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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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지중해 세계와 폴리스 시대

1강
생물학적 진화가 멈춘 4~5만 년 이후로 인간의 행위는 전적으로 학습의 산물이며, 문명을 잉태하는 기술은 도구와 그 도구를 가능하게 하는 관념의 복합물이다. 문명의 요소들은 신석기 농업 혁명 이후에 출현한다.

2강
고대 희랍은 지중해라는 압도적인 생활 조건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배로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 지역들이 발전하였고, 농경만으로는 인구 증가에 대응할 수 없어서 주변 지역에 대한 탐사와 식민지 개척을 벌였다.

3강
강대국 페르시아가 희랍의 폴리스 연합에 패한 페르시아 전쟁은 해전의 주역으로 활약한 경장보병 출신 시민들의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였고, 아테나이의 제국주의를 촉진하여 펠로폰네소스 내전을 불러왔다.

4강
아테나이는 대내적으로는 민주정을 행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행태를 일삼았다. 패권의 강성은 문화와 예술의 탁월한 성취를 이룩한 반면에 희랍 세계의 결속력을 약화시켰고 공통의 심성구조를 파괴했다.

5강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요소는 첫째, 군사력의 우위, 둘째, 시장의 형성, 셋째, 문화의 전파력이며, 에게 해를 장악한 아테나이의 헤게모니는 스파르테 중심의 라케다이몬 동맹 세력에게 구조적 불안감을 심어줬다.

6강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민주정에 대한 자부심을 '헬라스의 학교'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개인적인 이익과 손해와 무관한, 유기적인 공동체로서의 폴리스 사상을 천명했지만, 내전의 장기화는 이를 점차 파괴했다.

7강
역병의 창궐은 아테나이인들의 마음에 극단적 허무주의를 심어, 종교적 정신과 사회적 의례를 무너뜨렸다. 소피스트들은 규범의 상대성을 주장하였고, 생명을 경시하는 세태는 케르퀴라의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8강
투퀴디데스의 정의에 따르면 전쟁은 '잔혹한 교사'이며, 사람의 마음을 그들이 처한 환경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언어의 의미가 변질되고, 권력욕이 규범을 대체하며, 고상함과 순박함은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9강
델로스 동맹의 권위를 무시하는 멜로스 섬의 초토화 작전은 온건한 제국의 종결을 의미했다. 여기서 유능한 지도자와 현명한 다수의 조화 및 현실 정치에 충실하면 제국은 타락 혹은 실패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10강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를 활용한 새로운 전쟁 기법을 도입하여 헬라스를 정복하고 페르시아마저 무너뜨렸다. 플라톤은 존재론적 허무주의의 극복을 주창하지만 대세는 안심과 회의주의로 기울었다.


2 로마와 중세 가톨릭 제국 시대

11강
포에니 전쟁과 같은 장기전으로 공화정의 기반인 소농이 몰락하고 원로원의 토지겸병이 가속화된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이 실패하자 하층민의 불만을 흡수한 일인자들은 내전을 벌여 제정시대를 열었다.

12강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는 로마가 제국으로 가는 길목에 벌인 정복 전쟁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갈리안인들에게 살육과 식민화였던 이 원정은 카이사르가 수여한 평화와 전공으로 치장되어 그의 위상을 높였다.

13강
팍스 로마나의 오현제를 거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통치의 효율을 위해 동로마 제국을 세웠다. 직업군인 체제의 확립으로 농민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대지주 아래 편입되면서 도시의 몰락과 중세화가 진행된다.

14강
서로마를 점령한 게르만 족의 독립 왕국에서는 지주들이 기존의 로마 제국 시절보다 낮은 세금을 거두어 저항을 막고, 직업군인과 결합하여 농노를 착취하는 지주-전사 연합 체제를 형성하여 중세 봉건제로 나아간다.

15강
<고백록>은 자신의 삶이 하느님이 부여한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임을 안 자아가 과거를 회상하는 기록이며, <신국론>은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하느님의 섭리를 기반으로 한 목적론적 역사 신학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16강
중세는 개인의 삶 전체를 규율하는 교회의 권위 아래 영주와 쌍무계약으로 맺어진 전사조직과 장원과 도시로 구성된 경제체제의 복합물이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희랍의 사유를 전파하여 변화의 기운을 싹틔웠다.

17강
14세기에 속권을 옹호하는 논의가 확대되면서 교황권을 약화시켰다. 소小빙하기와 흑사병의 만연은 농노 확보를 위한 전쟁을 유발하여 전사 계급의 몰락을 촉진하고, 무기의 발달은 중앙 집권적 국가를 예비했다.

18강
화약과 대포는 중앙 집권을 촉진하여 인공물로서의 영토국가 개념을 이끌어냈고, 종교개혁은 국민국가와 민족주의를 고양하였다. 30년전쟁은 종교에 대한 회의를 확산시켜 시대정신의 자리를 과학에 넘겨주었다.

19강
비코는 <새로운 학문>에서 자연학에 대한 형이상학의 우위를 말하면서, 문명 세계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려 했으며, 부단히 변화하는 '자연법'을 근간으로 신과 영웅 및 인간의 시대가 순환한다고 보았다.

20강
비코는 인간의 역사적 활동(factum)을 통해 만들어진 시대정신인 진리(verum)를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았으며, '자연'탐구 대신에 '인간(사회)'를 연구하여 그 면면에 흐르는 순환법칙인 역사철학을 알고자 했다.


3 근대 국민국가 체제와 세기말

21강
30년전쟁은 국민군을 탄생시켰다. 국민군은 절대왕정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요소로서, 막대한 유지비를 대는 군상 복합체를 구성하여 치안의 안정과 상업의 부흥을 가져왔고, 손쉬운 해외 정복사업에 동원됐다.

