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전쟁의 원인과 평화의 확산
아자 가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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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왜 전쟁을 하는가?


제1부 불완전한 과거 : 선사와 역사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의 수렵채집인에게 초점을 맞춘 1960년대에는 인류학과 대중문화에서 (고전적) 루소주의가 흥기했다. 예컨대 칼라하리 부시먼족이 '무해한 사람들'로 찬양받았다. 부시먼족 연구를 선도한 인류학자 리처드 리가 퍼뜨린 이 견해는 '원시적 공산주의'라는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개념, 그리고 수렵채집인을 가리키는 새로운 표어 '원시적 풍요사회'와 잘 어울렸다. 그렇지만 지구의 평화로운 자식들에게 열광하는 초기의 흥분이 지나간 뒤, 국가 당국이 강압하기 이전에 부시먼족의 살인율이 같은 시기 선진 세계에서 단연 최고치였던 미국 살인율의 네 배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리 본인이 발견했다. 부시먼족과 비슷하게 캐나다 북극권 중부의 이누이트족도 '결코 화내지 않는' 같은 평화로운 호칭으로 찬양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의 폭력에 의한 사망률이 1990년 미국 수치의 열 배 이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21-2)


"그렇지만 고전적 루소주의에 대한 도전의 의의를 충분히 인식하기도 전에, 확장된 루소주의라고 부를 더 급진적인 루소주의적 견해가 1980년대 초에 유행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심각한 싸움은 더욱 나중 단계에, 실은 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비로소 시작되었다. 확장된 루소주의는 이른바 '부족 영역' 이론과 연관되었다. 이 이론의 옹호자들은 침입하는 국가─국가의 물품, 군사력, 정착민─와 접촉하고 그에 대응한 이후에야 부족 구조가 갑자기 생겨나고 부족 간 전쟁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이 현상은 세계에서 유럽인의 탐험과 팽창에 영향을 받은 지역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그 이전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족 영역' 이론의 옹호자들은 국가사회와의 접촉을 계기로 그때까지 평화롭게 살던 토착 부족들 사이에 전쟁이 도입된─'발명된'─것인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있었던 전쟁 패턴이 그저 강화된 것인지에 대해 줄곧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22)


그러나 루소주의의 희망과 달리 국가 이전 사회들 간에는 치명적인 폭력이나 전쟁이 만연했다. "어느 한 사례에서 발견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거나 미심쩍을 수는 있지만, 서로 독립적으로 수행한 인류학 사례 연구들이 되풀이해 내놓은 일관된 정보들은 틀림없이 하나의 패턴을 이룬다. 국가 이전 사회들에서 성인 남성의 약 25퍼센트(성인 인구 전체의 약 15퍼센트)는 폭력에 의한 죽음을 맞았으며, 나머지 모든 남성도 상처투성이였다. 이렇게 극히 높은 폭력에 의한 사망 비율은 집단 내 살해와 집단 간 살해의 모든 형태를 망라한 수치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비율은 야생 침팬지의 군집 내 살해와 군집 간 살해를 기록해 얻은 비율과 얼추 같다." "이처럼 수렵채집인의 평균 살해율은 역사적 국가사회들의 평균 살해율보다 훨씬, 수십 배 높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사회들은 가장 치명적인 국가 간 전쟁을 치르며 절정으로 치달은 경우에만 국가 이전의 평균에 그나마 근접했다."(26-7)


"고전적 루소주의와 달리 유사 루소주의자들은 민족지학 방법으로 기록한, 이동성 단순 수렵채집인들 사이에 나타난 높은 폭력에 의한 사망비율을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높은 살해율이 개인적·사적 분쟁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런 살해를 집단 간 싸움인 '전쟁'이 아닌 '살인'과 '혈수'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 조상의 과거를 대부분 차지하는─인간이 지구에 존재한 기간 중 90퍼센트 이상─구석기시대 동안 이동성 단순 수렵채집인은 전쟁을 하지 않았으며, 인류 발전의 훨씬 나중 단계에 이르러서야 전쟁이 출현했다." "이들의 주장은 원시적 인간 폭력에 대한 아주 중요한 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규정(경험적 근거가 없는)이라는 가느다란 줄에 매달린 채로 관심의 초점을 수렵채집인의 폭력에 의한 사망 비율─원시적 인간 상태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다른 데로 돌리고 있다."(31-3)


"혼란의 근원은 사람들이 습관처럼 하는 가정에 있다. 그 가정이란 광범하고 치명적인 폭력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였다면, 그것은 억누르기가 거의 불가능한 1차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결론에서 인간의 싸움이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생각에 반대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 결론을 전쟁의 불가피성을 뒷받침하는 설득력 있는 증거로 여긴다. 양편 모두 틀렸다. 죽음 충동 또는 본능에 관한 프로이트의 후기 이론화 작업까지 거슬러올라가는, 1960년대에 유행했던 견해와 달리, 폭력은 식욕이나 성욕처럼 해소해야 하는 1차적 충동이 아니다." "그렇지만 폭력이 1차적 충동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폭력이 내장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특정한 환경에서 각자 최선이라고 판단하나는 대로 협력할 수도 있고, 평화롭게 경쟁할 수도 있고,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60-1)


"협력, 경쟁, 폭력적 분쟁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세 가지 근본적인 형태다(이 밖에 상호작용을 전혀 하지 않는 고립 또는 회피 선택지가 있다).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선택지를 언제나 가지고 있었고, 언제나 상황을 평가해 어떤 선택지 또는 선택지들의 조합이 가장 유망해 보이는지 결정했다. 행동 전략으로서의 폭력적 분쟁은 인류 역사에서 후대에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세 가지 사회적 전략 중 어느 것이든 추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분쟁은 비록 주요 도구─망치─이기는 해도 우리의 다양한 행동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집단 싸움은 후대의 발명품도 아니고, 조건과 관계없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태도 아니다. 집단 싸움은 진화를 통해 형성된 우리의 행동 메뉴의 일부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과 평화 둘 다 '우리 유전자 안에' 있으며, 사회역사적 맥락에 따라 평화와 전쟁의 균형이 크게 요동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61-2)


# 진화적 자연 상태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들

1. 생존자원 :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은 자연에서 공격성과 치명적 폭력의 제1원인이다.

2. 번식 : 수컷의 성적性的 성공을 제약하는 주된 요인은 다른 수컷들과의 경쟁이다.

3. 우세 : 서열·명예·지위·위신이 높을수록 자원과 번식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4. 복수 : 보복은 서로 득이 되는 협력을 강제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을 때 일어난다.

5. 힘과 안보 딜레마 : 경쟁자들 간에 군비 경쟁이 치열해지면 그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다.

6. (초자연적) 세계관 : 석기시대에도 인간 공동체의 정신적 삶은 초자연적 믿음, 성스러운 숭배와 의례에 젖어 있었다.

7. 호전성 : 그저 재미를 추구하는 목적 없는 놀이이자 사디즘 혹은 황홀경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인간사에 진화론을 적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틀림없이 인간의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 주제에서 진화론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고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그릇된 이분법이다. 자연과 문화 둘 다, 그리고 둘의 상호작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본래 진화를 통해 형성된 인간의 선천적인 필요, 욕구, 근사적 행동·감정 메커니즘은 오늘날 근본적으로 달라진 '인공적' 조건에서 표출된다. 그 과정에서 그것들은 크게 변형되어 새롭고 다양한 외양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지만 문화적 진화는 '빈 서판' 위에서 작용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무엇이든' 산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문화적 진화의 다채롭고 다양한 형태들은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선천적 성향들이라는 중핵 위에 건설되어왔다. 문화적 도약은 워낙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 인간의 생물학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유전자-문화 상호작용은 싸움의 역사를 포함해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재료다."(99-100)


"(농경사회 출현 이후) 권력 투쟁과 권력이 수반하는 이익을 차지하려는 투쟁은 국가들 내부와 사이에서 동시에, 그리고 불가분하게 일어났다. 국가란 기본적이고 일관된 전쟁 단위라는 인식이 그간 너무 만연했다. 그러나 국가는 구갠의 폭력적인 권력 경쟁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경쟁을 얼마간 한정하고 억압한 쪽에 더 가까웠다." "리바이어던 주변과 내부에는 수많은 정어리만 있었던 게 아니라 많은 상어와 꼬치고기, 즉 강력한 귀족, 지방 총독, 장군, 비적, 해적도 있었다. 그들 모두 국가 권력을 제한하거나 도전장을 내밀거나 찬탈하려 했다. 요컨대 국가의 내부 권력정치와 외부 권력정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예를 들어 국가 통치자는 '안보 결집 효과'를 일으켜 자신의 국내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으며, 장군은 권력 찬탈에 필요한 자원과 위신을 얻기 위해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이른바 양면 게임은 대개 국가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폭력을 동반했다."(103-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전쟁을 밀접히 연관 짓는 주된 이유인 폭력에 의한 죽음의 비율은 사실 국가 치하에서 감소했다. 제일 많이 감소한 것은 내집단의 치명적 폭력이었으며, 이는 국가가 내부 평화를 강요하는 데 성공한 결과였다. 홉스는 무정부 상태가 폭력에 의한 죽음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며 많은 경우 나쁜 정부보다 더 나쁠 수 있다고 옳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통설에 완전히 반하지는 않더라도 덜 인식된 다른 측면이 있다. 바로 외집단 폭력─국가 간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 역시, 국제 체제의 고질적인 무정부 상태에도 불구하고, 국가 이전 시대와 비교해 감소했다는 것이다." "(절대적 사상자 수치는 대규모이지만) 상대적 사상자 수는 실제로 국가 치하에서 감소했는데, 바로 국가들의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큰 국가─따라서 원거리와 복잡한 병참─는 부족 집단의 경우와 비교해 동원율이 더 낮고 민간인 인구가 전쟁에 덜 노출된다는 뜻이었다."(106)


"국가가 착취적인 엘리트층이 위로부터 사회에 국가를 강요함으로써 생겨났는지 아니면 복잡한 사회에서 사회적 규제와 여타 서비스를 원하는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부응하여 출현했는지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두 과정은 서로를 배척하기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정 세력은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영토 또는 사회에 대한 권위를 확립하고, 그리하여 내부 평화를 증진하고 집단 노력─적어도 그중 일부는 '무임승차'를 줄이는, 공동선을 위한 노력이었다─을 조정할 수 있었다. 큰 국가들은 규모의 경제를 도입했고, 독점적으로 큰 국가가 되어 간접비를 과도하게 짊어지지 않는 한 혁신을 이루어내고 촉진했다. 이언 모리스는 『전쟁! 무엇에 이로운가?』에서 이 논점을 훌륭하게 전개하는 가운데, 전쟁에서 태어나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가 장수長壽, 발전, 안녕을 점차 증진함으로써 겉보기에 역설적인 막대한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입증했다."(111)


"싸움의 잠재적 이익이 사람들을 싸우도록 유인한 것 못지않게 싸움의 잠재적 위험과 비용은 그들을 싸우지 않도록 억지했다. 그 결과 싸움은 두 가지 상충하는 감정 메커니즘─싸움 스위치를 켜는 메커니즘과 끄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가장 양극화된 활동 중 하나가 되었다."(131) "호전성을 좀먹은 것은 금욕주의의 엄격함이 아니라 국가가 수립한 내부 평화와 문명의 편의였다. 부족 사회나 여타 질서가 덜 잡힌 사회들과 비교해 국가 치하 사람들은 일상의 폭력을 훨씬 자제하는 방향으로 사회화되었다─그들은 '길들여졌고', 이 변화는 필연적으로 그들의 호전적인 기질에 반영되었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근대 서구와 관련하여 이 과정을 문헌으로 뒷받침하고 '문명화 과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 이유로 역사 내내 크고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국가들과 제국들이 가난하고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경계지역에서 야심 찬 벼락출세자가 이끄는 작은 무장집단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곤 했다."(135)


제2부 분과별 거대이론들의 결함과 오해


"인류학에서 문화적 진화에 관한 가장 야심찬 이론은 마빈 해리스와 그의 제자들이 주창한 '문화유물론'이다. '문화유물론'은 진화론적 논리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공유한다.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받은 해리스는 자신이 '생산'이라 부르는 생계유지를 위한 투쟁을 인류의 문화적 진화를 이끄는 원동력으로 분별력 있게 가정했다. 그리고 맬서스를 인용하면서 생산 다음으로 번식, 출산,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서 인구와 한정된 자원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런 근간 위에 더 높은 수준의 문화적 형태들로 이루어진 '상부구조'가 세워진다고 주장했다." "앞서 얘기한 신체·번식 투쟁과 해리스의 주된 차이점은 해리스는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뚜렷이 구별하고, 생물학적 진화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견해를 부인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해리스는 번식, 성, 가족, 친족 연대를 따로따로 논하고, 이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153)


"기능주의는 진화론과 거의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거의 똑같은 답을 내놓는다. 그렇지만 기능주의는 사회적 현상의 기능을 환기시키면서도 그 기능이 무엇에서 생겨나는지 밝히지 않는다." "기능주의는 사태를 뒤집어 생각하거나 잘못된 방향에서 접근한다. 일반적인 사회적 현상과 관계를 설명할 때 기능주의는 살아 있는 동인들의 상호작용이라는 맥락에서 아래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들로, 특히 '안정성'이라는 관념으로 개별 행동을 설명하려 한다. 가령 인류학자 앤드루 바이다는 기능주의적 입장에서, 싸움이란 자원 압박으로 인해 촉발되는 인구통계학적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방향을 잘못 짚은 것은 기능주의적 답이 아닌 추론이다. 싸움은 과잉인구와 씨름하기 위한 자연 또는 사회의 규제 메커니즘 중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싸움은 인간과 여타 유기체들이 개체수 증가로 인해 심화된 경쟁에서 우세를 점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다."(158-9)


