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존자들
리처드 포티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1 오래된 투구게


"투구게는 사실 게가 아니다. 두 종류 모두 가느다란 절지로 바다 밑을 걸어다니는 종류라는 점에서 게의 아주 먼 친척일 뿐이다. 이런 몸마디가 있는 유용한 부속지(附屬肢)를 가진 동물을 절지동물(arthropod : 몸마디로 이어진 다리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이라고 한다. 절지동물은 절지동물문(Arthropoda)으로 분류된다. 절지동물문은 살아 있는 모든 곤충뿐 아니라 거미류, 노래기류, 온갖 종류의 해양 '벌레들'을 포함하는 대단히 큰 동물집단이다. 게는 바닷가재, 새우, 쥐며느리와 함께 갑각류에 속한다. 투구게는 나비와 마찬가지로, 결코 갑각류가 아니다. 투구게에게는 갑각류와 곤충의 공통 특징인 환경을 감지하는 데에 적응된 유연한 더듬이가 없다. 더듬이는 예민한 촉각기관인 동시에 후각기관이다. 투구게는 더듬이 대신에 머리 부속지의 끝이 한 쌍의 유용한 협각(chelicera)으로 변형되어 있으며, 뒤집힌 채 누워 있던 길 잃은 투구게에서도 협각을 볼 수 있었다."(22-3)


"삼엽충은 2억 6,000만 년 전, 세계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때 멸종했다. 투구게처럼, 삼엽충도 절지동물이다. 즉 마디로 연결된 다리가 있고, 근육과 힘줄이 모두 겉뼈대 속에 들어 있는 동물이다. 그러나 투구게와 달리, 삼엽충은 우리 행성의 생물학적 면모를 일신한 대량멸종 때 살아남지 못했다. 놀랍게도 화석 증거는 리물루스속의 친척들이 삼엽충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고 말한다. 델라웨어 해안에서 밤에 벌어지는 집단 짝짓기 의식의 난장(亂場)은 수백만 년 전에도 일어났을 것이다. 내 귀에는 고생대 때에도 그들이 같은 의식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곤충과 거미 등 다른 절지동물들이 육지로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하기 오래 전에, 혹은 새우와 게와 바닷가재 같은 갑각류가 지금처럼 해양 생태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기 전에, 바다에는 투구게의 친척들이 살았다. 그러니 델라웨어 만에 우글거리는 이 동물들을 원시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24-5)


"투구게는 피가 잘 엉겨서 다친 부위를 '차단하기' 때문에 출혈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피가 파란색이다." "우리의 피의 산소운반 색소는 철 원소를 필수 성분으로 하는 헤모글로빈인 반면, 투구게의 산소운반 색소는 헤모시아닌이라는 구리를 토대로 한 분자이기 때문이다." "후속연구 결과, 투구게의 피가 그람 음성균에 놀라울 만큼 민감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바닷물 1세제곱센티미터에는 이 미생물이 수십만 마리가 들어 있기도 하다." "투구게의 몸의 방어는 변형세포(amoebocyte)라는 한 종류의 보호세포가 맡는다. 이 세포에는 응고를 촉진할 수 있는 과립이 많이 들어 있다. 그람 음성균이 가까이에 있으면 변형세포가 터지면서 과립이 방출된다. 그러면 피가 응고되어 감염이 차단된다. 이제 우리는 투구게가 파이고 구멍이 났음에도 어떻게 비틀거리며 기어다닐 수 있는지를 안다. 투구게는 가장 위험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수억 년 동안 간직해왔다."(28-9)


2 발톱벌레 찾기


"발톱벌레(velvet worm)의 학명은 '페리파투스 노바이-제알란디아이'이다. 페리파투스는 썩어가는 소나무 속에서 흰개미와 함께 사는 것이 틀림없다. 사실 그들은 흰개미 방을 뒤지면서 그 작은 곤충을 먹는다. 예민한 '더듬이'로 찾아내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특수한 샘에서 만들어진 끈끈한 점액을 이용하여 먹이를 잡는다. 자연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먹이를 잡는 동물은 없다." "어쨌거나 점액은 단백질이며, 만드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경제성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어떤 느낌인지 만져본다. 아주 끈끈하다. 흰개미에게는 접착제나 다름없을 것이 분명하다. 발톱벌레와 흰개미 둘 다 햇빛을 피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얇은 '피부'를 통해서 금세 수분을 잃는다. 발톱벌레는 막으로 둘러싸인 액체 주머니에 다름 아니다. 밝은 태양 아래서는 금방 바짝 말라붙을 것이다. 빛이 없고 밀폐된 세계인 썩은 소나무는 상대습도가 거의 언제나 100퍼센트에 달하므로 완벽하게 안전하다."(58)


"미얀마에서 발견된 백악기의 호박(琥珀)에 약 1억 년 전 공룡이 살던 시대의 유조동물이 한 점 보존되어 있다. 이 화석 종은 현생 페라파투스와 매우 흡사하며 그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살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보다 2억 년 전인, 헬레노도라(Helenodora)라는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된 석탄기 화석은 유조동물의 먼 친척이 석탄 늪의 축축한 숲 바닥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말해준다. 생명진화의 이 시기에 함께 살던 동물로는 볼품없는 양서류와 아주 초기의 파충류, 최초의 날아다니는 곤충도 있었다. 유조둥물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육지에서 살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다시 2억 년을 더 올라가서 캄브리아기로, 즉 복잡한 동물이 출현한 '폭발적인' 진화가 일어나는 시대로 들어가도 우리는 유조동물의 먼 친척들을 볼 수 있다.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생명의 요람인 바다 밑에서 역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생존자임을 증명했다."(63)


3 끈적거리는 매트


"스트로마톨라이트는 미세한 생물들이 긴 세월에 걸쳐 서서히 층층이 쌓은 둔덕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생태계이다.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덮은 끈적거리는 피부는 살아 있다. 이 매우 얇은 층은 주로 남세균(cyanobacteria)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에는 남세균을 뜯어 먹는 것을 좋아하는 생물들이 많다. 해변의 축축한 바위 위에 미세하게 삐뚤삐뚤 난 자국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바위 표면을 덮은 영양가 있는 얇은 세균층을 고둥의 섭식기구가 긁어대면서 남긴 자국이다." "그러나 해멀린 풀(pool)이라는 특수하고 따뜻한 세게에서는 뜯어 먹는 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스트로마톨라이트의 끈적거리는 표면을 훼손할 고둥이 없다. 남세균을 저녁거리로 뜯어 먹을 물고기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선캄브리아대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로 수중환경의 상당 부분을 뒤덮었던 고대의 생물학적 건축물을 물어뜯고 긁어대는 해양동물들이 등장하기 이전의 생명이 어땠는지를 보여준다."(92-3)


"생물학 전문용어로 남세균은 원핵생물(prokaryote)이다. 이들은 가장 작을 뿐만 아니라 가장 단순해 보이는 세포를 가지고 있지만─공이나 소시지와 다를 바 없다고 할 만한 것도 있다─자그만치 수백 종에 달한다. 원핵생물은 진핵생물(eukaryote)과 달리 세포 안에 막으로 둘러싸인 세포핵이라는 구조물이 없다. 남세균을 빼고 지금까지 이 책에 언급된 생물은 (필자를 포함하여) 모두 진핵생물이다. 그것은 우리 이야기가 이제 생명체를 조직하는 더 단순한 방식을 다루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원핵생물은 진핵생물보다 먼저 출현했으며, 그것은 그들이 생명의 나무의 줄기에 더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진핵생물이 출현하기 이전에, 남세균이 신참이었고, 샤크 만의 한쪽 구석의 얕은 바다에서 우리의 눈앞에 펼쳐졌던 스트로마톨라이트가 특별한 생존자가 아니라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전형적인 경관을 이루었던 시대가 있었다."(94)


"진핵세포의 핵심 소기관─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 같은 것들─은 원래 자유생활을 하는 세균들이 더 큰 후손세포라는 보쌈 보따리 안에 들어간 결과였다. 그러나 인간의 납치와 달리, 여기서는 모든 참여자들이 혜택을 입었다. 이것을 과학적 용어로 공생(symbiosis)이라고 한다. 이전에 '자유생활'을 하던 세균들이 안전한 새로운 서식지에서 번성했다. 납치로 새롭게 보강된 세포들은 삽입된 새로운 핵심 기능을 이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식물에서는 포획된 엽록체가 진핵세포라는 안전한 곳에서 광합성을 전담했다. 이제 식물은 태양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번성할 수 있었다. 대조적으로 미토콘드리아는 생명에 화학 에너지를 제공하는 '아궁이'가 되었다. 그것은 생물이 먹고 자라는 데에 핵심적인 기관이다. 복잡한 세포의 기원을 설명하는 그런 이론을 〈내생공생 이론(endosymbiont theory)〉이라고 한다. 여기서 'endo'는 '몸속'의 공생을 뜻한다."(108)


"스트로마톨라이트로 덮인 얕은 바다와 석호가 있는 세계를 상상해보자. 원시 햇빛에 자극을 받아서 매일 수십조 개의 작은 방울로 산소를 내뿜는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수십만 개 늘어서 있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실로 뒤덮인 끈적거리는 표면은 해로운 자외선의 효과를 어느 정도 완화하는 역할도 했다. 우리 모두는 점액질에 감사해야 한다. 이제 이 과정이 수십억 년 동안 계속된다고 상상해보자. 유조동물의 역사보다 6배나 더 긴 세월이다. 그 결과 대기는 바뀌었다. 산소 방울들을 통해서 말이다. 초기 지구에는 산소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그 공기 자체를 남세균이 바꾸었다. 생명활동을 유지하려면 동물들은 산소를 호흡해야 한다. 그들은 생명의 나무에서 더 아래쪽에 붙어 있는 생물들이 천천히 꾸준히 대기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아가미도, 폐도, 파란 피도, 빨간 피도 없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 끈끈한 둔덕의 자손이다."(110-1)


4 뜨거운 물속의 생명


"알맞은 온천이라면, 단지 몇 종류의 고세균이나 세균만이 무수히 들어 있는 수프가 나올 것이다. 옐로스톤의 황 가마솥(Sulphur Cauldron)에서 사람들은 역겨운 노란 수프처럼 부글거리며 끓는 진흙 웅덩이를 내려다볼 수 있다. 강렬한 황 냄새는 공기를 유독하게 한다. 생명이라고는 전혀 없을 듯한 환경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휘저어지는 뜨거운 황 도가니이다. 그러나 이곳은 술폴로부스(Sulfolobus)라는 유명한 고세균의 집이다. 이들은 황화수소라는 유독가스를 먹으며, 그 황은 산화되어 치명적인 황산이 된다. 이 과정에서 고세균은 성장하고 번창하며 분열할 에너지를 얻는다. 고세균 수십억 마리가 저 아래 섭씨 80도인 곳에서 번성하고 있다. 저 수프는 이윽고 ph가 2 이하로 떨어져서 극도로 산성을 띠게 된다. 쇠까지 녹일 정도이다. 동물은 저 수프에서 2초 이상 살지 못하겠지만, 고세균에게는 저곳이 천국이다. 따라서 이 미생물들은 산과 열을 좋아하는, 즉 호산성(好酸性) 호열성(好熱性) 고세균들이다."(137-8)


"생명은 모든 수준에서 화학반응을 토대로 하는데, 이때 세포 내에서 에너지를 운반하는 수단은 아데노신 삼인산(Adenosine triphosphate, ATP)이라는 화학물질이다. 우리 인간의 세포에서 물질대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ATP 덕분이다. 이 사실은 모든 생명이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하나로 엮는 실들은 그밖에도 많다. 신장 인자(Elongation Factor)라는 이름의 유전자도 기나긴 생명의 역사 내내 쓰인 공통의 언어이다. 즉 모든 생물은 그 유전자를 가진다. 거의 끓는 물에서 번성하며,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래 지구 어딘가에 숨어서 살아온 생물들과 우리가 이런저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질 때마다 놀랍기 그지없지만, 우리 모두는 번성하려면 단백질을 만들어야 하며, 신장 인자는 바로 그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모든 생물이 삶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개입한다."(140-1)


# 생명 영역 분류의 변화 : 원핵생물-진핵생물 → 고세균-세균-진핵생물


"님프 크릭의 언저리, 물이 증기를 피워올리면서 주변의 침엽수림으로 흘러가는 얕은 개울의 바닥은 생생한 녹색 매트로 뒤덮여 있다. 선명한 에메랄드 빛깔이라는 점에서 자연의 다른 녹색들과 다르다. 키아니디움(Cyanidium)이라는 산과 열에 가장 잘 견디는 조류가 만든 색깔이다. 이 조류는 섭씨 50도에서도 살 수 있다. 이 조류는 호열성임에도 철저한 진핵생물이다. 선명한 녹색은 피코시아닌(phycocyanin)이라는 광합성 색소에서 나온다. 물은 더 흘러가서 더 차갑지만 산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웅덩이로 흘러든다. 그곳에는 이동능력을 가진 조류인 유글레나(Euglena)가 우글거린다. 유글레나는 채찍을 휘두르며 움직이는 작은 녹색 소시지처럼 보인다. 근처의 덜 산성을 띤 물웅덩이에서는 남세균과 규조류(조류의 일종)가 엉겨서 복잡한 매트를 짠다. 이처럼 옐로스톤은 드넓은 칼데라 안에 생명의 역사 중 상당 기간을 압축해서 담고 있다."(146)


5 무척추동물 무리


"해면동물문(Phylum Porifera)은 우리 이야기에서 다른 무척추동물보다 더 아래쪽에 끼워진다. 이 장에서 다룬 모든 동물들은 몸의 긴 축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다. 이 잡다한 수많은 생물들은 좌우대칭 동물에 속한다. 몸의 왼쪽이 오른쪽의 거울상이기 때문이다. 당신과 나도 좌우대칭 동물이며, 우리는 거슬러올가라면 완족동물, 투구게, 유조둥물, 민달팽이와 공통 조상을 가진다. 그들도 모두 좌우대칭 동물이다. 고둥은 상황이 조금 달라 보이지만, 연체동물의 원시적인 형태도 앵무조개와 딱지조개처럼 좌우대칭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면동물은 그런 제약조건에서 자유롭다. 많은 해면동물은 꽃병이나 찻잔과 비슷한 단순한 모양이지만, 해면동물은 콜리플라워에서 갈라진 촛대, 방석, 빵 껍질에 이르기까지 거의 어떤 형태든 취할 수 있다." "해면동물은 신경계나 위장이 없지만 유성생식을 한다. 몸이 조직과 기관을 이루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185-6)