22강
종교의 권위(근본 범주, 이론 체계, 미래 예측)를 대체한 자연과학은 세계관을 전환시켰고 계몽주의를 통해 서구 전체로 확산됐다. 이것은 과학의 성과를 긍정하는 사회적 관계망과 제도적 뒷받침 속에서 가능했다.

23강
계몽주의는 사회운동의 원리로서의 이성이며, 과학에 근거를 두고 역사적인 통찰을 시도했다. 관념의 변혁을 원동력 삼아 물질세계를 깊게 탐구하고 보편적 시대정신을 발효하여 체계적 정신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24강
콩도르세는 인간 능력의 '완전가능성'을 확신하여, 공교육을 전인민에게 확대할 것을 주장했으며, 과학적인 원리와 실천으로 인간과 사회를 개조하고자 했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근대 제국주의의 밑바탕이었다.

25강
혈연 엘리트가 폐기되면서 근대 국민국가가 주요한 정치 행위자로 등장하고, 산업혁명이 확산되면서 '기계-사물'이라는 비인간 행위자가 경제 조직의 핵심 요소로 자리를 잡아 19세기 부르주아 전성기를 인도한다.

26강
인클로져 운동과 토지 병합으로 뿌리뽑힌 독립 자영농이 자유로운 노동자로 전환되고, 기술혁신이 가속화하면서 등장한 산업자본주의는 토지, 화폐, 노동을 상품화하고 이윤 추구의 마음을 '계발'하는 과정이었다.

27강
엥겔스는 1844년이라는 시간, 노동자계급이라는 행위자, 장소의 맨체스터를 엮어 산업혁명이 가져온 근대 산업도시의 실상을 해부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한 삶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제시한다.

28강
대도시의 공간 배치는 계급 구조에 대응하여 노동자계급과 중간, 상층계급이 서로 만나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으며, 일련의 구획은 이윤이라는 말에 담긴 체계적인 배제와 은폐의 결과이다.

29강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1) 임금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2) 계급간, 계급내 투쟁에 시달리며 3) 부작위에 의한 사회적 살인에 노출되어 있고 4) 질병과 죽음이 곁에 떠돌아 5) 냉혹한 계산에 따른 탈도덕화 현상을 보인다.

30강
근대화의 기본 심성구조는 '경쟁'이며 실존적 불안을 동반한다.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는 사상이 '온화한 상업론'이며, 인간의 정념이 파괴적인 방향으로 발현되지 않도록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상업활동을 장려하였다.

31강
프랑스 대혁명은 산업혁명과 함께 19세기를 부르주아에게 헌정했다. 제3계급은 혁명적 심성을 집단적 정체성으로 체현한 제4계급의 등 위에서 혁명을 일궜고, 주권의식과 역사적 주체성을 지닌 국민이 탄생했다.

32강
버크는 영국의 기성 체제를 지키려는 의도에서 혁명의 경거망동을 지적했고, 칸트는 혁명 이전에 보편사에 기여하는 세계시민 개념을 제시했다. 일련의 논의는 혁명의 성과를 제도화하는 헌법 논쟁으로 이어진다.

33강
인간의 주체적인 역사 활동을 강조하는 역사철학이 성립하면서,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기계적 인과관계를 강조하였고, 헤르더의 인류의 도야를 위한 학교로서의 역사라는 관점은 헤겔의 세계정신으로 이어진다.

34강
<공산당 선언>은 계급을 역사의 행위자로 내세워 부르주아 혁명은 희비극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비희극으로 도식화한다. 대호황 속에 역사를 장악한 부르주아는 혁신을 지속해야 하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35강
부르주아는 신분 질서의 신성한 후광을 지우고 유능한 개인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세웠다. 철도와 전신은 시공간을 압축하고, 기술에 지체된 의식은 대량 살상 무기의 위험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36강
부르주아 헤게모니는 경제력, 합법적 폭력, 이데올로기적 설득력으로 구성된다. 1870년대에 독점기업이 등장하고, 청교도 정신을 강조하던 부르주아가 상속에 의존하는 유한계급으로 변질되면서 소비가 중요해졌다.

37강
대호황과 규모와 직종에 따른 노동자들간의 구분과 차별, 문화적, 민족적, 종교적 차이는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방해했다. 부르주아의 유산계급화와 러시아혁명은 계급적대를 낳았지만 수정주의 논쟁으로 귀결됐다.


4 제1,2차 세계대전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38강
19세기 말, 국가가 주체적 행위자로 부상하면서 제국주의적 다툼을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싹튼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극적으로 소모된 것은 인간 생명이었으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퇴장했다.

39강
제1차 세계대전은 군사력, 경제력, 프로파간다가 집약된 총력전의 양상을 보였다. 전쟁의 목표는 무역이나 영토 획득이 아니라 군사력을 과시하는 전쟁 그 자체에 있었고, 국가 교육을 받은 대중은 국민으로 거듭났다.

40강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는 미합중국의 세계 패권이 관철되는 과정이다. 마셜플랜을 기반으로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여 자본주의 황금시대를 열었고, 미합중국이 전 세계를 관리하는 신식민주의 체제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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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연구 -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역비한국학연구총서 26
정병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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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한말•개화기 : 성장•교육•개화운동

1 가계와 왕족 의식
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조선 왕조에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면서도, 대외적인 활동에서 왕족 의식을 드러내는 이중적 의식을 보여 훗날 제왕적 대통령을 예비했다.

2 학업과 독립협회 참여
과거제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와 서구식 문화, 기독교를 습득한 그는 협성회 활동을 통해 언론의 중요성을 체득했고, 독립협회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3 미국 유학과 망명
민영환의 개인 밀사 자격으로 도미한 이승만의 외교 활동은 가쓰라-테프트 밀약 체결로 무산됐지만, 미 고위관료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일방적인 대미 외교의 근간이 됐다.