"국제관계학 분야를 살펴보면, 우선 대표적인 현실주의자인 모겐소는 국가들은 권력을 추구하고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권력을 얻고자 하며, 그 까닭은 권력과 우세 추구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비판자들은 오래전부터 현실주의자들이 목표와 수단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해왔다. 무엇보다 현실주의자들은 권력 추구에 초점을 맞추는, 전반적으로 옳은 입장으로 인해 권력 투쟁이 왜 일어나는지 설명해주는 근원적인 현실을 간과해왔다." "모겐소는 "권력으로 정의되는 이익 개념"을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 모두의 특징으로 가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재한된 의미의 정치적 이익을 권력과 동일시하는 견해를 정당화하면서 그 내용만이 아니라 방법론까지 근거로 들었다. 그는 정치학에서의 권력은 경제학에서의 부와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권력과 부는 권력이 부의 획득에 이바지하고 부가 권력으로 바뀌는 식으로 서로 교환되었다. 두 '독자적 영역'은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163-5)


"월츠는 국내 정치와 달리 국제 체제를 규정하는 특징은 무정부 상태, 즉 국가들에 강제력을 행사하는 상위의 권위가 없는 상태이며, 그 결과로 국가들 간에 고질적인 불안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런 환경에서 모든 국가는 자국의 생존을 걱정하고, 타국이 공격해올 수 있으므로 다른 모든 국가를 우려하며, 자국에만 의존할 수 있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비롯한 조치들을 필요로 한다." "모겐소와 달리 월츠는 권력을 주로 목표 자체가 아닌 안보의 수단으로 여긴다." "결정적인 문제는, 월츠가 전쟁의 다른 원인들─'국가 수준'의 원인들─을 인정하면서도 오로지 '체제 수준'의 안보 딜레마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국가의 목표들과 안보 딜레마의 출현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이 불분명해졌다는 것이다." "국제 관계에서 전쟁이 되풀이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체제' 수준이 아닌 '단위' 수준의 가정, 즉 국가들이 안보 외에 폭력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는 다른 동기들을 갖고 있다는 가정이 필요하다."(169-71)


"존 미어샤이머는 월츠의 '방어적 현실주의' 이론을 바로잡고 현실주의에 없는 엔진을 더할 의도로, 구조현실주의의 변형인 '공격적' 현실주의를 제시했고, 무정부적 국제 체제의 안보 압력 자체 때문에 생존을 추구하는 국가들로서는 단순히 자국의 권력을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국을 정복하고 종속시키는 방법으로 권력을 공세적으로 증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미어샤이머의 입장이 구조적이라는 데 주목하라. 이 얼개 안에서는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는 전쟁의 다른 동기들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불안과 분쟁, 전쟁이 무정부적 국제 체제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어샤이머는 무정부적 체제 자체를 전쟁의 원인으로 상정하고, 순전히 방어적인 국가들이 각국 지도부와 국민의 진짜 바람과 무관하게, 그리고 그들의 다른 목표들이 무엇이든 간에, 무정부적 체제 때문에 공격적으로 행동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기에 '강대국들의 비극'이라는 딱지를 붙였다."(173-4)


"현실주의자들이 현실의 주된 특징과 추동력의 가장 가까운 근사물 또는 가장 유용한 추상물로서의 권력/안보 추구에 집중하는 동안, 비판자들은 현실주의자들이 도외시하는 현실이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 중요하다고 느꼈다. 이런 이유로 국제관계학 내에서 '구성주의' 학파가 출현하여 행위자들의 정체성, 가치관, 이념, 인식─모두 대체로 사회와 집단이 속한 특정한 역사적 국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했다." "자유주의는 현실주의에 더 실질적인 도전을 제기한다. 구성주의는 역사가 중요하다고 보는 반면, 자유주의는 역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어떤 의미에서 자유주의는 역사적 발전이 어떻게 행위자들의 선택 방침을 바꾸고 따라서 국제 체제의 논리까지 바꾸는가 하는 물음에 이제까지 구성주의측에서 내놓은 가장 중요한 논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변화 관념은 현실주의자들의 추상적인 도식과 사고방식에 반하거나 그것을 역사전 전환에 맞추어 변경하려고 시도한다.(184-5)


제3부 근대화 평화


"1945년 이후 강대국 전쟁을 겪지 않은 세월이 길어짐에 따라 여기에 '긴 평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일한 부분적 예외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관여한 제한전쟁(1950~1953)이었다." "그렇지만 강대국들 사이 긴 평화가 특별하지 않다는 점은 좀처럼 지적되지 않는다. 이미 1871년부터 1914년까지 강대국들 사이에 43년간 지속된 평화기가 있었다(1904~05년 러일 전쟁은 부분적인 예외다). 그리고 이 둘째로 긴 평화에 앞서 1815년부터 1854년까지 강대국들 사이에 39년간 지속된 셋째로 긴 평화가 있었다. 강대국 전쟁은 특히 중요한데, 역사적으로 이 유형의 전쟁이 언제나 가장 결정적인 동시에 가장 파괴적인 국가 간 전쟁, 가장 강력하고 단연코 가장 호전적인 국가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둘째로 긴 평화와 셋째로 긴 평화 둘 다 핵무기 등장 이전에, 경쟁이 치열한 강대국 다극 체제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194-5)


"강대국들 사이 세 번의 긴 평화기는 사실 그 이전 역사와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근대 강대국 체제에서 이제까지 가장 긴 세 번의 평화기는 모두 1815년 이후 나타났고, 뒤로 갈수록 그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 1945년 이후 가장 긴 평화의 내구성에 핵 요인이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어리석은 주장일 것이다. 상호확증파괴의 전망─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전망─이 핵 홀로코스트로 악화될 수도 있는 전쟁을 궁극적으로 억제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핵무기는 마치 교수형 밧줄처럼 모든 관련자의 이목을 놀라우리만치 집중시켰다. 그럼에도 핵시대가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뚜렷한 추세가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는 1815년부터 현재까지 기간을 통틀어 전체 추세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같은 이유로, 이 추세에서 벗어난 엄청난 예외인 양차 대전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전쟁 감소 현상에 관한 포괄적인 설명은 동전의 양면을 모두 해명해야 한다."(198)


"양차 대전, 특히 제2차세계대전은 분명 전쟁 사망자 수(제1차세계대전 1600만 명 이상, 제2차세계대전 6000만 명 이상)에서 상위권에 들었고, 경악스러운 물질적 지출을 수반했다. 그렇지만 이 절대치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첫째, 근대 국가들은 전근대 국가들보다 인구가 더 많고 훨씬 더 부유하므로 진짜 문제는 국민 중 몇 퍼센트가 전시에 사망했고 전쟁이 얼마나 큰 경제적 곤경을 수반했느냐는 것이다. 둘째, 명칭이 시사하듯이 세계대전, 특히 제2차세계대전은 여러 대륙에서 많은 국가가 관여한 전쟁이었다. 이것이 양차 대전의 사망자 수가 그토록 많은 또다른 이유다." "사실 양차 대전은 역사에서 예외적인 사례와는 거리가 멀다. 소로킨과 레비 둘 다 유럽에서 20세기(사실상 전반기)가 지난 500년 간 가장 치명적인 세기이기는 했지만 예외적으로 치명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몇몇 지표를 보면 〈17세기가 가장 호전적이었다〉."(201)


"상대적인 부를 고려할 때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전쟁이 그 이전 역사의 전쟁보다 경제적으로 비용을 더 많이 잡아먹었던 것도 아니다. 전쟁은 언제나 엄청난 경제적 노력을 수반했고 국가의 지출에서 단연 비용이 많이 드는 항목이었다." "몽골족이 북중국과 남중국, 중앙아시아, 이라크, 러시아의 고도로 발달한 문명들을 정복하면서 얼마나 극심하게 파괴했던지, 이들 문명이 회복되는 데 수 세대, 때로는 수 세기가 걸렸고, 일부는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30년 전쟁이 독일에 끼친 영향도 마찬가지다. 16세기와 17세기 에스파냐와 18세기 프랑스는 전쟁 수행과 경악스러운 전쟁 부채 때문에 경제가 파탄 났고, 프랑스의 경우 결국 대혁명을 맞았다. 더욱이 산업화 이전 사회의 사람들은 최저 생계 수준 근처에서 살았으므로 전쟁으로 인한 지출과 황폐화는 거의 문자 그대로 그들의 입에서 빵을 빼앗는 원인이었다. 전근대 전쟁에서는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죽는 일이 그야말로 다반사였다."(207)


"민주주의 국가들이 비민주주의 국가들보다 덜 호전적이고 더 평화적이라는 생각은 계몽주의 시대부터 널리 퍼져나갔다. 회의론자들은 민주주의 평화가 개인과 집단이 자기네 것이라고 편향되게 주장하는 미덕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실제로 민주주의 국가들이 평화롭다는 주장을 더 엄격한 정량적 방법으로 검토했을 때, 19세기와 20세기 동안 민주주의 국가들이 비민주주의 국가들보다 덜 싸웠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후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일부 학자들은 19세기와 20세기 동안 민주주의 국가들이 얼마나 많이 싸웠느냐고 묻지 않고 '서로' 얼마나 많이 싸웠느냐고 물었다. 그때부터 수많은 정성적·정량적 조사로 입증된 놀라운 결과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서로 매우 드물게 싸웠거나 거의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 간) 평화 명제는 국제관계학에서 발견한 가장 견고한 '법칙'이라고 정당하게 선언되었다."(213)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영토가 가장 중요했던 농업 시대와 반대로 산업 시대와 정보화 시대에 정복 자체의 수익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 주장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전쟁이 본질적으로 수익성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와 비교해 전쟁의 수익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첫번째 명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선진 국가나 영토를 정복하여 이익을 남길 수 있었거나 실제로 남긴 것으로 확인된 사례들이 있다. 전쟁과 정복의 수익성이 예전보다 낮아졌다는 두번째 명제는 수량화하기가 어려우며, 요점에서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게 한다. 수익성 방정식에서 결정적인 변화는 전쟁이 아닌 평화 쪽에서 일어났다. 전쟁과 정복의 수익성이 낮아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경제 활동은 수익성이 높아지고 부를 얻는 유망한 길이 된 반면 정복은 불확실하고 위험한 활동으로 머무르고 경제성장에 쓰일 자원을 끌어다 쓰는 덜 매력적인 길이 된 것이다."(226-7)


"민주주의 평화와 더불어 상호 의존하는 상업을 통한 평화는 근대화 평화의 가장 익숙한 요소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시장의 중요성과 군사력 사이 균형 및 관계가 크게 바뀌는 추세와 맞물려 자유무역은 엄청난 속도로 현실이 되어갔다. 시장의 중요성과 군사력 모두 극적으로 바뀌었다. 경제적으로 약한 국가들은 군사적으로 무력해졌고 따라서 체제를 강요할 수 없었다. 오히려 경제에서 무역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중요해졌는데, 산업생산과 대규모 분업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무역이었기 때문이다. 상품 흐름을 가로막는 장벽이 낮아짐에 따라,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산업 시장경제의 효율성이 한층 높아졌다. 산업 시대에 무역 자유의 증진은 훨씬 더 매력적인 것이 되었는데, 산업화 이전 경제에서는 가족 생산자들이 자기네 생산물을 직접 소비했지만 이제 빠르게 늘어나고 다양해지는 생산물 중 압도적인 비율을 시장에 내다팔았기 때문이다."(232-5)


# 전쟁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인들

1. 상호 의존성 : 주요 무역 파트너들 간 전쟁은 생산과 무역의 연쇄고리를 깨뜨려 단기적인 결핍과 비효율을 초래한다.

2. 상호 번영 : 세계 시장에서 외국의 번영운 국내의 번영과 연관되며, 외국의 황폐화는 체제 전체를 위협한다.

3. 높아진 경제의 취약성 : 전쟁 관여국들은 외국 자본이 떠나거나, 국제금융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할 수 있다.

