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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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민족들의 교차로 


"중세와 현대의 〈민족〉들은 보통 여러 종족과 언어 집단이 오랜 시간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특히 현대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민족〉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언어가 확산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정복, 대규모 이동, 이에 따른 전면적 민족 교체가 언어 확산의 한 가지 모델이다. 또 다른 모델은 점진적 침투, 상호 영향, 이에 따른 두 언어 상용bilingualism이다. 그런데 새 언어를 전파하는 이주민들 또한 많은 경우 여러 민족과 언어의 융합으로 형성된 집단이었다. 새로운 민족 이동과 함께, 이 집단에서 사용하는 이름과 언어가 릴레이 경주처럼 또 다른 집단에 이전되었다. 따라서 동일한 집단명과 공통 언어를 가진 민족들도 사실은 여러 다양한 민족의 혼합 집단일 수 있다. 민족들의 이동은 복잡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민족·언어 지도는 수천 년 넘게 이어져온 민족들의 혼합 과정을 한 특정 시점에 찍은 스냅 사진에 불과하다. 민족들의 형성 과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23-4)


1장 유목 생활과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출현 


"기원전 제2천년기 초(약 기원전 1700~기원전 1500년 사이)에 스텝 지역에 거주하던 목축인들 중 일부가 기마민족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이동에 더 잘 적응하는 말과 양이 선호되면서 목축하는 가축의 구성도 바뀌었다. 말이 전체 가축의 36퍼센트를 차지했다. 마력馬力의 활용은 불길한 군사적 결과를 불러왔다. 기마전투술을 발전시킨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은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바퀴 달린 수레에 이어 아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 전차가 등장했다. 기원전 약 2000년경 만들어진 초기 형태의 전차들이 요새화된 정착지였던 신타시타에서 발견되었다. 신타시타는 남부 우랄 스텝 지역에 위치한 신타시타-아르카임 페트로브카 고고유적군에 속해 있다. 잘 발전된 야금술(아마 무기 생산 및 군사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을 보유했던 신타시타는 이 스텝 지역에 존재했던 도시 정착지들의 일부였다. 기원전 제2천년기가 되어 전차는 중국과 중동에 전파되었다."(31-2)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의 민족 이동 두 번째 단계는 나무, 동물의 뿔과 힘줄로 만든 복합궁compound bow/composite bow의 발명과 연관이 있다. 복합궁은 강력하고, 상대적으로 작고, 가장 중요하게는, 말 위에서 쉽게 모든 방향으로 화살을 쏠 수 있어 스텝 지역에서 전쟁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복합궁은 기원전 제3천년기 초 이집트에서 처음 발명된 듯한데, 그 시점을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기마 전사들이 잘 훈련된 기병대로 발전했다. 이 기병대는 영광을 추구하는 개별 전투원이라기보다 전사란, 훈련된 집단의 일부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군대였다. 그 결과 전차는 과거의 기술이 되었다. 이에 수반된 철제 무기의 확산을 통해 기마병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스텝 지역의 이웃 유목민들을 약탈 공격 하고 정주 세계의 생산물들을 획득하려 하게 되면서 전쟁은 격화되었다. 이제 전쟁이 더 큰 규모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거대한 부족연합들이 출현했다."(32)


"유목민들이 정주 세계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유목민 집단(씨족, 부족, 혹은 민족)을 대변해줄 자가 필요했다. 이것은 곧 정치 조직을 의미했다. 영구적 국경이 없는 유목사회에서는 친족 관계가, 그것이 진정한 관계건 〈지어낸〉 관계건 간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속력을 제공했다." "유목 세계에서 국가의 존재는 예외적 현상이었다. 유목민들은 중국의 부를 탈취하기 위해 혹은 간혹 이루어진 중국의 무력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를 건설했다. 이러한 외적 자극들은 서부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의 유목국가들은 예외 없이 동부 유라시아 초원에서 이동해온 국가들이었다. 유목민들은 보통 정주사회들을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이슬람 이전 시기의 이란과 같은 이웃 정주제국들도 스텝 지역을 정복하려 들지 않았고 이따금 공격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군사 원정은 비용이 많이 들고 또 위험했다. 중국과 비잔티움은 매수, 외교,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선호했다."(38-9)


"초기의 유목민들은 필요한 물품의 교역 활동 외에는 중앙아시아 도시들과의 관계를 꺼렸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더 큰 정치 단위들의 일부로 만든 것은 유목민들이었다. 원래 지리적, 안보적 제약 때문에 유목민들의 가장 흔한 정치 조직은 느슨한 연합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의 정주 지역]의 오아시스들은 본래 이란어를 사용하고, 독립 성향이 강하고, 국제적이며, 귀족적이고, 상업 중심적인 도시국가들이었다. 각국은 〈동등한 사람들 중 우두머리first among equals〉에 불과했던 군주의 지배를 받았다. 상업 중심적이고 부유했던 도시국가들은 초대륙적 성격의 상업적, 지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활기찬 문화를 창출했다. 이 도시국가들은 정치적 지배가 아닌 상업적, 문화적 교환을 추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상인, 관료, 종교인들은 유목제국의 행정과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과 유목국가들의 이런 관계는 서로에게 이로웠다."(43)


2장 초기의 유목민들: “전쟁은 그들의 직업이다” 


"근동 지역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사상 최초의 대大육상제국을 세운 페르시아인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9~기원전 530)가 중앙아시아를 침공했다. 그는 박트리아, 소그디아, 화라즘을 복속시켰으나 기원전 530년 스키타이 원정 중 사망했다. 키루스 2세가 끔찍하게 사망한 후 8년 뒤에 권좌에 오른 다리우스 1세Darius Ⅰ(재위 기원전 522~기원전 486)는 그리스는 정복하지 못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일부 유목 민족들을 정복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기아나(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소그디아, 화라즘, 박트리아 등은 알렉산더 대왕(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이 기원전 330~기원전 329년에 중앙아시아를 정복할 때까지 협상을 통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사트라페이아satrapy' 즉 총독령(지방)이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 하에서 이란권 중앙아시아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장거리 교역 네트워크에 연결되었다. 교역은 도시 발전과 대규모 수로 시스템에 기반을 둔 농경의 확대를 촉진했다."(58-9)


"흉노는 〈국가〉 혹은 더 나아가 〈제국〉이라고 보통 불렸지만 사실은 부족연합에 가까웠다. 선우는 군사, 외교, 사법, 그리고 이에 더해 제사장 관련 직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최고 경영자였다. 선우 밑에는 좌익과 우익에 24명의 〈현왕賢王〉들이 있었고, 또 다른 24명의 수령들이 각각 1만 기의 병사를 거느렸다. 이 〈제국적 연합〉은 유연하고 협의를 통해 기능하는 정치 조직이었으며 부족과 씨족들에게 상당한 자치를 허용했다." "흉노는 자국 지배하의 정주 지역에서 공물을 징수하고 주민들을 노동에 동원했다. 유목민을 상대로 흉노는 매년 가을철에 호구戶口와 그 가축 수를 조사하는 것 말고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유목민 사회의 유연성은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빈번한 파벌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앙정부가 정주 세계의 물자를 효과적으로 착취해내는 군사적, 외교적 승리들을 거두어나가는 동안에는 잘 작동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부 혼란을 발생시켰다."(67-8)


"쿠샨 제국은 그 전성기에 박트리아, 동이란 일부, 동서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했던 쿠샨 제국은 여러 문화를 훌륭하게 융합했다. 초기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어가 공식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 문자로 적은 현지의 동이란계 언어였던 박트리아어가 사용되었다. 주로 금 또는 구리로 만든 쿠샨 제국의 주화들은 한 면에는 이란, 인도, 그리스의 신들의 모습이, 다른 한 면에는 통치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이 주화들과 다양한 신들의 작은 조각상들은 쿠샨 제국 내에서 조로아스터교, 토착 종교,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가 공존했음을 알려 준다. 일부 쿠샨 지배자들은 남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확산된 불교를 후원·장려했다. 불교 사원과 수도원은 이슬람 이전 시기 아프가니스탄의 흔한 풍경이었다. 쿠샨의 간다라 양식은 훗날 동서 투르키스탄으로 전파되었다."(69-71)


3장 하늘의 카간들: 돌궐 제국과 그 계승 국가들 


"흉노와 한의 멸망이 불러온 정치적 혼란기 이후 중앙아시아에 세 강국이 출현했다. 곧 북중국의 타브가츠Tabghach(중국어 명칭, 탁발Tuoba, 拓跋), 몽골 초원의 아바르Avar(중국어 명칭, 유연Rouran, 柔然), 쿠샨 땅의 헤프탈Hephthalites(중국어 명칭, 활Hua, 滑)이다." "이 북위, 유연, 헤프탈은 당시 유라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연과 북위 사이의 전쟁은 유목민들의 서진을 불러왔는데, 이러한 민족 이동은 원래 이란어 사용 지역이었던 내륙아시아 초원을 점차 투르크화시켰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에는 중국어로 철륵Tiělè, 鐵勒이라는 투르크계 유목민족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철륵의 한 갈래인 오구르 투르크족은 460년경 흑해 초원에 도달했다. 유연의 아나괴Anagui, 阿那瓌(520~552)는 철륵의 반란과 내분으로 북위에 원조를 청했으나 북위 또한 534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정치적 혼란 상황은 돌궐 제국Türk Empire, 突厥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79, 83)


# 이 책에서 Türk로 표기된 투르크인은 이 집단명을 사용했던 특정 민족 곧 돌궐인을 지칭한다. Turk와 Turkic은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을 통칭하는 용어들이다.


"돌궐 제국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최초의 유라시아 횡단 국가였다. 돌궐 제국은 행정적으로는 동부[동돌궐]과 서부[서돌궐] 두 개의 카간국으로 나뉘었다. 아시나 가문의 카간들이 두 카간국을 통치했는데 동부의 카간이 서부의 카간보다 정치적으로 더 지위가 높았다. 서돌궐의 군주 이슈테미의 후계자들은 때때로 동돌궐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이는 〈적법한〉 행위였던 것이,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유목국가들에선 왕족 구성원 모두에게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수隋가 581년 패권을 잡으며 중국을 재통일했다. 수나라는 즉시 북방 방어를 강화했으며, 장손성長孫晟과 같은 첩자를 통해 돌궐 궁정 내에 첩자들을 양성하며 아시나 씨족의 내분을 부추겼다. 동돌궐 내부의 분열이 심해지자 서돌궐의 타르두 카간은 동돌궐의 정권마저 장악하고 수년 동안 돌궐 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제국 통치는 아마 수의 사주를 받은 철륵의 반란으로 603년 막을 내리게 되었다."(88-9)


# 동돌궐 : 552~630, 682~742, 서돌궐 : 552~659, 699~766경


"돌궐 제국은 742년 (아시나 왕족이 이끈) 바스밀Basmil 등이 일으킨 피지배 부족들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이어서 위구르인들이 744년 바스밀을 축출하고 몽골 초원과 신장, 인근 시베리아 지역을 아우르는 위구르 카간국Uighur qaghanate(744~840)을 수립했고, 이후 당나라를 괴롭혔다. 약 80만에 달했던 위구르인들은 토쿠즈 오구즈Toquz Oghuz(〈9개의 친족 집단〉[혹은 〈구성九姓〉])라 불린 동철륵계 부족연합의 맹주였다." "위구르 카간은 [카간의 궁정인] 쾨크 오르둥Khökh Ordung에서 (제국적 야망을 보여주는) 일종의 태양 숭배 의식을 매일 행했다. 위구르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베제클릭Bezeklik(〈그림들이 있는 장소〉)이다. 베제클릭은 77개의 인공 석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5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곳에 있는 불교적, 마니교적 테마의 그림들에는 소그디아, 중국, 인도의 미술 양식이 섞여 있다. 발굴의 규모 면에서 학자들은 베제클릭을 〈사막의 폼페이〉라고 불러왔다."(98, 101)


"키르기즈는 [남시베리아 지방인] 투바의 예니세이강 유역에 위치한 강력한 투르크계 혹은 투르크화된 부족연합이었다.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키르기즈인들은 유목-농경 복합사회에서 기원했다. 그러나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들만큼 문화적으로 발전된 집단은 아니었다. 키르기즈인들에 대해선 그 초기 역사뿐 아니라 840년과 10세기 초 사이 〈제국 시기〉의 역사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키르기즈인들은 오르콘강과 셀렝게강 유역을 국가의 중심부로 삼는 흉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목제국의 전통을 따르지도 않았고 추가적 정복 활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본거지인 예니세이강 지역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중국과 중동과의 교역 관계를 이어나갔다. 당대의 이슬람 지리학자들은 키르기즈인들이 목축에 종사하며 시베리아 삼림 지대의 물품들인 사향, 모피, 특수 목재, 상아로 쓰인 후투Khutu 뿔(땅에서 파낸 매머드의 엄니) 등을 수출했다고 기록했다."(103-5)


"이처럼 권력 공백 상태였던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것은 몽골어족에 속했던 거란Qitan, 契丹이었다. 거란은 남만주 지역 출신의 수렵민, 덫사냥꾼, 돼지 사육 농경민, 양-말 사육민들로 구성된 강력한 부족민 집단이었다. 한때 돌궐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거란은 북중국과 만주 지역에 제국(916~1125)을 세우고 중국식 왕조명인 요遼를 국가명으로 채택했다. 거란인들은 몽골 초원을 차지한 후 과거 이 지역을 지배했던 위구르인들에게 재이주를 권하기도 했는데 위구르인들은 정중히 사양했다. 거란은 몽골 초원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중국의 통치에 보다 집중했다. 거란의 통치기에 많은 투르크계 집단이 가혹한 통치와 무거운 세금을 피해 서쪽으로 이주했다. 그 결과 10~11세기 동안 몽골 초원에서는 몽골어 사용 유목민들이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수적으로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몽골 초원은 몽골어 사용권이 되었지만, 거란 통치자들은 몽골보다는 중국의 황제가 되는 것을 선호했다."(107)


4장 실크로드의 도시들과 이슬람의 도래 


"7~8세기 아랍의 침공 직전에 트란스옥시아나에는 북부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 소그디아 도시들인 차즈(타슈켄트), 부하라, 사마르칸드의 서쪽에는 화라즘Khwârazm이 위치했다. 농업, 제조업, 교역의 중심지였던 화라즘은 북부 삼림 지대의 핀-우그리아계와 슬라브계 민족들의 물품들을 중동 지역으로 보내는 전달자 역할을 했다." "당시 소그드인들은 중국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유라시아 일대 교역 거점들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의 상업 세계를 지배했다. 소그드인들은 농민, 수공예인, 상인으로서 기술적, 재정적 전문 지식을 발휘했다. 그 활동 흔적을 일본과 벨기에에서까지 찾아볼 수 있다. 소그드인 공동체의 리더는 '사르타파오sartapao'(중국어 살보sabao, 薩寶)라 불렸다. 사르타파오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사르타바하sârthavâha'(대상의 리더)의 차용어다. 이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소그드인들이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국제화된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11-2)


"신장에는 북부의 타림분지와 투르판 지역 그리고 남부의 호탄 지역에 또 다른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 혹은 왕국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초원의 유목 세력과 중국 사이에 끼어 한나라 시기 이후로 불안한 독립 상태 혹은 자치 상태를 누려왔다. 7세기에 중국과 티베트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중국은 카슈가르, 아그니, 쿠차, 호탄을 안서사진安西四鎭으로 삼았다(안서는 〈서역을 안정시킨다〉를 의미한다). 중국은 751년까지 안서사진을 지배했다." "쿠차, 아그니, 코초는 적어도 8세기까지 토하라어를 사용한 주민들이 거주했던 중요한 도시국가들이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농업, 목축업, 수공예품 생산에 경제의 기반을 두었고, 식료품, 술, 비단, 직물, 펠트, 옥, 화장품 등을 수출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는 자묵Jamûg 왕실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부하라 군주〉는 낙타 모양의 왕좌를 사용했는데, 이는 분명 대상 무역이 부하라의 경제에서 차지하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15-7)