"해면동물을 구성하는 각각의 세포들이 연결되어 먹이를 수확할 수 있는 형태를 이루려면 지탱하는 뼈대가 필요할 것이다. 해면동물은 골편(spicule)이라는 작은 성분으로 이루어진 유달리 아름다운 지탱하는 '뼈대'를 갖추게 되었다." "목욕해면은 미시적인 수준에서 놀라울 만큼 상호연결된 뼈대를 만드는 콜라겐의 일종인 물질로 이루어진다. 그리 놀랍지 않겠지만, 이 물질에는 해면질(spongin)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다른 해면동물들은 덜 유연하다. 많은 무척추동물들이 쓰는 물질인 탄산칼슘으로 골편을 만드는 종류도 있다. 유리로 골편을 만드는 종류도 있다. 진짜 유리는 아니지만, 화학적으로는 똑같은 물질이다. 바로 이산화규소인 실리카로서, 흔히 석영이라고 한다. 해면질 해면 중에서도 뼈대에 실리카 골편을 섞는 종류가 있지만, 그 골편은 유리해면의 골편과 다르다. 유리해면의 '뼈대'는 자연에서 가장 경이로운 구조물에 속한다. 마치 마법 기하학자가 만든 것 같다."(186-7)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해면동물도 바이러스와 세균에 감염된다. 수억 년에 걸쳐 해면동물은 그런 공격에 맞서 내성을 갖추어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껏 번성하면서 우리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해면동물은 흥미로운 유기 화학물질들이 찰랑거릴 만큼 가득 든 잔과 비슷하다. 그런 화학물질이, 예를 들어 세균 군체의 증식을 억제하는 효과를 낸다면, '생물학적 활성'을 띤다고 말한다. 현재 우리가 쓰는 항생제는 이른바 슈퍼박테리아(MRSA) 같은 세균에 점점 효력이 없어지고 있으므로, 그런 변화무쌍한 원생생물에 맞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균의 생장이나 증식을 억제하는 새로운 화학물질이 대표적이다. 지금까지 해면동물로부터 의학연구의 대상이 될 만한 물질을 100가지 이상 찾아냈다. 그러니 해면동물은 화학물질 측면에서 잔이라기보다는 풍요의 뿔이라고 할 수 있다."(189-90)


6 녹색의 잎


"후페르지아는 약 3억 년 전 석탄기에 번성한 거대한 나무를 포함한 대규모 식물집단의 후손이다." "후페르지아는 생명의 역사를 더욱 멀리 석탄기까지, 육지녹화가 처음 이루어진 시기로 끌고 간다. 약 4억 2,000만 년 전 실루리아기에 식물은 수십억 년 전에 산소를 내뿜는 광합성이 출현한 이래로 우리 행성의 역사에 가장 주요한 경관의 변화를 일으켰다. 식물은 보호하고 지탱해주는 물속을 떠나서 희박한 공기 속으로 이동했다. 그 이주는 유례없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환이 일어나자 동물들이 뒤따라 이주할 수 있었고, 크고 작은 생물들이 무수한 육상생활의 가능성을 탐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가장 중요한 점은 후페르지아가 관속식물이라는 것이다. 줄기 안에 물을 운반하는 빳빳한 관(물관)이 있다는 뜻이다. 물관은 육상식물이라는 지위를 얻는 데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기계공학적 성과물이다. 물관이 없다면 육지에 사는 식물은 말 그대로 풀썩 쓰러질 것이다."(199-200)


"식물의 육지정착은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라는 다소 과장된 표현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분해되는 유기물이 암석과 상호작용하여 토양을 만들고, 그 토양은 더 왕성하게 식생이 자랄 수 있도록 했다. 식물은 흙을 만들고 흙은 식물을 키웠다. 설령 화석 기록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세균과 균류도 이 과정에 관여했을 것이 분명하다." "셀룰로오스를 분해하고 흙을 만드는 일을 돕는 그들의 능력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육지정착의 초창기에도 반드시 필요했다. 진화에서는 그런 소리 없는 생존자가 계속 버티는 것이 새로운 돌파구 못지않게 중요했다. 균류와 뿌리는 처음부터 얽혀 있었을지 모른다. 균사는 최초의 식물 뿌리를 감싸서 오늘날 우리가 균근(菌根)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었다. 이 결합을 통해서 균류는 자라는 식물에 질소와 인산염을 제공하고 그 보답으로 당분을 얻는다. 그것은 가장 친밀한 형태의 공생을 이룬다."(203)


"개화식물의 다양화는 우리 행성의 생명을 가장 풍요롭게 만드는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는 어떤 창의력이 정점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문명이나 문화의 '개화(flowering)'라는 말을 쓰며, 그 비유는 적절하다. 꽃이 기본적으로 꽃가루의 유전정보를 전달하여 교차수분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단순한 기구라면, 그 단순한 주제의 무수한 변주는 끝없는 경이의 원천이 된다. 우리는 꽃이 진화하기 전에도 곤충이 꽃가루를 운반하는 일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지만, 꽃이 출현했을 때 발명의 상호발전이 촉발되었다. 꽃들은 꽃가루 매개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꽃가루 매개자들은 점점 더 헌신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화석 기록은 백악기 말의 대량멸종 이후에 나비와 벌이 폭발적으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이 시기는 더 따뜻한 위도에서 속씨식물이 (대체로 침엽수를 비롯한) 겉씨식물을 대체한 시기이기도 했다."(232-3)


7 어류와 도롱뇽


"오스트레일리아 폐어의 배아발생 과정은 척추동물의 진화의 역사를 알려줄 단서를 제공한다. 폐어는 실러캔스와 더불어 육기어류(Sarcopterygia)라는 어류집단(강[綱])으로 분류된다. 육기어류(육질의 지느러미를 가진 어류)는 내가 미끈거리를 폐어를 들었을 때 알아차린 것처럼 살집이 있는 신기한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다. 육기어류는 경골어류의 한 강이다. 경골어류에는 육기어강 외에 조기어강(Actinopterygii)도 있다. 조기어류는 농어와 청어처럼 빗살무늬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으며, 약 2만 5,000종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구의 척추동물 다양성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네 발 달린 육지동물(사지류)이 오늘날 훨씬 덜 눈에 띄는 이전 집단의 한 구성원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느러미는 다리가 되어 육지를 걸었다. 따라서 폐어가 어떻게 발달하는지를 연구하면, 우리 자신의 발달과 유연관계를 상세히 알게 될 가능성이 높다."(241)


"일단 육지로 올라오자, 등뼈를 가진 동물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무수히 열렸다." "그린란드와 캐나다 북극지방의 몇몇 지역들에서 나온 화석들이 입증하듯이, 약 3억 8,000만 년 전 데본기 시점에 이르러 적당한 '조상' 어류가 최초로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비교적 잘 알려진 육상 사지류를 낳았다." "지금까지 말한 등뼈를 가진 동물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극히 명백해서 처음에는 혁신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공통 특징이다. 바로 턱이 있다는 것이다. 학술용어로 말하면, 그들은 유악류(gnathostome)이다. 턱은 진화과정에서 낚아채고 물고 씹고 걸러내고 비벼대고 구슬리는 일을 하면서 계속 존재해왔다. 그러나 턱이 없던 시대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턱은 위턱과 아래턱이 관절로 이어져 있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복잡한 기구이다. 물고기의 턱도 마찬가지이다. 턱을 만들려면 진화가 일어나야 한다. 어류의 역사는 그 일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간다."(246-7)


"칠성장어 같은 턱 없는 물고기도 수억 년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했다." "뼈는 수산화인회석(calcium hydroxyapatite)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산(물론 인 원소를 함유한다)이 들어 있으며, 척삭동물 특유의 조직이다. 뼈는 모든 척삭동물이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입증하는 독특한 증거이다. 뼈는 우리의 내부 골조를 이룬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를 떠받친다. 최초의 뼈는 캄브리아기 말, 약 5억 년 전에 출현한 듯하며, 따라서 뼈의 발명은 생명의 나무에서 아래쪽 가지에 끼워진다. 뼈가 없었다면, 어떤 폐어도 육지로 첫 걸음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깨물기를 도입한 이빨도 없었을 것이다. 무악어류 화석은 뼈가 더 취약한 머리를 보호하는 외부 덮개로 출발했음을 시사한다. 뼈가 튼튼한 등뼈를 만들고, 우리가 짐승, 가금, 어류와 동족임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지인 뻐대, 즉 피부 밑의 머리뼈를 제공한 것은 더 나중의 일이었다."(254-5)


# 척삭(notochord) : 신경관과 평행하게 몸 전체에 걸쳐 형성되는 중배엽 세포로 몸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고등한 척추동물도 배아 때 척삭을 갖고 있다. 


8 피 속의 열기


"가시두더지는 포유동물이지만, 특별한 포유동물이다. 우리처럼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맞다. 짧은 만남을 토대로 얼마나 지능이 뛰어난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온형동물이고 자기보호 본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가시두더지는 알을 낳는 극소수의 포유동물(단공류, 單孔類)에 속한다. 새끼는 발생 초기단계에서 태어나며, 생물임을 겨우 알아볼 수 있는 매우 작고 꿈틀거리는 존재에 불과하다. 유대류도 미완성 상태의 작은 새끼를 낳기는 하지만, 가시두더지는 캥거류, 웜뱃, 주머니쥐처럼 새끼를 키우는 데에 쓰이는 잘 발달한 주머니가 없다. 또 젖을 분비할 때 외에는 젖샘도 아예 없다." "체온은 포유류 중에서 가장 낮은 섭씨 31-33도이다. 가시두더지가 파충류 상태로부터 '데워지고' 있는 과정에서 멈추었다고 주장해도 그리 과장이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포유류와 달리, 가시두더지는 헐떡거리지도 땀을 흘리지도 않기 때문에 과열에 취약하다."(277-9)


"가장 영리하다고 여겨지는 동물, 즉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은 어땠을까? 육식동물, 고래와 친척들, 대형 초식동물, 박쥐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포유동물은 공룡과 그들의 파충류 친척들이 백악기 말에 사라진 뒤에 주된 방산진화를 이루었다. 이 과정을 묘사할 때 '생태적 해방(ecological release)'과 같은 다소 과장된 용어가 쓰였지만, 실상은 포유류가 폭발적으로 분출한 진화적 창의성을 발휘하여 세계의 빈자리를 거의 다 메운 것이었다. 창의적인 발명은 그 뒤로 6,000만 년 동안 진행되었다가 멈추었다가 하면서 계속되었다. 판게아가 쪼개져 생긴 각 대륙에서 연달아 새로운 포유류 집단이 출현하면서 이어졌다. 우리의 진화적 친척들과 우리 자신이 속한 집단인 영장류는 이 방산진화가 이루어질 때 처음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이 집단이 백악기에 뿌리를 둔다는 것을 시사하는 약간의 화석들이 있으므로, 영장류는 결코 가장 최근에 출현한 포유류가 아니다."(286-7)


9 섬과 얼음


"섬은 취약하다. 격리된 채 진화한 종은 고양이나 쥐나 무성한 잡초가 일상적으로 가하는 위협을 접하지 못했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몇몇 섬들은 이미 키니네 덤불과 외래종 검은딸기로 뒤덮여서 훼손되었다. 낯선 자들이 자연의 진화실험을 망친 것이다. 아마도 약 2,000년 전일 텐데, 모험심 많은 폴리네시아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섬의 원초적인 생물 다양성은 영구히 훼손되었다. 토종 꿀새(honey-creeper)의 황금빛 깃털은 곧 대추장의 화려한 겉옷을 만드는 데에 쓰였다. 더 나중에 온 쥐들은 땅에 알을 낳는 날지 못하는 하와이 토종 새들을 모두 전멸시켰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잘못된 지식을 토대로 쥐를 잡겠다고 몽구스(mongoos)를 들여왔고, 몽구스는 토착생물들에게 이빨을 들이댔다. 외래종 나무들이 천천히 자라는 토종 나무숲을 대체했다. 격리된 상태에서 진화가 빚어낸 것들 중 상당수는 바깥 세계와 연결되었을 때 자연선택의 작용으로 파괴되었다."(318)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biophilia)' 개념은 우리 존재의 깊은 현실일 수 있는 인류 종과 자연계의 타고난 결속을 상정한다. 나는 〈인류가 다른 살아 있는 생물들보다 훨씬 더 고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이 생명이라는 개념 자체를 고양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류는 숭고하다〉는 그의 말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한 종의 중요성이 우리 인류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개념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이 이 특정한 호미닌의 관찰을 통해서만 유효하다는 견해에 동조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생물은 자기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으며, 전기(biography)라는 용어가 이미 인간의 전용물이 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 용어를 문자 그대로 쓰고 싶다. 우리는 멸종이 다른 생태계에 끼칠 '손상'을 통해서 종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30억 년이 넘는 진화의 산물들을 공리주의 목록으로 서열화할 수 없다."(319-20)


"플라이스토세에 북극의 빙모는 2만 년 전 마지막 최대 빙하기(Last Glacial Maximum, LGM) 때 가장 컸다. 당시 미국은 오하이오 강까지 거대한 빙상으로 뒤덮였고, 영국의 거의 전체와 유럽의 북부도 마찬가지로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였다." "얼어붙은 황무지의 아시아 가장자리에서는 드넓고 추운 툰드라 습지와 초원이 그 환경에 적응한 종들이 행복하게 번성할 특별한 조건을 제공했다. 따라서 빙하기는 온대생물들이 편안히 지낼 만한 더 남쪽으로 그들을 내몰았을 뿐 아니라, 일부 생물들에게는 기회를 준 시기였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물이 빙상에 갇혔기 때문에 세계의 해수면은 대폭 낮아졌다. 그 결과, 마지막 최대 빙하기는 인도네시아 군도와 아시아 사이에 육지 다리가 형성되어 인류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주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마도 키가 약 1미터에 불과한 플로레스 섬의 작은 인류는 이때 처음으로 먹성 좋은 커다란 뇌를 가진 친척들과 맞닥뜨렸을 것이다."(325)


10 역경에 맞서는 생존자들


"나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생명의 역사를 드러내는 이 모든 원핵생물, 동물 식물을 〈그저 운이 좋았다〉라고 뭉뚱그려 말하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본다. 그들을 전적으로 적응력이 뛰어난 우수한 존재라고 묘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실수일 것이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사실 결코 찰스 다윈의 것이 아니며, 1864년 다윈주의 경제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만든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우리는 거의 모든 곳에서 생명의 나무의 낮은 가지에서 살아남은 생물들로부터 과거의 각인을 볼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했듯이, 설령 화석 같은 것이 전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진화의 결정적인 증거를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은 유전체에, 그리고 비교해부학과 현생 생물의 발달 과정에 적혀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 핵심을 놓치고 있기도 하다. 화석은 언제, 어떻게, 왜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를 제공한다."(347-9)


"나는 역사의 조류에 따라 이리저리 오가면서 생존자들이 모이게 된 곳을 시간 피난처(time haven)라고 이름 붙이련다. 시간 피난처는 개별 종의 '레퓨지아(refugia)'의 집합이다.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 이 종들은 진화적으로 더 젊은 종들과 뒤섞이고 이웃이 되어 함께 살게 되었다. 시간 피난처는 서로 다른 생태계들이 다소 한정된 공간에 꾸려넣어질 수 있는 육지에서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해양세계에서는 플랑크톤 유생을 통해서 새로운 곳으로 퍼지는 종이 많아서 분포영역이 불분명하다." "시간 피난처에 보전된 종들의 역사는 화석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그곳의 종들은 대부분 생명의 나무의 꼭대기에 난 잔가지이다. 시간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 놓인 시간 피난처에는 옛 사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줄 종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특히 진정한 영속성에 비추어보면, 인류의 역사가 대단히 짧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유로서 말이다."(369-72)


# 레퓨지아(refugia) : 대륙 전체의 기후가 변할 때 비교적 변화가 적어 다른 곳에서는 멸종된 종이 살아 있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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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읽다 - 고전을 원전으로 읽기 위한 첫걸음 유유 고전강의 1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유유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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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전의 의의와 『종의 기원』의 지위


