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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결정과 발발 ㅣ 나남신서 477
박명림 지음 / 나남출판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서론 : 한국전쟁 연구의 의미와 방법
1) 첫째, 한국전쟁의 결정과정을 탐색하고, 둘째, 전쟁의 시작과 발발을 다루고, 셋째, 전쟁의 기원과 원인(해방, 48년 질서)을 찾고, 넷째, 전쟁의 성격과 의미를 규명한다.
2) 연구의 준거는 사회의 다수구성원으로서 변혁을 통과해 온 농민들, 언로의 보장과 정당정치의 민주주의 여부, 이념 갈등을 넘어 대결 구도의 핵심이 된 민족주의이다.
3) 48년 질서기의 남북의 '역동적 상호간섭 관계'는 국제적 냉전체제와 동아시아 공산주의 삼각동맹과 통일 지상주의의 분단대립이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이다.
1부 전쟁의 결정 : 과정
2 분단과 국토완정론의 등장
1) 북한은 해방 이후 민족주의와 협력을 모색하는 민주기지론을 고수하다 49년 이후에 무력 통일을 시사하는 '국토완정론'으로 입장을 변경하고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2) 모택동은 전쟁 수행을 위해서 중국 통일과 모스크바의 결정을 선제조건으로 꼽았고, 49년 6월의 미군 철수를 기점으로 조선로동당 합당과 대남 정치선전을 강화했다.
3) 소련이 북한의 군사력 부족으로 전쟁이 장기화되고 미국의 개입, 국제적 반소 기류를 우려하자, 북한은 빨치산의 게릴라 활동을 강화했지만 남로당의 역량만 약화시켰다.
3 최종결정 :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의 합의
1) 중국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주의 삼각동맹이 형성되자 스탈린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군사원조에 나섰지만, 직접적인 군사지원은 배제하고 모택동의 동의를 강조하였다.
2부 전쟁의 결정 : 분석
4 스탈린 : 지원과 은폐의 이중주
1) 확보한 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구축이라는 일(一)지역사회주의를 채택한 스탈린은 미국의 38선 분할 요구를 수용한 2차대전 직후의 입장을 1947년까지 유지했다.
2) 스탈린은 중국혁명의 성공 이후 공세주의로 변화해 개전을 수락했지만, 외면적인 참여를 철저히 거부하고 전쟁 의도를 은폐하여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려했다.
3) 스탈린은 1950년 가을 전세가 기울자 북한 포기를 천명하면서 중국의 참전을 강력하게 권유하였는데,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소련의 국익이 최우선 목표였다.
5 모택동 : 내키지 않는 적극적 동의
1) 모택동은 스탈린의 결정을 존중하고 불편한 중소관계 개선을 위해서, 대만점령 및 중국 완전통일을 위해서, 조중간의 역사적 유대를 위해서 전쟁시도에 적극 동의하였다.
2) 스탈린은 미국 개입을 우려하여 중국혁명을 반대했고, 혁명 후에도 제2의 유고(티토)화를 우려했기에, 모택동은 그의 의심을 풀기 위해 한국전쟁의 항미원조에 나섰다.
3) 조중연대는 만주의 항일공동투쟁 경험과 46~7년의 중국혁명의 배후지 역할을 담당한 연대감을 기반으로 하지만, 주저와 단호 사이에 국익에 대한 고려가 우선이었다.
6 비밀의 늪 : 북한내부의 결정 1
1) 박헌영과 김일성은 권력 배분을 놓고 다퉜지만 공산혁명의 대의에는 합의했고, 박헌영이 전쟁을 반대했다거나 박헌영의 오판에 김일성이 넘어갔다는 주장은 모순이다.
2) 49년 6월 합당 이후에도 대남공작의 남로계열의 주도권을 인정하였고, 중앙위원회 구성도 힘의 배분을 반영했으며, 스탈린•모택동의 회담에 박헌영은 공동 참석자였다.
3) 북한 내부의 협의와 지령 지시, 소련•중국에 대한 지원 요청 등 전쟁과 관련한 결정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합작품이었고, 50년 10월 전세의 역전과 더불어 균열이 갔다.
7 비밀의 늪 : 북한내부의 결정 2
1) 만주게릴라파의 핵심 중 한 명인 최용건을 필두로 전쟁에 반대하는 온건파들이 있었지만, 의사수렴 과정에서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급진적 사회주의는 이를 무시하였다.
2)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군의 참전 가능성이 낮고 그 전에 전국을 장악하는 전격전을 구상했으며,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인민의 봉기가 일어나리라는 자기기만에 빠졌었다.
3부 전쟁의 발발
8 전쟁으로의 이행
1) 49년 말부터 38선 부근 주민들의 소개와 도로 및 교량이 신설됐고, 장비 보강과 동계-검열-하계로 이어지는 군사훈련과 중국 귀환 부대원들의 인민군화를 실시했다.
2) 소련군사고문단의 주도로 작전계획이 수립되자 부대 완편과 하계훈련으로 위장한 전선 집결이 시작됐는데, 이동 중의 정신교육과 위장평화전술은 사기를 진작시켰다.
3) 대남 사전조치로 남측 게릴라들의 월북과 조직화 교육 후의 재남파가 있었고, 수용 불가능한 평화통일 제안과 남한정부에 대한 원색적 비난을 퍼부어 명분을 쌓았다.
9 공격명령 : 6월 25일 직전의 38선 북선
1) 6월 들어 전선에 속속 도착한 부대들은 전투준비를 위해 장비를 점검하고 이동 금지, 비밀 엄수와 군사기율을 고취하였으며, 사상동향을 점검하고 정신무장을 강화하였다.
2) 전선 중앙에 배치된 부대는 서울-수원선 주타격으로 방어선 돌파와 적 주력부대 섬멸, 개성-서울, 춘천-수원 보조타격은 후방 차단 및 북상 부대에 대한 대비를 지시했다.
3) 6월 23~25일의 최후의 순간에는 교육, 선전과 최종결의, 장비점검을 시행하고 공격노선의 최근접 정찰 및 지뢰 제거가 끝나자 포병의 폭격, 파괴사격과 함께 돌격하였다.
10 마지막 조치 : 북침의 주장
1) 북침 주장의 근거는 문학봉과 조소앙 등 북한으로 넘어간 남한 고위층의 폭로와 북벌 의지를 담은 이승만의 편지와 군사계획 등이지만 실제 침공의 증거가 담겨 있지 않다.
2) 해주침공설은 전쟁 초기에 북침의 강력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부정한 점, 해주 지휘관들의 영전, 옹진침투 이후 서울까지 귀환루트의 난맥상 등의 허점이 많다.
3) 북침설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들은 의도를 숨기고 교묘하게 목적을 달성하려했던 북한과, 의도만 드러내고 능력은 형편없었던 남한의 허세의 뒤엉킴에서 탄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