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이해하기 - 경쟁·명령·변화의 3차원 경제학
리처드 에드워즈 외 지음, 이강국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1. 경제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①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가 갖는 제약constraints(행동에 대한 제약), 선호preferences(결과에 대한 평가), 그리고 한 개인의 신념beliefs(특정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이해)을 고려해야 한다.

   ② 이기심은 여러 동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③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을 인간 본성human nature이라고 하며,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문화적 차이라고 한다.

   ④ 모든 동물은 같은 종 내의 다른 구성원과 경쟁하지만, 인간은 친족의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과 협력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2. 3차원 경제학은 경제생활을 구성하는 경쟁·명령·변화를 모두 고려한다.

   ① 자본주의는 경제체제의 하나이다.

   ② 모든 경제체제는 수평적 차원(경쟁), 수직적 차원(명령), 시간적 차원(변화)에서 설명할 수 있다.

   ③ 경제학은 사실facts에 대한 학문일 뿐 아니라 가치values에 대한 학문이기도 하다.

   ④ 3차원 경제학의 세 가지 요소

      가) 경쟁competition : 다수의 잠재적 소비자와 판매자들 간의 교환과 선택이 지배적 역할을 하는 경제적 관계의 한 측면. 주로 시장에서 이루어진다.

      나) 명령command : 힘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경제의 관계적 측면. 타인에게 비용을 부과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용가능한 정보를 제어하는 능력도 포함한다.

      다) 변화change : 사람과 경제체제의 역사적 진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제체제 내에서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는 과정이 발생한다.


3. 정치경제학(3차원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① 정치경제학에 공헌한 인물들은 구체적인 경제 현실과 씨름했다.

   ② 정치경제학의 주요 사상가들

      가) 아담 스미스 : 노동 분업은 독립적인 경제 행위자들을 경제적으로 상호의존하게 만든다. 특정 개인이나 제도가 의식적으로 질서를 만들지 않더라도, 즉 개인의 이기심에 맡겨 놓아도 질서 잡힌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 공공 이익에 전혀 관심없는 이기적 행동도 사회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나) 칼 마르크스 : 경제적 이해관계에는 조화만이 아니라 갈등도 존재한다(교환이 당사자들 모두에게 동등한 혜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도 자신들의 이해를 방어하고 증진시키고자 행동할 수 있다. 어떤 경제체제든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자체의 작동에 반응하면서 변화한다.

      다) 조셉 슘페터 :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제적 변화의 한 형태 혹은 양식이며, 변화를 멈춘 적이 없다. 진보(기술 혁신과 조직 및 사회 변화)란 낡은 사업 방식이 ‘창조적으로 파괴’될 때 일어난다. 혁신이 대규모 생산의 경쟁 우위와 결합될때, 자본주의 경제에서 대기업은 소기업보다 우월한 경쟁력을 갖는다. ‘장기파동’long waves이나 ‘장기변동’long swings현상을 설명했다.

      라) 존 메이너드 케인스 : 실업은 임금이 너무 높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이 생산한 재화에 대한 수요가 너무 적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자체적으로 균형 상태에 도달할 수 없으며, 필요한 경우 정부가 적정한 재화나 서비스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마) 로널드 코스 : 가격 결정 체계(시장)의 역할을 믿으며 중앙 집중적 경제 계획이 불가능하다는 고전학파의 믿음과 명백히 계획된 사회와 기업이 존재하고 작동하는 현실은 어떻게 양립하는가?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명령으로 일을 조직할 때 발생하는 거래 비용이 시장 교환으로 같은 일을 조직하는 데 드는 거래 비용보다 작기 때문이다. 또한 거래 비용이 없다면 파급효과(외부성)의 문제는, 많은 경우 (이론적으로는 당사자 간의 협의를 통해서) 정부의 개입 없이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는 거래 비용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바) 아마르티아 센 : 평균 소득 같은 지표로 국가의 경제 발전을 측정하거나 이를 기초로 소득수준을 높이는 정책을 고안하기보다는, 빈곤, 열악한 경제적 기회, 체계적인 사회적 박탈, 관용 없는 배타성, 공공시설의 경시, 독재정치, 억압적 국가 등 자유를 제한하는 주요 원천을 제거해야 한다. 기근은 식량 부족이 아니라 불평등한 소득분배가 식량의 극심한 불균등 분배를 가져오기 때문에 발생한다.


4. 잉여의 기원과, 규모, 잉여를 통제하고 활용하는 사회 시스템을 살펴본다.

   ① 경제는 노동과정들labor processes의 집합체다. 각각의 노동과정은 기술(투입과 산출 사이의 관계)과 생산의 사회적 조직화(사람들이 생산과정과 맺는 관계)로 구성된다.

   ② 잉여는 노동과정을 통해 생산된 생산물의 총량이, 생산자들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생산에 사용된 원료 및 생산과정에서 사용된 기계의 마모분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클 때 발생한다.

   ③ 잉여의 크기를 결정하는 국가 내 경제 관계, 국제적 경제 관계들은 때때로 매우 갈등적이다.


5. 경제적 계급은 잉여 생산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통제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① 계급 집단은 생산물을 생산하지만 잉여 생산물을 통제하지 못하는 집단과 잉여 생산물을 통제하는 집단으로 나뉜다. 

   ② 경제체제란 다양한 재산권 제도를 바탕으로 노동과정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다양한 방법을 말하며, 이 재산권 제도는 다시 잉여 생산물이 어떻게 사용될지를 결정한다.

   ③ 자본주의는 자본재를 소유한 고용주가 임금노동자를 고용해 이윤을 목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특정한 경제체제이다.

   ④ 자본주의에서 잉여는 ‘이윤profit’으로 나타난다.

   ⑤ 계급 개념의 네 가지 측면

      가) 모든 계급은 (다른 계급과의) 관계로 정의된다. 

      나) 계급 관계는 노동과정에서 각각이 점유한 특정 위치에 따라 정의된다. 

      다) 계급 관계는 위계적(수직적)이다.

      라) 대부분의 경우, 생산 계급과 통제 계급의 이익은 충돌한다.

   ⑥ 자본주의 노동과정의 세 가지 측면

      가) 상품생산 : 돈을 벌기 위해 판매할 의도를 가지고 생산한 물건이나 서비스. 상품은 시장을 전제한다.

      나) 자본재의 사적 소유 : 사유재산이란 소유물을 사용, 판매할 수 있는 권리, 거기서 나온 수익에 대한 권리, 타인이 자신의 소유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리(고용 및 해고의 권리 포함)이다.

      다) 임금노동 : 임금을 받는 대가로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지는 노동. 자본재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6. 자본주의 경제의 고유한 특징인 경쟁은 잉여 생산의 많은 부분을 소비보다는 투자에 사용하게 한다.

   ① 기업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이윤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이윤 획득을 둘러싼 경쟁은 불가피하다.

   ② 이윤을 얻기 위한 경쟁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투자의 과정을 ‘축적’이라고 부른다.

   ③ (미국의) 자본주의 역사는 축적 과정을 쉽게 해주는 여러 제도적 장치들을 발명했는데,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을 사회적 축적 구조social structures of accumulation라고 부른다.

   ④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 자본주의의 변천 과정

      가) 경쟁 자본주의competitive capitalism(1860년대-1898년) : 소규모 사업체들이 주로 가격 인하로 경쟁하던 시기

      나) 법인 자본주의corpoate capitalism(1898년-1939년) : 대규모 기업 집단(트러스트) 등장, 노동권 열악, 대공황이 야기한 실업과 이윤 감소로 해체

      다) 조절된 자본주의regulated capitalism(1939년-1991년) : 고용과 성장률을 중심으로 정부의 직간접 규제 증가, 사회보장, 실업 급여 같은 정부 보조 증가

      라) 초국적 자본주의transnational capitalism(1991년~  ) : 국제적 상품 유통, 인구 이동, 지식 교환

   ⑤ 노동조합이 발전하면서 나타난 노동시장의 분화

      가) 독립 1차 노동시장independent primary labor market : 고도로 관료화되거나 직업의 전문성이 확실한 일자리들을 포함한다. 수공업자, 기술자, 전문직, 하위 관리직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나) 종속 1차 노동시장subordinate primary labor market : 노사 합의 같은 집단 협상을 통해 조직된 일자리들을 포함한다. 주로 산업 분야에 속하며, 노조가 조직된 산업 노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다) 2차 노동시장secondary labor market : 1차 시장의 특징인 공식적 조직화가 미비한 직업들로 구성된다. 서비스나 소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점원, 계절노동자와 노조가 없는 소규모 사업체 직원들이 여기에 속한다.