"30쪽짜리 축약본을 읽는 것과 500쪽에 달하는 원서를 읽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보통 축약본에서 접하는 것은 '다윈주의'이지 다윈의 학설이 아니다. '다윈주의'는 단 몇 마디로 요약이 가능하다. 다윈의 복잡한 내용을 단 몇 마디로 설명한다면 '다윈주의'는 얻을 수 있을지언정 다윈의 진정한 사상과 견해는 얻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축약본을 읽고 종합 정리된 설명을 무수히 축적하더라도 본래의 복잡한 지식을 접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번거로운 일은 이토록 복잡하고 수많은 현상을 축약해 아우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이 다 효과적이고 간단한 방법으로 처리되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는 복잡한 것들과 진실하게 대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춰 이 세계에 대한 이해의 기초로 삼는 동시에, 어떤 복잡한 것은 간단한 방법으로 포착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33)


2 종의 변화와 『종의 기원』의 구조


"다윈이 살던 시대까지도 교회나 대다수 사람은 자연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자연은 하느님의 천지창조 때 창조되었다. 하느님이 이렇게 창조한 자연은 반드시 그분의 섭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자연이 변화한다는 가설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담이 경험하고 기록하고 명명한 자연계는 아담 이래로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우리가 오늘날 보는 그것과 반드시 똑같아야 한다." "그러나 '아담이 없어도 에덴 동산은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은 17세기 이후 갖가지 충격을 받으면서 19세기에 끝내 흔들리고 말았다. '자연 불변'의 신념에 충격파를 던진 것은 화석 연구였다. 서양에서는 17~18세기에 화석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화석에는 고대 동식물의 생태가 응집되어 있어서 화석을 통해 시간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5만 년이나 10만 년 전 동식물의 모습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44-5)


"더 큰 충격은 '지리상의 대발견'에서 비롯되었다. 15세기부터 크게 발달한 해상 탐험 및 이와 관련된 지리상의 대발견은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다양한 지역으로 유럽인들을 인도했다. 그 지역에는 모두 유럽에는 없는 새로운 것들이 대단히 많았다."(46) "콜럼버스 같은 항해가를 격려했던 요소로는 모험과 스릴, 부자가 되고 명성을 떨칠 기회 혹은 남들이 가 보지 않은 땅을 밟는다는 기대 외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각 지역 특유의 동식물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를 더욱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중요한 원양 항해마다 배에 박물학자가 꼭 함께 탑승했다. 박물학자의 주요 임무는 각지의 표본을 수집하여 새로운 지식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수집한 물건을 유럽으로 가져오면서 18~19세기에 '분류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50) 


# 다윈의 네 가지 연구 방법

1. 유추 : 현존하는 생물을 조사하여 과거에 이루어진 종의 변화 상황을 미루어 짐작한다.

2. 배열 : 특정 생물 종을 특수 기관 혹은 신체 기능의 차이별로 분류하여 변화의 양상을 추론한다. 

3. 잡탕 : 각기 취약점을 지닌 여러 종을 한 곳에 모아 이들 사이의 구체적인 연관성을 찾아낸다.

4. 추적 : 현재의 환경에서 쓸모가 없어져 퇴화한 현재 생물 종의 비효율적인 기관을 찾아낸다.


"『종의 기원』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다윈은 먼저 독자에게 '종은 변화한다'라는 개념을 설득시키려고 했다. 그는 파급력이 큰 수많은 증거를 나열하여, 독자의 마음 속에 꿈쩍없이 자리잡고 있던 자연관을 흔들어 놓았다. 낡은 자연관에서는 고양이, 개, 호랑이, 토끼 같은 모든 생물 종이 3천 년 전이나 3천만 년 전이나 똑같다. 다윈은 바로 이런 관념을 깨고자 했으며 진화가 사실임을 주장했다." "또한 다윈은 진화의 이치가 무엇이고, 왜 진화하며,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대한 탐구에 나섰다. 그 결과가 '자연선택'이다.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갖가지 변화를 일으킨다. 그 변화는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환경과 상호 작용을 거쳐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고착되고 남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생물의 진화를 촉진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다."(61-2)


3 다윈 이전의 진화론


"다윈의 조부인 이래즈머스 다윈은 자신의 저서 『주노미아』에서 종이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해한 종의 변화 방식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과 비교적 가까웠다. 다윈이 이런 조부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았을 리 만무하고 조부의 영향을 받지 않기란 불가능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오늘날까지도 생물 분류학에서는 '린네의 분류법'을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린네의 분류법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다. 라틴어가 그 시대에 학술 공통어였으므로 현재 우리가 쓰는 생물 분류 학명도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고, 린네의 논문도 처음부터 끝까지 라틴어로 쓰였다. 그렇다면 린네가 분류법 체계를 확립한 가장 중요한 논문은 누가 영어로 번역했을까? 사료를 찾아보니 최초의 영문 번역자는 개인이 아니라 '리치필드 식물학회'라는 단체였다. 리치필드는 다윈의 고향이다. 그리고 '리치필드 식물학회'의 회장은 다름 아닌 이래즈머스 다윈이었다."(86-7)


4 창조론과 생존경쟁: 『종의 기원』 1~3장


"다윈은 물리학과 생물학으로 각각 하느님의 존재를 밝히는 것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창조론자들은 물리학에 근거해, 하느님은 매우 정교한 우주를 창조했고 우주는 법칙에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운행하는데 만약 하느님이 부재한다면 우주가 이렇게 정확하게 운행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생물학에도 이를 똑같이 적용하고 이용했다. 생물 사이에 형성된 관계 역시 이처럼 완벽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으므로 반드시 하느님이 있어야 이와 같은 생물의 상태를 설계하고 창조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다윈은 이 논증 가운데에서 결정적인 허점을 콕 짚어냈다. 그것은 생태계와 물리계의 가장 큰 차이점이 인간의 역할에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물리계의 질서를 바꿀 능력이 전혀 없다." "반면 다윈이 집비둘기와 사육하는 동물을 먼저 언급한 것은 인력으로 이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102-3)


"멘델의 유전학에서 모든 후대 개체는 전대 개체의 유전 형질을 절반씩 물려받고, 이 절반이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게 된다. 멘델의 또다른 중요한 발견은 유전 형질 안에서 '유전형'과 '표현형'의 차이를 명확히 밝혔다는 점이다. 사람의 눈동자 색깔은 다른 신체적 특성처럼 반은 아버지로부터, 나머지 반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다. 그러나 한쪽 눈은 검고 다른 쪽 눈은 파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전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유전자 구조는 유전형이 되지만 이 유전형은 오직 한 가지 표현형 인자로 나타날 뿐이다. 다윈은 이런 유전 패턴을 아직 몰랐다. 그는 꼬리가 유달리 긴 비둘기가 다른 비둘기와 교배하면 후대에 태어나는 비둘기는 어떤 것은 꼬리가 길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다윈은 어지러운 교배 안에서 한 가지 종이 수많은 종으로 번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105-6)


"'종'의 정의는 자연 환경에서 교배를 통해 후대를 생산할 수 있는 생물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 2장에서 〈변종은 종과 구별할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느님이 창조한 것은 동식물의 개체가 아니라 종이다. 다윈은 『성서』와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과 계속 논쟁을 벌이며 분류학 가운데 '종'을 자주 언급했다. 그의 논지는 하느님이 종을 창조했다면 종의 번식은 아담 이래, 혹은 노아 이래로 명명백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곳곳에서 변종을 볼 수 있다. 모든 종에서 변종이 생기고 있으며, 변종이 서로 다른 종 사이에 개입해 어느 한 가지 종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또한 변종은 늘 새로운 종으로 발전하여 언제 그것이 변종이었고 언제 새로운 종이 되었는지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약 변종과 종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면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종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다."(107-9)


"『종의 기원』 3장에서는 '생존경쟁'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다. 다윈은 생물 개체와 개체 사이 또는 종과 종 사이의 생존경쟁에서 어떤 요소에 특히 주목했을까?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맬서스의 『인구론』의 영향이다." "맬서스가 제기한 개념은 다윈에게 영감을 주었다. 사람과 식량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동물과 그 생존 조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동물들도 방해 요소가 없다면 기하급수적으로 계속 증가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어떤 동물도 이 방식으로 증가하지 않는 것일까? 적어도 부분적인 답은 '경쟁'에 있다. 각 생물 개체의 생존 방법은 맬서스가 말한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생물 개체는 항상 경쟁을 통해서 생존해 간다.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예측한 현상이 자연계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대다수 개체가 생존경쟁 과정에서 도태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힘을 지닌다."(112-4)


5 다윈의 초월과 한계: 『종의 기원』 4~6장


"린네의 분류학이 출현하게 된 이유는 대항해 시대에 신천지가 속속 발견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라마와 야크 같은) 유럽인들이 전혀 몰랐던 동물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종이 끊임없이 발견되면서 분류 체계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개별 종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쉽지 않았다. 분류해 낸 동물들을 일일이 정의하기란 여간 귀찮은 일 아닌가! 그러자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분류한 동물 배후에 필연적으로 이 종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서서히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기존의 분류 체계로는 점점 더 처리하기 어려워진 데다가 분류하고 기록해야 할 동물이 갈수록 많아지자, 본질과 현상의 '이원론'을 흔드는 이론들이 생겨났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발견되고 기록된 본질 영역의 생물이 1만 종으로 늘어나자 기존의 분류학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팽창하고 말았다."(145-8)


"이전 사람들은 일단 분류를 앞에 두고 생물 개체를 뒤에 두었다. 그러나 다윈은 완전히 새로운 태도를 취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연의 오묘함과 종의 변화 및 이 세계의 유래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여겼다. 다윈은 사람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생물 세계를 관찰했다. 먼저 개체를 본 다음 그 안에서 종의 집합을 찾아냈다. 철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현상학으로 기존의 본질론을 대체한 것이다. 우리는 성급하게 이 동물이 무엇인지 결정하거나 정의할 필요 없이 각각의 단일 개체가 실제로 어떻게 자라는지 관찰하면 그만이다." "본질주의 분류학에서 생물계는 종의 영역이 가장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고, 종마다 저마다의 경계선과 장벽이 있었다. 그러나 다윈의 개념 속에서 생물계는 다윈적인 좌표 체계처럼 각각의 특성을 지닌 개별 생물체가 독립된 위치를 차지했다. 이는 생물계가 무한한 개체로 이루어진 점들로 구성되었음을 뜻한다."(151-2)


"라마르크는 생물이 하등에서 고등으로 진화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라마르크의 도식에서 자연계의 형성은 가장 단순한 생물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서로 다른 환경의 자극을 받고, 일부 기관은 실용성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대대로 유전되어 더욱 복잡하고 고등한 생물이 출현했다. 그러나 라마르크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생물이 정말 가장 하등한 것에서 가장 고등한 것으로 진화했다면 이 세상에는 왜 가장 고등한 생물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물들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 것일까?" "라마르크는 종이 끊임없이 우수하고 완벽한 쪽으로 변화 발전한다고 여겼지만, 다윈은 동의하지 않았다. 다윈은 종이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기준에서 갈수록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특정한 환경에 점점 더 잘 적응하게 되는 것이고 생존 환경에 맞춰서 완벽해진다고 주장했다. 결코 종이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앞으로만 죽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157-8)


"다윈이 원래 『종의 기원』에서 말한 자연선택은 동일한 종 사이의 경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개념을 라마르크의 진화표 및 라마르크가 주장한 진화 방향과 결합시켜 서로 다른 종 사이의 경쟁으로 바꿔 놓았다. 이는 19세기 후반부터 오늘날까지 인간의 사회 관념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등 생물일수록 쉽게 도태되고, 고등 생물은 하등 생물을 도태시키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등 생물을 도태시킬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헉슬리 등이 라마르크의 목적론적 진화표와 다윈의 자연선택을 같이 엮으면서 불변의 진리로 간주되는 새로운 존재론이 탄생했다. 비록 하느님의 의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진화론에 따르면 결국 가장 완벽하고 똑똑한 인간이 이 세계를 정복해, 불완전하고 낙후한 모든 종을 없애는 이상적인 상황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에 의하면 불완전하고 낙후한 종은 자연선택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했다."(159-61)


6 다윈의 해명: 『종의 기원』 7~9장


# 다윈의 이론에 대한 문제제기들

1. 점진적 진화 이론이 맞다면 초기의 아주 작은 변화가 어떻게 생존에 도움이 되겠는가? 가령, 다른 개체들보다 0.1센티 목이 길어진 사슴이 정말로 생존에 유리한가?

→ 20세기에 이르러 돌연변이설이 점진적 진화를 대체한다.

2. 진화는 우세뿐만 아니라 열세의 측면도 갖고 있지 않은가? 가령, 목이 길어져 물을 마실 때 취약점이 노출되는 기린은 정말로 생존에 유리한가?

→ 생물의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태적인 생태계 안에서 진행되는〉 생물과 생물 사이의 관계이다. 즉, 현재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한 것이다.

3. 진화론은 동어반복이 아닌가? 현존하는 생물이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는 '정해진' 결론에서 생물은 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는 전제를 끌어오지 않았는가?

→ 근거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 100년간 다양한 실험이 행해졌다.

4. 자기를 희생하는 이타주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 진화는 개체 단위가 아니라 유전자 단위에서 일어난다.


