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 민족들의 교차로 


"중세와 현대의 〈민족〉들은 보통 여러 종족과 언어 집단이 오랜 시간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특히 현대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민족〉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언어가 확산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정복, 대규모 이동, 이에 따른 전면적 민족 교체가 언어 확산의 한 가지 모델이다. 또 다른 모델은 점진적 침투, 상호 영향, 이에 따른 두 언어 상용bilingualism이다. 그런데 새 언어를 전파하는 이주민들 또한 많은 경우 여러 민족과 언어의 융합으로 형성된 집단이었다. 새로운 민족 이동과 함께, 이 집단에서 사용하는 이름과 언어가 릴레이 경주처럼 또 다른 집단에 이전되었다. 따라서 동일한 집단명과 공통 언어를 가진 민족들도 사실은 여러 다양한 민족의 혼합 집단일 수 있다. 민족들의 이동은 복잡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민족·언어 지도는 수천 년 넘게 이어져온 민족들의 혼합 과정을 한 특정 시점에 찍은 스냅 사진에 불과하다. 민족들의 형성 과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23-4)


1장 유목 생활과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출현 


"기원전 제2천년기 초(약 기원전 1700~기원전 1500년 사이)에 스텝 지역에 거주하던 목축인들 중 일부가 기마민족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이동에 더 잘 적응하는 말과 양이 선호되면서 목축하는 가축의 구성도 바뀌었다. 말이 전체 가축의 36퍼센트를 차지했다. 마력馬力의 활용은 불길한 군사적 결과를 불러왔다. 기마전투술을 발전시킨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은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바퀴 달린 수레에 이어 아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 전차가 등장했다. 기원전 약 2000년경 만들어진 초기 형태의 전차들이 요새화된 정착지였던 신타시타에서 발견되었다. 신타시타는 남부 우랄 스텝 지역에 위치한 신타시타-아르카임 페트로브카 고고유적군에 속해 있다. 잘 발전된 야금술(아마 무기 생산 및 군사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을 보유했던 신타시타는 이 스텝 지역에 존재했던 도시 정착지들의 일부였다. 기원전 제2천년기가 되어 전차는 중국과 중동에 전파되었다."(31-2)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의 민족 이동 두 번째 단계는 나무, 동물의 뿔과 힘줄로 만든 복합궁compound bow/composite bow의 발명과 연관이 있다. 복합궁은 강력하고, 상대적으로 작고, 가장 중요하게는, 말 위에서 쉽게 모든 방향으로 화살을 쏠 수 있어 스텝 지역에서 전쟁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복합궁은 기원전 제3천년기 초 이집트에서 처음 발명된 듯한데, 그 시점을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기마 전사들이 잘 훈련된 기병대로 발전했다. 이 기병대는 영광을 추구하는 개별 전투원이라기보다 전사란, 훈련된 집단의 일부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군대였다. 그 결과 전차는 과거의 기술이 되었다. 이에 수반된 철제 무기의 확산을 통해 기마병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스텝 지역의 이웃 유목민들을 약탈 공격 하고 정주 세계의 생산물들을 획득하려 하게 되면서 전쟁은 격화되었다. 이제 전쟁이 더 큰 규모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거대한 부족연합들이 출현했다."(32)


"유목민들이 정주 세계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유목민 집단(씨족, 부족, 혹은 민족)을 대변해줄 자가 필요했다. 이것은 곧 정치 조직을 의미했다. 영구적 국경이 없는 유목사회에서는 친족 관계가, 그것이 진정한 관계건 〈지어낸〉 관계건 간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속력을 제공했다." "유목 세계에서 국가의 존재는 예외적 현상이었다. 유목민들은 중국의 부를 탈취하기 위해 혹은 간혹 이루어진 중국의 무력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를 건설했다. 이러한 외적 자극들은 서부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의 유목국가들은 예외 없이 동부 유라시아 초원에서 이동해온 국가들이었다. 유목민들은 보통 정주사회들을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이슬람 이전 시기의 이란과 같은 이웃 정주제국들도 스텝 지역을 정복하려 들지 않았고 이따금 공격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군사 원정은 비용이 많이 들고 또 위험했다. 중국과 비잔티움은 매수, 외교,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선호했다."(38-9)


"초기의 유목민들은 필요한 물품의 교역 활동 외에는 중앙아시아 도시들과의 관계를 꺼렸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더 큰 정치 단위들의 일부로 만든 것은 유목민들이었다. 원래 지리적, 안보적 제약 때문에 유목민들의 가장 흔한 정치 조직은 느슨한 연합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의 정주 지역]의 오아시스들은 본래 이란어를 사용하고, 독립 성향이 강하고, 국제적이며, 귀족적이고, 상업 중심적인 도시국가들이었다. 각국은 〈동등한 사람들 중 우두머리first among equals〉에 불과했던 군주의 지배를 받았다. 상업 중심적이고 부유했던 도시국가들은 초대륙적 성격의 상업적, 지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활기찬 문화를 창출했다. 이 도시국가들은 정치적 지배가 아닌 상업적, 문화적 교환을 추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상인, 관료, 종교인들은 유목제국의 행정과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과 유목국가들의 이런 관계는 서로에게 이로웠다."(43)


