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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교류사
정수일 지음 / 사계절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서장 문명과 문명교류
"문명(civilization)이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하여 창출된 결과물(結果物)의 총체로서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으로 대별된다. 문명의 생명은 공유성(共有性)이다. 인류 문명은 자생(自生)과 모방(模倣)에 의해 탄생하고 발달하며 풍부해진다. 자생성은 문명의 내재적이고 구심적인 속성으로 문명의 보편성(普遍性)과 개별성(個別性)을 규제하고, 모방성은 문명의 외연적(外延的)이고 원심적(遠心的)인 속성으로서 문명의 전파성(傳播性)과 수용성(受容性)을 결과한다. 따라서 자생성과 모방성은 문명의 2대 속성이자 그 발생·발달의 2대 요소이며, 서로 상보상조적 관계에 있다. 문명의 모방은 그것이 창조적인 모방이건 기계적(답습적)인 모방이건 간에 문명 간의 교류를 통한 전파와 수용 과정에서 현실화된다. 따라서 교류는 모방에 의한 문명의 발달을 촉진하는 필수불가결의 매체다. 그런데 이러한 교류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문명의 교류를 실현 가능케 한 이 유한한 통로가 바로 실크로드다."(22-3)
1장_문명교류의 시원
"후기 구석기 시대(3만 5천~1만 2천 년 전)의 문명교류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바로 이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너스상(Venus, 여인 나체상)이다." "대체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예술은 동물을 형상화하는 애니미즘(animism)이 주제로 채택됨으로써 인물을 독립적으로 부각시키는 경우가 흔치 않으나, 비너스상의 경우는 이와 달리 여러 가지 형상을 구비한 인물(여인)이 독자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너스상이 의미와 용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는 (당시 여성의 미의식을 보여주는) 사실적 작품이라는 견해다. 둘째는 호신(護身)의 부적(符籍)이라는 상징적 의미다. 셋째는 가족이나 종족의 수호신(守護神)이라는 견해다. 넷째로 무녀상(巫女像)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회 진화 과정에서 부권(父權)에 비해 여권(女權)이 선행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비너스 여인상은 그것이 어떠한 의의를 지녔든간에 여성(모성)에 대한 추앙과 숭상을 뜻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49-53)
2장 신석기 문화의 교류
"신석기 문화권 중 첫 번째인 거석(巨石) 문화권은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는 문화권으로서 그 특색은 각종 거석 구조물이다. 두번째 즐문토기 문화권은 발틱 해로부터 시베리아 및 북미에 이르는 추운 산림 지대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를 주생업으로 하는 인간들이 창조한 문화권으로서, 그 특색은 빗살 모양의 선(線) 무늬가 있는 이른바 즐문토기(pit-cambwere)와 골기다. 세번째 채도 문화권은 동유럽으로부터 서남아시아·동북아시아 등 기후가 따뜻하고 계절풍으로 인해 우량이 풍부한 습윤 지대의 문화권이다.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마제석기와 색깔 무늬가 있는 채도(彩陶, 彩文土器)가 발견되는 것이 이 문화권의 특색이다. 네번째 세석기 문화권은 몽골고원·투르키스탄·남러시아·이란 고원·아라비아·북아프리카 등의 건조한 초원 지대에서 발생한 문화권이다. 이 문화권의 특색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렵한 짐승의 껍질을 벗기고 뼈를 자르며 살을 베는 데 편리한 세석기를 제작하였다는 것이다."(73-4)
3장_청동기 문화의 교류
"청동기 시대의 인류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첫째, 청동기 시대가 시간적으로 극히 짧아(2~3천 년) 시대성을 결여한다는 데 있다. 둘째, 청동기 시대는 하나의 과도기로서 성격이 불투명하다. 이 시기는 금속이 처음 사용된 시대로서, 물론 청동기가 금속으로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청동 외에 금이나 철 등 여러 가지 금속이 병용되고 있다. 거기에 오랜 세월 물 젖어 온 석기 문화가 여전히 유행하고 있어 사실상 금석병용(金石竝用)과 다금속(多金屬) 시대라 할 수 있다." "셋째, 청동기 시대 설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청동기의 편재성과 공유성의 결여라는 사실에 있다. 이때까지 메소포타미아·이란·중국 등 고대 문명 국가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은 거개가 사회 상층들의 활동이나 생활에 필요한 제기나 용기 및 장신구에 국한된 것으로서 사회의 상·하층 전체를 망라하고, 그래서 보편적인 실용 가치가 있는 이른바 문화의 편재성이나 공유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132)
4장 보석 문화의 교류
