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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찰스 P. 킨들버거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2004년 12월
평점 :
"성장과 상대적 쇠퇴라는 생명주기에서 각국의 경험은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한 요소가 다른 요소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명력과 유연성이 경직성으로 변한 것이야말로 그 패턴을 결정한다."(65)
11~12세기에 제노바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상업혁명은 한편으로 조선업, 다른 한편으로 재정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두 도시 모두 경작 가능한 땅이 없었으므로 피렌체 식의 봉건주의를 피할 수 있었고, 그 대신 선출된 관리(베네치아의 경우 통령[doge])를 둔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유지했다. 베네치아는 1104년에 건립된 국영 아르세날레(Arsenale)가 조선업을 주도했는데, 이곳에서는 해군용 갤리 선과 상업용 '대大갤리 선'을 건조했다." 배를 끊임없이 개량한 결과 "1300년에 이르는 약 100년의 기간 동안 상업혁명은 항해혁명을 초래했다." 상업혁명은 단지 "선박의 개량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전문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상품을 가지고 직접 여행하는 여상(旅商, merchant-traveler)은 줄고, 회계사무소와 창고에 머물면서 상품운송은 선장에게 부탁하여 거래 항구의 대리인에게 전달하게 하는 정주상인이 증가했다."(94-6)
"1380년 제4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 중의 키오자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제노바를 꺾었다. 제노바의 쇠락으로 15세기에 베네치아는 군사적, 경제적 패권을 차지했다."(97) 15세기 말까지 베네치아가 성공적으로 선두를 유지한 원인은 "공화정의 효율적인 정부 덕분이었다. 정부를 이끈 것은 평의회와 선출직 도제(doge)였는데, 이들은 거리낌없이 무역과 산업을 통제했다." 그러나 제노바와의 4번째 전쟁 이후 "공화국은 항상 20-30개의 상위 가문과 그들 밑에 위치한 100여 개 남짓한 귀족가문으로 이루어진 과두정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특히 구귀족 가문의 거만한 매너 때문에 분쟁이 풍토병처럼 지속되었다." 본질적으로 상업도시였던 베네치아는 금융 분야에서 피렌체에 뒤처졌다. "베네치아는 피렌체처럼 환어음이나 복식부기의 혁신을 이루지도 않았고, 무역활동 중의 많은 부분은 피렌체에서 융통한 자금으로 충당되었다."(100-1)
"베네치아의 상대적 쇠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르투갈과의 향신료 경쟁, 영국과의 모직물 경쟁, 네덜란드 및 영국과의 조선 경쟁이었는데, 이것들이 베네치아의 '지위, 제국' 그리고 헤게모니 상실로 이어졌다. 철 지난 표준에 매달린 것은 길드와 정부 모두의 실수였으며, 이야말로 태도의 경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111) 대외 부채도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경제발전을 저해한 주요인이었다. "과시소비가 이 모든 것에 한몫을 했다. 의상, 시골의 토지, 교외 별장, 공공건물, 그리고 예술품 등이 그 대상이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공직에 오르면서 메디치 은행 지점 통제권을 프란체스코 사세티에게 위임했다. 하지만 사세티 자신은 로렌초에게 충고했던 대로 해외지점을 엄밀히 통제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기를란다이오에게 그리게 한 가족 예배당의 제단화에 더 관심을 쏟았을지도 모른다."(114)
포르투갈은 "15세기 전반에 자국 해안을 벗어나서 멀리 외국으로 진출함으로써 부국으로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선박건조창과 항해학교 덕분에 엔리케 왕자는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 곶 부근까지 항해해 가서 금과 노예 무역을 하였으며, '발견의 시대'의 막을 올렸다."(115-6) 그러나 포르투갈인은 "훌륭한 상인은 아니었다. 에스파냐에서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은 육체노동과 상업을 혐오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자체 생산하지 못했고, 그 대안으로 영국상품을 수입했다. 그 결과 브라질산 금이 리스본에서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쇠퇴의 또다른 요소는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이다. "종교재판소에 구금되거나 이민을 떠나면 그들의 자산은 몰수되었다. 이 조치는 그들과 거래하던 영국상인들을 멀어지게끔 했다." 마지막으로 1580년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로 합병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인력이 부족했던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의 군사모험에 충원될 인력을 제공해야 했다."(119-20)