7. 교환의 중요한 형태 중 하나인 경쟁 시장은 수요와 공급 개념으로 분석할 수 있다.

   ① 경쟁 시장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수많은 잠재적 구매자와 판매자로 구성된다.

   ② 경쟁 시장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공급곡선, 수요곡선, 그리고 시장 청산market-clearing이다.

      가) 수요곡선(demand curve) : 각각의 모든 가격에서 수요자들이 얼마만큼 재화를 구입하고자 하고, 또 구입할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 

      나) 공급곡선(supply curve) : 각각의 가격에서 공급자들이 팔고자 하는 재화나 서비스의 양을 나타낸다.

      다) 시장 청산 가격market clearing price : 판매자가 판매하고자 하는 제품의 수량이 구매자가 구매하고자 하는 수량과 정확히 일치하게 되는 시장가격을 말한다. 즉 P(가격)=MC(한계비용) 상태를 말한다.

   ③ 공급곡선과 수요곡선의 위치를 결정하는 요인들

      가) 공급곡선 : 기술, 투입 비용, 대안적 이윤 기회, 잠재적 공급자의 수

      나) 수요곡선 : 소비자들의 선호, 소득(분포), 다른 재화의 수와 가격, 잠재적 수요자의 수


8. 시장은 경제를 구성하는 수많은 행동들을 조정하며, 그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① 경쟁시장은 성공은 보상하고 실패는 처벌함으로써 분권화된 유인 구조decentralized system of motivation를 제공한다.

   ② 일정한 조건에서 시장은 전체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경제를 조정한다. 그러나 이 조건이 사라지면, 시장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③ 경제적 조정economic coordination의 두 가지 방식 (시장과 계획)

      가) 준칙에 의한 조정(coordination by rules) : 상호 작용이 행위의 보편 원칙에 따라 결정된다. 

      나) 명령에 의한 조정(coordination by command) : 상호 작용이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하는 명령에 의해 결정된다. 

   ④ 조정의 실패 (기후 온난화, 어획량 규제 등)

      가) 죄수의 딜레마 : 협력 부족이 조정의 실패를 초래하는 경우 

      나) 공유지의 비극 :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가 공유지를 훼손하여 공동 이익을 해치는 경우

   ⑤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 :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시장에서 자발적으로 상호 작용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 경우

      가) 소수가 시장을 통제하는 경우 (독점의 폐해)

      나) 생산 분야의 음의 외부성 (사회적 비용이 기업의 사적인 비용을 초과하는 경우, 환경오염)

      다) 소비 분야의 음의 외부성 (개별 소비자의 편익과 비용이 전체 사회의 편익과 비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 흡연자의 담배 연기 문제)

      라) 필요가 시장 수요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경우 (노숙인들은 집을 살 만한 구매력이 없다)


9. 이윤율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는 기본 도구이다.

   ① 이윤이란 생산에 투입된 요소(원료, 기계의 마모분, 노동)에 대한 보수를 모두 지불하고 난 후 남는 부분, 즉 잉여를 말한다. 경제 내의 모든 투입 요소들에 대한 보수의 총합이 경제적 총생산물의 가치와 같게 되면 이윤은 존재하지 않는다.

   ② 이윤율이란 이윤을 총 자본재의 가치로 나눈 값이다.

   ③ 자본가 집단이 이윤율을 높이는 방법은,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 비용으로 높은 노력 지출을 뽑아내고, 정부에게 낮은 세금으로 필요한 서비스를 얻어 내며, 원재료와 여타 투입 요소를 낮은 비용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④ 이윤의 종류

      가) 상업이윤 : 구매 비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제품을 팔아 생기는 이윤

      나) 자본주의적 이윤 : 생산된 것의 가치가 투입된 노동 시간이나 여타의 투입 요소의 비용보다 큰 데서 발생하는 이윤

   ⑤ 이윤율의 결정 요인과 이윤율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

      가) 산출물의 가격 (+)

      나) 노동시간당 노력 지출 (+)

      다) 노동 효율, 주어진 노력 지출로부터 얼마나 많은 생산물이 산출되는가 (+)

      라) 노동시간당 사용되는 원료의 양과 기계 (-)

      마) 원료와 기계의 가격 (-)

      바) 시간당 임금률 (-)

      사) 자본재의 가격 (-)

      아) 고용된 노동 한 시간당 사용되는 자본재의 양 (-)

      자) 설비 가동률 혹은 소유 자본 중 실제로 사용되는 자본재의 비율 (+)


10. 이윤은 경쟁을 초래하고, 경쟁은 변화를 유도한다.

   ① 기업 간의 경쟁은 세 가지 형태를 띤다. 첫째, 가격 우위를 점하려는 노력(가격 경쟁력), 둘째, 잠재적 경쟁자들을 따돌리는 상황을 창출하려는 노력(돌파구 찾기), 셋째, 경쟁 자체를 제거하려는 노력(독점력)이다.

   ② 투자는 기업이 가격경쟁력을 얻고, 돌파구를 찾고, 독점력을 획득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③ 경쟁은 이윤의 크기를 다르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윤율을 균등화하기도 한다. 이윤율 균등화 경향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여러 힘들의 상대적 크기에 달려 있다.


11. 노동자와 고용주의 이해관계는 작업 현장에서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① 생산과정, 즉 노동은 본질적으로 지루하고 억압적이거나, 반대로 즐겁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생산과정이 ‘본질적으로’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다.

   ② 자본주의 기업은 명령 체계이고, 위에서 아래로 권력이 행사된다.

   ③ 고용주는 피고용인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이는 좋은 직장이 희소하고 노동시장에 항상 노동의 초과 공급, 즉 실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 불완전한 노동계약incomplete labor contract :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계약이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임금수준은 명시할 수 있지만 이후에 정확히 어떤 임무를 맡게 될지,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의 양은 어느 정도가 될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불완전한 계약

   ④ 고용주들은 노동자에게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받아들이는 임금의 최저한도보다 높은 임금을 지불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하면 ‘뭔가를 잃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따라서 현 임금수준에서 일할 용의가 있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비자발적인 실업 상태가 존재하게 된다.

      가) 저지선 임금fallback wage : 노동자가 현재의 직장을 유지하는 것과 이 직장을 그만두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할 때의 임금수준


12. 모든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조직화 방식과 생산기술을 결합한다. 이 두 요소가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따라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임금과 노동강도, 노동조건을 둘러싼 갈등의 표출 형태가 결정된다.

   ① 고용주는 작업 현장에 통제 시스템을 갖추어 더 수월하고 완전하게 노동을 추출하려고 한다. 

      가) 단순 통제(simple control) : 적절한 보상과 처벌로 고용주가 원하는 작업 속도 유지

      나) 기술적 통제(technical control) : 생산과정에 기계를 도입하고, 기계의 속도를 변화시켜 노동강도를 높이는 방법

      다) 관료적 통제(bureaucratic control) : 조직적 인센티브인 승진 체계, 호봉제 등을 이용하는 방법

   ② 현재의 생산기술 수준은 고용주가 생산을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제약 조건이다. (기술 변화를 둘러싼 갈등)

      가) 작업속도를 높이거나 조립라인을 도입하여 더 많은 노동 추출한다.

      나) 탈숙련화(deskilling) : 비숙련 노동자들로 작업할 수 있도록 작업 방식을 변화(분업)시킨다.

      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separation of conception from execution in work) : 일을 계획하는 사람과 일을 실행하는 사람을 다르게 한다.

   ③ 고용주들은 노동과정을 가장 수익성 높은 방향으로 조직하려고 하는데, 그 방향이 항상 가장 효율적인 방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④ 시장과 위계는 자본주의적 이윤 창출 과정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보완한다.