"일반적으로 보석은 귀중한 장식품으로서 인간의 미의식(美意識)을 촉발하고 복식 문화(復飾文化)와 환경 장식 문화(環境裝飾文化)를 풍부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유리를 비롯한 일부 보석은 생활 용기의 소재로도 활용되어 생활 문화를 윤택하게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옥(玉)이 인(仁)·진(眞)·지(智)·의(義)·공정(公正)의 '오덕(五德)'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대단히 소중히 여기고, 부적(符籍)이나 방부(防腐)·초혼(招魂) 등의 효능을 가진 신물(神物)로서 신성시하였다. 고대 인도에서는 루비를 건강과 지혜·부·행복을 가져오고, 중세 유럽에서는 해독을 시키고 벼락을 멀리한다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사파이어는 하늘빛을 나타내므로 그것을 지니면 정신과 육체를 건전하게 하며, 암흑의 정령을 퇴치하고 빛과 짛몌의 정령이 도와준다고 여겨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것을 가락지에 장식하였다. 다이아몬드는 보석 중에서도 가장 굳기 때문에 그것을 지니면 여자의 정조가 불변한다고 생각하는 민족도 있었다."(157)
"보석 문화의 교류사를 통관하면 기타 문화교류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 특징은 우선, 교류의 한계성(限界性)이다. 이러한 한계성은 희귀 광물로서의 보석의 산출지와 산출량이 극히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그 문화의 수용자나 향유자는 상층부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문명 현상으로서는 공유성(共有性)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특징은 교류의 복합성(複合性)이다. 보석은 주로 장식용으로 쓰이지만 생활 용기로서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미적 의식을 함양하는 정신 문명의 한 요소인 동시에 인간의 물질 생활과 직결되는 물질문명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 특징은 교류의 명증성(明證性)이다. 보석은 견고하고 불변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석만큼 확실한 문화 유물이 없다. 자고로 희귀한 보석은 대체로 그 산출지가 밝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의 출처나 이동 과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161-2)
5장 유목기마민족과 문명교류
"스키타이란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흑해 연안의 초원 지대에 살면서, 특히 기원전 6~4세기에 이 지대를 지배했던 이란계의 언어를 사용한 유목민을 지칭한다. 이것이 본래 의미(좁은 의미)에서의 스키타이이나, 스키타이가 강성해지면서 활동 영역이 확대되자 그 치하에 있던 유목민도 일괄해서 스키타이라고 지칭(넓은 의미)하기도 한다. 본래 페르시아의 북동과 북서 지방에 거주하다가 아랄 해 이동의 카자흐 초원과 키르키스 초원, 천산 지방으로 이동한 이란계 유목민인 사카족도 넓은 의미에서 스키타이로 부른다." "북방 최대 세력이 된 스키타이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오리엔트 지역에서 1세기에 걸쳐 종횡무진으로 행한 공포정치와 무력행사는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주변 여러 나라들을 크게 위협하였다. 심지어 이집트의 파라오까지도 스키타이 지배층에 많은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횡포와 약탈이 그들의 생존 전략이나 생계 수단일 수도 있었다."(230, 236)
"그러나 그것은 필연코 주변 국가들과 마찰을 빚었고 스키타이가 쇠퇴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원전 512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단행한 원정으로 인해 스키타이는 코카서스 산맥 이남과 다뉴브 강 하류 지역으로 한때 쫓겨난 적이 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 초 동쪽에서는 볼가 강 중류에서 흥기한 유목민 사르마트(Sarmart) 족이 서진해 스키타이 요새인 쿠반 강 유역을 점령하고, 서쪽에서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온 켈트(Celt) 족이 공격해 옴으로써 동서 협공에 직면한 스키타이는 드네프르 강 일대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어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사르마트인들이 다시 돈 강을 넘어 진공해 오자, 스키타이는 드네프르 강 유역을 포기하고 크리미아 반도로 도피했다. 거기에서 네아폴리스(Neapolis)를 수도로 하는 소국을 건설하고 정착하여 농경 생활로 잔명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1세기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스키타이란 이름은 영영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237)
