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 역사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어떻게 탄생했나
도널드 케이건 지음, 박재욱 옮김, 한정숙 감수 / 휴머니스트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서론


"〈아마도 내 설명에는 신기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재미가 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사는 똑같지 않더라도 비슷하게 전개되기 마련이므로 미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찾는 사람이 이 책을 유용하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이 책은 한 번 듣기에 좋은 경연용 글이 아니라 영원한 유산이 되도록 저술되었다.〉(1.22.4)" "이 문단은 투퀴디데스가 자기 역사책에서 사실을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왜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실이 반드시 정확해야만 투퀴디데스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즉, 그는 미래에 지혜로운 사람이 이 자료를 활용하여 특히 전쟁 같은 긴장된 상황에서 인간 행동의 일정한 정형들을 연구하고 교훈을 얻어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를 기대했다. 만약 그의 서술 내용에서 사실이 잘못되었다면 해석 역시 잘못된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정치적 지혜를 이끌어낼 수도 없게 된다."(34-5)


1장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


"(수정주의자 본능을 지녔던) 투퀴디데스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해 논변을 펼치지도 않고, 심지어 누군가의 견해를 반박할 때에도 자기 관점을 '대안적 설명'이라 이름 붙여 제시하지 않았다. 오직 신중한 조사와 숙고 끝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실과 거기에서 추출되는 결론만을 독자에게 제시했다. 투퀴디데스가 택한 방법은 크게 성공했다. 무려 2,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바라보는 데 있어 투퀴디데스와 다른 관점이 존재했음을 알아챈 독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책과 여러 고대 자료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투퀴디데스가 살던 시대에 그와 다른 견해가 존재했고, 그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러한 다른 견해에 반대하는 강력하고 성공적인 논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잊히고 가려진 동시대 견해를 복원해 투퀴디데스가 제시한 해석과 비교하면 투퀴디데스의 정신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의미를 흥미롭게 다시 조명할 수 있다."(42)


# 수정주의자 :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방식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중대하게 바꾸려는 저자


"그렇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기원전 431년 봄부터 기원전 404년 봄까지 벌어진 사건을 따로 떼어내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벌인 단일한 전쟁으로 정의한 사람은 투퀴디데스가 처음이다." 그 기간에 벌어진 몇몇 분쟁을 독립적인 전쟁으로 다룬 당대 혹은 직후의 저술가들과 달리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합된 하나의 긴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변을 펼쳤다. 〈사건이 발생한 순서대로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서 스파르타인과 동맹국들이 아테나이 제국을 끝장내고 장벽과 페이라이에우스 항을 점거하던 때까지 이야기이다. 전쟁은 27년간 이어졌다. 누군가 조약으로 전투가 중단된 시기는 전쟁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틀렸다. 10년 전쟁과 그에 뒤이은 의심스러운 휴전 기간, 이후에 벌어진 전쟁을 여름과 겨울 단위로 합산하면 전쟁은 이미 내가 말한 기간(27년)과 똑같은 햇수만큼 지속되었고, 단지 며칠만 차이가 난다.〉(5.26.1-3)"(54-6)


2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 케르퀴라 위기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타인이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동맹국들이 제기한 논변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아테나이가 보유한 힘이 날로 커지고 헬라스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1.88)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상 투퀴디데스가 자신이 내린 상황 판단을 마치 스파르타인의 판단처럼 제시한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당시 아테나이가 얼마나 강력해졌으며 스파르타인이 이에 대해 얼마나 경계심을 품었는지를 보여주는 보충 설명을 길게 덧붙여 자기주장을 뒷받침한다.(1.89-118) 이로써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원을 에피담노스 문제보다 훨씬 이전에서 찾아야 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울러 투퀴디데스는 이 보충 설명의 끝 부분에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결정한 행위는 페르시아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지속적인 과정에서 단지 마지막 단계였을 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66-7)


"스파르타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이 성장하여 성공과 부, 권력을 차지하고 서서히 아테나이 제국으로 탈바꿈한 페르시아 전쟁 직후의 시기부터 경쟁을 시작했다. 스파르타에는 처음부터 아테나이가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수상쩍게 여기고 못마땅해 하는 분파가 존재했다. 그들은 페르시아군이 도주한 뒤 아테나이가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아테나이인이 이러한 반대 의견을 확연한 태도로 거부하자 이들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히 이를 갈았다.〉(1.92.1) 기원전 475년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게루시아(스파르타 원로원)'에서는 아테나이와 전쟁을 벌여 새로 결성된 동맹을 분쇄하고 해상을 제패하자는 제안이 등장했다. 스파르타인은 얼마간 논쟁을 벌인 끝에 이 안을 거부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반反아테나이파가 늘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8-9)


"대개 아테나이 민회에서는 거의 모든 논쟁이 하루 안에 끝났다. 그러나 케르퀴라 동맹 문제는 하루를 더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궁극적으로 거대한 전쟁을 초래할 정책을 결정했는데, 아테나이는 케르퀴라와 방어동맹만 맺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조약은 헬라스 역사에서 이때 처음 등장했다. 투퀴디데스는 케르퀴라와 코린토스 사절의 연설을 서술할 때에는 그들의 말 자체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표현하도록 그대로 전달했다. 그런데 아테나이인의 연설은 하나도 전하지 않았다. 다만 아테나이인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라고 '자신이 믿는 바'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최종 결정을 이끌어낸 동의안을 누가 제안했고 또 누가 옹호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플루타르코스에 의존해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코린토스와 싸우고 있는 케르퀴라를 돕게 하고 해군력을 갖춘 활기찬 나라와 연합하게 만든 이는〉 바로 페리클레스였다."(87)


# 케르퀴라 동맹 문제 : 케르퀴라가 코린토스와의 분쟁에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테나이에게 동맹을 요청한 사안. 아테나이가 중립을 취한 결과로 코린토스가 케르퀴라 함대를 장악하게 되면 아테나이의 제해권이 위협받고, 이를 막기 위해 케르퀴라와 동맹을 맺으면 코린토스는 물론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둘째 날 회의에서 다수가 방어동맹을 지지하도록 설득한 데에는 분명히 페리클레스의 연설 필요했다. 여기에서 투퀴디데스는 문제에 부딪혔다. 페리클레스는 분명 특유의 방식으로 인상적인 연설을 했을 테고 늘 그렇듯이 회의를 주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설득하여 케르퀴라인을 돕게 만든〉 이가 바로 페리클레스이며, 앞으로 엄청난 고난을 안기고 참혹하게 종결된 전쟁이 바로 그가 추진한 정책 때문에 벌어졌다는 인상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당대의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초래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투퀴디데스는 바로 이 견해를 반박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 아테나이인의 결정을 특정 개인과 무관하게 취급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민회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모든 아테나이인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인 것처럼, 그리고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89)


3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2 ─ 케르퀴라 위기에서 메가라 봉쇄령까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 제국에 속한 모든 항구와 아테나이의 시장 겸 중심지인 아고라에 메가라인이 출입하지 못하게 막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쟁보다 낮은 강제 수단인 경제 봉쇄는 현대 세계에서는 외교적 무기로 자주 활용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전시가 아닌 평시에 봉쇄 조치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 또한 분명 페리클레스가 고안한 혁신적인 조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후 벌어진 전쟁이 이 봉쇄령 때문이었고 또 페리클레스가 이 봉쇄령을 동원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메가라 봉쇄령은 코린토스와 동맹을 맺은 폴리스들로 전쟁이 확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외교적인 압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이해해야 한다.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인을, 그리고 누구보다도 스파르타를 싸움에 끌어들여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인은 메가라를 징벌하여 다른 폴리스가 추가로 코린토스를 돕지 못하게 억제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99-100)


"마침내 기원전 432년 7월 에포로스들은 스파르타 민회를 소집하고 동맹국 중 아테나이에 불만을 가진 폴리스는 모두 스파르타로 오도록 초청했다." "(전쟁을 선동하는 코린토스인의 연설) 다음 발언자는 아테나이 사절 중 한 사람이었다. 투퀴디데스는 그가 〈다른 일 때문에 스파르타에 왔다가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1.72.1)고 말한다. 그 '다른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이는 아테나이인에게도 해명할 기회를 주려고 만든 핑곗거리였음이 분명하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 입장에서는 스파르타 동맹국들의 불만 사항에 대해 해명은 해야겠지만 스파르타 민회에 공식 대변인을 보내지는 않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공식적인 사절을 보낸다면, 평화조약에 따라 불화를 중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가 아테나이의 행위를 심판할 권리를 가졌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런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 민회의 논의에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102-3)


"스파르타가 메가라 봉쇄 사안을 (30년 평화조약에 명시한 대로) 중재에 회부했다면 페리클레스는 중재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또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가 대표를 파견해 기원전 432년 스파르타 민회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스파르타가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 건으로 아테나이 제국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또 메가라 봉쇄령처럼 아테나이가 추진하는 상업 정책과 제국 정책에 개입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서 양보를 한다면 에게 해에서 아테나이가 장악한 헤게모니와 아테나이 제국에 대한 지배권이 스파르타의 용인 여부에 달려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었다. 아테나이가 지금 협박이 무서워 뒤로 물러선다면 이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동등하다고 주장해온 입장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이며, 또 장차 더 많은 협박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민회 연설에서 외부 압력 때문에 유화책을 써서는 안 된다고 자세히 설명했다."(112)


4장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아테나이인이 수비에 치중하고 함대를 보존하며 전시에 제국을 확대하려 시도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2.65.7)" "(투퀴디데스도 이에 동의했지만) 동시대 아테나이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 첫해에 앗티케를 침공한 스파르타군이 아테나이 서북부 모퉁이만 휩쓸었다면 사람들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페리클레스가 내린 명령에 따라 기꺼이 성벽 뒤에 머물며 교전을 회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군이 도시에서 고작 60스타디온 떨어진 아카르나이 인근에 이르자 더 이상 참아서는 안 될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자기 땅이 약탈당하는 모습은 끔찍한 일이었다.〉(2.21.2)" "페리클레스가 추진하던 정책을 향해 매우 거센 분노와 비판이 쏟아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민회가 자신이 수립한 전략을 거부하고 지상전을 강행하지 않을까 두려웠다."(119-21)


# 페리클레스 전략의 실패 요인

1.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스파르타에서도 평화파가 득세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쟁 피해를 겪은 양측의 감정은 격해지고 전쟁을 지속하려는 결심이 한층 굳어져갔다.

2. 기원전 430~427년에 역병이 발생하여 도시 거주민의 3분이 1이 사망하면서 페리클레스의 권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심지어 펠로폰네소스에는 역병이 번지지 않았다.)

3.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가 축적한 전비(동맹에서 걷는 수익까지 포함한)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전쟁 개시 후 3~4년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반대파들의 비난과 소송에 맞서 기원전 430년에 행해진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자기 정책의 결과로 빚어진 현재의 끔찍한 상황을 이해해달라거나 용서해달라고 호소하기는커녕 대담하게도 자신이 폴리스의 효율적인 지도자가 될 가장 탁월한 자질을 갖췄다고 주장한다. '아프라그모네스(고요함을 사랑하는 자들)'는 불행과 공포로 인해 바보, 겁쟁이에 자기밖에 모르는 자가 되어버렸다. 이에 비해 전쟁을 지속하기를 지지하고 '아프라그모네스'를 반대하는 논변을 펼치는 이는 용감하고 연륜을 쌓았으며, 현명하고 거기에 더해 진정한 지도자로서 탁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적어도 페리클레스 본인은 이 강력한 연설에서 스스로를 이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고, 투퀴디데스도 페리클레스를 그렇게 그렇게 묘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오직 페리클레스만이 발언을 허락받았고, 그의 강력한 언어는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철저한 옹호 덕분에 더욱 증폭되었다."(147-9)


5장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투퀴디데스가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이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2.65.10)고 말한 것은 자기 기준에서 볼 때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가 민주정이라 부르기에 부족했다는 뜻이다."(153-4) "그러나 (많은 희곡작가와 정적들이) 페리클레스와 내연녀를 인신공격하고 정치를 빈정대며 풍자하는 일은 사실상의 군주제나 독재정에서는 생각도 하기 힘들다. 어떤 이들은 페리클레스의 권력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프린키파투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전혀 적절하지 않다. 로마의 초대 황제가 제아무리 군주정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프린켑스라는 호칭 뒤에 숨기려 했어도,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행해진 것과 같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공공연한 악담과 공격을 받았다면 아무 처벌도 하지 않고 넘겼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페리클레스에 대한 비방과 풍자는 놀라우리만치 자유로운 민주정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어떤 다른 곳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160)


"오늘날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나이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달리 고대의 비평가들은 이 체제가 '실제로' 민주정이라는 점을 확신했고, 바로 민주정이기 때문에 본성상 나쁘다고 믿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말의 타락한 민주정을 기원전 5세기 중반 위대한 아테나이를 이룩한 민주정과 같은 반열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투퀴디데스는 정치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희귀할 정도로 탁월한 지혜가 필요하며, 그러한 지혜를 가진 자는 소수라고 확신했다. 그런 정치적인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재능 있는 희귀한 개인의 의견보다 우위에 두는 민주정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 재능 없는 시민들이 정치 천재에게 지도권을 내어준 다음에야 나라가 성공할 길이 열렸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172-4)


6장 클레온은 운이 좋아 승리했는가


"투퀴디데스는 자기 역사책에서 기원전 427년에야 처음 클레온을 소개한다. 그리고 클레온이 〈시민 중 가장 난폭했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3.36.6)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대부분 니키아스와 클레온이 서로 매우 다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니키아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을 따르는 자로서 평화를 옹호했고, 신중하고 고결한 인품을 가진 신사였다고 한다. 반면 클레온은 페리클레스를 반대하는 자였고, 전쟁을 옹호했고, 선동정치가였으며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보통 묘사되듯이 그렇게 다른 인물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모두 귀족 가문이 아니라 '신인' 계층 출신이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둘 다 자기 가문에서 무엇으로라도 크게 이름을 떨친 첫 인물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마 둘 다 부자였겠지만 폴리스에서 유난히 특출한 사람은 아니었다."(177-9)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이루어낸 놀라운 승리는 비할 데 없이 중요했다. 〈헬라스인이 보기에 이 일은 전쟁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스파르타군을 항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40.1)" "아테나이인은 투퀴디데스와 그가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부른 이들과 의견이 달랐다. 아테나이인에게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은 기적에 가까운 일을 이룩한 위대한 영웅이었다. 아테나이인은 당시 최고의 영웅이었던 클레온에게 감사를 표했다." "클레온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테나이 재정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수준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클레온은 당당하게 포로를 압송한 지 두 달가량 지난 뒤인 8월 둘째 주 정도에 튀딥포스라는 자를 파견해 아테나이 동맹국에게 새롭고 더 높은 금액의 조공을 부과한다는 명령을 전달하고 이를 실행할 준비를 갖추었다."(206-8)


# 클레온의 승리(기원전 425년) :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니키아스파와 맞서던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스팍테리아 섬에 있는 스파르타 중장보병들을 공격하여, 그 중 스파르타 완전시민(120여 명)을 생포한 승리. 이 패배로 함대를 억류당하고 포로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스파르타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졌다.


"투퀴디데스가 튀딥포스 법령을 언급했다면 클레온의 공격적 제국주의와 아테나이 속국들에 대한 그의 가혹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할 수 있겠지만, 이는 동시에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에서 벗어난 작전으로 거둔 승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결과가 된다. 이 승리로 아테나이는 제국의 수입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었고, 장기전을 치를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는 페리클레스 전략의 최대 약점을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튀딥포스를 언급한다면 페리클레스 전략의 단점이 강조되고,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을 충실히 따랐더라면 분명히 승리했을 것이라는 투퀴디데스의 칭송은 벽에 부딪힌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페리클레스가 실수했으며, 클레온이 무분별하고 운만 좋은 미친 남자가 아니라 대담하고 명민한 지도자였다고 결론짓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210)


7장 암피폴리스의 투퀴디데스와 클레온


"우리에게는 투퀴디데스가 암피폴리스에서 한 행동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보다 투퀴디데스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투퀴디데스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먹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려 했다면, 자기 변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약한 부분인 운명의 날에 왜 에이온에 있지 않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이 일에 대해서 분명 투퀴디데스는 제대로 변명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투퀴디데스는 (자신과 반대측의 변론을 언급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겉으로는 자신을 변호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가장 냉정한 태도로 객관적인 이야기만 전했다. 그리고 핵심 질문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로써 이천 년이 넘도록 독자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는 잘못이 없고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분노하고 이성을 잃은 탓에 투퀴디데스가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결론을 내렸다."(224)


# 암피폴리스 함락(기원전 424년) : 투퀴디데스는 스팍테리아 사건 이듬해에 장군으로 선출되어 제국의 트라케 지역(핵심 근거지가 암피폴리스) 방어 임무를 맡았는데,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가 이 도시를 기습 공격해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투퀴디데스는 반역죄를 선고받고 남은 전쟁 기간 동안 국외로 추방되었다.


"아테나이인은 암피폴리스를 비롯해 빼앗긴 여러 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전함 30척에 중장보병 1,200명, 기병 300기, 렘노스와 임브로스 출신의 뛰어난 대규모 경보병 특수 부대를 보냈다. 클레온이 장군으로 이 군대를 이끌었다." "투퀴디데스는 이번 작전의 동료 장군을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전쟁을 통틀어 트라케 지역에서 벌어진 작전을 모두 검토해도 장군 한 사람이 혼자서 군대를 이끈 경우는 없었다." "아테나이인이 예외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오직 장군 한 명에게, 그것도 다수의 동료 시민에게 경험이 부족하다고 의심받는 장군에게 맡겼을 리는 없다.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동행한 장군 혹은 장군들을 언급하지 않은 일 역시 결코 우연한 누락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작전은 재앙으로 끝났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이 실패한 작전의 책임은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관계자가 모두 뒤집어썼다. 이것은 의도치 않은 일일 리가 없다."(228-9)


# 브라시다스의 기습 : 암피폴리스 포위 작전에 앞서 정찰을 마치고 트라케 문을 지나 철수하던 아테나이 군이 브라시다스의 기습을 받아 600명 가량 전사(스파르타군은 7명 전사)한 사건. 클레온과 브라시다스도 함께 전사했다.