"소그디아는 광범위한 대외 교류를 통해 국제화되고 아주 세련된 공동체가 되었다. 동시에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세계관을 그 특징으로 했다. 여러 다른 문화의 융합은 소그디아의 종교에서 가장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소그디아는, 중세의 근동 지역 및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국교가 없었고 여러 다른 종교를 관용했다. 소그드어로 쓰인 마니교, 그리스도교, 불교 서적들은 소그드인들의 종교적 관심의 폭이 넓었음을 보여준다. 불교는 여전히 옛 쿠샨과 헤프탈 땅에 널리 퍼져 있는 종교였으며, 아무다리야강(옥수스강) 숭배 신앙 등 여러 토착 신과 여신을 숭배하는 종교들과 공생하고 있었다." "소그디아에는 불교와 토착 종교들 외에도 예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네스토리우스파[경교景敎]가 전파되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소그디아 지방에서 이슬람교도들 다음으로 가장 성공적인 종교 공동체가 되었다. 소그드인 상인들은 다른 종교의 경우에도 그랬듯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 역할도 수행했다."(118, 121, 125-6)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이루어진 아랍-이슬람 제국의 정복 활동은 종교적 열정, 영토 욕심, 전리품, 제국의 심장부에서 심화되던 내부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등 다양한 동기에서 비롯했다. 〈(옥수스) 강의 건너편〉을 의미하는 마와라안나흐르Mâ warâ'an-nahr는 [그리스어 지명] 트란스옥시아나를 아랍어로 번역한 명칭이다. 아랍인들의 마와라안나흐르 침공은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632년 사망)의 계승자들이자 팽창 중이던 이슬람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이었던 우마이야조Umayyad 칼리프들(재위 661~750)이 전개한 아랍 정복 활동의 일환이었다." "중앙아시아에 여전히 눈독을 들이던 두 제국인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소그드인 도시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권력 투쟁이 계기가 되어 751년에 당과 카를룩 동맹군은 카자흐스탄의 탈라스강 근처에서 이슬람 군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서돌궐-투르게슈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카를룩이 이슬람 제국 편으로 돌아서면서 이슬람 군대가 승리했다. "(26, 130)


"아랍 군대의 승리에 이어 755~763년의 내란[안사安史의 난]으로 중국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철수하자 이슬람교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적 종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음 몇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교가 옛 종교들과 혼합되기도 했다. 이슬람교 개종자들은 옛 관습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정복이 개종의 토양을 마련해주었지만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보통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동기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상업 마인드를 가졌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 상인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 수립된 압바스 칼리프국Abbâsid Caliphate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주민들이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됨에 따라 그리고 9세기에 비非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늘어났다."(130-2)


5장 초원 위에 뜬 초승달: 이슬람과 투르크계 민족들 


"하자르 카간국의 왕가는 서돌궐의 아시나 혈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자르 카간국과 아랍 칼리프국은 코카서스의 지배권을 놓고 (640년대와 737년 사이에) 장기전을 치렀고 그 결과 북코카서스에 양측의 국경이 형성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은 중세 세계의 최대 상업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발트해와 북유럽 삼림 지대에서 카스피해를 거쳐 이슬람 세계로 들어오는 물품들의 주요 통로인 볼가강 루트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자르 카간국은 비잔티움 제국과 자주 동맹 관계에 있었고, 복잡한 삼각관계 속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와 정치적·경제적으로 교류했다. 하자르 카간은 8세기 말과 9세기 초 사이에 유대교로 개종했다. 많은 수의 하자르 지배 가문 인사도 카간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 "하자르 카간국에는 일상적 통치 활동을 위임받은 부副카간이 있었다. 현지의 이슬람교도 중에서는 국가의 재상도 배출되었다. 이 재상과 신성한 카간들의 호위병들은 화라즘 출신의 거주민들이었다."(141-2)


"십중팔구 (아프가니스탄) 토하리스탄 출신의 이란인들이었을 사만 일족은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지방 영주들의 후예들로, 9세기 초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다." "사만 왕조는 이슬람의 확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중앙아시아 도시들의 지배적인 종교였던 이슬람교는 초원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사만 왕조 출신의 중앙아시아 학자들은 이슬람 문화와 세계 문화 발전의 주요 공헌자였다. 사만 왕조는 아마 옛 불교 교육 기관을 모델로 삼은 이슬람교 대학인 마드라사madrasa들을 세웠으며, 근동 지역으로 보내질 투르크인들을 이슬람교도로 양성하는 관료 기구들과 관리 전통들을 확립했다. 사만 왕조는 소그드인 무역 도시들의 상업 전통을 계승하고, 대륙 횡단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동이슬람 세계의 리더였다. 사만 왕조의 주화들은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에서도 상당량이 발견되었는데, 국제무역에서 사만 왕조가 지녔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143, 147-8)


"카라한 왕조는 여러 투르크계 부족을 지배하며 1005년에 사만 왕조를 멸망시켰다.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이었던 까닭에 카라한인들은 사만 왕조의 도시들을 점령했을 때 대중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카라한 왕조의 귀족들은 유목 생활 혹은 반半유목 생활을 영위했다. 그 다수는 봉직의 대가로 토지 기반 조세 수입인 이크타iqta'를 지급받았는데, 유럽의 봉지fief, 封地와 어느 정도 유사했다." "10세기 후반기에 또 다른 투르크-이슬람계 국가가 출현했다. 세뷱 티긴Sebük Tigin은 사만 왕조로부터 독립해 가즈나 왕조(977~1186)를 수립했다. 가즈나 왕조는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를 필수 자원으로 활용한 최초의 이슬람 세력이었다. 코끼리 부대는 이란계 관료들과 투르크계 군사 엘리트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이란계와 인도계 주민들이 피지배층을 이루는 복합적 국가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전쟁 무기였다. 가즈나 왕조의 이와 같은 복합적 국가 형태는 훗날 등장할 여러 국가의 원형을 이루었다."(151-4)


"11세기에 중동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셀주크 제국의 시조는 오구즈 부족연합에 속한 키닉 부部의 수령 셀주크Seljük였다. 985년경에 그는 시르다리야강 연안의 잔드에 자리 잡고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시아파 부야Buyid[부와이흐Buwayh] 왕조의 통제를 받고 있던 압바스 왕조는 1055년에 셀주크인들에게 바그다드로 와서 자신들을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셀주크인들은 압바스 왕조의 요청에 응했고 그 결과 수니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부상했다. 1071년에 차그리의 아들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재위 1063~1072)은 아나톨리아 동부의 만지케르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투르크계 부족민들이 비잔티움령 아나톨리아로 몰려들었다. 이는 룸Rûm[로마] 셀주크 술탄국과 뒤이어 오스만 제국이 세워지는 토대가 되었다. 오구즈인들이 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투르크화된 형태의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 지역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으로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다."(158-61)


6장 몽골 회오리바람 


"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성은 때로는 과장되었지만, 각 종교 성직자들의 주된 의무는 몽골 칸들의 건강과 행운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다. 종교적 관용은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제국을 통치하는 데서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기도 했다. 칭기스 일족은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 모든 정복지에서 몽골 제국 관리들은 제국의 경영에 도움이 될 기술을 보유한 인력을 식별해냈다. 이러한 인력들도 전리품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언어가 사용된 몽골 제국에서 언어적 재능을 보유한 사람들은 특히 우대되었다.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재능이 있으면 확실히 등용될 수 있었다. 중국어 구어口語를 할 줄 알았던 쿠빌라이는 언어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해 1269년에 티베트 승려인 파스파'Phags-pa에게 몽골어, 중국어, 그 외 몽골 제국의 다른 언어들을 다 적을 수 있는 알파벳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쿠빌라이의 노력에도, 이 파스파 문자는 몽골 제국 내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187)


"몽골인들은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내려 했다.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은 천체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그리고 아마 통제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열심히 찾았다. 한화된 거란인이었던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칭기스 칸과 우구데이를 섬겼는데 처음에는 천문학자와 기상학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해 대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대역사가 라시드 앗딘Rashid ad-Din(1247~1318)은 '야다타슈yadatash'를 능히 다루었던 한 캉글리-킵착 부족민에 대해 기록했다. 야다타슈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에게 비를 내리게 하는 마법의 돌이었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이 우석雨石은 여름에도 눈보라를 일으킬 수 있었다. 외국인 전문 인력들은 초기 칭기스 일족이 가졌던 조금 더 파괴적인 성향을 일부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야율초재는 우구데이 칸이 북중국의 농경지를 유목민을 위한 목초지로 바꾸려 하자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더 이득이 된다고 설명하며 이를 만류했다."(187-8)


"몽골 제국의 팽창 정책은 동남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몽골 제국의 남중국 정복은 타이Tai계 주민들을 파간의 버마 왕국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여기서 〈버마 왕국〉은 당시의 파간 왕국Pagan Kingdom으로, 오늘날의 미얀마를 말한다], 1283년부터 1301년까지 몽골군은 정기적으로 파간을 공격했고 1287년에는 일시적으로 파간을 점령했는데, 이는 추가적 인구 이동을 불러왔다. 몽골군은 오늘날의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지역도 침공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자바의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은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1293년에 수립되었는데 곧바로 몽골군을 몰아냈다. 이후 마자파히트 왕국은 서유럽에서 수요가 컸던 향신료의 주요 공급자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그리고 지리적으로 연결된 육상제국이었다. 몽골 제국은 1250~1350년 사이에 국제 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초기의 〈세계체제world system〉를 태동시켰다. 몽골 제국은 근대 세계의 선구자였다."(192-3)


7장 후기 칭기스 왕조들, 정복자 티무르, 그리고 티무르 왕조의 르네상스


"몽골 제국의 지배를 거치며 그때까지 이란어를 사용해오던 많은 주민은 투르크어를 채택했다. 이러한 언어의 투르크화 현상은 6세기부터 진행된 과정이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 같은 도시들에서는 계속해서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두 언어가 상용되었다. 페르시아어(타직어)는 상류층 문화와 정부의 언어로서 지위를 계속 유지했지만, 문학의 영역에서까지 갈수록 더 투르크어와 공존해야 했다. 결국 투르크어는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에서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의도적으로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재편해 그 소속 부족들을 해체하고 이들을 칭기스 일족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몽골 제국이 쇠퇴하자 부족 혹은 부족 형태의 집단들이 재등장했는데, 그 중 일부는 칭기스 혈통의 리더나 다른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집단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새롭게 등장한 집단들이 전통적 친족 관계보다는 '알탄 우룩'(황금 씨족) 즉 칭기스 일족에 대한 충성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197-8)


"차가다이 올루스는 여러 부족과 칭기스 일족이 이끄는 군사 집단들로 구성되어 서로 동맹을 맺거나 싸우면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 바로 여기서 유럽에서는 타메를란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티무르가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칭기스 일족만이 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칸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티무르는 칭기스 일족을 꼭두각시 군주로 추대하고 자신이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칭기스 가문 출신 여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그는 '쿠레겐Küregen'(몽골어 '쿠르겐kürgen', 〈사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데 만족했다." "티무르의 일차적 목표는 차가다이 울루스 내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만큼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활동 기회를 줌으로써 병사들의 충성을 유지했다. 이것은 티무르가 끊임없이 병사들을 전쟁과 약탈전에 동원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이유에서 티무르는 군사 원정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다."(203-5)


"화약의 시대가 중앙아시아에 도래했고 티무르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 도구들의 추가적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대체로 새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데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화약 무기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화기의 신뢰성과 정확성이 훈련받은 궁수의 그것들을 따라가지 못했던 까닭이다. 처음에 대포는 빠르게 움직이는 기병을 상대로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총포는 에센 칸이 이끄는 오이라트 군대를 상대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화약 무기들은 몽골군의 위협을 막아내는 데서 무력했고 그 결과 명이 화약 무기의 효능을 믿지 않았던 터라 중국의 무기 개발이 지연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더 명중률이 높아진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보병은 궁기병弓騎兵보다 더 우수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유목민들은 더는 화약 무기로 방어되는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225)


8장 화약의 시대와 제국들의 출현 


"카자흐인들의 아불 하이르 칸으로부터의 독립은 투르크권 칭기스 세계가 재편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1470년경, 자니벡과 기레이가 이끄는 카자흐 부족들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자리 잡으면서 강력한 부족연합으로 통합되었다. '카작Qazaq'이라는 이름은 원래는 [〈자유인〉 〈방랑자〉 〈약탈자〉 등을 지칭하는] 사회정치적 용어였으나 이제는 민족 명칭이 되었다[카작을 러시아어로 발음한 것이 카자흐다]." "카자흐인들의 압박을 받은 아불 하이르 칸의 손자 무함마드 시바니Muhammad Shîbânî와 그를 따르는 우즈벡인들은 1500년에 트란스옥시아나로 진입해 티무르조 정권들을 몰아냈다. 시바니 칸의 주적 중 한 명인 바부르Babur는 그를 피해 인도에 새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우즈벡인들은 트란스옥시아나를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으로 변모시켰다. 그들은 이전부터 트란스옥시아나에 거주해온 투르크인과 이란인 집단 사이에 정착해 이들과 함게 복잡한 언어와 문화 계층을 이루었다."(230-2)


"바부르는 1512년에 [우즈벡인들로부터] 도주해,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그다음에는 인도로 간 티무르 일족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Lodi dynasty를 멸망시키고 인도에 무굴 왕조Mughal dynasty(1526~1858)를 세웠다. 바부르(재위 1526~1530)와 초기의 무굴 황제들은 인도를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이전에 머물 임시 피난처로 생각했으나, 그들의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시도들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무굴인들은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본향을 지향했다. 무굴 통치자들은 18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차가타이 투르크어로 교육받았다. 페르시아어는 중앙아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상류층 문화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무굴인들은 우즈벡인들과 경쟁 관계를 이어갔으나 인도의 무굴 제국은 계속해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군인, 관료, 지식인들을 받아들였다.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인도에 남은 반면,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잠시 머물며 기후와 음식에 대해 불평하고, 부를 쌓은 뒤 인도를 떠났다."(233)


"1552년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4세Ivan Ⅳ〈뇌제the Terrible, 雷帝[그로즈니]〉(재위 1533~1547, 러시아의 차르 1547~1584)는 카잔 칸국을 정복했다. 카잔 칸국의 주민들인 무슬림 불가르-타타르인, 우랄 지방의 바시키르 부족민, 볼가 지방의 관계 민족들 모두 러시아의 속민이 되었다. 이반 4세는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Astrakhan Khanate을 손에 넣었다. 수 세기 동안 투르크계 민족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볼가-우랄 지대가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이다. 1547년부터 '차르tsar'(황제) 칭호를 스스로 사용해온 이반 4세는 볼가강 유역의 칸국들을 정복한 후에는 비잔티움 황제들과 몽골 칸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는데, 이것은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선언이었다. 러시아는 이반 4세의 정복 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묘사하는 한편 무슬림 타타르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집단 개종시키려 했다. 17세기가 되면 러시아인들은 이들 지역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234-5)


"만주인들은 1644년에 명을 패퇴시키고 중국 지배를 확고히 한 후 몽골, 시베리아,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의 변방 지역으로 진출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서부 초원 지대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두 제국은 시베리아에서 맞닥뜨렸다. 러시아는 교역을 원했고, 청은 북방 변경 지대의 정치적 안정을 원했다. 청과 러시아 양국은 네르친스크조약Treaty of Nerchinsk(1689)을 통해 국경 문제를 다루었다. 1727년 체결된 캬흐타조약Treaty of Kiakhta으로 러시아와 청의 국경이 확정되었고, 셀렝게강 연안의 캬흐타가 두 제국 간 국경 무역 도시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이슬람권 중앙아시아를 북쪽과 서쪽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은 장애물인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서로 대립하던 몽골 집단들은 국내의 경쟁자와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갈수록 더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해졌고, 이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238-9)