"스키타이는 비록 강력한 세력으로 수세기 동안 동분서주하였지만 한 번도 통일된 국가를 건립하지 못하고 그저 여러 유목 부족들의 공동체로서 존재하였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키타이 사회는 총체적으로 왕족(王族) 스키타이(돈 강 하류에서 쿠반 강 유역), 혼혈 스키타이(그레코스키타이, 드네프르 강 하류), 농경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중류), 유목(목축) 스키타이(드네프르 강 동쪽)의 4개 집단(부족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왕족 스키타이가 지배 집단으로서 각지에 태수(太守)를 파견해 부족장을 통솔하였다. 왕족 스키타이와 유목 스키타이는 기마에 능하여 주변 그리스 식민지들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스키타이의 동방 교역과 그 루트를 추정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생산하거나 페르시아와 그리스에서 수입한 공예품이나 장신구들을 동방에 수출하고, 알타이 지방에서 채취되는 황금이나 중국과 몽골 일대에서 생산되는 직물류를 서방으로 운반하는 일종의 중계무역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237-8, 245)
"흉노는 어원부터가 아직 미상이다.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다고 본다. 문제는 '노(奴)'자인데, 대체로 이 글자는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지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세등등하던 흉노가 자신들에 대한 이러한 비칭(卑稱)을 허용했을 리 만무하며, '흉'자란 흉노어(퉁구스어) 글자에 '노(奴)'자란 한자를 결합시키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흉노족이란 어떤 단일한 씨족이나 부족에게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선대(先代)의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총체(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흉노족 형성 과정에서 '흉노'라는 한 종족 집단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 이름 아래 여타 종족과 씨족들을 망라시킨 것으로 추정된다."(252-4)
"훈과 흉노의 역사를 한 맥락에 놓고 유럽 일원에서의 훈의 활동을 고찰하는 것은 유라시아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흉노 이전에 유라시아를 무대로 동분서주한 유목기마민족들은 아직 통일된 국가권력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고, 활동력도 미약하였기 때문에 문명교류에 미친 그들의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흉노는 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정치권력에 의한 유목기마민족 통일국가를 세우고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북부 일원에서 400여 년 간 여러 유목 문화는 물론 중국 중원을 비롯한 농경 문화와도 접촉하여 민족 구성만큼이나 문화 구성도 복잡다단하였다. 이러한 복합 문화의 소유자인 흉노가 유럽에 나타나서는 강력한 훈제국을 건립하고 유럽 고전 문화나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와도 융합하여 특유의 훈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훈제국의 흥망성쇠는 총체적 흉노 역사의 한 부분이며 그 연장으로서 반드시 밝혀져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273)
"흉노에 의한 동서교류는 우선 스키타이 유목 문화를 동전(東傳)시킨 데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르도스(수원) 청동기 문화다. 이것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청동기 문화를 수용한 후 가일층 발전시킨 문화로서 동북아시아 청동기 문화의 출현과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다음으로 '호한(胡漢) 문화'의 창출을 꼽을 수 있다. 호한 문화는 수원 청동기 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연속선상의 계승 문화, 혹은 발전 문화로서 한(漢) 문화적 요소가 뚜렷한 것이 그 특징이다." "한대 중국 문물과 그 방조품(한경鏡, 옥구검, 한견絹, 한식궁弓 등)이 볼가 강 하류 지역(한식궁과 한경)이나 북코카서스(한경), 크리미아 반도(옥구검과 한견), 헝가리(한식궁과 한경·흉노식 동복) 등지에서 다량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지역이 훈의 유럽 활동 시대의 요지였다는 유럽 사서의 소전(所傳)과도 부합된다. 또한 이는 흉노~훈~아바르로 이어지는 동방 문명의 서전(西傳)상을 시사해 준다."(291-3, 306-7)
6장 로마와 한(漢)의 교류
"로마와 한의 교역은 일시에 직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교역을 중간에서 차단하던 세력인 파르티아(安息)를 제압·제거하고 인도와의 교역을 성사시킨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추진해 온 것이다. 이 과정은 곧 로마 세력의 동점 과정이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와 장기간의 쟁탈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지중해-홍해를 통해 인도와의 교역을 계속하고 있었다. 기원 초기 로마와 한 간의 교역은 인도 서해안의 여러 항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간접교역·중계무역으로서 주로 중국산 견직물이나 생사·모피·육계 등의 물품을 로마로 수출하였다. 로마와 한 간의 교역 중계지였던 인도(파키스탄 포함) 경내,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1~5세기의 로마 화폐(금·은화)가 다량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하여 로마와 인도 간에 활발했던 무역상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역의 연장선상에서 인도와 한 간에도 교역이 진행되었던 것이다."(337, 340-3)
