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C 회원국 중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다른 주요
산유국인 이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은 중동 지역의 지도를 가로지르는 주도권을 위한 다툼이다. 이 갈등은 또한 종교와 이념의 충돌,
국가의 이익과 이슬람 세계의 맹주 자리를 노리는 충돌로 인해 빚어졌다. 그리고 석유 역시 이 씨움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에 전 세계는 두 나라의 다툼에 영향을 받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서로를 향해 내비치는 경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 P300

지역을 관통하는 깊은 갈등의 골들을 만들었다. 호메이니의 새로운 현법은 이란 혁명이 단지 이란뿐 아닌 ‘전 세계 단일 공동체‘ 구성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충분할 정도로 분명히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호메이니 자신도 "이란 혁명은 그 출발 지점에 불과하다."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자신의 진짜 목표는 "모든 폭압적인 범죄 정권을 깨부수는 것이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선 이란이 반드시 "다른 국가들에게도 혁명정신을 전파하고 이란 안으로 들어오는 오염된 사상들을 거부해야만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P304

그렇지만 미국을 페르시아만으로 끌어들인 건 이란 혁명뿐만이 아니었다. 1979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소비에트 연방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 지역 공산당 지도자가 비밀리에 미국과 접촉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망상에 빠져 저지른 실수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국가들의 영역을 넘어 처음으로 대규모 군사 행동을 벌였다는 것에 워싱턴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팔레비 국왕이 망명한 후 페르시아만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란은 더 이상소비에트 연방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는 지역의 경찰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페르시아만으로 전진해 중동 지역 석유를 장악하려는 계획의 첫 단계가 될 수도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 입장에서 아프카니스탄 침송은 처음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드는 부담스러운 작전이었고 결국 훗날 벌어지는 연방 붕괴 과정의 단초가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이 침공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성전 사상이 시작되었으며 그 영향역은 전 세계에 퍼진 데 이어 급기야는 아랍 세계의 중심부까지 이어져 관련 지역을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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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관료들은 과거 세 곳의 오스만 제국 동쪽 행정 지역, 즉 빌라예트들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 자신들의 통치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영국이 원래 ‘메소포타미아‘로 불렀던 이 지역은 이제 이라크가 되었고 북쪽 지역과 모술에는 쿠르드족이, 서쪽 지역과 이라크 중심부 및 바그다드에는 이슬람 종파 중 수니파가, 그리고 남쪽 지역과 바스라에는 시아파가 각각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이 세 지역에 공통된 정체성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바스라는 페르시아만과 남쪽으론 인도를 향하고 있었고, 바그다드는 동쪽으로 페르시아와 이어져 있었으며, 모술은 서쪽의 터키와 시리아를 마주보고 있었다. 차이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구나 종교적 구성만 보더라도 쿠르드족, 터키 쪽에서 흘러들어왔으며 네스토리우스(Nestorian)파라고도 불리는 아시리아 기독교인 (AssyrianChristian), 바그다드에서 제일 비중이 큰 단일 민족인 유대인, 신자르산맥(Mount Sinjar)에 모여 살고 있는 야지디(Yazidi)족, 거기에 투르크멘(Turkoman), 아르메니아(Aremenian), 칼데아(Chaldean), 사비아(Salbean) 및 페르시아인들까지 더해져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중 대다수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 민족이었지만 그들 역시 종교적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와 소수인 수니파로 갈라져 있었다.