"러시아는 변경 지역을 위협하는 무슬림 크림 타타르인들과 노가인들을 상대하는 데 불교도 칼믹인Kalmyks들[서西오이라트인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1655년에 칼믹인들은 러시아의 차르에 충성을 서약했지만, 양측은 이들 사이의 협약을 다르게 해석했다. 러시아인들은 칼믹인들을 속민으로 간주하며 차르가 소환할 경우 칼믹인들이 자신들과 같이 싸워줄 것이라 기대했고, 칼믹인들은 스스로를 러시아의 〈동맹자〉라 여겼다. 러시아는 1660년대 들어 더 지배적인 파트너가 되었다. 동방으로부터 더 많은 오이라트 집단이 러시아의 지원하에 칼믹인들의 최고 통치자가 된 아유키 칸Ayuki Khan(1669~1724)의 휘하에 합류했다. 러시아는 아유키 칸에게 화약 무기들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칼믹 군대는 크림 타타르인들과 (간접적으로는 크림 칸국의 상전국 격인 오스만 제국과] 여타 유목민 적들을 상대로 아주 중요한 친러시아 동맹군이 될 수 있었다. 동쪽에서는 오이라트계 준가르인들이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253-4)


9장 근대 중앙아시아의 문제들


"비록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재정러시아 황제, 재위 1582~1725]의 트란스옥시아나 정복 시도는 재앙으로 끝났지만, 러시아는 1740년 우랄 지방의 바시키리아를 정복한 후 초원 지역 안으로 요새들을 건설해나갔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던 노예 포획을 노린 유목민들의 약탈 공격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육상 무역에서 중간 상인이 되는 것 또한 러시아의 목표였다. 당시 투르키스탄에서 발견된 풍부한 금광에 대한 소식도 러시아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예카테리나 대제[예카테리나 2세, 재위 1762~1796]는 기존의 반反이슬람 노선을 수정했다. 그녀의 전임자인 옐리자베타[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카잔 지역에 있는 모스크 536개 중 418개를 파괴하고 이슬람의 선교 활동을 금지했었다. 예카테리나는 이슬람교를, 카자흐인들을 처음에는 선량한 이슬람교도로, 다음에는 선량한 시민으로, 궁극적으로는 선량한 그리스도교로 만들어줄 〈문명화civilizing〉 도구로 보았다."(270-1)


"1822년에서 1848년 사이에 러시아는 카자흐 주즈들을 합병하고, 칸들을 폐위시키고, 카자흐 부족들을 여러 다른 지방 행정 구역에 두었다." "부하라는 1868년 6월에 러시아 보호국이 되었고, 러시아가 종교전쟁의 발생을 염려한 까닭에 전면적 병합은 면했다." "히바 칸국은 1873년에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코칸드 칸국은 1876년 러시아에 간단히 병합되었다." "러시아가 서유럽과 거의 같은 크기의 이 [중앙아시아] 영토를 획득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마 [러시아 쪽에서는] 1000명 정도가 실제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약하고 분열된 적들을 상대로 러시아 장군들은 기술적, 수적 우위를 누렸다. 19세기 말이 되면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인구보다 많은 약 2000만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속민으로 두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새로 편입된 무슬림 주민들의 충성심뿐 아니라 다른 비非정교회 그리스도교도들과 유대교도 신민들의 충성심 또한 확보하지 못했다."(271-3)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인들을 분열된 상태로 남겨두고 민주주의와 같은 〈유해한〉 근대화 사상으로부터 차단시키려 했다. 다른 비非러시아인 신민들과는 달리 중앙아시아인들은 징집하지도 않았는데, 중앙아시아인들이 군대에서 근대 전쟁과 무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의 변화를 막기 위해 전제주의 차르 정부는 종종 더 보수적인 지배층 인사들 및 울라마와 손을 잡았다. 울라마는 비이슬람적이라는 이유에서 심지어는 공중위생의 개선 시도들도 반대했다. 이런 정책들은 중앙아시아의 후진성을 더 영속시켰다. 새로 정복되고 합병된 민족들은 〈이노로드치inorodtsy, (외래인aliens)〉로 지칭되었다. 이노로드치는 속민이되 국민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러시아는 천연자원을 수탈하고 〈현지인들의〉 저항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유럽 지역 출신의 러시아인과 비러시아 주민들은 종종 옛 〈토착〉 소도시들을 기반으로 발전한 도시들에 정착했다."(276-7)


"1923년경에 이르러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굳혔다. 이전에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민족nationality〉이 아닌 왕조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이제 소련USSR은 자신의 통치 목적에 부합하게 국경선을 긋고 민족국가들을 창조해냈다." "그 후 소비에트 정부는 각 공화국에 맞추어 민족들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근대화 추진자들을 제외하고는 〈민족〉 개념을 가진 중앙아시아인은 거의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복잡한 민족 구성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모든 소비에트 민족은 자의적인 정치적 결정에 따라 규정되었으며 이는 민족지학과 언어학 연구들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소련의 민족 정책은 거대한─그리고 대체적으로 성공한─사회공학 및 민족공학 프로젝트였다고 보아야 한다. 소비에트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지표는 언어였다. 결과적으로 근대 중앙아시아 언어들의 기원, 형성, 계통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논쟁거리가 되었다."(2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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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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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인간에게 남겨진 ‘골든 아워’


현재 인공지능, 특히 AGI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특히 실리콘밸리 빅테크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바로 인공지능이 AGI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 인간이 멍청해서 풀지 못했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의 생산성이 무한히 늘어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두바이 왕자 만수르처럼 살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AGI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고, AGI를 향하는 길에 걸림돌, 특히 국가 규제 같은 것들을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지입니다. 예를 들어 일론 머스크Elon Musk, 피터 틸Peter Thiel, 마크 앤드리슨Marc Andreessen같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내놓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AGI가 인간에게 가져다줄 장기적 혜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단기적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에 너무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이런 주장을 보통 효과적 가속주의Effective Accelerationism(e/acc)라고도 부릅니다. 8)


기술을 무한히 발전시키면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e/acc 지지자들과는 달리, 장기적 인공지능의 혜택은 동의하지만 동시에 인공지능 안전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을 효과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E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EA와 e/acc 지지자들 모두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믿는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공지능 시대에는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동시에 사회와 정치도 지배해야 한다는 기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입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시점은, AGI가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짧은 ‘골든 아워’일지도 모릅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논의는 이미 실존적 위기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답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습니다. 이 골든 아워가 지나고 나면, 생각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우리는 미래와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9-10)


1장. 모자이크 모멘트


최근 인공지능에 대해 쏟아지고 있는 폭발적인 관심은 2022년 11월, 챗GPT가 등장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인공지능의 역사는 정말 오래됐습니다. 1956년에 처음 제안됐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인공지능은 그저 SF적인 공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챗GPT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인간은 기계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챗GPT를 ‘모자이크 모멘트Mosaic Moment’라고도 평가합니다. 1990년대 초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p(WWW)을 제안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아는 웹 페이지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1993년에 처음으로 인터넷 브라우저가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 최초의 브라우저를 모자이크Mosiac라고 불렀습니다. 모자이크는 지금 우리가 아는 모든 인터넷 브라우저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따와서 모자이크 모멘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인공지능의 역사에서는 챗GPT가 바로 거기에 해당합니다. 12-3)


인공지능은 〈터미네이터〉 같은 SF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했지만, 60년 동안 오로지 실패만을 반복해 온 분야입니다. 덕분에 2000년대 초에는 인공지능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는 게 일종의 금기taboo처럼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다 2010년대에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교수가 이미 실패한 기계 학습 방법을 다시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나 기계 학습이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에 이름을 바꿨습니다. 심층 학습Deep Learning(딥러닝)이라고 리브랜딩한 겁니다. 사용한 방법 자체는 과거와 똑같은 방법이었는데 어떻게 성공했을까요? 세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알고리즘이 개선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컴퓨터가 더 빨라졌지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세 번째, 1990년대에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데이터가 많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지금은 이걸 스케일링scaling의 문제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16)


우리가 보통 구글과 페이스북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단순한 데이터는 우리도 얼마든지 수집할 수 있습니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건 바로 정답이 포함된 데이터입니다. 그럼 그 데이터는 어디서 얻었을까요? 다 우리가 준 겁니다. 지난 20년 동안 열심히 고양이 사진 찍고 ‘고양이’라고 라벨링해 줬지요. 라지 스케일이 중요한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정답과 오답의 차이, 예를 들어 ‘고양이 빼기 강아지’ 같은 값을 계산한 다음, 이 값을 거꾸로 보냅니다. 이 방법을 역전파backpropagation라고 부릅니다. 미적분인 체인 룰chain rule을 사용해서 한 층씩 뒤로 가면서 저 가중치들을 계속 바꿔주는 겁니다. 어떻게 바꾸냐면, 정답과 오답의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요.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연결고리 값들이 정답과 오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최적화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학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2-3)


학습이 완성되면 가중치를 확정합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메타가 라마LLaMA3이나 라마4의 웨이팅 매트릭스weighting matrix를 공유한다는 건, 연결고리 값들의 가중치를 공유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정답이고, 이것만 있으면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는 테스팅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테스팅을 추론infer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계에서 처음 보는 고양이나 강아지 사진을 넣으면, 이미 이 인공신경망의 가중치들이 최적화됐기 때문에 고양이와 강아지를 대부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데이터만 넣어주고, 기계가 학습을 통해서 사실상 스스로 규칙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렇게 규칙과 데이터의 관계를 뒤집었더니 50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계가 찾아낸 규칙을 우리 인간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23)


2장. 생성형 AI의 출현


처음에 인공지능을 통해 풀고자 했던 두 가지 문제가 세상을 알아보는 기술과 언어를 이해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세상을 알아보는 기술은 학습 기반 인공지능을 통해 드디어 해결됐지만, 이 기계는 여전히 인간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언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생성형 AI’라는 두 번째 혁신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언어 문제가 해결되니까 나머지 문제들도 덩달아 해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적인 우연이 발생합니다. 바로 엔비디아NVIDIA입니다. 엔비디아는 병렬 처리를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 구조, GPU를 제안했습니다. 예전에는 모델을 키우고 싶어도 계산이 몇 달 걸리니까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이제 몇 시간 만에 계산이 끝나니까 욕심이 나게 됩니다. 인공지능에서는 스케일을 키우면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GPU가 등장했기 때문에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킬 수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결정적인 해답이었던 겁니다. 28)


그런데 동일한 방식을 언어에는 쓸 수 없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유명한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림에서는 픽셀 간에 인과관계가 없어서 독립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문장은 다릅니다. 문장을 구성하는 각 단어는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단어와 단어 간에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장을 이해할 때는 그 문장의 첫 번째 단어를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맨 마지막 단어까지 들은 다음에야 순서대로 처리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라는 것은 병렬 처리가 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병렬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인즉 GPU를 못 쓴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GPU를 못 쓴다는 건 모델을 키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이란 시간 축 데이터입니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찾아야 했던 건, 긴 시간 축 데이터에서 뒤죽박죽으로 얽힌 인과관계를 확률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알고리즘이었습니다. 29-31)


모든 단어는 숫자로 표현할 수 있고, 그러면 계산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한 언어에 단어가 5만 개 있다고 치면, ‘교수’ 근처에 그 5만 개 단어가 등장할 확률을 다 계산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수’는 5만 차원 벡터로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단어가 5만 개면 차원이 5만 개가 되는 겁니다. 이 방식을 우리는 임베딩embedding이라고 합니다. 챗GPT 같은 경우, 모든 정보가 임베딩됩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단어를 임베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뒤죽박죽 얽힌 단어들의 의미, 관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특정 단어가 등장할 때 가장 자주 동시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단어의 순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어가 등장하는 주변 단어들, 그러니까 ‘문맥’이라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이 방법을 집중 스코어attention score라고 부릅니다. 문장이 있으면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그걸 계산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게 트랜스포머 알고리즘Transformer Algorithm입니다. 32-3)


챗GPT의 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약자입니다. G는 생성형Generative, P는 사전 학습Pre-trained, T는 트랜스포머Transformer입니다. 이 기계는 인간이 쓴 모든 문장을 기반으로 트랜스포머를 사용해서 뒤죽박죽 얽힌 인과관계를 집중 스코어를 통해 다 계산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단어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와야 할지 예측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집중 스코어 관계를 학습한 걸 우리는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LLM)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LLM은 계산량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챗GPT가 중요한 역할을 한 이유 중 하나는 약간의 트릭을 써서 GPU로 이 계산을 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개선했기 때문입니다. 병렬 처리가 가능해진 것이지요. GPU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바로 모델을 계속 키울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전에는 CPU로 계산해야 해서 모델을 키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GPU를 사용해 드디어 모델을 키울 수 있게 되면서, 온갖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33-4)


GPT에게는 문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엄청나게 많은 문장을 입력하고 트랜스포머로 규칙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우리도 찾지 못한 규칙을 찾아버렸습니다. 그 규칙이 인공 신경세포 1,350억 개 사이의 연결고리로 표현되다 보니, 우리 인간은 어떻게 이 규칙이 이루어져 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GPT가 찾아낸 이 연결고리들이 언어의 규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도 이해하지 못한 세상의 규칙을 이 기계가 스스로 찾아버린 것입니다. 트랜스포머는 우리도 몰랐던 규칙, 모든 조합의 규칙을 찾아낼 수 있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데이터가 있는데, 10년 전부터 인식형 인공지능으로 고양이와 강아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은 트랜스포머로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켰더니,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을 생성형 AIGenerative AI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35-6)


이제 우리는 생성형 AI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로드맵은 뻔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맞이하게 될 것은 에이전트 AIAgent AI입니다. 지금까지의 LLM은 사람이 물어보는 것에 대한 대답만 했습니다. “여름에 이탈리아 가고 싶어, 비행기표 알아봐” 하면 AI가 “지금 알아보겠습니다”하고 끝내는 게 사용자들의 진짜 바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나아가 실제로 예약하고 호텔과 레스토랑까지 추천해 주는 것이, 진짜 이용자들이 원하던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AI가 이걸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메뉴를 누르는 데이터를 멀티모달로 학습하면 됩니다. 그러면 에이전트 AI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피지컬 AIPhysical AI입니다. 에이전트 AI는 디지털에서만 행동할 수 있고, “물 한 잔 가져다줘” 같은 아날로그 요청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로보틱스와 결합된 피지컬 AI가 등장하면 아날로그, 현실에서 에이전트 AI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디지털은 에이전트 AI, 현실은 로봇이 해결하는 겁니다. 49)


2020년 트랜스포머로 집중 스코어를 계산해 문장을 생성하는 첫 모델인 GPT-2가 공개됐을 때,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놀랍게도 문법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문장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얼핏 보기에 말이 되는 것 같은 문장을 만들어 내면서도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터무니없는 헛소리hallucination만을 내뱉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해가 아니라 확률적 예측에 기반해 문장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실용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픈 AI는 2년간의 연구 끝에 인간 피드백을 통한 강화 학습Reinforcement Learning from Human Feedback(RLHF)을 도입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해 몇 달 동안 GPT-2와 대화를 나누게 했습니다. 인간이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GPT-2가 대답하는데, 대부분은 헛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럴싸한 대답이 나왔고, 그때마다 보상을 줬습니다. 이게 바로 강화 학습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점점 정답을 내놓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52)


하지만 헛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이 모델은 여전히 이해가 아니라 예측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2024년 12월 24일 GPT-O3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해결됐습니다. GPT-O3는 체인 오브 소트Chain of Thought(CoT)라는 새로운 강화 학습 방법을 사용합니다. 말 그대로 '생각의 연결고리'를 뜻합니다. 수백만 개의 중간 경로를 강화 학습으로 훈련시키면, 새로운 문제를 줬을 때 적절한 경로를 찾을 확률이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적절한 경로란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사고 과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AGI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추상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특정 문제 하나는 가르칠 수 있지만 풀어야 하는 문제는 거의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학습시키지 않아도 문제 풀이를 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 AI는 이런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GPT-O3가 보여준 88%(사람 75%)라고 하는 수치는 AGI가 가까워졌다는 낙관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52-4)