"클레온은 브라시다스와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정책이 자기 폴리스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하고 추구했다. 물론 클레온의 저급한 태도가 아테나이 정치 생활의 품격을 낮추기는 했다. 반란을 일으킨 동맹국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했는데, 이를 잘했다고 칭찬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클레온이 아테나이 대외 정책을 형성하고 수행하면서 광범위한 여론을 대변했고 늘 열정과 용기로써 자기 생각을 행동에 옮긴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동시대인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만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죽음으로써 평화로 나아갈 길이 열렸다고 한 말은 옳았다. 당분간 아테나이에는 니키아스가 강력하게 이끄는 평화 정책에 반대할 만한 위상을 갖춘 인물이 없었다. 이 평화는 거짓으로 드러나고 아테나이인에게 재앙과 최종적인 패배를 안겨주겠지만 이는 클레온과 아무 상관 없는 결과였다."(241-2)


8장 시켈리아 원정은 어떻게 결정되었나


"투퀴디데스가 시켈리아 원정을 설명하는 내내 그려낸 모습에 따르면 이 작전은 시켈리아 섬 전체를 정복하고 착취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아테나이 군중은 이 작전이 얼마나 거대한 모험이며 얼마나 어려울지, 또 얼마나 위험할지도 알지 못한 채 권력과 탐욕에 찌들어 이 일의 실행을 요구했다. 투퀴디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는 이 섬이 얼마나 큰지도 몰랐고 헬라스인과 비헬라스인을 포함해서 섬 주민이 얼마나 많은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펠로폰네소스인과 벌이는 전쟁에 비해 결코 작지 않은 대규모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6.1.1)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로 1차 벙력을 보내기로 결정한 일을 설명한 뒤 니키아스의 입을 통해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은 시시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핑계를 댔지만 실은 시켈리아를 정복할 의도였고 이는 거대한 사업〉(6.8.4)이었다."(252)


# 시켈리아 원정 : 시켈리아 서부에 있던 에게스타와 셀리누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고, 열세에 몰린 에게스타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한다. 주전파(알키비아데스)와 평화파(니키아스)가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아테나이는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지만, 적절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원정에 임했다가 결국 코린토스와 스파르타의 원조를 받은 쉬라쿠사이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의 지리와 인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큰 사업인지도 알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시켈리아를 향한 대규모 원정이 시작되기 적어도 9년 전인 기원전 424년에 아테나이 삼단노선 60척이 시켈리아에서 장기 주둔을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투퀴디데스는 에게스타와 레온티노이의 요청에 아테나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서술했는데 이 내용 역시 아테나이인이 무지했거나 무모했다는 주장에 타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민회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않고 대신 에게스타로 사절단을 보내 〈에게스타인이 말한 대로 국과 신전에 돈이 넉넉한지 살피고 동시에 셀리누스인과 벌이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조사하도록〉(6.6.3) 결정했다." "에게스타인은 아테나이에 은괴를 60탈란톤─전함 60척을 한 달 동안 부양할 수 있는─이나 제공해 더욱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253-4)


"투퀴디데스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아테나이인은 '엘피스(희망)'에 가득 차서 출발했다. 이 대목에서 투퀴디데스를 읽는 독자는 아테나이인이 1년 전에 불운한 멜로스인에게 경멸조로 했던 말을 틀림없이 떠올리게 된다. 이 이야기는 시켈리아 원정 직전에 서술되었다. 〈그래요. 희망은 험악한 시절에 위안을 줍니다. ····· 그러나 희망의 대가는 엄청나게 비싸기에, 단 한 번의 시도에 전부를 거는 이들은 그 시도가 실패했을 때에야 대가를 알게 됩니다.〉(5.103) 아테나이인의 냉정한 논평은 사실로 증명되었고, 스파르타가 도우리라는 희망에 운명을 걸었던 멜로스인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독자는 아테나이의 위대한 무적함대가 맞이할 끔찍한 운명을 이미 알기에 여기에 담긴 반어법을 놓칠 리 없다. 투퀴디데스는 이 모두를 통해 이번 원정대는 무지하고 탐욕스런 군중이 결정하고 응원한 행사이며,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되는 일이었다고 암시한다."(279)


9장 시켈리아의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니키아스는 전략가로서 원정 실패의 핵심 원인이 된 실수를 저질렀다. 쉬라쿠사이를 점령하려면 기병이 꼭 필요했다. 아테나이군이 처음부터 기병을 보유했다면 쉬라쿠사이는 항복할 도리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어떤 도움을 얻더라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니키아스 본인이 원정대 출발 전에 기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테나이군이 기병 부대를 원정대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은 특히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착오는 판단을 잘못 내린 탓이 아니라 목적을 잘못 설정한 탓이었을 것이다. 니키아스는 시켈리아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억지로 이 작전에 참가한 뒤에도 최소한의 행동만 하고 제대로 된 교전은 피하려 했다. 니키아스는 아마 쉬라쿠사이를 직접 공격하는 심각한 상황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으리라. 그러다가 그는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작전에 필요한 병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89-90)


"(전황이 점차 불리해졌고, 본인도 본래 후퇴하는 편을 선호했지만) 니키아스는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심하면 더 좋지 않은 결과도 맞이해야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내내 아테나이인은 기대를 저버린 장군들에게 가차없는 모습을 보였다. 위대한 페리클레스조차 정책과 전략의 결과물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하자 모욕당하고 처벌받았다. 니키아스는 분명히 귀환하자마자 심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니키아스는 자신의 명성과 안위를 염려해 (부정직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아테나이인에게 자기 뜻대로 철수하거나 아니면 1차와 같은 규모로 추가 원정대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니키아스는 애초에 아테나이인이 원정에 나서지 못하게 막으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실패한 경험에서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한 듯하다. 아테나이인은 이번에도 니키아스의 바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가 함대와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니키아스를 해임하지도 않았다."(304-7)


"역사가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러한 조치들이 아테나이 직접 민주정의 탐욕과 무지,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아테나이인은 아테나이 민주정을 비난하는 주된 이유인 변덕과 우유부단함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좌절과 실망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시작한 일을 끝마치려는 일관성과 결단력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이 저지른 실수는 사실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약하고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강력한 나라라면 다들 겪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당한 강대국은 대개 그대로 군사를 되돌리면 위신에 타격을 입는다고 생각한다. 철군 자체도 불미스럽지만 주변 국가들이 이 나라의 국력과 결단력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안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모험을 할 때에는 대개 승리할 전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307-8)


"투퀴디데스가 니키아스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를 덧붙이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니키아스의 동시대인들과 같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은 니키아스가 정치가로서 또 장군으로서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투퀴디데스는 니키아스의 무능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투퀴디데스가 보기에 니키아스의 무능만으로는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며, 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도 아니었다. 투퀴디데스는 재앙이 벌어진 주된 이유는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현명하고 절제력을 지닌 강력하고 총명한 지도자에게 견제를 받지 않았고, 생각 없고 야심 가득한 선동정치가에게 현혹되었으며, 그리하여 스스로를 무지와 탐욕과 미신과 공포에 내맡겼기 때문이라는 점을 독자가 이해하기 바랐다."(325)


결론


"우리가 본 대로 투퀴디데스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서술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매우 다양한 장치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이 속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고, 진실을 강조하고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해 자료를 선택했다." "투퀴디데스가 특이한 곳에 강조점을 둔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해석을 위해서였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반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증거를 거의 대부분 투퀴디데스 본인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투퀴디데스 스스로 투퀴디데스식 해석의 목적을 알려주고 있다. 투퀴디데스가 목적한 바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진실이 꼭 우리의 진실일 필요는 없다.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을 유익하게 사용하려면 그가 제시하는 증거와 그가 덧입힌 해석을 구분해야만 한다. 오직 그 후에야 투퀴디데스가 바란 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으로 사용할 수 있다."(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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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철학을 번역하다 : 플라톤의 파이돈
남경희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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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자연언어는 신이 창조하여 인간에게 선사한 것도,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정신에 심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사는 특정 공동체 구성원들이 아마도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모두가 참여하여 이루어낸 가장 포괄적이고 기반적인 문화 활동의 성과다. 언어 형성을 위한 정신적 활동은 너무나 기초적이고 편재적이기에, 마치 물고기가 수압에 대해, 우리 신체가 기압에 대해 그러하듯이, 우리는 그것의 영향력을 간과한다. 자연언어는 인간의 정신이 숨 쉬는 공간이기에, 나름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 자연언어는 그 자체가 특수적이고 개별적인 문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적인 좌표대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를 사용하는 언어 주체들의 사고방식, 세계관, 인간관, 사회관, 관점 등이 내장되어,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차적 문화 활동 전체의 기본 틀이나 범주로 기능하며 정신 전체의 분위기나 기상도, 사유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12-3)


1부 고전 번역론: 철학의 매체에 대한 철학적 반성


1장 언어와 사유의 관계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권의 어휘들이 그 청각적 또는 시각적 모습은 달라도 의미는 동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령 '어머니', 'mother', 'meter'는 각각 한국어, 영어, 그리스어 어휘로서 외적(기표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의미 내용은 '한 가족의 2세를 낳거나 양자로 삼아 양육하는 여인'으로 서로 같다. 즉 기표는 물리적 존재이니만큼 발성 구조나 시공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나, 그 배면의 의미는 정신적 내용이기에 그런 차이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과연 '어머니'와 'mother', '사랑'과 'love'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와 'meter'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정서나 태도는 시간과 거리의 차이만큼 다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효도'라는 덕목이 중요하지 않았으며, 고대 그리스의 'meter'가 한국의 '어머니'처럼 자식에게 희생적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23)


# 의미동일론 비판


"동서고금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를 도구로 사용하는 주체인 정신이나 사고의 구조, 논리, 방식 등은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이 통념이다. 사유의 내용은 물론 다를 수 있지만 인간 정신의 사유 틀, 사유법, 사유의 구조는 지역과 시대라는 시공적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종이 자연 진화의 결과라 한다면, 인간 정신도 자연적·문화적 진화의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일관된 입장이다. 정신이 등장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요인은 신경생리학적 기반에 더하여 다른 인간과의 사회적 관계이며, 사회적 관계에서 핵심은 언어이다. 인간의 정신은 다른 인간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자라나는 것인데, 그 사회적 관계의 기초이자 가능 근거는 언어일 것이다. 인간이 유아 시절부터 무인도에서 자라난다고 한다면, 그는 정신적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추정이다."(25-6)


# 사유선재론 또는 언어도구론 비판


"의미동일론은 더 근본적이고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념에 기대고 있다. 그것은 우리 밖 세계의 모습이 고정적이고 동일하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 밖 외계 내의 대상이나 사태가 일정하며 객관적인 그 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그것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는다."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문장의 경우에도 비슷한 입장을 견지한다." "이 경우 역시 어떤 언어(기표)를 사용하느냐는 우리의 내면 감정이나 정서의 풍경화가 지니는 모습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배우지 않은 유아들도 다양한 감정이나 정서 등의 심적 상태를 품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문제는 유아들의 심적 상태와 그들이 배우게 될 다양한 심적 술어들의 의미 혹은 공적 사용 기준 간의 관계를 해명하기가 쉽지 않다. 양자는 사실상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전자는 주관적인 것이고, 후자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28-30)


"감정과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의 존재 순서는 뒤바뀌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감정 상태가 생기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감정 어휘들이 고안되는 것이기보다는, 감정 어휘들을 배우면서 감정 상태가 형성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감정 어휘들을 기존의 언어공동체로부터 학습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달리 이들 어휘를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감정 어휘의 학습은 어떤 객관적·공적 사용 기준을 매개로 하거나, 또는 그 어휘의 사용례들을 접하고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로 아동이 자신의 내면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감정 어휘를 사용하는 경우, 그 술어의 의미나 사용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의 내면 상태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그 술어의 공적 사용 기준이나 사용례들에 대한 기억이다. 타인이 아동의 심적 문장을 이해하는 준거 역시 그 공적인 것이다."(30)


# 세계동일론 비판


2장 플라톤 시대의 담론 문화: 준구술 시대


"에릭 해블록은 호메로스 시대에서 300~400년 지나 등장한 자연철학자들도 구술 시대의 사상가라고 자리매김한다. 소크라테스 역시 저술 없이 대화나 토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구술 시대의 현자로 평가할 수 있다. 철학함에서 그가 의지했던 언어 매체는 구어, 대면적 구어였다. 몇몇 소피스트는 직접 저술을 했으나, 그런 저술 활동은 주로 자신을 시인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들의 주된 활동은 대면적 담론이었으며, 그들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아고라agora에서의 연설과 토론, 혹은 법정에서의 변론 기술이었다. (플라톤 시대 역시 저술의 출판과 대중의 독서가 일반화될 수 있는 물리적·문화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가 구술 시대인가 문자 시대인가의 물음은 그의 저술 의도만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철학함의 모습, 그의 저서에 담긴 철학적 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도 필수적이다."(43)


"고대 그리스가 공적인 공간에서도 글보다 말을 더 중시했던 구조적 이유는 고대 그리스가 대면적 사회라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규모가 큰 곳이 20여만 명, 그중 정식 시민은 4~5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소규모 공동체였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면 서로를 익숙하게 알 수 있는 좁은 사회였다. 이러한 대면사회에서는 구태여 규범, 관습, 권리 관계를 위탁할 문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문서란 말하자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타자 또는 제3자이며, 스스로는 증언할 수 없는 물리적 존재라는 점이다. 말보다 문서에 의존하면 문자의 비대면성, 간접성, 사물성, 비활성성 등 때문에 불안감이 더 커질 수 있다. 이에 비해 대면적이고 구술적인 관계는 사람을 직접 대하고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확실성, 직접성, 인격성, 행위성 등의 특색이 있다 글과 달리 말은 인격의 일부이자 행위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46)


"'개인의 신원' 또는 '자아 정체성'을 의미하는 영어 어휘 'personal identity'에서 'identity'는 개인의 고유하며 개성적인 자아라기보다는 원래 '소속', '타자와 함께하는 것', '타자와 공유하는 동질적인 성질'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 개인에게 신원을 물으면 그가 소속한 집단을 말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내면적 개인, 정신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개념은 플라톤 시대에는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공동체적인 시기에 홀로 행하는 독서와 사색은 특이하고 예외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현자들은 지혜를 전하고 자연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며 저술했으나, 그것은 이들이 사유 주체로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루는 것이라기보다는 학예의 여신 뮤즈Muse의 도움으로, 혹은 신들의 신탁을 통해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시인들은 뮤즈를 호출하여 영감을 요청하고, 파르메니데스 등의 자연철학자들은 뮤즈의 인도를 받아 진리의 길을 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53-4)


"철학자나 현자들이 자신의 사상을 타인들에게 가르치는 데 있어서 도서라는 매체에 의탁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제작할 수 있는 필사본이 소량이고 글 읽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그 범위가 제한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선의 방법은 대면을 하고서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를, 또는 수사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대화록 저술 목적 역시 구술적 가르침을 재현함으로써 후대의 시민들을 이런 대면적·상호적 철학함으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인간 정신의 성장과 발전은 서재나 연구실에서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대화·토론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이고 정치철학적인 과정이다. 플라톤의 저술은 독자가 홀로 독서하면서 동료 시민들을 떠나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사색의 여정을 떠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기 위한 자료로서 저술된 것이다. 그것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위의 아고라였던 것이다."(62-3)


"구술적 철학함은 역설적이다. 구술적 철학함은 역동적이고 가변적이며 관계적이지만, 철학자들은 이런 역동적이고 상호적인 말하기를 통해 정태적이고 불변적이며 자체적인 실재를 찾아간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철학의 목표를 불변하는 실재나 진리를 지적으로 정관하는 상태(프로네시스phronesis)라고 논한다." "이런 역설이 어떻게 가능한가? 대화와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상호 공유하는 지평이나 좌표대를 구축한다. 자연스레 구축·형성된 공동의 좌표대는 일종의 문서적 세계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철학적 대화와 토론이 진행됨에 따라 참여자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내용들만이 그 좌표대에 등록되고 저장·축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객관화·합리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말은 점차 구체적이고 특수한 삶의 현장에서 비상하여 플라톤이 말하는 자체적인 존재자들이 세계에 이르게 된다."(84-5)


"플라톤의 대면적 철학함의 모델은 구술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가 생각하는 구술적 활동의 성격이나 내용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전에는 전승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암송하고 이를 자기화하여 자신의 행동과 삶을 위한 지침으로 삼는 것이었다. 플라톤 이전에 말이란 단지 지혜의 전승·전달을 위한 매체이거나 소통의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말(소통 수단으로서의 로고스)은 아직 진리 발견의 방법(이성으로서의 로고스)으로서의 지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시민들이 진리와 실재를 탐구함에서 실질적인 사유 주체로 격상될 수 있었던 것은 말하기가 진리 발견의 방법의 지위에 오르면서이다. 진리 발견을 위해서는 특별한 예외적 능력이나 과정이, 가령, 신탁, 계시, 신들림, 영매 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말하기에 의존하되, 말의 정신과 논리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96-7)


"플라톤이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타무스의 입을 통해 문자를 비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문자는 사람들의 정신에 망각을 주입한다. ②지식의 보관을 문자에 의존하기에 그들 정신의 암기력을 소홀히 하게 된다. ③문자는 정신에 외적인 것이며, 타자에 속하는 매체이다. ④문자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내부로부터 암기하려 하지 않는다. ⑤문자는 기억하기가 아니라 생각나게 하기를 위한 간접 도구에 불과하다. ⑥문자나 문헌을 통해서는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지혜로 보이는 바만을 획득할 수 있다. ⑦문헌의 독서로는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 ⑧많은 것을 읽기만 해서는 단지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이기만 할 것이다. ⑨다루기 힘든 사람들이 되어 학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구술 시대에 말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글은 독자가 읽기까지는, 그리고 글의 의미를 새기고 수용하기까지는 가수假睡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106-7)


"플라톤은 진리 발견의 능력을 감싸고 있던 신성성의 안개를 흩날려버리고 세속화했다. 그것은 일상의 감각 경험과는 다른 능력이기는 하되,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선험적인 기억력이다. 이런 세속화와 함께 그 특별한 능력이 대상으로 하는 바 역시 다른 위상을 부여받게 된다. 인간은 선험적 기억력을 통해서 일상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접하기는 하되, 그것은 영웅과 신들의 세계가 아니라 보편자·추상체의 세계, 개념들의 세계이다. 이제 '신적이고', '초월적이며', 비경험적인 기억력은 시인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 모두가 지닐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시인과 같이 선택되거나 점지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보통 시민들도 스스로의 사유 활동에 의해 뮤즈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단 이런 초자연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기억력을 향유하고 배양하려면 정신의 정화, 신체적인 것을 정신에서 씻어내는 정화 과정, 즉 철학함의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25)