13. 고용과 실업은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총수요에 달려 있고, 정부 정책은 실업률을 낮추고 총수요의 변동을 완화할 수 있다.

   ① 재화와 서비스의 총수요는 총생산액과 다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총수요가 총공급보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②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할 때에도 실업은 존재한다.

   ③ 재화와 서비스의 수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이윤과 임금 사이의 소득분배다. 임금률은 소비재의 수요에 영향을 미치고, 이윤율은 투자재의 수요에 영향을 미친다.

   ④ 정부는 이자율을 조정하고,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여 고용 수준에 영향을 미친다.

   ⑤ 경제는 일반적으로 고용과 산출의 변동을 겪는데, 이를 경기순환이라고 한다.


14.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거시경제정책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없다.

   ① 높은 고용(낮은 실업률)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이윤이 감소하는데, 이를 높은 고용으로 인한 이윤 압박high-employment profit squeeze이라고 부른다.

   ② 수출입이 가능한 해외시장의 존재는 거시경제정책의 효과를 더욱 제한한다.

   ③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은 종종 모순된다. 적자 지출을 위해 필요한 정부의 차입은 완전고용을 위한 통화정책의 목표인 저금리와 갈등을 빚는다.

   ④ 실업이 존재하는 두 가지 이유

      가) 사적이고 조정되지 않는 경제적 의사 결정 : 각 개인(고용주와 노동자)의 의사 결정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노동시장의 공급과 수요에 불일치가 발생한다.

      나) 자본재의 사적 소유 : 생산과정의 계급적 성격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을 대부분 기업에 유리하게 조절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실업을 필요로 한다. 


15. 고용주, 노동자, 원료 공급자, 정부 사이에서 소득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해결되지 않을 때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① 경기 인플레이션(cyclical inflation) : 경기순환의 호황기가 끝날 때 발생하는 가파른 인플레이션

   ② 구조 인플레이션(structural inflation) : 주요 경제 행위자(은행, 대기업, 노동조합, 정당, 정부) 가운데 누구도 자신의 의지를 다른 이들에게 부과할 권력을 갖지 못하는 정치적 교착 상태political stalemate가 지속되면서, 산출의 감소나 후퇴가 동반될 때 나타나는 인플레이션. 

   ③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 저성장(불황)과 물가수준의 일반적 상승(인플레이션)이 결합된 형태

   ④ 실업-인플레이션 상충 관계(unemployment-inflation trade-off) : 실업률이 떨어졌을 때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실업률이 증가했을 때 인플레이션이 감소하는 경향

   ⑤ 인플레이션의 부정적 효과

      가) 인플레이션은 소득분배에 불균등하고 예측 불가능한 영향을 미친다. 인플레이션은 그 비용(때때로 이익도)을 매우 불균등하고 자의적으로 배분한다. 

      나) 인플레이션은 실질소득real income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플레이션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기 어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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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에서 인터넷까지 - 기술은 어떻게 사회와 역사를 변화시켜 왔는가
토머스 J. 미사 지음, 소하영 옮김 / 글램북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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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프로젝트에 복무하고 권세 가문의 전시나 궁정 오락을 위해 발현된 르네상스 시대 기술의 독창성과 특별한 성격은 '궁정시대의 기술(1450-1600)'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다빈치와 그의 동료 기술자들을 고용한 도시국가들과 궁정은 산업 또는 상업적 기술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꿈과 열정은 오직 전쟁, 도시건설, 궁정오락, 그리고 왕조의 위엄을 보여주는 데만 치중했다."(40) 따라서 궁정 기술자들 간의 방대한 지적 교류는 동료들의 모임 내에서만 공유되었고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통치자의 몰락 혹은 통치자의 문화 파괴와 같은 사회체제 분열은 기술 전통의 지속성을 떨어뜨리며 세대 간의 공유를 단절시켰다. 기술의 변화는 영구적으로 쌓여있지도, 지속하지도 못한 채 조각조각 흩어졌다. 기술에 있어 영구적이고 계승 가능한 전통은 인쇄술과 원근법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중유럽의 광산업에서 나타났다."(61)


인쇄술의 발전과 종교개혁,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독립체인 네덜란드의 등장과 국가 간 무역 분쟁은 대륙이 교역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기술 발전은 자본주의적 성향을 띄었지만 산업적이지는 않았던 '상업시대의 기술(1588-1740)'이다. "혁신적 선박설계, 수입 가공 등과 같은 금융 혁신을 일으킨 다수의 기술은 마차 공격대, 궁정 오토마타와 화려한 궁전들이 르네상스 기술의 상징으로써 왕권의 비전을 표현했던 것처럼 상업적 필요 때문에 발전되었다."(72) 당시 발트 해는 화물 용량이 아니라 선박의 갑판 면적에 따라 통행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플류트 선박은 전형적인 강화 구축을 포기하고 "선박 안에 더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갑판 면적을 최대한 줄여서 설계했다."(81) 17세기 중반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예멘까지 닿았던 무역 루트는 "상품거래, 공공 외환은행, 주식 거래를 포함하는 상업 자본주의 기관들에 대한 네덜란드의 대대적인 혁신에 기인한다."(85)


르네상스기 궁정 후원 시대와 비교했을 때보다 "훨씬 다양한 상인들과 무역업자, 조선업자, 선박 주인, 설탕 정제 산업 관계자들, 섬유제작자 외 많은 사람이 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였고, 이는 상업시대 기술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네덜란드 상업시대를 다른 시대와 구분하는 것은 바로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기법들이다. "다른 그 어떤 시대나 장소에서도 대형화물을 싣는 상선들이나 공장 같은 청어 어선, 내륙 도시들과 연계된 분주한 대형 항구들, 교역의 부가가치, 주식과 상품을 거래하는 거래소, 공공소유 선박, 청어, 양모, 한때는 튤립 거래를 위한 선물시장을 포함하는 세계적 금융기관의 정교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103-4) 각각의 교역품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생산량, 고임금, 고품질 수송"을 지향한 네덜란드의 상업기술은 "많은 생산량, 저임금, 낮은 생산품질을 강조하던 초기 산업기술과 극명히 대조되었다."(96)


영국의 부상(1740-1851)은 산업 지형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영국 역시 산업혁명 전 단계에는 "대개의 노동자가 작은 가게에서 일하거나, 건축, 양모, 가죽 등의 전통적인 산업에 종사"했지만, 런던을 위시하여 점차 산업화의 길로 나아갔다.(110) 1800년 무렵, 런던 인구의 3분의 1이 제조업에 고용되면서 "도시는 그 어떤 공장 도시보다 더 많은 증기기관을 사들였다. 1850년이 되자, 런던은 4개 대형 공장이 있는 도시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제조인력을 보유하게 되었다."(112) 거대한 "산업화 규모와 자본의 막대한 상승, 인력 비용절약, 기술 혁신, 그리고 시장집중, 제품별 특화의 풍성함, 공급 산업 등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극적으로 담고 있던, 맥주 양조산업은 "산업과 위생, 소비, 농업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며 런던이 산업도시로 가는 길목을 제공했다."(116-7) 포터 흑맥주 양조업자들은 빠르고 열정적으로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계화와 산업시대의 논리"를 도모했다.(120)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런던과 달리 면직물 기술자들이 거주하던 맨체스터는 "빠른 성장 속도가 개념의 열쇠였다." 1770년 맨체스터 인구는 3만 명에 불과했지만, "이후 인구는 한 세대를 보낼 때마다 2배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1851년에 이르자 그 수치는 30만 명에 육박했다."(128-9) 1825년, 맨체스터에는 방적 회사와 창고 회사가 결합한 통합 방적/직물 기업형 회사가 총 38개 존재했다. "도시의 섬유산업 규모는 1851년 정점을 찍었으며 이와 관련된 해당 노동자 수는 5만 6천 명을 육박했다. 아울러 이 해에 처음으로 천을 마무리하는 직업, 방직기계를 만드는 직업, 주택 건설과 기타 제조업 등에 관련해 고용된 총 노동자의 수가 단순히 옷감을 만드는 노동자의 수를 뛰어넘었다. 이 시기부터 성장은 단순히 한 도시의 산업에 의존했다기보다는 그 지역 전체의 면직물 공장들에 의존했다. 맨체스터에서 염색과 표백 제조 산업 또한 섬유산업의 특화 보조 산업으로 함께 성장했다."(136) 