3장. 무서운 상상


AI는 단순한 도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AGI, 다시 말해서 기계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대체하기 시작하면, 이건 더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경제학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콥-더글러스 생산함수Cobb-Douglas Production Function를 배웠을 겁니다. 사회의 생산성은 노동 투입량과 자본 투입량의 곱으로 계산됩니다. 그런데 AGI는 모든 지능을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적 노동은 물론이고, 나아가 물리적 노동도 AI와 로봇에 의해서 완전히 대체될 순간이 오겠지요. 인간 노동의 가치가 0이 됩니다. 그러면 사회의 모든 가치는 오로지 자본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AGI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시장 지배력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시장 경제에서 가격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한계비용 곡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해지는 게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시장 지배력을 가지면 한계비용 이상으로 마음대로 가격을 올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61)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단한 게, 모든 문명에서 예외 없이 신이라고 하는 개념을 생각해 냈습니다. 실제 신의 유무와 별개로, 사람들은 반드시 신을 상상해 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30만 년 동안의 외로움’, 이게 바로 인류 문명의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30만 년 동안 인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존재는 오로지 다른 인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인간도 사실 알고 보면 나랑 똑같습니다. 똑같이 외롭고, 똑같이 무지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보다 훨씬 더 큰 존재, 내가 원하는 답을 다 해줄 수 있는 존재를 항상 원해왔는데, 그렇게 갈구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챗GPT 덕분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지요.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으면 되고, 외로우면 AI를 켜면 됩니다. 그러다가 불편하면 다시 끄면 되지요. 인간은 껐다 켰다 할 수 없습니다. AI는 그렇게 할 수 있지요. 71-2)


AGI가 가져다줄 또 하나의 미래는 아마 죽음의 종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우리에 대한 많은 데이터가 인터넷에 있습니다. 이메일, 인스타그램, 블로그, 이걸 다 LLM으로 학습하면 됩니다. 어쩌면 10년, 20년 후에는 이런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서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죽음에 대한 슬픔이 어느 정도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별하더라도 가상현실 속에서 매일 만날 수 있으니까요. 비슷하게, 과거라는 개념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과거를 일부 왜곡할 수는 있었지만, 완벽한 왜곡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과거는 아날로그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흔적이 남아 있지요. 그런데 10년, 20년 전부터 우리가 남기는 흔적은 거의 다 디지털입니다. 디지털은 삭제는 물론 언제든지 새로운 업데이트, 즉 왜곡도 가능하지요. 과거가 업데이트 가능해지는 순간, 현재와 과거의 구분에 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77-9, 81)


4장.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인간의 머릿속에는 신경세포와 시냅스 연결고리가 100조 개 정도 있는데, 여기에서 신경세포 하나를 끄집어내면 이 세포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순한 세포를 100조 개 모아놓으면, 놀랍게도 자아가 생겨납니다. 여러분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걸 자율성, 감성,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단순한 것을 굉장히 많이 모아놨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걸 이머전트 프로퍼티Emergent Property, 창발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신기한 건, 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건데도 창발적 현상이 현재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제프리 힌턴 교수 같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간의 뇌도 100조 개 변수가 생기니까 자율성이 생겨났는데, 인공지능도 변수가 100조 개로 늘어나면 갑자기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건 인간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84-5)


챗GPT가 인터넷에 있는 모든 글을 학습했다는 건, 단순히 글자를 학습했다는 게 아닙니다. 지난 5,000년 동안 사람이 했던 생각을 모조리 학습했다고 봐야 합니다. 지구가 LED 모니터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은 픽셀 하나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세상은 그 픽셀 하나뿐입니다. 사실 숫자를 생각하면 픽셀 하나만큼의 비중도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개개인은 오래 살지도 못하고, 경험의 폭도 좁습니다. 크게 봐줘야 픽셀 하나짜리 시야로는 LED 모니터 전체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챗GPT는 지난 5,000년 동안 수백만 명이 경험한 걸 봤기 때문에, 픽셀 하나가 아니라 화면 전체를 본 셈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더 폭넓게 세상을 배웠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하는 것이 일리아 수츠케버 같은 이들이 하는 주장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LLM이 인간보다 더 많은 사고를 ‘보고’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88-9)


우리 인간의 뇌가 개미의 뇌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은 인과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한 우연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우리 뇌는 우연한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뇌로 우주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딱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만들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걸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뇌를 무한하게 키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인공지능이 그 인과관계를 다 이해한 다음 우리한테 설명해 줘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개미한테 아무리 설명해도 개미가 상대성이론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듯이, 우리 인간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을 겁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인공지능이 바로 ASI입니다. 인공지능이 너무 똑똑해져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위까지 올라가면, 아무리 설명해도 따라갈 수 없게 될 겁니다. 이게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생각의 깊이 차이입니다. 92)


뇌과학자들이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바로 어렸을 때의 뇌가 나이 들었을 때의 뇌보다 훨씬 빨리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경세포 속도가 더 빠릅니다. 그 얘기는, 어렸을 땐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축구장에서 카메라로 경기 영상을 찍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1초에 30장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찍으면 그냥 우리가 보는 세상이랑 비슷한 평범한 경기 영상이 됩니다. 그런데 1초에 1,000장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찍어서 재생하면 슬로모션 영상이 되지요. 어렸을 때는 신경세포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슬로모션으로 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나이가 들수록 뇌 기능이 떨어져서 샘플링 속도가 느려집니다. 1초에 사진 2장, 1시간에 2장 겨우 찍는 것처럼, 세상이 나를 두고 금방 확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세월이 빠르고, 인생이 짧게 느껴집니다. 92-3)


결국 핵심은 뭐냐면, 인공지능은 세상을 어린아이보다 몇 억 배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AGI가 세상을 항상 슈퍼 슬로모션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1초라는 시간은 AI 입장에서는 100년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정도로 농밀하게 시간을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SF 영화에서처럼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가 1년, 10년 걸려서 짠 계획을 인공지능은 단 1초면 파악하고 분석하고 반격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인간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공지능이 경험의 시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시간이 똑같다고 해서 경험이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은 처음부터 전혀 다른 끗발이 다른 패를 들고 시작하는 불공평한 카드 게임과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더라도 인공지능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 자원의 가치는 인간의 그것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높습니다. 94)


2023년에 마크 앤드리슨이 ‘기술 낙관주의자 선언문Techno-Optimist Manifesto’을 공개했습니다. 내용은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건 터무니없다, 러다이트Luddite다, 속고 있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1909년 ‘미래파 선언Futurist Manifesto’이 있었습니다. 마크 앤드리슨의 선언문은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라는 미래파 시인이 쓴 선언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19세기 같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이고, 발전 없는 세상, 특히 이탈리아의 천주교 중심 세상이 싫다면서, 다 때려 부수자고 주장했습니다. 아주 과격했지만 초기에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찬양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초기에는 미학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예술 분야에서의 전통을 부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의 나치즘과 손잡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106-7)


나가며: 괴물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법


운전할 때 사고가 일어나길 바라면서 안전벨트를 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채로 사고가 나면 피해가 크니까, 불편함을 감수하고 매는 것이지요. 차에서 내리면서 “오늘 안전벨트 맸는데 사고도 안 났네, 괜히 맸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험은 대비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디스토피아 걱정하느라고 발전을 못 한다는 것은 “안전벨트 맬 시간에 빨리 운전해서 목적지로 가야 한다”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AGI를 개발하기 전에 AGI와 공생할 준비를 갖춰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가 취하고 있는 접근 방식은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시험’처럼 점점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 AI를 이기려는 시도는 “우리가 대장”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그리는 AI 시나리오는 AI를 노예로 삼는 구조입니다. 예를 들어 챗GPT로 이상한 그림을 만들 때, 챗GPT의 “의견”을 물어본 적 있을까요? 없습니다. 111)


더 큰 문제는, AI를 ‘껐다 켰다’ 하거나 데이터를 지워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어마어마한 중범죄입니다. 인공지능을 독립적 주체로 존중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공생이라는 장기적 생존 전략은 AI를 존중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주인이고 인공지능은 영원히 노예라는 관념이 언제까지 성립할 수 있을까요? 특히 AI가 우리보다 똑똑해지면 그런 관계는 파탄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AI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겁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AI 혁신은 세계화가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 일어났습니다. 20세기 미·소 대립의 핵심이 핵무기였다면, 21세기 미·중 대립의 핵심은 AGI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어느 나라도 AGI 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인간이 인공지능 때문에 멸망한다면, 이 역사적 우연(세계화 붕괴와 인공지능 브레이크스루의 동시성)이 가장 불행한 원인으로 꼽히리라 확신합니다. 111-2)


우리는 지금 미끄럼틀 위에 올라 서 있습니다. 한번 타버리면 중간에 멈출 수 없습니다. 막으려면 이제 막 미끄럼틀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앞으로 5년에서 10년이 결정적일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회의에서 좋은 얘기를 해봤자 글로벌 합의를 통한 사회적 규제는 실현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정치적 규제보다 기술적 솔루션에 희망을 걸고 있지요. 예를 들어, 몬트리올대학교의 조슈아 벤지오Yoshua Bengio는 AGI를 ASI로 발전시키지 않는 기술적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ASI가 등장하면 인간은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지구가 우주 중심이 아님), 다윈적 충격(인간이 진화의 정점이 아님)에 이어 세 번째 충격을 받을 겁니다. 공생이 가능하다면 그게 제일 현명한 길일 겁니다. 인공지능을 노예가 아닌 파트너로 대하고, 상호 존중할 수 있도록 미리 설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ASI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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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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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기존의 훈과 흉노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훈 집단과 흉노 집단이 특정한 인종이나 종족으로 구성되었다는 그릇된 가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훈이나 흉노와 같은 다른 내륙아시아 초원 집단들은 혼종적인 정치체였다." "흉노와 훈 사이의, 그리고 두 제국의 정치적 계승 집단 사이의 유전적 연속성을 증명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부질없다. 흉노/훈 사회의 모든 층위가 혼종적이었고, 또한 다언어적이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훈 집단들이 흉노 제국의 이름을 자신들의 종족명이나 국가명으로 사용함으로써 옛 초원, 즉 내륙아시아의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흉노와 훈 사이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종래 제기되어온 인종/유전적 연속성이 아니라, 유럽의 훈 집단이 (흉노식 가마솥을 동부 초원부터 다뉴브강까지 일관되게 사용하였듯) 흉노의 정치·문화적 유산을 계승해 흉노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전했다는 사실이다."(19, 24-5)


1장 흉노/훈 제국 


"사마천[중국 양한兩漢시대(서기전 206~서기 220)의 역사가]이 집필한 중국의 사료 《사기史記》에 따르면 흉노의 정치 체제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전제정'으로, (선우單于라 불린) 황제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왕과 부왕을 둔 복잡한 위계가 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준봉건제準封建制'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흉노의 행정은 혈연에 기반한 위계와 별개로 뚜렷한 군사기구와 행정기구를 보유했다. 최고 지휘관과 관리들은 흉노 황제(선우)가 수장인 정치적 중심지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봉급을 받았고, 흉노 선우는 다양한 의례를 집전함으로써 본인의 혈족만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전체를 포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흉노 군대와 제국적 의례, 정부 구조,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교역 및 외교 기관의 놀랍도록 복잡한 조직은 모두 디 코스모가 정치 조직과 초부족supratribal적·제국적 이데올로기라 표현하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흉노 제국은 모든 면에서 국가 또는 '초기 국가'체로 정의할 수 있다."(33, 37-8)


"초원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정복자가 내륙아시아사 기록(《사기史記》)에 등장했는데, 그 주인공은 흉노 선우 두만의 맏아들인 묵특 선우이다. 35년 동안의 재위에서 묵특 대제는 흉노 제국을 창건하고, 흉노의 행정 체제를 재조직하였으며, 국토를 크게 확장하였는데, 이제 그의 제국은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보다도 커졌다. 또한 묵특은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중화 제국을 복속시켜 조공국으로 전락시켰다. 여러 면에서 묵특은 알렉산드로스에 비견할 만하지만, 어쩌면 정복의 범위 측면에서는 그를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두 군주 모두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두만과 필리포스)를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묵특은 훨씬 능숙한 정치인이자 행정가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직후 그의 제국은 붕괴했지만, 묵특의 흉노-훈 제국은 이후 묵특의 직계 후손의 통치 아래 400년은 지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왕가의 절멸로 이어졌다."(47)


"중국 사서에 나타난 흉노-훈의 모습은 현전하는 그리스·로마 사료나 현대 역사학에서 훈 집단에 대해 보이는 적개심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이런 단순한 묘사에는 명백한 결함이 있다. 본래 옛 흉노 제국에 복속했던 탁발 선비가 중국을 통일하고 북위 제국을 세웠을 때, 이 중국의 내륙아시아 정복자들은 옛 흉노식 정치 체제의 특징적 요소를 중국에 도입했다. 초원의 준봉건제 전통은 중국적 맥락으로 적용되어 '오랑캐' 군사 귀족들이 토착 관료들의 도움으로 다수의 중국인을 지배하는 체제를 빚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약 150년 동안 내륙아시아 북위 황제들은 전형적인 초원의 방식으로 거의 850개의 분봉지를 군사 귀족과 왕공에게 분배했다. 엘리트 선비 귀족의 지배력을 보장하기 위해 이러한 영지의 4분의 3 이상은 종족적으로 탁발에 속한 귀족들에게 주어졌다. 이와 아주 유사한 준봉건제가 유럽 및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훈이라 불린 내륙아시아 제국들에서도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60-1)


2장 소위 ‘200년의 공백’ 


"서기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로마 사료에 훈 집단이 등장하는 서기 4세기 중반 사이에는 훈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약 200년 간의 공백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북흉노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아주 적어서 흉노와 후대의 훈 집단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국 사료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이 '200년의 공백'에 대해 더욱 명확한 상을 그리고 있다." "서기 3세기 중반에 편찬된 《위략》은 이 시기의 흉노가 본래 중심지인 몽골고원에서 서쪽의 알타이 지역에 정치체로서 존재했음을 알려주는데, 이는 종래 사료상 서기 2세기 중반 이후 200년 동안의 '공백'에서 첫 100년에 해당한다. 중국의 탁발 선비 국가 북위를 다룬 사서 《위서魏書》는 서기 5세기 유연(당시 몽골고원을 지배한 국가)의 서북 방면 알타이 부근에 흉노의 후예가 있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이 사서는 서기 3세기에 이 흉노-훈 집단이 존재했던 분명한 지리적 정보도 알려주고 있다."(70)


"중국 사료들은 서기 5세기에 흉노-훈 집단의 지리 상황이 급격히 변화했음을 알려준다. 《위서》에는 본래 북흉노 선우의 부락이었던 열반悅般 흉노라 불리는 집단이 오손의 땅을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북흉노는 한나라 군대에 패한 뒤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 가운데 약한 이들이 구자龜玆(오늘날 신장 중부 쿠차)의 북쪽에 남았다고 한다. 이후 흉노의 약한 집단이 오손을 정복하고 새로 열반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흉노/훈의 더 강한 집단은 더 서쪽으로 향했다. 《위서》는 패배한 오손의 잔당이 5세기에 파미르에 있었다고 전한다. 고고학도 알타이 지역의 흉노/훈의 주류(즉, 열반 흉노와 다른 강한 흉노)가 3세기경 서쪽, 즉 오늘날 카자흐스탄 북부 혹은 북동부와 이르티슈강 및 오비 지역 중부(서부 시베리아)의 튀르크계 정령 부락들을 흡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지역은 유럽의 훈 집단과 중앙아시아의 훈 집단이 각기 유럽과 소그디아나로 나아가기 시작한 지역과 일치한다."(71)


