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겸朴來謙(1780~1842)은 본관은 밀양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오晚悟·탑서塔西다. 경상도慶尙道구미龜尾 봉곡蓮谷에서 박선호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1810년부터 1811년까지 가주서假主書로봉직했고, 그 후 주서注書, 정언正言, 지평持平, 장령掌슈 등을 역임했다. 1819년 부안현감에임명되었다. 1822년 암행어사에, 1827 년 함경도 북평사에 제수되었다. 또 1829년 영의정 이상황이 심양정사로 갈 때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수행했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43살에 평안남도 암행어사의 경험을 담은 <서수일기西日記 >, 48살에 함경도때의 공무를 기록한 <북막일기幕日記>, 50살에 서장관으로 양을 다녀온 견문을 담은 <심사일기>등 3권의 일기를 남겼다.
1833년 예조참판參判參判으로 있을 때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두 번째 연행을 다녀왔다.
1837년부터 1840년까지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신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 P8

<서수일기>는 1책 35장의 필사본筆寫本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홍문관 부교리로 있던 박래겸朴來謙(1780~1842)이43세의 나이로 1822년 3월 16일부터 동년 7월 28일까지 장장 126일 동안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당시의 일기로, 다른 어떤 기록보다 생생한 암행어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서수일기>의 주된 내용은 일자와 날씨, 경유한 장소, 해당 장소의 대략적 형세, 명승지에 대한 감상, 다닌 거리, 해당 고을 수령의 성명 등이다. 서계별단 등과 같은 공문서를 작성하기 위한 메모의 성격도 없지 않다. 염탐한 기록을 수시로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일기에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유명한 지역 인사들을 직접 내방하거나 서북 문인들의 분노와 탄식에공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또 하층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생생한 모습을 기록하는 등, 신분을 숨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정보들을 얻었다는점도 큰 소득이라 할 수 있다. - P9

4월 16일
관서의 돌로 된 집들

비 때문에 출발할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자 조금 개여서 진흙탕을 무릅쓰고 영원군에 들어갔는데,
고을 수령은 이병규였다. 고을이 깊은 산골에 있었는데 (그 정도가) 거의 맹산보다도 심했다. 고을의 터가 좁고, 앞으로는 큰 냇물을 굽어보고 있었다. 민가 백여호가 모두 돌로 기와를 대신하고 있어기와집이나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대체로 관서에는 돌로 된 집이 많기는 했으나, 이 고을은 더욱 심했다. 영정이 안산 아래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고 큰 냇물로 둘러싸여 있어서, 시원한 것이참 좋았다. 이날, 5리를 다녔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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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볼 때, <열녀춘향수절가>에서 춘향의 어머니 월매가 춘향의 계보로서 소개된다는 것은 굳건하게 뿌리박힌 유교 사회의 전통과 관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일이다.
춘향의 계보에서 또 주목할 점은 아버지 성참판이 그저 월매에 딸려 있는 부수적 인물로 언급된다는 점이다. 마치 영웅소설에서 ‘씨 부인‘이라고 모친을 부수적으로 호명할 때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전한 상황의 역전이다. 월매가 성참판을 데리고 산다고 되어 있으며, 일점혈육이 없어 기자정성,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풍속을 드리는 것도 월매가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점의 주도권은 월매에게 있다. 춘향의 아버지 쪽 계보에 대해 무시하는 듯한 이러한 서술 태도는 고전소설 관행에서 볼 때 상당히 이례적이다.
소설 첫머리에 주인공의 부친 쪽 계보를 들추는 바로 그 자리에 퇴기 월매를 내세워 발언권까지 주고 있는 것은 계산된 목적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것은 남성 중심의 가문 계보에 대한 염증의 발로이며, 새로운 계보 설정에 대한 탐색이라 할수 있다. 이를 조금 확대해서 본다면, 남성 중심의 사회 제도와전통에 대한 저항심의 표출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뒤에 이도령이 소개될 때 이도령의 아버지 이한림의 선정이 치적으로 소개되면서 이도령의 계보가 얘기된다 하더라도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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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년 9월, 정운경(鄭運經, 1699-1753)은 제주 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정필녕(鄭必, 1677~1753)을 따라 제주도로 건너온다. 그는이곳에 머물며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이 낯설고 물선 땅의 문화와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길 작정을 했다.
막상 제주에 와서 보니 이곳 백성 가운데 뜻밖에 일본과 대만은 물론, 멀리 베트남까지 떠내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바다 밖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이참에 바깥세상의 소식이 궁금해진 그는 표류민으로 살아 돌아온사람들을 차례차례 만났다.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신기하고 흥미진진했다. 정운경은 그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또 섬을 일주하고 한라산을 등반했다. 여행에 앞서 이전에 제주를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을 꼼꼼히 읽고 주제별로 편집하여 제주의 인문지리적 특징들을 정리했다. - P11