2부 일제시기1 : 외교독립노선과 외교 활동

4 외교독립노선의 형성과 특징
1)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이후 미국에 한층 경도되어 유화적인 대일관을 견지하였고, 미일전쟁이 수반되지 않은 무력투쟁과 해방 후 한국민의 자치 능력에 회의적이었다.
2) 그는 문호를 개방하여 통상의 자유를 누리는 교역상의 한반도중립화론을 주장하고, 임시정부 수립과 대미외교, 자치정부론을 내세운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모방했다.

5 1910~30년대 외교 활동
1) 재미 한인 지도자들로는 무력투쟁의 박용만, 실력양성의 안창호, 외교노선의 이승만이 있었고, 박용만과 안창호는 최일선에서 죽음을 맞은 반면 이승만은 후방에 남았다.
2)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임된 이승만은 곧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직에 임명되자 대통령을 자임하여, 통합 상해 정부 출범시에 자신의 대통령 취임을 관철시켰다.

6 태평양전쟁기 전시 외교 활동
1) 1세대 이민자의 노령화와 동지식산회사의 파산으로 조직력이 약화되었고, 상해 임정과의 갈등도 해소되지 않은 채 주미외교부를 설치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2) 김구의 후원으로 중경 임정과의 관계를 회복한 이승만은 얄타밀약설을 주장하며 반소•반공 노선을 강화하여 미 군부의 지지 속에 해방 정국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3부 일제시기2 : 국내 연계와 지지 기반

7 1910~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과의 관계
3•1운동을 전후하여 강화된 국내의 이승만 지지 세력은 독립협회 활동 경험과 기독교로의 개종, YMCA 핵심 멤버 및 기호 출신으로 연결되며 흥업구락부 조직을 주도했다.

8 이승만의 국내 지지 기반 흥업구락부(1925~38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창립한 동지회의 국내버전인 흥업구락부는 실질적 활동이 미약했고 다수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민족주의 계열내에 이승만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9 태평양전쟁기 단파방송 사건과 국내의 이승만 인식
전시 정보 통제 속에서 입소문으로 전해진 이승만의 단파 방송은 실제보다 과장되어, 그는 민족 해방을 염원하는 좌우파 지도자들에게 국외 민족운동의 중추로 각인되었다.

4부 해방 직후 : 정부 수립 노선과 활동

10 조기 귀국과 동경 회합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신탁통치를 염두에 둔 국무부와 달리 미 군정은 공산주의자들과의 거래를 반대하고 자유정부의 확대를 구상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의중과 일치했다.

11 정계 부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
1) 인민공화국은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미 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이승만을 회유하기 위해 주석으로 추대했지만, 그를 민족 지도자로 선전하는 효과만 가져왔다.
2) 독촉중협은 좌우를 포괄한 명목상 한국 정부 역할을 하면서 총선거를 실시한 후 북한 지역으로의 확대를 꾀했으나, 친이승만적인 우익 일변도의 구성으로 통합이 무산됐다.

12 1946년 지지 기반 강화와 단독정부 수립 제안
1) 반탁운동의 기세를 등에 업고 군정을 접수해 정부를 세우려던 임정의 시도는 미군정의 신뢰를 잃는 계기가 되어 비상정치회의의 주도권을 이승만에게 일임하게 됐다.
2) 광산 스캔들에 휘말려 민주의장직을 사임한 뒤 시작한 남선순행은 지방 우익들을 결집시켜 군중을 동원하고, 경찰력으로 좌익을 예비검속, 억압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13 1945~47년 정치자금 조성과 운용
1) 그에게 대규모 정치자금을 조성해 준 대한경제보국회는 친일 경제인 단체로서, 이들은 친일 행위에 대한 보험 및 일제가 남긴 자산과 생필품•공산품의 이권을 노렸다.
2) 조성된 정치자금은 46년 9월의 총파업을 분쇄할 우익 청년 단체의 동원과 반탁 시위의 지원에 사용됐고, 자신을 지지하는 언론 매체의 확보와 사설 고문비로 쓰였다.

14 1947~48년 우익 진영의 분화와 단독정부의 실현
1) 좌우합작에 기반한 임시정부 수립이 제2차 미소공위의 진전으로 가시화되고 미군정과 한민당마저 등을 돌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격렬한 반탁시위와 테러를 조직했다.
2)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여운형이 암살되자 이승만의 남한 단독 총선거 주장이 힘을 받았고, 장덕수 암살로 임정과의 통합도 물거품이 된 후 49년 6월 김구마저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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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기원과 원인 나남신서 478
박명림 / 나남출판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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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해방과 분단

1 해방과 최초 질서 : '광기의 순간'
1) 도둑처럼 찾아든 해방은 '대안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던 독립운동 세력들의 우려를 자아냈고 미소의 점령이라는 외부계기의 규정력이 독립국가의 염원을 짓눌렀다.
2) 소련군의 진주는 건준을 인민위원회로 개편하고, 좌파 인원을 우파와 동등하거나 우세하게 조정하는 계기가 됐으며, 미군 역시 점령군의 자세로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2 초기 분단질서의 등장
1) 소련은 일본의 세력권에 재편입되거나 미국의 극동 기지화된 한반도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종전 이전부터 한반도를 주시했다.
2) 미소의 점령 초기 정책은 매우 유사하여 각종 정당과 단체의 등록을 의무화하고, 사설 무장대를 해산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세력만 남기는 수용과 배제를 시행하였다.
3) 분할통치가 결정된 후 소련은 군정 아래에 소비에트 민정을 세워 행정, 사법, 군사조직을 이양했고, 북조선공산당을 출범시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단독정부를 세웠다.
4) 소련은 민공간의 연립정책을 구사하고, 연안 조선의용군의 입북을 연기시켜 김일성리더십의 정착을 지원했고, 미국은 자생조직을 거부하고 식민관료를 부활시켰다.

