 대처를 역설한 것이다.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위해 정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당연히 정치의 논리를 따랐어야 했는데 사보나롤라는 여전히 수도원에서 설교라는 수단에만 의지했다. 그사이 반대파와 교황은 갖가지 정치적 수단을 동원해 그를 압박했고, 결국 그는 실패했다. 물론 그가 교황청의 타락을 비판한 점에서 나중에는 루터로 이어지는 종교개혁의 선지자로 추앙받기도 한다.
사보나롤라의 몰락을 알리는 동판을 보면서 인간이 유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본다. 성직자가 정치가로 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는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여러 저작에서 정치가는 끊임없이 질료의 상태를 잘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 P72

마키아벨리는 1498년 사보나롤라가 죽은 다음 달부터 메디치가가 복귀하는 1512년까지 피렌체의 제2서기관과 10인위원회 위원을 맡아 일한다.  - P76


제2서기관은 외교, 10인위원회는 국방을 맡는 자리였다. 마키아벨리는  특히 1502년에 종신직 정의의 기수로 임명된 소데리나 Pierosalenni의 총애를 받았다. 정의의 기수는 피렌체 정부의 최고위직이었다. 전통적으로 공화국에서는 폭군의 출현을 우려해 임기를 엄격히 제한했다. 피렌체에서 공화국의 개혁이라는 과제를 앞에 두고 행정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귀족파와 더 많은 참여를 바라는 인민파간의 대립이 큰 문제였다. 그리고 양측이 타협한 결과가 바로 종신직인 정의의 기수다. 귀족파는 귀족 출신인데 야망이 없어 보인 소데리니를 그 자리에 앉혔고, 소데리니는 지지 세력이 미비한 자신에게 힘이 될 심복으로 귀족이 아니고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지만 능력이 출중한 마키아벨리를 발탁했다. 어쨌든 마키아벨리는 외교와 국방을 맡은 뒤에 이탈리아의 각 도시국가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까지 돌아다니며 정세를 보고했다. 그의 보고서는 간결한 데다 핵심을 잘 담아, 당시 정부의 많은 인사들이 돌려 읽었다고 한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권대사가 되지는 못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외교의 핵심 업무 중 하나인 정세 파악과 보고였다. 피렌체를 대표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정치적식견이 피렌체의 통치자들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수 있었다. 그는 이때 얻은 경험을 통해 정치적 지혜와 실용적 사상을 형성했다.
- P77

그의 외교 업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피렌체 정부를 대신해 다른 국가의 황제나 군주를 만나 의견을 교환하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피렌체 영향하에 있는 지역에 가서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교황군 총사령관이자 전제군주였던 보르자, 프랑스왕 루이 12세,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교황 율리우스2세 등이 다 이런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이다. 이들을 만난 경험은그의 저작에 중요한 소재로 쓰인다. 예컨대 1502년 피렌체 정부가 당시 위협적 존재이던 보르자의 속마음을 파악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파견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때 만난 보르자의 행적과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나중에 『군주론』 7장에 담았다. 당시 마키아벨리가 쓴 편지 가운데, 용병대장들을 사로잡은 세니갈리아 사건에 대한 박진감 있는 묘사가 눈에 띈다.

발렌티노공(보르자)의 군대가 세니갈리아로 쳐들어가 오르시니와 비텔리를 잡아들였다. 도시는 계속 약탈당하고 있다. 지금은 밤 11시다. 내 명령을 수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 편지를 부칠 수있을지 아주 불안하다. 다음에 더 자세히 쓰겠다. 내 생각으로는 그들(오르시니와 비텔리)이 내일 아침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1507년에는 마키아벨리가 전권대사 베토리 Francesco Vetori 를 보좌해 독일로 파견된다. 막시밀리안 1세가 밀라노를 침략하려고 했기때문이다. 밀라노는 이미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막시밀리안 1세의 침략은 프랑스와 독일의 대결을 의미했다. 프랑스와 동맹 관계에 있던 피렌체로서는....
그가 보기애 독일의 힘은 자유로운 도시에서 나왔다. - P79

승자도 패자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전투가 많았다. 게다가 고용국이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대개 안하무인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전투를 앞에 두고 사보타주에 나서면서 돈을 더 요구하는 것이다.
문제는, 정치와 경제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이탈리아에서 북쪽의 밀라노공국과 베네치아공화국, 중부의 피렌체공화국과 교황국, 남쪽의 나폴리왕국 등이 강대국으로 꼽혔다.
이 나라들이 영토 확장 경쟁을 벌인 탓에 군대가 필요하고 전쟁이 잦았다. 피렌체는 용병을 쓰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고 이득을취해야 했지만, 지루하게 이어지는 전쟁 탓에 용병에게 지급하는 보수만 늘어났다. 결국 재정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세금을 내는 시민들이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정권의 동요와 국가의 위기를 낳았다. 용병 문제는 국방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문제였다.
이런 상황을 일찍이 인식하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사람들을 모아 훈련해서 군대를 구성했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 누가 가려고 하겠는가? 피렌체 시민들은 생계를 핑계로 댔다. 가장 크게 반대한 집단은 귀족이었다. 인민에게 무기를 주었을 때 그것이 자신들을 향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피렌체 근교 농촌에서 군인을 모으는 것이다. 그들의 생계에 손해를 끼치지 않게 확실히 보상한 결과 군대를 구성할 수 있었다. 소데리니의 전폭적인 지지와 마키아벨리의 노력에 힘입은 결과였다. 이 군대로 피렌체가 1509년에 피사를점령한다.  - P81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기 피렌체에는 공화국을 떠받치는 시민적요소와 그것을 대체하는 대가문들의 과두제적 요소, 1인 지배의 군주제적 요소가 혼재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1469년에 피렌체는 명목상 공화국이면서 메디치가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때는 특히 병약하던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고 로렌초 데 메디치가 스무살 나이로 권좌에 오른 해다. 로렌초가 지배하는 피렌체에서 성장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몰락 그리고 사보나롤라의  집권과실각을 목도한다. 그 뒤 피렌체공화국의 공무원이 된 마키아벨리는 잘사는 나라,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민병대를 구성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 시민은 공동체의 핵심 세력이었다.
.......힘 있은 가문과 개인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늘날에는 이를 대중과 엘리트, 일반 시민과 지도자 또는 팔로워와 리더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82