4. 열린 접근 : 세계화된 경제 체제에서는 어떤 영토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꼭 그곳을 정치적으로 소유할 필요가 없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적한 '비공식 제국주의'에도 불구하고, '팍스 브리타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는 근대 체제에서 경제개발, 상호 번영, 평화의 주요 촉매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과정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순전히 이타주의적인 동기에 의해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마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체제 내에서 행위자들의 이기적인 행위는 전반적인 번영의 증대로 귀결된다. 나치 독일과 제정 일본이 이 체제를 파탄 내려 했을 때 민주주의 국가들이 유화와 봉쇄로 대응하고 결국 두 나라를 파괴한 것─아울러 전후에 승전국들이 두 나라를 재건하여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평화적인 세계 질서에 편입시킨 것─은 그 이중 과정을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인 역사적 사례다. 전쟁을 평화화한다는 것은 과장된 생각이라고 비판자들이 아무리 주장하더라도, 독일과 일본에 맞선 전쟁은 궁극적으로 평화를 확립했다."(255-6)


# 그 외 전쟁 가능성을 낮춘 요인들 : 성적 자유화, 인구 고령화, 여성의 태도와 선거권 등


"이와 달리 자본주의적 비민주주의 강대국들은 비효율성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양차 대전 시기에 독일은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적어도 경쟁자들만큼 앞서 있었으며, 일본은 1913년부터 1939년까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그들의 문제는 우연찮게도 너무 작았다는 것이다. 독일과 일본 모두 제한된 자원과 인력 기반을 가진 중간 크기 국가였다. 대국들, 그중에서도 대륙 크기 국가인 미국과 겨룰 만한 형편이 아니었던 양국은 그들에 맞서 결집한 연합의 중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러므로 그들이 몰락한 것은 대체로 우연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20세기 내내 미국의 권력은 세계에서 둘째와 셋째로 강한 국가들의 권력을 합한 수준을 능가했다. (국제 세계의 세력 균형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 경쟁 우위를 선사한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어떤 내재적 강점보다도 미국의 현존과 대륙 규모 크기였다."(281)


"중국의 굴기가 국제 체제, 미국의 우위, 자유주의적 패권, 근대화 평화에 끼치는 영향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2014년 시민들이 대규모 친민주주의 시위를 벌인 홍콩은 정치적 주장들을 검토할 사례를 제공한다. 폭넓은 지지를 받는 주장 중 하나는 경제·사회 발전이 민주화에 이로운 압력을 만들어내고 권위주의적 국가 구조로는 그 압력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자체가 자본주의로 인해 생기는 경제적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압도적인 평등주의적 견인력 사이에서 줄곧 갈피를 잡지 못한 결합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전까지만 그렇다. 이 긴장이 얼마나 극명했던지, 사회주의자들은 이 양립 불가능한 모순 때문에 필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파멸을 맞고 사회주의─경제적 민주화─가 미래의 물결이 되리라 믿었다. 그때 이후로 복지국가 제도를 통해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이 긴장은 여전히 대부분 남아 있다."(284-6)


"비판자들은 자본주의적 권위주의에는 세계에 제시할 보편적인 메시지, 사람들이 납득하고 열망할 만한 매력적인 메시지가 없고 따라서 마음을 사로잡는 '연성 권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편주의라는 동전에는 뒷면이 있다. 세계 각지의 많은 사람들은 자유주의적 보편주의를 교조적이고 간섭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여긴다. '단극單極' 세계에 대한 저항은 미국의 권력만이 아니라 인권 자유주의의 패권과도 관련이 있다. 비서구 사회들에는 서구로부터 훈계를 받는 데 대한 깊고도 넓은 반감이 존재한다. 서구의 인식과 달리, 자유민주주의는 그저 가치들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는 데 필요한 중립적인 메커니즘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선택이며, 그 선택에는 여러 사회와 문화의 사람들이 더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가치들과 충돌하는 일군의 가치들이 포함된다." "문화와 사회적 가치는 불변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상부구조'인 것도 아니다."(287)


"미국의 권력 우위가 쇠퇴하고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을지라도, 전 세계 세력균형의 변화는 훨씬 덜 극적일 수 있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미국이 아주 많은 일을 해서 만들어낸 오늘날 세계의 중심축은 민주주의-자본주의 국가들의 동맹이다. 이 동맹은 미국과 유럽연합, 일본,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다른 주요 맹방들, 그리고 점차 합류할 것으로 보이는 인도 등 세계의 강국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합해보면, 이 블록의 세계 경제-군사 잠재력 점유율은 20세기에 미국이 중심에 있었던 그 어떤 연합체 못지않게 우세하고, 앞으로도 계속 우세할 것이다. 민주주의-자본주의 동맹은 미국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상태와는 거리가 멀고 또 극단적인 상황이 되어야만 군사적으로 협력할 테지만, 어쨌거나 세계 군사 잠재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을 무너뜨린 연합국의 경제-군사력과 엇비슷한 수준이다."(301-2)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것 같은 "비재래식 테러의 당혹스러운 문제는 테러리스트 집단을 상대할 경우 국가를 상대할 경우와 비교해 억지의 효과가 한없이 떨어진다는 데 있다. 그런 집단은 극단주의적인 열성자들, 즉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하고 심지어 전 세계의 종말을 적극 바라기까지 하는 이들로 이루어질 공산이 크기만 한 것이 아니다. 미꾸라지 같은 테러리스트들은 억지 개념 전체의 토대인 보복 대상을 여간해서는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국가는 대량살상무기에 접근하는 능력에서 단연 월등하다. 그렇지만 테러리스트는 상호확증파괴에 기반하는 억지력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최종 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은 테러리스트 쪽이 더 높다. 핵시대를 줄곧 지배해온 사고방식과 반대로, 테러리스트가 획득한 비재래식 능력은 사용 가능하다." "이와 비슷하게 사이버테러리즘의 위협은 급속도로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어, 전 세계에서 각국 정부와 민간 부문의 조치를 재촉하고 있다."(328-9)


결론 / 전쟁과 평화의 논리


"사실 집단 싸움은 여러 종의 사회적 동물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집단 싸움에 인간 고유의 측면은 없다. '전쟁'을 관습적으로 대규모 조직 폭력으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 종의 사회 집단들이 언제나 더 크고 더 복잡하고 더 협력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특히 농업과 국가로 이행한 이래 사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더 조직화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진정한 전쟁'은 국가 및 국가정치와 함께 비로소 출현했다고 역설하는 것은 곧 인류 역사의 살아 있는 과정을 개념적 인공물로 대체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국가 치하에서 사회의 크기, 따라서 군대의 크기가 극적으로 증가하긴 했지만, 인간 싸움으로 인한 인구 대비 사망자 수는 실제로 줄어들었다." "홉스가 지적했듯이, 리바이어던이 질 낮은 서비스라도 제공하는 편이 무너지는 편보다 대체로 안보 전망에 더 나았다. 내전이나 무정부 상태는 대개 국가 간 전쟁보다 더 심각한 파괴와 죽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348)


"이제껏 이 책에서 주장한 대로, 전쟁은 인간 동기체계 일반의 밑바탕에 놓인 인간 욕구의 대상들과 동일한 대상들을 얻기 위해 수행해온 것이다. 다만 폭력적 수단으로, 물리력을 사용해 수행해왔을 뿐이다." "전쟁의 '문제'는 인간의 이런저런 욕구─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드는 욕구, 삶을 채우는 욕구─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말해 폭력과 전쟁은 평화적 경쟁과 협력보다 분쟁 행동 전략이 인간 욕구의 어떤 대상을 얻는 데 더 유망하다고 판단할 때 일어난다. 전쟁이 발생하는 이유를 알려면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와 이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노력을 분쟁 경로 쪽으로 몰아가는 조건, 이 두 가지를 모두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인간의 욕구는 전쟁의 동기를 이루고 따라서 전쟁의 근원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요인들, 이를테면 폭력 선택지의 기대효용, 분쟁 가능성에서 생겨나 확대되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 같은 요인들이 전쟁으로 귀결되는 인과적 배열을 완성한다."(3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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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하는 인간의 탄생 - 인종주의는 역사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나인호 지음 / 역사비평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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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타자 증오의 이론적 원천으로서의 인종주의 역사관


"인종주의자는 낯선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 자체를 혐오하고 미워한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인종주의가 단순히 우발적이거나 비합리적이고 일탈적인 현상이 아니라 서양에서 발원하여 전 세계로 퍼진 대표적인 근대사상 혹은 체계적인 근대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는 것이다. 미국 역사가 모스가 적절하게 지적했다시피 인종주의는 광기의 우발적인 표출이나 편견의 산발적인 표현, 혹은 단순히 억압의 메타포가 아니다. 인종주의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독특한 구조와 담론 양식을 지닌 완전히 발달된 근대적 사상체계이다. 인종주의는 과학에 대한 믿음, 근대적 철학과 종교사상, 시민계급의 도덕, 민족주의 등 서양의 근대정신을 대표하는 주류 사조와 결합되어 있으며, 근대 서양인들의 경험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자 근대 세계를 특징짓는 중심적 현상이다."(9-10)


제1부 계몽사상과 인종 우월주의 세계사의 탄생 : 크리스토프 마이너스를 중심으로


"근대적 인종주의의 등장은 거대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콜럼버스 이후 끊임없이 계속된 대항해와 식민지 개척을 통해 유럽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 지평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유럽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 지평의 확대는 평화로운 교류를 통한 것이 아니라 정복과 문화파괴, 학살 같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엔코미엔다(encomienda)와 수천만의 살상, 그리고 전통문화의 파괴로 대표되는 에스파냐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폭력적 정복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으나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더욱 중요한 결과를 낳은 폭력적 현상이 있었는데, 당시 막대한 이문을 남긴다는 의미에서 검은 상아(black ivory)로 호명된 흑인노예무역과 흑인노예제로 특징지어지는 초기 자본주의 발전이 그것이다. 이러한 근대 초의 역사적 변화와 근대적 인종주의의 출현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진행되었다."(28-9)


"15세기 중엽에 등장한 '유대인raza'라는 표현은 'raza'라는 용어의 두 가지 뜻, 즉 '혈통'과 '천의 얼룩진 부분'이 결합하여 '세례를 통해서도 지울 수 없는 얼룩을 지닌 유대인 혈통'의 의미로 쓰였다." "16세기 이후에는 또다른 인종 차별적 어휘들이 출현하고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메스티소'(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 '물라토'(흑백 혼혈, 원래 말과 당나귀의 잡종인 노새를 지칭하던 단어), '니그로'와 같은 단어들이 그것이다." "17세기까지 인종 개념은 단순히 '가계', '혈통'을 뜻하면서 주로 신분/계급과 관련된 사회적 용어로 쓰이거나, 이러한 용례의 연장선상에서 점차 타종족이나 종교적·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소수집단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8세기 계몽의 시대에 들어와 근대적 인종 개념이 탄생했다. 이제 인종 개념은 과학적(생물학적) 학술용어로 격상하면서 전 세계의 인간을 분류하는 보편적 기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30-2)


# 당시의 신생학문인 자연사(박물학)가 인종차별적 믿음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줄기'나 관념적인 '접착제' 역할을 했다.


"마이너스는 독일 계몽사상의 충실한 대변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세계 지혜(Weltweisheit)" 교사로 불렀다. '세계 지혜'라는 개념은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거두 볼프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철학' 개념을 대체하여 종종 쓰이곤 했다. 볼프에 의하면 성서의 가르침인 '신의 지혜'에 대비되는 세속적 전체 지식이 '세계 지혜'였다. 특별히 '세계 지혜'라는 개념에는 특정한 철학적 입장이 담겨 있다. 이에 의하면 추상적 사변은 비난받아야 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란 곧 실용성, 진보, 이성의 독립성, 국가의 위엄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이너스는 인간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기대할 때 그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계몽〉이라고 했다. 여자들이 언어나 수학을 배우거나 농민들이 학술저서를 읽는 경우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비판이 결여된 마이너스는 계몽사상이 실제로 얼마나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된다."(47-9)


"인류사적 세계사로 구체화된 계몽주의의 역사관은 무엇보다 환경결정론에 입각해 있었다. 당대의 박물학자, 철학자 및 역사가 사이에서는 환경결정론이 인류의 역사를 자연사와 결합시키는 매개체로 각광을 받았다. 이는 그다지 새로운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환경 조건들과 정신(psyche)의 관계를 탐구했고, 이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마이너스는 인류사 서술에서 '인종의 위계 서열', '유전/피', '자연법칙으로서의 인간 불평등'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인종결정론이다. 다수의 계몽사상가들이 인종 또한 환경의 산물이라는 대전제를 쉽게 넘어서지 못했고, 자신들의 백인종 우월주의적인 시각을 단지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고 있을 때, 마이너스는 자신의 역사관에 근거하여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내부로 전위시켜 보편적인 인종 우월주의를 정초하려 했다."(62)


# '존재의 대연쇄'라는 형이상학적 자연질서를 '인종의 대위계'라는 경험과학적 자연질서로 대체


"다른 자연사가들이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인종 차별적 언사들은 무수히 발견된다." "특히 〈니그로와 타인종 일반은 백인종보다 자연적으로 열등하다〉는 흄, 〈니그로는 검기 때문에 우둔하다〉고 주장하고 〈백인종의 순수함을 보존〉할 것을 염원한 칸트, 노예제는 자연법칙에 위배됨을 지적하면서도 심지어는 〈흑인들이 인간일 수가 없다〉고 말한 몽테스키외 등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발언들은 계몽사상이 인종 편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은 인종 담론을 통해 타지역의 후진성과 대비되는 유럽의 문명적 성취 및 진보에 대한 자부심, 다시 말해 유럽중심주의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의 인종 담론은 인종의 불평등보다는 인종의 다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인종의 해부학적 특징과 지적·도덕적 소질을 직접적으로 결부시키는 데 조심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인종결정론이 아닌 환경결정론에 의해 주도되었다."(68-70)


# 인류의 인종적 차이의 근본적 원인은 기후/환경이라는 관점


제2부 혁명의 시대와 염세적 인종주의 역사철학의 탄생 : 아르튀르 고비노를 중심으로


"이 책은 고비노가 ('인종주의의 아버지'라는) 모든 기억들과는 달리 그가 계몽사상기의 인종 우월주의와 제국주의 시기, 특히 19/20세기 전환기의 인종 증오주의를 매개하는 인물이란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는 인종주의의 아버지가 아니라 인종주의의 매개자였다."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고비노가 결코 독창적인 인종이론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고비노의 역사철학은 내용적으로 인류학, 언어학, 역사학 등 당대의 다양한 학문적 성과의 종합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 역사가 모스는 고비노를 "인종주의의 조합자"라고 불렀다." "고비노의 역사철학은 염세주의적 문명비판, 귀족의 인종주의, 반민주적·반혁명적인 정치·사회사상을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인종 이론과 결합시킴으로써, 구체제와 봉건적 신분질서를 옹호한 당대의 보수반동 이데올로기를 근대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89-90)