3장 그리스의 담론 매체와 이성의 발견


"전쟁에서 적과의 투쟁은 물론, 동일 진영 내에서도 전략 토론과 전리품 분배를 둘러싼 치열한 다툼, 올림픽 경기에서의 승부 경쟁, 아고라에서의 정치적 논쟁, 법정에서의 논고와 변론, 나아가 소피스트들과 철학자들의 이론적 토론 등의 다양한 경쟁적이고 논쟁적인 관계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심지어 인간의 정신적 활동도 정신 또는 영혼을 구성하는 이질적 요소들 간의 주도권 경쟁이라고 설명했다. 지성과 기개와 욕망, 검은 말과 흰 말과 이들을 통어하는 기사, 지성과 감정, 억견(doxa)과 인식 등 간의 경쟁과 갈등이 인간 정신 내면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담론 문화도 경쟁적이기에 변증술, 이중 논변, 반론술, 논박법, 쟁론술 등 다양한 논쟁 방식이 생겨났다. 경쟁적 관계란 말의 권리나 말의 평등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며, 이런 믿음은 전시에나 평화 시에나 그들 도시적 삶에서 주축의 원리이자 가치로 기능했다. 132)


"우리의 생각이나 발언들이 논리적·이성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 특히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논변에서 이미 확립된 것이다. 이들은 존재의 단일성, 존재와 사유의 일치, 운동과 다수의 불가능성을 논하는 다양한 역설을 개진했는데, 그 정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들은 존재 개념에 대한 논리적 분석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이들 논변의 논리적 지렛대는 논리학의 제1원리라 할 동일률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순을 찾아 논파하는 철학적 방법론인 논박법을 진리 검증의 핵심적 방법으로 제안한다. 이는 논리학의 제2원리인 모순 배제율의 원형을 이룬다. 플라톤은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철학적 사유의 중심 원리는 논리나 이성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를 관찰하기보다는 로고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진상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136)


"우리는 상호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조건, 진리를 위한 조건, 이들 조건을 충족시키는 제반 사항들을 모두 합하여 이성이나 합리성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언어적 소통은 이성을 전제하며, 이성을 형성해간다. 언어는 이성의 현현이며, 이성은 말의 본질이다. 이성이나 합리성이란 다름 아닌 이해와 진리를 위한 조건, 그러므로 말이 곧 말이 되기 위한, 말다운 말의 조건이다. 그리스적 언어관은 말에 대한 인식적 관점을 취한다 할 수 있는데, 말에 대한 다른 관점과 비교할 때 그 고유성이 드러날 수 있다. 유가의 언어 이론은 정명론正名論에 요약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언어란 규범이다. 동아시아에서 언어란 사실을 기술하기보다는 행위를 처방하고 규제하는 규범의 역할을 한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행동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동아시아적 사유에서 사물에 로고스를 준다는 생각은 낯설 뿐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생각이다."(140-1)


"플라톤 대화 모델의 사고관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문자 문화의 영향이라 추정할 수 있다. 플라톤은 저술을 하고, 문자의 특색에 주목하고 반성하면서 사유를 점차 정신이 독립적으로 홀로 수행하는 특유의 활동이라고 보았으며, 경험계와는 다른 고유의 대상에 관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새로운 사고관의 특징을 지적해보자. 첫째, 사고 활동이란 정신이나 영혼이 신체와 독립적으로, 그리고 홀로 수행할 수 있는 고유의 활동이다. 둘째, 감각 대상을 다루거나 기표 또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 자체적이고 보편적이며 개념적인 존재를 인식과 논구의 대상으로 한다. 셋째, 이들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 이들에 대해 새로운 종류의 활동, 가령 비교, 평가, 공통점 추출, 추론, 연역, 일반화 등의 활동을 수행한다. 그리고 넷째, 이들을 경험계의 대상들, 또는 이들에 대한 인식과 관계시킨다."(146-7)


"문자의 비효율성이나 의존성은 오히려 정신의 등장이나 활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 기능을 한다. 문자는 정신에 의해 사념될 수 있는 추상적이며 비가시적인 존재를 요청한다. 그런 것의 매개 없이 그것은 소통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자는 무언가의 대리인이다. 문자가 언어라고 한다면, 그것의 존재 기반이 되는 자체적이고 추상적인 의미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문자는 이들 추상체를 대리하는 것이며, 추상체는 문자의 배후 후견인으로서 이들을 지원한다고 여겨지기에 문자 문화는 추상체나 자체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을 강화시켰을 수 있다. 글에 대한 이런 믿음은 말에도 전이되어 언어 일반에 대한 입장을 형성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문자에 대한 반성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그가 철학적 사유에서 필수적이라 생각했던 바, 즉 자체적인 것,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 정신의 고유 영역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이다."(148-9)


# 플라톤 철학의 두 가지 측면

1. 구술 문화적 요소 : 대화록이라는 저술 형식, 이야기식 문체, 문자에 대한 명시적 비판, 소크라테스의 대면적 철학함, 아카데메이아에서의 철학함의 방식, 당시 문자 자원의 희소성

2. 문자 문화적 요소 : 형상의 존재, 자체성의 개념, 지적 정관(프로네시스), 실재의 불변성, 정태적 인식의 주체로서의 정신, 실재 탐구에서 차선의 방법인 언어방법론, 가설의 방법, 변증법, 분석과 종합의 방법, 추론과 연역적인 사고의 강조


4장 고대 그리스어의 언어철학


"문자 형성의 기반이 무엇이냐는 언어관 형성에 기초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그리스 문자는 음성을 가시적 매체로 전사하는 음성문자이다." "음성문자는 그 자체로서는 물리적 끄적임이기에 그것의 의미, 혹은 그것이 지칭·묘사하는 사물이나 사태와 전혀 무관하다. 기표는 기의에 대해 자의적이다. 그래서 음성문자적 문화는 끄적임의 배후에 그 물리적 흔적을 언어로 역할하게 하는 의미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가시적 끄적임이나 흔적은 시각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홀로는 언어기호로 기능할 수 없다. 그래서 그를 소통의 매체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이 배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배후의 것은 끄적임과는 달리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며, 눈이나 귀로는 지각할 수 없으나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으로는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을 수 있다."(178)


"미국의 고전학자 찰스 칸은 그리스어 be동사('einai' 동사)의 진리 확인적 역할을 조명하면서 그리스어 be동사는 ①'존재한다'는 의미('a is' = 'a가 있다'), ②계사적 역할('a is P' = 'a는 P이다')에 더하여, 보다 기초적인 의미로서 ③진리 서술적 의미('a is P' = 'a가 P라는 것은 참이다')를 지니고 있다고 논한다. 그리스어 be동사는 자신이 연결사가 되어 서술된 사태가 객관적 사실이며 진리임을 주장하고 확인하는, 상위 술어(메타)적인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는 것이다. 칸은 그 근거로 'einai'의 분사형에서 파생된 부사('ontos')와 형용사('on')가 결합된 어구 'ontos on'이 '진정으로 실재인really real'을, 'to onti'가 '실제로really'나 '진실로truly'를, 'esti tauta'가 '이들은 사실이다these are real' 또는 '이들은 진실이다these are tru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더 나아가 '진술된 바가 진리이다 또는 사실이다'라는 진리언명적 의미가 그리스어 be동사의 보다 중심적인 의미라고 주장한다."(186)


"'einai' 동사를 사용하여 무언가를 서술하고, 서술되는 바가 진리임을 주장하려 한다는 것은 역으로 그것이 논파될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be동사를 사용한 사실 언명이나 주장이 일상적이고 빈번히 이루어질수록 진리 주장에 대한 비판 의식은 첨예해질 수 있다." "플라톤 철학에서, 더 일반적으로 서양철학에서 인식론이나 존재론이 중심적인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의 be동사가 지닌 서술적 역할이나 진리주장적 의미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 이래 서구적 사고에서는 실재란 무엇이냐, 언표되는 바가 객관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철학은 오랫동안 서구 학문의 중심이었고, 철학이나 학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진리의 인식이었다. 자연철학자들은 서양철학의 비조鼻祖로 평가되는데, 그들의 전형적인 물음, 아르케에 관한 물음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었다."(186-8)


"그리스어를 포함한 서구어에서는 형용사에 정관사(고대 그리스어에는 정관사만 있음)를 붙이면 그 형용사가 기술하는 성질을 지닌 어떤 보편자나 추상체를 가리키는 어휘를 만들어낼 수 있다. 'the red'는 보고 만질 수 있는 'red apples', 'red lights' 등과 대조되어 빨강 자체, 빨강의 성질, 빨강의 본질을, 'the just'는 'just societies', 'just decisions' 등에 공통적인 덕목인 정의 자체, 정의로움, 정의의 본질을 지칭한다. 이들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며 자체적인 것, 그러면서 특수자들에 공통적인 본질은 관사의 도움을 받아 존재론적인 추론을 거치면 쉽사리 실체로서의 추상체나 보편자로 변모한다. 서구어의 관사가 이렇게 형용사를 실체화할 수 있는 이유는 지칭적인 기능을 행하기 때문이다. 지칭될 수 있는 것은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이다. 'the red'나 'the just' 역시 관사적인 것, 즉 지칭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어떤 존재자이다."(197-8)


"플라톤은 형용사와 보통명사의 의미 근거와, 이들에 의해 기술되는 물상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성질의 근거가 되는 것이란 동일하다고 추론했다. 사물들이 특정한 형용사('정의롭다')나 명사('정의')에 의해 의미있게 서술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어휘에 의해 기술되거나 지칭되는 어떤 속성(가령 '정의로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형용사나 명사는 그 실체 또는 형상을 명명하는 이름이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산하는 모두 '아름답다'고 의미있게 서술될 수 있고, 그런 기술이 진리일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아름다움'이라는 어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면서도 '아름다움'의 근거가 되는 이것을 플라톤은 그리스어 형용사에 관사를 붙여 'to kalon(아름다움the Beautiful)'이라고 부르며, 나아가 이를 'to Kalon auto kath' hauto(자신에 즉해 있는 아름다움 그 자체Beautiful itself)라 칭하면서 다양한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분리 구분했다."(200-1)


"그리스어 동사 'einai'와 라틴어 동사 'existere'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어 'einai'는 지속적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로서 'gignesthai(생겨나다)'와 대조된다. 이에 비해 라틴어나 영어의 존재동사는 오히려 '생겨남'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사이다. 라틴어 'existere'는 두 어휘 요소 'ek-sistere'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에 비추어볼 때, 이 동사는 '앞으로 나옴', '걸어 나옴', '존재하게 됨',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대낮의 밝은 빛 속으로 부상함'을 의미한다. 이 동사의 접두사인 'ex(ek)'는 과정의 완료를, 그리고 어간 'sistere(서게 되다)'는 지속성을 함의하는 'stare(서 있다)'와 달리 부정과거aorist의 일회성이나 순간성을 함의한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existere'라는 동사는 'gignesthai'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 즉 생성 과정이 완료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existere'는 '존재하게 되다', '생성 과정의 결과로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다'를 의미한다."(208)


"이 어휘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부상하게 되다'를 의미하므로, 존재자들이란 '부상하게 된 것들id quod existit'이다. 이렇게 부상하게 되어 대낮의 빛 속에 들어선 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부상하지 않고 어두운 배경에 머무를 수도 있으며, 곧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중세 신학은 성서의 영향을 받아 존재와 본질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런 구분법에는 존재가 우연적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우연한 존재의 개념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개념으로 계승된다. 'einai'의 명사적 형태라 할 수 있는 그리스어 'ousia'는 '우연적 현존existence'이 아니라 '항구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 '본질essence'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의 'einai'는 중세적 'existere'와 달리,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 있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의 존재 개념은 중세나 이후 실존철학의 존재 개념과는 정반대적이라 할 정도로 현격한 차이를 지닌다."(208-9)


"'praxis(프락시스)'와 'poiesis(포이에시스)'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또는 행위철학의 중심 이론 중 하나인데, 이는 그리스적 사유에서 동사상 구분에 대한 민감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poiesis'는 대략 '노동', '제작'이라 번역될 수 있는 어휘로,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적 활동을 의미한다. 외재적 목적이 성취되면 그 행위는 종료된다. 가령 '(밭을) 갈다'라는 동사가 기술하는 경작의 활동은 밭을 다 갈게 되면 종료된다. 목공일은 가구가 완성되면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다. 이와 달리 '실천'이라 번역할 수 있는 'praxis'는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산책하기, 놀이하기, 운동하기, 명상하기, 지적 호기심 충족하기, 수학문제 풀기, 우주의 질서를 관조하기 등의 활동은 실천적 활동이다. 이들 활동은 어떤 외부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즐거움을 주며 가치를 지니기에 활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211-2)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활동을 두 종류로 구분하는 것은 윤리적 삶과 행위를 규정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삶의 목표는 'eudaimonia(에우다이모니아)'이다. 통상 이는 'happiness' 또는 '행복'이라 번역되어 왔는데, 이는 일종의 마음의 상태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심리적 상태라기보다는 어떤 활동을 의미하는데,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앞서 구분한 바, 자체 목적적인 활동인 실천(프락시스)이다. 삶의 목표인 에우다이모니아는 어떤 행위를 통해 도달한 상태나 무엇을 성취하여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가치를 지닌 진행적인 실천 활동인 것이다." "노동이나 제작이란 부정과거 동사상(일회성으로 끝나는 활동)이나 완료 동사상(행위의 온료 또는 행위에 의해 이르게 된 상태)적 활동이다. 이에 비해 실천이나 그 전형인 에우다이모니아는 반과거 동사상(진행적 활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활동이다."(212)


2부 플라톤의 『파이돈』 : 철학적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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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웃음의 나라 -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
정병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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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청년장군


"협의과정에서 북측이 취하는 전형성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회의의 공식성을 중시해서 격식을 갖춰 웃으며 악수하고, 덕담을 주고받는다. 상대방의 설명을 먼저 잘 듣고 메모하다가 실무적인 내용보다 원칙적인 문제를 찾아서 거론한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비판하고 꾸짖기도 하면서 상대방을 위축시킨다. 자기편 주장을 강하게 말하면서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갈등을 고조시키고 격앙된 감정을 표현하면서 그 상태로 회의를 끝내기도 하고, 다시 만나서 논의하기로도 한다. 다시 회의가 시작되면 다시 웃고 덕담하고 원칙과 도덕으로 비판하고···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기 주장을 관철하거나, 상대방의 제안을 조정하도록 해서 최대한 자신들의 입장과 체면을 지킨다. 결국은 받을 것이었는데 자존심 하나를 지키려고 그 어려운 과정을 반복한 것이다. 그동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북 협상 과정에서 겪었던 일이고, 앞으로의 협상에서도 패턴은 비슷할 것이다."(22)


"미사일 발사 같은 도발의 원리도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기는 국제사회의 동정이나 연민으로 얻을 수 있는 지원이 얼마나 되겠는가? 국제 구호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실제로 어떤 지원을 받았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북한은 아무리 어려워도 그런 방식으로 국제사회의 동정을 구하는 가난한 나라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뚜렷했다. 개인적 자선과 마찬가지로 국제원조도 대상국의 상태와 실력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참혹한 모습으로 도움을 청해도 가난한 걸인에게는 동전을 던져줄 뿐이다. 입성이 반듯하고 갚을 능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는 단위나 지원방식이 달라진다. 실력과 배짱이 있는 상대가 '나'를 해칠 수 있는 힘까지 가지고 당당하게 요구를 한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대기근상황에서 발사한 미사일 광명성은 바로 그런 길을 가기로 했다는 선언으로 들렸다."(24)


2장 행복을 교시하는 나라


"〈행복 넘쳐요〉라고 노래하는 유치원 아이들의 '행복'과 '장군님'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장군님'을 왜 '아버지'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주체사상의 논리에서 보면 이들은 스스로를 항일 유격대의 전통을 이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아직도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민족을 해방시키려는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령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고난을 견디며 바른 편에 서서 바른길을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압도적인 외세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가난하고 괴롭지만, 올바른 길을 가는 자신들이 언젠가는 승리해서 통일을 이루고 민족을 해방시킬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의 노래하는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듯 물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부럼 없어라〉나 〈우리식대로 살자〉든가 〈조선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라는 표어도 남한식으로 해석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들 나름의 도덕원리에 바탕을 둔 정신주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62-3)


"남아프리카 부시맨 문화에서는 선물을 받고 감사하거나 칭찬하는 법이 없다. 평등사회의 문화원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예를 들어 사냥꾼이 큰 짐승을 잡아 온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모두 둘러앉아 맛있게 먹으면서 고기가 질기다고 불평을 한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냥꾼의 뜨거워진 가슴을 식히기 위해서라고 한다." "'고마움'은 선물을 주고받는 그 자리에서 바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그와 같거나 더 큰 선물로 확실하게 갚는다." "북한 당국도 소떼를 몰고 온 정주영 회장에게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개발권으로, 감귤을 보내온 제주도민들은 전세기편으로 직접 평양에 오게 하는 식으로 그때의 고마움을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계산'했다." "〈우리 손으로 직접 나누어 주고, 아이들이 먹는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하면 줄 수 없다〉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런 꼬리표가 붙는 '선물'은 안 받겠다는 것이 북쪽의 일관된 입장이다. '선물'은 장군님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69-70)


"대기근 발생 초기에 국제사회의 구호를 기대하며 공개한 육아원과 아동병원에서 외부 사람들이 찍은 아이들의 참혹한 영양실조 사진은 모금 활동에 일부 활용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폭넓게 북한정권의 실패와 인권상황을 고발하는 이미지로 확산되었다. 그후 북한 당국은 그런 현장에 더이상 외부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관리했지만, 이미 널리 퍼진 이미지들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어 아직도 수많은 반북 정치집회에 동원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후에도 여러차례 평양에 갔었지만 다시는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지난 20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의 비아프라,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전쟁과 자연재해로 수많은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그 아이들의 참혹한 사진들은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렇게 많은 끔찍한 사진들을 돌려 보면서 국제사회는 그 아이들을 얼마나 구했을까? 깡마른 북쪽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우리는 과연 얼마나 도왔을까?"(79-80)


3장 아버지 나라의 교육


"혁명투쟁 중에 희생된 동지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거두어 키워주는 수령의 '어버이'로서의 이미지는 국가 전체로 확대된 가족 개념의 출발점이 되었다. 혁명학원과 정치적 양부모 관계의 의미에 대해서는 탁아소와 유치원부터 모든 교육기관에서 반복학습을 통해 가르친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혁명학원은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가족국가'의 확대종가로서의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북한에서는 혁명을 (기득권 세력에 맞선) 사회 내부의 평등보다는 외세로부터의 해방으로 개념화했다. 외부와의 혁명투쟁이 길어지다보니 '대를 이어' 혁명을 해야 한다. 그 혁명의 효율을 위해 선택과 집중은 불가피하고, 선택의 기준은 개인의 능력보다 신뢰를 우선한다는 논리다. 특별히 신뢰받는 혁명가족의 아이들은 국가적으로 특별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장기화된 혁명의 현실은 처음에 추구하던 혁명의 이념과는 달리 특권 의식으로 나타났다."(107-8)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총 4천 명 이상이 교육받았다. 중국이 가장 많은 수를 돌보았고, 몽골과 소련으로 보낸 고아들까지 포함하면 최소 2만 5천명 이상을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이 돌봐주었다고 한다."(110-1) "동구권 국가에서 교육받은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1960년대 초중반까지 모두 북한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 동구권 사회의 영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귀국 직후 이들은 집중적인 사상 재교육을 받았다. 심각한 문화충격으로 재적응에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귀국 전쟁고아들은 '어버이 수령'의 특별한 사랑을 증명하는 존재들로서 외교 및 통역 분야는 물론, 과학기술 분야에서 전문가 집단을 형성하고 지도적 역할을 했다. 평양과 해외에서 그들과 교류해본 전 루마니아 대사는 전쟁고아들처럼 '어버이 수령'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집단들이 국제적 고립과 위기상황에서도 체제의 전복을 막아주는 '평형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114-5)