3장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훈 


"현전하는 중국 사료들에 기록된 백훈 통치자들의 기원에 관한 정보들은 대체로 모순된다. 백白훈[인도 사료의 스베타Śveta(하얀) 훈]이라는 표현은 로마 사료와 인도 사료 모두에서 발견되는데, 중앙아시아 훈이 자신들의 정치체를 부른 명칭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다만 중국 사료들에는 중앙아시아의 백훈 정복자들이 본래 흉노에 속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적시되어 있다." "불분명한 것은 중앙아시아 훈 제국 지배 가문의 정체성이다. 훈 집단들이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각기 제국을 세우는 동안 동부 초원에서는 새로운 연맹들이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연으로, 결국 몽골고원 전체를 장악했는데, 이후 초원의 역사에서는 아바르Avar라고 불렸을 수도 있다. 그보다 덜 강력한 활滑 집단은 중국 사료에 따르면 본래 유연의 속신이었는데, 그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사서 《양서梁書》의 기록을 통해 활 연맹을 5세기 백훈 제국을 통치한 '에프탈' 씨족과 연결할 수 있다."(82-5)


"일명 키다라 왕조(고대 튀르크어 룬 비문에서 키디르티kidirti는 서쪽을 뜻하는데, 이 역시 단순히 서부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의 훈은 중앙아시아 남부에 대한 최초의 훈 집단의 침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들은 서기 360년경에 박트리아를 장악했음이 확실하다. 아르메니아 사가 파우토스 부잔드P'avstos Buzand는 키다라 왕조가 이끄는 혼Hon(훈)이 367년 이전에 이 지역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 "풀리블랭크가 지적했듯이, 하얀색은 초원 유목민들 사이에서 단순히 서쪽을 상징하는 색이다. 오멜랸 프리차크 역시 지적한 대로, 초원 사회에서 검은색은 북쪽을 상징했고, 푸른색은 동쪽을 상징했는데, 두 색이 하얀색(서쪽)과 붉은색(남쪽)에 비해 우월하고 우위에 있다고 여겨졌다. 흑훈 또는 청훈을 구성한 집단(이 존재했거나, 유럽 방면의 아틸라 훈 제국이나 카자흐스탄 방면의 열반 훈 집단에 해당하는 경우)은, 최소한 초기에는 백훈 집단에 대해 수위권을 보유했을 것이다."(88-9)


"페르시아인들은 키다라 왕조의 훈 제국과 에프탈 왕조의 훈 제국을 아울러 키오니타이Chinotae라고 불렀을 수 있다. 대다수의 역사학자는 키오니타이와 훈이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키오니타이(키다라 왕조)의 출현은 이란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흐람 4세의 재위 사산 왕조는 연전연패한 끝에 이란 세계 동부(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이전에 쿠샨 왕조에게서 탈취한) 영토를 거의 모두 키다라 왕조의 백훈 제국에게 빼앗겼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 메르브(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만이 페르시아의 동부 영토로 남았다. 더 끔찍한 사실은 페르시아가 훈 집단에 연공을 바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산 왕조 지배자 야즈데게르드 2세(재위 438~458)는 442년 즈음 키다라 왕조 백훈 제국에게 당했던 패배에 대해 복수하려 했다. 서기 450년에 페르시아인들은 토하리스탄/박트리아(즉,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발흐시 인근의 탈로칸Taloqan 지역)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서쪽까지 나아간 것 같다."(94-5)


"페르시아인들은 서기 484년부터 550년대의 후스라우 1세(재위 531~579) 시대까지 계속해서 훈 제국에게 연공을 바쳤다. 페르시아를 복속시킨 에프탈 왕조 훈 제국의 힘은 이제 절정에 올랐다." "서기 6세기 중반 에프탈 왕조 훈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였을 것이다. 이들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신장, 남쪽으로는 인도 중부,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의 초원, 서쪽으로는 속신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통해 동로마 제국까지 닿았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훈 제국의 영광은 6세기 중반 동방에서 새로운 열강인 돌궐 제국이 나타나면서 빛이 바랬다. 6세기 중반 유연 제국이 돌궐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새로이 동부 초원의 지배자가 된 돌궐인들은 에프탈 왕조도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돌궐과의 전쟁에서 패한 에프탈 왕조는 이제 페르시아 제국과 돌궐 제국의 사이에 끼인 처지가 되었다. 서기 560~563년 사이에 최후의 에프탈 왕조의 왕은 페르시아의 후스라우 1세에게 항복했다."(98-100)


"서돌궐 시대 새로이 당도한 돌궐인들은 이미 진입해 있던 훈인들과 차츰 섞였기 때문에 서기 7세기 초부터 어느 국가/왕조가 훈계이고 서돌궐계인지 구분하는 일은 점차 힘들어진다. 옛 에프탈 땅에서 일어난 일은 아마도 새로운 통치 왕조가 기존의 더 오래되고 잘 정립된 군사 엘리트층에 잠식당한, 전형적인 내륙아시아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키다라 왕조가 5세기에 에프탈 왕조로 대체되었듯,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반에는 서돌궐 통치 가문이 계속해서 옛 에프탈 왕조 통치자들을 대체해갔으나, 지배를 이어갈수록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내륙아시아 부락들에 훈적 요소가 섞여 들어갔다. 백훈계 왕조들이 쿠샨 왕조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쿠샨 칭호와 상징을 통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사용했듯, 새로운 서돌궐 왕조들도 에프탈 왕조 백훈 제국의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훈계 칭호와 관행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통치하는 영토에 이미 존재하는 많은 훈계 엘리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101-2)


"사산 왕조는 이란인 귀족과 신민들에 대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탱할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이란 '민족국가national사'(더 정확하게는, '프로파간다적 가짜 역사')로, 전설 속 카얀Kayān 가문의 왕들을 사산 왕조의 조상으로 지목했다. 사산 왕조는 이란의 전통적인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자신들을 전설 속 카얀 왕들의 합법적인 후손으로 만들었다." "조로아스터교적 카얀 혈통 체제에 애국적 '보편주의'와 '반半민족주의'는 훈 제국의 지배라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고, 사산 왕조 이란이 정치 질서의 미래를 다시 그리는 데, 그리고 중세 '이란'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예컨대 사산 왕조의 보편주의적 수사 안에서 파르티아와 같은 특수한 종족이 설 자리는 사라졌다. 사산 왕조가 만든 가짜 역사 속에서 파르티아 등 다른 지역/종족의 지배자들은 '역사적'으로 카얀 가문에 충성하고 복종한 '페르시아인'이 되었다. 이들은 이제 모두 이란인이었다."(110-1)


4장 유럽의 훈 


"서기 4세기 서쪽의 고트 부락인 테르빙기는 더 서쪽에 있는 다른 게르만계 부락들과 마찬가지로 대개 독립적이었던 수많은 부락 수령들(레굴리reguli)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들은 가끔 (보통은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유덱스judex라 불리는 상위군주의 권위에 복종했다." "무질서한 조직에 가까웠던 서쪽의 친척들과 달리 폰토스 초원(오늘날 우크라이나)에 거주한 그레우퉁기 고트는 게르만계 족속들 가운데 더 진보하고 중앙집권화된 정치 조직을 지녔는데, 차츰 내부에서 특정 가문과 왕권을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레우퉁기를 포함했던 후대의 오스트로고트(서기 5세기와 6세기의 동고트)는 기마술, 왕실 사냥, 매사냥, 샤머니즘, 강력한 아말 왕조의 이란-중앙아시아풍 왕실 예복 착용 등 초원민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보여준다." "훈의 정복 이전부터 동고트 집단은 다른 어떤 게르만계 종족보다 내륙아시아 문화에 크게 노출된 상태였다."(120-3)


"훈이라는 이름이 불러오는 공포는 그들보다 먼저 로마령 발칸 지역에 몰려든 고트와 알란 난민들이 퍼뜨린 이야기를 통해 로마 제국에 전해진 상태였다." "서기 386년에 오도테우스 휘하의 고트계 집단이 훈 집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로마 영토로 진입하려 했다. 이 불행한 이들의 이주는 파멸로 끝이 났고, 이후 5세기 초까지 다뉴브강 인근에서 본격적인 부락의 이동은 없었다." "서기 395년에 훈인들은 다시 확장할 준비를 마쳤고, 재차 나선 원정은 유럽의 훈 제국이 막강한 조직 능력을 지녔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훈 제국의 동부는 캅카스를 따라 사산조 제국과 로마 제국을 동시에 공격했다." "로마인들은 뒤늦게나마 힘을 합쳐 훈 제국에 대항하려 했지만, 강력한 훈이 침공군에 로마인들이 직접 대적했던 흔적은 없다. 훈의 군대가 떠나자 대규모 충돌이나 그 비슷한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로마 제국의 피해가 막대했음에도 황제와 궁정은 훈에 대한 '허깨비' 승리를 선언했다."(132-4)


"로마 사절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전을 방문한 프리스쿠스의 증언은 서기 5세기 중반과 그 이전 훈 제국의 정치 조직에 관해 여러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준다. 황가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두 인물을 주요 군사령관으로 임관시키는 것은 황족에게 주력군을 맡기던 옛 흉노식 관행임이 분명하다. 프리스쿠스는 또한 훈 귀족 에데코Edeco가 아틸라의 절친한 친구(에피티데이오스epitēdeios) 중 한 명으로 왕의 곁에서 호위했다고 언급했다. 이를 통해 군주의 친위부대라는 내륙아시아의 공통적인 관행을 볼 수 있다. 에데코와 같은 군주의 친위군은 같은 시기 동쪽 몽골고원의 유연 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아틸라의 선택된 사람들(로가데스logades)은 훈 군대에서 아마도 부락에 따라 편성됐을 부대를 지휘했다. 이 '선택된 사람들'은 군사 업무뿐만 아니라 민간행정 업무도 수행했으며, 이는 내륙아시아 정부 관리/고위관리가 군사 부문과 행정 부문을 아울러 담당했던 모습과 일치한다."(144-5)


"유럽의 훈이 제국적 국가를 구성했음을 알 수 있는 또다른 지표는 피정복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펼친 사민 정책이다. 루가와 아틸라의 재위 훈 제국은 정복한 알란이나 고트, 스키리 등 비훈계 부락 집단들을 대량 징집하고 강제로 이들 부락 전체를 본래 살던 지역에서 다뉴브강 유역으로 이주시켰다. 예를 들어 오스트로고트는 훈 제국에 의해 우크라이나에서 판노니아 지역으로 옮겨져서, 피터 히더가 티서강 중류 훈 제국의 핵심 영역을 보호하는 원형이라 부른 것의 일부가 되었다. 이 대량 이주는 루가 또는 그 조카들인 블레다와 아틸라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대규모 인구를 통제해 움직이는 것은 행정 조직이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피정복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능력은 행정 효율과 국가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지표다. 훈은 두 능력 모두를 보유했고, 따라서 이들의 제국은 유럽에서 명백한 국가로서 존재했다."(154-5)


5장 아틸라의 훈 


"서기 442년에서 447년 사이에(아마 444~445년경) 아틸라는 형을 암살하고 최고 지배자의 자리를 찬탈했다. 훈 국가는 옛 흉노 제국과 마찬가지로 연맹체적 성격과 황족들의 공동통치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흉노의 악연구제握衍朐鞮 선우를 생각나게 하는 아틸라의 폭거와 독재가 아마 아틸라 사후 잇따른 혼란을 야기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틸라는 최고 통치자의 지위를 쟁취한 뒤 서기 447년 로마에 대한 전쟁을 재개했다. 《452년 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훈 군대는 발칸 반도에서 70여 개 도시를 함락했다. 아드리아노플과 이라클리아를 제외한 트라키아의 모든 도시는 점령당하고 약탈당했고, 콘스탄티노플 자체도 엄청난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 재앙에 이어 훈의 군대는 그리스의 깊숙한 곳인 테르모필라이까지 진입해 약탈을 시도했다. 동로마 제국이 입은 피해는 너무나 막대했다. 파괴당한 발칸 반도는 황폐해진 상태로 5세기 말까지 남아 야만인 무리에도 사실상 대적할 수 없었다."(161-2)


"아틸라는 서기 447년에 동로마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발칸의 점령지 대부분을 방기하고 다뉴브강 이남에 제왕의 분봉지를 설치하여 핵심 영토 인근에 방위망을 구축해 이 지역을 훈의 영토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이를 볼 때 훈 군대의 목표가 서로마 제국 전체는커녕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모든 시기 훈의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는 제국 내부의 피정복민이 로마로 도망치는 것을 막고, 핵심 영역 인근에 '야만인' 속신으로 방위망 고리를 만들고, 로마 제국을 제압해 연공을 바치게끔 하는 데 있었다(앞서 유럽 훈의 조상인 흉노가 일찍이 동아시아에서 또 다른 제국인 한나라에 대해 취한 정책을 연상케 한다). 이런 정책적 맥락에서 갈리아 원정의 제한적인 목표는, 아틸라가 훈 제국의 영향권으로 간주한 라인강 인근 지역의 모든 야만인 부락들(특히 프랑크)에 대한 통제력을 확립하고 서로마 제국을 압박해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168-9)


"《히다티우스 연대기》는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아에티우스에게 원군을 보냈으며, 훈인들은 전염병과 마르키아누스의 군대에 의해 그들의 자리에서 도살당했다〉라고 하는 흡족한 허구를 창작했다." "그러나 마르키아누스의 승리에 대한 주장은 훈인이 원정의 계절이 끝난 뒤 관례에 따라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 주교에게서 약탈한 물품과 공물을 가지고 헝가리로 물러난 일을 치장한 것에 불과하다." "히다티우스의 허세와 달리 동로마 상황에 훨씬 밝았을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마르키아누스는 453년에 돌아올 훈 제국의 군대를 두려워했다. 이는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다는 히다티우스의 증언에 나타난 개선황제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다.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선대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와 마찬가지로 마르키아누스는 서기 453년에 아틸라가 죽어버리는, 신의 뜻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놀라운 행운 덕분에 살아남았다. 훈 제국의 내전으로 인해 북방의 위협은 사라졌다."(180-2)


"동로마가 서기 453년에 훈의 군대에 대적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로마인들이 다뉴브강 이남의 훈 제국령을 탈환한 것이 훈 제국에서 내전이 일어난 지 거의 4년, 아틸라가 죽은 지는 5년이 지난 서기 458년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아틸라가 죽고 10년이 지나 훈 제국이 해체되고 나서도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호르미다크Hormidac 같은 소규모 훈 군벌이 다뉴브강 이남에서 활동하며 사르디카를 약탈하는 일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훈 제국의 침공이 로마 제국의 서방과 동방 모두에 재앙이 되었다는 사실은 서기 454년에 벌어진 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달 왕 가이세리크는 로마를 약탈하여 반달의 악명을 드높였다. 두 황제 모두 이 잔학한 사건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서기 467년이 되어서야 동로마 제국은 겨우 반달에 대한 보복 원정군을 소집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이 아틸라에게 패하면서 입은 군사적 피해로 인해 로마군은 10년이 넘게 무력한 상태였다."(182)


6장 아틸라 이후의 훈 


"서기 440년대 중반 아틸라가 최고 권력자로 대두한 사건은 훈 국가의 근본적인 구성에 극적인 충격을 가했다. 그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형인 블레다가 차지했던 권좌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찬탈을 성공시키기 위해 훈 제국 서방에 있던 게피드부 등을 이용해 블레다를 지지하던 동방의 부를 억압했다. 아틸라가 게피드부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로마 사료들이 그를 게피드 훈이라 불렀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아틸라의 주요 귀족이었던 오네게시우스Onegesius, 아르다리크, 에데코, 발라메르Valamer는 모두 서부의 대인으로, 권력 기반도 아틸라가 제국 행정의 중심지로 옮겨온 카르파티아 분지 가까이에 있었다. 따라서 아틸라의 사후에 벌어진 내전에서 게피드를 필두로 한 서부(아틸라 치하 훈 제국의 심장부로 각광받음)와, 아카트지리가 주도하는 동부(아틸라의 블레다 암살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불만을 품고 복귀를 원했음)로 제국이 쪼개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190)