3 분단의 내화(內化)
1) 신탁통치 논란은 사실의 오류와 세력들의 내적 동기(도덕적, 실권추구적, 이념적)를 넘어, 식민통치의 연장이라는 외형만으로도 한반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2) 탁치균열은 경쟁적 공존시기를 급속도로 소멸시켰고, 남한에서 친일파의 소생과 반공주의의 확산을, 북한에서 민족주의자의 탈락과 단독정권 수립을 가속화하였다.


2부 북한혁명과 48년 질서의 등장

4 북한혁명 : 반(半)정복과 반(半)혁명
1) 토지개혁은 식민지 시절부터 반봉건의 제일요소로 정비되었고, 초기에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력을 중점에 두었지만 탁치균열을 기점으로 독자적 급진성이 강화되었다.
2) 농민의 자발적 결사와 북한리더십의 신속한 결정은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혁명적 동원체제를 이루었고, 저항세력을 철저히 탄압하여 38선 이남으로 이주를 유도하였다.
3) 북한혁명은 소련군의 점령과 농민의 자발적 혁명이 혼합된 반(semi)정복-반혁명이었으며, 관할지역의 통합성이 높아질수록 반대지역과의 반(anti)통합은 더욱 커졌다.

5 혁명적 동원체제의 구축
1) 소련군 대위와 KGB의 요원이던 김일성의 부상은 급진주의보다 좌우합작에 비중을 두었지만, 탁치균열과 좌파 우세 주장으로 결렬된 미소공위가 빚어낸 차선책이었다.
2) 46년 1월 민주당 배제로 민족주의와 결별하고, 7월에는 온건좌파의 신민당을 해체하고 북조선로동당의 일당 독재를 수립하면서 김일성 체제의 전통을 '창조'하였다.

6 선거와 이행의 완료
1) 선거는 인민들을 정치적으로 교육하고 국가 공식이념과 정책을 하향식으로 침투시키는 통치 과정이었으며, 국가 수립을 승인하는 '긴 과정의 마지막 의식'에 불과했다.
2) 정부 수립의 전단계인 인민위원회 구성은 김일성의 헤게모니 장악 과정으로서 이후로 그에 대한 찬양과 권력집중은 경찰국가의 뒷받침 아래 변함없이 유지•강화되었다.
3) 구체제를 일소한 북한리더십은 고등 및 실무 교육기관을 집중 설립하여 국가운영 인력을 양성했고, 국정교과서와 역사 교육 강화, 사상 혁신으로 사회 개조를 꿈꾸었다.

7 분단과 48년 질서의 등장
1) 2차 미소공위가 분단체제의 확인으로 결렬되자 남북한 정권은 서로 단정의 책임을 떠넘기면서 단독선거를 진행했고, 통일에 매달린 정치적 패자들의 자리는 없었다.
2) 초기 북한체제의 균열로서 소련 진주군의 패악질에 분노한 민중들과의 대립과 민족주의 세력의 자생적 저항에 대한 가차없는 탄압은 남한의 균질적인 반공을 형성했다.
3) 소련군의 방임으로 월남은 북한 인구의 10%에 달했고, 50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지주와 친일파뿐 아니라 다양한 직업군이 생활난과 구직을 이유로 내려왔다.
4) 남한은 47년 7월 여운형의 암살을 기점으로 좌우합작이 무산되자 강력한 국가 권력에 매진하다가 북한 혁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공의 틀 내에서 민주 개혁을 실시했다.


3부 48년 질서의 성격-남한

8 분단국가의 등장과 초기 균열
1) 초기 해방정치의 주도권을 쥔 좌파에 맞서 미군정의 하위동맹자로 활약한 이승만-한민당 반공연합은 좌파가 몰락하자 김구-임정계열을 배제하고 내부 권력투쟁을 벌였다.
2) 제주 민중항쟁과 여수반란은 좌파의 암약과 친일경찰의 만행, 피폐한 생활고의 화학적 결합으로, 극심한 국가 토벌을 야기하였고 반공국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여수반란은 국가보안법의 제정과 주한미군철수를 연기시켰고, 숙군작업, 대한청년단 결성, 학도호국단 조직 등 일사분란한 하부조직을 결성하여 체제완비에 기여했다.

9 48년 질서의 변환 : 6월공세와 토지개혁
1) 도덕적 명분보다 정치권력을 택한 이승만 정권의 6월공세는 반민특위 습격과 국회의원 대량 체포, 김구 암살로 이어졌고, 용인된 정치공간에서 반대파를 배제하였다.
2) 토지개혁은 혁명을 주장하는 급진파와 지주 일변도의 수구파를 누르고, 절대 다수의 농민들에게 반공주의 체제를 내면화하여, 정치적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0 '미국의 범위'와 한미관계
1) 미국은 중국에서의 실패를 거울 삼아 사회, 경제적 체제 우위를 지향했지만, 공산주의의 차단이라는 원칙은 남한의 호전적인 북진통일론과 맞물려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2) 극동방위선을 언급한 애치슨의 연설은 기존의 NSC 48 시리즈에 내용을 반복한 것으로, 남침의 도화선이 되거나 유도 기제로 작용했다는 주장은 사후의 정당화 해석이다.
3) 전쟁은 예상된 침공에 대비하다가 오열의 적전 호응으로 흐트러진 남측의 허술함과 승리의 확신 속에 방아쇠를 당긴 북측 리더십의 결단이 맞물린 기습 아닌 기습이었다.