2장 초기의 유목민들: “전쟁은 그들의 직업이다” 


"근동 지역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사상 최초의 대大육상제국을 세운 페르시아인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9~기원전 530)가 중앙아시아를 침공했다. 그는 박트리아, 소그디아, 화라즘을 복속시켰으나 기원전 530년 스키타이 원정 중 사망했다. 키루스 2세가 끔찍하게 사망한 후 8년 뒤에 권좌에 오른 다리우스 1세Darius Ⅰ(재위 기원전 522~기원전 486)는 그리스는 정복하지 못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일부 유목 민족들을 정복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기아나(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소그디아, 화라즘, 박트리아 등은 알렉산더 대왕(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이 기원전 330~기원전 329년에 중앙아시아를 정복할 때까지 협상을 통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사트라페이아satrapy' 즉 총독령(지방)이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 하에서 이란권 중앙아시아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장거리 교역 네트워크에 연결되었다. 교역은 도시 발전과 대규모 수로 시스템에 기반을 둔 농경의 확대를 촉진했다."(58-9)


"흉노는 〈국가〉 혹은 더 나아가 〈제국〉이라고 보통 불렸지만 사실은 부족연합에 가까웠다. 선우는 군사, 외교, 사법, 그리고 이에 더해 제사장 관련 직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최고 경영자였다. 선우 밑에는 좌익과 우익에 24명의 〈현왕賢王〉들이 있었고, 또 다른 24명의 수령들이 각각 1만 기의 병사를 거느렸다. 이 〈제국적 연합〉은 유연하고 협의를 통해 기능하는 정치 조직이었으며 부족과 씨족들에게 상당한 자치를 허용했다." "흉노는 자국 지배하의 정주 지역에서 공물을 징수하고 주민들을 노동에 동원했다. 유목민을 상대로 흉노는 매년 가을철에 호구戶口와 그 가축 수를 조사하는 것 말고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유목민 사회의 유연성은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빈번한 파벌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앙정부가 정주 세계의 물자를 효과적으로 착취해내는 군사적, 외교적 승리들을 거두어나가는 동안에는 잘 작동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부 혼란을 발생시켰다."(67-8)


"쿠샨 제국은 그 전성기에 박트리아, 동이란 일부, 동서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했던 쿠샨 제국은 여러 문화를 훌륭하게 융합했다. 초기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어가 공식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 문자로 적은 현지의 동이란계 언어였던 박트리아어가 사용되었다. 주로 금 또는 구리로 만든 쿠샨 제국의 주화들은 한 면에는 이란, 인도, 그리스의 신들의 모습이, 다른 한 면에는 통치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이 주화들과 다양한 신들의 작은 조각상들은 쿠샨 제국 내에서 조로아스터교, 토착 종교,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가 공존했음을 알려 준다. 일부 쿠샨 지배자들은 남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확산된 불교를 후원·장려했다. 불교 사원과 수도원은 이슬람 이전 시기 아프가니스탄의 흔한 풍경이었다. 쿠샨의 간다라 양식은 훗날 동서 투르키스탄으로 전파되었다."(69-71)


3장 하늘의 카간들: 돌궐 제국과 그 계승 국가들 


"흉노와 한의 멸망이 불러온 정치적 혼란기 이후 중앙아시아에 세 강국이 출현했다. 곧 북중국의 타브가츠Tabghach(중국어 명칭, 탁발Tuoba, 拓跋), 몽골 초원의 아바르Avar(중국어 명칭, 유연Rouran, 柔然), 쿠샨 땅의 헤프탈Hephthalites(중국어 명칭, 활Hua, 滑)이다." "이 북위, 유연, 헤프탈은 당시 유라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연과 북위 사이의 전쟁은 유목민들의 서진을 불러왔는데, 이러한 민족 이동은 원래 이란어 사용 지역이었던 내륙아시아 초원을 점차 투르크화시켰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에는 중국어로 철륵Tiělè, 鐵勒이라는 투르크계 유목민족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철륵의 한 갈래인 오구르 투르크족은 460년경 흑해 초원에 도달했다. 유연의 아나괴Anagui, 阿那瓌(520~552)는 철륵의 반란과 내분으로 북위에 원조를 청했으나 북위 또한 534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정치적 혼란 상황은 돌궐 제국Türk Empire, 突厥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79, 83)


# 이 책에서 Türk로 표기된 투르크인은 이 집단명을 사용했던 특정 민족 곧 돌궐인을 지칭한다. Turk와 Turkic은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을 통칭하는 용어들이다.


