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1년 9월, 정운경(鄭運經, 1699-1753)은 제주 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정필녕(鄭必, 1677~1753)을 따라 제주도로 건너온다. 그는이곳에 머물며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이 낯설고 물선 땅의 문화와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길 작정을 했다.
막상 제주에 와서 보니 이곳 백성 가운데 뜻밖에 일본과 대만은 물론, 멀리 베트남까지 떠내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바다 밖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이참에 바깥세상의 소식이 궁금해진 그는 표류민으로 살아 돌아온사람들을 차례차례 만났다.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신기하고 흥미진진했다. 정운경은 그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또 섬을 일주하고 한라산을 등반했다. 여행에 앞서 이전에 제주를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을 꼼꼼히 읽고 주제별로 편집하여 제주의 인문지리적 특징들을 정리했다. - P11

먼저 <탐라문견록>은 1687년 안남국(安南國, 베트남)에 표류한 조천관 주민 고상영의 표류기부터 1730년 관(官) 만적의 가라도(加羅島) 표류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14인의 표류 기록이 수록되어있다. 이전에도 표해록이 적지 않지만, 이렇듯 하나의 저술에서 15건에 달하는 표류기가 한꺼번에 소개되고 있는 것은 달리 예를 찾기 어렵다. 끝에는 저자가 제주도에서 직접 목격한 최담석 부자의감격적 상봉담을 적은 <최담석전>이 수록되어 있다. - P17

<영해기문>은 정운경의 저술이 아니다. 기존의 제주 관련 기록을정운경이 주제별로 추려서 편집한 내용이다. 김정(金淨)의 《충암록(沖菴錄)》,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지지(地誌)》와 임제(林悌)의《남명소승(南溪小乘)》,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錄)》,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등에서 발췌하여 제주의 기후와 풍토, 언어와 풍습, 뛰어난 경치와 특산품 등을 주제별로 정리했다. 이 글을 읽으면 제주도의 인문지리적 환경과 이름난 풍경점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간추린 제주 입문서인 셈이다. - P17

<탐라기>는 1732년 2월 23일부터 2월 28일까지 5박 6일 동안 섬전체를 일주한 여행 기록이다. 서숙(庶叔) 정택(鄭寧)과 약초꾼김명곤(坤)이 동행했다. 제주현에서 출발하여 자단촌(紫丹村)·서귀진(西歸鎭)·의귀촌(依歸)·수산진(水山鎭)·가마(加馬串)·조천관(朝天)을 거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순해록>은 1732년 4월 12일부터 4월 16일까지 4박 5일 동안 바닷가를 따라 여행한 기록이다. 현에서 산방산(山房山)과 송악산(岳山)을 거쳐모슬진(鎭)과 명월진(明月鎭), 애월진涯月)을 들러 관아로 돌아왔다. 중간 중간 제주의 풍토에 대한 묘사가 보인다. - P18

<해산잡지>는 그때그때 기록해둔 제주의 풍물과 풍광에 대한 적바림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제주 전체의 기후 특성과 자연환경을 꼼꼼하게 적었다. 백록담과 영실, 취병담과 용두암, 등영굴과 망경루의 경치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제주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 내용도 보이고, 직접 듣고 본 기이한 이야기도 있다. 끝에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백두산과 제주도가 우리나라 산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라 하며, 유사한 점을 나열했다. 한반도의 지세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하나의 기운으로 이어졌다고 본 그의 지리관이 잘 드러난다. - P18

<귤보>는 제주 감귤의 종류를 상중하 3품으로 나누고, 각각 5종씩을 예거한 내용이다. 모두 열다섯 가지 품종의 귤을 색깔과 맛으로 구분하여 상세히 설명했다. 제주 감귤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시기에 임제(林悌, 1549~1587)가 <귤유보(橘譜)>를 지은 바 있지만,
아홉 가지 품종에 대해서만 지극히 소략한 내용을 정리한 데 그쳤다. 이에 반해 정운경의 <귤보>는 가지 수도 많고 묘사가 비교적상세하여, 당시 제주도에서 재배되던 귤의 품종과 맛을 확인할 수있다. - P19

붙임  안남국의 명덕후(明德侯)가 우리나라에 올린 글안남국 명덕후 오(吳) 모가 영을 받들어 배에 실어 돌려보내는 일정묘년 10월 사이에 바람에 표류하여 작은 배 한척이 안남국에도착했습니다. 24인이 모두 조선인이라 하는데, 무역을 위해 바다로 나왔다가 뜻하지 않게 풍파가 크게 일어 배가 부서지고 화물을잃었다고 합니다. 조사 결과 귀국의 상민(民)이었습니다. 동체임을 굽어 아끼고, 본국 왕의 호생(好生)의 은덕으로 격외의 은혜를 베풀어, 회안지방에 안착시키고 돈과 쌀을 주었습니다. 뜻하지않게 이미 병이 든 세 사람은 죽고, 현재 남은 21인은 남풍을 기다려 배에 실어 돌려보내려 합니다.
다만 돌아가는 배들은 모두 광동과 복건 등에서 일본으로 가는큰 배가 있을 때 파송하여 돌아가게 됩니다. 바다는 드넓고 앞뒤로기후가 일정치 않아 반드시 도착하기를 기약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표류한 사람들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소원을 이루지못할까 염려했습니다. 계획이 온전치 않아 두 번 세 번 헤아리다가,
금번에 대청(淸) 영파부(寧府)의 상선이 금년 3월 사이에 화물을 싣고 안남국에 이르렀습니다. 본래 이 배는 객화를 가져다가 무역하는 배입니다.
표류한 21인이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구하는 바람이 몹시 간절한 데다, 다행히 배의 주인 진유리(履와 재부(副) 주한원 등이 많은 사람이 괴롭게 타향을 떠도는 것을 불쌍히 여겨......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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