"기원을 전후한 시기 로마와 한 간에는 인도를 중계지로 한 간접 교역뿐만 아니라, 육·해로를 통한 직접 교역과 인적 내왕도 진행되었음을 여러 문헌 기록과 유물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한금(漢錦, 한대의 비단)이 로마로 다량 수출되었다. 기원전 31년부터 기원후 192년까지 220년 동안 로마가 비단 교역을 주종으로 한 동방 무역으로 소모한 재정은 막대한 양이었다. 로마 제국의 쇠퇴를 초래한 재정적 고갈 요인 중에서 비단 구입으로 인한 지출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남해로를 통한 로마와 한 간의 간접 교역을 여실히 보여주는 유적이 바로 기원후 1~6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존재했던 부남국(扶南國)의 옥에오(Oc-éo) 유적이다. 옥에오 유적에서 로마와 한의 유물이 동시에 발견된 것이다. 이 유물들이 보여주다시피 기원 전후 인도차이나 반도는 중국 문화와 인도 문화의 접촉지였으며, 인도를 매개로 동점한 로마 문화는 이 반도에서 처음으로 한 문화와 만나서 교류하게 된다."(343-4, 347, 350-2)
"헬레니즘에 의한 동서 문명의 융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정치제도나 이념에서의 융합이다. 고전 그리스는 전형적인 도시 문화 국가로서 정복지 곳곳에 그리스식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민 대표제 등 그리스식 시민사회의 행정제도를 채택하고 산업구조도 그리스식으로 조정하였다 그러나 총체적인 중앙 권력구조는 (현지 전승을 따라) 오리엔트식 전제주의적 왕권제도를 답습하였다." "다음으로 두드러진 특징은 문화적 융합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融合, fusion)으로 인해 산생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다. 즉 비록 정복 문화이지만 그리스 문화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오리엔트 토착 문화를 흡수·결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융합은 종교에서도 나타났다. 곳곳에서 그리스 신과 아시아 신이 혼합된 이른바 제신습합(諸神習合, syncretism)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다."(362-3)
"간다라 미술의 특징은 한마디로 불상의 제작이다. 초기 불교도들은 부처를 너무나 숭배한 나머지 감히 인간 형체의 불상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불타(佛陀)를 단지 발자국 혹은 빈 좌석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현지의 그리스인들은 신을 인간과 똑같은 형체로 만들어 숭상하고 인간의 육체나 정신과 똑같은 속성을 신에게 부여하여 신상(神像)을 제작하고 그를 숭상하고 있었다. 이 영향을 받아 불교도들도 처음으로 불상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무형적(無形的)인 불교 정신이 그리스 조각으로 말미암아 유형적인 예배 대상을 얻게 되었다. 불전도(佛傳圖)의 주역으로서의 석존상(釋尊像)이 차차 독립된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상으로 제작되기에 이른 것이다. 아울러 석존상을 그의 초인간적 존재로서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조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특별한 형상(形相)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약속이 이루어졌다. 이 약속을 불교에서는 32상(相)·80종호(種好)라고 한다."(364)
7장 서역 개통과 문명교류
"기원전 138년 장건이 처음 대월지에 파견된 때로부터 기원후 102년 반초가 귀조할 때까지 약 240년 간을 서역 개통기라고 말할 수 있다." "선사 시대부터 기원 전후 오아시스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의 동서문명 교류는 주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스텝) 지대(북위 50도 부근)를 횡단하는 이른바 초원로를 따라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통로의 연변에서 생성된 문명은 전반적으로 낙후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비교적 발달된 서남아시아나 서아시아 문명권과 지리적으로 멀었고, 노정도 불편했다." "동서 문명의 직접적 만남을 가로막는 요인은 바로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파미르 고원이 가운데에 우뚝 솟아 험난한 장벽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건이 처음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그 이서에 있는 서역 제국을 역방하고 돌아옴으로써 중세동서문명교류의 동맥인 오아시스로가 트이게 되었고, 반초 부자의 서역 경영으로 인해 이 길은 더욱 활짝 열리게 되었다."(421, 426-7)