"특별히 프랑스에서는 전문 역사가들 사이에서 '인종'이 역사서술을 위한 용어로 부각되었다. 역사를 '인종 간 투쟁'으로 정의하고, '인종'과 '계급'을 동일시하면서 지배 인종과 피지배 인종의 불평등성을 강조한 티에리에서부터 '인종'을─크건 작건 간에─역사진행에 대한 설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파악한 샤토브리앙, 기조 등을 거쳐, '단지 선사시대 및 상고시대의 역사에 있어서만 인종이 역사적 요소'로서 중요하다고 본 미슐레에 이르기까지 그 입장은 다양했지만, 역사서술을 위해 '인종'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범주가 되었다." "당대의 이러한 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고비노의 『인종불평등론』은 '전체 역사' 혹은 '역사 자체'의 보편적 의미를 성찰함으로써 인종론적 역사해석을, 특별히 인종주의적 성격의 역사해석을 일종의 근대적 역사철학의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당대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94-5)


"『인종불평등론』은 세계사, 정확히 말해 세계 문명 전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특별히 프랑스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르네상스 시기부터 자국의 역사를 '정복민'과 '피정복민' 간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로 해석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의하면 프랑스 역사는 한편으로 정복민인 프랑크(게르만)족과 다른 한편으로 피정복민인 갈리아족(켈트족) 혹은 갈로-로마족이라는 두 종족(ethnos) 간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다. 종족 간 투쟁의 역사는 훗날 여기에 '인종' 개념이 들어오면서 지배계급인 프랑크(게르만) 인종과 피지배계급인 갈로-로마 인종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로 재해석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정복민인 프랑크(게르만)족(인종)의 후손임을 내세워 지배계급으로서의 정당성과 봉건제적 정치체제의 적법성을 이러한 역사해석으로부터 이끌어냈다. 이것이 바로 '계급'과 '인종/종족'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귀족의 인종주의'라는 프랑스 특유의 이데올로기다."(115-6)


"고비노는 '귀족의 인종주의'를 특유의 염세적 기조 속에서 '아리아 인종주의'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는 귀족의 지배계급으로서 정당성을 위한 역사적 전거를 중세 초에서부터 시작된 프랑스 역사에서 선사시대부터 시작하는 세계사로 확장했으며, 게르만주의를 아리아주의로 추상화하고 일반화했다. 이른바 '외래 인종에 의한 정복'이라는 것은 프랑스사의 시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동일한 현상이 나머지 세계에도, 즉 "인류의 아리아적 기원"에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문헌학자 존스는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켈트어, 게르만어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언어들 사이에는 공통된 어머니 언어가 있는데 그것을 '아리아어'라고 했다. 존스의 연구는 인종사상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언어군이 하나의 인종과 일치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로써 '아리아 인종' 관념과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피의 신화가 탄생했다."(122-3)


"1894년 2월 12일 독일에서 고비노협회가 창설되면서 고비노는 명실상부한 인종주의 역사철학의 아버지로서 부활했다." "고비노 르네상스는 제국주의가 그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에 일어났다. 고비노의 염세적인 인종주의 역사철학은 이제 인종 증오주의를 위한 무기로 변화되어갔다. 고비노협회 회원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각국의 수많은 인종 과학자들, 인종 신비주의자들은 그의 인종 퇴화론을 진지한 현실의 경고로 받아들여 민족의 인종적 재생, 나아가 민족을 엘리트 인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 매진했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민족의 몸을 해하려는 안팎의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 및 박해는 이러한 민족 재생 프로젝트와 동전의 앞뒷면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세기말의 인종 증오주의 속에서 고비노의 역사철학적 기본 개념, 이론 틀과 명제들, 그리고 역사 내러티브는 때로는 신랄한 비판을 통해 수정되면서 다양하게 수용되고 변형되었다."(154-6)


제3부 인종 증오주의와 '악마적 인종'의 발명 1 : 유대인의 위험


"급진적 민족주의와 결합된 인종주의는 자신들의 민족 혹은 인종을 위협하는 '적대 인종'을 향해 '사탄주의적' 메타포를 사용했다. 1860/70년대 이후 1900년을 거치면서 서양의 인종주의 담론은 전통적 반유대주의를 새롭게 포장했을 뿐만 아니라, 황화론과 결합되면서 진행되었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유대인이,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민족들, 즉 황인종이 위험한 '적대 인종', 나아가 무시무시한 '악마적 인종'으로 표상되었다. 이른바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 담론과 황화론은 종말론적 플롯을 지닌 인종투쟁의 역사관과 결합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종주의는 이전의 우월주의나 염세주의에서 벗어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증오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 그러나 '적대 인종'에 대한 두 담론은 내용적으로는 명백히 상호모순 관계에 있다. 전자가 유대인으로 체화된 근대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있다면, 후자는 황인종에 맞서 서양이 성취한 근대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수호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0-1)


"그렇다면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어떤 점에서 새로웠는가?" "전통적인 반유대주의는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인 혹은 사회적·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유대인의 특정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그 자체'라는 추상적 존재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유대인을 '우리 민족공동체'를 위협하는 '적대 인종'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의 원흉인 악마적 인종', 그것도 모든 것을 '유대화'할 정도로 가공할 능력을 지닌 '악마적 인종'으로 추상화시켰다. 이에 상응하여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논리적 근거와 도덕적 정당성을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관을 통해 찾았다. 역사는 빛의 세력인 '우리 민족공동체'와 어둠의 세력인 유대 인종과의 투쟁의 역사이며, 현재는 유대 인종의 최종적 승리와 '우리 민족공동체'의 멸망을 바로 목전에 둔 역사의 마지막 환란 단계라는 종말론적인 인종투쟁 사관이 그것이다."(168-9)


"마르는 유대인을 악마적 인종으로 형상화하면서 매부리코나 안짱다리 같은 유대인의 신체적 특징을 정형화시키는 전통적 토포스(topos)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유대인의 인종적 특징을 정신적인 것, 18세기 식으로 말하면 타고난 자질과 성향(Anlage)에서 찾는다. 특히 "유대화"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유대 인종의 내적인 소질과 성향이 독일인마저 오염시킬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 유대 인종이란 단순히 생물학적 혈연집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악마적인) 영적·정신적 실체를 의미했다. 이 같은 논리를 따를 경우 생물학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유대화"되었다면 그는 정신적 혹은 내적인 유대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자유주의자든 민주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혹은 특정 자본가든, 나아가 근대 문명 전반을 대변하는 세력이든, 자신이 적대하는 모두는 유대화된 존재 혹은 내적인 유대인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순결성을 파괴하는 악마 세력인 것이다."(171-3)


"독일과 서유럽에서 반유대주의 선동이 기대했던 정치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새로운 반유대주의 선동의 파도가 밀려왔다. 보다 완결된 형태와 스토리를 갖춘 유대인 세계지배 음모론이 그것이다. 이 음모론에 의하면, 유대인은 세계비밀정부 지휘하에─정부회합은 프라하의 공동묘지에서 밤에 열리는데─정치·경제·문화적 권력을 이용하여 각국을 다양한 위기와 혼란에 빠트리면서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한층 진화하게 되었다. 유대인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 가능한 무서운 능력을 지닌 채 모든 악의 원흉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주장했기 때문이다." "유대인 세계정부 음모론의 진원지는 러시아였다. (러시아 비밀경찰의 지휘 아래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위서僞書인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은 이러한 음모론의 최상의 표현이자 유포 수단으로 기능했다."(192-3)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에 상세한 주석과 실증적 고찰이라는 살을 입혀 유대인 세계정부 음모론을 보다 그럴듯하게 스토리텔링하고 전 세계에 확산시킨 사람은 '자동차 왕'이라 불리는 미국의 기업가 포드였다. 포디즘(Fordism)으로 대량생산체제와 소비자 사회를 창조한 이 미국의 '국민영웅'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의 반유대주의의 성장과 확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포드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평화주의자로서 평화선을 유럽에 보내 전쟁을 중지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 평화선에서 이 전쟁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유대인 금융자본가들의 음모로 인해 벌어졌음을 듣게 되었고, 이후 유대인들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이 문건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위서임을 주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건의 사실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대변했다."(194-5)


제4부 인종 증오주의와 '악마적 인종'의 발명 2 : 황인종의 위험


"황화 담론 속에 '황화黃禍(Yellow Peril)'라는 표어가 등장한 것은 1895년 청일전쟁이 종식될 무렵부터이다." "그러나 '황화' 표어의 등장과 확산은 황화 담론의 대중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지표에 불과하다. 이 표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황화 담론이 대중적 담론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화'라는 표현이 없다 하더라도 황화 담론은 이미 청일전쟁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이 담론 속에서 아시아 민족들의 위험을 표현하기 위한 여러 슬로건이 다양하게 동원되곤 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나치 이데올로기의 주요소 가운데 하나였던 '생활공간(Lebensraum)'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라첼은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인 이민문제와 관련하여 1876년 '엄청난 인구를 가진 몽골 인종의 걷잡을 수 없는 홍수라는 의미'에서 "황색공포(Gelber Schrecken)"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미국에서는 비슷한 맥락에서 "황색유령(Yellow spectre)"이라는 표어가 등장했다."(215-6)


"계몽사상의 시대는 유럽인들이 동아시아인을 백인종에서 황인종으로 변화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16/17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선교사, 상인, 여행가들은 대체적으로 동아시아인을 '백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린네 같은 박물학자들은 동아시아인을 백인에서 퇴화된 변종인 '황색인'으로 분류했고, 블루멘바흐는 형질인류학적 관점에서 '몽골 인종'으로 규정했다. 우리는 마이너스가 블루멘바흐의 영향을 받아 동아시아인을 '못생긴 몽골 인종'의 하위 범주로 분류했음을 살펴본 바 있다. 이윽고 19세기가 되면 동아시아인을 '황색 몽골로이드'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유럽인의 역사의식 속에 확고히 뿌리박힌 훈족, 헝가리, 몽골의 침입에 대한 기억과도 연관이 있다. '러시아가 유럽을 정복할 것이고 나중에는 러시아 역시 타타르족에 의해 정복당할 것', '타타르인의 지역에서부터 새로운 민족이동이 일어날 것'과 같은 토포스들이 반복되곤 했다."(217-8)


"세기말의 인종주의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대 인종들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악마화시키면서 타자에 대한 차별의 이데올로기에서 증오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해갔다. 이제는 타자에 대한 우월감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공동체의 타락/쇠퇴/몰락에 대한 염세주의적 우려 또한 악마적 적대 인종에 대한 공포와 증오의 감정을 북돋우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유대 인종의 '황금색 위험'이나 황인종의 '황색 위험' 이외에도 이른바 남아프리카의 헤레로(Herero) 부족과의 전쟁으로 촉발된 '흑색 위험'(흑인종의 위험), '적색 위험'(사회주의의 위험), '색깔 없는 위험'(인종 간 혼혈의 위험), '아메리카의 위험', '러시아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강조하는 표어들이 난무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가상의 적을 찾아 헤매던 폭력적 인종주의는 국가와 민족들 간의 무한투쟁이라는 제국주의의 문법 앞에서 민족주의와 결합되었을 때 그 파괴력이 극대화되었다."(250)


제5부 내적 인종 증오주의의 탄생 : 민족주의에서 국가인종주의로


"인종주의는 이제 단순히 인종 우월주의와 인종 차별주의에 머물지 않고 공격적인 인종 증오주의로 진화했다. 이러한 인종 증오주의는 외부의 적에 대한 국민/민족의 단결과 내적 통일을 강조했음에도, 혹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곧 내적인 인종 증오주의로 발전했다. 이러한 과정은 '국민/민족을 엘리트 인종으로 만들기'라는 인종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제 내부의 적과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인종 재생 프로젝트는 인종주의가 과학 담론의 틀에서 벗어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정치 담론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수많은 다양한 과학적 인종이론들은 사회다원주의와 우생학 혹은 인종위생학이라는 공리를 공유하면서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정치와 직접적으로 결합했다. 인종적 재생의 정치는 한편으로 국가적 효율성과 시민적 도덕규범의 이름으로 시민계급 여성에 대한 출산 강요 등 국민/민족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을 규제하고 억압했다."(255-6)


"19/20세기 전환기에 이르러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밀접하게 결합했다. 이 시기에 들어와 민족/국민의 인종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용어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또한 이 시기는 과학적 인종주의의 전성시대였다. '생존투쟁', '자연선택과 최적자의 생존', '우수한/열등한 유전자', '인종 개량' 같은 사회다원주의와 우생학/인종위생학의 공리를 공유한 수많은 인종이론이 유행했다." "이러한 과학적 인종주의는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인종위생학을 매개로 사유럽, 북유럽, 중부 유럽 및 남동 유럽의 여러 나라, 나아가 북미 지역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제 한 민족/국민의 인종적 자질이 그 민족/국민의 성격을 결정하며, 조국의 장래와 안녕은 민족/국민의 인종적 자질의 향상에 달려 있다는 신념이 민족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 사이에서 일반화되어갔다. 특별히 이들은 우생학/인종위생학을 "민족주의의 과학"으로 간주했다."(271-2)