4장 태양민족의 탄생


"김일성의 삶 이야기는 대부분의 신화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문화영웅'의 통과의례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다. 즉, 평범한 출생배경을 가진 어린 영웅은 소년기에 집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훌륭하게 성장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물聖物, 두자루 권총'을 물려받고, 성스러운 산(백두산) 속으로 들어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시련을 겪으며 민족을 노예로 삼은 외적을 물리치고, 마침내 고향(만경대)에 돌아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만든 '해방조국(지상낙원)'의 태양이 되어 영생한다는 서사구조다." "영웅의 '통과의례'처럼 소년 김일성은 두 번의 천리길 여행을 통해 청년이 된다. 그리고 '밖'에서 '안'으로 돌아오는 개선장군으로서의 '귀국',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수령으로서의 '건국'이 장년이 되는 과정이다. 그의 노년은 '민족의 태양'으로 추앙받으며 사랑과 이적을 보여주는 삶이었고, 그는 죽어서도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조상신'으로서 '영생'한다."(150-1)


"김정일의 탄생으로 북한의 신화는 세 명의 대성인(김일성, 김정숙, 김정일), 성스러운 삼위三位의 신격을 갖게 되었다." "김정일의 탄생설화는 예수 탄생을 둘러싼 다양한 전설과 성서적 표현을 번안한 형태로 전개된다. 그의 탄생은 성스러운 백두산의 겨울밤, 눈덮인 소나무 가지 사이로 이상한 별이 빛날 때, '정일봉' 아래 통나무집에서 〈룡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가 태어났다는 전설적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늘에는 날개 달린 천사들이 노래하고,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따라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것처럼, 김정일의 탄생은 먼저 민족의 향도성인 〈광명성〉이란 새 별이 솟아나는 것으로 예시되었다고 한다. 땅에서는 마구간에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바친 것처럼, 백두산 밀영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어리신 장군님〉에게 충성스러운 빨치산 '경위대원(호위대원)'들이 소박한 장난감을 바쳤다고 한다."(169-70)


"극장국가의 권력은 영토나 물리적 강제력을 확대하는 것보다 주로 사람의 마음을 잡는 일에 주력했다. 또한 극장국가의 정치와 행정체계는 국가의례의 준비와 집행을 다른 어떤 복지적, 경제적 심지어 군사적 이해보다도 앞세웠다. 그렇다면 (아직 기근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에게 '악의 축'으로 낙인 찍힌 2002년에 처음 개최된) 「아리랑공연」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국가적 장중함과 긍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국가가 초라하게 위축된 상황일 때 더욱 스스로의 존재감을 안팎 모두에게 과시적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문화적으로 익숙한 예술창작 방식을 총동원하여 종합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리랑공연」이다. 즉, 김일성으로 상징화되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정치적 정통성을 재확인하고, 주체적 삶을 지키기 위한 김정일의 선군정치의 힘을 보여주고, 미래의 유토피아 통일조국에서 〈태양민족〉, 〈김일성민족〉이 세계적으로 영원히 중심에 선다는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다."(177-8)


5장 빨치산과 고난의 행군


"'유격대국가'로서의 역사는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강요한 자기중심적 권력서사만은 아니다. 주체적 해방서사에 목마른 탈식민국가의 여러 집단들이 이런 이야기를 서로 만들고 유통하면서 스스로 하나의 문화적 논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만든 이야기에서 구체적 사실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교훈적 이야기의 설득력 있는 의미구성이 중요하다. 그 이야기를 통해 그 사회의 어른들과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 가치관 교욱으로서의 효과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수령과 국가권력에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교육 효과가 있는 다양한 영웅적 미담들도 꼭 사실 그대로일 필요는 없다. 황당할 정도로 많은 신화나 영웅담 형식의 과장된 이야기가 항상 보급된다. 통제된 정보매체 속에서 '이야기'에 굶주린 어른들과 아이들은 같은 주제지만 늘 새롭게 창작되고 있는 변주곡들을 반복해서 소비하고 있다."(195)


"외부세계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에 매달려서 경제적 파탄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군대를 앞세운 선군정치의 힘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자주성'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군대가 〈총 한번 쏴보지 못하는 무력한 집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주의 제도가 붕괴되고 인민들은 전쟁과 약탈, 민족분쟁으로 인하여 자기의 정든 보금자리마저 빼앗기고 다른 나라로 류랑의 길을 떠나고 있지만〉, 조선은 그런 파국을 막았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택한 '군사우선 사회주의', 즉 '선군정치'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고, 이웃한 사회주의 패권국 중국의 변질된 '경제우선 사회주의'와 대비되는 정통성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군정치는 사회주의 체제의 근본적 국가운영 원리이 '당'과 '군'의 서열관계를 역전시킨 것이다. 합당한 물적 토대를 혁명의 원동력으로 강조하는 정통 맑스주의의 전제도 뒤집은 것이다."(204-5)


"흔히 북한을 '벼랑끝 외교'를 펼치는 나라라고 한다. 늘 외부세계의 예상과는 다른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정말 벼랑끝에서 몸을 던질 각오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정책결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극장국가 내부에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 연기를 멈추도록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문화적 '연기'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계기만 있으면 한순간에 대본이 바뀐 듯이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있다. 실제로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은 하루아침에 모든 전선의 일본 군인들이 무기를 놓게 하였다. 마지막 한사람까지 죽창을 들고 싸우고자 했던 일본 국민들도 그의 한마디에 주술에서 풀린 듯 개인적 복수심까지 접고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을 환영했다. 천황이란 상징체계의 중심이 움직임으로써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210-1)


"북한 기근피해가 가장 혹심했던 1995~98년간에 남한사회가 당시의 경제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소극적으로 대응한 배경에는 기근으로 인해 북한체제가 조기에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참혹한 기근이 진행되고 있다 해도 그 기근을 발생시킨 체제가 있는 한 구호활동은 그 비극을 연장시킬 뿐이니, 그 체제가 붕괴하기를 기다려(혹은 적극적으로 붕괴시켜) 일거에 구원하자는 논리였다. 돌이켜보면 이는 '기근'현상에 대한 무지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혹독한 기근이라도 기근 자체는 체제를 붕괴시키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들은 권력에 저항할 힘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사회에서 발생한 '기근'에 대한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최근에 비로소 피해규모가 드러난 중국의 대약진운동 시기 대기근의 경우 사망자만 약 3천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정치체제는 물론이고 권력구조에조차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220-1)


"당시 북한 주민들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단순히 좀더 잘살아보겠다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살만큼이나 극단적인 저항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미 반세기 이상 북한은 국민들을 극도로 군사적인 빨치산국가의 구성원으로 사회화시켰다. 그 국가공동체를 이탈하는 것은 비겁한 배반이고 반역적인 범죄로까지 여기도록 했다. 발각되면 그 처벌은 개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가족과 친척에게까지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탈북난민들은 항상 붙잡혀서 송환되는 것에 대해 극단적인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송환된 후 자기 자신의 운명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에 대한 염려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종류의 공포심은 극단적인 죄책감과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위험한 고비를 넘겨서 일단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잘 먹으면 곧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북한에 남기고 온 가족 때문이었다. 국경을 넘은 자신의 행동이 비겁한 배반이라는 생각을 오래도록 지우지 못했다."(228)


# 기근의 3단계 진행과정

1. 경계 : 기근 초기에는 공동체적 이타성이 높지만 결핍이 심각해지고 사회적 통제가 이완되면서 점차 유대감이 사라진다.

2. 저항 : 심한 결핍으로 활동이 감소하고 사회관계도 침식되면서 공공재 파괴현상이 나타나고 가족단위의 유대만이 남는다.

3. 탈진 : 가족마저 붕괴되어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식량자원을 통제하는 권력에 복종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6장 차별과 처벌


"평양과 지방은 확실히 달랐다.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현격한 질적 차이가 느껴졌다. 도로와 건물 상태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복장, 표정, 걸음걸이와 자세까지 차이가 있었다. 물질적 생활수준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복지수준도 격차가 큰 듯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평양으로 들어와 살고 싶어 한다." "평양은 도시 슬럼 같은 문제도 없다. 경계관리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평양시민들은 지방민들이 소지한 '공민증(남한의 주민등록증)'과 다른 '평양시민증'을 소지한다. 평양시민증은 1997년 기근이 한참 심해질 때 새로 만들었다. 식량배급이 먼저 끊긴 지방에서 마지막까지 식량이 배급되고 있던 평양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평양 이주는 물론 방문까지 철저하게 관리했다. 평양 방문허가증은 국경을 넘는 비자와 같은 기능을 했다. 국가 안에 또 하나의 국경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기근시기의 끝자락에 내가 본 평양 경계선에는 메마르고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256-7)


"탈북한 사람들은 대부분 출신성분이 나빴거나 가족과 친척 중에 정치적 과오가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았다고 했다. 상당수는 바로 그 반대의 이유로 우대받고 당당하게 살았다. 그때 나오는 표현이 〈깨끗하다〉 〈더럽다〉 〈썩었다〉 〈순수하다〉 〈오점〉 〈전염〉 같은 말이다." "이런 문화체제에서는 '오염되었다'고 지목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도 혈연적 친밀도에 따라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위험시한다. 그들은 남들보다 낮은 위치에서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했다." "출신성분이나 과오로 사회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다시 '깨끗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수령뿐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덕성실화는 각 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위험시되던 오염된 성분의 인재들을 바로 현장에서 사면하고 구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차별제도 자체를 없애는 조치는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별적인 그의 '은사'는 예외적이고 특별한 것이 된다."(270-1)


# 사회적 낙인stigma의 세 가지 유형(어빙 고프먼)

1. 신체적 흠이나 장애로 인한 낙인

2. 반역적인 믿음, 부자연스러운 감정, 정신질환, 의지박약 같은 성격적 결함에 따른 낙인

3. 인종, 민족, 종교처럼 가계에 따라 전달되면서 가족 모두를 오염시킬 수 있는 부족적(집단적) 낙인


"북한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여성을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고 하면서 전통가족을 〈붉은 가정〉으로 바꿨다고 공식적으로 밝혀왔다. 그러나 실제 가족관계를 비롯한 일상생활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다." "요즘 북한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부장적 가족생활 문화는 1972년 수령 중심 '유일사상체계' 확립과 관계가 있다. '조선식 사회주의'는 서구식 사회주의와 다르다는 주장과 함께 전통적인 가정생활 방식이 되살아났다." "1980년대 이후 북한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서고 김정일 후계체제가 공식화되면서 이른바 '사회주의 대가정'이란 개념이 나타났다. 생물학적 혈연관계인 부모자식 관계처럼 정치적 생명을 준 수령을 아버지로 당을 어머니로 '섬기는' 인민이 되라는 것이다. 이런 이념을 가정에서도 매일 생활의례를 통해서 되새기도록 했다. 수령과 당에 대한 충성과 효성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가 다시 강화됐다."(278-80)


7장 저변의 흐름


"(대기근의 여파로 공식 배급체계가 무너지고 식량과 에너지를 포함한) 국내 자원이 고갈된 상황에서 중요한 문제는 필요한 물자를 외부에서 확보하는 일이었다. 때마침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시작한 중국은 생존의 열쇠였다.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시 돌아와서 가지고 온 물건들을 장마당에서 팔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중국에서 팔릴 만한 물건(또는 사람)을 모아 다시 그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해서 점점 그 길을 넓혀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사 올 돈을 처음 마련한 사람들은 주로 중국이나 다른 외국(일본과 한국)에 있는 가족을 통해서 외화를 모으거나, 외부세계와의 연줄을 통해서 그쪽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들고 나가 목돈을 만들었다. 그렇게 초기 교역자금을 마련하고 이윤증식 기술을 익힌 사람들을 '돈주'라고 했다. 초기 돈주들 중에는 골동품으로 큰돈을 쥔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305)


"초기 돈주 중에서 중국과 한국 '대방'과 연줄이 있고, 또 당간부나 고위 관료들과도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었던 사람들은 직접 '와쿠(교역허가권)'를 받아서 무역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그중 능력 있는 사람들은 국가기관(당, 군, 정) 소속 기업이나 무역회사의 이름을 빌려서 공식적으로 교역하고 비공식적으로 상납하면서 이윤을 챙겼다." "진짜 돈주의 출현과 소비재의 유행을 보고 자본주의의 맹아라거나 체제붕괴의 조짐이라고 여기는 주장이 많다. 그러나 스스로 생산수단을 갖지 못하고, 임금고용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돈주들을 자본가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오히려 기존 권력체제를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고, 스스로의 안전과 신분상승을 꾀하고 있다. 즉, 시장을 통해서 관료층과 상호의존관계를 맺은 돈주들이 혼인과 신분세탁을 통해서 기존의 계급체제에 새롭게 편입되는 구조다. 이런 방식의 변화는 사회계급 구성원이 바뀌더라도 사회구조 자체는 유지되게 한다."(310-1)


# 대방 : 북한에서 국경을 넘어온 물건들을 받아서 팔고, 식량이나 생필품을 준비해서 보내주는 중국 쪽 교역 상대방


"이동성이 높은 남한사회와 달리 거주이전이 자유롭지 않은 북한에서는 이웃과 동네, 즉 지역사회가 정치적 기능면에서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생활면에서도 중요한 거점이다. 대개는 평생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민반 등 기초 지역조직들은 상부의 명령을 주민들에게 전달하고 보고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정치적인 상호감시체제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일상생활면에서는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들을 협동해서 해결하는 기능과 주민들 간의 상부상조 네트워크 역할도 했다. 특히 공식적 배급체제가 무너진 위기상황에서는 지역단위 주민들이 전통적인 '계'나 '두레' 방식으로 비공식적인 자원과 기술을 모아서 대응했다. 실제로 장마당에 진출한 사람들 중에는 이웃들을 통해 장사기술을 배우고, 동네에서 '모음돈(모아먹기, 계)' 또는 '다니모시(모음쌀, 십시일반)' 방식으로 씨앗자금을 마련한 사례들이 많았다고 한다."(328-30)


"대기근 초기에 김정일은 역설적으로 '웃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지도자의 웃음'은 김일성의 영정사진으로 등장했다. 모든 가정과 공공장소에 근엄한 표정의 수령 초상을 모시고 살던 인민들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나타난 거대한 초상화에 어리둥절했다. 절망적 현실 속에서 낙관적 미래를 과시하기 위해 김일성의 영정을 더욱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그리도록 김정일이 직접 지시했다. 그 이후 계속된 비극과 고난의 시대에 김정일 자신도 파안대소하며 현지지도를 했다. 체제의 한계를 웃음을 통해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 아들 김정은도 위기감을 높이는 미사일 발사 현장에서 주위 사람들과 함께 웃는 모습을 연출했다." "낙관적 정서를 퍼트리기 위해 국가권력이 선도한 웃음은 '관제' 영화와 TV드라마 속에서 '웃음과잉'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이렇게 공식 미디어에 나타난 웃음은 비공식 통로로 국경을 넘어서 들어온 새로운 오락문화의 강한 침투력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이기도 했다."(339-40)


"생활의례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매주 한 번 하는 '생활총화'다." "생활총화는 대기근으로 사회제도가 흔들린 상황에서 뚜렷하게 형식적인 집단의례로 변질되어갔다. 생계문제로 바쁜 사람들은 생활총화가 있는 날 빠지기도 하고, 형식적으로 몇 사람만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심지어는 참가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딴짓을 하면서 의례의 권위와 긴장도를 떨어뜨리는 방식의 저항도 자주 나타났다. 여러가지 전술로 변질되고 있기는 해도 생활총화는 북한 사람들의 심성과 행동패턴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고백, 비판, 반성, 교정, 새 출발로 이어지는 일련의 생활총화 과정은 본질적으로 종교성이 강한 생활의례다.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먼저 드러내 보이고, 용서받아서, 다시 깨끗해진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정화의례이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에게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와 비슷한 일종의 '고백의 문화'라 할 수 있다."(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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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2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2
하영선.손열 엮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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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동아시아질서 개념의 역사적 변환 : 천하에서 복합까지


제2장 '사대'의 개념사적 연구


# 페어뱅크의 전통적 중화질서론

동아시아 정치단위들은 주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조공, 책봉, 일종의 집단안보 등 정치·경제·군사적 체제를 기반으로 정교하게 상호관계를 정비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중원왕조는 경제적 이득을 얻기보다는 주변 국가들에 물질적 이익을 나누어주고, 문화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주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 신청사론(新淸史論)의 비판

중원왕조는 조공, 의식, 이데올로기, 문화 등을 앞세워 주변 왕조에 대한 강력한 지배를 추구했지만, 사실상 그 과정은 무역과 외교, 실용주의와 실천이성 간의 상호 긴장관계가 작동하는 매우 실질적이고 정치적인 관계였다.


# 이용희의 동아시아 지역질서론

'명분으로서의 사대'는 유교적 관념의 토대 위에서 동아시아 질서를 관할하는 제도·규범·국제법의 역할을 했으며, '힘의 관계로서의 사대'는 주로 중원의 힘이 약해지고 이민족 왕조가 들어선 시기에 적용된 실력 중심의 사대관계였다.