먼저 <탐라문견록>은 1687년 안남국(安南國, 베트남)에 표류한 조천관 주민 고상영의 표류기부터 1730년 관(官) 만적의 가라도(加羅島) 표류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14인의 표류 기록이 수록되어있다. 이전에도 표해록이 적지 않지만, 이렇듯 하나의 저술에서 15건에 달하는 표류기가 한꺼번에 소개되고 있는 것은 달리 예를 찾기 어렵다. 끝에는 저자가 제주도에서 직접 목격한 최담석 부자의감격적 상봉담을 적은 <최담석전>이 수록되어 있다. - P17

<영해기문>은 정운경의 저술이 아니다. 기존의 제주 관련 기록을정운경이 주제별로 추려서 편집한 내용이다. 김정(金淨)의 《충암록(沖菴錄)》,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지지(地誌)》와 임제(林悌)의《남명소승(南溪小乘)》,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錄)》,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등에서 발췌하여 제주의 기후와 풍토, 언어와 풍습, 뛰어난 경치와 특산품 등을 주제별로 정리했다. 이 글을 읽으면 제주도의 인문지리적 환경과 이름난 풍경점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간추린 제주 입문서인 셈이다. - P17

<탐라기>는 1732년 2월 23일부터 2월 28일까지 5박 6일 동안 섬전체를 일주한 여행 기록이다. 서숙(庶叔) 정택(鄭寧)과 약초꾼김명곤(坤)이 동행했다. 제주현에서 출발하여 자단촌(紫丹村)·서귀진(西歸鎭)·의귀촌(依歸)·수산진(水山鎭)·가마(加馬串)·조천관(朝天)을 거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순해록>은 1732년 4월 12일부터 4월 16일까지 4박 5일 동안 바닷가를 따라 여행한 기록이다. 현에서 산방산(山房山)과 송악산(岳山)을 거쳐모슬진(鎭)과 명월진(明月鎭), 애월진涯月)을 들러 관아로 돌아왔다. 중간 중간 제주의 풍토에 대한 묘사가 보인다. - P18

<해산잡지>는 그때그때 기록해둔 제주의 풍물과 풍광에 대한 적바림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제주 전체의 기후 특성과 자연환경을 꼼꼼하게 적었다. 백록담과 영실, 취병담과 용두암, 등영굴과 망경루의 경치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제주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 내용도 보이고, 직접 듣고 본 기이한 이야기도 있다. 끝에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백두산과 제주도가 우리나라 산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라 하며, 유사한 점을 나열했다. 한반도의 지세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하나의 기운으로 이어졌다고 본 그의 지리관이 잘 드러난다. - P18

<귤보>는 제주 감귤의 종류를 상중하 3품으로 나누고, 각각 5종씩을 예거한 내용이다. 모두 열다섯 가지 품종의 귤을 색깔과 맛으로 구분하여 상세히 설명했다. 제주 감귤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시기에 임제(林悌, 1549~1587)가 <귤유보(橘譜)>를 지은 바 있지만,
아홉 가지 품종에 대해서만 지극히 소략한 내용을 정리한 데 그쳤다. 이에 반해 정운경의 <귤보>는 가지 수도 많고 묘사가 비교적상세하여, 당시 제주도에서 재배되던 귤의 품종과 맛을 확인할 수있다. - P19