"또한 급진민족주의 담론에서는 '민족의 몸'과 이를 위협하는 '낯선 몸들'이라는 메타포가 빈번히 쓰이고 있었다. 원래 몸의 이미지는─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 공동체를 '신성한 몸'으로 표현한 것처럼─전통적으로 공동체의 올바른 질서, 기원, 목표 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몸의 메타포는 종교적·정치적 공동체의 단결을 호소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급진민족주의자들은 몸의 메타포를 통해 생물학적, 의학적, 인종위생학적 개념들과 유추들을 사용하면서 민족공동체의 인류학적 확립을 의도했다. 나아가 '민족의 몸' 메타포는 푸코가 말한 이른바 '생명정치'의 영역으로 전위되었다. 남녀 성역할, 성정치, 인구정책 등에서 정치·사회적으로 건강한 민족의 몸을 재생산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남녀 고유의 역할이 장려되었으며, '민족공동체'를 위해 투쟁하는 민족주의적 남성성이 강조되었고, 이러한 '남성'과 '남성 아닌 자'의 구별 속에서 여성성이 혐오되었다."(273)


"인종과학자들은 국가인종주의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종종 그들의 상상력의 지평은 일반 수준의 민족주의자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곤 했다. 특히 인종과학자 가운데 일부는 인종 개량의 최종 목표로서 단순히 '인종의 순수한 보존'과 '건강한 민족의 몸'을 넘어서서 '완전한 인간', 즉 '초인超人으로서의 민족'을 지향했고, 이러한 사회생물학적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배제, 억압, 통제뿐 아니라 말살의 수단까지 고려했다. 이와 같은 급진적인 국가인종주의야말로 문자 그대로 한 사회 내에 〈살아 마땅한 자와 죽어 마땅한 자〉를 나누는 "생명 권력"(푸코)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물론 국가인종주의를 인종과학자들의 과학적 인종주의로만 한정시킬 수는 없다. 인종 신비주의에 입각한 민족(인종)종교운동 역시 국가인종주의의 한 형태다. 그러나 과학적 국가인종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의 공공여론과 정부정책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275-6)


# 국가인종주의의 양대 이론적 지주 :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


"1883년 다윈의 조카 골턴은 인종 재생을 목표로 우생학이라는 신생 학문을 탄생시켰다. 우생학의 밑바닥에는 '역선택'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었다. 이미 「유전적 재능과 형질」(1865)이라는 논문에서 골턴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개 상태에서는 생존경쟁에 의해 퇴화해야 할 허약한 개체가 문명사회에서는 살아남는다. 궁핍한 가정의 건강한 사람보다 유복한 가정의 병약한 사람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길 기회를 얻는 경우가 많다. (···) 문명사회에서는 자연선택의 법칙과 그 법칙에 의한 정당한 희생자 사이에 화폐와 제도가 방패막이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문명화의 결과로서 '역선택'이 일어나고, 이는 곧 인종의 질적 하락을 가져온다는 것이 골턴의 비관적 진단이었다." "'역선택'을 막는 처방과도 같은 우생학은 온 국민을 '정상'과 '비정상' 혹은 '적격자'와 '부적격자'로 구분하고, '비정상' 혹은 '부적격자'를 제거하며, '정성' 혹은 '적격자'의 결혼과 생식을 장려하는 인종 재생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284-5)


제6부 범민족주의의 역사철학 1 : 루트비히 볼트만의 인류학적 역사론


"급진민족주의는 특히 해외 식민지가 적었거나 없었던 나라들에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범민족주의(pan-nationalism)로 발전해갔다. 범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 대동아공영권 이념으로 발전한 범아시아주의 등이 제국주의 전쟁의 파노라마에 등장했다. 범민족주의는 자민족을 세계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 선민 내지 초인적 지배 인종으로 내세우면서, 자민족의 지도하에 문화적 혹은 혈연적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 여러 국가의 국민을 모아 새로운 제국을 만들거나, 최소한 이들에게 '세계정책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적 기획이었다. 범민족주의에는 종족적·문화적 민족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가 결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독일어가 모국어인 사람들, 나아가 게르만 인종에 속하는 모든 민족의 단결을 주장했던 범게르만주의는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를 이룬 범민족주의의 결정판이었다. 범게르만주의는 분열된 독일민족운동 진영을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접착제 역할을 했다."(327-9)


"'역사·사회인류학' 학파는 바세르 드 라푸즈의 인류사회학에 준거하여 코카서스 인종, 즉 백인종을 그 형태학적 특징에 따라 유럽 인종, 알프스 인종, 지중해 인종으로 나누었다." "이들은 이러한 가장 인종주의적인 인종이론을 독일 민족주의와 결합시켰다. 먼저 이 학파는 인도게르만(아리아) 인종의 기원을 아시아가 아닌 고대 게르만족의 원거주지로 추정된 중서부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의 북유럽이라고 주장했다. 볼트만은 이러한 학설이 "새로운 시대를 연 진보"라고 자찬했다. 그동안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근거한 이 인종의 아시아 기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학파는 언어학 이론과 인종사상의 결합물인 '아리아 인종'이라는 말보다는 '인도게르만 인종'이나 '북유럽(북방) 인종'이라는 인류학적 용어를 더 선호했다." "아울러 오랫동안 독일 민족의 우월함의 근거가 된 게르만 신화를 인종주의적으로 재구성하여 게르만 인종 우월신화로 변모시켰다."(348-9)


# 역사·사회인류학 학파의 주요 논지

1. 인류는 인종 간 육체적·정신적 고유성에서 불평등하다.

2. 인류가 출현한 홍적세 이후로 각 인종들의 근본적 속성은 불변하다.

3. 인종과 사회계급은 일치한다. 즉 인종 등급에 따라 사회적 위계질서가 구성된다.


"볼트만은 역사를 '우수한 자들에 의한 문명의 발전─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우수한 자들의 퇴화와 사멸'이라는 반복적 사이클이 연쇄적으로 이어진 끝없는 순환의 연속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진보와 몰락의 순환사관은 목적론적이지 않다. 그가 말하는 역사적 인종 진화 관념은 다윈의 무목적적인 진화 관념에 충실하다. 볼트만은 인류 전체의 끝없는 문화/문명적 진보와 완성을 주장하는 계몽사상가들과 일부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진보낙관주의를 "환상적인 표상방식", "미신" 등으로 폄훼했다. 그의 진보낙관주의에 대한 비판과 순환사관은 문명발전을 이룰 수 있는 재능과 천재성은 일부 인종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더 나아가 그는 '자연민족'들은 유럽인 및 문명과 조우하면 필연적으로 사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볼트만은 그 멸망의 주원인으로 특히 절멸전쟁을 꼽았는데, 이 논리를 따르면 '자연민족'들에 대한 절멸전쟁은 역사법칙을 따르는 정당한 행위가 된다."(356-7)


제7부 범민족주의의 역사철학 2 :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인종투쟁의 문화사


"1900년을 전후로 사회인류학과 사회생물학 연구 분야 전반에서 인종 개념 자체에 대한 신념이 도전받고 있었다. 피르호는 게르만 인종과 유대 인종을 가르는 순수한 인종의 경계란 없다는 것을 증명했고, 두개골 측정학 연구의 결론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처럼 인종과학이 위기를 맞고 있던 상황에서 인종주의의 비합리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른바 "인종 신비주의"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다. 우생학, 사회인류학, 인종사회학 등 유물론적·실증주의적 인종과학은 인종 이념에 합리성과 객관성의 외피를 덧씌웠다. 인종 이념은 결국 믿음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고, 인종에 대한 믿음을 갖느냐 아니냐는 궁극적으로 세계관의 문제였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인종 신비주의는 인종의 신화적 기원과 인종의 고유한 성격을 만들어낸 정신적 혹은 영적인 실체를 내세웠다. 이를 신봉하는 자들은 인종문제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실패했을 때에도 여전히 인종의 신화, 상징, 신비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견지했다."(371-2)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인종주의는 특히 반유물론적·반실증적인 지적 조류가 널리 퍼져 있던 독일어권 중부 유럽에서 유행했다. 이곳의 시민계급 문화는 전통적으로 도덕과 가치의 보루였던 기독교와 교회의 힘이 약화됨에 따라 나타난 세계관적 방황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합리주의, 물질주의, 도시화, 기술화 및 산업사회로 대표되는 근대성에 대한 전반적 불쾌감 속에서 많은 사람은 새로운 신, 새로운 예언자를 찾아 헤매었다. 이들 독일어권 시민들의 "방랑하는 종교성"은 자유주의 신학 및 자유종교 공동체, 자유사상가 운동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속화된 종교들, 즉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일원론에서부터 쇼펜하우어 컬트, 신적 진리의 신비한 체험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지학神智學 및 인지학人智學 등의 비교秘敎들을 거쳐 채식주의 및 생활개혁 운동, 반더포겔 운동, 사회개혁윤리협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체종교와 유사종교들에서 안식을 찾았다."(372-3)


"체임벌린은 인종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인종 개념을 과학적 인식의 대상에서 깨달음의 대상으로 변화시켰고, '모든 것은 인종으로 귀결된다'는 신념이 기반하는 세계관적 토대를 유물론에서 관념론, 형이상학, 종교의 영역으로 전위시켰다. 그에 의하면 인종은 분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총체적 '형상'을 관조하는 것이었고, 인종의 의미는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체험되고 역사 속에서 경험되는 것, 다시 말해 '직관'과 '본능'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었으며, 인종의 고유한 성격은 본질적으로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가 구축하고자 했던 새로운 인종이론에서 중요했던 것은 인종문제에 관한 검증 가능한 지식이 아니라, 이 문제가 현재의 삶을 위해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19세기의 기초』 서문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모든 지식보다 더 높고 신성한 것은 바로 삶 자체이다. 여기에 기록된 것들은 체험된 것들이다.〉"(398)


"괴테와 칸트에게서 체임벌린은 게르만적 세계관/종교의 사상적 주춧돌을 발견했다. 괴테는 독일 낭만주의의 선구자이자 자연연구가로도 유명한데, 무엇보다 자연을 수학과 인과율의 원리에 가두어버린 기계론적 자연관에 반대하면서, '예술가적·건축가적 상상력'을 매개로 예술과 과학을 결합한 독특한 자연철학을 전개했다." "체임벌린이 괴테의 이러한 자연신비주의를 통해 실증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인식론적 무기를 얻었다면, 독일 관념론의 시조가 되는 칸트를 통해서는 유물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관적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과학적 인식론의 공세 앞에서 도덕과 종교의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체임벌린에게 칸트는 유물론적 일원론의 공세에 맞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믿음의 세계를 보호해준 이원론적 세계관의 수호신이었고, 이성을 넘어서 신비주의로 빠진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인종이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준 스승이었다."(400-1)


"『19세기의 기초』에서 체임벌린은 무엇보다 서양의 근대적 역사철학의 기본 공리인 "인류의 진보" 개념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오로지 "게르만 인종의 발전과 번영"만이 실제적 진보라고 역설한다. 이때 이러한 '진보'는 역사의 '완성'을 전제로 한 채 역사진행 과정을 해석하는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특정 인종의 뛰어난 문화적 성취 능력과 고유한 발전 방향만을 강조하는 특수 개념이면서, 동시에 '퇴화' 개념과의 내적 연결성 속에서 적대 인종과의 대립과 갈등을 고무하고 정당화하는 투쟁 개념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그의 진보 개념은 인종 우월주의와 인종 증오주의를 동시에 표현하는 폭력적인 사회다윈주의의 슬로건이었다. 물론 당대의 많은 인종주의자들은 인류 전체의 진보를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인류 진보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을 무엇보다 진보낙관론적 사회다윈주의자들, 나아가 고비노와 같이 생물 분류학적·형태학적 인종 개념에 근거한 인종주의자들에 대한 비판과 연결했다."(417-8)


보론 : '독일 민족의 범게르만적 세계제국' 프로젝트


에필로그 : 인종주의 역사관의 특징과 20세기의 조망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서양의 인종주의는 민족주의, 제국주의와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본격적인 증오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우리'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동시에 신체적·지적·도덕적으로 인종적 퇴화에 직면해 있다는 위기의식이 인종 증오주의의 원천이었다. 이 시기 인종 증오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한 역사 서사는 그 다양한 결에도 불구하고 역사진행을 묘사하거나 설명함에 있어서 '생존투쟁'과 '자연선택' 및 '역선택'으로 요약되는 다윈주의와 우생학의 기본 개념에 준거했다. 이제 기존의 '융합', '혼혈', '퇴화' 개념은 이러한 개념들의 의미 장場 속에 편입되었다. 이를테면 잘 관리된 혼혈은 자연선택, 잡혼은 역선택에 속한다. 인종 증오가 표현된 역사 서사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역동적인 역사상을 제시했다. 역사란 '우리 민족/인종'과 '사악한 적대 인종(혹은 모든 우리의 적)' 간에 벌어지는 '생존투쟁'과 '자연선택'의 항구적인 과정으로 묘사되었다"( 464-5)