영국은 이라크로 통일된 이 나라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왕을 내세우는 것이라 생각했고, ‘메카의 수호자‘의 아들이자 지난 전쟁에서 아랍 봉기를 이끌었던 파이살 왕자를 후보로 염두에 두었다. 시리아의 왕으로 잠시 옹립되었다가 프랑스에 의해 쫓겨난 상태였던 파이살 왕자는 당시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라크의 왕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찬성표가 무려 96퍼센트를 차지했다. 더 놀라운 건 투표에 참여한 국민들 대다수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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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여름, 한 편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그 직전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의 조직원 하나가 영상에 등장해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 사이에 있는 어느 모래밭 위에서 발을 굴렀다. 남자의 뒤에는 총알구멍이 숭숭 뚫린 채 버려진 판잣집들이 보였다. 그 무렵까지 두 국가 사이의 국경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했던 곳들이었다. 다시 발을 구르며 이 조직원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국경선을 만들었던 ‘사이크스 피코(Sykes-Picot)‘ 협정은 이제 이라크와시리아의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ISIS)‘의 발아래 사라졌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는 사이크스 피코 협정은 마침내 끝났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런 국경선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선언을 강조라도 하듯 국경 초소가 폭파되는 장면이 보였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국경선들을 지워나갈 것이다."
- P282

 사이크스와 피코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915년 12월 런던,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한 젊은 영국인이 비밀리에 매일 프랑스 대사관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남자가 하는 일은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아니었다. 남자는 이제 곧 사라질 오스만 제국을 대신할 중동 지역의 새로운 지도를 제작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나면 제국주의시대의 식민지들도 곧 적당한 때에 주권에 대한 현대식 정의와 함께 새로운 민족 국가로 탄생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보수당 의원이자 기행문 작가였던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는 런던 최고의 중동 지역 전문가로 영국 정부에 영입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오스만 제국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한 이후부터...... - P284

......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해서 이 지역을 돌았고 그렇게 여행을 하며 여러 권의 기행문도 출간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발표했던 기행문은 『칼리프의 마지막 유산(The Caltiph‘s Last lertage) 이었다. 이슬람교의 율법학자를 흔히 ‘물라(Mullth)‘라 일컫는데, 사이크스의 모습을 본 일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물라(Mad Mullah)‘라 부르기도 했다.
어쨌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사이크스는 런던으로 돌아왔고,
그간의 경력 덕에 중동 지역 정책의 전문가로 인정받았으며 급기야 이지역의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중요한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사이크스는 우선 프랑스 대사관으로 가서 비밀리에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 -Picot)를 만났다. 피코는 프랑스의 고위직외교관으로 어렸을 때부터 늘 나이보다 조숙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한다. 그의 집안은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피코 본인도 레바논 지역 총영사 출신이었다. 각기 출신 배경은 달랐지만 사이크스와 피코는 500년간 이어져 내려온 오스만 제국을 대체할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확신하에 서로 힘을 합친다.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에 중동 지역 대부분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남동부까지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당시에는 제국이 지배하는 지역들만 있었을 뿐 그 안에는 어떤 국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있었으며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난 상태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제국은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및러시아 제국 연합에 대항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의 표현처럼 오스만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려"하고 있었다. - P285

물론 그 제안이라는 건 전쟁 이후 중동 지역의 모래밭 위에 열강들이 멋대로 선을 긋고‘ 역시 유럽 열강들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새로운 국가들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수상 관저에서 회의가 있고 나서 얼마 뒤 사이크스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프랑스 대사관을 비밀리에 드나들며 피코와 만남을 가졌다.
1916년 1월 3일, 두 사람은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모래밭 위에 그어진 선‘은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 하이파(Haifa) 근처에서 시작되어페르시아 국경 근처인 키르쿠크(Kirkuk)까지 이어지며 선의 북쪽은 고랑스의 보호령, 남쪽은 영국령이 된다. 두 사람이 그린 지도에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도 들어 있었다. 프랑스는 파란색 지역‘, 영국은 ‘붉은색 지역‘에 대해 직접적인 통치권을 행사한다. 사이크스와 피코가 격렬히 충돌한 한 가지 쟁점은 바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성지(聖地, the Holy Land)의 관리 문제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두 사람은 영국이 하이파와 아크레(Acre) 두 항구를 차지하며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철도 주변 영토도 가져가는 데 합의했다. 팔레스타인의나머지 땅은 일단 그 주인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종의 공동 관리 구역이 될 것이었다.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북쪽 지역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계산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제안에 동의를 했다.