철강산업의 중심지였던 셰필드에는 공장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셰필드의 기술자들은 "집에 작은 사무실 혹은 방을 두고 이름이 새겨진 도장 하나만 있으면 제조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연삭, 경화, 연마, 손잡이 혹은 자루 제조, 심지어는 스템프를 식별하는 일과 같이 나이프를 만들거나 날카로운 도구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모든 숙련된 노동은 거리에 널려 있는 숙련된 작업자의 가게를 방문해야 살 수 있었다." 소규모 제조사의 형태를 갖춘 "업체들은 낮은 자본, 빠른 회전율, 그리고 유연성에 대한 강점을 누렸으며 무엇을 하든 적절한 것들을 고르고 선택할 수 있었다."(145-7) 이처럼 산업혁명은 다양한 경로를 밟아 나갔다. 런던에서는 인구 집중을 통한 동시다발적인 산업 활동이, 맨체스터에서는 단일 산업에 종사하는 대규모 공장체계가, 셰필드에서는 고품질 철강 제품을 생산하는 분야별 지역 네트워크가 중점적으로 발전했으며, 다양한 보조 산업이 함께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19세기 중반, 산업화된 국가들은 해외 식민지 통치라는 신사업에 눈을 뜨면서, '제국의 도구들(1840-1914)'을 발전시켜 나간다. "발명가, 기술자, 무역상, 자본가, 정부 관료들은 국내의 용광로나 섬유산업에서 해외 식민지 개발을 위한 증기선, 전신, 철도를 향해 급속도로 관심을 돌렸다."(161) 그러나 제국주의가 착취한 수익은 식민지에서 수시로 벌어진 반란들을 진압하는 "군사비용뿐만 아니라 제국 관리들의 교통, 숙소, 식량, 연금 비용"으로 대부분 새어나갔다. 제국주의의 수혜를 받은 집단은 "무역상이나 투자가, 군 장교, 또는 관료들" 같은 일부 계층에 국한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기술 발전은 상업 및 산업 시대와 달리 "빠르고 편리한 수송과 신속하고 안정적인 의사소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부하고 효과적인 군사력을 보장"하는 데 집중됐다.(164) 일례로, 엄청난 연료를 소비하여 상업적인 이용가치가 떨어지던 증기선은 인도와 런던 간의 연결고리를 강화했으며, 아편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식민지에 깔린 전신과 철도망도 같은 목적에 복무했다. 미국에서는 원주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캐나다에서는 자치주들의 연합 조건으로,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단일 식민지 건설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철도가 건설되었다. 제국 기술의 주목적은 수익이 아니었다. "값비싼 증기선이나, 지나치게 화려했던 기관차, 넓은 폭의 이중 철도, 그리고 멀리 뻗어 나가는 전신과 전신망을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제국주의가 단순히 이전의 상업이나 산업시대의 연속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제국주의는 오히려 기술자들의 주목적을 산업과 경쟁하거나 심지어 대체시키는 일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증기선, 공작기계, 기관차, 철 그리고 면직물을 내다 팔 수 있는 확실한 식민지 해외시장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기업가들은 떠오르는 경쟁자들과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때문에 장기적인 측면에서 영국의 세계 경쟁력 하락이 가속화되었을지도 모른다."(201)


'과학과 시스템(1870-1930)'의 발전은 산업사회의 특징을 확연히 바꿔놓았다. 사회주의자들의 소망과는 달리 "기술을 통해 안정을 찾은 '체계적 자본주의'는 그들의 예상을 벗어났다. 이 시기의 기술자, 특히 과학 기반 산업에 종사하는 기술자는 아예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기보다는 존재하는 시스템을 개선하고, 안정시키고, 견고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허법, 기업 소유권, 산업연구소, 그리고 공학 교육 등을 동반한 시스템 안정을 향한 노력은 산업사회를 변모시켰다. 그리고 바로 이 시대에 '기술'이라는 용어가 장치의 집합, 산업의 복합체,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추상적인 힘이라는 오늘날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205-6) "산업과학자와 과학기술자는 거대한 시스템에 순응하려는 노력과 시스템의 질서정연한 확장을 위해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결"(232)하는 데 주력했고, 시스템의 혁신은 "전기, 전화, 자동차, 가전제품, 실내 장식, 라디오 등 거대 소비자 시장을 형성했다."(243)


모더니즘(1900-1950)은 근대주의를 대표하는 재료들인 강철, 유리, 콘크리트에 주목했다.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모더니즘에 열렬한 기술 중심적 세계관을 불어넣었고, 네덜란드의 데 스틸 회원들은 근대적 재료의 미학적 가치를 표현했으며,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이론과 실제의 통합을 달성했다. 근대적 재료가 곧 근대 문화의 기초라는 마리네티의 주장─강철로 건축 중인 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은 미래파의 유산 중 하나였다."(259-60) 모더니즘은 "근대 기술사회의 필연성을 반영하는 순리적인 발전 양식으로 표방되었으나, 모더니즘을 주류로 이끄는 운동은 충분히 정치적이었다." 모더니즘은 1920년대 도시 주거단지건설 계획으로 발전했지만, 1930년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억압에 시달리다가, 1940년대 이후 사회주의적 뿌리를 상실한 미학적 모더니즘으로 넘어갔다. 이후 "모더니즘의 구체적인 해석은 CIAM, 현대미술관, 그리고 다른 유행을 선도하는 단체의 중요한 홍보대상으로 전락했다."(286)


"1950~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군의 지원으로 기업들은 '첨단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들 기업이 바로 IBM, 보잉, 록히드, 레이시언, 제너럴 다이너믹스, MIT와 같은 주요 군수산업체이다."(291) 기술이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의 도구(1936-1990)'를 낳기 시작했다. 2차례의 원폭 투하로 막을 연 원자력 시대의 기술 경쟁은 대부분 "장거리 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다탄두미사일(MIRV)과 같이 공격용 대량살상무기"에 집중됐다.(315) 그러나 핵무기 군비경쟁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은 미국과 소련의 재정을 심각하게 갉아먹었고, 1960년대에 이르면 국방부조차 연구 예산을 맞춰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IPTO(정보처리기술국)에서 개발, 보유하고 있던 인터넷 관련 기술이 군용 통신망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1964년 RAND 기업보고서에 나온, 분산 처리되는 통신망 개념은 폐쇄된 군사시대의 지휘 통제기술을 넘어, 개방적이고 고객 지향적인 네트워크 기술로 이어졌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국제 표준화를 촉진한 팩시밀리, 표준화된 음식과 노동 관행McJobs, 단일화된 미국 문화McWorld로 대변되는 맥도날드, 전세계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인터넷은 기술과 문화에 대한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강력한 힘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2001년 9·11일 테러가 발생하며 세계화의 확장도 끝나버렸다."(377) '테러와의 전쟁'은 세계화라는 유토피아를 끝장냈으며, 안보 기술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과도한 보조금 정책으로 더 많은 화석연료 소비를 부추기는 에탄올 산업은 지속불가능한 에너지 정책의 표본이며, 통합된 단일 시스템이 가져오는 정보 리스크는 지정학적 불안정과 더불어 세계화의 부작용을 낳는다. 이처럼 기술은 자연발생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문화·경제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세계를 재구성하는 힘이다. 기존의 기술과 실천 관행이 새로운 대안을 봉쇄하고 기각시키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향후 기술 발전의 방향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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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문명
루이스 멈퍼드 지음, 문종만 옮김 / 책세상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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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세의 공간은 "상징과 가치를 기준으로 구성됐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는 교회의 뾰족탑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뾰족탑은 교회가 인간의 희망과 공포를 지배하듯 더 낮은 건물들 위에 군림했다. 공간은 일곱 가지 미덕, 12사도, 십계명, 삼위일체 등을 표현하는 상징 형식들로 분할되었다." 중세의 또 다른 특징은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으로 독립된 두 체계로 이해한 것"이었다. "제프리 초서는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의 전설을 동시대 이야기처럼 그렸다. 중세 예술가들은 시간의 경과라는 분명한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리스도의 삶을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양 묘사했다." 사건들을 연결하는 끈은 "우주적이고 종교적인 질서였다. 공간의 진정한 질서는 신이, 시간의 진정한 질서는 영원성이 부여했다."(44-6)