제3장 한국의 근대국가 개념 형성사 연구 : 개화기를 중심으로


"서양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전파된 근대국가의 핵심적 속성으로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영토, 주권, 국민이라는 세가지 요소이다. 이 중에서 영토성은 비록 서양에서는 중세국가와 비교할 때 근대국가의 차별적 특징이기는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다지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나라를 의미하는 한자어 '국(國)' 자체가 나라의 사방 경계를 뜻하는 '구'와 창을 들고 나라의 경계를 지키는 것을 표현하는 '역'이 합쳐 뜻을 이룬 것이다. 중국과 주변의 번국들은 비록 책봉·조공 관계에 있었지만 유럽의 봉건질서와는 전혀 다르게 영토적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 주권사상과 국민관념은 천하질서하에서 전통적 왕조국가를 이루고 있던 동아시아 국가들에 있어 대단히 생소한 개념이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근대국가 개념의 형성과정은 다름 아닌 서양의 주권사상과 국민국가 개념을 수용하여 전통적 국가개념과 접목하는 과정이었다."(93)


"한국의 국가개념은 1870년대까지만 해도 전통과 근대 사이의 지점에 머물러 있었으나 1880년대 들어 개화당(문명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돌연 근대국가 개념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문명개화파는 반드시 주권사상과 국민관념을 토대로 근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국공법』에서 제시하는 주권의 권리에 대해서는 비단 개화당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의 많은 인사들이 인지하고 있었으나 청으로부터 '독립'해야 진정한 주권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개화당 고유의 주장이었다." "문명개화파의 국가개념이 근대국가 개념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잇는 것은 주권국가를 지향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관념을 도입하여 국민국가를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일본 망명시절에 작성한 「지운영규탄상소문」(1886)에서 〈문벌을 폐지하고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집권의 기초를 확립하며 인민의 신용을 얻고 널리 학교를 세워 인재를 개발〉할 것을 주장했다."(100-2)


"문명개화파는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자면 독립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유길준도 주권과 독립을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청과의 조공관계를 일거에 청산하기 어려운 현실도 인정했다. 그는 이러한 딜레마를 속국(屬國)과 증공국(贈貢國)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속국은 주권과 독립권이 없지만 증공국은 주권과 독립권을 침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논리를 양절체제(兩截體制)였다. 유길준은 근대국가의 주권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속국과 증공국을 구분해 중국과의 조공관계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주권국가임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고자 했다. 한편 그는 근대국가는 국민국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국가가 정부를 설립하는 본의는 인민을 위한 것이고 군주가 정부를 명령하는 취지도 인민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유길준이 말하는 인민이란 국민에 다름 아니다."(108-9)


제4장 지역공간의 개념사 : 한국의 '동북아시아'


"구미의 쇄도에 맞서 동양삼국이 연대/합방해야 한다는 일본의 인종연대론은 황인종 내부의 서열화와 일본의 맹주적 지위가 전제되어 있다." "일본은 인종주의로서 동양연대론을 활용하여 청일전쟁 이후 발생한 동아시아 내부의 균열과 상처를 봉합하고자 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전쟁을 합리화하였다. 이 논리는 조선의 개화파나 위정척사파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독립신문』은 동양삼국이 아시아라는 같은 지역에 속해 있을뿐만 아니라 인종이 같고 문자가 상통하며 풍속도 유사하기 때문에 유럽의 침범을 '동심(同心)'으로 막아야 유럽에 의한 속국화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침략성에 강하게 저항해왔던 위정척사론자들도 문명개화론자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동양삼국의 인종적 연대를 주장하였다. 최익현은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일본에 복수하기 위해 동양에 재진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동양삼국이 '정립(鼎立)'하여 전력을 다해 이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123-4)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한국인들은 이 전쟁의 승패에 황색인종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파악하고 황색인종인 동양삼국이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성신문』은 러일전쟁이 러시아로부터 '동양평화와 안전'을 지키려는 노력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여, 러시아를 동양삼국 공동의 적국으로 간주하였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이러한 시대적 추세를 담은 구상이었다. 안중근의 구상이 처참하게 실패한 후 한국에서는 동양연대론의 허구를 비판하는 민족론이 등장하는 한편, 연대적 가치와 자주독립의 가치, 즉 외부(서양)으로부터 균형을 성취하려는 의도와 내부(동양)에서의 균형, 즉 한중일 삼국의 자주독립과 균형을 성취하려는 의도가 결합된 정립(鼎立)론 혹은 정족(鼎足)론이 등장하게 된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해 삼국의 연대를 주창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내부의 존재방식으로서의 독립과 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러한 국제정치적 발상은 3·1독립선언서로 연결된다."(124-5)


"한편, 중국의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일-만-화(중) 삼국 간의 동아신질서/동아협동체 구상을 넘어 남진(南進)을 추진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교착상태에 빠진 중일전쟁의 해결방안으로 동남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한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대동아공영권 구상이었다. 이 공간은 '대동아'라 불리는 훗카이도, 일본, 만주, 중국, 인도차이나반도, 남양제도라는 광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에자와 등 당시 일본의 지정학자들은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대동아가 갖는 생활공간, 혹은 대동아라는 공간이 결합되는 유대는 태평양을 끼고 있는 지형의 유사성, 기후의 통일성, 미작(米作), 공생관계 등과 같은 공통의 특질이라고 주장했다. 지형과 기후로부터 나오는 공통의 특질에 의해서 공통의 민족감정, 공통 유형의 문화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 지역의 민족들이 대동아라는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필연적 운명이라는 요지였다."(126-7)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반격을 가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세력이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동남아시아'라는 지리적 공간이 획정되었고, 이와 짝을 맞추어 '동북아시아'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이 언어 역시 서양세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동북아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은 대동아공영권의 붕괴와 관련하여 동남아와는 다른 새로운 지리적 영역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소련, 중국이 일본제국을 압박하면서 서로 만나게 되는 전략적 영역이 그것이다. 미국은 특히 소련의 동/남진에 의해 형성되는 최전선, 즉 중국과 일본,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리적 경역을 동북아로 불렀다." "1931년에 이미 소련-중국-일본의 지정학적 관계에 주목한 커너 교수의 문제의식은 일본의 진주만 침공, 전쟁 말기 소련의 개입으로 확인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미국 국무성 편제에서 중국과(科), 일본과와는 별도로 동북아과(Office of Northern Asian Affairs)가 설치되는 것으로 이어졌다."(128-30)


제5장 19세기 조선의 외교개념


"'외교'라는 용어는 『예기(禮記)』 교특성(郊特性) 편의 〈위인신자무외교 부감이군야(爲人臣者無外交 不敢貳君也)〉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외교는 '신하가 군주 몰래 남의 나라와 통한다'는 식의 나쁜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이 전통 국제질서하에서 외교라는 용어는 유력한 신하가 자국의 군주에 대하여 반의를 가지고 외국의 제후와 몰래 통교하는 사도(邪道)나 권도(權道)의 색채를 띤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한비자』에서는 신하가 외부의 권위와 통하는 것을 사통(私通)으로 규정하고, 신하에 대한 군주의 권력 저하를 가져와 일국의 통치를 혼란스럽게 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안으로는 신하에 대한 군주의 지배력이 확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복수의 군주가 패권을 경합하여 허점을 엿볼 수 있는 상황에서, 외교는 일국의 통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위험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청대에 오면 '人臣無外交'는 인적 왕래와 문화적 교류를 억제하는 현실적 규제로 작동하게 되었다."(150)


# 조선 역시 '人臣無外交' 원칙을 내세워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부


"인신무외교의 개념에서 보이듯이 조공질서에서의 사절은 교섭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를 행하고 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사신의 역할은 근대적인 교섭과정을 이해하는 데 갈등요인으로 작용한다. 전통적 사신의 역할과 근대적 사신의 역할 사이에 갈등을 불러온 것이 전권(全權) 제도이다. 전권 제도는 일국을 대표하는 권리를 위임받아 외국과 교섭하는 근대적 외교 관행을 가리킨다. 1876년 일본이 근대적인 외교제도에 입각하여 조약 체결을 요구하면서 전권문제가 처음으로 대두된다." "전권문제는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일본과 사실상 근대적인 관계가 수립되면서 각종 사안을 교섭하는 과정에서 현실문제로 대두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세칙협상에서 문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이 전권개념에 무지하다는 점을 악용하여 세칙협상을 회피하는 명분으로 전권제도를 활용하였다."(157-8)


제6장 근대한국의 '자주'와 '독립' 개념의 전개 : '속방자주'에서 '자주독립'으로


"조선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 하에서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예라는 명분하에 종주국인 중국에 대하여 조공국의 의례적인 절차로서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지만, 간섭은 받지 않았으며 외교와 내정에서 자주성을 유지해왔다. 이러한 시각에서 '자주(自主, autonomy)'는 사대질서 하에서 사용되는 용어이고 '독립(獨立, independence)'은 근대 국제법(만국공법) 질서 하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개화기에는 이 두 용어가 분리되지 않고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19세기 후반 전통적 사대질서가 무너지면서 조선과 청의 관계에서는, 기존의 조공책봉체제로부터, 더 나아가 1880년대 임오군란 이후 청군 주둔 시 청의 종주권을 강화하고 조선을 속국화하려 했던 청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의 내정과 각국 교제에서의 '자주'를 확보하는 것이 과제였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 및 서구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 과제였다."(173-4)


"근대한국에서 '자주'라는 용어가 해석상 논란의 대상이 된 첫번째 경우로, 조일수호조규 체결 시 조선의 지위에 대한 인식으로서 '자주(自主)의 방(邦)'이라는 표현을 들 수 있다. 1876년 2월 27일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는 조항이 명기되었다. 이 조항에 대한 해석에서 사대질서의 개념인 '자주'와 서양공법질서의 개념인 '독립'이라는 두 개념이 충돌하였다. 조선은 외번의 정교와 금령은 자주에 임한다는 사대질서 안에서의 의미로 인식했고, 일본은 자주가 곧 독립을 의미하므로 조선이 서양 국제법상 하나의 주권국가라고 해석하였다. 즉 일본 측은 조선이 과거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청의 번방(藩邦, 또는 속방)으로 있었던 것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립국가로서 국가 간 조약에 정식으로 명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176-7)


"'속방'이라는 표현이 조선의 의도 내지 해석과는 반대로 실질적 간섭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임오군란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규정부터였다. 임오군란 당시 청은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대내외적으로 공포함으로써, 청의 간섭을 기정사실화하였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청이 조선을 하나의 속방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는 이유를 일본 등에 통지하였으며, 조선 인민들에게 기존의 군신관계를 확인시키는 통지문을 거리에 게재하였다. 청의 이러한 의도는 1882년 10월 17일 체결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반영된다. 그 전문에서 조선을 청의 번 내지 속방으로 간주하고 통상분야에서 청의 배타적인 이득을 보장하며, 제8조에서 조선 국왕의 위상을 북양대신(北洋大臣)과 동격으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청은 사실상 조선정부로 하여금 청의 속국임을 인정하는 내용을 공식협정에 명문화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179-80)


"조선의 자주독립 선언은 1894년 12월 12일 종묘에서 고종이 직접 공포한 홍범(洪範) 14개조에 잘 나타나 있다. 홍범 14개조 첫번째 조항은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터전의 기초를 굳건히 한다〉는 점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조선정부는 조청 간의 기존 조공관계의 종식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자주독립 선언 이후 조선정부는 그 취지와 자주외교의 필요성을 국내적으로 설명하고 홍보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정부는 그간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장소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병자호란 당시 청국의 전공을 기록한 비문인 삼전도비(三田渡碑)를 허물어뜨림으로써, 그동안 청에 대하여 수치스러웠던 상징물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조선정부는 조선국왕의 칭호를 '주상전하(主上殿下)'에서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시켜, 이후 조선의 군주가 외국과 대등한 독립국가 군주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음을 과시하였다."(189-90)


제7장 근현대 한국에서 국제정치영역의 자유개념


"서구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자유(自由)는 서양 근대 국제질서가 동아시아에 유입되면서 필요해진 independence의 번역어 자리를 두고 독립(獨立), 자주(自主) 등과 경쟁하였다. 자유라는 한자어의 의미가 independence와 유사하다는 한자문화권의 공통된 배경에 더하여 명/청과의 국제관계에서 자유개념을 써온 긴 역사가 있었다는 특수한 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유와 independence는 다른 한자문화권의 국가에서보다 더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던 듯하다. 예를 들어 윤치호는 1884년의 일기에서 미국, 영국 등이 각국이 조선과 자유로이 조약과 세칙 등을 정한 것을 예로 들어 〈우리나라의 자유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윤치호의 이러한 자유개념은 근대서양 국제정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independence와 자유에 대한 정합적 이해의 전형적인 예였다."(208)


"량치차오는 대한제국의 자유 담론─liberty/freedom의 번역어로 자리잡은─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 개념에 대한 그의 이해에는 나카무라 마사나오의 『자유론』 번역본이 큰 영향을 주었다. 나카무라의 번역에 보이는 자유개념 이해에는 큰 특징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 이래 일본어의 자유개념에 강하게 남아 있던 independence의 의미를 없애고 자유의 주체를 기본적으로 개인으로 설정하여 자유의 영역을 국내로 단일화하였다. 둘째, 밀의 텍스트를 오역함으로써 자유를 둘러싼 개인과 사회/국가 사이의 관계설정을 변화시켰다. 밀은 '다수의 전제'를 논하면서 국가의 전제가 없어도 벌어질 수 있는 사회 내 다수의 전제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원리를 『자유론』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했다. 그런데 나카무라가 society를 '동료집단 즉 정부'로 번역한 결과, 사회와 국가가 동일한 것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211-2)


"민족/국가가 가지는 국제정치영역의 자유를 설정하고 이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1902~03년 이후 량치차오 자유론의 가장 전형적인 표현이었다. 신채호는 애국계몽기에 량치차오의 자유개념을 받아들여 당시의 대한제국의 상황에 맞추어 이 개념을 소화한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1908년 「대아와 소아」라는 글에서 신채호는 즉자(卽自)적인 개인을 가리키는 소아에 대하여 수많은 소아의 집합체로서의 대자(對自)적인 대아의 존재가 가지는 본질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대아의 무한한 자유로움을 강조하면서 자유를 논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약체화와 함께 대한제국의 집권세력이 주창하던 왕권 중심의 정치에 대한 이해가 붕괴되고 공화적인 정치체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대두되는 과정에서, 개인을 그 구성원으로 하면서도 단순한 개인의 집합을 초월하는 민족/국가가 가져야 할 핵심적인 가치로서 무한한 자유자재(自由自在)가 제시되었던 것이다."(213)


"192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국제정치영역의 자유 개념이 침체한 것은 성격을 달리하는 세 가지 맥락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운동의 분기과정에서 민족주의 우파의 일부는 식민지 상황을 인정한 자치(自治)의 주장으로 전향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우파의 자치론 전개는 국제정치영역 자유의 포기를 전제한다." "둘째, 3·1운동 이후의 분기과정에서 민족주의 우파 이외의 세력 사이에 사회주의가 지속적으로 침투함에 따라 국제정치적 자유개념을 포함한 정치적 자유개념 전반에 주변화가 일어났다." "사회주의 세력은 정치적 자유 개념을 부르주아 계급에 봉사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로 폄하하였고, 그 결과 민족/국가가 가지는 국제정치영역의 자율성도 자유가 아닌 다른 개념─예를 들어 해방─으로 표현되어 자유개념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셋째, 일본을 통하여 비정치적인 자유개념이 유입되어 세력을 획득해나가는 현상이 더해졌다."(222-4)


"자유개념은 1945년 이후 한국정치에서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확고한 위치를 획득한다. 첫째, 해방과 함께 국제정치영역의 자유개념이 부활하였다." "해외독립운동 세력들이 담론의 장에 복귀해 독립을 회복하고 건국을 시행하게 되는 상황 변화의 결과, 1920년 이후 침체를 겪었던 국제정치영역의 자유개념은 해방, 자주, 독립과 함께 국제정치영역의 목표를 나타내는 중심 개념으로 부활하였다. 둘째, 미군정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국내정치영역의 자유가 중심 개념으로 주어졌고 또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냉전의 국제관계가 국가 간의 경쟁이라는 차원에 더하여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진영 간의 경쟁으로 구성되었고 두 진영 중 하나가 자유세계를 자칭했다는 외부적 상황으로 인해, 근대한국의 고유한 자유개념에 냉전과 함께 도래한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이 결합하여 냉전시기 국제정치영역의 자유개념을 구성하기에 이른다."(234-5)


"자유는 국제관계의 개념으로서, 두 개로 나뉜 세계에서 우리 측 집단이 공유하는 특징을 드러내어 공통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개념이 되었다. 동시에 이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은 진영 간의 국제정치적 대립이라는 정치적 맥락과 연결되어, 대립하는 세력을 전체주의=공산주의로 규정하여 타자화하는 상징정치의 핵심적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국제정치의 자유개념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자유주의의 국제정치적 부분으로서 세계적 차원에서 재등장하였는데, 해방 후 3년간 냉전의 국제정치적 전개가 국내정치적 분열을 고착시키는 과정을 겪는 가운데 이 자유개념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50년의 『동아일보』를 보면, 제국과 식민지의 역사를 가진 일본도 자유진영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나타난다. 이처럼 1950년이 되면 새로운 국제정치분야의 자유개념, 즉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이 36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경험도 상대화시킬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6-7)


"1960년 이후 자유개념은 국내/국제정치의 현실 변화와 밀접한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해나갔다." "4·19혁명의 주도세력은 민주주의와 함께 민주주의의 근저에 있는 자유의 문제를 더불어 제기했다. 그들은 정권에 의해 상실된 자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에 자신들의 전쟁을 자유의 전쟁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4·19혁명은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변혁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선언문을 보면 민주주의보다도 자유가 보다 중심적인 과제였던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다. 이와 같이 4·19혁명의 과정에서 국내 정치분야의 자유개념이 중차대한 가치를 가진 정치적 모토로 급속히 대두된 것은, 자유(liberty/freedom) 개념이 19세기 말부터 외부로부터 수용되었지만 망국과 식민지를 거치는 과정에서 한국의 정치적 삶에 체화되지 못했던 한계를 넘어서 드디어 한국정치의 맥락 속에서 자생적인 전개를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42-3)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이 지배한 제3공화국도 자유주의 진영에 속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게도 자유를 둘러싼 개념적 모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공을 실현하기 위해 단순하고 통일성이 있으며 서로 협동하는 상하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공동체를 열망했던 박정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자유개념의 잠재적 갈등을 처리하는 나름의 논리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우리민족이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는 〈참된 자유에 대한 가장 무서운 적은 제멋대로 한다는 생각과 방종인 것이다〉라고 썼다. 방종은 거짓된 자유─실질적인 의미는 권력자인 그가 정한 틀을 넘어서는 자유─에 대한 비판의 원리로 제시되었다." "이것이 후쿠자와가 liberty/freedom에 대한 오해를 우려하며 제시했던 제멋대로·방탕(放蕩)과 명확한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일제시기에 제국일본에 의한 교육을 받은 박정희의 지적 배경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246)


"1970년대 미국 외교에서는 데탕트를 배경으로 냉전적 대결만이 아닌 다른 사안에 대한 관심의 증가가 하나의 특징이었는데 그중에서 카터 행정부는 인권외교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한국의 자유 개념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변화는 이전에 주로 국제정치영역의 반공과 동일한 개념으로 존재하던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이 자유진영의 성원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즉 국내정치영역의 특성을 중시하는 개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국제정치적 자유개념과 방종개념을 결합시켜 국내정치영역의 자유를 억압하던 박정희식의 자유/방종담론에 대한 반론이 독재에 대항하여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던 세력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장준하는 근대 이후로부터 계승한 국제정치영역의 자유에의 갈망이라는 과제를 민족주의로 승화시키면서, 이 민족적 과제가 새롭게 받아들인 고귀한 가치인 국내정치영역의 자유와 대립되지 않게 구성하고자 했다."(250-2)