7 인류 문화와 종의 진화


8 진화론의 함정과 영향


"전체적으로 봤을 때 다윈의 위대한 공헌 중 하나는 인간과 동물, 심지어 기타 생물과의 경계선을 허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이르러 다윈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면서 문화인류학이 태동했다. 문화인류학은 종교와 다윈주의가 인간 이해에 대해 전과 다른 길을 가길 바라는 데에서 출발했다. 종교에서는 인간을 하느님의 숭고한 의지가 반영된 창조물이자 산물로 여긴다. 반면 다윈은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동물성을 감추는지 아는 데 불과할 뿐이며 여전히 동물성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고 격하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새로운 문화 개념을 수립해 인긴과 동물의 차이점을 분석하고, 또 인간이 어떻게 다른 동물의 천성이나 본능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을 개척했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문화인류학이 세운 기본 가설에서는 인간이 비록 동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문화를 통해 개조할 수 있는 부분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내세웠다."(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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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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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은 성경적이었으며, 교부시대의 지속되는 업적 중 하나는 언어와 영감 면에서 성경적으로 사고방식을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교회와 서양 문명에게 성경에 대한 통일되고 일관된 해석을 제공했다. 즉, 이것은 성경의 최초 독자들을 무시하는 해석은 교회의 책도 아니고, 서양 문학, 미술, 음악의 상상력이 풍부한 원천도 아닌, 단지 파편들의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토대로, 기독교 예배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성경(또한 성경에 대한 초기 해석들)으로부터, 곧 역사, 제의, 문헌으로부터 사고한다. 기독교 사상은 교회 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시편 암송 같은 경건 활동으로 유지되고 예배, 특히 정기적인 성찬식 참여로 양분을 얻는다. 이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개념과 관념은 그것들이 가리키는 대상물 자체인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실천에 더 깊이 침잠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목적은 이해뿐 아니라 사랑이었다."(22-3)


1 기독교 사상의 토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최초의 기독교 문헌들은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2세기 중반에 이르러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적으로 외부인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책을 쓴 사람들은 변증가들apologists로 불렸고, 이러한 맥락에서 변증apology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삶과 신앙 방식에 대한 방어와 설명을 의미한다." "최초의 변증가들 중에서 가장 명석한 사람은 2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순교자 유스티누스였다." "유스티누스는 기독교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 사람들을 대상으로 몇 권의 책을 썼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들을 위해서도 방대한 책을 한 권 남겼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두 종류의 비판자들을 동시에 다루어야 했다. 하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기원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후자의 성경(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이라고 부른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성경으로 삼았다."(31-2)


"켈수스가 보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났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한 역사적 인물 속에 나타난 계시의 문제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된 것이었다." "켈수스가 신약성경을 읽음으로써 깨달았듯이, 기독교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내려왔고 인간들이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면, 세상의 근본적인 질서와 구조는 돌이킬 수 없이 방해를 받을 것이라고 켈수스는 말했다. W. H. 오든의 기억할 만한 시구(詩句)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영원한 존재가 일시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고정되고 불변한다. 영적 실재는 지상의 삶을 지배하는 강제력에 종속될 수 없다. 켈수스는 이렇게 썼다. 〈만일 당신이 지상에서 대단히 의미없는 어떤 것을 바꾼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뒤집고 파괴할 것이다.〉"(37-8)


"교회사에서 가장 용감하고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가 켈수수의 『참된 교리』에 대응하여 『켈수스에 대항하여』라는 상세한 반박서를 저술했다." "켈수스는 정신의 고양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감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에서 돌이켜, 일련의 정신적 단계를 거쳐 하나님을 향해 상승해야 한다. 또 다른 비판자의 주장처럼 〈지적인 문제는 지적으로 알 수 있고 감각적인 것은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주장에 대해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정신의 고양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적 인물 속에서 인간들을 향해 내려오심으로 시작한다는 주장을 한다. 〈나는 켈수스가 인용한 플라톤의 주장이 고귀하고 인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로고스)이 모든 인간과 접촉하기 위해 육신을 입었다고 성경이 주장할 때, 성경이 인류를 위해 더 많은 애정을 보여주는지 어떤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38-40)


"오리게네스는 두 종류의 보는 방법을 구별한다. 인간이 물리적 대상을 감지하는 일반적 방법과 하나님을 보는, 곧 아는 영적 방법이다. 〈육체적인 것을 보기 위해선 그들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사물에 집중하는 눈〉만 필요하다." "하지만 〈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무엇이 요구된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할 때 그것이 보이려고 의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나타났을 때 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했고,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해야〉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른 예언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바로 은총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마음의 눈은 그가 하나님을 보는 원인일 뿐 아니라 의로운 사람에게 자유롭게 제공된 하나님의 은총이었기 때문에,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이다.〉"(47)


"사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 앞에서 그들에게 〈예수와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우리에게는 낯설게 들리니,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싶다.〉 교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뿐 아니라 외부인들에게 쓴 글에서, 가장 초창기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예배와 관행, 기도와 교리 교육, 성경의 말씀과 이미지와 이야기 속에서 전해진 것이 확고한 지적 토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것이 요점이다. 즉, 기독교의 이야기는 일군의 사상이나 원리로 축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개념체계도 복음주의 역사를 대체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5세기 로마의 감독이었던 대 레오가 썼듯이, 기독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신비 위에 세워진 종교〉다. 기독교 사상은 어떤 독창적 사상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며, 어떤 중요한 영적 통찰력에 의해 양분을 공급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의 한 인간의 삶에서 비롯되었다."(51-2)


2 기독교의 예배: 놀랍고 피 없는 희생제물


"유스티누스는 성찬식에서 교인들이 살아 있는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이라고, 그들이 먹는 음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 요점은 기독교 예배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축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을 함께 기억하는 기념 식사가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편 22편 설교에서 말했듯이 예배는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현재의 것으로 만들며, 이런 식으로 그것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요점은 그 예배가 명백히 삼위일체적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존재하기 전에도, 기독교 기도들은 성삼위일체를 초청했다. 유스티누스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우주의 아버지께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찬양과 영광의 기도를 올려 드린다〉고 말한다. 유스티누스가 말하는 것은 초기 예배에서 빵과 포도주에 대한 기도 속에 메아리친다."(60-1)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살아 있는 제물로 제시되었다." "예배에서 이를 반복적으로 기념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의 상상력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와 친밀한 관계로 이끌었다.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경험의 명백한 사실로서 말이다. 5세기 로마의 주교였던 대 레오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화해를 위해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우리는 단지 과거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알 뿐 아니라 현존하는 사역의 권능 안에서 경험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문이 집필되기 전, 성경에 대한 학문적 주석이 나오기 전, 은총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이나 도덕 생활에 대한 저술이 출현하기 전, 교회의 성찬식에 살아서 현존하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바치는 경외와 숭배가 존재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에 선행했다."(64-5)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집단적 행사였다. 감독과 다른 성직자들, 이웃과 친구들, 가족 등 모든 사람이 맡은 역할이 있었다. 매년 늦겨울과 봄에 반복될 때마다 엄격한 심사, 혹독한 금식, 낭랑한 신조 낭독, 축귀의식, 침례는 그 경험을 더욱 고양시켰다. 세례식은 장엄한 기독교 행사였다. 그리고 이웃과 친구들이 한 사람씩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을 뿌리거나 붓지 않고 물속에 잠겼다. 기독교는 빵과 포도주, 물, 기름처럼 사물과 관계가 깊다. 기독교 신앙은 사물들과 그것들을 사용하는 행위 속에 담겨 있다." "세례식의 물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논의에서, 하나님은 보고 만질 수 있는 한 인간을 통해 알려진다는 기독교의 핵심적 확신이 이제 물과 기름, 빵과 포도주, 우유와 꿀, 소금과 성인들의 뼈, 그리스도의 몸이 닿았던 성지(聖地), 그리고 성상처럼 만질 수 있는 다른 물건들로 확장된다."(68-9)


3 성경: 현재를 위한 하나님의 얼굴


"자신의 대표작인 『잡록』Stromateis에서 클레멘스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유사성에 대한 논의는 현재 알려진 모습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알려줌으로써, 예기치 못한 주장을 시작한다. 그는 플라톤의 유사함이 형상이라는 성경적 개념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가 읽은 창세기에서 〈형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될 때 인간이 받은 것을 가리키며, 〈모양·유사함〉은 인간의 삶이 열망하는 목적을 가리킨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것의 기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이 가능하다. 유사함(모양)이라는 주제를 도입함으로써 클레멘스는 자신이 철저히 그리스인임을 보여주고, 최고의 철학자 플라톤에 대한 당대의 철학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하지만 창세기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클레멘스는 논의를 성경의 하나님께로 전환한다."(86-7)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변형을 요구한다. 클레멘스는 하나님과 유사함·모양을, 특히 〈그리스도 따르기〉라는 측면에서 해석함으로써, 논의 전체에 독특한 성경적 광택을 부여한다. 그는 사도 바울을 인용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목적, 곧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절은 초기 기독교 사상에 헬레니즘 정신이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에 대한 증거로 여겨져 왔다. 전체 구절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헬레니즘 도덕 전통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 닮기(모양)란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클레멘스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그의 손에서 헬레니즘의 개념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빌려온 새롭고 이국적인 맥락 속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유사함〉은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뜻이다."(87-8)


"성경은 〈우리 신앙의 토대이자 기둥〉이라고 이레나이우스는 말한다. 성경이 기이한 신학 프로그램을 위해 분할되고, 성경 본문이 영지주의자들처럼 자의적으로 사용된다면, 성경은 폐쇄적인 책으로 남을 것이며 〈그것들 안에서 진리를 찾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모든 것을 붙들고 있는 뼈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성경은 마치 설계도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배열된 모자이크처럼, 혹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임의로 가져온 구절들을 함께 묶은 후 그것을 호메로스의 작품이라고 상상하면서 재구성한 시처럼 모호하다." "이레나이우스의 개요는 매우 담대하게 설정되어 있다. 성경해석에 대한 그의 접근이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것은 후대의 모든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아리우스에 대항하는 아타나시우스, 펠라기우스에 대항하는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네스토리우에 대항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읽든, 우리는 각 구절들을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95)


4 삼위일체: 항상 그의 얼굴을 구하라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성경에서 주어진 언어와 교회의 관행, 특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식에 의해 형성된 확신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탐구하면서 힐라리우스는 하나님을 먼저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통해 알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에야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힐라리우스의 다소 수수께끼 같은 언어 배후에 모든 기독교 사상에 스며 있는 하나의 진리가 놓여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신 것, 초대교회가 경륜economy이라고 불렀던 것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질서와 정리를 뜻하는 이 그리스어 단어는 신학적 담론에서 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한 성경적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 있는 자기노출을 의미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힐라리우스의 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115-6)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없다.〉 힐라리우스는 부활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무언가를, 곧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부활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는 보다 충격적인 주장도 제기했다. 일단 예수가 부활하자 도마는 〈신앙의 모든 신비를 이해했다.〉 이제 부활의 관점에서, 도마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활 후에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oneness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쉐마를 계속 암송할 수 있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은 〈제2의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나 신적 본성의 통일성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독한 하나님〉이나 〈외로운 하나님〉이 아니라는 인식이었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혼자가 아니라고 힐라리우스는 말한다."(118)


"삼위일체에 대한 책을 집필했던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삶의 특정한 행위들과 성령의 사역을 연결하는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태어났고, 성령은 그의 선구자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성령은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고, 성령은 그를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고, 성령은 그와 동행한다. 그리스도는 승천하고, 성령이 그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레고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성자만의 활동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령의 현존을 통해 확증되고 중개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썼다. 〈신적 본성에 관해······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성부께서 아들과 협력하지 않고 혼자서 어떤 일을 행하시거나, 아들이 성령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행동한다고 배우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와 관련되고 우리의 상이한 개념에 따라 지칭된 모든 신적 행동은 아버지 안에서 기원하며, 아들을 통과하고, 성령에 의해 완성된다.〉"(128)


"하지만 성령의 개별성을 방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성경이 두 가지 〈보냄〉, 곧 아들의 보냄과 성령의 보냄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핵심 본문은 갈라디아서 4:4-6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보냄이 아들의 보냄 못지않게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이 본문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듯이,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보냄을 받거나 오순절 날에 교회 위에 부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처럼 〈영원부터 감추어진 것이 시간 속에 나타났다.〉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성령은 역사적 자료요 경험적 사실이었다."(128-9)


5 그리스도 인성의 비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설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난 인간이었고, 동시에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증거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런 주장의 어떤 것을 불쾌하게 여긴 이들 중에서 가현설주의자들Docetists은 그리스도가 오직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그의 인간적 외모는 단지 겉모양만 그렇게 보였을 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극단에서, 에비온파 같은 집단은 그리스도가 단지 고대의 현인들이나 예언자들처럼 고귀한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신성을 부정했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의 중심 전통은 그리스도가 온전히 신이며 온전히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5세기에 발생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논쟁은 교회의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명확히 하려고 살았던 사상가들의 진정한 노력이었다."(140-1)


"요한복음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키릴로스는 힐라리우스와 다른 차원에서 부활을 바라보았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독특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인류의 첫 열매로 드렸다.·····그는 우리를 위해 인류가 예전에 알지 못했던 길을 열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 〈인간 본성은 죽음을 파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세상의 환란보다 우월하고 죽음보다 〈강하다.〉 따라서 그는 죽음과 부패를 정복할 수 있었던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자신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는 부활의 권능을 우리에게까지 확대한다. 그런 후에, 키릴로스는 다음 문장을 추가한다.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정복했다면,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으로서 정복했다면, 우리도 그 안에서 정복할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오신 두 번째 아담이기 때문이다.〉 키릴로스에 따르면, 예수의 인성이 그리스도를 독특하게 만든다."(146-7)


"이전 작가들은 예수께서 탄원하신 말씀, 곧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를 가설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진정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스도 기도의 두 번째 부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가 이해되느냐고 묻는다. 동시에, 이 설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가 그 잔을 마셨다는 것이라고 그는 언급한다. 막시무스가 보기에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저항이나 공포가 아니라 〈완벽한 동의와 일치〉를 표현한다.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고, 이런 식으로 〈신적인 의지에 대한 그의 인간적 의지의 최고 동의〉를 보여주었다."(154)


"막시무스는 복음서에 또 다른 명령, 곧 또 다른 〈내게 이루어지이다〉가 있다고 제안한다. 즉, 인간 그리스도의 고통 말이다.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는 이러한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의도한다." "고통의 잔을 받은 것은 그의 자유로운 행동이었다. 영원한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연합하여 의도했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의도하신 것이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자신이 새로운 종류의 인간임을 보여주신다. 인간의 의지는 신적인 의지와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덜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더 인간적이다. 키릴로스처럼 막시무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인간이 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스도의 삶은 새롭다고 막시무스는 말한다. 〈지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놀라우며, 다른 것들과 비교할 때 낯설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았던 사람의 새로운 에너지를 그 자체 안에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156-7)


6 천지창조 이야기: 처음에 주어진 끝


"창세기에 대한 기독교 주석가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중, 〈태초에〉라는 단어였다." "4세기 후반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리우스는 〈태초에〉라는 단어에 그리스어 arche의 의미를 이용한다. 〈그것은 적절한 시작이다. 세상의 형성에 대해 말하려는 사람은 가시적 사물들의 질서 속에서 지배적 영향을 행사하는 원리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어 arche는 단지 〈시작〉, 곧 〈때〉를 의미할 뿐 아니라,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원리〉도 의미한다. 서론도 없이 바실리우스는 청중을 그 원리로 이끈다. 창세기의 설명은 누군가 상상하듯이 세계가 자발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먼저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과 친교 및 친밀함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볼 수 없다.〉 우주론 연구는 영과 관련된 것으로 시작한다."(164-7)


"시작은 또한 목적end을 내포한다. 단지 세상이 끝날end 것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가 〈유용한 목적〉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창조는 〈독단적 힘〉이나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예술적 이성〉의 작업이다. 즉, 창조에 목적이 있다는 것보다 더 도전적인 교리는 성경에 없다. 바실리우스도 창조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작업이며, 세계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에 따라 섭리적으로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창조는 마지막 순간에 사물들에 영향을 끼친다. 태초에 하나님이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고 바실리우스는 말한다. 창세기는 자체 내에 성장과 발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생명계의 탄생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땅의 흙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적절한 시간 내에 새로운 피조물들이 정상적으로 발전하도록 만들었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다."(168-9)


"그레고리우스는 신약성경에서 직접 인용한 인간의 세 가지 특성을 소개한다. 첫째는 로고스(말씀) 혹은 이성이다. 이것은 그가 요한복음 1장에서 가져온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썼던 사도 바울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셋째는 사랑이다. 이것은 그레고리우스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는 요한복음과 〈하나님은 사랑이자 사랑의 원천이시다〉라는 요한1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사랑이 없다면 〈그 형상의 흔적은 뒤틀린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는 인성의 회복뿐 아니라,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일체의 온전한 설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끝은 시작 속에서 주어진다〉라는 그의 말에서 완성과 시작이 상보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창조는 선물이자 약속이며,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민 태초에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된다."(180-1)


"〈인간의 창조〉에 대한 모든 온전한 설명은 인간의 파괴,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타락과 악의 완고함을 다루어야 한다. 그의 논문 중간 부분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경험에 관심을 보이고, 비록 간략하지만 인간의 비극적 삶을 논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생생한 언어로 죄의 결과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 안에 불순종이란 잡초의 씨를 뿌린 삶의 교활함 때문에, 우리 본성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보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죄 때문에 변형되고 흉하게 되었다. 우리 본성은 악한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한다. 이런 이유로 인간 본성은 죄의 아비가 거느리는 악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인간 본성은 악에 의해 〈약해졌고, 무기력해졌다.〉 인간은 〈악으로 돌아서는 것처럼 쉽게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인간은 죄를 짓기 쉬우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했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죄는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 안에 존재한다.〉"(181-2)