"인종주의 역사 서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에 상응하여 그것이 인종 증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거로 활용되면 될수록, 점점 더 허구와 사실, 신화와 역사 간의 경계가 사라진 역사 판타지로 바뀌어갔다. 이 속에서 인종 간 투쟁은 마니교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신적인 존재'와 '동물적 존재', 나아가 선과 악의 대립으로 묘사되었다. 물론 인종주의 역사 서사는 본질적으로 신화를 지향했다. 예를 들어 '아름답고 우월한 존재'와 '못생기고 열등한 존재' 혹은 '고결한 피'와 '천한 피'의 대립 구도 속에서 전자의 찬란한 성취와 영웅적 투쟁을 찬양하는 인종 신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신화는 가능한 한 '실제 일어난 것(res gestae)'으로서의 역사에 기반하곤 했다. 동시에 이러한 신화적 역사는 자신의 권위와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적 성과와 이론을 끌어들였다. 이제 더 이상 역사의 신화화가 아니라 신화의 역사화가 인종주의 역사 서사를 특징짓게 되었다."(465-6)


"인종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백인 인종주의에 맞서는 저항적 인종주의도 출현하곤 했다. 저항적 인종주의는 백인종을 만악의 근원으로 규정하지만, 동시에 백인 인종주의의 역사관과 서사 및 논리를 모방한다." "19/20세기 전환기에 일본이 주창한 범아시아주의가 그러하다. 악마 혹은 귀축鬼畜과도 같은 백인종에 맞서기 위해 황인종의 단결을 주장했던 일본인의 인종주의가 개화사상가로 시작해 친일부역자로 일생을 마친 윤치호에게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덜 알려진 사실은 『환단고기』를 숭배하는 자칭 민족주의 역사가들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저항적 인종주의의 포로라는 것이다. 이들은 마치 고비노, 볼트만과 체임벌린 같은 범민족주의적 인종주의자, 나아가 서양의 여러 인종 신비주의자들을 모방한 듯 우리 민족은 수메르 문명을 비롯한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문명의 건설자요 지배자인 환족의 후예라는 역사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있다."(4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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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끝과 시작 - 책읽기가 지식이 되기까지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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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은 자신의 자유를 자각하고 있다. 그러면 이 자유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절대적으로 정초된 것이다. 단적인 시원始原(Anfang)이다. 이 시원은 자연사적 맥락에서 추상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상황에서 도출해 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매개적인 것이다. 헤겔이 이것을 기독교에서 이끌어 내고 있기는 하다. 그는 예수가 단적으로 인간의 자유, 세계의 자유를 천명하였다는 통찰을 청년기에 설파한 바 있다.

 그러나 철학사적인 문맥에서 고찰한다면 이는 데카르트의 '자립적 자기의식'에서 기원한 개념이다. 데카르트는 일체의 외면적 사태로부터 철저하게 내면으로 퇴각한(소극적 부정적 계기), 그리하여 단독적 자기로써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적극적 긍정적 계기) 〈이 정신··· 나 자신〉을 정립하였다. 이로써 유한자인 '나 자신'은 바로 그 유한성을 계기로 무한자인 신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무한자인 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던 유한자인 인간은 무한자인 신의 인식에 이르는 필연적 계기로서 성립하였다. 인간이 자기의식으로써 신을 인식할 때에만, 바로 그때에만, 인간이 초월론적인 만큼, 인간이 스스로 초월적인 것을 관조할 수 있는 존재하고 이론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만큼, 꼭 그만큼만 인간은 초월적일 수 있는 것이요, 바로 그러할 때에만 신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이 자신의 자유를 자각하고 있다는 것에는, 바로 그렇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바로 그것과 함께 또는 바로 그런 까닭에) 정신의 자유 일반을 세계에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자신의 자유에 대한 자각이 정신의 온전한 자기 실현의 가능태라면 그러한 가능태는 이 세계 안에 자신의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는, 가능태를 현실태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자연사가 아닌 인간사의 시작이다. 인간사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정신화精神化(Begeisterung)된다.

 인간사에서는 정신적 세계가 실체이고, 물리적 자연적 세계는 그것에 종속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정신의 자유가 세계에 실현되어야 함을 자각하여 온 과정이므로 물리적 세계에 매몰된 것은 선행하는 단계요, 정신적 세계의 건립은 〈사변적으로 표현하면〉, 이 선행하는 단계의 〈진리〉이다. 진리의 성립은 목적을 실현하려는 운동, 즉 활동이 있음으로써 가능해진다.

 가능태의 실현은 활동 또는 운동을 요구한다. 물론 물리적 자연적 세계에도 운동이 있다. 식물은, 가능태인 씨앗이 현실태인 나무로 성장하려면 환경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식물은 이 환경을 자신의 활동으로써 조성할 수 없다. 자연의 우연적 여건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가능태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실현의 활동, 즉 노동(Arbeit)은 인간 개인의 활동이면서 동시에 세계사적 노고이기도 하다. 이 노동이 '근대'라는 시대를 이끌어 간 추동력이다.

-제3부 〈시대를 읽는 주제 서평들〉, 1. 세계의 궁극목적과 역사 中에서, pp.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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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성장의 고고학 (양장) - 사회조사로 본 한국 사회의 변화, 1965~2015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기획, 장덕진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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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한국인의 삶, 그 반세기의 변화


1965년과 1974년, 그리고 2005년의 자료를 비교 분석한 김현식의 분석을 살펴보자. "초혼에서 이혼으로의 이행을 보면 1965년과 1974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2005년에는 이혼하지 않고 초혼으로 남을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1974년 이전의 한국 사회에서 이혼의 위험이 지금보다 더 컸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과거에는 일단 초혼이 소멸되고 나면 빠른 시간 안에 재혼을 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관찰되지만, 2005년에는 재혼 시기가 현격하게 늦어지고 있다. 과거의 여성들이 이혼도 더 많이 경험하고 재혼도 더 빨리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역시 반드시 이혼이나 재혼에 대한 여성들의 가치관과 직접 맞닿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의 여성들이 재혼을 선택으로 생각하는 반면, 과거의 여성들은 초혼 소멸 이후 '혼자된 여성'에 대한 높은 사회적 압력(가령 경제적 부담)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재혼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을 가능성이 있다."(17)


"가장 놀라운 것은 태아 사망의 변화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이 높아지면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변화 중 하나는 기대 수명의 증가이다." GDP의 급격한 증가와 더불어 "태아 사망도 당연히 드라마틱하게 줄어들었을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1965년 기혼 여성 중 태아 사망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응답자가 80.4%에 달했던 반면, 2005년이 되면 이것이 48.7%로 절반 가까이 낮아진다. 즉, 현대의 여성들이 과거 여성들보다 훨씬 많은 태아 사망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는 태아 사망을 사산과 자연유산, 그리고 인공유산으로 분해해보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거에 비해 사산은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자연유산은 늘어났고, 특히 인공유산은 거의 네 배로 크게 늘어났다. 2005년이 되면 여성 두 명 중 한 명 꼴로 인공유산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식은 2005년 인공유산으로 사라진 출산율을 0.21에서 0.27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18-9)


"지난 50년간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한국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초혼 연령이 늦어졌을 뿐 아니라 초혼을 하는 기간도 길어졌다. 몇 세에 결혼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결혼 시기를 선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혼의 위험이 줄어든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전쟁 같은 급격한 사회 변화로 뜻하지 않게 혼인이 해소될 위험은 확실히 줄어들었고, 본인의 의사에 반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하는' 일도 줄어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혼인의 유지도 과거에 비해 여성 본인의 선택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이혼하게 될 경우 재혼이 줄어들거나 늦어지고 있는 것도 역시 규범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자녀 출산이 줄고 특정 시기 몇 년간 집중적으로 출산한 후 중단하는 경향, 그리고 인공유산이 늘어난 것도 역시 출산에서 여성의 선택이 과거에 비해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20)


"김두환은 전통적 신분 질서가 무너지면서 '모두가 가난하지만 평등해진' 1950년대가 (학력주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교육투자의 원인을 교육열보다는 집단적 상승 이동의 기회가 사라진 구조적 조건에서 찾는 선행 연구들에 주목한다. 미군정하에서 노동운동 같은 집단적 상승 이동의 계기가 탄압의 대상이 되면서 개인적으로 계층 상승의 활로를 모색하려면 교육에 투자하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김두환은 한국의 평등주의가 평등한 개인들 간의 연대라기보다는 '지위 상승 평등주의' 혹은 '비도덕적 가족주의'에 가까웠다고 보고 있다. 우리의 교육열은 사실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해진 사회에서 나도 경쟁에서 이겨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겠다는 '지위 상승의 열병'이었고(따라서 그 과정에서 연대의 자원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그 경쟁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변형된 형태의 근대적 가족이었다는 것이다."(21-2)


"고령화를 추동하는 힘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이를 낳지 않아서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노인이 된 이후에 더 긴 시간 동안 살게 되는 것이다." 1970년 대비 2015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무려 19.8세가 늘어나면서 "그에 수반되는 문제들도 생겨났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생애 전체에 걸쳐 총소득과 총지출이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아동 시기와 노인 시기에는 소득이 없거나 매우 적은 상태에서 지출만 하는 상황이 된다. 경제활동 기간에 지출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고 이때 남은 소득을 아동기와 노인기에 분배해서 전 생애에 걸친 총소득과 총지출이 어느 정도 균형을 갖도록 해야 하는데, 노인으로 지내는 기간이 19.8년이나 늘어난 지금 이 두 가지를 일치시키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으로서는 노인 빈곤의 문제가 되고 국가 전체로는 재정 부담이 된다."(27-8)


"임채윤의 분석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보면 이웃 공동체는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압축성장의 핵심 지역인 수도권에서는 유의미하게 사라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의 고소득 고학력자들은 다른 나라와 달리 이웃 연결망에 대한 참여가 낮고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웃도 아니고 친족도 아닌 연고형 조직(예를 들어 동창회)과 결사체에 대한 참여가 두드러지게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임채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동창회와 같은 배타적 연고 집단을 중심으로 연결망을 구축한다는 것은 학벌이 좋지 못한 사람들을 사회적 자본으로부터 배제하는 효과를 더 강력하게 만들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는 점에 대해서도 한국의 도시화가 전반적인 사회적·시민적 참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하는 도시사회학의 고전적 가설에 한층 더 부합한다는 진단을 내놓았다."(34-5)


"권현지는 1987년 이전 체제가 일체의 조직 운동과 집단적 움직임에 대한 억압을 통해 테일러적 대량생산에 복무할 수 있는 순종적 저임금 공장노동자들을 형성하고 동원하는 데 초점을 둔 노동 체제라고 규정한다. 평생직장과 근속 연수에 따른 승진과 보상 등 내부 노동시장은 관리사무직과 고급 기술직에 배타적으로 주어졌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분절적 노동시장 정책이 비시장적이고 위계적인 가부장제 규범에 의해 정당화되었고 차별의 당사자들에게도 상당 부분 내면화 되었다는 점이다. 분절의 갈림길은 성별 격차와 학력별 격차, 그리고 관리직과 사무직의 격차, 대기업과 소기업의 격차 같은 것들이었다." "학력과 성별을 매개로 한 노동시장에서의 임금격차가 그나마 지금의 수준으로 축소된 것은 1987년부터 외환위기까지의 10년 동안의 변화 때문이다. 1980년 대졸자의 임금 총액은 고졸자의 231.6%에 달했고(지금은 약 150%),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44.2%에 지나지 않았다(지금은 약 63%)."(37-9)


"87년 체제 노동운동은 실질임금 인상, 생산직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된 내부 노동시장, 고용평등법 등 주요한 제도 변화의 촉진, 지니계수의 가파른 하락 등 불평등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진전은 주로 대기업 및 중화학공업 남성 노동자에게 집중됨으로써 여성 노동을 포용하는 데 실패했고 기업 규모 간 임금과 근로조건의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87년 체제는 노동자 전반을 포괄하는 노동조합운동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노동조건 개선 위주의 운동으로 머물렀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1997년 외환위기는 노사 간 균형을 완전히 깨버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권현지의 진단이다. 그는 포스트 97년 체제를 탈규제, 집단적 노사 관계의 전반적 약화, 노동시장 유연화 및 개별화, 불평등의 심화로 요약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고 이들은 광범위한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적 위험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다."(40)


"2000년대 이후 나타나는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현상은 조직 내 인간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졌고 특히 비정규직의 만족도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는 점이다. 노동자들 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개인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연대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의 개인화는 2007년 조사에서 나타나는 사회의식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2007년 조사에서 임금노동자만을 골라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77%의 노동자가 빈부격차가 늘었으며, 53%의 노동자가 노사 갈등이 커지고 있다고 답했다. 다수의 임금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확대되고 있는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고 답했지만, '노력하면 누구나 한국 사회에서 잘 살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오직 28%만 그렇다고 답한 데서 드러나듯이 문제 해결에 필요한 합리적 기제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부정적이거나 부재했다."(41)


"두 시점(1968년과 2012년) 사이에 가구주는 점차 고령화, 여성화, 고학력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경제 계층이 낮을수록 여성 가구주, 저학력 가구주, 미취업 가구주의 구성비는 높고 상용직에 종사하는 가구주의 비율은 낮아졌으며 이는 두 시기 모두 공통적으로 관찰되었다. 십분위분배율은 6.31%에서 12.9%로 증가해 소득 양극화는 다소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불균등 분배구조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전체적인 사회적 위험의 수준은 비교 시점 사이에 약 다섯 배 이상 증가해 후기 산업사회로의 이행에 따라 사회적 위험이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시기에 관계없이 사회적 위험은 경제 계층이 낮을수록 증가했으며 경제 계층 간 사회적 위험의 격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1968년의 경우 사회적 위험은 근로소득이나 재산소득과 유의미한 관계를 갖지 않았으나, 2012년이 되면 사회적 위험의 수준이 높은 가구일수록 근로소득은 유의미하게 감소하고 있다."(43-4)