이처럼 기독교인들은 본래부터 "규칙적 기도와 헌신을 통해 영원성 속에서 정신의 충만을 도모"해왔다. 그러나 기계식 시계의 발명으로 시간 준수라는 오래된 개념은 "시간 절약, 시간 계산, 시간 배분으로 거듭 확대"되었고, 그 가운데 "인간 행동의 척도이자 근간이었던 영원성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38-9) 시계는 "시간이라는 아주 특별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기계로 인간의 경험에서 시간을 분리해냄으로써 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독립적 세계, 즉 특별한 과학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싹틔웠다."(39) 린 손다이크에 따르면, "1345년 경 한 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나누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런 분할된 시간이라는 추상적 사고방식은 점차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41)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추상과 계산이라는 새로운 사유 습관이 도시인의 삶에 깊이 배어 들었다." 미다스나 크로이소스 같은 "전설 속 인물들이나 드물게 추구했을 법한 ‘획득의 경제economy of acquisition’가 일상의 생활양식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생활양식은 '필요의 경제economy of needs'를 대체했고, 삶의 가치는 화폐 가치로 환원됐다. 상업의 전체 과정이 점점 더 추상적 형식으로 굳어져가면서 상품이 아닌 상품 가격, 상상의 산물인 선물 투기, 미래를 획득하리라고 가정된 이익에만 모든 관심이 쏠렸다."(52) 자본주의적 추상은 과학적 추상보다 앞서 나타났고 전형적인 과학적 방법의 모든 절차적 합리성을 강화"했는데, 과학 권력과 화폐 권력은 모두 "추상, 측정, 양화量化의 권력"이었다.(54)


중세 질서의 붕괴는 두 가지 현상을 낳았다. "하나는 익숙한 과거의 전통과 자기 원칙을 내팽개치고 약탈자, 발견자, 개척자의 삶을 살도록 인간을 떠미는 현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격동 속에서 강제로 사회를 조직화된 모듈로 만드는 군대의 교관, 군인, 회계사, 관료의 방법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현상이었다." 새로운 경제 체계에서 "가장 유용한 덕목은 절약, 선견지명, 방법을 적용하는 솜씨였다. 발명은 상상력과 의식儀式을 대신했고 실험은 신중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대체했으며 연역적 논리와 학문의 권위는 사례를 통한 입증으로 갈음되었다."(76-7) 새로운 질서의 이상적 인간형은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였다. 이제 자연 세계는 "공간, 시간, 질량, 운동, 양의 관점에서 질서 정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단순화 과정"을 거쳐나갔다.(84)


감각을 극대화하여 실용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수단들은 질의 영역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질적 성질들은 주관적이고 보이지도 않고 측정될 수도 없었기에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돼 묵살되었다. 직관과 느낌은 기계적 과정과 기계적 설명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87) 17세기를 지배한 "시계 제작, 시간 절약, 지리상의 발견, 수도원의 규칙성, 부르주아 질서, 기술 장치, 프로테스탄트 금욕주의, 마술, 그리고 특별한 질서, 정확성, 자연과학의 명확성, 이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된 활동이었고 각각은 사소한 의미만 가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기계의 방대한 영향력을 지원하고 기계 이용을 확대하는 복잡한 사회적·이념적 연결망을 형성했다." 사실상 이들은 "장기적 기후 변화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계절의 변화를 알렸던 것이다."(99)


어떤 산업보다 "광업은 근대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미 16세기에 광업은 자본주의적 착취 패턴을 확립했다." 기술 발전이 가져온 "광산 굴착, 새로운 탄층으로의 작업 확대, 갱도에 찬 물 빼기, 광선 운반, 갱내 환기를 위한 복잡한 기계류의 설치, 새로운 용광로의 풀무 작업에 수력 사용을 늘리는 등의 일은 애초에 광부들이 소유한 것보다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노동은 하지 않고 자본만을 투자하는 부재 소유absentee ownership 동업자들이 생겼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소유한 지분은 점차 부재 소유자들에게 넘어갔고 노동자들이 공유했던 이익은 단순한 급여 형태로 전환"됐고, 마침내 "기술 혁신과 자유노동의 기초를 놓았던 광업의 협력적 길드의 토대는 무너졌다."(123-4)


15-16세기에 이르면, "광업은 전쟁의 원천을 제공하고 자본의 초기 축적을 가능하게 했으며 군사 비용을 조달하는 핵심 산업이었고 무기의 산업화를 강화함으로써 금융가들의 배를 불렸다. 전쟁과 광업의 불확실성은 투기적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증가시켰고, 금융이라는 기생 권력이 창궐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다."(126) 전쟁은 "개인적 매력 없이도 여성을 얻고, 지식 없이도 권력을 획득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또 유용한 기술을 습득하지 않고도 노동의 보상을 가로채서 누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아울러 "근대 전쟁의 조직화는 군대의 실제 규율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임무를 떠맡았다. 상명하달식 명령 체계는 기계적 복종을 요구했다."(134-5) 군대는 "산업의 순수한 기계적 체계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 형식이었다."(142)


돈을 규율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던 "용병 부대는 언제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항복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전투는 옛날식 축구 시합처럼 조심스럽게 정해진 규칙 아래서 진행되는 흥미로운 의례와 비슷해졌고 위험성도 줄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기계적 체계는 군대에 절도와 통일성을 부여했다. "군사훈련은 군인들을 마치 한 사람이 행동하는 것처럼 단련했고, 규율은 마치 한 사람이 반응하는 것처럼 만들었으며, 군복은 마치 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145-6) 산업화가 진척되고 "개별 국가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국가 간의 경쟁은 계급 투쟁을 압도했다. 한때 왕조의 전유물이었던 전쟁은 프랑스혁명 이후 전 국민을 동원하는 주된 산업적 과업으로 재탄생했다. 이런 변화를 든든히 뒷받침한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부산물인 '징병제'였다."(275)


"원기술 시기eotechnic phase에 풍력과 수력이라는 에너지원과 목재와 유리라는 물질이 단단히 묶여 있었고, 구기술 시기paleotechnic phase에 석탄이라는 에너지원과 철이라는 물질이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듯이, 신기술 시기neotechnic phase에 전기는 폭넓은 산업 분야에서 특별한 물질들과 짝을 이룬다. 대표적으로는 새로운 합금, 희토류 금속, 초경량 금속 등이다."(329) 전기가 지역, 산업 중심지, 공장을 하나로 연결하고 수많은 관련 업무와 제도를 창출하면서 "신기술 수단들이 존재하고 공통 언어가 통용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한때는 아티카의 가장 작은 도시에서나 가능했던 정치 집단과의 직접 접촉이 일상화"되었다. 이제 목소리와 이미지를 통한 이차 접촉은 "점점 더 넓은 지역에서 대중적 사회 통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344)


"처음부터 기계의 가장 지속적인 정복 대상은 빠르게 유행에 뒤처지는 기구도, 빠르게 소비돼버리는 상품도 아닌, 바로 삶의 양식이었다. 즉 삶의 양식을 기계를 통해서, 그리고 기계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철커덕거리며 돌아가는 기계는 한 명의 교사였다. 기계는 한편으로는 비굴한 예속 상태를 강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성의 해방을 약속했다. 기계는 이전의 기술 체계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상상과 도전의 가능성을 열었다. 기계가 질서·체계·지성이 자연의 어디에 깃들어 있는지를 보여주자마자, 그때까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환경과 사회적 관습은 즉시 효력을 상실해갔다." 인간은 "인간 개성의 한 측면을 기계의 구체적 형식에 투사함으로써, 개성의 모든 다른 측면에 영향을 주는 독립적 환경을 창조했다."(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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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 - 문명을 읽는 새로운 코드 옥스퍼드 세계사
대니얼 R. 헤드릭 지음, 김영태 옮김 / 다른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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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도구를 만들어낸 후에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 - 마샬 맥루한