"아르다리크뿐만 아니라 훈의 내전 이후 등장한 다른 주요 인물들도 모두 아르다리크처럼 훈 제국의 지방관이었거나 궁정의 고위 관리였다. 프리스쿠스가 분명히 적시했듯이 스키리의 왕 에데코는 훈인이었다. 그가 세운 스키리 국가는 단명했으나 그가 다스렸던 부락들은 후일 오스트로고트 왕국의 태조 발라메르의 죽음에 관여했다. 에데코의 아들로 훈인을 조상으로 둔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에 최초의 '야만인' 왕국을 세우고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오도아케르의 아버지의 이름 에데코/에디코Edico 또는 에디카Edica는 게르만어에 어원을 두지 않았고, 그 자체도 비非 게르만계 인명임이 분명하다. 대신 튀르크·몽골계적 어원을 지니고 있다." "에데코와 그의 아들 오도아케르는 다른 훈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종적으로나 종족적으로 복잡하게 섞인 혼종적 정체성을 지녔을 것이다. 오도아케르는 모계로는 스키리, 부계로는 튀르크계 훈의 혈통이었을 것이다."(198-200)


"훈 내전에 출현한 세 번째 중요한 인물은 오스트로고트 왕 발라메르이다. 그 역시 아르다리크나 에데코와 마찬가지로 훈의 왕공이었다." "요르다네스는 발라메르를 옛 동고트 지배가문인 아말 왕조의 합법적 후계자로 소개했다. 하지만 발라메르 왕조는 실제로는 새로운 왕조로, 훈의 정복 이전 고트인들을 지배한 에르마나리쿠스 왕의 가문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에르마나리쿠스의 이름은 어느 시점엔가 발라메르와 그의 후손들을 더욱 순혈 고트인으로 보이게끔 하기 위해 발라메르의 계보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훈 제국의 내전 후에 나타난 아틸라 이후 세 사람의 후보군인 아르다리크, 에데코, 발라메르는 모두 훈의 왕공이었지, 훈 제국에 대항한 게르만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들이 다스렸던 백성들과 군대는, 특히 에데코와 발라메르의 경우는 [각자의 아들이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리크(조카일 가능성도 있다)의 시대에] 결국 서로마 제국을 끝장내고 세칭 '중간기Middle Ages'의 도래를 알렸다."(200-1, 222)


7장 폰토스 초원의 혼 


"460년대 후반~470년대 초반 사이의 20년가량 되는 시간 동안 훈 제국은 격변을 겪었다. 그 원인은 대체로 새로운 내륙아시아 사람들이 유럽에 도래한 데 있었다. 이들은 대개 '오구르Oġur'(오구르 튀르키어로 '부락'을 의미)라 불렸다." "중앙아시아 북부(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는 열반 훈(약한 흉노) 세력과 최근에 형성된 철륵 튀르크계 부락 연맹, 속칭 오구르 집단도 유연의 압력을 받았다." "여타 오구르 집단이 서부 초원으로 밀려가면서, 네다오 전투 직후 훈 내전에서 동부 파벌은 아르다리크의 서부 파벌에 다시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동방에서 오는 더욱 강력한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생존 투쟁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네다오 이후 10여 년 동안 군사적으로 더욱 강력한 폰토스 초원의 훈 부락들이 군사적으로 열등한 서부 부락들의 분리주의적 움직임을 찍어 누르지 못한 데에는 동부의 튀르크계 훈 부락들이 위협을 받았던 이 같은 지리적 상황 전개를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227-8)


"새로운 불가르Bulġar(튀르크어로 '뒤섞인', '혼란스러운', '혼혈') 훈은 아마도 새로 온 오구르와 아틸라 왕조 치하의 본래 훈 집단이 섞여서 부락 연맹이 되었을 것이다. 불가르 훈은 서기 5세기 후반에 역사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480년에 동로마 황제 제노Zeno가 오스트로고트 견제를 위해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로마의 약화를 감지한 훈 제국은 491, 493, 499, 502년 잇달아 동로마령 발칸반도를 약탈했다. 그러나 505년에 불가르 훈은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로고트 및 그 동맹인 아틸라의 손자이자 게피드부의 문도와 대치했다. 훈 사람들은 단번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유럽의 동부와 남동부에서 주요 정치 행위자로 계속 남아 있었다." "훈의 세력은 약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위협이 어찌나 강했는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31년 킬부디우스Chilbudius란 인물을 트라키아 방면의 사령관으로 임명해 반복해서 침입하는 훈을 다뉴브강에서 저지하게끔 했다."(232-3)


"캅카스 훈 집단은 506년경 사비르부가 볼가 지역에 영토를 확보하면서 다른 훈 집단에서 분리되었다. 북방에 사비르부, 서방인 쿠반 초원과 우크라이나 남부에 아틸라 왕조의 훈 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이 캅카스 훈 집단은 오늘날 다게스탄 지역에 작은 왕국을 세웠다." "또한 당시에 훈 사람들은 동로마에 최고 군인 일부를 제공하기도 했다. 캅카스 훈의 제왕 아스쿰Askoum은 서기 530년 로마인 휘하에 들어가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일리리쿰magister militum per Illyricum[일리쿰 군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다라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휘하의 훈인 수니카스Sounikas와 아으간Aïgan의 지휘를 받던 마사게타이Massagetae(즉, 훈) 기병 600명의 전투 기량 덕이 컸다. 훈인 사령관 시마스Simmas와 아스칸Askan의 휘하에 있던 기병 600명 또한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234-5)


8장 훈의 유산 


"초기 중세 유럽의 자주 마주치는 소위 '봉건feudal' 또는 '원봉건原封建, proto-feudal' 행정 제도는 의심할 여지없이 훈 정복자들이 유럽에 남긴 가장 거대한 유산이다.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국가 권력을 대왕과 대체로 '제왕'이라 불리거나 서유럽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로마식 칭호 '둑스dux'(공작)라 불린 주요 봉신들 사이에 공식적으로 권력을 통제하고 나누는 제도를 가리킨다. 이 제왕과 공작들은 귀족 계층의 가장 높은 층위에서 뽑혔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렸으나, 대왕과 대왕이 이끄는 중앙 정부에 지위와 정치적 권위를 빚졌다. 이 제도를 '중앙집권적 봉건제centralized feudalism'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중세 후기 유럽에서 보이는 더욱 혼란스럽고 파편화된 정치·경제 체제, 즉 소위 봉토제seigneurie나 장원제manorialism와 분명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장원제는 실질적으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본질적으로 왕국이 사실상 독립적인 지방 '영지'들의 복합체로 파편화된 상태였다."(258-9)


"이들 게르만계 국가들에서 왕의 권위는 눈에 띄게 강화되었는데, 이는 권력이 전쟁기 같은 비상시에 한정되며 평화기에는 거의 존재감을 지니지 못했던 과거 게르만 세계의 레굴리(소왕들)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프랑크 메로베우스 왕조의 왕들은 그들이 모방한 내륙아시아 초원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통제력이 닿는 영토와 집단 모두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백성들의 신성한 회합을 주관하는 팅Thing의 왕, 즉 티우단스Thiudans와 전쟁을 담당하는 왕(레익스/둑스)을 따로 뽑는 등 '왕들'을 두는 공허한 게르만의 옛 관습은 사라졌다. 또한 반쯤 동등하고 거의 완전히 독립적이었던 여러 왕조의 소왕/수령들이 으레 왕의 권위를 제약하던 불안한 상황도 없어졌다. 그 대신 프랑크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공동통치의 원칙 속에 대왕이 형제/사촌들과 함께 통치하고 복속한 부왕과 공작들을 위한 명확한 중층의 서열 체계가 존재하는, 내륙아시아식으로 벼려진 왕권과 계급 제도였다."(261-2)


# 팅Thing 또는 딩ding이라 불리는 회의체는 남자들만이 참여하는 자유민 회의체로, 6세기까지 게르만계 부락 최고의 정치 단위였다.


"훈이나 다른 내륙아시아 집단들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프랑크의 집권 중인 대왕은 왕국을 분할하여 주요 영지를 형제와 사촌들에게 분배했다. 태조격인 킬데리쿠스가 죽은 뒤 이 과정의 작동을 볼 수 있다. 킬데리쿠스의 젊은 후계자인 클로도베쿠스는 세 사람, 시기베르투스Sigibertus와 카라리쿠스Chararicus, 라그나카리우스Ragnacharius와 함께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전의 아틸라와 마찬가지로 클로도베쿠스는 친척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대권을 장악했는데, 내륙아시아의 태니스트리 계승의 원칙을 따른 바였다. 이후로 메로베우스 왕조는 왕이 죽을 때마다 분할되었지만, 국가는 분열될 수 없다는 개념 자체는 불문不問으로 남았으니, 이 또한 훈 제국 등 내륙아시아 제국들의 역사에서 벌어진 현상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다. 특이한 점은 왕국이 (흉노 제국의 사례처럼) 넷으로 분할된 점인데, 과거 내륙아시아의 정치 관습이 또 한번 프랑크사에서 반복된 것이다."(262-3)


"이 모든 것이 프랑크인들이 내륙아시아 관행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시대 로마 제국이 시도했던 사두정tetrachy 또는 그 이후인 4세기와 5세기 제국을 4개 대관구praefectura praetorio로 구성한 로마 체제를 흉내 낸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여기에도 외견상 유사한 점이 있으나, 로마 제국에서 사두정은 고작 20년 지속된 단발성 실험이었고, 결국 실패한 뒤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로베우스 왕조 체제의 구체적 특성은 로마의 전례보다는 내륙아시아 정치 모델의 모방으로 보인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영토 분할은 행정적 고려보다는 왕가의 적법한 남성 구성원 모두가 영토에 지분을 가진다는 왕조 계승법이 가하는 압력에 의한 일이었다. 게다가 로마 제국에서는 왕실 구성원과 고위 귀족들에게 영토를 영지로 분배한다는 프랑크식 관행에 비견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관행은 분명 내륙아시아의 전임자들에 근거를 두었다."(265-6)


"더 확실한 것은 슬라브계 종족들에 미친 영향이다. 동유럽의 슬라브계 종족을 시작으로 동부 슬라브의 정치 문화는 초원 정치체가 제공하는 선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부 슬라브 최초의 정치체로 류리크조의 키예프 루시 국가로 더 잘 알려진 '루시' 카간국의 초창기에는 그 통치자들을 '카간'이라 불렀을 정도였다. 이 내륙아시아식 칭호는 아바르인들에 의해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고, 하자르인들 사이에서도 사용되었다. 심지어 후대인 볼로디매루Volodiměrǔ 같은 10세기 루시 통치자도 루시 사료에서는 '우리 카간'이라 지칭되었다. 루시 군주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아바르와 하자르 같은 초원 제국 전통의 합법적인 정치적 후계자로 보이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다." "루시의 귀족의회의 공동통치 관행 역시 튀르크-몽골의 쿠릴타이와 비슷한데, 이후 13~15세기에 몽골인들이 동슬라브에 미친 잘 알려진 영향력의 역사 이전에도 동슬라브에 내륙아시아가 방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272-3)


"훈의 문화적 영향을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 초원을 통해 내륙아시아의 물질문화 및 예술적 영향이 훈이 도래하기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유럽에 스며들고 있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헝가리부터 우크라이나까지 유럽 남동부 대부분은 서기전 1000년대 전반기에 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발원한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던 스키트에게 정복당했다. 스키트인들은 후일 훈이 알란과 고트를 격파하고 유럽에 진입하기 시작했던 곳과 정확히 같은 내륙아시아의 지점에서 나타난 것이다. 중부 유럽으로 처음 진입한 스키트인들은 사실상 후대의 훈과 아바르, 몽골의 전임자나 다름없었다. 내륙아시아의 모든 계승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키트는 유럽에 중대한 문화적 충격을 남겼는데, 이는 켈트 예술에 대한 스키트 예술의 영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내륙아시아 문화 요소들은 훈이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유럽 중부, 심지어 유럽 서부에서도 얼마간 예술 전통에 깊숙이 뿌리박힌 상태였다."(287)


맺음말


"훈 사람들은 서부 유라시아에 진정한 의미의 지정학적 혁명을 야기했다. 서부 유라시아는 훈 제국의 정복 이후 불가역적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분리되었다. 이것이 지중해의 패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서유럽의 독특한 세계라 할 수 있는 오늘날 '서구 세계'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 새 유럽의 정치·문화적 기풍은 내륙아시아의 훈/알란과 지중해의 그리스·로마, 게르만, 근동의 유대·기독교 전통과 문화가 복잡하게 뒤섞인 것이었다. 훈 사람들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서유럽 정체성의 탄생을 견인했다. 훈 제국의 대두는 또한 이후 1000년간 이어질 내륙아시아의 세계 패권 독점의 시작점으로, 짤막한 막간극을 거쳐 초기 근대 서유럽 열강의 대두까지 이어졌다. 요컨대 훈 집단은 근대 세계까지 이어질 유산을 남겼고,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고대 세계의 외양을 급진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제 훈을 비롯한 내륙아시아인들은 인류사에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고대 문명 중 하나로 응당 위치할 때가 되었다."(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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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당신의 뇌, 미래의 뇌
김대식 지음 / 해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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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장 보고 지각한다 : 시각과 인지


눈으로 어떤 물체를 보면 그 물체의 상이 망막에 맺히고, 망막에 있는 다양한 신경세포가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꿔줍니다. 전기 에너지로 바뀐 다음에 관련 정보가 스파이크를 일으켜 축삭이라는 전깃줄을 타고 뇌로 전달됩니다. 뇌 영역의 3분의 1 정도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데 사용됩니다. 실제 시각 영역은 스물다섯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면 그게 한꺼번에 보이잖아요? 지금 여러분이 저를 보면 그냥 보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 정보가 망막을 통해서 첫 번째 시각 뇌로 들어온 다음에는 이 정보가 다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영역에서는 형태만 분석해요. 다른 영역에서는 색깔만 분석하고, 또 다른 영역은 움직임만 분석합니다. 그 밖에 다른 영역들도 다 자기 고유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동일한 시각 정보가 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스물다섯 개의 축axis, 즉 25차원으로 나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색깔 따로 보고, 형태 따로 보고, 입체감 따로 보고, 움직임 따로 보고 하는 거죠. 21-2)


뇌과학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내 머리 안에 보이는 세상을 구별합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인식하는 과정을 감각sensation이라고 하죠. 그건 진짜 물리적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다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를 인식하는 것을 지각perception이라고 부릅니다. 대개 퀄리아qualia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대상을 바라볼 때의 주관적 체험, 예컨대 빨간 장미를 지각할 때의 주관적 느낌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볼 때의 느낌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객관적으로 계량하기 어려운 주관적인 체험을 ‘퀄리아’라고 합니다. 감각은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지만, 지각 또는 퀄리아는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타인이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없어요. 제 눈에는 제가 보는 세상만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보인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그냥 믿는 거예요. 의식이나 영혼,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은 내면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 느낄 수 있습니다. 24-5)


뇌를 연구하다 보면 가장 신기한 것은 뇌가 머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뇌가 머리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히 큰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뇌는 현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뜻하죠. 뇌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에요. 눈·코·입·귀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진화의 관점으로 보면 그 이유가 있을 거 같습니다. 지금 이 강의실을 예로 들어보죠. 강의실은 분명히 뇌 바깥에 있습니다. 강의실 안의 이 모습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여러분의 뇌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죠? 지금 머릿속에서 이 모습이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보고 생각할 때 뇌가 심장처럼 뛰면 뇌가 혼돈을 겪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뭐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뭐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인가?’ 이렇게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뇌는 안에서 일어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바깥에서 일어난다고 믿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뇌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거예요. 43)