7 인식의 길: 믿음의 합리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증인의 정직에 의존하는 역사적 지식과 확실하고 명백한 수학적 지식을 구별한다. 7X7=49는 구구단을 암기한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지식은 우리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항상 간접적이고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한다. '믿는다'라는 단어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 개연성 있는 지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역사적 지식에 대한 적절한 단어는 〈믿음〉이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수학적 지식뿐 아니라 역사적 지식을 위해서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그는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 간의 차이도 유지하고 싶었다. 역사적 지식의 독특한 특징은 그것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증인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martyr가 기독교 사전에서 거룩한 단어가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순교자martyr는 자신의 말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이다."(195-6)


"역사적 지식은 증인을 요구한다. 그리고 증언은 증거하는 사람의 말에서 믿음과 확신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에 대한 토론에 '권위'라는 단어를 도입한다. 그는 〈우리는 권위에 우리의 믿음을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절에, 권위라는 단어는 우리 시대의 용법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라틴어에서 권위auctorita는 auctor(이 단어는 영어의 author에 해당한다)에서 기원했고, 원래의 의미는 유언장이나 다른 법적 서류의 타당성과 진정성을 보증했던 사람을 가리켰다. 권위는 어떤 사람, 예를 들어 행정관이나 유언장 작성자의 그러한 특성, 곧 어떤 사람이 말한 것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특성을 가리켰다. 이런 의미에서 권위는 인간 삶과 사회에 공통되는, 없어서는 안 될 측면이다. 우리가 참된 것으로 인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성실과 신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196-7)


8 지상과 천상의 나라: 하나님이 주님인 백성은 복이 있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이 평화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가 이해했듯이, 평화는 이생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인류가 자신들 안에 건설할 수 있는 평화는 항상 부서지기 쉽고 불안정하며 덧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 땅 위의 평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약속도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평화는 항상 소망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도성이 열망하는 평화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 선지자 하박국에 따르면, 우리가 소망하는 목적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추구할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선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에 뛰어난 매력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땅에 평화를 성취하려는 노력(비록 그것이 연약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223-4)


"하나님의 도성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마음의 갈망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해결될 수 있고, 평화에 대한 희망도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성이 아직 순례 중인 이 삶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온전한 시민이었다. 다른 시민들처럼 그들도 법, 안정, 일치를 존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은 특정한 형태의 강제력 없이는 더불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의 권력, 판사가 휘두르는 칼의 권력, 집행관의 발톱, 군인의 무기, 주인의 징계, 그리고 선한 아버지의 엄격함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자신들만의 방법과 명분, 이유와 유용함을 지닌다. 사람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동안, 사악한 사람들은 특정한 울타리 안에 갇히고, 선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보다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다만 모든 정치제도는 임시적이며, 그것들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228-9)


"『하나님의 도성』 제2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국가론』에서 정치 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한 문장을 인용했다. 〈시민은 공통된 법 정신과 집단적 이익으로 연합된 다수의 사람들〉로 정의된다. 이 정의에서 법으로 사용된 단어가 jus다. 이 단어에서 라틴어 단어 justitia가, 영어 단어 justice가 각각 유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가 정의justice없는 정치 공동체, 공화국,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 정의(定義)를 이해했다고 설명한다. 〈진정한 정의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jus, 곧 어떠한 법, 평등,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공화국은 단지 한 이익공동체일 수 없다. 그래서 공화국은 jus로 함께 묶여야 한다. 단지 공통된 이익에 기초해서 연합된 사회는 기껏해야 폭도나 해적 집단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정의는 없고 오직 도둑질과 무법과 착취만 있다면,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정의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정의와도 관련이 있다."(230)


9 초기 기독교 문학: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행동


"몇몇 기독교 시인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전통적 시로 다시 쓰려고 했다. 잘 맞춘 운율과 시적 어휘를 사용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낯익은 표현으로 종교적 시를 제공하고 싶어했다." "가령, 요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초기 기독교 시는 성경의 단어 〈예언자〉 대신, 라틴어 단어 〈점쟁이〉를 사용한다. 증인에 해당하는 성경의 단어인 〈순교자〉 대신, 라틴어 단어 〈목격자〉를 사용한다. 〈천사〉 대신 〈전령〉을 선택했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그 시인은 〈부활〉이라는 단어는 피하고 대신 〈죽음을 목격하는 것에서 벗어났다〉란 표현을 사용했다. 성경의 단어 〈성전〉은 이교적 단어 〈성소〉로 대체되었고, 〈요구하다〉라는 멋진 라틴어 단어가 〈기도하다〉란 성경적 단어를 대체했다. 이런 변화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늘날 〈이번 주일에 나는 제1침례교회의 컬트에 참석할 예정이다〉라는 표현에서, 기독교 예배를 〈컬트〉라고 지칭할 때처럼 그것은 고대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꺼림칙한 것이었다."(243)


10 초기 기독교 미술: 이것을 다르게 만들다


"고대 기독교 도시들에서 가장 경멸받던 관행 중 하나는 죽은 자를 예배하는 것, 특히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뼈를 숭배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강력한 적이었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를 죽은 자들의 무덤과 비석으로 가득 채웠다〉고 불평했다. 4세기 말 로마 세계의 도시들에는 유물들, 곧 거룩한 사람들의 뼈를 보관하는 성소들이 흩어져 있었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기 위해 이런 거룩한 장소들을 경건하게 방문했다. 2세기 초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와 중보기도를 위해 무덤에 모임으로써 죽은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무덤에, 〈여기에 베드로가 있다〉라는 비문이 적힌 장식판을 걸기 위해서 벽에 벽감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이런 성소에서 성인들의 고귀한 몸을 담은 석관을 바라보기 위해 신자들이 앉아 있던 의자와 제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뼈들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사람의 현존을 분명히 보여주었다."(265)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의 견해에 따르면 성상금지는,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역사상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살았던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진 성육신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 신앙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가능했다. 〈몸도 없고 형태도 없이 그의 본성은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하며,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는 그가 자기를 비우고 본질과 본성에서 종의 모양을 취하시고 육신의 몸으로 발견될 때, 당신은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놀라운 낮아짐, 그의 동정녀 탄생, 그의 요단강 세례, 다볼산에서의 변화, 우리를 고난에서 자유롭게 했던 그의 고통, 죽음, 기적을 묘사하라. 그의 구원의 십자가, 무덤, 부활, 승천을 보여주라.〉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묘사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느냐고 요하네스는 말했다."(271-2)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 모두 물질이 다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성상파괴론자들의 경우, 물질이 거룩하게 되는 최고의 예는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다. 성찬식에 사용되는 그 물질들을 사제가 축복함으로써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된다.〉 하지만 성상은 보다 흔하고, 축성기도를 통해 축성되거나 성화되지 않았다. 성상옹호론자들은 성상이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축성기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테오도르는 말한다. 〈그것의 모양만으로도 성화聖化되기에 충분하다.〉 나무와 물감은 나무와 물감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것은 나무 위에 그려진 형상이며, 성상에 의해 묘사된 인격이다. 그것이 그 성상을 귀하게 만든다. 그 형상이 닳거나 지워지면, 그것은 더 이상 성상이 아니고 더 이상 거룩한 물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인격의 형상을 담고 있는 한, 그 성상은 거룩하다."(288)


11 윤리의 삶: 하나님 닮기


"기독교가 등장했을 때,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잘 발달된 도덕 형성체계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것의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이 의미했던 행복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말은 〈좋은 느낌〉이나 특정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환경이 변하거나 행운이 개입하면 왔다가 떠나는 일시적인 상태다. 고대인들에게 행복은 영혼의 소유물이었다. 즉, 사람이 획득한 어떤 것, 한번 획득하면 쉽게 빼앗길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행복은 인간 삶의 최고 목적, 고대철학의 언어로 말하면 자연과의 일치 속에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가리켰다. 도덕철학은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즉, 가능한 것을 다루었다. 이런 이유로 고대 윤리학은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 개념에 따라 사람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보다는, 특정한 방식의 삶을 통해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303)


"그리스인들에게 도덕 생활의 목적은 〈신 닮기〉이고, 기독교 사상가들은 〈하나님 닮기〉나 〈신화〉(神化)라는 언어를 환영했다." "클레멘스의 동시대인들에게 〈하나님 닮기〉는 덕의 실천을 의미했다. 기독교 작가들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을 향한 안내자로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는 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닮기 위해 주어진 모델은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한 인간이자 인간의 육신을 입은 하나님인 예수의 완전한 삶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은 모방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가 선택한 하나의 신적 속성은 팔복 중에서 예수가 언급한 가난이다." "겸손 역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정말로 그것은 참된 덕의 징표다. 오직 겸손을 통해, 우리는 오만과 자만이라는 독특하게 인간적인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짐으로써 〈하나님을 닮는다〉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한다."(306-7)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인내에 대한 글을 썼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의인과 죄인 모두에게 빛을 비추신다. 하나님은 땅이 가치 있는 자와 무가치한 자 모두에게 열매를 맺도록 허락하신다. 그는 인간의 죄와 잘못을 참으시고, 죄인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 때도 자신의 진노를 참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내의 가장 가시적인 징표는 성육신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한 여인의 자궁 속에 잉태되도록 허락하셨고, 그리스도의 탄생 전까지 인내 속에 여러 달을 기다리셨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인내의 특이한 징표는 참을성이나 용기가 아니라 희망이다.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인내심이 없는 것은 희망 없이 사는 것이다. 인내는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미래를 지향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의 징표는 현재의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선을 기대하는 열망이다. 따라서 인내는 사랑을 포함한 다른 덕들의 열쇠가 된다."(313-5)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기독교적 삶의 출발점(뿐만 아니라 종점)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다른 기독교 사상가들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행복이 〈하나님 닮기〉 안에서 발견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처럼 그도 하나님 닮기가 신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산다는 뜻임을 잘 알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의 생명과 빛과 성결로 충만해진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도전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삶의 원천에 대해 보다 체계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그의 저작들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돌이켜서 선을 꼭 붙들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주목한다. 또한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그리스도인의 삶의 끈질긴 내적 갈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십계명, 산상수훈, 자유의지는 한 사람을 덕스럽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못하다. 사람은 선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사랑의 밧줄로 하나님께 묶여 있어야 한다."(316-7)


12 영의 삶: 감각적 지성의 지식


"초대교회에서 읽었던 그리스어 역본 아가서에서, 신부가 자신의 연인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사랑에 상처 받는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신랑의 〈화살〉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을 관통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 박힌 멋진 화살은 바로 그리스도, 예언자 이사야의 〈갈고 닦은 화살〉(선택된 화살)이라고 그는 썼다. 영혼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로 상처 입을 때 그것은 불타오르고, 그 행복한 구절에서 〈보답하는 사랑〉을 제공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신비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런 정서를 수세기 후에 다시 되살렸다. 〈사랑은 보답으로 사랑을 요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하나님께 데려간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는 불이 붙었고, 위로 상승했다. 우리는 더욱 붉게 타오르며 위로 상승했다. 우리의 마음이 상승한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음의 제단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사랑의 타오르는 불〉이라고 말한다."(323)


"『신곡』 '천국편Paradiso'에서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정확히 이런 길〉, 곧 성육신을 의도하셨느냐고 묻는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자신이 지금 그에게 설명하려는 것이 사랑의 불꽃 속에서 지성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려져 있다〉고 상기시켜 주면서 자신의 답변을 시작한다. 우리가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투신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도 못하고, 관음증 환자나 구경꾼, 호기심 추구자로 남는다. 하니님에게 모순은 신성모독이다. 오직 우리가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를 하나님께로 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물의 진리를 관통할 수 있다. 사랑이 부재하면 우리 마음은 진리를 단단히 붙잡지 못하고, 오직 한 가지씩만 시도하면서 유치하고 미성숙한 채로 남는다. 단테가 말했다. 인간은 〈지성과 사랑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이 마지막 장의 주제는 사랑임에 틀림없다."(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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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jsdirtjdwjs 2022-02-0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 단계
http://www.godnara.co.kr/bbs/board.php?bo_table=03_01&wr_id=119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단계를 배워야 참 하나님을 알게되는데 천국을 소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배워서 참 하나님께 나아 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섯단계을 모두 깨달으신분들은 참 하나님을 알게되어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비밀들과 구원의 해를 알게 되실겁니다.
 
바울
귄터 보른캄 지음, 허혁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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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바울 서신에 나타난 바울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리스도인이며 선교사인 바울을 묘사할 때 아직도 바리새주의에 의해 대표되고, 이제는 예수의 부활에 의해 실증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선조들의 율법에 충실히 머물러 있는 확실한 바리새인임을 강조하는 반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가장 고유한 거룩한 전통들을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실제의 바울은 전혀 다르다. 특히 빌립보서에서 분명히 밝힌 대로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義)를 얻으려는 그의 옛 바리새적인 열심을 버렸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오는 구원을 얻기 위해 그것을 '해로운 것', '배설물'로 여겼다. 물론 이 분명한 차이 때문에 사도행전은 원시적이고 유대주의적인 경향을 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의 견해들이 가능하게 된 것은 율법의 타당성 문제를 둘러싼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투쟁이 조정되고, 율법이 옛 편협한 제한성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23)


"특히 주목할 점은 누가의 작품 전체의 어느 한 구절에서도 사도 자신의 서신을 알았거나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미루어 사도행전이 성립되던 시대에는 광범위하게 교회 영역들에 유포되어 있던 대표적인 바울 서신 수집록이 아직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물론 개개 서신들은 이미 일찍부터 이웃 교회들 사이에 교환되고 있었다. 고대 교회의 다른 저술가들이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수집록의 확실한 흔적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다가, 1세기 90년대부터는 점점 증가된다. 사도행전이 아직 서신들을 모르고 있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사도행전 역시 대략 이 시대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에 앞서 저술, 완결되어 있던 누가복음서─이것은 70년 이후에 저술된 세 공관복음서들 중 마지막 것인데─가 80년대에 기록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연대를 가장 근거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누가는 직접적인 증인이 아니라 이차적인 보고자에 해당한다."(25-6)


"사도의 문서적 유산이 오직 서신들뿐이라는 사실은 역사적인 우연일 뿐 아니라 중요한 내용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수십 년 뒤에 나온 마가복음서 기자와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같이, 가령 어떤 복음서를 써서 나사렛 예수의 역사를 전할 생각을 가졌었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 또한 그는, 가령 우리가 그와 동시대의 유대인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고대 그리스도교의 문필가들에게서 보는 바와 같은, 구약성서의 개별 문헌들에 대한 주석서를 쓰거나 고대 교회 이후 많이 선을 보인 교회제도에 관한 것, 신학적인 논문, 교리 지침서를 저술하려고 생각했다고 볼 수도 없다." "모든 순수한 편지처럼, 바울의 서신들도 특정한 기회에, 그 때를 위해, 구체적인 동기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쓴 것이다." "바울 자신은 이 편지를 임시변통으로, 헤어져 있어서 당장은 이룰 수 없는─이미 불가능하게 되었거나 아직은 가능치 않은─만남에 대한 불충분한 대안으로 생각했다."(27-8)