에스파냐의 지리·정치·종교적 조건은 경제발전의 걸림돌이었다. "우선 도로가 형편없었다. 노새와 소달구지로는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통합할 수 없었다. 국내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었고, 먼 거리는 배를 통해서만 연결되었다." 카스티야 중심부에 위치한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는 "상업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도시로서, 다른 지역들로부터 곡식, 관세, 지대를 긁어 모았을 뿐 에스파냐 내륙에 자극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의 로마처럼 마드리드도 기생적이었다. 이 도시는 궁정, 대귀족(grandee), 이달고, 관료들을 유치했으며, 극빈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곡물 외에도, 해외의 사치품들과 지방 기술자들이 만든 준準사치품들을 소비하는 도시였다." 관세는 국내뿐만 아니라 식민지로 향하는 양모와 모직물 수출길을 봉쇄했다. "고리대금업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명령에 의해서 국내 환어음 결제도 금지"된 형편이었다.(124-5)
"중앙집중주의 대 다원주의의 고전적인 보기는 네덜란드 연합주인데, 이곳에서는 홀란드 주가 전체 7개 주를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홀란드 주는 육군, 해군, 상업 활동을 지휘했으며 다른 주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세금을 분담함으로써 '무임승차자들'인 각 주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특권 비용을 치렀다. 그러나 조너선 이스라엘은 다른 주들이 암스테르담으로 하여금 외환정책, 해운업, 무역과 어업을 통제하거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제어해서, 네덜란드 연합주는 본질적으로 탈집중화되고 연방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가 쇠퇴하던 18세기,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던 때에 다른 주들이 의사결정―특히 조세정책과 관련된―에서 고도의 중앙집중화를 허락하기를 망설이거나 심지어 거부한 것은 탈집중화가 얼마나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가로막고 쇠퇴를 재촉했는지 보여준다."(72-3)
네덜란드 역사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초기의 역동성의 원천이 과연 이 나라의 분권화된 특성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이다."(149)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6세기 말의 치열한 경쟁에서 한자 동맹을 물리친 후 기본적으로 '어머니 무역'(moederhandel, 근대 초 네덜란드의 경제에 발트 해 무역이 대단히 중요하고 또 다른 교역활동이 여기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어머니'에 비유한 표현)으로 이익을 얻었다." 조너선 이스라엘은 "네덜란드인들의 진정한 이점은 아시아 및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와의 '사치품 무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150) 어떤 면에서 보면,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은 본질적으로 과도기적이었다. 품질, 수량, 가격에 대한 정보가 확산되고 무역량이 증가할수록 직교역이 더 경제적이 됨으로써 중계지는 건너뛰게 되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도 비우호적으로 변해갔다. "바다는 해적들로부터 안전해졌고, 선박은 대형화되었으며, 각국은 자신의 상선단을 구축하고자 했다."(154)
네덜란드 쇠퇴의 다양한 '원인들' 가운데서 "전쟁, 외국의 중상주의, 외국이 네덜란드의 기법을 따라한 것, 무역과 금융에서 유럽 각국이 더 이상 암스테르담을 중계지로 이용하지 않은 것,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에 빌려준 자본을 잃은 것, 프랑스에 의해서 전쟁 배상금이 부과된 것 등은 외적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네덜란드 역사가들은 쇠퇴를 이런 것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무역과 산업에서 철수하여 금융으로 전환한 것, 런던에서 파리로 대부를 전환한 것, 소비품에 높은 세금을 매기고 또 이것이 고임금을 초래한 것, 세금 문제와 같은 것에서 지방이 중앙의 지도에 대해서 저항한 것, 길드가 존속한 것, 숙련공들을 상실한 것, 과소비가 행해진 것, 소득분배가 비대칭적인 것 등은 내적"인 요인이다. "생명력과 에너지를 가진 젊은 국가들은 오래된 독점권에 도전하지만, 늙은 국가들은 이러한 도전에 혁신적으로 대응할 역량이 없다."(171)