1520년에 메디치가의 의뢰를 받아 집필하기 시작한 ‘피렌체 사‘다. 마키아벨리는 가문이 아니라에 피렌체를 중심에 두고 이 책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메디치가의 역사와 그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 조국을 위해 다시 일하고 싶었지만 메디치가가 의심을 거두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그의 역사 서술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피렌체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메디치가 사람은 살베스트로다. 1378년에 정의의 기수가 되기도 한 그는 인민 편에서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려고 했다. 메디치가의 그다음 수장은 비에리 또는 비에리 디 캄비오로 불린 사람이다. 마키아벨리의 서술에 따르면,
귀족들의 억압에 불만을 품은 인민들이 무기를 들고 그에게 찾아가 자신들을 위해 권력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마음만 먹었으면 피렌체의 지배자가 됐을 그가 오히려 사람들을 설득해 무기를내려놓게 한다. 내전 탓에 불어닥칠지 모를 피바람을 막으려고 한것이다. 한편 교환, 환전을 뜻하는 ‘캄비오‘가 이름에 붙은 데서 알수 있듯 그는 은행을 세워 유럽 각지에 지부를 두었다. 그와 동업한 친척 중 한 명이 우리가 앞에서 본 조반니 디 비치다.
사업 수완이 좋던 조반니는 특히 교황청의 금고 관리를 맡으면서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유럽 곳곳에서 교황청으로 모이는자금은 엄청난 것이었다. 조반니는 큰 부자인데도 귀족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우는 재산세 형식의 새 조세제도를 도입하는 데 찬성하면서 인민의 지지까지 얻었다.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첫째가 코시모고 둘째가 로렌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코시모와 그 자손들이 메디치가의 힘을 강화했다면, 로렌초 집안에서는 코시모 1세가 나왔다.
- P85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가 몸은 낮췄지만 피렌체의 선거제도를 무의미하게 하면서 사실상 지배자로 군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견제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명문 귀족인 알비치 (Rinaldo degli Mira)도  코시모를 제거해야 피렌체에 안정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족파가 정부의 주요 구성원이 되자 코시모를 잡아들여 처형하라고 전했다. 하지만 코시모가 매수를 비롯한 여러 방법을 동원해 사형대.
신 추방형을 받았고, 얼마 있다 피렌체로 복귀했다. 메디치가가 우위를 유지했지만 귀족파의 위세도 여전했기 때문에 메디치파와 귀족파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사』에서 당시 귀족파를 이끈 카포니 Neri Capponi 와 코시모를 비교한 대목이 흥미롭다.
카포니는 공적인 방식으로 명성을 얻어서 친구가 많고 당파의 추종자는 적은 반면, 코시모는 권력을 위해 공사의 구분 없이 온갖 방식을 다 써서 친구뿐만 아니라 당파의 추종자도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물 평가에 앞서 그의 시민관과 국가관을 알아보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대목도 있다.
피렌체사 7권 1장에 따르면, 시민이 명성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적인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방식이다.
공적인 방식은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한 도시를 획득하거나, 조심히 사려 깊게 임무를 완수하거나, 공화국에 현명하고 알맞은 조언을 하는 것 등이다. 사적인 방식은 "이런저런 시민을 이롭게 하게나, 그를 행정관으로부터 보호하거나, 그를 돈으로 도와주거나, 그에게 분에 넘치는 명예를 수여하거나, 놀이나 공적 증여를 통해 평민들의 환심을 사거나 하는 등으로 명성을 얻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사적인 방식에서 파벌과 당파가 나타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얻은 명성은 많은 해를 끼친다. - P86

마키아벨리는 코시모의 뛰어남과 업적을 다 인정하면서도 그가 사적인 방식으로 권력과 명성을 얻어 공화국에 해를 끼쳤다고 본다. 시민들이 국가가 아닌 메디치가에 충성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을 부패시켰다는 가장 큰 죄를 메디치가가 지었다.
"위대한 자‘로 칭송받은 로렌초는 어떤가? 파치가의 끔찍한 습격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사건 때문에 메디치 군주국이 빨리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시민들의 마음이 자유보다는 호혜와 영웅을 바라는 쪽으로 기울었다는것이다. 두 번째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면서 군주가 될 가능성이 더커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 배경과 비슷한 예를 로마공화국 말기 카이사르 암살 사건에서 볼 수 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권력의 집중때문에 자신들의 자유정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를 비난했다. 카이사르의 영웅적 행위와 풍모와 그가 시민들에게 베푼 호혜에 더 마음이 끌린 시민들은 공화국보다 군주국을 선호했으며 이런 상황이 결국 로마공화정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공화정이 군주정으로 바뀌려면 시민들이 자유보다 복종에 익숙해져야 하며 군주가 되려는 인물 또는 가문이 있어야 한다. 이들에게는 경쟁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경쟁자는, 공화정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엘리트일 수 있으며 스스로 군주가 되려고 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 군주가 될 수 있다. 흔히 모반은 경쟁에서 불리한 쪽이 일으키는데, 그것이 실패하면 역풍이 기존 관계를빠르게 강화한다. 마키아벨리는 고금의 사례를 통해 이런 현상을 강조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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