옛 호모 사피엔스를 신인류로 재탄생하게 만든 요인은 바로 문화이다. 수백만 년 동안 생물학적 진화에 묶여 있던 인류에게 "상징 표현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면서 인류의 문화는 절대 느려지거나 멈추지 않게 되었으며 새롭고 더 창의적인 발전 방법을 찾아나가게 되었다."(18) 신석기 시대에 정착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찾는 데 몰입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너무 무겁거나 약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물건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29) 인류의 신체와 두뇌는 신석기 시대에 정체되어 있었지만 "이들이 만든 유물의 다양성·효율성·의미는 지수적으로 증가하였다. 기원전 1만 년경 이들의 기술과 제작품 덕분에 인간은 가장 효율적인 수렵채집자가 되었으며, 이전에 보지 못한 가장 성공적인 포식자가 되었다."(33)


신석기 마을에서 문명사회로 전환할 수 있었던 주요인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잉여 식량을 생산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급진적이고 새로운 사회조직이 생산을 증대시키는 새로운 농업기술과 함께 등장한 셈이다."(36) 최초의 문명사회는 강이나 호수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건조 지대와 사막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 운하나 둑을 쌓는 토지 작업을 하면서, 협동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고대 문명이 남긴 "문자 기록과 기념물, 대부분의 수공예품은 엘리트가 만들었거나 엘리트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문명을 특징짓는 기술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비롯하여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능력을 크게 발전시켰다."(62-3)


철기시대 초기에 생산된 괴철bloom은 "청동보다 부드러웠지만, 쉽게 부서지고 날이 쉬 무뎌지며 녹이 잘 슬었다." 그럼에도 철은 "거의 모든 국가의 발굴하기 쉬운 지표면 근처에서 광석이 대량으로 발견된다"는 엄청난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널리 쓰이게 되었다.(67) 말과 바퀴 달린 이동수단 그리고 "저렴한 철제 무기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유라시아 전역이 전쟁에 휩싸였다."(72) 철기시대에는 모든 건설사업이 관개시설이나 운하처럼 "수력과 관계된 것만은 아니었다. 제국은 통일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우수한 운송수단이 필요했다. 따라서 도로 건설은 부분적으로는 무역을 위해, 더 중요하게는 수도와 외곽 지방 사이의 빠른 통신과 원활한 군대 이동을 위해 필수적이었다."(78)


"8세기 초 등자가 유럽에 도달하였고 여기서 전쟁의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크족의 지도자인 샤를 마르텔은 무거운 창으로 무장한 기병(창기병)의 가능성을 깨달은 유럽 최초의 지도자였다. 기수가 창을 단단히 잡고 등자가 있는 말과 한 몸이 되어 달리면, 창 자체의 무게뿐 아니라 기수와 말의 무게까지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창기병의 창은 보병이 던진 창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105) 말 가슴걸이와 편자의 발명은 농업 혁명뿐만 아니라 운송 혁명도 불러왔다. "목수들은 회전이 가능한 앞 차축, 브레이크, 물추리막대whippletree(길모퉁이를 돌 때 두 말이 끄는 짐의 무게를 같게 해 주는 수평막대)를 갖춘 바퀴가 네 개인 마차를 만들었다. 12세기에는 이런 무거운 마차를 흔히 볼 수 있었다."(118)


대항해 시대는 세계의 중심을 유럽대륙 너머로 확장시켰다. "폭풍이 몰아치는 유럽의 대서양 쪽으로 항해하기 위해서 북유럽의 선박 기술자들은 카그cog라고 불리는, 커다란 사각돛과 한 개의 돛대를 가진 둥근 통 모양의 배를 만들었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박 제조업자들은 "갤리선과 카그선의 장점만을 결합하여 카라벨caravel이라고 부르는 배를 만들었는데, 이 배는 세계 어느 대양에서나 항해가 가능했다." 바스코 다 가마, 콜럼버스와 마젤란 모두 개량한 카라벨을 타고 항해에 나섰다. 카라벨의 더 큰 형태인 "무장 상선 캐럭carrack과 큰 돛을 단 상선 갤리언galleon은 다음 4세기 동안 유럽 항해의 버팀줄이 되었다."(131) 16세기에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옥수수와 카사바는 열대우림 지역에서도 잘 자라나 아프리카인의 생존력을 크게 높였다.


18세기 산업혁명은 본질적으로 네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는 분업화이다. 이는 공장·농장·건설 현장에서 하는 일을 일련의 단순화 작업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여 생산·운송·통신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처음 두 가지의 결과물, 다시 말해 예전 방식으로 만든 제품보다 저렴해진 대량생산된 제품을 말한다. 그리고 네 번째는 화석 연료로부터 역학적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이다."(158) 증기기관은 "석탄·철·기계 제작의 다른 세 가지 산업과 발맞추어 진화하였다. 석탄은 물을 퍼내고, 기계를 돌리고, 마차를 끌고, 광산에서 승강기를 들어 올리는 엔진의 연료로 사용되었다." 그중에서도 "동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증기기관을 운송에 응용한 것이었다."(170-1)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이전 100년 동안 이룩한 기술의 승리였다. 1869년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이런 승리를 잘 보여주었다. 첫 번째 사건은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었다. 이로써 유럽과 동남아시아가 연결되었다. 두 번째 사건은 미국의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최초의 철도가 개통된 것이었다."(188) 적당량의 탄소를 함유하여 단단하면서도 휘어지는 강철은 철도와 해운을 전세계로 확산시켰다. 영국인 헨리 베세머는 강철 생산 과정을 개량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한 번에 수 톤의 강철을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전환로converter를 만들었다." 곧이어 한층 발전한 "지멘스-마르탱 평로법Siemens-Martin open-hearth furnace과 길크리스트-토머스법Gilchrist-Thomas process(1875)"이 등장한다.(189-90)


"20세기에 내연기관보다 인간의 삶과 환경에 더 큰 충격을 준 기술은 없었다. 화실이 실린더와 분리된 증기기관과 달리, 내연기관에서는 연료가 실린더 내부에서 연소되고 더 많은 에너지가 운동으로 바뀌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17세기부터 존재했지만 실제로 작동이 되는 내연기관을 처음 제작한 사람은 1859년 프랑스의 기술자 에티엔 르누아르였다." 다음 목표는 "내연기관을 (운송수단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가스관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1883년 독일의 기술자 카를 벤츠가 석유로부터 등유를 얻을 때 생기는 부산물인 휘발유를 기화시키는 법을 발견했다. 3년 후 벤츠는 다른 독일의 기술자 고트리프 다임러가 했듯이 3륜 마차에 휘발유 엔진을 달았다. 다임러와 벤츠는 곧 힘을 합쳐 최초의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19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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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찰스 P. 킨들버거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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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상대적 쇠퇴라는 생명주기에서 각국의 경험은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한 요소가 다른 요소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명력과 유연성이 경직성으로 변한 것이야말로 그 패턴을 결정한다."(65) 


11~12세기에 제노바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상업혁명은 한편으로 조선업, 다른 한편으로 재정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두 도시 모두 경작 가능한 땅이 없었으므로 피렌체 식의 봉건주의를 피할 수 있었고, 그 대신 선출된 관리(베네치아의 경우 통령[doge])를 둔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유지했다. 베네치아는 1104년에 건립된 국영 아르세날레(Arsenale)가 조선업을 주도했는데, 이곳에서는 해군용 갤리 선과 상업용 '대大갤리 선'을 건조했다." 배를 끊임없이 개량한 결과 "1300년에 이르는 약 100년의 기간 동안 상업혁명은 항해혁명을 초래했다." 상업혁명은 단지 "선박의 개량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전문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상품을 가지고 직접 여행하는 여상(旅商, merchant-traveler)은 줄고, 회계사무소와 창고에 머물면서 상품운송은 선장에게 부탁하여 거래 항구의 대리인에게 전달하게 하는 정주상인이 증가했다."(94-6)