"돌궐 제국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최초의 유라시아 횡단 국가였다. 돌궐 제국은 행정적으로는 동부[동돌궐]과 서부[서돌궐] 두 개의 카간국으로 나뉘었다. 아시나 가문의 카간들이 두 카간국을 통치했는데 동부의 카간이 서부의 카간보다 정치적으로 더 지위가 높았다. 서돌궐의 군주 이슈테미의 후계자들은 때때로 동돌궐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이는 〈적법한〉 행위였던 것이,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유목국가들에선 왕족 구성원 모두에게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수隋가 581년 패권을 잡으며 중국을 재통일했다. 수나라는 즉시 북방 방어를 강화했으며, 장손성長孫晟과 같은 첩자를 통해 돌궐 궁정 내에 첩자들을 양성하며 아시나 씨족의 내분을 부추겼다. 동돌궐 내부의 분열이 심해지자 서돌궐의 타르두 카간은 동돌궐의 정권마저 장악하고 수년 동안 돌궐 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제국 통치는 아마 수의 사주를 받은 철륵의 반란으로 603년 막을 내리게 되었다."(88-9)


# 동돌궐 : 552~630, 682~742, 서돌궐 : 552~659, 699~766경


"돌궐 제국은 742년 (아시나 왕족이 이끈) 바스밀Basmil 등이 일으킨 피지배 부족들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이어서 위구르인들이 744년 바스밀을 축출하고 몽골 초원과 신장, 인근 시베리아 지역을 아우르는 위구르 카간국Uighur qaghanate(744~840)을 수립했고, 이후 당나라를 괴롭혔다. 약 80만에 달했던 위구르인들은 토쿠즈 오구즈Toquz Oghuz(〈9개의 친족 집단〉[혹은 〈구성九姓〉])라 불린 동철륵계 부족연합의 맹주였다." "위구르 카간은 [카간의 궁정인] 쾨크 오르둥Khökh Ordung에서 (제국적 야망을 보여주는) 일종의 태양 숭배 의식을 매일 행했다. 위구르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베제클릭Bezeklik(〈그림들이 있는 장소〉)이다. 베제클릭은 77개의 인공 석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5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곳에 있는 불교적, 마니교적 테마의 그림들에는 소그디아, 중국, 인도의 미술 양식이 섞여 있다. 발굴의 규모 면에서 학자들은 베제클릭을 〈사막의 폼페이〉라고 불러왔다."(98, 101)


"키르기즈는 [남시베리아 지방인] 투바의 예니세이강 유역에 위치한 강력한 투르크계 혹은 투르크화된 부족연합이었다.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키르기즈인들은 유목-농경 복합사회에서 기원했다. 그러나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들만큼 문화적으로 발전된 집단은 아니었다. 키르기즈인들에 대해선 그 초기 역사뿐 아니라 840년과 10세기 초 사이 〈제국 시기〉의 역사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키르기즈인들은 오르콘강과 셀렝게강 유역을 국가의 중심부로 삼는 흉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목제국의 전통을 따르지도 않았고 추가적 정복 활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본거지인 예니세이강 지역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중국과 중동과의 교역 관계를 이어나갔다. 당대의 이슬람 지리학자들은 키르기즈인들이 목축에 종사하며 시베리아 삼림 지대의 물품들인 사향, 모피, 특수 목재, 상아로 쓰인 후투Khutu 뿔(땅에서 파낸 매머드의 엄니) 등을 수출했다고 기록했다."(103-5)


"이처럼 권력 공백 상태였던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것은 몽골어족에 속했던 거란Qitan, 契丹이었다. 거란은 남만주 지역 출신의 수렵민, 덫사냥꾼, 돼지 사육 농경민, 양-말 사육민들로 구성된 강력한 부족민 집단이었다. 한때 돌궐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거란은 북중국과 만주 지역에 제국(916~1125)을 세우고 중국식 왕조명인 요遼를 국가명으로 채택했다. 거란인들은 몽골 초원을 차지한 후 과거 이 지역을 지배했던 위구르인들에게 재이주를 권하기도 했는데 위구르인들은 정중히 사양했다. 거란은 몽골 초원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중국의 통치에 보다 집중했다. 거란의 통치기에 많은 투르크계 집단이 가혹한 통치와 무거운 세금을 피해 서쪽으로 이주했다. 그 결과 10~11세기 동안 몽골 초원에서는 몽골어 사용 유목민들이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수적으로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몽골 초원은 몽골어 사용권이 되었지만, 거란 통치자들은 몽골보다는 중국의 황제가 되는 것을 선호했다."(107)