"미국의 압력과 저항세력의 운동으로 인해 자유진영의 자유개념에서 국내정치영역이 가지는 중요성이 점증하는 가운데, 박정희는 반공과 근대 이후 국제정치적 자유의 내용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국내정치영역 자유의 억압을 떠올리게 하는 자유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게 된 듯하다. 그 결과 국내정치적 자유를 포함하지 않고 국제정치영역에서의 자율성만을 나타낼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자유의 대체 개념으로 가장 유력했던 것이 자주(自主)였다. 자주는 19세기 후반에 independence의 번역어를 둘러싸고 독립, 자유와 경쟁했고 이 경쟁에서 패한 이후에 주로 독립보다 더 불명확하면서도 보다 넓은 의미의 주체성과 자립성을 나타냈던 개념이었는데 이 시기의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대두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국제정치영역 자유 개념은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저항자들의 민족주의, 그중에서도 반미민족주의와 결과적으로는 부분적이나마 공통점을 띠게 되었다."(256-7)


"1980년대 저항운동이 진행되면서 자유주의나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개념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며 자유의 중요성을 무시, 심지어 자유를 적대시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두 갈래가 있었다. 첫번째는 민중민주주의론의 입장에서 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종속적인 이데올로기로 보고 자본주의의 극복을 지향하는 움직임이었다. 이 정치적·경제적·사상적 운동은 1980년대를 거치며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며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두번째는 민족해방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정치분야의 자유개념의 전개에서 나타난 새로운 움직임이다." "민족해방론은 민족/국가의 실질적인 자율성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가치로 삼는 관점에서 미국에 대한 한국의 종속적인 상황에 주목하여 이러한 현실의 극복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표상하는 국제정치영역의 개념으로는 주로 '자주'가 사용되었다."(259-60)


제8장 민권과 제국 : 국권상실기 민권개념의 용법과 변화, 1896~1910


"독립협회는 창립 초기의 한 논설에서 인민의 권리를 '법률에 정해진 것'으로 정의하면서, 이 법률을 제정하는 정부의 관인을 선출할 '권리'를 백성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민권'이라는 용어는 『독립신문』에서 선거제를 도입한 외국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사용되었고, 특히 미국의 정당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민권은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나라들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권이나 천부인권의 의미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인민주권 혹은 인민의 정치참여권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인식되었다. 인민의 정치참여권을 강조하는 민권개념은 독립협회 후반부로 갈수록 강화된다. 예를 들어 초기 『독립신문』이 인민을 〈시켜〉 좋은 관리를 천거하고 벌주는 제도로 설명한 선거는 1898년 2월의 한 논설에 이르러 〈임금과 같이 높은 권리〉를 행사하는 대통령의 자리를 인민에게 줄 수 있는 〈성스러운〉 제도로 찬양되었다."(274-6)


"『독립신문』은 「민권론」이라는 논설에서 민권 확장이 국가 부강의 근본이라는 논리를 제시한다. 동양에서는 백성이 권리가 없으므로 나라의 흥망을 정부에만 미루고 수수방관한다. 즉 동양의 왕조 교체에서는 종묘사직과 임금을 바꿀 뿐 정부와 백성은 그대로 두는 고로, 정부가 새 나라에 다시 벼슬하고 백성도 그 새 나라에 다시 세를 납부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상관치 않았다." "그러나 이 민권론에 의하면 나라는 임금이 천명을 받아 세우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임금 혼자의 것도 아니다. 나라는 '임금, 정부, 백성'이 동심(同心)하여 세운 것이고 특히 생산과 재정을 담당하는 〈백성의 권리〉로 나라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 논설의 어조는 조심스러우며 〈백성의 권리〉를 지금 모두 주장할 수는 없음을 인지하나 강한 참정권의 지향을 드러낸다. 논설의 주장 중 민권이 보장되어야 백성이 나라의 위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나라의 부강이 도모된다는 주장은 광범한 파급력을 가졌다."(280)


"『황성신문』은 민권과 관권은 서로 분리되는 영역이 있고 서로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 결국 국권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절충논리로 독립협회를 거들었지만 독립협회 해산 후 침묵했고, 유교적 논리에 입각한 정부와 민의 신뢰 구축과 군주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한편 통감부 정치기 현상타파세력 중 급진적인 그룹이었던 일진회는 인민의 대표를 자임하며 민의 직접적 지방행정 개입과 세율 조정 및 감세, 국가 소유 토지에서 소작권의 재분배 등 다른 엘리트 개혁세력이 제시하지 않은 포퓰리스트적 의제들을 제기하며 대중동원 정치를 벌였으나 통감부에 의해 수용되지 않았다. 말기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민권이 확보된다면 조선왕조를 역사적 기반으로 형성된 한국이라는 정치적 공동체가 일본제국 속으로 해소될 수도 있다는 입장에서 합방청원서를 발표해 조선사회 내부에서 큰 반발을 샀고 일제의 해산 명령과 함께 정치적으로 소멸되었다."(305-6)


"통감부가 내건 소위 '시정 개선'은 민권 확대와 상충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민권론은 특히 고종황제 퇴위 후 식민관료의 직접통치가 강회되는 통감부 후기로 접어들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접점에서 민권론이 인민주권론적 정향성을 드러내며 민족국가론으로 흡수되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대한매일신보』의 논설들이다. 이 논설들에 이르러 국가는 인민이 계약에 의해 창조한 것이며 인민은 정부와 반반씩 권한을 나누거나 정부권한을 거스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정치역량을 강화하여 정부를 감독하고 지도하여야 하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자로 규정되었다. 또한 인민은 국권을 떠난 권리를 추구할 수 없으며, 국가주권의 보존과 회복을 위해 모든 자유권을 압제에 잃어도 애국자의 사상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존재로 정의되었다. 이제 인민의 권한과 국권은 결합되어 분리불가능한 것이 되었다."(306)


제9장 근대한국의 기술개념


"기술의 개념사라는 시각에서 볼 때, 17~19세기 한국에 전파된 서양 근대기술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근대기술개념의 핵심은 장인에 구현된 기능이나 기예로서의 테크네(techne)로부터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지식'이라는 의미로서의 기술, 즉 테크놀로지(techne+logos)의 출현에 있다. 둘째, 근대기술의 출현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자연관으로부터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자연관으로의 변환을 바탕에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기술의 발달은 탈도덕화된 근대과학의 성립을 배경으로 가능했다. 끝으로 근대기술의 발달은 단순히 기계의 발명이나 과학·지식 체계의 발달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제와 체제 전반의 변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시각에서 볼 때, 근대기술이 부국강병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즉, 서양기술의 전파는 외래문물의 순탄한 수용과정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던 동태적인 과정이었다."(308)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개물(開物)이라는 용어가 기술에 상응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역경(易經)』을 보면, 개물성무(開物成務)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개물이란 '자연의 개척 내지 자연의 인위적 가공'이라는 의미였다." "개물이라는 말은 천공(天工)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물(物)은 천(天)에서 생기지만 공(工)은 인(人)에 의하여 열린다. 따라서 천공이란 천과 인을 겸한 것을 말한다. 천공이라는 말은 '하늘이 만든 자연을 인공에 의하여 이용한다는 것, 즉 '하늘과 사람의 합작'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중국의 독특한 천(天)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인위적 기교만으로는 참된 생산[工]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동아시아의 기술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동아시아인들은 천공을 기다린 다음에야 비로소 인공이 완전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천(天)과 지(地)의 관여가 없는 개물, 즉 인공만으로는 훌륭한 기술이 이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311-2)


"성리학에서 격물(格物)은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데 활용되지 않았고, 인간의 수신(修身)을 위해 필요한 방향으로만 적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은 하나의 독자적인 지식체계가 아니라 인간, 즉 장인에 배태된 일종의 덕목으로서 이해되었다. 최고의 기술은 천지의 도(道)에 연결되며, 기술이 이러한 도(道)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숙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숙련된 뒤에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경지, 즉 기교를 의식하지 않는 반사운동으로서의 기술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도에 이른 기술의 경지는 자기가 그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도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경지를 의미한다. 이렇게 숙련을 통해서 이뤄지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기술개념이 근대적인 'technology' 개념과 거리가 있었음은 당연하다. 요컨대, 전통 동아시아의 기술은 아직 장인의 직업을 도구적 수준에서 보조하는 형태였으며, 도제를 통해서 전수되는 경험적 수준의 테크네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15-6)


"동도서기론은 유교적 전통을 지키려면 서양의 기술을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동도서기론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근대기술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기보다는 서양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이이제이의 수단으로서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기술의 개념사적 측면에서 볼 때, 동도서기론은 서양기술의 '하드웨어'적 발전, 즉 도구에서 기계로의 발전에만 주목하고, 그 '소프트웨어'적 측면, 즉 지식체계로서의 속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동도서기론은 후자 없이 전자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동도서기론자들에게 서양의 발전된 기계는 새로운 개념의 것이라기보다는 '장인의 기술'의 관점에서 이해된 또 하나의 신기한 도구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 신기한 도구를 들여오거나 그것을 만드는 방법만 배우면 서양을 능히 따라갈 수 있다는 식의 사고가 가능했고, 이러한 점에서 동도서기론이 서양기술의 '하드웨어', 즉 기(器)만을 보게 되는 구도가 설정되었던 것이다."(329-30)


"근대기술에 대한 개화기 지식인들의 이해는 동도서기론의 발상으로부터 서도(西道)와 서기(西器)가 분리될 수 없는 표리의 관계라는 인식─명실상부한 근대 'technology'에 가까운─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인식의 변환은 주로 1880년대를 넘어서면서 나타난다. 단순히 하드웨어만을 수입하려는 시도를 넘어서 사회체제 전반의 변화라는 맥락에서의 서양기술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는 1880년대 초엽 파견된 영선사나 조사시찰단 등을 통한 근대서양의 군사 및 산업 기술에 대한 이해가 한몫을 담당했다. 소위 개화론으로 알려진 이러한 인식은 동도서기론과는 달리 전통적 가치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하여 좀더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으로, 그들의 인식 속에 반영된 기술은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의 면모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술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신구세력 간의 정치사회적 진통은 불가피한 것이었다."(339-40)


제10장 식민지 한국의 국제협조주의


"제국주의가 넓은 의미의 국제주의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주의론이 공격적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언설로 각광받았던 것은 명백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생물 진화가 생존경쟁뿐만 아니라 상호부조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유럽에서 국제협조주의의 전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파는 1920년대 신자유주의(new liberalism) 계열이었다. 나바리는 소극적 자유보다 적극적 자유를 주창하던 신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집단안보, 새로운 외교, 국가 간의 폭넓은 연결성에 대한 요구를 이론화했다고 밝히면서, 신국제주의가 곧 신자유주의였다고 설명한다. 19세기 말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상품과 아이디어의 사적·경제적 교환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국제법 확장, 규정된 국제법적 판결, 국제재판소 창설을 지지하고 그에 대한 정부의 영구적인 개입을 요구했다는 것이다."(347-8)


"국제협조주의는 국가절대사상에서 국가를 어느 정도 상대화시킨 것이었고 군국주의, 국가지상주의, 국가만능주의, 침략주의, 이권독점주의 등으로 명명되는 국제질서의 원리와 대립했다." "종전 이후 세계개조론의 유행 속에서 국내외의 개조를 동시에 논하던 일본 사상계의 움직임은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에게 거의 시간 격차 없이 전달됐다." "일본인들은 개조를 국내와 국제 차원에서 폭력적 군국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나아가려는 세계의 흐름으로 인식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은 일본의 논의를 이어받아 세계개조가 민의정치와 여론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고, 이를 국제간에 적용하면 제국주의와 완력주의를 타파하고 〈공론(公論)과 협조와 이의(理義)〉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세계개조 개념을 통해 국제협조주의를 받아들인 초기 단계에서 식민지 한국인들은 (민본주의와 계급평등을 강조하던 일본과 달리) 민족자결 원칙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356-9)


"1920년대 생존경쟁론 비판이 세계개조론과 함께 한국에서 큰 논쟁을 낳았던 이유는 식민지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열망이 치열하던 1920년대 초반에, 세계개조론은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과 대척점에 서 있었고 침략주의와 대조되는 협조주의, 군국주의와 대조되는 평화주의로 표현되었다. 조선사회에서 사회진화론은 이미 1890년대에도 존재했다. 윤치호는 서로 다른 민족 사이에서는 힘의 정의뿐이라며, 강한 인종이나 민족이 힘을 얻어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정의와 평화는 결코 지구상에 자리잡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조선인들은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대세가 바뀌고 있다는 희망을 갖고서 일본에서의 육군 축소운동 등에 주목하며 군국주의가 나아갈 방향에 깊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가령, 김영식은 다원적 구심작용으로 민족자결을 고창하고, 일원적 구심작용으로 국제주의 또는 세계주의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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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서남동양학술총서 32
하영선 외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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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대한국의 문명 개념 도입사


"서양의 civilization 개념 자체는 막부부터 메이지 초기에는 예의와 교제로 이해되다가 점차 번역어로서 문명과 문화가 함께 쓰이는 짧은 시기를 거쳐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해서 니시 아마네, 미츠쿠리 슈헤이, 모리 아리노리 등에 의해 문명개화 또는 문명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미개/반개, 개화문명/문명개화의 네 부류로 진보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1875년에 쓴 본격적 일본 문명론의 전개라고 할 수 있는 『문명론지개략』에서 세계의 문명을 논하면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을 최상의 문명국, 터키,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반개화국, 아프리카와 호주를 야만국으로 분류한 다음 이러한 분류의 상대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반개화국가인 일본이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간과 장소를 고려한다면 일차로 서양 문명을 목표로 삼되 우선 지덕을 개발하고, 다음으로 정법을 개혁하고, 마지막으로 의식주나 기계를 추구해서 일본 독립을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57-8)


"유길준은 『세계대세론』에서 이미 전통과 근대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으며, 『서유견문』에서는 개화를 실상개화(實狀開化)와 허명개화(虛名開化)로 나누어 설명한다." "유길준은 실상개화를 달성하려면 개화의 노예에게서 벗어나서 개화의 빈객(賓客)을 거쳐 개화의 주인이 될 것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서 유길준은 개화의 죄인, 개화의 원수 그리고 개화의 병신이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 조선의 현실을 격렬히 비판한다. 전통 없는 근대를 추구하는 개화의 죄인과, 근대 없는 전통을 추구하는 개화의 원수, 전통의 긍정적 측면을 버리고 근대의 부정적 측면만 받아들인 개화의 병신만 존재하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현실 속에서 유길준이 당면하고 있었던 최대 과제는 단순한 서양문명의 소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 아닌 조화를, 더 나아가서 복합화를 당시의 어려운 국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44-6)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덕(智德)의 개화에 이어 정법(政法)의 개화를 논의하는 것처럼 유길준은 행실과 학술의 개화에 이어 정치와 법률의 개화를 강조한다. 정치의 개화를 위해서는 첫째,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의 급격한 영향력의 강화 속에서 당시 조선이 놓이게 된 양절체체─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국제질서─라는 이중구조의 어려움을 풀어 나가려고 유길준은 우선 구미 근대 국제질서의 명분체계로 등장한 『만국공법』의 논리를 빌려 국가는 마땅히 현존과 자위하는 권리, 독립하는 권리, 산업(토지)의 권리, 입법하는 권리, 교섭과 파사(派使)와 통상의 권리, 강화(講和)와 결약(結約)하는 권리, 중립하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유길준은 이러한 양절체제의 현실 속에서 청과의 관계를 속국이 아닌, 증공국(贈貢國)과 수공국(受貢國)의 관계로 만들어 나가면서 동시에 청 이외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균세와 『만국공법』에 기반을 둔 근대 국제관계로 만들어 나가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50-3)


저항의 국제정치 대신에 활용의 국제정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형 문명화 모델에 자극을 받은 개화파 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으로서 조선이 당면하는 국내외 정치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과 근대를 복합화한 조선형 문명화 모델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청국의 영향력이 비정상적으로 커지지만 개화세력은 급격히 약화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노력을 행동이 아닌 『서유견문』이라는 글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유길준은 갑오개혁(1894)을 통해 비로소 조선형 문명화의 실천기회를 얻게 되었으나, 첫째, 조선이 겪고 있었던 전통과 근대의 갈등, 둘째, 청일전쟁 이후 청의 영향력 대신 급격하게 커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현실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운 국제적 여건, 셋째, 국내 역량의 효율적 동원 실패, 넷째, 조선형 문명화 모델의 실천전략적 취약성 등으로 19세기 조선의 문명화 모색은 좌절된다."(64-5)


2장 서구 권력의 도입


"근대 서구 권력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 서구문명에서 권력이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수단으로든지 어떤 행동을 효과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당연한 명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동양 전통사상에서는 어떤 사람, 예를 들어 왕이나 관리가 자신의 인격을 연마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왔다. 둘째, 권력에 사용되는 수단은 주로 폭력과 돈, 금력 등 외부에서 작용하는 요인이며, 이들의 사용은 법(法)에 합당하는 한 정당하다. 이러한 수단의 양(量)과 방법 그리고 기술 자체에는 제한이 없으며 이를 확대하고 정교화하는 행위는 전문기술의 영역이다. 셋째,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하여 이를 행사하는 경우 거의 모든 경우에 국제 전쟁법에 직접 위배되지 않는 한 정당하다. 넷째, 권력의 행사는 주로 관료주의적 조직에 의한다. 이러한 조직은 권력의 도구이자 주체이며, 조직은 이같은 권력관계의 총체로서의 제도라 할 수 있다."(68)


"중국 고대부터 법가 전통에서는 영토를 넓히고 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중심 원리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송(宋)나라 때부터 주자학의 강한 영향으로 '부국강병' 식의 사상은 이른바 '덕치(德治)' 뒤로 밀려나고 '패도(覇道)'로 지탄받게 되었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문제는 동북아시아에서도 분명히 살아있는 현실이기는 했지만 계속 죄악시되고 잊히게 되었고, 현실적으로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적인 문화는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부국강병'이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것은 스스로 자성(自省)에서뿐만 아니라 서구 권력 관념의 도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되돌아보면 서구의 권력 또는 국가권력(national power) 관념은 '부국강병'이라는 한자 조어(造語)로 포장되었다. 결국 서구의 권력 개념은 당시에 그대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 사상언어로 번역되어 전통적 담론(談論)의 틀에 포섭되어 변형·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72)