제1부 생애와 활동


"종교적으로나 세계관적으로 극도의 분열 상태에 있던 고대 말기 주변 세계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유대 종교의 방사력과 유인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시국가의 안온한 영역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세계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정도로 확장되었으며, 이와 함께 인간 자신은 개별화되었다. 아직 옛 신들을 위해 신전이 세워지고 계속 제사와 제물을 드렸으나 그것들은 진부한 것이고 신들에 관한 신화들은 쓸모 없게 되었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위한 보호와 축복, 구원과 속량에 대한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이미 무력해졌다. 도처에서 옛 종교들과 특히 동양으로부터 쇄도해 오는 새로운 종교들의 융합과 혼합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이질적이고 복잡할수록 그만큼 더 매력이 있었다. 운명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과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는 밀의(密儀) 종교의 의식(儀式)과 구원의 교리가 지나치게 판을 쳤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교는 전혀 다른 것,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고자 했다."(44)


"디아스포라 회당의 선교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원칙들에 따라 수행되었으니 이방 주민 중에 유대인 공동체에 가담한 '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유일신론적인 신앙 고백, 최소한의 의전적 계명들(안식일 계명, 음식물 규정 등), 그리고 율법의 윤리적인 기본 요구들을 이행하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에게는 물론 할례도, 그와 함께 유대 민족의 완전한 지체로 간주되는 '개종자(Proselyt :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의 신분으로 들어오는 것도 강요하지는 않았다. 율법에 대해 엄격한, 바리새파의 지도하에 있는 팔레스틴 유대교는 이 관례를 배교적인 행위라고 판단하고 모든 사람에 대한 할례의 요구를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파 역시 이방 선교에 열중했다. 물론 디아스포라 유대교에 비해 그 성과가 미미했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로써 이미 유대교적 이방 선교의 영역에는 할례에 대한 문제로 나뉜 두 방향이 서로 반목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47-8)


"헬레니즘 파는 그리스도에 대한 극히 혁명적인 주장했으며, 이러한 이해는 유대교적인 엄격한 율법 이해와 충돌을 일으켰고, 성스러운 전통들과 성전 예배, 선택된 백성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적인 주장을 문제시했다.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인 바울에게─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그리스도인을 박해하도록 자극한 이유들이다." "여기서 예수의 메시아됨에 대한 신앙이, 엄격한 유대교도에게는 충분한 박해의 이유가 되었다는 널리 알려진, 그러나 잘못된 가정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눈에도 과오를 범하고 있는 기괴한 하나의 유대교 종파로 보이기는 했을 것이나 결코 신성모독적인 이단은 아니었다. 이런 '예언자'를, 혹은 저런 '예언자'를 메시아로 믿은 추종자들의 집단은 이 밖에도 유대교 내에 적지 않은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유대교 측으로부터 박해받고 추방당해야 했던 일은 없었다."(53)


"바울이 후기에 에베소에서 활동할 때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글은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들의 선동으로 인해 유발되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전하는, 율법에 구애되지 않는 복음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직 선택된 유대 민족의 일원이 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이들의 공격과 더불어 동시에 그의 사도직도 문제시되었다. 아무도 이 직책을 그에게 위임한 이가 없다는 것이다. 적대자들이 비방하는 내용은 바울이 소식을 변조하고 자칭 사도가 되려는 독단적인 월권을 저질렀다는 두 가지였다. 그 때문에 그는 스스로 공격하면서 동시에 그의 서신에서 아주 날카로운 어조로, 이방인들을 위한 그의 복음의 진리와 그의 사명의 신적인 근원이란 두 가지 점을 변호했다. 이 둘은 불가분의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이것들은 같은 내용의 두 가지 측면이고, 그 배후에는 하나의 신적인 의지의 권위가 있다."(57-8)


"예루살렘 회합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그의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원사도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울의 복음을 온전히 그리고 그것의 모든 결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마치 신에 의한 기적적인 작용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직접적인 통찰이 순수한 신학적인 논증들보다 더 강하게 관여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가 회심하고 소명을 받은 이래 바울에게 거의 의심 없었던, 그리고 후에 그의 서신들에서 전개된 신의 새 창조로서의 교회에 대한 인식들, 즉 교회에서는 이미 유대인도 없고 모두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갈 3, 28)라는 인식들이 무조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제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유대인계 그리스도교 교회와 유대교인들에 대한 설교에서는 오히려 지금까지의 것이 그대로 계속 타당하고 안디옥 사람들은 그들대로 이 이상 더 강요받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렇게 할 사람도 없었음이 분명하다."(82)


"바울은 개체 교회를 넘어서 언제나 곧 나라와 지방들을 생각한다. 방금 세워진 교회일지라도 모두 그에게는 각기 그 모든 지방을 위해 있는 것이다: 가령 빌립보 교회는 마게도냐 지방을 위해(빌 4, 15),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위해(살전 1, 7-8), 고린도 교회는 아가야를 위해(고전 16, 15 고후 1, 1),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를 위해(롬 16, 5 ; 고전 16, 19 ; 고후 1, 8) 있다." "즉 복음은 단 한 곳에만 선교되어도 스스로 길을 내고 개개 도시로부터 모든 주변 지방으로 퍼진다는 것이다." "남겨두고 간 교회들에 대해 바울이 무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얼마나 그들에 대해 책임지고 있었는지는 그의 서신들이 증명한다. 그러나 그가 이 교회들을 위한 지속적인 염려는 그의 동역자들에게 위임하고 그 자신은 그의 서신들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순간적인 방문으로써 교회들을 지킬 수 있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한다는 그의 원대한 목표는 그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고, 초조하게 했기 때문이다."(100-1)


"바울이 떠난 이후 고린도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고 활동적이었으며 결코 종교적인 가난과 불모에 떨어지지 않았다(1, 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혼돈된 모습을 제공하고 있다. 교회의 풍요로움이 교회에 큰 위험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교회에 당부하면서 또한 예리하게 비판한다. 그가 자세히 언급한 첫 질문(고전 1-4장)은 이미 그 교회가 바울 자신에 의해 닦여진 토대로부터 빗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교회는 경쟁적인 여러 파로 분열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의 통일성이 위협 받고 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전 1, 12)." "그 당파들의 구성과 논쟁의 출발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떻게 싸웠든지 간에 교회 생활에 개입한 열광주의는 바울에 의해 고린도전서에서 처리되어야 했던, 참으로 위험한 현상이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자신들만이 이미 '완전한' 상태에 도달했고, '영'과 '지식'을 소유했다고 자랑했다."(119-20)


"고린도전서 8-10장은 특히 주의할 만하다. 바울은 여기에서 열광주의자들이 자신을 변호하는 모든 거짓 신학적 논증들을 얼마나 단호하게 멸시하고, 제기된 문제들을 신과 주변 세계 앞에 져야 할 다른 사람을 위한 책임이라는 주제 하에서 얼마나 단호하게 다루었는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구원에 참여한다는 신념 하에 주의 만찬이 베풀어진 것은 확실하나 부유한 사람들이 이 만찬에 수반된 공동 식사에서 가난한 자들, 늦게 오는 자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바울에 의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수치스럽게 하는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예배 때 황홀경에서 연설하는 데 몰두하는 영 소유자들의 소란한 경쟁에 반대하고 이성적인 분명한 말로 선포함으로 인해 아직 멀리 있는 자들과 불신자들을 설복하고 그들을 감화시킬 것을 종용했다."(122)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이방 세계의 신적인 이적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의 사도직의 합법성을 변호해야 했었다. 이에 반해 고린도에서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들의 이방인 경쟁자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며 바울과 그의 복음을 멸시하고 드러내 놓고 그에게 도전했다. 그들의 척도들에 의하면,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에 의해 위임된 참 사도의 표지들이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이 표지들이 있음을 주장했고 그것들로 그들의 인상을 교회에 심었다." "이에 맞서 바울이 '자랑'으로 여긴 것은 바로 그의 선포에 의해 신앙에로 일깨워진 교회이며, 그의 나날의 노동의 피로이며 그가 그의 일에서 경험한 수난과 박해의 연속이다. 이것이 그에게는 참 '사도의 표지'이다." "새로운 적들이 고린도에서 교란을 일삼는데 직면해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옹호와 함께 그의 복음과 그리스도인됨의 이해 전반을 위해 싸워야 했다."(124-5)


"자신의 생애사의 마지막 장이 될 예루살렘 여행길에 오른 바울은 '장로들'을 에베소로부터 불러서 예언자적 선견으로 곧 순교하리라는 감동적인 장황한 연설로 그들과 작별한다(행 20, 17-38)."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은 무엇보다도 아주 자명하게 전제된 교회의 장로 제도인데, 이것은 바울 서신들이 아직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세의 것임을 특징지어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별 연설 자체의 문체와 내용이다. 이 연설은 사도의 전체 활동을 회고하면서 그의 마지막을 예측하고 그가 죽은 후에 물어뜯는 늑대처럼 교회를 파괴할 거짓 교사들의 출현을 예고한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울은 그의 순수한 가르침의 전권을 이 장로들에게 계승시키고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양떼의 '관리자들(Episkopoi)'로 선임된 직권자들로서 그들을 임명한다." "이는 후기 교회가 특히 이단 방지 싸움에서 발전시킨 사상들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151-2)


"바울이 구금되기까지의 예루살렘 사건들에 관한 보도들은, 사도행전에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예루살렘 여행 목적, 즉 헌금의 전달과 연결시킬 때에 비로소 투명해진다." "헌금 전달과 함께 이것으로써 바울이 교회에서 가능하게 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의 통일을 과시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물론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그렇게도 큰 실천적이며 신학적인 정력을 가지고 모은 원교회를 위한 이방인계 그리스도 교회들의 헌금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만났는데 바울이 그의 동반자 가운데 유대교인이 아닌 한 사람, 즉 에베소 출신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온 줄 잘못 알고 죽이려고 했다. 그에 대한 소동은 결국 로마 군인이 개입해서 그를 보호 검속해 유대 군중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한다(행 21, 27-36). 그 후 바울은 로마의 죄수가 되었다."(152-4)


"누가가 바울의 재판의 계속과 그의 불법적인 죽음에 관해 알면서도(행 20, 22 이하, 21, 10 이하) 한 마디 말도 시사하지 않은 것은 기이하다. 그러나 누가적인 역사서의 구상, 즉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사마리아를 지나 땅 끝까지 이른 복음의 길을 서술한다(행 1, 8)는 계획을 회상하면, 이 책의 평화로운 마무리는 이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저자는 이 위대한 이방 민족의 선교사로 하여금 로마에서도 그의 위력적인 일을 완수하게 했다. 그리고 특별히 바울의 순교에 관한 침묵이 사도행전의 현실적인 목표 설정을 통해서 이해된다. 사도행전은 신자들을 고무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이방 제국에 대한 변호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이방 제국이 바울의 이 모습에서 그리스도교의 위대함과 평화의 의지에 관한 인상을 받고 로마 관원의 많은 대표들이 바울의 역사 과정에서 이미 보여 준 것과 같은 현명하고 바른 태도를 교회에 대해 취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사도의 실제 최후는 달랐을 것이다."(159)


제2부 소식과 신학


"지상의 예수의 선포와, 바울뿐만 아니라 부활 후의 교회 전반의 그리스도 소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놓여 있다. 이 차이는 생각 없는 사람만이 간과할 뿐이다. 바울은 그저 지상 예수의 설교를 전달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이 차이는 현저하게도 신약성서 문헌들이 각기 달리 보도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복음서들이 단순화된 도식적인 말로, 예수의 죽음과 그의 부활까지 그의 지상 역사 영역에서 일어난 그의 설교와 활동에 관해서 보도했다면, 사도의 소식(서신들, 사도행전, 요한묵시록)에서는 전자의 목표점이 부활 후의 증인들을 낳는 근거와 시초가 된다. 선포자가 선포되는 자로 되면서 그의 지상 역사의 제한성은 제거되었으며, 예수의 말 대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 부활, 마지막 날에 그의 옴에 관한 말이 등장한다. 바울을 이 과정의 제일 첫 책임자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서신들은 역시 우리로 하여금 특히 뚜렷하게 이 놀라운 사태에 직면하게 한다."(164)


"물론 이 변화 과정에는 종교사학적으로 후기 유대교적·묵시 문학적 사상들과 후기 고대 주변 세계의 신화적 표상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지상적인 예수가 신화적인 신적 존재로 바뀌고 역사는 절망적으로 포기되었다는 널리 알려진 주장은 피상적이고 잘못된 것이다." "원그리스도교적 증언들과 고백들, 즉 구약성서적·유대교적인 혹은 헬레니즘적인 언어로 그를 부른 수많은 호칭들이 예수의 이 구원의 의미를 분명히 말해 준다: 메시아, 그리스도, 퀴리오스(主), 사람의 아들(人子), 신의 아들 등. 이 모든 호칭들이 지상적인 예수를 대신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상적인 예수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그의 이름도 우연하거나, 공허한 혹은 바꿀 수 있는 낱말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호칭들은 오직 그만이 신에 의해 세계에서 성취된 구원의 내용과 전달자라는 것을 말한다. 선포되는 말을 듣고 신앙으로 대답하는 자들은 다 함께 이 사건에 소속되고 관련된다."(165-6)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선포를 위해 성별(聖別)되고 부름을 받고 파견되었음을 알고 있다(롬 1, 1 ; 갈 1, 15)." "복음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해 바울은 묵시 문학적인 울림으로 말하고 있다: 〈신의 의가 복음에서 계시된다〉(Apokalyptetai, 롬 1, 17)."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와 같이, 그가 미래적인 사건들을 예고하고 유대교적 묵시 문학에서처럼 환상적으로 세계의 파멸과 새 세대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 이미 지금 복음 자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오고 있는 구원과 파멸의 가능성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원을 가져오는 신의 도래가 그 안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복음 자체가 〈믿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는 신의 능력〉이다(롬 1, 16). 이것은 이미 묵시 문학적 의도에 일치하지 않는다. 유대교적·원그리스도교적 묵시 문학에서 먼 혹은 가까운 미래에 기다려지던 것이 복음에서는 현재가 된 것이다."(169-70)


"아직 실제로 주목을 끌지는 않지만 지적되어야 할 중요한 바울 신학의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즉 그의 신학은 처음과 끝이 서로 어울리는 주제들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배열된 체계로서, 이른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으로 그것을 재생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강하게 반대한다. 많은 학문적인 진술들이 마치 여기에 그런 어려움이 없는 것같이 그의 신학을 다루며 신과 그리스도, 인간, 구원, 성례전, 교회, 마지막 일들과 그와 유사한 것들에 관한 바울의 진술들을 열심히 체계적으로 배열한다. 그들은 흩어져 있는 것을 한데 모아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 수 있으면 있을수록 더 높은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설사 모든 구절을 위해 필요한 증거를 가져다 댈지라도 다음과 같은 단순한 관찰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은 거짓이 된다. 즉 바울의 진술들은 교의학적인 주제들의 체계적인 배열에 있지 않고 거의 언제나 단편적이며 항상 다른 것들과 엉켜 있다는 것이다."(172-3)