11 48년 질서와 대쌍관계 동학
1) 이승만은 대내적인 체제 안정을 꾀하고 국부와 다른 전투의지를 내세워 미국의 실질적인 국방 원조를 구하며, 소련의 남침 기도를 차단하기 위해 북진통일론을 내세웠다.
2) 49년 6월~10월에 집중된 게릴라 활동은 북한과 연계된 무력 시위였으며, 남한은 강력한 토벌 작전과 보도연맹 결성을 통한 자수와 밀고의 양동 작전으로 분란을 정리했다.
3) 전쟁 직전 남한은 좌파의 몰락과 전향으로 내부 교란이 완화되어 이승만의 입지가 확고해졌고, 개헌 시도를 통한 지배연합내 헤게모니 투쟁은 50년 총선거에서 외면받았다.


4부 48년 질서의 성격-북한

12 혁명적 동원체제의 구조
1) 인민군은 급진 군사주의로 대변되는 북한 사회의 축소판으로, 인민과의 일체성과 항일 운동 정신의 계승을 내세웠으며, 창군부터 등장까지 김일성 계열이 철저히 장악했다.
2) 의열단을 모태로 하는 조선의용군은 무정 휘하의 대규모 항일 부대로서, 소련군의 집단 입국 거부로 세력이 분산되어 지휘부에서 밀려났지만 중간간부의 주력을 구성했다.

13 혁명적 동원체제의 변환 : 군사주의의 등장과 확산
1) 인민군의 목적은 국가의 보위이고, 국가의 보위는 인민의 보위라는 진술은 가족의 국가화와 국가의 가족화라는 이중고리로 엮여서 인민, 국가, 군대의 일체화를 꾀한다.
2) 계획경제로 일궈낸 경제적 하부구조의 조기구축은 군사분야의 자신감과 실현의지를 높여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실현해야 한다는 '남반부 인민구원론'을 뒷받침했다.
3) 북한은 대중의 이념 무장과 통일을 위한 체계적인 이론을 수립하고, 대중동원의 방대한 조직과 인민군과의 연계 및 동원을 위한 구체적인 규정을 갖춘 혁명적 동원체제였다.

14 대쌍관계 동학과 급진 군사주의
1) 49년 6월 인민군 공개 모집을 기점으로 38선 충돌에 근거한 군사적 자신감, 식민 부역을 정리한 도덕적 우월감, 남한 인민들의 과장된 투쟁 의식 등이 급진주의와 결합했다.
2) 극단적인 언사를 동원한 대남 선동과 빨치산 활동에 대한 과장된 칭송은 급진주의에 탐닉하여 이성적 판단을 폐기하고 군사적 낙관주의와 결합한 북한리더십을 보여준다.

15 결 론
한국전쟁은 본래 내것이던,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쌍생아들의 급진성과 오만함, 신의 반열을 탐낸 인간의 역설적인 무지몽매가 빚은 제전(祭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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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결정과 발발 나남신서 477
박명림 지음 / 나남출판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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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 한국전쟁 연구의 의미와 방법
1) 첫째, 한국전쟁의 결정과정을 탐색하고, 둘째, 전쟁의 시작과 발발을 다루고, 셋째, 전쟁의 기원과 원인(해방, 48년 질서)을 찾고, 넷째, 전쟁의 성격과 의미를 규명한다.
2) 연구의 준거는 사회의 다수구성원으로서 변혁을 통과해 온 농민들, 언로의 보장과 정당정치의 민주주의 여부, 이념 갈등을 넘어 대결 구도의 핵심이 된 민족주의이다.
3) 48년 질서기의 남북의 '역동적 상호간섭 관계'는 국제적 냉전체제와 동아시아 공산주의 삼각동맹과 통일 지상주의의 분단대립이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이다.


1부 전쟁의 결정 : 과정

2 분단과 국토완정론의 등장
1) 북한은 해방 이후 민족주의와 협력을 모색하는 민주기지론을 고수하다 49년 이후에 무력 통일을 시사하는 '국토완정론'으로 입장을 변경하고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2) 모택동은 전쟁 수행을 위해서 중국 통일과 모스크바의 결정을 선제조건으로 꼽았고, 49년 6월의 미군 철수를 기점으로 조선로동당 합당과 대남 정치선전을 강화했다.
3) 소련이 북한의 군사력 부족으로 전쟁이 장기화되고 미국의 개입, 국제적 반소 기류를 우려하자, 북한은 빨치산의 게릴라 활동을 강화했지만 남로당의 역량만 약화시켰다.

3 최종결정 :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의 합의
1) 중국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주의 삼각동맹이 형성되자 스탈린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군사원조에 나섰지만, 직접적인 군사지원은 배제하고 모택동의 동의를 강조하였다.


2부 전쟁의 결정 : 분석

4 스탈린 : 지원과 은폐의 이중주
1) 확보한 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구축이라는 일(一)지역사회주의를 채택한 스탈린은 미국의 38선 분할 요구를 수용한 2차대전 직후의 입장을 1947년까지 유지했다.
2) 스탈린은 중국혁명의 성공 이후 공세주의로 변화해 개전을 수락했지만, 외면적인 참여를 철저히 거부하고 전쟁 의도를 은폐하여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려했다.
3) 스탈린은 1950년 가을 전세가 기울자 북한 포기를 천명하면서 중국의 참전을 강력하게 권유하였는데,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소련의 국익이 최우선 목표였다.