"국가권력의 기본 작동원리로서, 그리고 제도로서의 근대 법(法) 개념의 도입은 1894년 청일전쟁에 이은 갑오경장(甲午更張) 때부터였다. 전통적 유교국가에서 법의 의미와 서구식 근대국가에서 법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서구식 근대국가는 특히 19세기 이후의 민족국가에서 법적 존재였다. 국가는 보편적 법에 근거하여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며, 법에 근거하는 한 정당한 것이었다. 또한 법은 늘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절차와 주체는 법이 정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 언어는 명쾌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추호의 혼란도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유교국가에서 법의 위치는 애매한 것이었다. 국가가 법에 따라 다스려진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최악의 상황에 한하는 것이었다. 또한 법이란 조선의 경우 명나라의 법전을 사용한다는 것에 별 수치스러움이 없었고, 그것은 동양의 전통에는 입법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86)


"1898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국가권력의 탄압에 의해 소멸하자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권력이 시도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06년 4월에 출범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이 중심이 된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 운동 또한 대한자강회 외에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가세한 전국적인 흐름이었다. 대한자강회의 설립 소이(所以)는 바로 '자강(自强)', 즉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힘'이 운동의 의미와 목적 그 자체였고, '실력(實力)'은 바로 그들의 모든 언어의 '키워드'였다. 이렇게 보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갑신정변의 다른 길이었다면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힘', 현실적 힘─정치권력의 탄압을 극복할 수 있는 스스로의 힘─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이다. 실력이라는 의미는 오랜 기간을 거쳐 다져지는, 언제 어디서, 어떤 조건하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면적인 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96-7)


3장 근대한국의 주권 개념


"『만국공법』이 번역되면서 조선에 도입된 주권 개념은 새로운 대외관계의 규범과 규칙의 전파를 뜻하였고, 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되었다. 일본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 제1조에 〈조선국자주지방(朝鮮國自主之邦) 보유여일본국평등지권(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이라고 표기하여 청으로부터의 자율성을 명시하였다. 이는 당시 기존의 '정교자주(政敎自主)' 원칙으로부터 종주권에 대한 강조로 대조선정책을 변화시키고 있던 청을 견제하고 자신의 세력확대를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1877년 청에 대한 보고에서 〈소방(小邦)이 상국(上國)에 복사(服事)하는 것은 천하 공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병자조약에서 소방을 자주국(自主國)이라고 한 제1조는 일본이 마음대로 자서하여 강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종속관계를 유지하려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청국을 통해 서양과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조선의 고민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131)


"주권은 하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근대정치를 표상하는 관념이자 당시의 문명표준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에 주권 개념의 도입은 곧 포괄적인 관념의 수용 문제였고, 이는 유교와 기독교, 그리고 전통적인 동아시아 정치질서와 근대적인 서구 정치질서 사이 선택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갖게 되는 관념은 그를 통해 한 사회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공동체의 상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주권 관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질서관의 수용은 그 대응에서 저항과 구성, 그리고 순응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게 된다. 서구를 야만으로 간주하고 무조건적인 척사의 태도를 보인 쪽과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을 고려하여 외세에 편승하려 했던 세력을 제외한다면, 당시의 관료나 지식인들은 이전의 규범과 새로운 규범, 그리고 주어진 현실과 명분체제 사이에서 각기 다른 고민을 하였다."(137)


# 주권 개념을 둘러싼 주요 논지들

1. 김윤식(저항의 한계) : 조선이 중국의 속방─조공과 책봉 체제 속에 편입되었지만 내치(內治)에 자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임을 명시하는 것이 자주권을 유지하면서 국가의 안보를 보장받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2. 유길준(구성의 좌절) : 강대국의 침략을 면하려고 본심에 없는 조공을 하는 증공국과 자주할 권리가 전혀 없는 속국을 구별하고, 증공국[조선]은 다른 나라들과 동등하게 조약을 맺을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3. 윤치호(순응의 결과) : 근대적 주권 관념을 가장 충실하게 수용하였지만, 근대국가의 주체를 당시의 인민들이 아니라 미래의 ‘개화국민’으로 상정한 결과, 대세를 좇아 '선先문명화, 후後독립'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4장 근대한국의 부국강병 개념


"구한말 조선에서 부국강병의 개념이 긍정적 의미로 재해석되고 조선의 여러 국내 정치세력이 부국강병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식들을 모색하게 된 것은 서구세력의 팽창에 직면하여 유교이념과 조공체제에 입각한 조선의 안전과 독립 확보방식이 뚜렷한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부국강병을 국가정책의 최우선순위에 두었다는 사실은 과거와 달리 부국강병 개념이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긍정적인 의미로 재해석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대원군에 의해 시작된 구한말 부국강병책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부국강병책은 포군의 대대적인 증설, 새로운 무기개발 등으로 이어졌다." "고종 친정기 부국강병의 개념은 더는 패도 혹은 잡술로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조선이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정책의 의미로서 재해석되고 있다."(157-8)


"위정척사파와 달리 김윤식과 어윤중 같은 개화파 관료들은 조선의 부국강병은 기존의 중화질서의 틀 내에서 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의 입장은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주장하듯이 당시 조선이 처한 양절체제적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중국에 의존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음과 동시에 서구 국가들과 독자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부국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자들의 부국강병책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벗어나 일본과 연대하여 조선의 부국강병을 급격하게 달성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들의 부국강병 방식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김홍집은 자강은 단순히 부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교적 도덕질서와 정치제도를 유지한 바탕 위에서 군비의 증강과 서구 선진기술의 도입을 통하여 서구열강의 위협에 대처하고 소국 조선의 안전과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68-9)


5장 근대한국의 세력균형 개념


"『만국공법』(1865)은 청국 동문관(同文館)에서 서양서 한역을 담당했던 윌리엄 마틴이 헨리 휘튼의 『국제법 요강』을 한역한 것인데, 마틴은 이 책에서 'balance of power'를 '균세(均勢)'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자연법론자였던 마틴은 『만국공법』에서 국제법의 자연법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그는 구미의 『만국공법』이 소국의 자주독립을 보전한 사례들을 예시하면서 세력균형의 자연법적 공공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마틴은 '균세의 원리'를 대국이 세력을 '균평(均平)'하게 만들고 소국이 이에 의뢰하여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태평의 요술(太平之要術)'로 규정하였다. 이 규정은 휘튼의 원저에는 없던 것인데, 마틴이 세력균형의 자연법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일부로 할주(割註)의 형태로 삽입한 것이었다. '균세' 개념의 탄생은 『만국공법』의 자연법적 국제법의 이미지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균세'는 『만국공법』의 법적 공공성을 실현하는 정치적 공공성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178-9)


"번역어 '균세'의 사회적 확산과 개념화에 이바지한 텍스트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이었다. 이 책자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것으로, 조선정부에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의 외교정책과 '자강'정책을 권유한 논책이었다. '친중·결일·연미'의 균세론은 한국을 서양 국가에 개방하여 위협세력인 러시아와 부상세력인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동북아에 세력균형 질서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조선 종주권을 재정립하려 했던 리홍장의 동북아정책에서 나왔다. '균세'는 '친중·결일·연미'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동원되었다. 『조선책략』은 필사본의 형태로 중앙뿐 아니라 지방 유생사회까지 유포되고 개화론자와 척사론자들 간에 개방개혁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논쟁을 통해 '균세' 개념은 개항반대자들(위정척사론자)까지도 그 정확한 의미를 포착할 정도로 널리 유포되었다. 즉, 『조선책략』은 (균세 개념의) 공론화 과정을 통해 '국제정치 개념으로서의 수용'을 유발하였던 것이다."(179-80)


"'균세'는 유교의 권력 관념에 부응하는 중국식 한자어였다. 'balance'의 번역어 '균(均)'은 '평형'의 뜻만이 아니라 토지의 공평한 분배를 통해 '안민(安民)'─경제적·정치적 안정, 곧 '태평'─을 모색하는 유교이념을 담은 '균분(均分)' '균평(均平)'에 쓰이는 '균'의 의미를 연상했을 것이다." "(서구의) 권력지향적 '세력균형' 개념을 규범적 '균세'로 치환하여 규범원리로서 관념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유교이념의 영향뿐 아니라 조선의 취약한 국제정치적 위상과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관념은 자기 존재의 현실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세력균형 개념에 대한 규범적 관념(해석)은 주권이 취약한 상태에서 세력균형의 주체가 되기 어렵고, 객체가 되기 쉽다는 소국의 현실과 자의식에서 비롯한다. 소국의식이 강한 장소(topos)에서는 규범은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여기서 권력의 취약성 때문에 규범에 의탁하는 국제정치 관념이 '균세'를 규범적인 개념으로 상상하게 하는 착시현상이 나타난다."(185)


"근대 한국의 '합종연횡'에 관한 상상력은 세력균형 관념의 장소성을 드러낸다. 이 상상력은 일본과 중국의 경우와 달랐다.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를 일본 전국시대의 할거체제와 결부하여 생각했을 때 막부 무사들은 개체적 전투력과 생존의지에 충만한 무사들의 만국투쟁적 질서를 상상했다. 그리고 '전국'적 만국투쟁 이미지는 부국강병을 통해 주권을 확보하고 서양국가의 위협에 대항하려는 개체적·주체적 생존의식을 낳았다. 청국의 경우는 서양국가(미국)를 끌어들여 러·일을 견제하는 동북아 세력균형, 곧 균세지국(均勢之局)을 구상하는데, '이이제이(以夷制夷 혹은 '이적제적以敵制敵'이나 '원교근공遠交近攻')'를 동원하였다. '이이제이' 관념에는 화이질서관의 대국 관념이 남아 있었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와 달리 1870~80년대 소국 관념과 결부된 한국 지식인들의 '합종연횡' 관념은 대국과의 동맹이나 외교정책의 신중함(prudence)을 추구하는 전략 관념의 표현이었다."(189)


"갑신정변 실패 이후 갑오개혁과 광무개혁 등 '자주'와 '자강'을 위한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청국과 일본, 러시아와 일본의 권력투쟁이 동북아 국제관계를 규정하고 열강의 권력투쟁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국제폭력으로 귀결되는 콘텍스트에서 한국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세력균형이 열강의 역학관계를 의미하고 조선이 '자주'와 '자강'의 부족으로 세력균형의 객체가 되었을 때 '균세'가 국제행동의 정책원리로서 내면화될 가능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립'과 '정립'의 세력균형론이 나타났다. 중립 구상은 세력균형의 주체적 실천이 거의 불가능한 소국의 장소적 특질에서 나왔다. '중립'은 대국이 세력균형 정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갖지만, 부국강병에 기반을 둔 주체적 자주독립이 어려운 상태에서 강구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조선의 중립은 주권국가 체제와 조공체제가 공존이나 중첩되는 콘텍스트에서 모색된, 그리고 유럽의 경험에서 유추된 조선의 생존전략이었다."(195-6)


"'중립'은 주변 열강들이 만들어내는 세력균형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립론은 일본의 힘의 우위(지역패권)가 동북아 세력균형을 대체했을 때 파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보호조약 체결 이후 문명개화론자들은 대국 의존론을 생존논리로서 제시하였다. 청국 우위의 콘텍스트에서 친청 중립을 구상했던 유길준은 이 콘텍스트에 들어서면 일본 의존적인 평화론을 내세운다. 일본은 한국의 자강과 국권 회복을 통해 '동양의 영원평화'를 보전하기를 원하며, 한국은 '문명'과 '부강'을 통한 '광복'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지성(至誠)의 평화'를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평화'는 일본의 대한정책에 대한 우호적인 협조 혹은 '대국' 일본에 대한 묵종을 뜻했다. '균세'는 이러한 '평화'를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한다. 유길준은 '균세'를 믿고 일본에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다른 외세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응하려는 세력균형 정책이 부정되었던 것이다."(197-8)


"세력균형의 내면화 또는 토착화는 열강의 세력균형을 중시한 중립론과 달리 동북아공간 내부의 세력균형을 중시하는 또다른 구상에서 전개되었다. '정립(鼎立)' 혹은 '정족(鼎足)'의 발상이 그것이다. '정립' '정족' 개념은 국제체제의 관점에서 동북아공간의 세력균형을 포착하고 조선을 세력균형의 주체로 상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정립' '정족' 개념은 1890년대 중반 이래 1920년대에 걸쳐 보였는데,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세력을 팽창하고 제국을 형성한 시기에 해당한다. '정립' '정족'은 일본이 지역패권국가로 성장해가는 콘텍스트에서 일본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제시되었다. 이 개념은 개화지식인들도 보였지만, 특히 유학자들(위정척사파, 개신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과거 '균세'와 균세적 동맹을 거부했던 위정척사론자들은 일본의 세력팽창에 직면하자 만국공법을 일본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로 받아들였고 '정립'의 세력균형론을 조선의 생존논리로서 적극적으로 내세웠다."(198-9)


# 정립(鼎立) : 한·중·일 삼국이 안정 자립의 세를 보전함 / 정족(鼎足) : 한·중·일 삼국의 지리적 특성, 인종적 동질성, 문화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협심평화를 보전함


"'정립'이 실현되기 어려웠을 때 '만국공법'은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일본의 이기적 대외행동을 비판하고 일본에 '신의'와 공공성을 요구하는 규범적 준거로서 부활한다. 1900년대 후반 현실지향적인 국제정치관을 가졌던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이 지역패권을 장악해가는 동북아 현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현실에 추종하는 자세를 보였다. 반면 전통론자들은 세력균형을 동북아공간에 내면화한 '정립'의 논리를 통해 일본의 폭력과 패권에 대항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전하려는 강한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여기서 만국공법이 일본의 대외행동을 비판하고 세계만국에 공공성을 주창하는 근거로서 제시되었다. '만국공법'의 규범성과 공공성이 전통론자들에 의해 부활했던 것이다. 지난날 '균세'를 부정했던 전통론자(위정척사론자)들이 '정립'의 세력균형 관념을 강하게 주창하게 된 반면, 과거 '사대'를 부정했던 문명개화론자들이 신흥대국 일본과의 의존관계를 중시하게 된 것은 역설적인 현상이다."(203)


6장 근대한국의 평화 개념 도입사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청은 전통적으로 사대질서를 관리해온 예부(禮部)와 별도로 구미의 근대 외교를 담당하는 총리아문(總理衛門)을 설치해서 이중 외교를 시작해야 했다." "이는 청이 구주제국의 행동양식이 단순히 금수와 같이 무력행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만국공법이라 할 수 있는 법규범에 따르는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청은 이러한 규범을 바로 문명의 표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국의 오랜 역사 중에 춘추전국시대에 유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는 부회론(附會論)을 전개했다." "『만국공법』은 원용론(援用論)과 부회론의 틀 속에서 중국에 서양 국제법을 구체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점차 빈번해지는 구미제국과의 관계에서 중국은 서양제국들의 요구를 전통적 천하질서의 논리로서 거부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사고와 행동의 규범논리를 원용하여 상대방을 물리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발휘했다."(214-6)


"근대한국의 평화 개념 도입 역시 청일전쟁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우선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중국은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 반세기 만에 구미의 근대 국제질서를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청의 종주권이 명실상부하게 소멸하고 일본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위험 속에서 위정척사론자들의 인간과 금수의 이분법에 기반을 둔 만국공법 거부론 대신에 동도서기론자들의 만국공법 원용론을 채택하게 된다. 양절체제론은 더는 설자리를 잃게 되고 현실에 뿌리는 내리지 못하고 논의 차원에 머물렀던 자강균세의 평화론은 국내외의 현실과 직접 부딪치고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하고 또 현실적인 실천 가능성을 꿈꾸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1896년 4월부터 1899년 12월까지 제기된 『독립신문』의 자강균세 평화론을 크게 재구성하면 독립, 문명개화, 인민교육의 3대 과제로 요약할 수 있다."(234-5)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1894년 10월 20일 임시회의에서 개전에 이른 과정을 설명하고, 청일전쟁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공격적 민족주의의 전쟁적 평화관은 러일전쟁 이후 기독교 평화론을 대표하는 우치무라 간조를 포함한 광범위한 일본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진화론에 기반을 둔 평화관은 사회진화론의 양면성, 즉 경쟁진보와 약육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조선이 20세기에 생존하려면 새로운 지역문명표준으로 등장한 일본을 받아들여서 진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잘 요약한 최석하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었고, 천하대세와 세계치란을 논의하려면 일본을 제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일본 문명을 연구하는 것은 세계 각 나라 사람들의 시대적 요구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일본의 '동양평화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240-1)


"신채호는 동양주의의 문제를 한마디로 시대착오자들로 평가한다. 20세기는 치열한 열국경쟁시대인데 국가주의를 추구하지 않고 동양주의를 잘못 꿈꾸는 것은 미래 다른 별나라 세계의 경제를 걱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국가가 주인이 되고 동양이 손님이 되어야지 동양이 주인이 되고 국가가 손님이 되면 나라는 망한다고 단언한다."(242) "열국경쟁과 약육강식의 무참한 희생물이 된 한국이 국권을 회복하여 다시 무대에 서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와 동양주의는 전혀 상반된 길을 걸었다. 동양주의론은 일본의 동양평화론을 방패삼아 우선 교육과 산업을 통해 새로운 문명표준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면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낙관론을 전개했다. 반면에 국가주의론은 구미의 약육강식적 제국주의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뒤늦게 치열한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일본의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비관론이었다. 역사적 현실의 결과는 동양주의론의 패배였다."(245)


7장 근대한국의 국민/인종/민족 개념


"국민은 서양과의 만남 이전에도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나름의 의미로 존재하던 개념이었다. 『주례(周禮)』 『좌전(左傳)』 『사기(史記)』 등 동아시아 문명권의 대표적인 고전에서 이미 국민 개념이 쓰였다. 이때의 국민은 국(國)─선진(先秦)시대 봉건제후의 영지, 중국적 세계질서의 개념적 기초가 잡힌 한대(漢代) 이후에는 중국적 세계질서의 일원인 조공국 등─에 속한 민(民), 즉 백성이었다. 이러한 용례는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답습된다.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1660년의 한 상소에는 〈두루 넓은 땅의 백성은 또한 국민이 아님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조공국인 조선의 백성을 국민으로 지칭한다. 또한 이 국민 개념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자산을 공유하고 있던 중국과의 담화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1729년의 『비변사등록』의 기록을 보면 청의 사신과의 대화에서 조선민을 지칭할 때 번속(藩屬)의 백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국민이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51-2)