# 사회적 위험 : 가장의 사망, 장애, 질병, 실직, 노령뿐만 아니라 저숙련 일자리 감소와 국가 간 노동력 이동의 확대, 민간 보험의 오용 등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자〉는 슬로건으로 기억되는 1990년대에 정보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장밋빛 미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94년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정치활동 영역, 경제활동 영역, 사회활동 및 개인 심리 모두에서 정보화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조사 시점이 인터넷의 상용화가 미처 이루어지기도 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본격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정보화에 대한 긍정적 기대가 넘쳐났다고 할 수 있다." "2003년이 되면 비로소 정보화의 효과에 대한 태도가 집단별로 유의미하게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변수들에서 전통 미디어를 선택한 집단과 인터넷을 선택한 집단이 양극에 위치하고 주변 사람을 선택한 집단이 그 중간에 위치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오늘날 SNS에 젊은 세대가 편중되고 보수 성향 종편에 고령 세대가 편중되는 것과 같은 미디어의 분화 현상이 이때 이미 그 단초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47-8)


"일곱 개의 하위 분야와 키워드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추세 가운데 하나는 개인화 경향이다.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을 둘러싼 경제적 강요나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그들의 선택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떠맡겨지는 삶의 조건들로부터 또 다른 형태의 강력한 제약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산 자체가 줄어들 뿐 아니라 출산 시기 또한 갈수록 엄격하게 제한되는 양상 등이 그러하다. 교육은 경쟁에서 이겨 더 높은 곳에 올라가겠다는 비도덕적 가족주의가 그 주된 동력이고, 그 결과 사회적 연대의 자원을 파괴하고 성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양상을 보인다. 고령화의 과정은 지역별로 양극화되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중심의 고령화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심각하게 진행되어온 대부분 지역의 고령화를 외면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노인 세대 내부의 양극화가 또 다시 진행된다."(52-3)


"도시화의 과정에서 한국의 이웃 공동체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상층의 이탈이었다. 그들은 지위 경쟁의 대상이자 사회적 교류의 보상이 그리 크지 않은 이웃 공동체에 참여하기보다는 이미 많은 자원을 가진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동창회와 같은 연고형 조직들에 참여한다. 50년에 걸친 노동 레짐의 변화 과정에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연대를 잃어버린 노동자'가 되었다. 이들에게 〈남은 생존 방식은 개인의 도구주의를 힘껏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사회적 위험은 현저하게 늘었고, 그 위험은 계층화되었다. 이러한 위험의 계층화 사다리에서 아래쪽에 속하는 사람들은 사회연대에 기초한 위험 분산의 기회로부터도 배제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정보화는 짧은 시간 안에 빠른 사회 변화를 가져왔는데, 사회의 균형추를 회복하는 네트워크된 개인의 역량은 아직 그 단초를 보이고 있을 뿐 본격화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개인화라는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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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
서중석 지음 / 돌베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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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박종철 고문사망과 동시다발 시위의 등장


"1986년 가을 언제부턴가 전두환은 비상수단으로 친위쿠데타 같은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언론에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지만, 10월 22일 전두환은 11월 4일의 미국의회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11월 7일 비상조치와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정지시키겠다고 언명했다." "비상조치 또는 친위쿠데타는 애당초 현실성에 문제가 있었고, 미국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압승하여 레이건 행정부가 궁지에 몰리는 등 국내외적인 여건도 작용해 구체화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 모의'는 이 시기 전두환의 대응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성환 의원 구속, 건국대 사태, 4·13호헌조치도 이 같은 전두환의 대응방식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 계획안은 안기부나 경찰, 행정부, 여당에 대해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좋으니 단호히 대처하고 밀고 나가라는 전두환의 의지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과시한 것이었다."(36-7)


"1986년 11월의 건국대 사태가 말해주듯 학생들은 그해 5·3인천사태 이후 끊임없이 붙잡혀갔고, 수배당하고 투옥되었다. 또한 거의 매일같이 대문짝만하게 신문지면과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한 공안 사건을 접하면서 악몽에 시달렸다. 언제 어디서 군홧발에 걷어차일지, 끌려가 어떤 고문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대학가는 탈진상태나 다름없었다. 전두환 정권의 쉴 새 없는 공격에 많은 학생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좌절과 무력감을 느끼며 겨울방학을 맞았다. 그런데 이때 박종철이 서울대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일명 깃발) 사건으로 수배 중인 5년 선배 박종운(사회학과)의 거처를 대라는 대공분실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학생들 누구한테나 자신의 현실이 될 수 있었다. 학생들은 그의 사망 이후 정국이 무섭게 변하는 것을 목도했다. 얼어붙은 교정은 〈친구〉, 〈그날이 오면〉을 부르면서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32)


"신민당은 박종철 죽음이 '단순한 사망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자 17일에야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대변인이 성명을 발표하는 등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1986년 2월 12일 2·12총선 1주년을 맞아 1,000만 직선제개헌서명운동을 벌여 대대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렇지만 5·3인천사태 이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목표로 한 '합의개헌'이 여당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것에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은연중 가세한데다가,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민우가 내각제 개헌을 검토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까지 발표해 야당가는 뒤숭숭했다. 신민당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민우의 주장을 제압하려 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박종철 죽음'이 '박종철 사건'으로 진전되면서 양 김은 재야와 공조하여 이 사건에 직선제 개헌투쟁을 접목시켜 정면공세로 나아갔다. 드디어 국면 돌파의 혈로가 뚫린 것이다."(30-1)


제2장 호헌철폐투쟁으로의 전환과 학생운동의 변화


"4월 13일은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 5월 18일 박종철 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 6·10국민대회 등과 함께 한국 민주화 여정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전두환은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이날 특별담화를 통해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만료와 더불어 후임자(노태우)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개헌 논의는 88올림픽 뒤에 생각할 일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 결정이 얼마나 심각한 파장을 몰고 올지 짐작이라도 했을까. 4·13호헌조치는 같은 날 발기인대회를 가진 통일민주당이나 민주화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전두환 정권과 같은 통치방식은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고, 따라서 대통령 선거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반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또 민정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4·13호헌조치는 자신들이 그때까지 주장해왔던 합의개헌 논의를 일순간에 부정하는 조치였다."(104-6)


"1986년 5·3인천투쟁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최대의 가두투쟁으로, 군사독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평가도 있고, 민주화운동사에도 한 획을 긋는 투쟁으로, 민족민주 세력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또 인천에서 여한 없이 싸워봤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5·3인천투쟁 참여자들은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은, 급속히 형성·고양된 관념적 급진성에서 벗어나는 데 수개월 또는 수년이 걸렸다." "1986년 들어 공세적이었던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은 5·3인천사태 이후부터 그해가 끝날 때까지 수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KBS와 MBC에서는 불타는 민정당 당사와 경찰차, 보도블럭 등이 나뒹구는 인천시민회관 일대의 모습을 연이어 방영해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데 열을 올렸다. 경찰은 민민투·자민투 등을 용공조직으로 규정하면서 인천사태를 극렬 좌경용공 폭력 세력에 의한 난동으로 몰아갔다."(161)


"전두환·신군부는 수구체제를 보위하기 위해 입법회의를 통해 노동관계법을 개악하고 민주노동조합을 파괴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돌리고 '위장취업자'를 단속해 노동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했다. 전두환 정권은 공장에서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겸손한 자, 자주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는 자, 오른쪽 손가락 셋째 마디에 굳은살이 박힌 자, 그리고 안경을 쓰거나 말을 잘하는 자, 생활이 너무 검소한 자 등이 '위장취업자'일 수 있다는 공문을 발송하여 자체 감시 기능을 강화하도록 조처했다. 그러나 경찰이 1986년 6월 경인지방 노동자들의 자취방을 덮친 것은 '위장취업자'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1계급 특진의 포상이 따르는 5·3사태 수배자들을 체포하게 위해서였다. (서울대 의류학과 출신의 위장취업자인) 권인숙이 경찰서에 끌려온 다음 날부터 담당 형사가 5·3사태 수배 노동활동가에 관해서 묻기 시작했고, 3일째부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추악한 성적 고문을 가했다."(127)


"5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6월 임시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할 것에 합의를 보았다. 현특 구성 문제를 앞두고 노태우는 자신들의 복안이 내각제라는 것은 밝히지 않았지만, 직선제는 나라를 망치고 극심한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고 강조해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다음 날 임시국회는 헌특 구성결의안을 통과시키고 폐막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던 7월 7일 청와대에서 당·정·청 핵심 인사들이 모여 내각제 개헌안을 야당에 제시하되, 야당이 거부할 경우 기존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고 88올림픽을 치른 다음 국민의 뜻을 물어 개헌을 하겠다는 정국 운영 방안에 합의했다. 야당이 내각제를 받아들일 리 만무한 이상 사실상 헌특이 필요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전두환은 다수당이 되는 것은 선거법이나 부정선거 방법으로 얼마든지 보장받을 수 있으므로, 내각제로 하면 영구집권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165-6)


"전두환의 초강경 초토화 공세는 박종철 고문사망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크게 위축되었던 야당은 고양된 분위기에서 정치공세를 펴며, 5·3인천사태 이후 있었던 앙금을 털고 민주대연합을 앞장서서 제기했다. 야당으로서는 박종철 고문사망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개헌 문제에 연계시켜 체육관 대통령이나 변형된 내각제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더 나아가 김영삼·김대중은 직선제 개헌투쟁을 선명하게 전개하기 위해 4월에 들어와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4월 13일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를 가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두환이 합의개헌을 위해 노력했다는 시늉도 별반 보이지 않은 채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 날에 맞춰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4·13호헌조치는 3·3평화대행진 이후 뚜렷한 이슈가 없어 약화되었던 민주화운동을 크게 자극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5·3인천사태 이후 잠복해 있던 개헌 열망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170-1)


"학생운동권은 1986년까지 야당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민주대연합에 그다지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학생운동권이 1985년 2·12총선 유세장에서 김대중·김영삼의 신당 후보를 지원한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야당후보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미·일 파쇼정권'의 장기집권 음모를 분쇄하고 대중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개헌 문제가 제기되자 학생운동권은 야당을 혹독히 비판하면서 직선제 개헌론과는 다른 개헌 주장을 폈고 5·3인천사태에서 야당은 거의 모든 운동권에게 두들겨 맞은 동네북이었다. 그러한 학생운동권과 야당의 관계가 1987년에 들어와 바뀌었고, 학생들은 6월 항쟁에서 직선제 개헌 쟁취를 들고 나왔다. 6월 항쟁이 그토록 거대한 민중시위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이 민주대연합에 적극적이었고, 시위 구호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로 단순화된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189-90)


"(박종철 고문사망 사건 이후) 전국 각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 등 정국이 격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지만, 학생회는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제약된다는 이유로 가두시위나 연대시위는 가급적 자제했다. 그런데도 천주교와 개신교 측의 성직자와 신자, 대학교수, 문화인, 언론인, 재야단체, 여성단체, 정당에서는 4·13호헌철폐투쟁을 줄기차게 벌였고, 5·18박종철 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가 터졌을 때는 다시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하고 6·10국민대회를 가질 것을 결의했다. 전두환이 파악한 것과 같은 세상이었더라면 4·13호헌조치나 5·18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 6·10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이 큰 저항이나 반응 없이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과거에 학생운동이 했던 역할을 이제는 상당 부분 행동하는 시민이 하게 되었다. 이처럼 6월 항쟁으로 진전되도록 추동하는 힘이 민주화 열망 속에 새롭게 쌓여갔다."(228-9)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5·18박종철 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가 큰 쟁점이 된 이후 학생들이 민주화투쟁의 대열에 적극 나서게 된 데에는 미안함이나 죄책감도 작용했다. 일제강점기 학생·청년의 반제항일 변혁운동, 4월 혁명, 그 이후 학생운동에서 학생들은 어느 계층보다도 강한 정의감, 뜨거운 인간애(동포애)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한국의 학생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에 미안함이나 자괴감, 자책감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호남 출신이 더 심했지만, 1980년대에 학교를 다니면서 광주에 대해 무언가 갚아야 할 것이 있다, 죄를 지은 것 같다, 미안하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5월 그날이 올 때마다 격렬한 시위가 전개된 것은 그러한 마음의 빚과 무관하지 않다."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빈사상태에 빠진 것도 학생들이 가슴을 무겁게 누르며 가열한 투쟁에 나서게 하는 한 축으로 작용했다."(237-8)


제3장 6·10국민대회에서 6월 항쟁으로


"초기에는 민주당도 1986년의 경험 때문인지 재야와 직접적으로 한 조직에서 같이 활동하는 것을 망설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협의 끝에 모든 민주 세력을 망라하자는 천주교 측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대중노선을 주장한 학생들로서는 이 단체에 적극 참여하거나 협력하게끔 되어 있었다. 드디어 4월 혁명 이후 가장 강력한 민주대연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호헌철폐·민주쟁취를 위한 공동투쟁기구는 부산에서 먼저 조직되었다. 5월 20일 부산 당감성당에서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와 종교계, 통일민주당, 학생과 재야, 노동자 등 100여 명이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를 결성했다." "부마항쟁이 일어난 곳이자 박종철의 고향인 부산에서 이러한 단체가 출발했다는 것은 부산지역이 6월 항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했다.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은 노무현이, 상임집행위원은 김상찬·문재인 등 16명이 맡았다."(258)