사이크스와 피코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크게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그저 텅 빈 종이 위에 마음대로 지도를 그렸던 것은 아니다.
이 둘의 작업은 기존 지도들이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은 오스만 제국의 지도였는데, 이 제국의 행정 구역인 빌라예트(villayet)를 상세히 표시한 지도가 완성된 건 18년의 일이었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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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힘을 합친 모스크바와 베이징이 자신들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고 서방측이 제시하는 보편적 가치와 기준에 반기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은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을 지지하면서 이른바 미국의 주도적 위치와 ‘일방주의‘ 에도 대항하고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지정학적 결속에 있어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에너지 자원이다. 한때 마르크스(Marx)와 레닌의 공산주의 이념으로 뭉쳤던 두 나라는 이제 석유와 천연가스를 중심으로 다시 하나가 되었다.
- P196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시작되고 2008년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 경제 질서를 관리하는 미국의 방식을 전 세계는 별다른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2008년 금융위기의 대재앙은 다름 아닌 미국 경제의 심장부를, 아니 중국의 표현처럼 "자본주의 세계의 중심"을 강타하고 말았다. 국가 혹은 공산당 같은 정당이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중국식 모형‘은 미국 방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게다가 중국은 세계 경제가 2009년부터 위기를 벗어나 다시회복세에 접어들게 해준 핵심 동력이었고,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미국을 바라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중국의 관점에서 금융위기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있어 역사적인 분수령" 이었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미국은 중국을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다.  - P201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한 전략 분석가는 『중국의 꿈: 미국 이후 시대의 강대국의 조건과 전략적 준비 ( 同时代的大同思惟)이라는 책을 펴냈다. 중국에서 큰 화제가 된 이 책은 미·중 양국의 대결은 이제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 경제의 무게중심이 바뀌면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중국은 산업혁명 시대에 영국이 했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바로 세계의 공장‘ 역할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현재 중국은 세계 철강 생산량의 50퍼센트를 책임지는 최대 생산국이며 알루미늄과 컴퓨터, 반도체는 물론 전기자동차와 풍력 발전기 제작에 꼭 필요한 희토류 생산량 규모 역시 세계 최대다. 2011년에서 2013년까지의 3년간중국은 미국이 20세기의 100년 동안 소비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멘트를 소비했다. 또한 외환보유고도 충분해서 중국 인민은행의 국가외환관리국(国家外管理局)은 모두 3조 달러 규모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3분의 1은 미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다.
또한 중국 정부가 수출 중심에서 소비 중심으로 경제 변화를 모색함에 따라 중국은 빠르게 소비자들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2000년당시 중국에서는 190만 대, 미국에서는 1,730만 대의 자동차가 팔렸다. 그런데 2019년에는 그 숫자가 2,500만 대와 1,700만 대로 크게 역전되었다. 세계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2002년 사스(Severe Acute RespiratorySyndrome, SARS), 즉 급성호흡기증후군이 유행했을 당시 전 세계GDP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퍼센트에 불과했으나 2020년에는16퍼센트로 증가했다. 이는 중국이 자국의 경제력만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의 규모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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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과 시진핑은 지난 14개월 동안 이미 여섯 차례나 회동을 가졌고 2014년 5월 상하이 회동이  일곱 번째 만남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어느 논평가의 말처럼 "서방측과의 협력이라는 과거의 장밋빛 꿈"은 "서방측이 러시아의 국제적인 고립을 획책함으로써"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런 러시아에게 중국은 또 다른 대안이었다. "우리는 해당 지역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모두에서 똑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푸틴의 말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자신들이 "일극 체제"라 부르는 미국이 "절대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국제적 체제는 물론 비정부 기구며 활동가들이 사주하는 체제 변동과 민주주의 확산 운동 모두에 힘을 합쳐 대항하기로 했다. 양국이 중요하게 내세우는 건 다극화 체제, 그리고 무엇보다 자국 문제를 스스로 알아서 하겠다는 각자의 "절대적 주권" 이었다.‘