"1380년 제4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 중의 키오자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제노바를 꺾었다. 제노바의 쇠락으로 15세기에 베네치아는 군사적, 경제적 패권을 차지했다."(97) 15세기 말까지 베네치아가 성공적으로 선두를 유지한 원인은 "공화정의 효율적인 정부 덕분이었다. 정부를 이끈 것은 평의회와 선출직 도제(doge)였는데, 이들은 거리낌없이 무역과 산업을 통제했다." 그러나 제노바와의 4번째 전쟁 이후 "공화국은 항상 20-30개의 상위 가문과 그들 밑에 위치한 100여 개 남짓한 귀족가문으로 이루어진 과두정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특히 구귀족 가문의 거만한 매너 때문에 분쟁이 풍토병처럼 지속되었다." 본질적으로 상업도시였던 베네치아는 금융 분야에서 피렌체에 뒤처졌다. "베네치아는 피렌체처럼 환어음이나 복식부기의 혁신을 이루지도 않았고, 무역활동 중의 많은 부분은 피렌체에서 융통한 자금으로 충당되었다."(100-1)


"베네치아의 상대적 쇠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르투갈과의 향신료 경쟁, 영국과의 모직물 경쟁, 네덜란드 및 영국과의 조선 경쟁이었는데, 이것들이 베네치아의 '지위, 제국' 그리고 헤게모니 상실로 이어졌다. 철 지난 표준에 매달린 것은 길드와 정부 모두의 실수였으며, 이야말로 태도의 경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111) 대외 부채도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경제발전을 저해한 주요인이었다. "과시소비가 이 모든 것에 한몫을 했다. 의상, 시골의 토지, 교외 별장, 공공건물, 그리고 예술품 등이 그 대상이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공직에 오르면서 메디치 은행 지점 통제권을 프란체스코 사세티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사세티 자신은 로렌초에게 충고했던 대로 해외지점을 엄밀히 통제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기를란다이오에게 그리게 한 가족 예배당의 제단화에 더 관심을 쏟았을지도 모른다."(114) 


포르투갈은 "15세기 전반에 자국 해안을 벗어나서 멀리 외국으로 진출함으로써 부국으로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선박건조창과 항해학교 덕분에 엔리케 왕자는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 곶 부근까지 항해해 가서 금과 노예 무역을 하였으며, '발견의 시대'의 막을 올렸다."(115-6) 그러나 포르투갈인은 "훌륭한 상인은 아니었다. 에스파냐에서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은 육체노동과 상업을 혐오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자체 생산하지 못했고, 그 대안으로 영국상품을 수입했다. 그 결과 브라질산 금이 리스본에서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쇠퇴의 또다른 요소는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이다. "종교재판소에 구금되거나 이민을 떠나면 그들의 자산은 몰수되었다. 이 조치는 그들과 거래하던 영국상인들을 멀어지게끔 했다." 마지막으로 1580년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로 합병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인력이 부족했던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의 군사모험에 충원될 인력을 제공해야 했다."(119-20)


에스파냐의 지리·정치·종교적 조건은 경제발전의 걸림돌이었다. "우선 도로가 형편없었다. 노새와 소달구지로는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통합할 수 없었다. 국내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었고, 먼 거리는 배를 통해서만 연결되었다." 카스티야 중심부에 위치한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는 "상업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도시로서, 다른 지역들로부터 곡식, 관세, 지대를 긁어 모았을 뿐 에스파냐 내륙에 자극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의 로마처럼 마드리드도 기생적이었다. 이 도시는 궁정, 대귀족(grandee), 이달고, 관료들을 유치했으며, 극빈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곡물 외에도, 해외의 사치품들과 지방 기술자들이 만든 준準사치품들을 소비하는 도시였다." 관세는 국내뿐만 아니라 식민지로 향하는 양모와 모직물 수출길을 봉쇄했다. "고리대금업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명령에 의해서 국내 환어음 결제도 금지"된 형편이었다.(124-5)


"중앙집중주의 대 다원주의의 고전적인 보기는 네덜란드 연합주인데, 이곳에서는 홀란드 주가 전체 7개 주를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홀란드 주는 육군, 해군, 상업 활동을 지휘했으며 다른 주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세금을 분담함으로써 '무임승차자들'인 각 주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특권 비용을 치렀다. 그러나 조너선 이스라엘은 다른 주들이 암스테르담으로 하여금 외환정책, 해운업, 무역과 어업을 통제하거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제어해서, 네덜란드 연합주는 본질적으로 탈집중화되고 연방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가 쇠퇴하던 18세기,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던 때에 다른 주들이 의사결정―특히 조세정책과 관련된―에서 고도의 중앙집중화를 허락하기를 망설이거나 심지어 거부한 것은 탈집중화가 얼마나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가로막고 쇠퇴를 재촉했는지 보여준다."(72-3)


네덜란드 역사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초기의 역동성의 원천이 과연 이 나라의 분권화된 특성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이다."(149)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6세기 말의 치열한 경쟁에서 한자 동맹을 물리친 후 기본적으로 '어머니 무역'(moederhandel, 근대 초 네덜란드의 경제에 발트 해 무역이 대단히 중요하고 또 다른 교역활동이 여기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어머니'에 비유한 표현)으로 이익을 얻었다." 조너선 이스라엘은 "네덜란드인들의 진정한 이점은 아시아 및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와의 '사치품 무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150) 어떤 면에서 보면,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은 본질적으로 과도기적이었다. 품질, 수량, 가격에 대한 정보가 확산되고 무역량이 증가할수록 직교역이 더 경제적이 됨으로써 중계지는 건너뛰게 되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도 비우호적으로 변해갔다. "바다는 해적들로부터 안전해졌고, 선박은 대형화되었으며, 각국은 자신의 상선단을 구축하고자 했다."(154)


네덜란드 쇠퇴의 다양한 '원인들' 가운데서 "전쟁, 외국의 중상주의, 외국이 네덜란드의 기법을 따라한 것, 무역과 금융에서 유럽 각국이 더 이상 암스테르담을 중계지로 이용하지 않은 것,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에 빌려준 자본을 잃은 것, 프랑스에 의해서 전쟁 배상금이 부과된 것 등은 외적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네덜란드 역사가들은 쇠퇴를 이런 것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무역과 산업에서 철수하여 금융으로 전환한 것, 런던에서 파리로 대부를 전환한 것, 소비품에 높은 세금을 매기고 또 이것이 고임금을 초래한 것, 세금 문제와 같은 것에서 지방이 중앙의 지도에 대해서 저항한 것, 길드가 존속한 것, 숙련공들을 상실한 것, 과소비가 행해진 것, 소득분배가 비대칭적인 것 등은 내적"인 요인이다. "생명력과 에너지를 가진 젊은 국가들은 오래된 독점권에 도전하지만, 늙은 국가들은 이러한 도전에 혁신적으로 대응할 역량이 없다."(171)


프랑스는 "성장이 쇠퇴로 이어진다는 우리의 복잡한 국가 생명주기 모델에 대해서 다른 측면에서 예외적이다. 이 나라는 우위를 획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나머지 나라들에 비하면 장기적인 쇠퇴도 겪지 않았다. 그 대신 프랑스는 골드스톤 모델에서 묘사된 것처럼 일련의 정부 붕괴와 격동을 겪었는데, 올슨이 말했듯이 오히려 이것이 새로운 출발의 기회들을 제공했다."(174)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난 뒤, 루이 14세는 왕실의 군대로써 프롱드 난을 진압했다. 중상주의 정책을 펼친 콜베르는 "보조금과 관세를 통해서 산업을 장려하고, 네덜란드의 조선공, 스웨덴의 광부, 이탈리아의 유리 제조공, 플랑드르의 레이스 제조공을 프랑스로 데려왔으며, 특히 모직물 교역에서 영국, 네덜란드와 맞서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바다에 대해서 무지했으며, 그의 호전적인 귀족들은 인력(人力)과 지도력을 놓고 바다와 육지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을 때 늘 잘못된(즉 육지) 쪽을 택했다."(176-7)


