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진행되고 있는 역사는 많은 사람들을 해적으로 내몰았다. 해양 국가는 전쟁이 시작되면 대규모로 선원과 해군을 모집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마지막 20년은 잉글랜드와 스페인과의 전쟁이 지속되면서 많은해적들이 해전에 참가했다. 하지만 제임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고 평화의 시대가 열리자 5만 명의 선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거나 굶어죽어야 했다.
항구도시 플리머스는 일자리를 잃은 선원들로넘쳐났고, 그들은 항해하는 선박을 나포하여 노략과 강도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외에도 해적이 증가하게 된 이유로 18세기 초 스페인왕위계승을 둘러싼 전쟁이 끝난 사건을 들 수 있다. - P8

사실 당시 정부가 발급한 나포 허가증은 민간 선박들에게 합법적인 해적 행위를 해도 된다는 증서나 다름없었다. 이외에도 영국 정부는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의 해적 행위를 지원했다. 이들은 지중해를 무법천지로 만들었고 종교적인 이유로 국적을 가지지 않았으며 전쟁과 공동 조약을 무시했다. 북아프리카 해적은 조직 구조는 엄격했고 약탈한 재물을 공평하게 분배했다.  - P10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 해협(Hormuz Strait)은 최초의 해적 소굴이 되었다. 그들은 좁은 호르무즈 해협의 특징을 이용해 비단과 금은보석, 구리, 유자나무를 실은 인도와 아시아 상선을 주로 습격했다.
당시 호르무즈 해적은 그들의 악명을 듣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기원전 694년 아서왕도 호르무즈 해협에 원정대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중해 지역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해적이 존재했다. 그들은 주로 금은보화를 실은 페니키아 상선을 공격했으며, 지중해의 수많은 섬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다. 지중해 해적과 관련된 이야기는 많은 역사 기록에도 실려 있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은 해적을 소탕하고자 했지만 어떠한 정책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 200 년 후 로마제국 시기에도 해적들은 기승을 부렸다. 그중에서도 실레지아(Silesia) 해적은 악랄하기로 유명했는데, 그들은 터키 남쪽 부근을 근거지로 삼았다. 실레지아 해적은 수천 척의 선박을 보유했으며, 로마군을 무찌를 정도로 세력이강했다. 기원전 78년 시저(Julius Caesar)는 젊었을 때 해적에게 생포되어 6주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서야 풀려난 적이있다. 당시 해적 활동은 로마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로마는 해적을소탕하기 위해 폼페이우스(the Great pompey)를 파견했는데, 3개월 만에지중해의 해적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바다의 평화도 잠깐, 16세기 들어와서 해적은 다시 지중해를 장악하게 된다.
지금까지 해적은 세계의 안정을 위협하는 걸림돌이었다. 해적의 무기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함께 발전했지만,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기습을 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들의 전투전술은 고대의 수법 그대로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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