양국의 논의사항들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막대한 규모에 이를 수도 있는 천연가스 거래 건이었다. 협상은 지난 10년간 지루하게 계속 이어져왔지만 이젠 어떻게든 매듭을 짓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중국은 환경오염을 줄이고 경제성장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앞으로 천연가스를 더 많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유럽 시장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벗어나 보다 다양한 시장을 필요로 했던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며 국제 전략과 경제 문제 모두에 있어 좀 더 상호 협력이 가능한 새로운 국가에 자국의 미래를 걸어야 했다. 중국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나라였으며, 그 덕에 경제 관리 및 이른바 ‘베이징 콘센서스(Beijing consensus)‘라 하는국가 주도형 자본주의를 앞세운 중국 경제 모형의 가치도 크게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 P182


러시아의 동진 정책은 에너지 자원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시작은 250억 달러를 들이고 2,800마일(약 4,506킬로미터 옮긴이)에 걸쳐 건설한 동시베리아-태평양(Eastern Siberia - Pacifie Ocean. ESPO)송유관이었다. 2018년 러시아는 아시아 지역에 185만 배럴의 석유를공급했고 그중 3분의 2 이상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2005년까지만해도 러시아 석유 수출량의 불과 5퍼센트가 중국의 몫이었지만 지금은 30퍼센트 가까이에 이르며,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중국최대의 석유 공급처가 되었다. 양국의 석유 거래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 중국은 향후 25년 동안 계속해서 석유를 공급받기로 하고 로즈네프트에 800억 달러의 선금을 이미 지급했다.
이런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위협할 만한 요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러시아는 한때 갈등의 중심이 되었던 동쪽 국경 지대에서 인구가 적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골라 중국 국민들이 계속 이주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 국경선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 있지 않은 이 극동의 오지에 혈통적으로 중국계에 속하는 합법, 그리고 불법 이민자들이 약200만 명에서 500만 명 이상 모여들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물론 그숫자를 훨씬 더 낮게 보는 쪽도 있지만, 어쨌든 수치에 상관없이 푸틴은 이 지역의 경제적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한 근처에 남아 있는 소수의 러시아계 국민들이 결국 중국계 국민들에게 잠식당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 P185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의 교류와 중국으로부터의 투자를 적극받아들이고 있다. 자신들의 독재 정치 체제를 바꾸는 데 베이징은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선거 방식을 비판하거나 인권운동가들을 지원할 의사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국가들의 정부 관료들은자신들이 살았던 시절에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러시아어로 모든 사업들을 진행해오고 있지만 중국이 갖는 경제적 영향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중국의 존재감이 빠르게 커지고 중국에 대한 의존도 또한 늘어나면서 이 중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상황이다. 일반 국민들의 경우는 오히려 중국의 이런 영향력과 농지 인수 같은 문제들에 대해 의구심과 원망을 동시에 품고 있고, 정부는 정부대로 모스크바와 베이징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우려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계속해서 지원과 도움을 약속함으로써 이들 국가가 중국과 지나치게 가까와지는 걸 경계한다. - P192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중국에게는 미국이 러시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장이다. 무역 전쟁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2018년, 중국은 러시아에 350억 달러 규모의 상품을 수출했지만 미국으로의 수출 규모는 4,100억 달러에 달했다.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러시아와의 금융 거래에 대한 제재 조치가 실시되었을 때에도 중국의 주요 은행들은 그 조치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러시아와의 얼마 되지 않는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달러화 체제 및 국제 자본 시장에서 제외되는 상황을 감수할 순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와의 거래는 얼마 되지 않는 특별한 은행들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상황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2019년 12월 2일을 기점으로 좀 더 또렷이 드러났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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