프랑스는 "성장이 쇠퇴로 이어진다는 우리의 복잡한 국가 생명주기 모델에 대해서 다른 측면에서 예외적이다. 이 나라는 우위를 획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나머지 나라들에 비하면 장기적인 쇠퇴도 겪지 않았다. 그 대신 프랑스는 골드스톤 모델에서 묘사된 것처럼 일련의 정부 붕괴와 격동을 겪었는데, 올슨이 말했듯이 오히려 이것이 새로운 출발의 기회들을 제공했다."(174)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난 뒤, 루이 14세는 왕실의 군대로써 프롱드 난을 진압했다. 중상주의 정책을 펼친 콜베르는 "보조금과 관세를 통해서 산업을 장려하고, 네덜란드의 조선공, 스웨덴의 광부, 이탈리아의 유리 제조공, 플랑드르의 레이스 제조공을 프랑스로 데려왔으며, 특히 모직물 교역에서 영국, 네덜란드와 맞서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바다에 대해서 무지했으며, 그의 호전적인 귀족들은 인력(人力)과 지도력을 놓고 바다와 육지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을 때 늘 잘못된(즉 육지) 쪽을 택했다."(176-7)
프랑스와 영국의 성장률과 성장단계를 비교할 때 "지폐, 은행, 중앙은행, 청산소, 보험회사, (장기 공채를 제외한) 유가증권 시장의 발전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비해서 약 1세기 정도 뒤떨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182) 재정개혁 시도는 "모두 재정가들의 거친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재정개혁은 결국 "프랑스 혁명기에 35명의 관리 및 재정가들이 체포되고, 이중 28명이 기요틴에서 처형되어서야 성취되었다."(183-4) 프랑스 대혁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의 태도는 오랫동안 구체제의 귀족적 가치가 지배했다. 이러한 정신은 개인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부심을 특징으로 한다." 귀족들은 "상업이 고상하지 않다고 여겼고, 그래서 지방 신사와 부르주아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성을 소유하고 귀족 신분으로 상승하기 위해서 부를 갈망했다."(197-8)
17-18세기에 해외무역을 장악한 영국은, 초기에는 유럽이 "주요 수입원 및 수출시장이었으나 후기에는 식민지가 그 뒤를 이었고 더 뒷시기에는 미국, 남아공 등의 독립국들과 준-독립적인 자치령들이 식량과 원재료의 수입원이자 제조품의 판매지가 되었다."(208-9) 자유무역으로의 긴 도정은 "1841년부터 1846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이 사이에 600개 이상의 관세가 철폐되고 1,000개 이상의 품목에 대한 관세가 '조세개혁'이라는 표어 아래 인하되었다." 자유무역은 "1846년 곡물법 폐지 직후에 목재 관세 및 항해법의 철회로 확대되었다."(217) 1880년대 곡물가격이 하락하자, 독일은 자유무역에서 재빨리 후퇴했다. 1879년 비스마르크가 호밀과 철을 필두로 관세인상 정책을 펴는 동안, 영국은 여전히 자유무역에 집착했다. "갈수록 영국의 단기이익에 반하는 데에도 자유무역을 고집한 것은 집단적인 기억 혹은 제도적인 지체의 전형적인 사례이자 코스의 정리(the Coase theorem)의 반증이다."(219)
"선두 주자의 불리함에 대해서 일부 경제학자들은, 만일 공장이나 기술 혹은 제도가 무용하고 비효율적이라면 언제든지 그것을 폐기해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며 조소를 보낸다. 이것은 경로 의존성의 힘을 간과하는 것이다."(230) 영국에서 신기술의 병목현상이 발생했을 때, 기술 개발에 실패하거나 다른 국가의 성공 사례를 도입하는 상황이 점차 누적되면서 "일부 산업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개입한 상인층이 너무나 두터워서 이들이 기술 향상을 저해했다. 이는 특히 면직물과 공작기계 분야에서 심했다." 상인들은 사실상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장벽을 둠으로써, 생산자에게는 "소비자는 이런 식의 것을 원하지 않소"라고 말하고 소비자에게는 "생산자는 그런 식의 것을 만들지 않소"라고 말하는 형국이 되었다.(231-2) 영국이 세계경제의 선두 자리에서 점차 내려온 것은, "강렬한 생명력이 점차 경직성과 변화에 대한 저항에 잠식당한다는, 국가 생명주기 개념에 잘 부합한다."(240)
"사회변동이나 심성 같은 요소들은 앞에서 설명한 국가 생명주기에서 종종 전면에 자리잡곤 했지만, 독일만큼 경제적 경로에 사회발달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곳은 없었다. 그것은 정치사뿐 아니라 산업, 관세, 통화, 경제의 역사에 모두 적용된다."(243)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독일은 "355개의 영방(Land)과 1,476개의 자율적인 제후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정복 전쟁으로 라인 강 서안은 1801년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나폴레옹은 1803년에 112개의 제후령―세속화된 두 개를 제외하면 모두 종교적 제후령들이었다―을 제거하고 대부분의 소규모 도시와 읍의 정치적 독립성을 종식시킨 뤼네빌 협약을 강제로 부과했다." 프로이센이 1871년에 프랑스에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은 완결되었고 "알자스와 로렌의 획득으로 영토가 더욱 확대되었다. 프로이센의 탈러는 마르크로 이름을 바꾸어 제국의 통화단위가 되었다. 1875년에는 제국은행이 설립되었다."(244-5)