4장 실크로드의 도시들과 이슬람의 도래 


"7~8세기 아랍의 침공 직전에 트란스옥시아나에는 북부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 소그디아 도시들인 차즈(타슈켄트), 부하라, 사마르칸드의 서쪽에는 화라즘Khwârazm이 위치했다. 농업, 제조업, 교역의 중심지였던 화라즘은 북부 삼림 지대의 핀-우그리아계와 슬라브계 민족들의 물품들을 중동 지역으로 보내는 전달자 역할을 했다." "당시 소그드인들은 중국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유라시아 일대 교역 거점들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의 상업 세계를 지배했다. 소그드인들은 농민, 수공예인, 상인으로서 기술적, 재정적 전문 지식을 발휘했다. 그 활동 흔적을 일본과 벨기에에서까지 찾아볼 수 있다. 소그드인 공동체의 리더는 '사르타파오sartapao'(중국어 살보sabao, 薩寶)라 불렸다. 사르타파오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사르타바하sârthavâha'(대상의 리더)의 차용어다. 이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소그드인들이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국제화된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11-2)


"신장에는 북부의 타림분지와 투르판 지역 그리고 남부의 호탄 지역에 또 다른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 혹은 왕국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초원의 유목 세력과 중국 사이에 끼어 한나라 시기 이후로 불안한 독립 상태 혹은 자치 상태를 누려왔다. 7세기에 중국과 티베트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중국은 카슈가르, 아그니, 쿠차, 호탄을 안서사진安西四鎭으로 삼았다(안서는 〈서역을 안정시킨다〉를 의미한다). 중국은 751년까지 안서사진을 지배했다." "쿠차, 아그니, 코초는 적어도 8세기까지 토하라어를 사용한 주민들이 거주했던 중요한 도시국가들이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농업, 목축업, 수공예품 생산에 경제의 기반을 두었고, 식료품, 술, 비단, 직물, 펠트, 옥, 화장품 등을 수출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는 자묵Jamûg 왕실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부하라 군주〉는 낙타 모양의 왕좌를 사용했는데, 이는 분명 대상 무역이 부하라의 경제에서 차지하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15-7)


"소그디아는 광범위한 대외 교류를 통해 국제화되고 아주 세련된 공동체가 되었다. 동시에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세계관을 그 특징으로 했다. 여러 다른 문화의 융합은 소그디아의 종교에서 가장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소그디아는, 중세의 근동 지역 및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국교가 없었고 여러 다른 종교를 관용했다. 소그드어로 쓰인 마니교, 그리스도교, 불교 서적들은 소그드인들의 종교적 관심의 폭이 넓었음을 보여준다. 불교는 여전히 옛 쿠샨과 헤프탈 땅에 널리 퍼져 있는 종교였으며, 아무다리야강(옥수스강) 숭배 신앙 등 여러 토착 신과 여신을 숭배하는 종교들과 공생하고 있었다." "소그디아에는 불교와 토착 종교들 외에도 예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네스토리우스파[경교景敎]가 전파되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소그디아 지방에서 이슬람교도들 다음으로 가장 성공적인 종교 공동체가 되었다. 소그드인 상인들은 다른 종교의 경우에도 그랬듯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 역할도 수행했다."(118, 121, 125-6)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이루어진 아랍-이슬람 제국의 정복 활동은 종교적 열정, 영토 욕심, 전리품, 제국의 심장부에서 심화되던 내부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등 다양한 동기에서 비롯했다. 〈(옥수스) 강의 건너편〉을 의미하는 마와라안나흐르Mâ warâ'an-nahr는 [그리스어 지명] 트란스옥시아나를 아랍어로 번역한 명칭이다. 아랍인들의 마와라안나흐르 침공은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632년 사망)의 계승자들이자 팽창 중이던 이슬람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이었던 우마이야조Umayyad 칼리프들(재위 661~750)이 전개한 아랍 정복 활동의 일환이었다." "중앙아시아에 여전히 눈독을 들이던 두 제국인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소그드인 도시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권력 투쟁이 계기가 되어 751년에 당과 카를룩 동맹군은 카자흐스탄의 탈라스강 근처에서 이슬람 군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서돌궐-투르게슈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카를룩이 이슬람 제국 편으로 돌아서면서 이슬람 군대가 승리했다. "(26, 130)


"아랍 군대의 승리에 이어 755~763년의 내란[안사安史의 난]으로 중국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철수하자 이슬람교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적 종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음 몇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교가 옛 종교들과 혼합되기도 했다. 이슬람교 개종자들은 옛 관습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정복이 개종의 토양을 마련해주었지만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보통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동기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상업 마인드를 가졌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 상인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 수립된 압바스 칼리프국Abbâsid Caliphate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주민들이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됨에 따라 그리고 9세기에 비非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늘어났다."(130-2)