"구약성서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서도 율법은 그 원래의 의미상 구원과 생명을 위한 신의 부름이며 처방이다(롬 2, 6 이하 ; 7, 10). 율법은 순종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율법은 십계명으로, 특히 사랑의 계명으로 종합되면서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다(롬 7, 7 ; 13, 9 ; 갈 5, 14)." "그러나 바울에 이르러 바로 이 성스럽고 의롭고 선한 율법(롬 7, 12.16)이 실제로는 이미 구원과 생명에 인도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비로소 부각되었다. 이 의미에서 그는 율법의 보편성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했다." "즉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보기에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실천하는 것도 유혹적으로 지배하는 죄의 세력의 구속에서 인간을 풀어 주지 못한다. 율법은 그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 율법의 지배하에 일어나는 모든 사람의 상실성의 불가피한 이 연대성이 비로소 그의 소식의 본래적 혁명성이다."(178-9)


"바울이 가르치는 의(義)는 신은 의롭다는 일반적인 신학 명제가 아니다. 그의 소식의 특수성은 믿는 자들에게 신의 의(義)를 넘겨 주는 것이다." "신의 의는 경건한 자가 율법의 일들에 의해 얻어내는 '의'와 정면으로, 배타적으로 반대된다. 그가 자신의 열심으로 이루어 놓은 것은 언제나 단지 그 '자신의' 의(롬 10, 3)에 불과하며 결코 신의 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신만이 의롭다고 선언하고 그럼으로써 의롭게 한다. 반면에 인간은 수동적이다. 즉 인간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의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소유격 결합인 '신의 의'는 문법적으로 말해서 주어적 소유격(이렇게 보면 신은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을 배제하는 먼 그의 존엄성에 숨어 버릴 것이다)이 아니라 근원자의 소유격을 의미한 것이다. 즉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그의 의를 마련해 주고 그를 의로 세움으로써, 신의 이러한 선언과 행위 없이는 멸망할 인간으로 하여금 지금의 신 앞에서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194-6)


"'오직 신에 의해서만(solo deo)' 그리고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sola gratia)'에는 만인을 포괄하는 철두철미 새로운 의미가 들어 있다. 신앙을 위한 신의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근거를 두고 율법 없이 제시되었다(롬 3, 21 이하). 그리스도의 속죄 제물에 관한 사상은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신의 언약의 성실에 대한 증거를 보고, 이스라엘의 범죄에 의해 파기된 시내산 계약의 회복에 그리스도를 관련시킨 유대인계 원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바울 자신의 해석에서 곧 완전히 후퇴하고, 그 대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바 현재에서 세계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며 일어나는 신의 행위가 부각된다(롬 3, 26)." "오직 신만이 의롭게 하고 경건한 사람은 신의 은혜에 의지한다는 사상을 통해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한정된 옛 시내산 언약에 철저히 대립되는 새로운 언약 사상을 확언한다."(198-9)


"소식과 고백은 시간과 더불어 영원히 어제에 머물러 보리는 옛 시대의 사건들을 내용으로 갖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그것이 일회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구원 사건으로서 현재와 미래를 규정한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깨워져서 다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죽음이 다시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는 그가 그의 죽음으로 죄에 대해 단번에 죽고 그의 삶으로 그는 신에 대해 살아났음이다〉(롬 6, 9-10; 비교. 14, 9). 복음은 구원 사건을 진정한 의미에서 '현재화'하고 이 사건에 스스로 속한다; 복음은 단지 이 사건에 관한 차후의 보도가 아니다. 복음의 선포와 함께 새로운 창조의 날의 빛이 신자들의 마음에서 빛나기 시작한다(고후 4, 6).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세계에 대한 신의 화해의 행위에 관해 말하면서 동시에 신이 '직책'을, 즉 '화해의 말'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선포가 단지 지나간 옛일의 회상만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미래에 대한 위로이다."(219)


"바울의 모든 역사는 양면에서 협공을 받았다. 한쪽은 율법과 할례, 제의적 의식을 받아들여 특권적인 구원의 백성에 관여하면서 그의 절망적인 길을 다시 타개하려는 시도이고, 다른 쪽은 외견상 반대 방향을 가는 노력같이 보이는데, 즉 모든 지상적인 제약들로부터 벗어나서─파렴치하게 선전되고 실천되는 윤리적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영에서' 새로운 실존을 보려는 것이다. 율법성에 되돌아가는 것과 영적인 체험에 심취하는 것─바울은 이 둘에 대해, 함께 십자가의 말을 부끄럽게 하고 무력하게 하는 것이며, 복음이 믿는 자들을 찾고 만나고 붙잡는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현재를 상상적인 과거 또는 환상적인 '완성'에 넘겨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든 혹은 저렇게든 그의 소식에 만족하지 않는 그의 적들과 비판가들은 함께 절망적인 시대 착오에 빠졌으며, 참된 오늘과 지금을 탈취하는 데 그리고 이와 함께 그의 상대자, 즉 그 말이 상대하면서 해방시키려는 인간을 은혜의 말에서 탈취했다."(252-3)


"묵시 문학의 언어와 표상들이 바울 신학에 끼친 영향은 강하나 이 신학에서 심오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들은 완전히 거세되거나, 대개 단편적으로 또는 통일성 없이 산재할 뿐이다. 그의 종말론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세대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바울의 신학에서 이것에 긴밀하게 연결된 것은 그 전에 전혀 없었던, 그에 의해 철저히 생각되고 전개된 통찰, 즉 신 앞에서 상실된 인간이 세계의 특징으로 확인되고 신의 구원의 행위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이 인간에게 일어났다는 통찰이다. 신앙의 때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그의 도래 사이의 때로 된 것이다." "열광주의자들은 너무도 성급하게 때의 성취와 구원의 시작에 관한 소식을 탐욕적으로 받아들이고 새 시대를 그들 자신의 실존에서 연출시키되 낮아지고 고난받는 그리스도교적 현존의 나그네됨을 스스로 감내할 각오 없이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269)


결론 바울과 예수


"초기 교회사에서 바울에 대한 평가는 극히 분열적이었다. 예로부터 유대인계 그리스도교 측에서는 그를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의 적으로서 용서 없이 버렸다. 아니 이 그룹들에서는 그를 모든 이단자의 두목인 시몬 마구스와 동일시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위僞클레멘스서). 1세기 말에는 그를 높이 존경하고 그의 서신들을 인용하는 교회의 문필가도 몇 있었다(클레멘스 1서,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폴리갑). 그러나 이 밖에 바울을 자기 편에 둠으로써 그로 하여금 교회의 의심을 받게 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소종파의 두목들, 특히 마르시온 같은 사람이 곧바로 등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수십 년 동안 침묵 속에 파묻히거나 위조된 베드로후서(2세기 중엽)에서와 같이 '사랑하는 형제'로 호칭은 되지만 역시 주저하면서만 언급되었다. 그의 서신들의 난해성 때문에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스스로 멸망에 이르렀기' (벧후 3, 15-16) 때문이다."(304-5)


"'바울이 아니라 예수'라는 구호를 내세우는 이들은 바울이 비정상적인 묵시 문학적 헬레니즘계 유대교, 그러나 아주 이방적인, 그리스·근동적 신화와 사상들에 희생되었으며 동시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불행한 대립과 예수 자신의 설교 및 순수한 유대교를 변질시킨 교회의 교리 전통에 대해 본래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 옛날의 많이 알려진 논증들─지금은 세분화되고 완전히 변한 전제들이기는 하지만─이 새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즉 그들은, 율법과 할례의 제거, 예수의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변질시킨 것, 그에게서 이미 현재한다는 종말론적 구원의 시대에 대한 선포─이것은 세계와 역사 안에서 날마다 겪는 모든 경험들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이스라엘의 희망의 포기, 끝으로 개인을 민족과 역사, 세계의 숨은 보호에서 분리시킨 것, 아니 그것들을 피조물로 인정하지 않고 악마화한 것 등을 바울의 책임으로 지적한다."(307)


"그러나 바울은 지상의 예수의 말들 또는 비슷한 말들에도 직접 자신을 결부시키지 않았다. 그의 모든 말은 오히려 그가 그런 것들을 알지조차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자신 있게, 많은 사람들에게 아마 놀랍고 역설적으로 들릴 주장, 즉 거의 2천 년의 거리를 둔 오늘의 우리가 아마 역사적 예수에 관해 바울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주장을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가 예수에 관해 아는 것, 즉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해방의 일을 선포하고 신의 약속을 확인하는 '예(Ja)와 아멘'으로서 예수 자신을 이해했다(고후 1, 17 이하)." "예수와 바울 모두의 설교는 깨어 있으라는 부름과 고난과 시련에 대비하라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여기서 깨어있음과 대비는 불확실성과 묵시 문학적인 유토피아의 설계, 또는 인간이 '무덤 직전에서도 가질 수' 있는 희망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날의 빛 가운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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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치의 조건 - 미국 유일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서 배우는
조시 맥짐시 지음, 정미나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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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미국을 살린 뉴딜, 뉴딜을 지휘한 루스벨트


"1920년대에 등장한 다원주의는 사회가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엘리트 권력에 의해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이 조화를 이뤄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따라 잘 정립된 다원주의는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가 고정적이고 위계적 방법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고 여기던 이전의 가정에서 탈피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고 역동적이어서 그런 식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원주의의 중심 가치관은 궁극적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결정과 행동의 연속적 과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전문적 지식의 역할을 경시하여 전문가의 위상을 지도자에서 남들이 더 나은 답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격하시켰다. 다원주의자들은 전문가들이 특정 원인에서 특정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또한 본질적으로 거대한 시스템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25)


"다원주의자들은 광범위한 진실이나 전체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며, 특정 시기에 따라 고유한 모습을 취한다고 여겼다." "다원주의자들은 지역, 공동체, 공익, 연합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정부에게 정책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요구했다. 즉, 정부는 다양한 시각을 규합하여 문제 해결을 촉진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하며, 주어진 상황의 다양한 특징들을 처리할 수 있는 전문가 팀이 될 것을 주장했다. 이런 다원주의의 주장에 의하면, 정부 정책은 너무 전반적이거나 중앙집권적이어서는 안 되고 너무 지령적이어서도 안 되었다. 또한 지역적 조건들을 존중하여 정부 정책의 목표가 지역민들, 즉 일반 대중에게 공통의 노력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다원주의자들은 사회조직이 번영하려면 이런 식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루스벨트의 대통령 임기는 미국 정치사에서 이런 다원주의가 구현되는 시기였다."(26-7)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공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렇게 되면 공공의 자유는 더 이상 대중의 욕구의 합으로 규정되지 않고 공공 이익의 기본적 조화를 이끌어내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지도부에 의해 규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훌륭한 사회란 기능적 그룹들로 이루어진 사회이고, 각 개인에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으며, 개인이 그 역할을 펼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사회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정부이며, 정부의 정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회적 지식에 따라 각 개인과 그룹의 기능이 정해지며,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이나 그룹의 사회제도 내에서의 가치도 정해진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그룹이 역할 수행 시에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촉구함으로써 사회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돕는다고 여겼다."(34)


"루스벨트의 기질 가운데 병으로 인해 가장 두드러지게 발휘된 부분은 내면의 용기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도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당장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이며, 그 어떤 시련도 자신을 흔들지 못한다고 여겼다." "조금 불확실한 견해지만 소아마비라는 병마가 루스벨트의 사회적 동정심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당시의 보편적인 사회적 관념에 길들여져 있었지만, 그것에 의지해 내면의 안정을 얻지는 않았다. 가령 흑인이 대체로 하인이 되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하인이 아닌 흑인을 보고 의아해하지는 않았다. 또 반유대주의적 언급을 묵인하고 즐기기조차 하면서도 유대인을 친구나 협력자로 삼길 꺼려하지도 않았다. 때때로 인격과 성격이 인종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국민성이라는 개념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올바른 국내 질서나 세계 질서에 대해 판단할 때 이런 개념을 잣대로 삼지는 않았다."(40-1)


제2부 민주적 다원주의의 새로운 세상을 열다


"루스벨트는 복잡한 정치적·개인적 경험을 거치는 와중에 인간관계란 본래 심리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35년 국가비상대책심의회와 국가의 경제 건전성을 판단하는 여러 가지 척도들에 대해 토론할 때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최종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나는 1932년 이후로 이번에 미시시피 강 서부에 처음 와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이 아주 확연히 달라보였습니다. 그 달라진 모습은 기차 끝 쪽에 서서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번 알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얼굴에 용기가 가득했고, 표정도 활기찼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극복해낼 겁니다.〉 그것은 루스벨트가 육성하려고 애썼던 바로 그런 기운찬 용기였다. 루스벨트는 스스로도 자신에 찬 분위기를 풍겼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깊이 있고 심오한 품성에서 우러나오는 태도라고 믿었다."(213-4)


"(종종 잔인하거나 배려 없는 태도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지만) 루스벨트는 사람들을 국가의 도구로 삼았다. 그런 만큼 그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국가의 목적을 달성해내는 능력이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자질을 최대한 이용했다. 설계와 고안 능력을 발휘하고 목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면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헌신적인 이들을 모아서 그들의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했다. 이것은 공직에 몸담은 모든 사람들, 특히 중대한 책무를 맡은 사람들로서는 성공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리처드 닉슨처럼) 개인의 안위를 공적 책임보다 더 중시할 경우에는 그로 인해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된다. 루스벨트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는 다양한 물건들과 같았다. 그 물건들은 그가 원할 때 조정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 것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이용하더라도 서툴게 이용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잘 이용했다."(216-7)


"루스벨트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판단, 특히 자신의 타이밍 감각을 믿었다. 그는 고문들에게 때에 따라 대담한 모습과 소심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즉, 행동할 때가 됐다고 결정할 때는 대담했고,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는 소심했다. 그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하면 실패와 곤경의 위험 앞에서도 완강할 만큼 단호해졌다. 반면에 오랜 기간 좌절에 빠져서 행동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동안에는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이 중심에 서서 통제하고 있지 않으면 흥미를 잃었다." "그는 오랫동안 침착하거나 난처하거나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대담한 행동을 취하곤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취임 후 첫 100일' 중에는 연방 대법원 개혁 계획, 공화당원인 스팀슨과 녹스의 각료 임명, 무기대여법(Lend-Lease Bill), 무기한 국가비상사태 선언, 독일의 U보트에 대한 '목격 즉시 발사' 명령, 무조건 항복 원칙 같은 눈에 띄는 결과들을 내놓았다."(221-2)


"루스벨트가 한 다음의 말에서 그의 정치적 현실 감각이 잘 드러난다. 〈후보자는 유권자들을 놀라게 해도 되지만 충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자신의 프로그램에 내포된 이점을 교육시킬 수 있으나, 후보자는 국민의 편견을 받아들이고 그 편견이 좋은 방향으로 이용되도록 돌려야 한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은 정치적 자산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 자산을 너무 빨리 소비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적 정치인들은 동맹자로 신뢰할 수 없다는 신념도 있었다. 루스벨트의 눈에 비친 진보주의자들은 언제나 기꺼이 소속된 편에서 떠날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타협의 순간이 오면 자신들의 편에서 가능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루스벨트는 민주당을 '자유주의'나 '진보주의'의 당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진보주의자들의 지원에만 기대서는 그 바람을 달성할 수 없다고 믿었다."(224-5)