붙임  안남국의 명덕후(明德侯)가 우리나라에 올린 글안남국 명덕후 오(吳) 모가 영을 받들어 배에 실어 돌려보내는 일정묘년 10월 사이에 바람에 표류하여 작은 배 한척이 안남국에도착했습니다. 24인이 모두 조선인이라 하는데, 무역을 위해 바다로 나왔다가 뜻하지 않게 풍파가 크게 일어 배가 부서지고 화물을잃었다고 합니다. 조사 결과 귀국의 상민(民)이었습니다. 동체임을 굽어 아끼고, 본국 왕의 호생(好生)의 은덕으로 격외의 은혜를 베풀어, 회안지방에 안착시키고 돈과 쌀을 주었습니다. 뜻하지않게 이미 병이 든 세 사람은 죽고, 현재 남은 21인은 남풍을 기다려 배에 실어 돌려보내려 합니다.
다만 돌아가는 배들은 모두 광동과 복건 등에서 일본으로 가는큰 배가 있을 때 파송하여 돌아가게 됩니다. 바다는 드넓고 앞뒤로기후가 일정치 않아 반드시 도착하기를 기약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표류한 사람들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소원을 이루지못할까 염려했습니다. 계획이 온전치 않아 두 번 세 번 헤아리다가,
금번에 대청(淸) 영파부(寧府)의 상선이 금년 3월 사이에 화물을 싣고 안남국에 이르렀습니다. 본래 이 배는 객화를 가져다가 무역하는 배입니다.
표류한 21인이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구하는 바람이 몹시 간절한 데다, 다행히 배의 주인 진유리(履와 재부(副) 주한원 등이 많은 사람이 괴롭게 타향을 떠도는 것을 불쌍히 여겨......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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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진행되고 있는 역사는 많은 사람들을 해적으로 내몰았다. 해양 국가는 전쟁이 시작되면 대규모로 선원과 해군을 모집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마지막 20년은 잉글랜드와 스페인과의 전쟁이 지속되면서 많은해적들이 해전에 참가했다. 하지만 제임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고 평화의 시대가 열리자 5만 명의 선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거나 굶어죽어야 했다.
항구도시 플리머스는 일자리를 잃은 선원들로넘쳐났고, 그들은 항해하는 선박을 나포하여 노략과 강도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외에도 해적이 증가하게 된 이유로 18세기 초 스페인왕위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끝난 사건을 들 수 있다. - P8

사실 당시 정부가 발급한 나포 허가증은 민간 선박들에게 합법적인 해적 행위를 해도 된다는 증서나 다름없었다. 이외에도 영국 정부는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의 해적 행위를 지원했다. 이들은 지중해를 무법천지로 만들었고 종교적인 이유로 국적을 가지지 않았으며 전쟁과 공동 조약을 무시했다. 북아프리카 해적은 조직 구조는 엄격했고 약탈한 재물을 공평하게 분배했다.  - P10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 해협(Hormuz Strait)은 최초의 해적 소굴이 되었다. 그들은 좁은 호르무즈 해협의 특징을 이용해 비단과 금은보석, 구리, 유자나무를 실은 인도와 아시아 상선을 주로 습격했다.
당시 호르무즈 해적은 그들의 악명을 듣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기원전 694년 아서왕도 호르무즈 해협에 원정대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중해 지역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해적이 존재했다. 그들은 주로 금은보화를 실은 페니키아 상선을 공격했으며, 지중해의 수많은 섬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다. 지중해 해적과 관련된 이야기는 많은 역사 기록에도 실려 있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은 해적을 소탕하고자 했지만 어떠한 정책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200 년 후 로마제국 시기에도 해적들은 기승을 부렸다. 그중에서도 실레지아(Silesia) 해적은 악랄하기로 유명했는데, 그들은 터키 남쪽 부근을 근거지로 삼았다. 실레지아 해적은 수천 척의 선박을 보유했으며, 로마군을 무찌를 정도로 세력이강했다. 기원전 78년 시저(Julius Caesar)는 젊었을 때 해적에게 생포되어 6주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서야 풀려난 적이있다. 당시 해적 활동은 로마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로마는 해적을소탕하기 위해 폼페이우스(the Great pompey)를 파견했는데, 3개월 만에지중해의 해적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바다의 평화도 잠깐, 16세기 들어와서 해적은 다시 지중해를 장악하게 된다.
지금까지 해적은 세계의 안정을 위협하는 걸림돌이었다. 해적의 무기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함께 발전했지만,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기습을 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들의 전투전술은 고대의 수법 그대로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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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부터 담배를 피우는 세상 사람들을 보아왔다. 대부분 담배를 남초(草)로만 알고 있을 뿐, 연초(烟草)로도 불리는 줄은 모른다. 단지 담배가 왜국(倭國)에서 건너온 줄만 알고 있을 뿐, 그에 앞서 본래 어디서부터 전래한 줄은 모른다. 또 시골사람들 가운데는 담배를 비벼 동글동글 마는 방식에 익숙해져, 시장에서 썰어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도 있다. 서울 사람들 가운데는 좋은 품질의 담배를 사는 데만 젖어서 작두로 써는 작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는 자도 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생활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나는 담배의 근원과 유래, 성질과 맛, 그리고 잎을 펴고 싸고말고 써는 방법과, 담배를 떠서 채우고 불을 피워 태우는 방법을 상세히 갖추어 써서, 잘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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