5장 초원 위에 뜬 초승달: 이슬람과 투르크계 민족들 


"하자르 카간국의 왕가는 서돌궐의 아시나 혈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자르 카간국과 아랍 칼리프국은 코카서스의 지배권을 놓고 (640년대와 737년 사이에) 장기전을 치렀고 그 결과 북코카서스에 양측의 국경이 형성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은 중세 세계의 최대 상업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발트해와 북유럽 삼림 지대에서 카스피해를 거쳐 이슬람 세계로 들어오는 물품들의 주요 통로인 볼가강 루트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자르 카간국은 비잔티움 제국과 자주 동맹 관계에 있었고, 복잡한 삼각관계 속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와 정치적·경제적으로 교류했다. 하자르 카간은 8세기 말과 9세기 초 사이에 유대교로 개종했다. 많은 수의 하자르 지배 가문 인사도 카간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 "하자르 카간국에는 일상적 통치 활동을 위임받은 부副카간이 있었다. 현지의 이슬람교도 중에서는 국가의 재상도 배출되었다. 이 재상과 신성한 카간들의 호위병들은 화라즘 출신의 거주민들이었다."(141-2)


"십중팔구 (아프가니스탄) 토하리스탄 출신의 이란인들이었을 사만 일족은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지방 영주들의 후예들로, 9세기 초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다." "사만 왕조는 이슬람의 확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중앙아시아 도시들의 지배적인 종교였던 이슬람교는 초원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사만 왕조 출신의 중앙아시아 학자들은 이슬람 문화와 세계 문화 발전의 주요 공헌자였다. 사만 왕조는 아마 옛 불교 교육 기관을 모델로 삼은 이슬람교 대학인 마드라사madrasa들을 세웠으며, 근동 지역으로 보내질 투르크인들을 이슬람교도로 양성하는 관료 기구들과 관리 전통들을 확립했다. 사만 왕조는 소그드인 무역 도시들의 상업 전통을 계승하고, 대륙 횡단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동이슬람 세계의 리더였다. 사만 왕조의 주화들은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에서도 상당량이 발견되었는데, 국제무역에서 사만 왕조가 지녔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143, 147-8)


"카라한 왕조는 여러 투르크계 부족을 지배하며 1005년에 사만 왕조를 멸망시켰다.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이었던 까닭에 카라한인들은 사만 왕조의 도시들을 점령했을 때 대중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카라한 왕조의 귀족들은 유목 생활 혹은 반半유목 생활을 영위했다. 그 다수는 봉직의 대가로 토지 기반 조세 수입인 이크타iqta'를 지급받았는데, 유럽의 봉지fief, 封地와 어느 정도 유사했다." "10세기 후반기에 또 다른 투르크-이슬람계 국가가 출현했다. 세뷱 티긴Sebük Tigin은 사만 왕조로부터 독립해 가즈나 왕조(977~1186)를 수립했다. 가즈나 왕조는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를 필수 자원으로 활용한 최초의 이슬람 세력이었다. 코끼리 부대는 이란계 관료들과 투르크계 군사 엘리트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이란계와 인도계 주민들이 피지배층을 이루는 복합적 국가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전쟁 무기였다. 가즈나 왕조의 이와 같은 복합적 국가 형태는 훗날 등장할 여러 국가의 원형을 이루었다."(151-4)


"11세기에 중동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셀주크 제국의 시조는 오구즈 부족연합에 속한 키닉 부部의 수령 셀주크Seljük였다. 985년경에 그는 시르다리야강 연안의 잔드에 자리 잡고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시아파 부야Buyid[부와이흐Buwayh] 왕조의 통제를 받고 있던 압바스 왕조는 1055년에 셀주크인들에게 바그다드로 와서 자신들을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셀주크인들은 압바스 왕조의 요청에 응했고 그 결과 수니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부상했다. 1071년에 차그리의 아들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재위 1063~1072)은 아나톨리아 동부의 만지케르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투르크계 부족민들이 비잔티움령 아나톨리아로 몰려들었다. 이는 룸Rûm[로마] 셀주크 술탄국과 뒤이어 오스만 제국이 세워지는 토대가 되었다. 오구즈인들이 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투르크화된 형태의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 지역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으로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다."(158-61)