"청일전쟁은 한반도의 인간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에 관한 논의를 전혀 다른 문맥 속에 위치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선 청의 패배로 조선에서 조공국의 백성이라는 국민 개념은 현실적인 의미를 잃고 논의의 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둘째, 고종을 중심으로 광무개혁이 진행되면서 (군君과 평등한 민民으로 구성된) 민국 정치이념의 국민 개념이 긴 잠복기에서 벗어나 재등장하였다. 조공국 백성으로서의 국민 개념이 사라진 상황에서 민국 정치이념의 국민 개념은 전통적인 국민의 기표를 손쉽게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셋째, 서양 근대를 모델로 하는 국민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서양 근대를 문명의 기준으로 하는 움직임이 급속히 고조됨에 따라 서양의 역사,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의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조선에 전파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유산에서 과감히 탈피했고, 이들 중 일부는 서양 근대 국민을 nation의 번역어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256-7)


"조선의 지식인 글 중에서는 유길준이 저술한 『서유견문』이 인종을 소개한 초기의 저작에 속한다. 그는 '세계의 인종' 편에서 〈여러 학자들의 논의가 같지 않아 혹은 삼종이라 하며 혹은 사종이라 하며 혹은 육종이라 하며 혹은 십일종이라 하며 혹은 이십이종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맞지 않는 논의이다. 오직 불루면씨가 말하기를 오종이라 하니 그 말이 맞는 듯한 고로 이 책에서도 역시 채용한다. 그 오종은 황색인, 백색인, 흑색인, 회색인(혹은 종려색), 적색인(혹은 동색)이니〉라고 하여 지구상의 인종을 설명한다." "『서유견문』의 인종 개념은 세계에 대한 자연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적인 설명에 사용됨에 머물렀고 조선인을 규정하는 새로운 정치체의 구성원을 나타내는 개념으로는 쓰이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인종이 형질적인 구별을 나타내는 자연과학적 개념에서 정치적 의사를 함께하는 인간집단을 나타내는 정치적 개념으로 진화한 것은 청일전쟁 이후의 시기였다."(262)


"대한제국에서 인종 개념의 수용과 그에 따른 황인종으로서의 자기인식은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결, 즉 관점에 따라서는 백인종과 황인종의 대결이 현실감을 띠는 것과 더불어 강화되어갔다." "하지만 1905년의 시점에서도 인종 개념이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둘러싼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가 차원에서 국민 개념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면서 지역 차원의 인종 개념과 병립하고 있었다. 이 시기 대한제국의 적지 않은 논자들은 대한제국의 국민이자 동아시아의 황인종이라는 두 차원의 정체성이 조화로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백인종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황인종 일본의 승리는 황인종 대한제국의 이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인종 개념의 확산을 정점에 도달하게 하였으나, 바로 그 전쟁을 통해 황인종의 일본이 황인종의 대한제국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인종[황인종]과 국민[대한제국민]의 조화는 여지없이 깨어졌다."(266)


"메이지 일본에서 만든 민족/민족주의 개념은 량치차오에 의해 청의 국제·국내정치적 맥락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쳐 한층 그 위상이 높아졌다. 량치차오에게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저항은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과제였고, 민족/민족주의 개념은 이 과제의 해답으로 주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량치차오의 민족 개념은 그가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식·정보의 전달자였다는 특징에 의해서 한반도의 민족 개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275) "러일전쟁 이후 인종 개념이 제국주의 논리로 변하여 국민 개념과 인종 개념의 조화가 깨어짐에 따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면 새로운 인간집단을 개념화할 필요가 생겼고 민족 개념은 바로 이러한 요청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리고 수용된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현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변화되어가며 대한제국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중요한 정치적 개념으로 정착되어갔다. 이러한 민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인종 개념의 대척점에 민족 개념과 국민 개념이 공존하는 상황이 나타났다."(278)


"경술국치와 더불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재규정되었다. 그 결과 그들의 행동은 당연히 대한제국이 아닌 제국일본이라는 국가와 연결되었다. 국민 개념은 여전히 제국의 신민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그들이 속하는 제국은 바뀌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국민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언어로 키워낸 국민 개념은 제국일본에 의해서 제국주의에 대한 복종의 언어로 변화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맞서 한편에서는 이전의 국민 개념, 즉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대한제국의 국민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자는 입장을 고수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 개념의 변화를 인정한 위에서 한반도에 존재하는 인간집단을 새롭게 규정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여 국민의 전제가 되는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전의 국민 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논자 다수는 국민 개념과의 결별을 꾀했고, 이들이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민족 개념이었다."(286-7)


8장 근대한국의 민주주의 개념 : 『독립신문』을 중심으로


"구한말 서구 민주주의 개념의 소개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길준은 입헌민주주의를 '군민이 공치하는 정체'라고 하며 국중의 정령과 법률을 대중의 공론으로 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①인민이 천거권을 가지고 ②대신 관리들의 직무를 감찰하거나 정령과 법도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 민주주의는 군주와 백성이 공동으로 수호하며 국민이 〈진취하는 기상과 독립하는 정신〉으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며 문명개화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독특한 것은 민주주의의 제도와 이념의 소개가 그의 부국강병론적 국가론 또는 국권론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방국의 권리' 편이 '인민의 권리'보다 앞에 다루어지고, '정부의 종류'에서도 '군주가 전단하는 체제'인 절대군주제가 '군민이 공치하는 정체'인 입헌정체보다 앞서 소개되었다."(298-301)


"갑오개혁 이후(1890년대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민주주의 개념의 체계적 전파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초기적 수용이 대중적 기반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1890년대 후반 민주주의 관념의 수용자들은 지식 엘리트층에서 시작되었지만 민주주의 관념은 이 시기에 다시 등장한 일간신문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빠르게 전파되어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후기 개화기에는 우선 전기 개화기와는 달리 1880년대 중반기 이후 시작된 서구식 근대 교육기관의 영향이 학교교육의 결실을 통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육영공원, 배제학당, 경성학당 등에서의 수년간 신식교육이 실시되었고, 신세대들 사이에서 신속하게 서구 민주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이들이 등장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중 물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서구 정치사상과 민주주의 개념의 전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계몽주의적 선각자─초기에는 서재필, 후기에는 윤치호─의 활동과 영향력이 두드러졌다."(302)


"비록 서재필이 초기부터 여러가지 국가적 덕목인 충군애국이나 부국강병, 독립을 강조했으나, 그가 사상적으로 가장 커다란 이바지를 한 것은 조선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담론인 민권 개념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유민권론은 『독립신문』이 다루는 '민(民)'의 성격이 유학적 '민(民)'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서재필이 소개한 민권은 민(民)이 정치체의 객체가 아니고 점차 중심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두드러졌다." "이제 권리란 특권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며 보편자인 인민, 즉 개인들의 〈텬생 권리〉나 〈사람마다 가진 자유권〉이라고 천명하여, 대한인민에게도 서구의 천부인권사상을 당당하게 소개했다. 서재필은 개화기 조선 민중의 계몽을 최우선시하였다. 아직 근대적 자각을 하지 못한 조선의 대중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하며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303-4)


"독립협회기의 민주주의는 2단계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먼저 민권을 고양하고 민권의식을 자각하는 시민층을 육성하는 단계로 계몽과 개화의 단계이다. 그 다음은 입헌군주제를 세우는 (군민공치제) 애국론과 경장론의 단계이다. 한편으로 『독립신문』은 서구의 자유주의나 계몽주의 사상을 소개하면서도 이것을 전통 유교적 관념에 대비하여 독자들에게 개화사상의 우월성을 설득하여 나갔다." "『독립신문』의 주요 담론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장(更張) 개혁론'이다. 서재필은 급진적 개화운동으로 수구파와 왕권의 반대를 불러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기에 우회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충군애국론을 바탕으로 하되, 개화파의 현실적 입지를 넓히려고 갑오년과 을미년의 근대적 개혁, 즉 경장개혁의 성공적 계승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특히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법률의 시행과 준수가 충군(忠君)이라는 점과 더 나아가 이를 통해 국가의 독립 기초가 굳세어진다는 점을 처음부터 밝혔다."(305)


9장 근대한국의 경제 개념


"일본에서 전통적 경제 개념(경세제민)은 오규 소라이로 대표되는 도쿠가와 유학의 변질, 란가쿠의 영향하에서 동요되었고, 19세기 중엽 개항과 유신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서양적 개념인 economy의 번역어가 되었다. 당시 일본이 마주친 식민지화의 위기[外壓], 그리고 국내 세력으로부터의 점증하는 도전[內壓] 속에서 메이지 지배층은 부국강병이란 슬로건을 국가정책의 전면에 내걸었으며, 따라서 경제는 국민국가를 단위/경계로 한 경제로서 부국과 강병의 상호작용 맥락 속에 있었다. 그리고 부국의 수단은 식산흥업으로, 즉 산업의 육성을 통한 생산의 확대와 교역이라는 당시 19세기 후반 세계표준에 수렴되어갔다. 다시 말해 경제란 백성의 복지, 구휼, 절검(節儉), 조세 및 재정의 합리화로서의 경제에서 국가의 부강, 생산, 식산흥업으로서의 경제로 전환되어갔으며, 이 전환된 개념하에서 국민경제의 성공적 구성은 결국 일본의 독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에서 또하나의 강국의 출현을 가져온 것이었다."(332)


"유길준에게 경제적인 것의 중심은 대체로 재정과 조세의 문제였다. 그는 〈민세(民稅)를 비용(費用)하는 사무(事務)가 국가 최대의 무(務)〉라 언급하면서 합리적인 조세체계의 구축, 예산확보와 예산집행 등의 재정 기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요컨대 유길준의 경제는 조세와 재정책이 중심이 되고 근대적 상업관이 부가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후자(=상업관)의 경우 문명개화론이란 보편적 범주에서 논의됨과 동시에 상권의 확보 혹은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부의 체계적 창출로서 상업을 관념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그의 논의는 주어진 재화를 합리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경제는 백성의 복지, 구휼, 절검, 조세 및 재정의 합리화로서의 경제에서 국가의 부강, 생산, 식산흥업으로서의 경제로 전환되는 중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근대경제의 표준담론, 즉 부국강병의 맥락에서 상공업을 통한 생산의 확대란 담론과는 거리가 있었다."(336)


"유길준의 상업관은 1890년대 '상업입국' 혹은 '무역입국'론으로 전개된다. 대표적으로 『매일신문』 1898년 4월 27일자에는 「장사길 넓게 열도록」이란 제하에 〈일국의 흥망성쇠는 상업(무역)에 달렸으니 천하에 장사가 큰 근본이 될지라〉고 주장하면서 영국이 세계 제일의 부강국인 까닭은 〈상업을 확장하야 긔교한 제조물을 만들어가지고 남의 나라 금은을 바꾸어다가 그 나라를 부유케〉 한 데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상업이 단순히 부를 가져다주는 것일 뿐 아니라 〈일국의 재물은 그 나라 혈맥이라 (상업을 장악한 나라는) 몇달 안에 전국 혈맥을 말릴 권리를 가졌으니 정부와 백성의 목숨이 (그 나라의) 장중에 달렸다〉는 점에서 강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가 정부를 지탱하고 백성이 집안을 보전하려면 아무쪼록 장삿길을 널리 열어 해마다 항구에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많게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는 중상주의적 주장이 드러나고 있다."(338-9)


10장 근대한국의 '개인' 개념 수용


"박영효에 의하면 민은 '자유의 권(權)'을 갖는다. 그러면 '자유'란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자유'는 종래의 한자어 '자유'─그것은 ('문명의 자유'가 아니라) '야만의 자유'일 뿐이었다─와는 의미를 달리한다. '자유'라는 말에도 이미 변용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이른바 자유라는 것은 그 생각한 바를 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만 하늘과 땅의 이치를 따를 뿐이며, 속박할 수 없고, 굽힐 수도 없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하늘이 부여해준 자유[天賦之自由]〉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민은 그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고 세속의 동의에 따른다. 그리고 따라야 한다. '의무' 같은 것이라 하겠다.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그 이익을 서로 얻으려면 일부의 자유를 버리고 세속의 동의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비록 그 자유를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야만의 자유를 버린 것이며, 천하에 두루 통하는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략하나마 '자연상태에서 사회로 이행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355-6)


"크게 다르지 않은 박영효와 유길준의 '인민관'은, 시민불복종, 저항권이라는 측면에서 나뉜다. 시민불복종을 긍정하는 박영효와 달리 유길준은 〈군민의 공치(共治)하는 정체(政體) 우왈(又曰) 입헌정체(立憲政體)〉를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군주'의 위상과 관련하여 홉스 식의 (계약을 통한) 이론적 정당화는 보이지 않는다─생각하면서도, 인민의 풍속과 국가의 상황을 불문하고 그 정체를 감행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인민의 정치참여를 유보하는 것이다. 인민의 지식이 부족한 국가는 갑작스레 그 인민에게 국정에 참여하는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 '인민의 권리' 바로 앞에 '인민의 교육'이 있다는 것은 극히 상징적이다. 개량주의나 계몽사상으로서의 뉘앙스가 강하다고 하겠다. 주어진 법률을 준수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시민불복종과 저항권이 깃들여지는 그만큼 옅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길준은 로크보다는 홉스에 가까웠다."(359)


11장 대한제국의 '영웅' 개념


"이 시기 구국(救國)과 구망(救亡)의 정신적 전선이 한·중·일 삼국 간에, 더 나아가 동양과 서양 간에 공유된 어휘를 어떻게 해석하고 사용하는가에 놓여 있었다고 할 때, 식민 전야(前夜)의 대한제국 지성계가 일제히 '영웅'을 부르짖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영웅론에서 반복적으로 개진되던 두 가지 논점, 즉 '영웅과 시세(時勢)' '무명(無名)의 영웅'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에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논자들은 미묘하지만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 수립에 성공하고 서구열강과 함께 본격적인 민족제국주의적 경쟁에 뛰어든 일본, 1898년의 무술정변, 1899년부터 1900년의 의화단사건으로 개혁운동과 반제 민중운동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서구 열강의 이권침탈을 받고 있던 중국, 1905년 통감정치 실시로 재정·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채 반식민지 상태에 접어든 한국의 각 정치현실과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375)


"1911년 4월 12일 『신한민본』의 논설 「조선에 와싱톤이 누구뇨」에서는 〈영웅이 시세를 만드느뇨, 시세가 영웅을 만드느뇨 하는 문제는 오늘 천하에 사람마다 아는 말이라〉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은 사회적 조건이 성숙해야 영웅적 업적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으면 영웅이 출현함으로써 사회변화를 선도하게 되는지를 묻고 있다. 만약 시세가 영웅을 만든다면 제도와 의식이 성숙해야만 그에 부응한 정치적·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지겠지만, 영웅이 시세를 만든다고 하면 강력한 리더십과 극적인 혁신을 통해 불리한 환경과 물질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청과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에게 영웅이냐 시세냐는 과학을 넘어서는 실존적 질문이었다. 근대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고 사회가 점차 보수화되어간 메이지 말기 일본에서 영웅론이 쇠퇴했지만, 같은 시기 대한제국에서는 영웅론이 맹위를 떨쳤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376)


"도쿠토미 소호의 무명영웅론은 칼라일과 스마일즈의 영웅 개념을 신분사회에서 실력본위 사회로 변화해가던 메이지 일본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것은 영재(英才)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이 분발 노력하여 된 것이라고 한 스마일즈의 자조론과, 영웅은 진정한 인간의 완성태로서 모든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한 칼라일의 주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명'과 '영웅'이 결합된 형태의 무명영웅론은 이 시기 영웅 개념이 전통적 영웅 관념과 다르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도쿠토미 소호는 비슷한 시기 '평민(平民)주의'를 주창하였으며, 소호의 무명영웅론에서 '평민'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와 사회적 지위획득의 기회가 만인에게 열려 있었던, 혹은 적어도 그러한 기대를 가능하게 했던 메이지 일본사회의 역동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일본이 군국주의로의 경사를 보이는 시점에서 영웅론은 쇠퇴하고 '무명의 영웅'은 '영웅'의 자리를 빼앗긴 채 '무명'으로 남는다."(391-2)


"도쿠토미 소호의 문제의식은 서구의 근대화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놓여 있으며, 유명한 영웅들의 대사업의 조력자이자 원동력이라는 측면에서 무명의 영웅이 조명되고 있다. 그에게 '무명의 영웅'은 자신의 맡은바 직분을 다하는 '평민도덕'의 구현자이다." "도쿠토미 소호의 '평민도덕'과 '무명의 영웅'에 대한 사상은 칼라일의 논리를 계승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이 내셔널리즘의 구호로 사용될 때 그것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향한 맹목적 열성에 불과하다. 훗날 역사적으로 증명된바 일본의 무명영웅론은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는 신민, 제국전쟁에서 싸우다 죽는 무명용사가 되라고 요구하는 국가주의로 변질한다. 칼라일의 사상 자체가 안은 파시즘의 위험은 「무명의 영웅」에도 이미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다. 대(對)아시아 침략을 언론과 정치활동을 통해 열렬히 지지하고 훗날 A급 전범 판결을 받은 도쿠토미 소호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394-5)


"소호의 경우 천황으로 대변되는 메이지 국가의 존립과 발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유명영웅을 생략하고 메이지 일본의 '평민'들에게 직접 무명영웅으로서의 덕목을 설파할 수 있었다. 반면 량치차오의 무명영웅론이 겨냥하는 계몽의 대상은 무명영웅들이 아니라 유명영웅으로서 청의 위정자들이다. 「무명지영웅」 말미에 량치차오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시세가 진실로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또한 시세를 만드나니 장수를 도와 성공케 하는 자는 병졸이오, 이 병졸을 훈련하여 능히 우리 편이 되게 하는 것은 또한 장수에게 있으니〉라고 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세를 만드는 영웅'으로서 중국의 유명영우에게 요청된 시대적 숙제는 중국 인민을 모두 '무명의 영웅'으로 빚어내는 것이었다." "국민의 윤리와 가치를 역설할 도쿠토미 소호의 무명영웅론은 량치차오에게 와서 국가지도자에 대한 시무책이 되었다."(396-7)


"스펜서의 이론에서 영웅이 그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며, 제임스의 이론에서 영웅이 일종의 사회적 돌연변이로서 예측할 수 없는 우연성의 조합으로 탄생하는데 비해, 한국의 영웅담론에서 영웅은 '주조(鑄造)'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사회진화에서 인위적 개입을 중시하는 이러한 경향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견되지만, 중국과 일본의 영웅론에서는 그 무게중심이 종종 '유명의 영웅'의 주조에 있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무명의 영웅'을 만들어내려는 데 전적으로 놓여 있다." 시세가 무르익어야만 영웅적 사업이 가능하다고 하면 당대의 한국에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아 나라가 망해가는 암울한 과도기였으며, 현실적으로 국가의 대외적 주권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어째서 국가형성의 질료로서의 근대적 민(民)에 대한 언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은 이 당시 영웅론을 사회진화론의 맥락에서 읽었을 때 비로소 풀리게 된다."(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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