프랑스와 영국의 성장률과 성장단계를 비교할 때 "지폐, 은행, 중앙은행, 청산소, 보험회사, (장기 공채를 제외한) 유가증권 시장의 발전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비해서 약 1세기 정도 뒤떨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182) 재정개혁 시도는 "모두 재정가들의 거친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재정개혁은 결국 "프랑스 혁명기에 35명의 관리 및 재정가들이 체포되고, 이중 28명이 기요틴에서 처형되어서야 성취되었다."(183-4) 프랑스 대혁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의 태도는 오랫동안 구체제의 귀족적 가치가 지배했다. 이러한 정신은 개인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부심을 특징으로 한다." 귀족들은 "상업이 고상하지 않다고 여겼고, 그래서 지방 신사와 부르주아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성을 소유하고 귀족 신분으로 상승하기 위해서 부를 갈망했다."(197-8)


17-18세기에 해외무역을 장악한 영국은, 초기에는 유럽이 "주요 수입원 및 수출시장이었으나 후기에는 식민지가 그 뒤를 이었고 더 뒷시기에는 미국, 남아공 등의 독립국들과 준-독립적인 자치령들이 식량과 원재료의 수입원이자 제조품의 판매지가 되었다."(208-9) 자유무역으로의 긴 도정은 "1841년부터 1846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이 사이에 600개 이상의 관세가 철폐되고 1,000개 이상의 품목에 대한 관세가 '조세개혁'이라는 표어 아래 인하되었다." 자유무역은 "1846년 곡물법 폐지 직후에 목재 관세 및 항해법의 철회로 확대되었다."(217) 1880년대 곡물가격이 하락하자, 독일은 자유무역에서 재빨리 후퇴했다. 1879년 비스마르크가 호밀과 철을 필두로 관세인상 정책을 펴는 동안, 영국은 여전히 자유무역에 집착했다. "갈수록 영국의 단기이익에 반하는 데에도 자유무역을 고집한 것은 집단적인 기억 혹은 제도적인 지체의 전형적인 사례이자 코스의 정리(the Coase theorem)의 반증이다."(219)


"선두 주자의 불리함에 대해서 일부 경제학자들은, 만일 공장이나 기술 혹은 제도가 무용하고 비효율적이라면 언제든지 그것을 폐기해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며 조소를 보낸다. 이것은 경로 의존성의 힘을 간과하는 것이다."(230) 영국에서 신기술의 병목현상이 발생했을 때, 기술 개발에 실패하거나 다른 국가의 성공 사례를 도입하는 상황이 점차 누적되면서 "일부 산업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개입한 상인층이 너무나 두터워서 이들이 기술 향상을 저해했다. 이는 특히 면직물과 공작기계 분야에서 심했다." 상인들은 사실상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장벽을 둠으로써, 생산자에게는 "소비자는 이런 식의 것을 원하지 않소"라고 말하고 소비자에게는 "생산자는 그런 식의 것을 만들지 않소"라고 말하는 형국이 되었다.(231-2) 영국이 세계경제의 선두 자리에서 점차 내려온 것은, "강렬한 생명력이 점차 경직성과 변화에 대한 저항에 잠식당한다는, 국가 생명주기 개념에 잘 부합한다."(240)


"사회변동이나 심성 같은 요소들은 앞에서 설명한 국가 생명주기에서 종종 전면에 자리잡곤 했지만, 독일만큼 경제적 경로에 사회발달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곳은 없었다. 그것은 정치사뿐 아니라 산업, 관세, 통화, 경제의 역사에 모두 적용된다."(243)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독일은 "355개의 영방(Land)과 1,476개의 자율적인 제후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정복 전쟁으로 라인 강 서안은 1801년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나폴레옹은 1803년에 112개의 제후령―세속화된 두 개를 제외하면 모두 종교적 제후령들이었다―을 제거하고 대부분의 소규모 도시와 읍의 정치적 독립성을 종식시킨 뤼네빌 협약을 강제로 부과했다." 프로이센이 1871년에 프랑스에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은 완결되었고 "알자스와 로렌의 획득으로 영토가 더욱 확대되었다. 프로이센의 탈러는 마르크로 이름을 바꾸어 제국의 통화단위가 되었다. 1875년에는 제국은행이 설립되었다."(244-5)


"산업정책, 관세동맹 그리고 독일 철도체계 정비는 1850년에서 1857년까지 경제적 활력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길을 열었다.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영국의 곡물법 폐지는 곡물 수출 붐을 가져왔다. 특히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루르로, 그중에서도 비철금속 분야로 자본이 유입되었다." 영국에 대한 증오심은 철강 공업의 발전을 촉진했고,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베를린, 작센, 슐레지엔에서 산업의 고용이 증가"했다. 1860년대의 세 전쟁의 승리는 "행복감을 가져 왔고, 이것이 주택건설 붐과 회사 창설 시대(Grunderzeit)에 걸맞는 증권가격의 상승을 초래했으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으로 막대한 양의 정금이 유입되고 따라서 국가와 지방 자치체의 부채를 갚을 수 있게 된 덕분이기도 했다. 1873년 증권가격의 대하락은 경기하락을 드러냈지만, 소위 '대불황(great depression)'은 독일에서는 유럽 다른 지역에 비해서 미약했다."(251-2)


1945년 혹은 1950년부터 "대략 4반세기 동안 지속된 황금기는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전혀 도전받지 않았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나라들의 따라잡기와 미국 내부의 쇠퇴 징후가 함께 나타난 때이기도 했다. 항공, 컴퓨터, 전자공학, 제약, 인간의 달 착륙을 가능하게 한 관성 유도 장치, 컴퓨터 단층사진과 같은 의료기기 등의 신산업에서 1950년대의 큰 격차는 다음 10년 동안 좁혀지기 시작했다." 더욱 의미심장하게 미국의 쇠퇴를 가속화한 것은 "생산성의 둔화, 저축의 감소, 연방예산과 국제 경상수지 계정의 쌍둥이 적자, 다니엘 벨이 '탈산업국가'라고 일컬었던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 그리고 특히 금융에의 몰두이다. 이것은 재화보다는 자산의 판매와 구매, 그리고 제조업에서 신상품과 신공정을 개발하는 대신에 새로운 금융수단을 개발하거나 옛것을 부활시키는 데에 전념하는 것이다."(278-9)


국가주기의 일반적인 패턴은 교역, 산업, 금융의 순서이다. "첫 단계에서 교역은 경쟁적이고 공격적이며, 불명예스러운 수단을 통해서라도 외국의 기술을 습득할 준비가 되어 있고, 배우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제품을 외국 것으로 위장하곤 한다. 성장은 종종 수출지향적이며, 가끔 외국제품과의 경쟁에서 수입대체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유치산업의 육성을 위해서 보호무역 조치가 강구"되고 생존자들은 변화에 저항하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금융 주기는 "단기 혹은 때로 장기 자본대부를 통해서 교역과 산업을 촉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산거래, 그리고 생산보다는 부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 이행한다. 상인과 사업가들은 '위험 감수자'를 졸업하여 금리 수취인 신분이 되고 활력은 침체된다. 수입 중 소비의 몫이 증가하고 저축은 감소한다." 다양한 이해집단의 정치적 의사표출과 소득불평등, 부자들의 정치권력 독점은 "효율적인 정부의 행위를 가로막는다."(336-7)


"외부적 변화가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인지 지체시킬 것인지는 그 (국가의) 경제가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342) 혁신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의 딜레마는 이것이다. "안정적인 시기에는 장인의 본능과 낮은 수준의 혁신적 능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분권화가 선호된다. 반면에 위기나 중대한 변화의 시기에는 중앙의 지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앙이 너무 크게 성장하면 관료주의적 경화가 시작되어 그 다음 위기에 대응할 중앙권력의 능력을 저하시킨다."(346) 독자적인 기준 중 하나는 타이밍이다. "평화시에는 경제가 전향적으로 움직이고 분권화, 연방적이고 다원적인 자치의 기반 혹은 보완성이 촉진될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는 중앙집중화나 리더십이 요구되거나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중앙집중화를 선호하거나 분권화를 선호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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