6장 몽골 회오리바람 


"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성은 때로는 과장되었지만, 각 종교 성직자들의 주된 의무는 몽골 칸들의 건강과 행운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다. 종교적 관용은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제국을 통치하는 데서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기도 했다. 칭기스 일족은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 모든 정복지에서 몽골 제국 관리들은 제국의 경영에 도움이 될 기술을 보유한 인력을 식별해냈다. 이러한 인력들도 전리품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언어가 사용된 몽골 제국에서 언어적 재능을 보유한 사람들은 특히 우대되었다.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재능이 있으면 확실히 등용될 수 있었다. 중국어 구어口語를 할 줄 알았던 쿠빌라이는 언어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해 1269년에 티베트 승려인 파스파'Phags-pa에게 몽골어, 중국어, 그 외 몽골 제국의 다른 언어들을 다 적을 수 있는 알파벳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쿠빌라이의 노력에도, 이 파스파 문자는 몽골 제국 내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187)


"몽골인들은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내려 했다.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은 천체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그리고 아마 통제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열심히 찾았다. 한화된 거란인이었던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칭기스 칸과 우구데이를 섬겼는데 처음에는 천문학자와 기상학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해 대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대역사가 라시드 앗딘Rashid ad-Din(1247~1318)은 '야다타슈yadatash'를 능히 다루었던 한 캉글리-킵착 부족민에 대해 기록했다. 야다타슈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에게 비를 내리게 하는 마법의 돌이었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이 우석雨石은 여름에도 눈보라를 일으킬 수 있었다. 외국인 전문 인력들은 초기 칭기스 일족이 가졌던 조금 더 파괴적인 성향을 일부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야율초재는 우구데이 칸이 북중국의 농경지를 유목민을 위한 목초지로 바꾸려 하자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더 이득이 된다고 설명하며 이를 만류했다."(187-8)


"몽골 제국의 팽창 정책은 동남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몽골 제국의 남중국 정복은 타이Tai계 주민들을 파간의 버마 왕국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여기서 〈버마 왕국〉은 당시의 파간 왕국Pagan Kingdom으로, 오늘날의 미얀마를 말한다], 1283년부터 1301년까지 몽골군은 정기적으로 파간을 공격했고 1287년에는 일시적으로 파간을 점령했는데, 이는 추가적 인구 이동을 불러왔다. 몽골군은 오늘날의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지역도 침공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자바의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은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1293년에 수립되었는데 곧바로 몽골군을 몰아냈다. 이후 마자파히트 왕국은 서유럽에서 수요가 컸던 향신료의 주요 공급자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그리고 지리적으로 연결된 육상제국이었다. 몽골 제국은 1250~1350년 사이에 국제 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초기의 〈세계체제world system〉를 태동시켰다. 몽골 제국은 근대 세계의 선구자였다."(192-3)


7장 후기 칭기스 왕조들, 정복자 티무르, 그리고 티무르 왕조의 르네상스


"몽골 제국의 지배를 거치며 그때까지 이란어를 사용해오던 많은 주민은 투르크어를 채택했다. 이러한 언어의 투르크화 현상은 6세기부터 진행된 과정이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 같은 도시들에서는 계속해서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두 언어가 상용되었다. 페르시아어(타직어)는 상류층 문화와 정부의 언어로서 지위를 계속 유지했지만, 문학의 영역에서까지 갈수록 더 투르크어와 공존해야 했다. 결국 투르크어는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에서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의도적으로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재편해 그 소속 부족들을 해체하고 이들을 칭기스 일족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몽골 제국이 쇠퇴하자 부족 혹은 부족 형태의 집단들이 재등장했는데, 그 중 일부는 칭기스 혈통의 리더나 다른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집단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새롭게 등장한 집단들이 전통적 친족 관계보다는 '알탄 우룩'(황금 씨족) 즉 칭기스 일족에 대한 충성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197-8)


"차가다이 올루스는 여러 부족과 칭기스 일족이 이끄는 군사 집단들로 구성되어 서로 동맹을 맺거나 싸우면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 바로 여기서 유럽에서는 타메를란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티무르가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칭기스 일족만이 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칸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티무르는 칭기스 일족을 꼭두각시 군주로 추대하고 자신이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칭기스 가문 출신 여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그는 '쿠레겐Küregen'(몽골어 '쿠르겐kürgen', 〈사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데 만족했다." "티무르의 일차적 목표는 차가다이 울루스 내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만큼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활동 기회를 줌으로써 병사들의 충성을 유지했다. 이것은 티무르가 끊임없이 병사들을 전쟁과 약탈전에 동원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이유에서 티무르는 군사 원정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다."(203-5)


"화약의 시대가 중앙아시아에 도래했고 티무르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 도구들의 추가적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대체로 새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데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화약 무기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화기의 신뢰성과 정확성이 훈련받은 궁수의 그것들을 따라가지 못했던 까닭이다. 처음에 대포는 빠르게 움직이는 기병을 상대로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총포는 에센 칸이 이끄는 오이라트 군대를 상대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화약 무기들은 몽골군의 위협을 막아내는 데서 무력했고 그 결과 명이 화약 무기의 효능을 믿지 않았던 터라 중국의 무기 개발이 지연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더 명중률이 높아진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보병은 궁기병弓騎兵보다 더 우수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유목민들은 더는 화약 무기로 방어되는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225)