"6·10국민대회는 민주화운동사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서도 한 획을 그었다. 3·1운동 이후 같은 날 여러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시위가 벌어진 적이 없었다. 4·19혁명의 경우 서울과 부산, 광주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사망자도 많았지만 6·10국민대회처럼 많은 지역이 참여하지는 않았다." "국본의 평화투쟁 호소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부산·대구·마산·전주 등 여러 지역의 시위에서 공권력을 부정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투쟁을 벌였다는 것도 중요하다." "경찰은 처음으로 규모가 큰 전국 동시다발 시위를 경험했다. 이 때문에 정권 안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서울에서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서울에 지원 병력을 보낼 수 없었다. 2만 2,000여 명이 배치된 서울과 부산·성남 등 몇몇 지역에서는 경찰이 무장해제를 당하는 등 경찰력만으로 6·10국민대회에 대응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마산 시위는 부마항쟁을 방불케 했다."(307-9)


"6·10국민대회가 6월 항쟁으로 상승·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명동성당농성투쟁과 넥타이 부대 시위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명동성당농성투쟁과 넥타이 부대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6·10대회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대단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명동성당농성투쟁이 운동권에 의해 조기에 해산될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방향'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명동성당농성투쟁의 지속을 주장했던 사람은 대체로 활동가나 학생운동 지도부와는 거리가 있는, 문자 그대로 시민과 일반 학생으로 구성된 민중이었다."(312-3) "명동성당 농성 자리에 있던 40대 중년 남자의 말을 『말』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더 이상 학생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우리 시민들이 희생이 돼서 이 군부독재를 끝장내야 한다. 저들은 학생들을 극렬주동자로, 우리 시민들은 단순가담자로 분류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을 구속시킬 것이다. 우리가 앞장서자. 그리고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자.〉"(318)


"6월 12일 12시 45분경 농성시위대는 대열을 갖춰 명동거리로 나서기 위한 시위를 벌였다. 최루가스와 땀으로 범벅이 된 데다 허기에 지치고 햇볕에 검게 그을린 시위 대열이 나타나자 명동 일대는 거대한 축제를 치르는 듯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환호하면서 농성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삼창을 반복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건물의 창문이 활짝 열리면서 시민들이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뜯어 거리로 날려 보냈다. 명동 일대가 온통 하얀 꽃으로 뒤덮였다. 어떤 이들은 옥상에 올라가 손을 흔들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시위를 지켜보기도 했다." "부근에 있던 은행·증권회사·보험회사 사무원들은 상업은행 쪽에서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울려 퍼지자 함께 따라 외쳤다. 경찰이 명동성당 시위대와 합세하지 못하도록 길목으로 밀어붙이자 아쉽다는 듯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본격적인 넥타이 부대의 등장이었다."(326-8)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지속된 명동투쟁은 호헌철폐, 군부독재타도의 강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6·10국민대회를 이어받아 그것을 더욱더 강력히 발전시켜야 한다는 무의식적·의식적인 역사적 힘의 결집이었다." "명동성당 농성시위대가 15일까지 버티다가 해산한 효과는 바로 그날부터 드러났다. 13일 토요일, 14일 일요일이 지나 15일 월요일이 다가오면서 시위는 다시 격화되었다. 14일 아침에 고건 내무장관과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전두환에게 경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월요일에 12일 정도의 많은 사람이 나와도 경찰 능력으로 진압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전 같은 대도시나 진주·천안 같은 중소도시에서의 월요 시위는 정부가 호언장담하며 예상한 결과와는 전혀 달랐다. 쏟아져 나온 시위대에 비해 경찰 병력은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시위를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군부파시스트 독재정권이 강력하게 내세우는 철벽 같은 치안 유지가 여러 도시에서 허물어진 것이다."(354-6)


제4장 항쟁의 격화─기로에 선 전두환·신군부체제


"이 시기에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할 '결심'까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군을 출동시키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경찰의 치안 능력 한계가 심각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공권력이 거세게 도전받았던 6월 17일 저녁 민정당 당직자와 안기부장이 있는 자리에서 전두환은 "군부를 동원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그런 걸 반복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라고 말해 만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군 출동은 자제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미국 때문에 군이 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6월 항쟁 이전이라면 몰라도 6월 항쟁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군이 출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6월 항쟁은 광주항쟁과 비슷하게 대단히 격렬했다. 더구나 6월 항쟁은 광주항쟁과도 다르게 전국에 걸쳐 거의 매일같이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군이 출동했을 경우 자칫하면 엄청난 새로운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430-1)


"민정당은 18, 19일 시위를 목도하고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전두환의 얼굴만 쳐다볼 수 없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부산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의 사태가 4·19시위를 방불케 했고, 부마항쟁·광주항쟁을 떠오르게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4월 혁명 후 이승만 정권의 국무위원과 자유당 간부가 어떻게 당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더구나 6월 20일은 토요일인데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어서 마음을 놓았던 광주·전주·익산·순천·목표 등 호남지역에서 시위가 대단한 기세로 커지고 있었다. 전두환 또한 혼자 독단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도 위중한 상황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정당은 비상조치를 바랄 수 없었다. 군이 전면에 나서면 노태우 정권 출현이 뿌리째 뒤틀리고 뒤집어질 수 있었고, 민정당은 1980년 5·17쿠데타 이후의 공화당 신세로 전락할 수 있었다."(444-5)


"김영삼과 김대중은 4·19시위 때 속해 있는 파벌은 달랐지만 민주당의 중견 간부였는데, 4·19 혁명 그날의 민주당 간부들과는 다르게 월등히 용기가 있었다. 두 야당 지도자는 민주대연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6·26평화대행진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김대중·김영삼은 직선제 쟁취를 가져올 방법에 대해서 아무런 실질적 방안이 서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폭력투쟁'으로 비상조치가 선포되어 그나마 그때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입지조차 지난 1980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상실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크게 우려했다." "이 때문에 6·26대회는 한판 판갈이 싸움으로, 사자성어로 말하면 건곤일척의 전쟁이었고 진검승부처였다. 6·26대회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민권이 위대한 승리를 거둘 것인가, 군부독재가 용기를 얻어 시간을 끌면서 다른 간특한 방책을 내놓을 것인가가 판가름 나게 되어 있었다."(478-9)


제5장 무릎 꿇은 전두환·신군부체제─ 6·25대행진에서 6·29선언으로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물론 서울과 지방의 의원들이 시위에 들어가려고 하자마자 경찰에 당했던 바와 같이, 6·10대회 때와는 다르게 전두환의 직접 지시에 의해 경찰이 시위를 초동 단계에서 꺾어버리려는 초강경 진압정책을 썼는데도 6·26평화대행진은 전두환 정권이 대규모 시위에 경찰력으로 대처하는 데 역부족임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날 시위는 과격함은 적었고 전반적으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격렬하게 시위가 전개되었던 서울역 광장의 경우 시위대는 차도점거투쟁, 경적 유도에 의한 시민 끌어내기 '투쟁'에 힘을 기울였고, 최루탄 발사에도 투석 등으로 대항하기보다는 흩어졌다 다시 모여 구호를 외치는 방식을 택했다(『조선』). 전체적으로 6·10대회에 비해 시위의 규모·횟수·지역 등이 훨씬 커졌거나 늘었지만 방화나 폭력사태는 줄어 시위 양상은 덜 과격했던 것으로 경찰이 분석했다고 보도한 것도(『경향』) 이러한 시위 양상에 근거한 것이다."(532-3)


"6월 29일 오전 9시가 조금 지나 발표한 노태우의 6·29선언은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보적인 것도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폭넓게 확장하고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를 제외하면 15년 이전의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방자치의 경우 4월 혁명기 장면 민주당 정부 수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럼에도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 그리고 국민을 놀라게 한 것은 6·29선언이 전두환·군부독재정권의 정책과 너무나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었고, 6·29선언의 핵심인 대통령직선제는 그동안 전두환과 민정당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박정희 유신 권력과 전두환·신군부 세력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정책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12·12쿠데타 때부터 대체로 전두환 다음의 위치에 있었고, 민정당 대표위원이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제시했다는 점에서 장기간 혹독한 탄압만 받아왔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542-3)


# 6·29선언의 핵심 요지

1.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에 평화적으로 정부를 이양하겠다.

2.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도록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

3. 김대중을 사면·복권하고 시국 관련 사범들을 다수 석방해야 한다.

4. 구속적부심 전면 확대 등 기본권을 강화하고 인권 침해 사례를 시정하는 등 제도적 개선을 촉구한다.

5. 언론 자유 창달을 위해 인론기본법을 개정 혹은 폐지하고 프레스카드제도 또한 폐지한다.

6.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보장하고 대학 자율화와 교육 자치도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7. 대화와 타협의 정치 풍토를 마련해야 한다.

8.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하여 폭력배를 소탕하고 각종 비리와 모순을 과감히 시정해야 한다.


"6·29선언은 왜 나왔을까. 많은 사람이 예상했던 바와는 다르게 계엄령이나 친위쿠데타가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6월 항쟁에서 군 출동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그 시기가 차기 대통령선거 등 정권교체 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화운동 세력과 민주당이 요구하는 직선제 개헌이 민주화와 직결되어 있고, 일반 시민들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기 대통령선거 등 정권의 교체기에는 차기 정권 담당자의 입장이나 주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고 그것이 대규모 시위투쟁으로 표출된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전두환·신군부 통치체제가 고립되고 끝내는 벼랑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에 군이 출동할 수 없었던 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있다. 한시라도 잊을 수 없는 광주의 기억이 그것이다."(549-51)


"6월 시위에 군이 나서면 제2의 광주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가 많았다. 노태우는 그의 회고록 상권에서 충성심 강한 군 간부들도 '군이 출동하면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고 기술했는데, 군이 출동했을 경우 부산·대전·광주·전주·성남 등 여러 지역에서 뜻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일어나 엄청난 비극적 사태가 파국이 초래될 수 있었다." "그러한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군홧발로 누르다가 돌발사태가 발생해 광주참극 같은 파국적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경우 군은 어디에서 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명확해졌다. 군 상급 지휘관들이 두려워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4월 혁명에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될 때 계엄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중립을 지켰는데, 6월 항쟁에 동원된 군이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고, 12·12쿠데타처럼 하극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557-8)


"6·29선언에서 제일 궁금한 것은 노태우와 전두환이 야당에서 대통령이 된다고 예상했을 경우에도 과연 6·29선언을 발표했을까 하는 점이다." "노태우에게 직선제가 사지死地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약관화했다. 전두환과 노태우에게는 승리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노태우와 전두환은 특단의 다른 조치도 강구해봤겠지만 야당 후보가 반드시 두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노태우는 6월 24일 전두환과 직선제 문제를 논의했을 때 그 자리에서 〈직선제를 한다. 김대중 씨를 사면·복권한다〉는 두 가지만 합의를 보았다고 강조했다. 왜 이 두 가지만 합의를 보았을까. 김대중을 사형대에 보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공정한 정치 룰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렇게 합의했을 리는 만무했다.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면 바늘에 실 가듯이 반드시 김대중을 사면·복권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머릿 속에 철칙 중의 철칙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589-91)


제6장 6월 항쟁 탐구


"4월 혁명 후의 개헌처럼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이 합의하여 개헌안이 마련되었고,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29일 공포되었다. 6·29선언 이래 야당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각 출마하는 바람에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소선거구제가 17년 만에 부활되어 1988년 4월에는 총선이 치러졌다. 1987년 12월 대선은 지역주의가 투표 성향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극심한 지역주의는 1988년 4월 총선에서 더욱 거세게 표출되었다. 특히 총선은 특정 정당 정치인의 특정 지역 공천만 따내면 자동적으로 당선되는 것이어서, 선거 행위 자체를 원천적으로 무색케 했다." "지역 이기주의는 장기간에 걸쳐 권위주의 통치를 하는 동안 주입된 비인간적인 반공·냉전의식과 결합된 개인 이기주의가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 시민의식 또는 공공의식이 마멸된 것이 기본 바탕이었다."(675)


"1990년 2월 노태우·민정당이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자유민주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듦으로써 정치계는 상당 부분 과거로 회귀하여 6월 항쟁에 대한 반동의 바람이 불었다. 이로써 지역주의가 만들어낸 여소야대 국회는 해소되었고,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정당 당원과 십수 년간 그 정당과 싸웠떤 정당 당원이 한 정당 안에서 기묘하게 동거하게 되었다. 경제발전의 주역이면서 그것에서 소외되었고, 최소한의 기본 권리조차 통제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자들이 6월 항쟁 이후 어느 부문보다도 먼저 일어나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을 벌인 것은 6월 항쟁의 후속조치나 다름없는 자연스러운 진전이었다." "1987년 11월에는 여야 합의로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노조설립 요건은 완화되었지만, 제3자 개입 금지, 복수노조 금지, 노조 정치활동 금지 등은 그대로 남았다."(676-7)


"6월 항쟁은 통일운동 고양과 남북관계 개선의 길을 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수구냉전 세력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분단을 공고히 하고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권력과 기득권의 영속화를 기도했다." "그렇지만 4월 혁명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되었던 것과 흡사하게 6월 항쟁으로 통일운동은 활기를 띠었고 남북관계 또한 크게 변화되었다. 1988년 3월 서울대 학생회장 후보가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면서 촉발된 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호응을 받으면서 그해 여름 판문점으로 향하는 아스팔트길을 뜨겁게 달구었다. 1989년은 문익환 목사와 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방북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이 두 사건은 통일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고 남북 화해·교류의 길을 여는 데 기여했지만, 수구냉전 세력의 거센 반격에 직면해야 했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비판이 있었다."(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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