"산업정책, 관세동맹 그리고 독일 철도체계 정비는 1850년에서 1857년까지 경제적 활력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길을 열었다.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영국의 곡물법 폐지는 곡물 수출 붐을 가져왔다. 특히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루르로, 그중에서도 비철금속 분야로 자본이 유입되었다." 영국에 대한 증오심은 철강 공업의 발전을 촉진했고,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베를린, 작센, 슐레지엔에서 산업의 고용이 증가"했다. 1860년대의 세 전쟁의 승리는 "행복감을 가져 왔고, 이것이 주택건설 붐과 회사 창설 시대(Grunderzeit)에 걸맞는 증권가격의 상승을 초래했으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으로 막대한 양의 정금이 유입되고 따라서 국가와 지방 자치체의 부채를 갚을 수 있게 된 덕분이기도 했다. 1873년 증권가격의 대하락은 경기하락을 드러냈지만, 소위 '대불황(great depression)'은 독일에서는 유럽 다른 지역에 비해서 미약했다."(251-2)
1945년 혹은 1950년부터 "대략 4반세기 동안 지속된 황금기는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전혀 도전받지 않았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나라들의 따라잡기와 미국 내부의 쇠퇴 징후가 함께 나타난 때이기도 했다. 항공, 컴퓨터, 전자공학, 제약, 인간의 달 착륙을 가능하게 한 관성 유도 장치, 컴퓨터 단층사진과 같은 의료기기 등의 신산업에서 1950년대의 큰 격차는 다음 10년 동안 좁혀지기 시작했다." 더욱 의미심장하게 미국의 쇠퇴를 가속화한 것은 "생산성의 둔화, 저축의 감소, 연방예산과 국제 경상수지 계정의 쌍둥이 적자, 다니엘 벨이 '탈산업국가'라고 일컬었던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 그리고 특히 금융에의 몰두이다. 이것은 재화보다는 자산의 판매와 구매, 그리고 제조업에서 신상품과 신공정을 개발하는 대신에 새로운 금융수단을 개발하거나 옛것을 부활시키는 데에 전념하는 것이다."(278-9)
국가주기의 일반적인 패턴은 교역, 산업, 금융의 순서이다. "첫 단계에서 교역은 경쟁적이고 공격적이며, 불명예스러운 수단을 통해서라도 외국의 기술을 습득할 준비가 되어 있고, 배우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제품을 외국 것으로 위장하곤 한다. 성장은 종종 수출지향적이며, 가끔 외국제품과의 경쟁에서 수입대체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유치산업의 육성을 위해서 보호무역 조치가 강구"되고 생존자들은 변화에 저항하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금융 주기는 "단기 혹은 때로 장기 자본대부를 통해서 교역과 산업을 촉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산거래, 그리고 생산보다는 부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 이행한다. 상인과 사업가들은 '위험 감수자'를 졸업하여 금리 수취인 신분이 되고 활력은 침체된다. 수입 중 소비의 몫이 증가하고 저축은 감소한다." 다양한 이해집단의 정치적 의사표출과 소득불평등, 부자들의 정치권력 독점은 "효율적인 정부의 행위를 가로막는다."(336-7)
"외부적 변화가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인지 지체시킬 것인지는 그 (국가의) 경제가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342) 혁신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의 딜레마는 이것이다. "안정적인 시기에는 장인의 본능과 낮은 수준의 혁신적 능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분권화가 선호된다. 반면에 위기나 중대한 변화의 시기에는 중앙의 지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앙이 너무 크게 성장하면 관료주의적 경화가 시작되어 그 다음 위기에 대응할 중앙권력의 능력을 저하시킨다."(346) 독자적인 기준 중 하나는 타이밍이다. "평화시에는 경제가 전향적으로 움직이고 분권화, 연방적이고 다원적인 자치의 기반 혹은 보완성이 촉진될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는 중앙집중화나 리더십이 요구되거나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중앙집중화를 선호하거나 분권화를 선호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