8장 화약의 시대와 제국들의 출현 


"카자흐인들의 아불 하이르 칸으로부터의 독립은 투르크권 칭기스 세계가 재편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1470년경, 자니벡과 기레이가 이끄는 카자흐 부족들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자리 잡으면서 강력한 부족연합으로 통합되었다. '카작Qazaq'이라는 이름은 원래는 [〈자유인〉 〈방랑자〉 〈약탈자〉 등을 지칭하는] 사회정치적 용어였으나 이제는 민족 명칭이 되었다[카작을 러시아어로 발음한 것이 카자흐다]." "카자흐인들의 압박을 받은 아불 하이르 칸의 손자 무함마드 시바니Muhammad Shîbânî와 그를 따르는 우즈벡인들은 1500년에 트란스옥시아나로 진입해 티무르조 정권들을 몰아냈다. 시바니 칸의 주적 중 한 명인 바부르Babur는 그를 피해 인도에 새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우즈벡인들은 트란스옥시아나를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으로 변모시켰다. 그들은 이전부터 트란스옥시아나에 거주해온 투르크인과 이란인 집단 사이에 정착해 이들과 함게 복잡한 언어와 문화 계층을 이루었다."(230-2)


"바부르는 1512년에 [우즈벡인들로부터] 도주해,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그다음에는 인도로 간 티무르 일족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Lodi dynasty를 멸망시키고 인도에 무굴 왕조Mughal dynasty(1526~1858)를 세웠다. 바부르(재위 1526~1530)와 초기의 무굴 황제들은 인도를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이전에 머물 임시 피난처로 생각했으나, 그들의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시도들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무굴인들은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본향을 지향했다. 무굴 통치자들은 18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차가타이 투르크어로 교육받았다. 페르시아어는 중앙아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상류층 문화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무굴인들은 우즈벡인들과 경쟁 관계를 이어갔으나 인도의 무굴 제국은 계속해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군인, 관료, 지식인들을 받아들였다.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인도에 남은 반면,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잠시 머물며 기후와 음식에 대해 불평하고, 부를 쌓은 뒤 인도를 떠났다."(233)


"1552년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4세Ivan Ⅳ〈뇌제the Terrible, 雷帝[그로즈니]〉(재위 1533~1547, 러시아의 차르 1547~1584)는 카잔 칸국을 정복했다. 카잔 칸국의 주민들인 무슬림 불가르-타타르인, 우랄 지방의 바시키르 부족민, 볼가 지방의 관계 민족들 모두 러시아의 속민이 되었다. 이반 4세는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Astrakhan Khanate을 손에 넣었다. 수 세기 동안 투르크계 민족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볼가-우랄 지대가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이다. 1547년부터 '차르tsar'(황제) 칭호를 스스로 사용해온 이반 4세는 볼가강 유역의 칸국들을 정복한 후에는 비잔티움 황제들과 몽골 칸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는데, 이것은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선언이었다. 러시아는 이반 4세의 정복 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묘사하는 한편 무슬림 타타르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집단 개종시키려 했다. 17세기가 되면 러시아인들은 이들 지역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234-5)


"만주인들은 1644년에 명을 패퇴시키고 중국 지배를 확고히 한 후 몽골, 시베리아,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의 변방 지역으로 진출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서부 초원 지대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두 제국은 시베리아에서 맞닥뜨렸다. 러시아는 교역을 원했고, 청은 북방 변경 지대의 정치적 안정을 원했다. 청과 러시아 양국은 네르친스크조약Treaty of Nerchinsk(1689)을 통해 국경 문제를 다루었다. 1727년 체결된 캬흐타조약Treaty of Kiakhta으로 러시아와 청의 국경이 확정되었고, 셀렝게강 연안의 캬흐타가 두 제국 간 국경 무역 도시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이슬람권 중앙아시아를 북쪽과 서쪽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은 장애물인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서로 대립하던 몽골 집단들은 국내의 경쟁자와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갈수록 더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해졌고, 이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238-9)