"서역 개통이 계기가 되어 중국에 유입된 서역 문물 중에서 사회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은 말이었다. 중국에도 고대로부터 말은 있었으나 서역마와 같은 양마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한대에 이르러 우수한 서역마를 알게 되자, 대량 수입하여 주로 전마(戰馬)로 쓰는 한편 재래마를 개종하는 데도 이용하였다." "서역으로부터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까지 전래된 문물 중에서 오늘날까지 뚜렷한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유리다. 본래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에 유리가 출현하였다. 이집트 유리 제품의 수입은 대체로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5~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중국에서도 일찍 유리가 생산되기는 하였으나 백색 투명하고 다양한 무늬를 가진 이집트 유리와는 그 품질에서 필적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대부터 이집트 유리는 옥정(玉晶)·수정(水晶)이란 별칭으로까지 불리면서 귀족 부호들의 진귀한 사치품과 장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428, 431-2, 435)
8장 종교의 교류
"원래 불교는 브라만에 의해 형성된 계급 제도와 번다한 제식만능주의(祭式萬能主義)를 배격하고 중도 사상에 바탕한 만민평등주의를 제창한 일종의 반(反)브라마시즘적인 개혁 종교였다. 그러나 신분 제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힌두즘의 중심 사상이자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 이념인 윤회와 업(業) 사상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신분 제도를 무시하면서 누구나 불타가 될 수 있다던 불교 본래의 평등 사상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에 빠져 차차 퇴색해 가고 있었다. 여기에 본래 무신론 종교였던 불교[특히 대승 불교]가 우주에 천국과 지옥을 설정하고 성자(聖者)를 모시며 향과 촛불, 성수(聖水)로 예불을 하는 등 붓다를 중생 구제를 위한 신의 화신으로 되게 함으로써 힌두즘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이러한 변모 과정에 덧붙여 대승 불교의 진언(眞言, mantra)과 다라니(dhārānī)에 힌두교적인 신앙과 의식을 가미한 밀교의 출현(7세기경)은 궁극적으로 불교의 변질을 가속화하였다."(472)
"불교의 전파는 다른 종교, 특히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보편 종교의 전파와 비교해 보면 그 과정이나 결과에서 일련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는 당초부터 분파권적(分派圈的)으로 전파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3세기 실론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전파된 불교는 시종상좌부 불교(Theravāda, 일명 소승 불교)이고, 기원 1세기를 전후하여 서역과 동북아시아 일대에 전파되기 시작한 불교는 대승 불교(Mahāyāna)였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강한 변용성(變容性)이다. 불교는 발원지인 인도에서의 생존 과정에서 융화성(融化性)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전파 과정에서도 상당한 변용성을 나타냈다. 이것은 발원지를 떠난 외래 종교였지만 불교가 쉽게 이방에 정착하고 생명력을 유지토록 한 요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불교 전파의 특징은 그 방도(수단)에서 평화적이란 점이다. 실제로 불교 전파사를 살펴보면 전파를 위한 소위 '성전(聖戰)' 같은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473-4)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서 티벳 불교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철학적인 중국 불교를 밀어낸 밀교 전법승들은 밀법(密法)에 의해 악마를 조복(調伏)하고 기적을 행함으로써 민심을 선도하였다. 이러한 밀법은 전통적인 티벳의 종교 관행과 융합됨으로써 티벳 특유의 밀교를 창출하게 되었다. 티벳에는 원래 본(Bon) 교라는 샤머니즘적인 종교가 전승되어 왔다. '본'이란 티벳어로 '외치는' 사람, 또는 '신을 부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교의 샤먼(Shaman)은 검은 모자를 쓰고 북을 치면서 인간에게 폭풍우와 질병 등의 재앙을 가져다주는 악마와 싸움을 벌이다가 종당에는 자신의 요술 그물로 악마를 격퇴한다. 샤먼은 또한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 올라가서는 눈 덮인 산에 살고 있는 신들의 계시를 구하며, 그 계시를 어떤 신물(神物)이 자기에게 접했다고 생각하는 빙의(憑依)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곤 한다. 이러한 물합 결과 티벳 풍토에 적합한 밀교, 즉 라마(Lama)교가 마침내 성립되었다."(504-6)