5 모택동 : 내키지 않는 적극적 동의
1) 모택동은 스탈린의 결정을 존중하고 불편한 중소관계 개선을 위해서, 대만점령 및 중국 완전통일을 위해서, 조중간의 역사적 유대를 위해서 전쟁시도에 적극 동의하였다.
2) 스탈린은 미국 개입을 우려하여 중국혁명을 반대했고, 혁명 후에도 제2의 유고(티토)화를 우려했기에, 모택동은 그의 의심을 풀기 위해 한국전쟁의 항미원조에 나섰다.
3) 조중연대는 만주의 항일공동투쟁 경험과 46~7년의 중국혁명의 배후지 역할을 담당한 연대감을 기반으로 하지만, 주저와 단호 사이에 국익에 대한 고려가 우선이었다.

6 비밀의 늪 : 북한내부의 결정 1
1) 박헌영과 김일성은 권력 배분을 놓고 다퉜지만 공산혁명의 대의에는 합의했고, 박헌영이 전쟁을 반대했다거나 박헌영의 오판에 김일성이 넘어갔다는 주장은 모순이다.
2) 49년 6월 합당 이후에도 대남공작의 남로계열의 주도권을 인정하였고, 중앙위원회 구성도 힘의 배분을 반영했으며, 스탈린•모택동의 회담에 박헌영은 공동 참석자였다.
3) 북한 내부의 협의와 지령 지시, 소련•중국에 대한 지원 요청 등 전쟁과 관련한 결정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합작품이었고, 50년 10월 전세의 역전과 더불어 균열이 갔다.

7 비밀의 늪 : 북한내부의 결정 2
1) 만주게릴라파의 핵심 중 한 명인 최용건을 필두로 전쟁에 반대하는 온건파들이 있었지만, 의사수렴 과정에서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급진적 사회주의는 이를 무시하였다.
2)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군의 참전 가능성이 낮고 그 전에 전국을 장악하는 전격전을 구상했으며,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인민의 봉기가 일어나리라는 자기기만에 빠졌었다.


3부 전쟁의 발발

8 전쟁으로의 이행
1) 49년 말부터 38선 부근 주민들의 소개와 도로 및 교량이 신설됐고, 장비 보강과 동계-검열-하계로 이어지는 군사훈련과 중국 귀환 부대원들의 인민군화를 실시했다.
2) 소련군사고문단의 주도로 작전계획이 수립되자 부대 완편과 하계훈련으로 위장한 전선 집결이 시작됐는데, 이동 중의 정신교육과 위장평화전술은 사기를 진작시켰다.
3) 대남 사전조치로 남측 게릴라들의 월북과 조직화 교육 후의 재남파가 있었고, 수용 불가능한 평화통일 제안과 남한정부에 대한 원색적 비난을 퍼부어 명분을 쌓았다.

9 공격명령 : 6월 25일 직전의 38선 북선
1) 6월 들어 전선에 속속 도착한 부대들은 전투준비를 위해 장비를 점검하고 이동 금지, 비밀 엄수와 군사기율을 고취하였으며, 사상동향을 점검하고 정신무장을 강화하였다.
2) 전선 중앙에 배치된 부대는 서울-수원선 주타격으로 방어선 돌파와 적 주력부대 섬멸, 개성-서울, 춘천-수원 보조타격은 후방 차단 및 북상 부대에 대한 대비를 지시했다.
3) 6월 23~25일의 최후의 순간에는 교육, 선전과 최종결의, 장비점검을 시행하고 공격노선의 최근접 정찰 및 지뢰 제거가 끝나자 포병의 폭격, 파괴사격과 함께 돌격하였다.

10 마지막 조치 : 북침의 주장
1) 북침 주장의 근거는 문학봉과 조소앙 등 북한으로 넘어간 남한 고위층의 폭로와 북벌 의지를 담은 이승만의 편지와 군사계획 등이지만 실제 침공의 증거가 담겨 있지 않다.
2) 해주침공설은 전쟁 초기에 북침의 강력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부정한 점, 해주 지휘관들의 영전, 옹진침투 이후 서울까지 귀환루트의 난맥상 등의 허점이 많다.
3) 북침설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들은 의도를 숨기고 교묘하게 목적을 달성하려했던 북한과, 의도만 드러내고 능력은 형편없었던 남한의 허세의 뒤엉킴에서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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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 - 하 - 근세와 현대 서양 철학사 - 상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 이문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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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근세철학
근세는 의식과 세계관의 분열이 가속화되어 수많은 답변들이 혼란과 회의를 부추겼지만, 전체로서의 철학은 서로의 보완 속에 여전히 진리로 나아가는 의지의 표현이다.

1장 르네상스의 철학
1)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위대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고대를 소환하면서 대립과 종합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였다.
2) 세계의 배후에 있는 신비로움에 대한 동경은 르네상스의 또 다른 특징인데,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동일성, 합리성을 배제하고 상징과 비근거를 중시한 신지학 등이 있다.
3) 양적•기계적 자연관은 관찰과 실험의 귀납법을 정립하고, 실체를 기능으로, 형상을 법칙으로 전환하였으며, 질량 혹은 힘의 양을 기초범주로 하는 동역학을 발견하였다.
4) 마키아벨리는 사회의 역학 관계를 양적•기계적 방식으로 파악하여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제어하는 권력의 속성을 밝혀냈다.
5) 그로티우스는 국가의 최고권력이 국민에게 있지만, 이것을 자연인이나 법인인 통치자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정부를 제거하는 식의 적극적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6) 르네상스기의 '무지'는 더 이상 신의 진리에 대한 겸손이 아니라 참된 앎의 인식을 부정하는 회의주의의 표현이며, 지성보다 세계 탐구의 의지를 중시하였다(몽테뉴).
7)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간직하고 쿠사누스를 거쳐 칸트와 독일관념론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은 16c 신스콜라철학과 17c의 학원형이상학이다.