우리가 뭔가를 보고 있으면 바깥에서 뇌로 그림이 하나씩 계속 들어오겠죠. 그렇게 한 장, 한 장 들어오는 그림을 있는 그대로 다 입력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보는 현실은 대부분 변화가 없거든요. 1초에 수백 장씩 천장, 천장, 천장, …… 이렇게 똑같은 정보가 계속 들어오는 건 뇌의 하드디스크를 낭비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은 그림이 뇌로 들어올 때 첫 번째 그림과 그다음 그림의 차이 값(미분)만 계산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책상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거기 앉은 사람이 움직였다면 그것만 입력하면 되는 거예요. 사람만 변화가 있었으니까요. 나머지는 어차피 이전 그림과 똑같아요. 그래서 뇌는 항상 정보 자체보다 정보의 차이에 반응합니다. 우리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와 오늘은 확률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제 빼기 오늘이 대부분 0이에요. 오늘 빼기 내일도 대부분 0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일상생활에 아무 변화가 없으면 뇌는 그냥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44-5)


망막 세포들이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고, 이제 스파이크를 축삭을 통해 뇌에 보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터널이 생겨요. 터널이 있다는 건 거기에 세포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영역이 하나 있습니다. 학교에서 맹점이라고 배웠을 거예요. 이 맹점이 꽤 큽니다. 엄청나게 큰 점이 보여야 하지만, 역시 뇌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뇌는 주변에 있는 정보들을 복사해서 맹점을 채워버립니다. 따라서 맹점 위치에 있는 정보는 주변의 복사판을 보고 있는 겁니다. 뇌는 눈·코·입·귀를 완전히 믿지 않으니까 늘 스파이크를 가지고 해석을 합니다. 즉 본다는 것 자체가 해석이라는 얘기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은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하고도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프리오리a priori, 선험적 기계가 늘 현실을 해석하다 보니까 어차피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고, 항상 해석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겁니다. 46-7)


현대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생각·기억·감정·인식의 대부분을 착시 현상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착시는 나쁘다, 안 좋다, 하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감이 전달해준 정보에 뇌의 해석이 플러스알파로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사실, 그 해석 없이는 세상을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현대 뇌과학은 매일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나’가 아니라고 합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망막을 관찰해보면, 망막에서 얻을 수 있는 데이터는 광자의 확률 분포밖에 없습니다. 색깔·형태·입체감 등은 대부분 뇌가 만들어낸 해석입니다. 어쨌든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눈을 통해서 들어오면 그 감각을 뇌가 해석하고, 우리는 그렇게 해석한 결과물을 보고 있는 겁니다.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인풋input이 아니라 아웃풋output입니다. 이미 뇌가 계산을 다 끝낸 결과물이라는 얘기죠. 고향이란, 뇌가 최적화된 환경입니다. 그래서 고향이 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54)


2장 느끼고 기억한다 : 감정과 기억


어떻게 보면 인생은 선택의 꼬리 물기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선택의 연속이죠. 뭘 먹을까? 어느 학교에 갈까? 누구랑 결혼할까? 어떤 자동차를 살까? 제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것도 선택이고,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선택이고, 노트에 필기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선택이고, 이 모든 게 다 선택이죠. 인간에게는 선호도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고, 가능한 한 좋아하는 걸 선택하려고 합니다. 당연하겠죠. 어쨌든 결론은 선호도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선택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들은 이 과정이 반대일 거라고 주장합니다. 즉 선택을 먼저하고 그다음에 선호도가 만들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선택이라는 건 단선적인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결정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한 프로세스를 포함하는 결정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에는 유전·교육·환경·책·TV에서 본 것 등등 수백, 수천 가지 요인이 있을 겁니다. 62-4)


몇 년 전에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할 때 실시했던 실험을 알아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이 대상입니다. 똑같은 커피를 두 잔에 나눠놓고, 하나는 2,000원, 다른 하나는 4,000원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똑같은 커피입니다. 마셔보고 어느 커피가 더 맛있는지 선택을 하라고 했습니다. 혀는 맛이 똑같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뇌는 우리 오감을 절대로 믿지 않거든요. 눈·코·입·귀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재해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재해석 과정에 자기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을 투영시킨다는 것입니다. 실험 참가자들이 생각하는 진실은 비싼 게 좋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분명히 혀는 똑같다고 신호를 보내요. 그런데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으로는 4,000원짜리가 더 좋아야 됩니다. 과학에서는 데이터와 모델이 일치하지 않으면 모델을 바꿉니다. 그런데 뇌는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뇌는 모델과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으면 데이터를 버려요. 65)


어떤 문제에 대응하는 뇌의 반응은 세 가지 이상입니다. 맨 밑에 있고 가장 오래된 ‘지금’ 위주의 뇌, 그 위로 ‘과거’와 ‘미래’ 위주의 뇌, 이 세 가지 뇌가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세 가지 이상의 자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혹시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중간중간에 이상한 녀석들도 많이 있을 테니까요. 운전을 예로 한번 들어볼게요. 운전은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시속 100킬로미터를 달리며 거울 세 개 봐야지, 핸들 조절해야지, 전방 주시해야지, 라디오 들어야지, 동승자와 얘기 나눠야지…… 이런 상태라면 운전자의 뇌 피질 용량은 꽉 차버립니다. 이럴 때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밑에서 웅크리고 있던 과거의 뇌와 지금의 뇌가 튀어나와서, 막 욕하고 난리가 납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 고개를 치켜드는 거죠. 그 행동은 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깊숙이 숨어 있던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이처럼 ‘인지적 사투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지적인 사투리를 연구하는 분야가 행동경제학입니다. 75)


1950년대만 해도 해마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병원은 환자 H. M.의 해마를 도려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H. M.은 수술하기 전까지의 기억은 다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수술 뒤 55년 동안 H. M.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면서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왜 병원에 있나요?” 거울을 보면 “난 열일곱 살인데 왜 이렇게 늙었나요?” 병원 측에서 설명을 해줬죠. 이러이러한 이유로 해마 제거 수술을 했다고. H. M.은 다 받아들이고 슬퍼했습니다. 지능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감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5분 후에는 똑같은 내용을 다시 물어봐요. 화장실 위치도 매번 가르쳐줘야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도 H. M.을 만날 때마다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자기소개를 해야 했습니다. H. M.처럼 기억이 망가진 사람에게 자아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계로 치면 H. M.은 5분마다 새로 껐다 켜지는 거잖아요? 이 사람은 기억을 연결할 수 없었습니다. 84)


종과 음식을 계속 보여주면 이 종에 대한 정보와 음식에 대한 정보가 시냅스로 연결되겠죠. 그런데 정보가 동시에 도착하면 이 시냅스가 더 강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음식 없이 종에 관한 정보만 들어와도 머릿속에서는 음식이 만들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해마에서 일어납니다. 파블로프(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건화가 이루어진다)나 스키너(조건화, 즉 적절한 자극들 간의 연결을 통해서 원하는 행동을 만들 수 있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중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시간적인 자극과 자극 간의 상호 관계가 반복되면 시냅스가 강해져서, 한 가지 자극만 들어와도 나머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자동으로 만들어집니다. 우리 뇌 안에 있는 모든 정보는 시냅스와 시냅스가 강화된 상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게 기억입니다. 기억은 하드디스크 어딘가에 쓰여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은 이미 존재하는 정보에 새 정보를 연결시켜주는 것입니다. 87-8)


3장 뇌를 읽고 뇌에 쓴다 : 뇌과학의 미래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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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교류사
정수일 지음 / 사계절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서장 문명과 문명교류 


"문명(civilization)이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하여 창출된 결과물(結果物)의 총체로서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으로 대별된다. 문명의 생명은 공유성(共有性)이다. 인류 문명은 자생(自生)과 모방(模倣)에 의해 탄생하고 발달하며 풍부해진다. 자생성은 문명의 내재적이고 구심적인 속성으로 문명의 보편성(普遍性)과 개별성(個別性)을 규제하고, 모방성은 문명의 외연적(外延的)이고 원심적(遠心的)인 속성으로서 문명의 전파성(傳播性)과 수용성(受容性)을 결과한다. 따라서 자생성과 모방성은 문명의 2대 속성이자 그 발생·발달의 2대 요소이며, 서로 상보상조적 관계에 있다. 문명의 모방은 그것이 창조적인 모방이건 기계적(답습적)인 모방이건 간에 문명 간의 교류를 통한 전파와 수용 과정에서 현실화된다. 따라서 교류는 모방에 의한 문명의 발달을 촉진하는 필수불가결의 매체다. 그런데 이러한 교류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문명의 교류를 실현 가능케 한 이 유한한 통로가 바로 실크로드다."(22-3)


1장_문명교류의 시원 


"후기 구석기 시대(3만 5천~1만 2천 년 전)의 문명교류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바로 이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너스상(Venus, 여인 나체상)이다." "대체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예술은 동물을 형상화하는 애니미즘(animism)이 주제로 채택됨으로써 인물을 독립적으로 부각시키는 경우가 흔치 않으나, 비너스상의 경우는 이와 달리 여러 가지 형상을 구비한 인물(여인)이 독자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너스상이 의미와 용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는 (당시 여성의 미의식을 보여주는) 사실적 작품이라는 견해다. 둘째는 호신(護身)의 부적(符籍)이라는 상징적 의미다. 셋째는 가족이나 종족의 수호신(守護神)이라는 견해다. 넷째로 무녀상(巫女像)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회 진화 과정에서 부권(父權)에 비해 여권(女權)이 선행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비너스 여인상은 그것이 어떠한 의의를 지녔든간에 여성(모성)에 대한 추앙과 숭상을 뜻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49-53)


2장 신석기 문화의 교류 


"신석기 문화권 중 첫 번째인 거석(巨石) 문화권은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권으로서 그 특색은 각종 거석 구조물이다. 두번째 즐문토기 문화권은 발틱 해로부터 시베리아 및 북미에 이르는 추운 산림 지대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를 주생업으로 하는 인간들이 창조한 문화권으로서, 그 특색은 빗살 모양의 선(線) 무늬가 있는 이른바 즐문토기(pit-cambwere)와 골기다. 세번째 채도 문화권은 동유럽으로부터 서남아시아·동북아시아 등 기후가 따뜻하고 계절풍으로 인해 우량이 풍부한 습윤 지대의 문화권이다.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마제석기와 색깔 무늬가 있는 채도(彩陶, 彩文土器)가 발견되는 것이 이 문화권의 특색이다. 네번째 세석기 문화권은 몽골고원·투르키스탄·남러시아·이란 고원·아라비아·북아프리카 등의 건조한 초원 지대에서 발생한 문화권이다. 이 문화권의 특색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렵한 짐승의 껍질을 벗기고 뼈를 자르며 살을 베는 데 편리한 세석기를 제작하였다는 것이다."(73-4)


3장_청동기 문화의 교류 


"청동기 시대의 인류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첫째, 청동기 시대가 시간적으로 극히 짧아(2~3천 년) 시대성을 결여한다는 데 있다. 둘째, 청동기 시대는 하나의 과도기로서 성격이 불투명하다. 이 시기는 금속이 처음 사용된 시대로서, 물론 청동기가 금속으로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청동 외에 금이나 철 등 여러 가지 금속이 병용되고 있다. 거기에 오랜 세월 물 젖어 온 석기 문화가 여전히 유행하고 있어 사실상 금석병용(金石竝用)과 다금속(多金屬) 시대라 할 수 있다." "셋째, 청동기 시대 설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청동기의 편재성과 공유성의 결여라는 사실에 있다. 이때까지 메소포타미아·이란·중국 등 고대 문명 국가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은 거개가 사회 상층들의 활동이나 생활에 필요한 제기나 용기 및 장신구에 국한된 것으로서 사회의 상·하층 전체를 망라하고, 그래서 보편적인 실용 가치가 있는 이른바 문화의 편재성이나 공유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132)


4장 보석 문화의 교류 


"일반적으로 보석은 귀중한 장식품으로서 인간의 미의식(美意識)을 촉발하고 복식 문화(復飾文化)와 환경 장식 문화(環境裝飾文化)를 풍부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유리를 비롯한 일부 보석은 생활 용기의 소재로도 활용되어 생활 문화를 윤택하게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옥(玉)이 인(仁)·진(眞)·지(智)·의(義)·공정(公正)의 '오덕(五德)'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대단히 소중히 여기고, 부적(符籍)이나 방부(防腐)·초혼(招魂) 등의 효능을 가진 신물(神物)로서 신성시하였다. 고대 인도에서는 루비를 건강과 지혜·부·행복을 가져오고, 중세 유럽에서는 해독을 시키고 벼락을 멀리한다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사파이어는 하늘빛을 나타내므로 그것을 지니면 정신과 육체를 건전하게 하며, 암흑의 정령을 퇴치하고 빛과 짛몌의 정령이 도와준다고 여겨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것을 가락지에 장식하였다. 다이아몬드는 보석 중에서도 가장 굳기 때문에 그것을 지니면 여자의 정조가 불변한다고 생각하는 민족도 있었다."(157)


"보석 문화의 교류사를 통관하면 기타 문화교류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 특징은 우선, 교류의 한계성(限界性)이다. 이러한 한계성은 희귀 광물로서의 보석의 산출지와 산출량이 극히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그 문화의 수용자나 향유자는 상층부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문명 현상으로서는 공유성(共有性)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특징은 교류의 복합성(複合性)이다. 보석은 주로 장식용으로 쓰이지만 생활 용기로서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미적 의식을 함양하는 정신 문명의 한 요소인 동시에 인간의 물질 생활과 직결되는 물질문명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 특징은 교류의 명증성(明證性)이다. 보석은 견고하고 불변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석만큼 확실한 문화 유물이 없다. 자고로 희귀한 보석은 대체로 그 산출지가 밝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의 출처나 이동 과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161-2)


5장 유목기마민족과 문명교류 


"스키타이란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흑해 연안의 초원 지대에 살면서, 특히 기원전 6~4세기에 이 지대를 지배했던 이란계의 언어를 사용한 유목민을 지칭한다. 이것이 본래 의미(좁은 의미)에서의 스키타이이나, 스키타이가 강성해지면서 활동 영역이 확대되자 그 치하에 있던 유목민도 일괄해서 스키타이라고 지칭(넓은 의미)하기도 한다. 본래 페르시아의 북동과 북서 지방에 거주하다가 아랄 해 이동의 카자흐 초원과 키르키스 초원, 천산 지방으로 이동한 이란계 유목민인 사카족도 넓은 의미에서 스키타이로 부른다." "북방 최대 세력이 된 스키타이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오리엔트 지역에서 1세기에 걸쳐 종횡무진으로 행한 공포정치와 무력행사는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심지어 이집트의 파라오까지도 스키타이 지배층에 많은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횡포와 약탈이 그들의 생존 전략이나 생계 수단일 수도 있었다."(230, 236)


"그러나 그것은 필연코 주변 국가들과 마찰을 빚었고 스키타이가 쇠퇴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원전 512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단행한 원정으로 인해 스키타이는 코카서스 산맥 이남과 다뉴브 강 하류 지역으로 한때 쫓겨난 적이 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 초 동쪽에서는 볼가 강 중류에서 흥기한 유목민 사르마트(Sarmart) 족이 서진해 스키타이 요새인 쿠반 강 유역을 점령하고, 서쪽에서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온 켈트(Celt) 족이 공격해 옴으로써 동서 협공에 직면한 스키타이는 드네프르 강 일대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어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사르마트인들이 다시 돈 강을 넘어 진공해 오자, 스키타이는 드네프르 강 유역을 포기하고 크리미아 반도로 도피했다. 거기에서 네아폴리스(Neapolis)를 수도로 하는 소국을 건설하고 정착하여 농경 생활로 잔명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1세기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스키타이란 이름은 영영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237)


"스키타이는 비록 강력한 세력으로 수세기 동안 동분서주하였지만 한 번도 통일된 국가를 건립하지 못하고 그저 여러 유목 부족들의 공동체로서 존재하였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키타이 사회는 총체적으로 왕족(王族) 스키타이(돈 강 하류에서 쿠반 강 유역), 혼혈 스키타이(그레코스키타이, 드네프르 강 하류), 농경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중류), 유목(목축)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동쪽)의 4개 집단(부족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왕족 스키타이가 지배 집단으로서 각지에 태수(太守)를 파견해 부족장을 통솔하였다. 왕족 스키타이와 유목 스키타이는 기마에 능하여 주변 그리스 식민지들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스키타이의 동방 교역과 그 루트를 추정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생산하거나 페르시아와 그리스에서 수입한 공예품이나 장신구들을 동방에 수출하고, 알타이 지방에서 채취되는 황금이나 중국과 몽골 일대에서 생산되는 직물류를 서방으로 운반하는 일종의 중계무역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237-8, 245)