# 이러한 타락과 변질을 막기 위해 일어난 것이 14세기의 불교 운동이다. 이 개혁을 통해 확립된 것이 정교합일의 달라이라마(Dalai-bla-ma) 체제이다.
"'역대 기독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 전도열이 가장 강한' 네스토리우스파는 중앙아시아에 메르브를 비롯한 전도 교회 기지를 도처에 꾸리고 포교에 진력하였다." "6세기 중엽에 네스토리우스파 교주 마르 아바 1세(Mar Abba Ⅰ)는 옥서스 강 유역과 고대 박트리아 지방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에프탈족과 돌궐족들을 교화하였다. 이를 계기로 7세기경 옥서스 강 유역에서는 전도가 활발히 진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 전도사들은 대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과 기술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문화 개발과 계몽에도 일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현지인들과 협력하여 에프탈 문자와 돌궐 문자를 창제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고대 동방 기독교는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거쳐 천산 산맥의 북록(北麓) 및 타림 분지로 확산되었고, 그곳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판단된다."(566-9)
"이른바 경교로 명명된 고대 동방 기독교의 대당 전도에 관해서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를 통해 그 실상을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비문에서는 예수의 인격을 〈삼위일체의 분신인 경대지존(景大至尊)하신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 구세주〉로 규정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과 동일한 육신이 되어 강림[同人出代]〉하였으며, 〈천사가 경사를 선고하자, 실녀(室女, 즉 처녀, 동정녀)가 대진(大秦)에서 성주(聖主, 즉 예수)를 탄생하시었다[神天宣慶 室女誕聖]〉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명시하고 마리아의 신성마저도 긍정하고 있다. 이것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였고 성령에 의하여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는 정의와 신통하게도 일맥상통한다. 비문에 나타난 그리스도나 마리아의 이러한 인격론을 감안할 때, 오해 받은 네스토리우스파의 인성강조설이나 신성부정설은 경교의 교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일견하여 알 수 있다."(573, 579-80)
9장 고대의 실크로드
"실크로드 개념은 몇 단계를 거쳐 확대되어 왔다. 그 첫 단계는 중국-인도로(路) 단계다. 이 단계는 1877년 리흐트호펜이 최초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트란스옥시아나와 서북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실크로드라고 명명함으로써 실크로드란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단계다. 둘째 단계는 중국-시리아로 단계다. 고고학자들이 지중해 동안의 시리아 팔미라에서까지 중국 비단 유물을 다량 발견한 사실을 감안해 비단 교역 길을 시리아까지 연장하여 실크로드라고 재천명하였다." "셋째 단계는 3대 간선로(幹線路) 단계다. 2차 세계대전 후 학계에서는 선행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하여 오아시스로의 동·서단(東·西端)을 각각 중국 이동의 한국과 일본 및 로마까지로 연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의 포괄 범위를 크게 확장하였다. 즉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 지대를 지나는 초원로(스텝로)와 지중해부터 중국 남해에 이르는 해로까지를 포함시켜 동서를 관통하는 이른바 '3대 간선'으로 그 개념을 확대한 것이다."(608-9)
"마지막 넷째 단계는 환지구로(環地球路) 단계다. 1492년 콜럼버스가 칼리비아 해에 도착한 데 이어 마젤란 일행이 1519~1522년에 에스파냐→남미의 남단→필리핀→인도양→아프리카 남단→에스파냐로 이어지는 세계 일주 항해를 단행함으로써 신대륙으로 가는 바닷길이 트이게 되었다. 또한 16세기부터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들이 필리핀 마닐라를 중간 기착점으로 하여 중국의 비단을 중남미에 수출하고 중남미의 백은(白銀)을 아시아와 유럽에 수출하는 등 신·구대륙 간에는 '태평양 비단길' '백은길'이 트이게 되어 이른바 '대범선(大帆船) 무역'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두 대륙 간의 문물교류도 꼽을 수 있다. 항해로가 개척되고 교역이 진행되면서 고구마·감자·옥수수·낙화생·담배·해바라기 등 신대륙 특유의 농작물이 아시아와 유럽 각지에 유입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감안할 때 비록 해로의 단선적인 연장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문명교류의 통로는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