2장 17,18세기의 여러 체계들
1) 경험론은 단순히 사실적인 것에 주목하면서 근세의 철학적 혁명을 가져왔고, 합리론은 필연적인 것에 주목하여, 제일철학의 근본문제인 영역 존재론 탐구에 매진했다.
2) 데카르트는 철학을 수학이나 기하학과 같은 명석판명한 체계로 구축하려 했고, 순수하고 단순한 근본 원리(생각하는 자아)를 (본질)직관을 이용해 파악하고자 하였다.
3) 그는 본유관념 같은 존재론적 절대 진리를 확신했다는 점에서는 고대인이지만, 객체에 앞선 주체의 강조와 의식의 회의 같은 인식론 탐구라는 점에서는 근세인이었다.
4) 불완전함은 완전함을 전제로 하고, 기본적인 속성이 우연적인 양태에 앞서듯이 원인은 결과보다 실재적이며, 관념으로 파악한 것은 실재한다는 신존재 증명을 펼친다.
5) 기하학적 기계론은 물체의 운동을 수학적인 경계선의 이동으로 설명하지만, 영혼과 신체 및 정신의 상호작용이 단독적 실체개념과 부딪히는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다.
6) 스피노자에게 순수 이성의 앎이란 무시간적, 본질적이며, 존재를 직관으로 파악하는 힘으로, 정의에서 출발하여 공리를 세우고 정리하는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한다.
7) 하나와 여럿은 실체와 실체의 양상 혹은 속성이므로 기하학적 인과 질서에 묶인 필연적인 존재의 사슬 관계이며, 목적성 없이 맞물려 있는 진정한 동일성의 일원론이다.
8) 라이프니츠의 '단자'는 연장이 없고 나눌 수 없는 독립적 실체로서, 의식적인 표상을 가진 존재자에게만 쓰이는 영혼 개념을 확장하여 무의식적 표상까지 포괄한다.
9) '단자'는 스피노자의 실체와 유사하게 근원적이고 독자적이지만, 다수는 실체의 표상이 아니라 참된 실체로서, 각각의 단자들은 서로 다름의 개별성을 간직하고 있다.
10) 홉스는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물체의 작용과 현상을 합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보고, 철저한 유물론과 현상과 이름의 자의적 결합인 유명론을 주장한다.
11) 로크는 인간이 백지상태로 태어나서 관념마저도 경험으로 배우는데, 복합관념은 단순관념의 결합일 뿐이고, 보편관념은 추상작용으로 구성한 이름이라고 말한다.
12) 로크에는 직관과 논증을 통한 진리 인식의 긍정성이라는 실재론과, 감각적인 인식들의 조합인 자연 법칙의 개연성이 혼재되어 인식론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13) 흄은 순수한 사실성의 세계에 정착하여 경험은 시•공간의 접촉에 바탕한 관념의 연합이며, 심리적인 중력의 법칙에 불과한 하나의 신념이라는 회의주의를 천명한다.
14) 초월적인 진리를 기반으로 하는 경이로운 신적 존재의 그늘에서 벗어나, 권력과 자연적인 욕구를 찬미하고, 집단적 공리와 이기주의를 정의(正義)로 정의(定義)한다.
15) 계몽주의는 기계적 세계관과 과학의 필연적인 합법칙성을 진보의 의지에 실어 대중에게 전파하려는 열망이자, 이성의 빛을 받은 이상적인 인간의 실현을 갈구했다.
16) 홉스나 로크의 자연상태가 분쟁지대인 것과 달리 루소의 자연상태는 이상적인 인간들이 모인 이상적인 사회를 말하며, 계몽주의의 낙관적 이성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17) 계몽주의는 절대적 상대주의를 견지하면서 이성의 무한성을 긍정했지만, 무한한 낙관주의가 뻗어나간 자리는 고전적 형이상학이 사라진, 진리가 비어있는 자리였다.