"러시아는 변경 지역을 위협하는 무슬림 크림 타타르인들과 노가인들을 상대하는 데 불교도 칼믹인Kalmyks들[서西오이라트인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1655년에 칼믹인들은 러시아의 차르에 충성을 서약했지만, 양측은 이들 사이의 협약을 다르게 해석했다. 러시아인들은 칼믹인들을 속민으로 간주하며 차르가 소환할 경우 칼믹인들이 자신들과 같이 싸워줄 것이라 기대했고, 칼믹인들은 스스로를 러시아의 〈동맹자〉라 여겼다. 러시아는 1660년대 들어 더 지배적인 파트너가 되었다. 동방으로부터 더 많은 오이라트 집단이 러시아의 지원하에 칼믹인들의 최고 통치자가 된 아유키 칸Ayuki Khan(1669~1724)의 휘하에 합류했다. 러시아는 아유키 칸에게 화약 무기들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칼믹 군대는 크림 타타르인들과 (간접적으로는 크림 칸국의 상전국 격인 오스만 제국과] 여타 유목민 적들을 상대로 아주 중요한 친러시아 동맹군이 될 수 있었다. 동쪽에서는 오이라트계 준가르인들이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253-4)


9장 근대 중앙아시아의 문제들


"비록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재정러시아 황제, 재위 1582~1725]의 트란스옥시아나 정복 시도는 재앙으로 끝났지만, 러시아는 1740년 우랄 지방의 바시키리아를 정복한 후 초원 지역 안으로 요새들을 건설해나갔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던 노예 포획을 노린 유목민들의 약탈 공격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육상 무역에서 중간 상인이 되는 것 또한 러시아의 목표였다. 당시 투르키스탄에서 발견된 풍부한 금광에 대한 소식도 러시아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예카테리나 대제[예카테리나 2세, 재위 1762~1796]는 기존의 반反이슬람 노선을 수정했다. 그녀의 전임자인 옐리자베타[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카잔 지역에 있는 모스크 536개 중 418개를 파괴하고 이슬람의 선교 활동을 금지했었다. 예카테리나는 이슬람교를, 카자흐인들을 처음에는 선량한 이슬람교도로, 다음에는 선량한 시민으로, 궁극적으로는 선량한 그리스도교로 만들어줄 〈문명화civilizing〉 도구로 보았다."(270-1)


"1822년에서 1848년 사이에 러시아는 카자흐 주즈들을 합병하고, 칸들을 폐위시키고, 카자흐 부족들을 여러 다른 지방 행정 구역에 두었다." "부하라는 1868년 6월에 러시아 보호국이 되었고, 러시아가 종교전쟁의 발생을 염려한 까닭에 전면적 병합은 면했다." "히바 칸국은 1873년에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코칸드 칸국은 1876년 러시아에 간단히 병합되었다." "러시아가 서유럽과 거의 같은 크기의 이 [중앙아시아] 영토를 획득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마 [러시아 쪽에서는] 1000명 정도가 실제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약하고 분열된 적들을 상대로 러시아 장군들은 기술적, 수적 우위를 누렸다. 19세기 말이 되면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인구보다 많은 약 2000만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속민으로 두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새로 편입된 무슬림 주민들의 충성심뿐 아니라 다른 비非정교회 그리스도교도들과 유대교도 신민들의 충성심 또한 확보하지 못했다."(271-3)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인들을 분열된 상태로 남겨두고 민주주의와 같은 〈유해한〉 근대화 사상으로부터 차단시키려 했다. 다른 비非러시아인 신민들과는 달리 중앙아시아인들은 징집하지도 않았는데, 중앙아시아인들이 군대에서 근대 전쟁과 무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의 변화를 막기 위해 전제주의 차르 정부는 종종 더 보수적인 지배층 인사들 및 울라마와 손을 잡았다. 울라마는 비이슬람적이라는 이유에서 심지어는 공중위생의 개선 시도들도 반대했다. 이런 정책들은 중앙아시아의 후진성을 더 영속시켰다. 새로 정복되고 합병된 민족들은 〈이노로드치inorodtsy, (외래인aliens)〉로 지칭되었다. 이노로드치는 속민이되 국민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러시아는 천연자원을 수탈하고 〈현지인들의〉 저항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유럽 지역 출신의 러시아인과 비러시아 주민들은 종종 옛 〈토착〉 소도시들을 기반으로 발전한 도시들에 정착했다."(276-7)


"1923년경에 이르러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굳혔다. 이전에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민족nationality〉이 아닌 왕조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이제 소련USSR은 자신의 통치 목적에 부합하게 국경선을 긋고 민족국가들을 창조해냈다." "그 후 소비에트 정부는 각 공화국에 맞추어 민족들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근대화 추진자들을 제외하고는 〈민족〉 개념을 가진 중앙아시아인은 거의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복잡한 민족 구성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모든 소비에트 민족은 자의적인 정치적 결정에 따라 규정되었으며 이는 민족지학과 언어학 연구들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소련의 민족 정책은 거대한─그리고 대체적으로 성공한─사회공학 및 민족공학 프로젝트였다고 보아야 한다. 소비에트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지표는 언어였다. 결과적으로 근대 중앙아시아 언어들의 기원, 형성, 계통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논쟁거리가 되었다."(28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