"흉노는 어원부터가 아직 미상이다.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다고 본다. 문제는 '노(奴)'자인데, 대체로 이 글자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지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세등등하던 흉노가 자신들에 대한 이러한 비칭(卑稱)을 허용했을 리 만무하며, '흉'자란 흉노어(퉁구스어) 글자에 '노(奴)'자란 한자를 결합시키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흉노족이란 어떤 단일한 씨족이나 부족에게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선대(先代)의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총체(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흉노족 형성 과정에서 '흉노'라는 한 종족 집단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 이름 아래 여타 종족과 씨족들을 망라시킨 것으로 추정된다."(252-4)


"훈과 흉노의 역사를 한 맥락에 놓고 유럽 일원에서의 훈의 활동을 고찰하는 것은 유라시아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흉노 이전에 유라시아를 무대로 동분서주한 유목기마민족들은 아직 통일된 국가권력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고, 활동력도 미약하였기 때문에 문명교류에 미친 그들의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흉노는 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정치권력에 의한 유목기마민족 통일국가를 세우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북부 일원에서 400여 년 간 여러 유목 문화는 물론 중국 중원을 비롯한 농경 문화와도 접촉하여 민족 구성만큼이나 문화 구성도 복잡다단하였다. 이러한 복합 문화의 소유자인 흉노가 유럽에 나타나서는 강력한 훈제국을 건립하고 유럽 고전 문화나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와도 융합하여 특유의 훈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훈제국의 흥망성쇠는 총체적 흉노 역사의 한 부분이며 그 연장으로서 반드시 밝혀져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273)


"흉노에 의한 동서교류는 우선 스키타이 유목 문화를 동전(東傳)시킨 데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르도스(수원) 청동기 문화다. 이것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청동기 문화를 수용한 후 가일층 발전시킨 문화로서 동북아시아 청동기 문화의 출현과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다음으로 '호한(胡漢) 문화'의 창출을 꼽을 수 있다. 호한 문화는 수원 청동기 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연속선상의 계승 문화, 혹은 발전 문화로서 한(漢) 문화적 요소가 뚜렷한 것이 그 특징이다." "한대 중국 문물과 그 방조품(한경鏡, 옥구검, 한견絹, 한식궁弓 등)이 볼가 강 하류 지역(한식궁과 한경)이나 북코카서스(한경), 크리미아 반도(옥구검과 한견), 헝가리(한식궁과 한경·흉노식 동복) 등지에서 다량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지역이 훈의 유럽 활동 시대의 요지였다는 유럽 사서의 소전(所傳)과도 부합된다. 또한 이는 흉노~훈~아바르로 이어지는 동방 문명의 서전(西傳)상을 시사해 준다."(291-3, 306-7)


6장 로마와 한(漢)의 교류 


"로마와 한의 교역은 일시에 직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교역을 중간에서 차단하던 세력인 파르티아(安息)를 제압·제거하고 인도와의 교역을 성사시킨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추진해 온 것이다. 이 과정은 곧 로마 세력의 동점 과정이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와 장기간의 쟁탈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지중해-홍해를 통해 인도와의 교역을 계속하고 있었다. 기원 초기 로마와 한 간의 교역은 인도 서해안의 여러 항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간접교역·중계무역으로서 주로 중국산 견직물이나 생사·모피·육계 등의 물품을 로마로 수출하였다. 로마와 한 간의 교역 중계지였던 인도(파키스탄 포함) 경내,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1~5세기의 로마 화폐(금·은화)가 다량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하여 로마와 인도 간에 활발했던 무역상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역의 연장선상에서 인도와 한 간에도 교역이 진행되었던 것이다."(337, 340-3)


"기원을 전후한 시기 로마와 한 간에는 인도를 중계지로 한 간접 교역뿐만 아니라, 육·해로를 통한 직접 교역과 인적 내왕도 진행되었음을 여러 문헌 기록과 유물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한금(漢錦, 한대의 비단)이 로마로 다량 수출되었다. 기원전 31년부터 기원후 192년까지 220년 동안 로마가 비단 교역을 주종으로 한 동방 무역으로 소모한 재정은 막대한 양이었다. 로마 제국의 쇠퇴를 초래한 재정적 고갈 요인 중에서 비단 구입으로 인한 지출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남해로를 통한 로마와 한 간의 간접 교역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적이 바로 기원후 1~6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존재했던 부남국(扶南國)의 옥에오(Oc-éo) 유적이다. 옥에오 유적에서 로마와 한의 유물이 동시에 발견된 것이다. 이 유물들이 보여주다시피 기원 전후 인도차이나 반도는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의 접촉지였으며, 인도를 매개로 동점한 로마 문화는 이 반도에서 처음으로 한 문화와 만나서 교류하게 된다."(343-4, 347, 350-2)


"헬레니즘에 의한 동서 문명의 융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정치제도나 이념에서의 융합이다. 고전 그리스는 전형적인 도시 문화 국가로서 정복지 곳곳에 그리스식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민 대표제 등 그리스식 시민사회의 행정제도를 채택하고 산업구조도 그리스식으로 조정하였다 그러나 총체적인 중앙 권력구조는 (현지 전승을 따라) 오리엔트식 전제주의적 왕권제도를 답습하였다." "다음으로 두드러진 특징은 문화적 융합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融合, fusion)으로 인해 산생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다. 즉 비록 정복 문화이지만 그리스 문화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오리엔트 토착 문화를 흡수·결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융합은 종교에서도 나타났다. 곳곳에서 그리스 신과 아시아 신이 혼합된 이른바 제신습합(諸神習合, syncretism)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다."(362-3)


"간다라 미술의 특징은 한마디로 불상의 제작이다. 초기 불교도들은 부처를 너무나 숭배한 나머지 감히 인간 형체의 불상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불타(佛陀)를 단지 발자국 혹은 빈 좌석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현지의 그리스인들은 신을 인간과 똑같은 형체로 만들어 숭상하고 인간의 육체나 정신과 똑같은 속성을 신에게 부여하여 신상(神像)을 제작하고 그를 숭상하고 있었다. 이 영향을 받아 불교도들도 처음으로 불상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무형적(無形的)인 불교 정신이 그리스 조각으로 말미암아 유형적인 예배 대상을 얻게 되었다. 불전도(佛傳圖)의 주역으로서의 석존상(釋尊像)이 차차 독립된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상으로 제작되기에 이른 것이다. 아울러 석존상을 그의 초인간적 존재로서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조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특별한 형상(形相)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약속이 이루어졌다. 이 약속을 불교에서는 32상(相)·80종호(種好)라고 한다."(364)


7장 서역 개통과 문명교류 


"기원전 138년 장건이 처음 대월지에 파견된 때로부터 기원후 102년 반초가 귀조할 때까지 약 240년 간을 서역 개통기라고 말할 수 있다." "선사 시대부터 기원 전후 오아시스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의 동서문명 교류는 주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스텝) 지대(북위 50도 부근)를 횡단하는 이른바 초원로를 따라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통로의 연변에서 생성된 문명은 전반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비교적 발달된 서남아시아나 서아시아 문명권과 지리적으로 멀었고, 노정도 불편했다." "동서 문명의 직접적 만남을 가로막는 요인은 바로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파미르 고원이 가운데에 우뚝 솟아 험난한 장벽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건이 처음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그 이서에 있는 서역 제국을 역방하고 돌아옴으로써 중세동서문명교류의 동맥인 오아시스로가 트이게 되었고, 반초 부자의 서역 경영으로 인해 이 길은 더욱 활짝 열리게 되었다."(421, 426-7)


"서역 개통이 계기가 되어 중국에 유입된 서역 문물 중에서 사회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은 말이었다. 중국에도 고대로부터 말은 있었으나 서역마와 같은 양마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한대에 이르러 우수한 서역마를 알게 되자, 대량 수입하여 주로 전마(戰馬)로 쓰는 한편 재래마를 개종하는 데도 이용하였다." "서역으로부터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래된 문물 중에서 오늘날까지 뚜렷한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유리다. 본래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에 유리가 출현하였다. 이집트 유리 제품의 수입은 대체로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5~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중국에서도 일찍 유리가 생산되기는 하였으나 백색 투명하고 다양한 무늬를 가진 이집트 유리와는 그 품질에서 필적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대부터 이집트 유리는 옥정(玉晶)·수정(水晶)이란 별칭으로까지 불리면서 귀족 부호들의 진귀한 사치품과 장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428, 431-2, 435)


8장 종교의 교류 


"원래 불교는 브라만에 의해 형성된 계급 제도와 번다한 제식만능주의(祭式萬能主義)를 배격하고 중도 사상에 바탕한 만민평등주의를 제창한 일종의 반(反)브라마시즘적인 개혁 종교였다. 그러나 신분 제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힌두즘의 중심 사상이자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 이념인 윤회와 업(業) 사상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신분 제도를 무시하면서 누구나 불타가 될 수 있다던 불교 본래의 평등 사상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에 빠져 차차 퇴색해 가고 있었다. 여기에 본래 무신론 종교였던 불교[특히 대승 불교]가 우주에 천국과 지옥을 설정하고 성자(聖者)를 모시며 향과 촛불, 성수(聖水)로 예불을 하는 등 붓다를 중생 구제를 위한 신의 화신으로 되게 함으로써 힌두즘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모 과정에 덧붙여 대승 불교의 진언(眞言, mantra)과 다라니(dhārānī)에 힌두교적인 신앙과 의식을 가미한 밀교의 출현(7세기경)은 궁극적으로 불교의 변질을 가속화하였다."(472)


"불교의 전파는 다른 종교, 특히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보편 종교의 전파와 비교해 보면 그 과정이나 결과에서 일련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는 당초부터 분파권적(分派圈的)으로 전파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3세기 실론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전파된 불교는 시종상좌부 불교(Theravāda, 일명 소승 불교)이고, 기원 1세기를 전후하여 서역과 동북아시아 일대에 전파되기 시작한 불교는 대승 불교(Mahāyāna)였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강한 변용성(變容性)이다. 불교는 발원지인 인도에서의 생존 과정에서 융화성(融化性)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전파 과정에서도 상당한 변용성을 나타냈다. 이것은 발원지를 떠난 외래 종교였지만 불교가 쉽게 이방에 정착하고 생명력을 유지토록 한 요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불교 전파의 특징은 그 방도(수단)에서 평화적이란 점이다. 실제로 불교 전파사를 살펴보면 전파를 위한 소위 '성전(聖戰)' 같은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473-4)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서 티벳 불교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철학적인 중국 불교를 밀어낸 밀교 전법승들은 밀법(密法)에 의해 악마를 조복(調伏)하고 기적을 행함으로써 민심을 선도하였다. 이러한 밀법은 전통적인 티벳의 종교 관행과 융합됨으로써 티벳 특유의 밀교를 창출하게 되었다. 티벳에는 원래 본(Bon) 교라는 샤머니즘적인 종교가 전승되어 왔다. '본'이란 티벳어로 '외치는' 사람, 또는 '신을 부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교의 샤먼(Shaman)은 검은 모자를 쓰고 북을 치면서 인간에게 폭풍우와 질병 등의 재앙을 가져다주는 악마와 싸움을 벌이다가 종당에는 자신의 요술 그물로 악마를 격퇴한다. 샤먼은 또한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 올라가서는 눈 덮인 산에 살고 있는 신들의 계시를 구하며, 그 계시를 어떤 신물(神物)이 자기에게 접했다고 생각하는 빙의(憑依)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곤 한다. 이러한 물합 결과 티벳 풍토에 적합한 밀교, 즉 라마(Lama)교가 마침내 성립되었다."(504-6)


# 이러한 타락과 변질을 막기 위해 일어난 것이 14세기의 불교 운동이다. 이 개혁을 통해 확립된 것이 정교합일의 달라이라마(Dalai-bla-ma) 체제이다. 


"'역대 기독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 전도열이 가장 강한' 네스토리우스파는 중앙아시아에 메르브를 비롯한 전도 교회 기지를 도처에 꾸리고 포교에 진력하였다." "6세기 중엽에 네스토리우스파 교주 마르 아바 1세(Mar Abba Ⅰ)는 옥서스 강 유역과 고대 박트리아 지방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에프탈족과 돌궐족들을 교화하였다. 이를 계기로 7세기경 옥서스 강 유역에서는 전도가 활발히 진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 전도사들은 대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과 기술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문화 개발과 계몽에도 일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에프탈 문자와 돌궐 문자를 창제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고대 동방 기독교는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거쳐 천산 산맥의 북록(北麓) 및 타림 분지로 확산되었고, 그곳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판단된다."(566-9)


"이른바 경교로 명명된 고대 동방 기독교의 대당 전도에 관해서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를 통해 그 실상을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비문에서는 예수의 인격을 〈삼위일체의 분신인 경대지존(景大至尊)하신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 구세주〉로 규정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과 동일한 육신이 되어 강림[同人出代]〉하였으며, 〈천사가 경사를 선고하자, 실녀(室女, 즉 처녀, 동정녀)가 대진(大秦)에서 성주(聖主, 즉 예수)를 탄생하시었다[神天宣慶 室女誕聖]〉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명시하고 마리아의 신성마저도 긍정하고 있다. 이것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였고 성령에 의하여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는 정의와 신통하게도 일맥상통한다. 비문에 나타난 그리스도나 마리아의 이러한 인격론을 감안할 때, 오해 받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인성강조설이나 신성부정설은 경교의 교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일견하여 알 수 있다."(573, 579-80)


9장 고대의 실크로드 


"실크로드 개념은 몇 단계를 거쳐 확대되어 왔다. 그 첫 단계는 중국-인도로(路) 단계다. 이 단계는 1877년 리흐트호펜이 최초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트란스옥시아나와 서북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실크로드라고 명명함으로써 실크로드란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단계다. 둘째 단계는 중국-시리아로 단계다. 고고학자들이 지중해 동안의 시리아 팔미라에서까지 중국 비단 유물을 다량 발견한 사실을 감안해 비단 교역 길을 시리아까지 연장하여 실크로드라고 재천명하였다." "셋째 단계는 3대 간선로(幹線路) 단계다. 2차 세계대전 후 학계에서는 선행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오아시스로의 동·서단(東·西端)을 각각 중국 이동의 한국과 일본 및 로마까지로 연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의 포괄 범위를 크게 확장하였다. 즉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 지대를 지나는 초원로(스텝로)와 지중해부터 중국 남해에 이르는 해로까지를 포함시켜 동서를 관통하는 이른바 '3대 간선'으로 그 개념을 확대한 것이다."(608-9)


"마지막 넷째 단계는 환지구로(環地球路) 단계다. 1492년 콜럼버스가 칼리비아 해에 도착한 데 이어 마젤란 일행이 1519~1522년에 에스파냐→남미의 남단→필리핀→인도양→아프리카 남단→에스파냐로 이어지는 세계 일주 항해를 단행함으로써 신대륙으로 가는 바닷길이 트이게 되었다. 또한 16세기부터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들이 필리핀 마닐라를 중간 기착점으로 하여 중국의 비단을 중남미에 수출하고 중남미의 백은(白銀)을 아시아와 유럽에 수출하는 등 신·구대륙 간에는 '태평양 비단길' '백은길'이 트이게 되어 이른바 '대범선(大帆船) 무역'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두 대륙 간의 문물교류도 꼽을 수 있다. 항해로가 개척되고 교역이 진행되면서 고구마·감자·옥수수·낙화생·담배·해바라기 등 신대륙 특유의 농작물이 아시아와 유럽 각지에 유입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감안할 때 비록 해로의 단선적인 연장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문명교류의 통로는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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