3장 칸트와 독일관념론
1) 비판철학 이전의 칸트는 뉴턴의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라이프니츠의 계몽주의, 루소의 감성철학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물음들에 대한 답을 시도하고 있다.
2) 흄을 만나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칸트는 형이상학적 물음들, 즉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거부하고 인간 이성의 기초와 한계를 규정하고자 했으며 3대 비판서를 집필한다.
3) 순수이성비판은 선천적인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검증하여, 학문이 신념에 불과하다는 흄의 회의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이며, 순수수학과 물리학에서 근거를 찾는다.
4) 칸트는 선험적인 인식을 형식(형상)이라고, 여기에 들어맞는 질료를 감각들로 칭하는데, 우리의 정신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감각을 선천적인 형식으로 가공, 분류한다.
5) 공간과 시간은 추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존재와 세계를 직관하기 위한 전제이며, 개별적인 관념들이고, 자체 안에 여러 공간과 시간을 내포한 선험적 형식이다.
6) (감각적인) 직관과 (추상적인) 개념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것은 판단 형식에서 이끌어낸 범주들이며, 객관 대상은 인식주체의 선험적인 주관 형식들 안에서야 종합된다.
7) 이념은 경험의 가능성을 넘어서 이해된 개념(Begriff)이자 인식 주관 속에서 최고로 가능한 통일성인 이성의 추론 활동으로, 다가서지만 도달할 수는 없는 경험 전체다.
8) 이념은 전통형이상학에서 존재자들 중의 존재자였지만 이제는 막연하게 실재 위에 떠돌면서, 일종의 발견을 해내는 의심스러운 주관적인 의식의 내용으로 격하된다.
9) 도덕법칙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은 순수이성의 당위(Sollen)로서 '주어진 것'이고, 인과적인 현상 세계를 벗어나서 당위의 전제로 주어지는 선천적인 자유에 기반한다.
10) '판단력 비판'은 감성계의 자연개념과 초감성계의 자유개념을 통합하기 위해 합목적성의 이념을 제시하지만, 현상계의 인과성과 '그런 것 같음'의 분리는 여전하다.
11) 피히테는 인간의 내적 가능성을 무한 긍정하여 <나>를 세계존재 전체의 근원으로 삼고, 칸트를 얽어맨 경험론을 제거하여 '자기의식'의 절대적인 관념론을 주장한다.
12) 쉘링은 <나>와 독립해 있는 객관적인 정신, 곧 자연세계를 강조했는데, 정신과 자연, 주관과 객관, 실재와 관념은 동일하며 본질은 하나라는 동일철학을 주장한다.
13) 낭만주의자들은 신의 의지를 선과 악의 분열로 보고, 순수이성과 경험주의에 반대하는 비물질적인 앎과 믿음의 통일, 원초적 인간의 회복과 종교적 사명을 강조한다.
14) 헤겔의 로고스는 언제나 있고, 만물을 창조하면서 만물 자체이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절대적인 세계정신으로서, 신과 세계의 본질적인 차이인 초월사상이 사라진다.
15) 절대자는 본질적으로 결과이며, 마지막에 가서야 본래 있던 그대로의 것이 되는데, 이 과정은 대상들간의 대립이 전체 안의 계기라는 변증법적 통합으로 진행된다.
16) 논리학은 <자체로서 스스로를 위해>(An-und-für-sich), 자연철학은 <달리 있음>(他在, Anderssein), 정신철학은 <자신에게 있는>(Bei-sich-Sein)을 다룬다.
17) 국가는 객관적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자신에게 되돌아 온 법률•도덕의 체현이자 유기적인 종합체로서, 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실현 가능한 상태이다.

2편 현대철학
1장 19세기에서 20세기로
1)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주관적 현상과 '사물 그 자체'의 구분을 받아들였지만, 세계 자체와 만날 수 있는 힘이자 현상 세계의 본질인 맹목적, 무목적적인 의지를 말한다.
2) 의지는 개별화의 욕망으로 인해 전체와 대결하지만, 거기서 비롯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것은 예술과 동정의 윤리를 통해 가능하다.
3)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관념론에서 감각을 구해내어 모든 실체의 본질로 자리매김하고, 기도의 자리에 노동을, 종교의 자리에 정치를 집어넣어 국가주의를 강화한다.
4) 마르크스는 선대 유물론이 세계의 완전성을 받아들여 해석하기만 하는 태도를 지적하고,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혁명의 수단으로서 철학을 전유한 역사 유물론을 편다.
5)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인간의 완성과 즐거운 노동을 주장한 프랑스 계몽주의에 헤겔의 사변을 덧붙인 것이며, 구체적인 대안 없이 이상사회를 약속하는 한계가 있다.
6) 키에르케고르의 <나>는 보편자의 계기에서 벗어나 실존적인 결단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며, 세계는 비논리적이라는 불안을 안고 비약을 감행하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7) 신은 시간(생성) 속에서 역설로만 존재하고, 유화와 위안이 아니라 고통과 절망의 끝에 서 있는 타자이므로, 인간은 무한한 내적 정열로 불확실한 선택을 감행해야 한다.
8) 니체는 삶을 '(총체적인) 권력에의 의지'로 규정하면서 기존의 관념적, 행복주의적인 노예의 도덕을 뒤집어엎고(르쌍티망), 당위의 자리에 운명에 대한 사랑을 놓는다.
9) 운명과 자유는 필연적이면서, 영겁 회귀하는 세계의 의지 아래에서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는데, 새로운 가치를 실현할 초인은 신과 무(無)를 이겨내고 오고, 오지 않는다.
10) 실증주의는 인류의 정신사를 페티시즘에서 다신교와 일신교로 나아가는 신화•신학적 시기와 형이상학적 허구의 시기와 직접적인 실재를 다루는 실증 시기로 나눈다.
11) 프라그마티즘은 인간의 행위의 목적에 맞춰진, 그래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을 참된 것으로 보며, 종교와 예술은 이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유용한 허구들이다.
12) 귀납 형이상학은 경험을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여, 인식의 결정적인 근원이라고 보며, 가설적인 성격밖에 갖지 못하지만 자연과학 시대에 형이상학을 존속하게 했다.

2장 20세기의 철학
1) 베르그송은 현상주의의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필연성을 거부하고, 시간의 체험은 각자에게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개념은 일회적, 직관적으로만 드러난다고 말한다.
2) 의식은 지성만이 아니라 충동을 포함한 '삶의 약동'이며, 이것이 모든 존재의 정수이고, 도덕 역시 관습적인 경험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이 발현한 초지성적 산물이다.
3) 딜타이의 정신과학은 역사 안의 인간의 삶을 다루며, 헤겔이 단독자의 지양과 절대자를 말한 것과 달리, 그는 개별자의 다양성과 상대주의적•일회적인 삶을 탐구한다.
4) 훗설은 모든 주관화에 반대하여 논리적 구성요소의 객관성을 긍정하고 경험론의 심리주의를 거부했지만, 존재 자체를 파악하는 '본질직관'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5) 하르트만은 인식에 앞서고, 독립해 있는 어떤 것을 파악하려는 인식의 형이상학을 전개하는데, 그의 주제는 보편형상이 아니라 현상으로 주어져 있는 실재의 분석이다.
6) 하이데거는 '존재자'에 앞서 '존재 자체'가 있고, 존재자는 '자기를 벗어나 존재 안에 있는 것'이며, 존재가 드러나는 지점은 인간이 아닌 인간의 사고와 언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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