"루스벨트는 투표자들의 지지기반이 다양했다. 북부지역 백인 가톨릭교도와 남부지역 백인들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투표에 무관심했던 유권자층을 투표하러 나오게 만든 일은 루스벨트의 정치적 기반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1928~1940년에 민주당이 새로 동원한 투표자 수가 자연적으로 증가한 유권자 수의 세 배 이상이었다." "1920년대 후반에 상당수의 시카고 노동자들, 특히 백인 소수민족 노동자들이 대거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 뉴딜 프로그램들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국가에 대해서나 복지와 안전보장을 제공해주는 방면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신뢰가 생겼던 것이다." "1936년에 루스벨트가 얻은 지지표 가운데 20퍼센트 정도는 통상적으로 공화당원을 자처하던 투표자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뉴딜정책이 정부의 기업 규제와 노조 결정 지지 쪽으로 진행되자 북부의 진보파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으로 이동했던 것이다."(240-3)


"루스벨트의 두 번째 정치적 기반은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당을 차지하게 된 민주당의 위상이었다. 의회 다수당의 위상은 루스벨트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결과였다.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는 상당히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1920년대의 민주당원들은 압도적으로 '안전한' 민주당 표밭에 의존하면서 대체로 남부지역과 북부 도시 인근의 소수민 가톨릭교도 지역의 표에 기대야만 했었고, 공화당원들과의 경합에서 통상적으로 거둔 승률은 40퍼센트 이하였다. 그러나 1932년부터 1940년까지는 남부지역과 도시지역의 지지 기반을 유지하면서 '안전한' 의석을 추가로 확보하여 경합에서 57퍼센트의 승률을 거두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의회의 민주당 의원들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루스벨트에 대한 충성심과 결부시켰다. 대통령을 부인했다간 당의 힘을 약화시키고 공화당에 정권을 넘겨줄 위험이 있었다." "의회의 어떤 회기 중에도 민주당 의원들의 루스벨트 지지율이 70퍼센트 아래로 내려간 적은 없었다."(248-9)


"루스벨트는 첫 임기의 절반에 걸쳐 연방 대법원의 영향력을 제한하거나 무효화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심지어 연방 대법원의 반발을 북돋기 위한 일환으로서, 일부러 사건을 보내 반뉴딜 판결이 더 나오게 하라고 조장하기도 했다. '뭔가를 할' 적절한 방법을 찾는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뉴딜 법안을 수월하게 승인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을 제안했지만, 헌법 개정 절차가 너무 오래 걸리고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이 방식은 거절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지루한 토론이 이어진 끝에 근본 문제는 헌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판사들의 헌법 해석에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국가산업부흥국에 불리한 판결은 만장일치였으나, 그 외의 다른 판결들은 1~3표씩의 표차가 있었다. 다시 말해, 헌법을 바꾸는 대신 대법원의 판사 구성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여러 곳에서 의회를 통해 대법원의 판사 수를 늘리자는 제안이 나왔다."(292)


"그러나 대법원과의 투쟁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법원 재정비 안은 뉴딜의 그 어떤 경제 부문 입법보다 더 효과적으로 공화당원들을 단결시켰다. 반면에 민주당원들은 물론 양당의 진보파 개혁가들을 분열시켜놓았다. 또한 루스벨트도 패배할 수 있으며, 대통령의 인기가 어디에서나 탄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적대자들에게 공격할 결정적 수단을 제공해주었다. 이제 적대자들은 루스벨트에게 '독재자'를 꿈꾸고 있다는 이미지를 씌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이 활개치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기세를 떨치며, 라틴아메리카에서 파시스트 독재정권이 부상하고 있던 1930년대 말에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강력한 공격 수단이었다." "아울러 루스벨트가 간파하지 못한 점은 국민들은 '뭔가를 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막상 하려는 일을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294)


제3부 더 강한 미국,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고립주의자들은 대부분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국제연맹이나 국제사법재판소 같은 국제협력기구를 불신했고, 방어를 위해 군사적 대비를 갖출 것을 주장했다. 1930년대에 고립주의자들은 루스벨트가 외교정책을 수립하여 유연성을 발휘하는 데 제한을 가할 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루스벨트의 국제연맹과의 협력 시도를 사사건건 비난했고, 군축을 위한 협력 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전쟁 채무로 인해 채무불이행에 빠진 국가에 대출을 해주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미국이 교전 중인 국가를 지원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로 중립 법안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루스벨트가 다른 나라들과 관세율을 낮추는 협정을 맺으려 할 때도 반대했다. 이러한 협정은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주장이었다. 그들은 '호혜무역 협정' 법안이 나올 때마다 통과를 저지하다가 번번이 실패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그들의 단결력은 증대되어갔다."(317)


"사실 라인란트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세계 강대국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루스벨트만이 평화에 대한 히틀러의 위협을 정확히 헤아리고 있었고, 루스벨트만이 히틀러를 봉쇄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위협을 저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져보면, 루스벨트의 적대자들은 미국 국민의 눈을 멀게 하여 세계질서가 서서히 파괴되고 있음을 보지 못하게 했고, 건설적인 정책을 개발하기보다는 루스벨트를 공격하기 좋아했다. 그리고 자국의 심리적·물질적 전쟁 대비를 방해했고, 대통령과의 싸움으로 자신들의 위신을 손상시켰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루스벨트의 외교정책이 평화 유지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36년 8월에 루스벨트는 전쟁을 혐오한다고 공표했으며,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외교정책 수립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1930년대 말의 세계 상황이 평화가 아닌 전쟁을 요구했다는 점이다."(318-20)


# 라인란트 사건 : 1936년 3월 히틀러의 군대가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로 진군한 사건


"루스벨트는 뉴딜정책 초창기 이후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노변담화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설명했다. 이때의 이야기는 대체로 히틀러에 저항하는 이들을 원조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을 최선의 방법이라는 주장의 되풀이였다. 연설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특별히 더 긴박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일부 실업가들이 공장 생산능력의 확대가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생산능력 확대가 추후에 국가의 과잉생산을 더 부추기기만 할 것을 우려했다. 루스벨트는 이런 우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새로운 방어시설이 요구되어 추가생산 능력이 필요해질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생산 확대를 하지 않으면 위험성이 아주 높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가가 〈전쟁만큼이나 심각한 비상사태를 맞았다〉면서 교전 중일 때와 마찬가지의 헌신과 희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국이 〈민주주의의 거대 병기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40-1)


"루스벨트는 강력한 행동을 정당화해줄 사건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모겐소에게 말했듯이, 〈자진해서 전쟁에 나서기보다는 떠밀려 들어가고〉 싶어 했다. 주일 대사 조지프 그루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문제는 방어의 문제이니 엄중한 계획을 세울 수가 없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우리는 그 시점의 환경에 비추어보아 우리의 자원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이용할 수 있는 시기와 장소와 방법에 대해 결정해야 하네.〉 루스벨트가 당시 가장 의욕적으로 나섰던 일은 여론이 어떠한 사건이든 전쟁의 명분으로 인식할 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1941년 5월 말로 접어들었을 때 그는 연설을 통해 히틀러가 세계 지배의 야심을 품고 있다고 비난하며, 미국의 방위 범위를 국경 너머까지 확대하는 한편 〈무기한의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더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겠다고 국민들을 안심시켰다."(348-9)


"루스벨트는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1시 직후에 진주만 폭격 소식을 들었다." "루스벨트의 오른팔인 해리 홉킨스는 그 소식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지만, 루스벨트는 덤덤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대꾸했다. 그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각료 및 의원들과 논의를 시작하는 한편, 양원 합동회의에서 발표할 교서를 준비했다. 루스벨트는 현 상황에 대한 책임 소재를 따질 것이 아니라, 미국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본질적인 사실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양원 합동회의에 나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던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위기에 처해서 자신의 리더십을 기꺼이 따르려는 국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몬태나 주의 평화주의자 재닛 란킨만이 루스벨트의 요구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이제 루스벨트의 대통령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360)


"테헤란 회담은 그 급변성, 변환성, 즉흥성에도 불구하고 연합국 간의 외교술의 모범을 제시했다. 루스벨트는 세계 구조를 미국의 국내 정치에서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구상하려 애썼다. 그래서 고립주의의 저항을 경계하여 전후 평화유지 활동에 미군을 투입하는 방식을 회피했고, 대신 정치적 분산, 신탁통치, 4개 경찰국들에 의해 후원되는 국제기구를 통해 독일과 일본의 힘을 제한하는 식의 체제를 지지했다. 그는 소련의 전후 안보에 대한 요구가 미국의 반식민지주의 및 인종별 투표 경향과 균형을 맞추길 바랐고, 스탈린에게 소련이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데 있어 민의(民意)와 조화시키는 상징적 조치를 취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군사적 의제를 설정하도록 허용함으로써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구슬렀다. 뿐만 아니라 양국의 협력관계를 굳히기 위해, 또다시 소련의 대일본전 참여를 요구하며 그 승리의 전리품을 분배받을 기회를 제시했다."(396)


"한편 루스벨트는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목표를 군수품 생산량 증대로 설정하면서도) 미국 내의 전시 경제를 다루는 일도 착수했다. 그는 전쟁 개시 첫 해에만 500만 명 규모의 군대를 인가했다.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일터에서 끌어내 전장으로 보낸다는 것은, 군수품의 폭발적인 수요로 국가의 생산 능력이 무리하게 동원된 시기에 노동력 부족을 유발할 것이 분명했다." "말하자면 미국의 가장 절박한 문제는 전시 국가가 보편적으로 겪는 현상인 인플레이션이었다. 루스벨트는 이 문제에 대해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법을 취하여, 전면적 세금 인상, 임금 및 물가 통제, 필수 물자의 소비제한, 전쟁공채 구매의 장려 등 7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의회에 제안했다. 프로그램에는 루스벨트의 신념인 전시에는 부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는 미국 국민 중에서 1년에 세금을 2만 5,000달러 이상 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406)


"1943년에 들어서면서 3개월 동안 내리 물가가 무섭게 치솟아오르자, 루스벨트는 '현상유지' 명령을 내려 임금과 가격을 현 수준에서 동결했다. 루스벨트는 가격과 임금을 관리하는 주무기관들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 뒤에 물가관리국에서는 39개 상품의 가격을 내리고, 200개 도시의 약 1,000개 식료품에 대해 적정가격을 정했다." "또한 전시생산국에서 점점 더 많은 소비자 상품들에 대해 배급제를 인가해주었고, 마침내 배급제 상품이 소비자 물가지수 산출에 포함되는 품목의 20퍼센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유연탄 광부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자 루스벨트는 그 광산을 인계받았고, 결국 노조는 노동자들에게 일터로 돌아오라로 명령했다. 이처럼 가격 통제, 배급제, 정부의 인계가 어우러져서 큰 효과가 나타났다. 통제가 해제되었던 1943년 4월과 1946년 6월 사이에는 연 인플레이션율이 1.6퍼센트에 이르렀다."(411-2)


"미국은 (서반구의 다른 어느 국가보다 많은) 수천 명의 유대인 이민자들을 받아주었으나, 이 숫자는 종국에는 죽음을 맞게 될 수백만 명 가운데 극히 일부만 구해준 것에 불과했다." "루스벨트도 곤경에 처한 유대인들을 동정했지만, 으레 그렇듯 그는 우선 처리할 사항이나 운신 폭을 제한하는 정치적 압력들에 대해 (유대인 구출에 헌신하던) 엘리너 루스벨트보다 더 민감했다. 루스벨트는 이민자를 더 받아들이면 반대파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늘어나 전쟁 수행 노력에 위협이 가중될 것이라는 국무부의 우려에 공감했다. 국내 반대파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느끼던 백악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루스벨트가 전쟁 수행에 매우 중요한 기술을 지닌 전문가들을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이민 절차를 파기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의회는 법이 바뀌면 이민자가 물밀듯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주는 꼴이 된다면서 그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기까지 했다."(439-41)


"유대인을 구하는 문제에 이르면, 모든 사람들이 다른 급선무가 있었다. 전시난민위원회가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폭파시켜달라고 군에 호소했을 때, 군은 할애할 만한 전투기가 없다고 답했다. 또 유대인 피난민을 수송할 선박을 간청했다가 선박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 번에 수천 명씩 들어오는 비유대인의 수송은 이런 선박 부족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다. 일이 이렇게 이루어진 데는 동맹의 구축, 한 집단에 대한 '편애'의 회피, 적절한 절차와 문서를 내세운 변명, 관료주의적 실수 등 여러 사소한 원인들이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민주당원들은 뉴딜이 '주(Jew)딜'이나 다름없다는 비난에 자극받아 더 비난을 사지 않으려고 주저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 사회가 일종의 수동적 반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어서, 전국 각지에서 린치 가해자들과 인종차별자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부여해주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서였다."(442-3)


"행정학자 배리 D. 칼 교수가 통찰력 있게 간파했듯이, 루스벨트는 합리적 관리라는 척도에서는 점수가 낮은 편이지만, 참모와 각료를 정보 획득과 권한 양도의 방편으로 이용한 면에서는 칭찬을 받아왔다. 이런 접근법이 낳은 주된 결과는 복합적 기능에 이바지한 복합적 배치였다. 루스벨트는 프로그램들을 '조정'할 시스템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이해관계의 균형을 맞추고 충돌을 중재할 만한 조직망을 만들 수 있었다. 결정권은 자신이 확보한 채로 말이다." "루스벨트에 대한 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인 평가 모두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의 아주 일관된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리더십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며 루스벨트라는 인물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라는 이미지다. 루스벨트는 계속해서 세상의 이목을 끌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의 성공이나 실패는 그의 비전이나 정부 관리 측면에서의 취약성보다는 그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결과였다."(479-80)


"루스벨트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현대 복지국가를 위한 제도적 구조를 만들어낸 일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기관인 공공사업진흥국(WPA)을 비롯해 뉴딜정책 시행 기관들 대다수는 전시에 사라졌지만, 농산물 가격, 퇴직연금, 실업수당, 노사관계, 재무관리를 위한 프로그램들은 그대로 남았다.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업적은 그가 대통령에 재임하면서 정부가 시장의 변동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했던 심리적·정치적 장애물들을 제거한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덕분에 후임 대통령들은 정부를 창의적으로 이용하는 면에서 예전보다 더 자유로울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트루먼의 페어딜(Fair deal, 자유주의적 국내 개혁 정책), 케네디의 뉴프런티어(New Frontier, 신개척자 정신), 존슨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교육·의료 증진과 빈곤 퇴치를 내세운 국내 사회복지 정책) 정책이 가능해졌다. 로널드 레이건의 일자리 창출 입법은 WPA를 고스란히 본뜬 것이었다."(480-1)


"(뉴딜 프로그램이 경쟁적 이익과 공공복리 추구를 함께 추구했듯이) 루스벨트에게 민주주의란 더 많은 그룹을 정부의 인정과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공공의 장(場)으로 이끄는 것을 의미했다." "루스벨트는 결국 다원주의의 애매성과 복잡성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도시 당수들, 인종차별주의적 대농장주들, 요직 임명을 갈망하는 의원들, 영리에 집착하는 기업 임원들을 통해 복잡하게 성취를 이뤄나갔다. 그토록 애쓰고 바랐지만, 자신의 비전을 예상한 대로 확실하게 성취시킬 정치 행정 구조를 창출할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 동안, 계속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책략 구사, 재정비, 비위 맞추기, 훈계하기, 고무시키기, 회피하기, 얼버무려 넘기기 따위를 거듭했다. 이렇듯 그의 행동은 다원주의적 비전의 특징을 그대로 따르면서 복잡하고 다양하며 칭찬받을 만한 면모와 비난받을 만한 면모를 모두 지녔다. 그러나 언제나 '네 가지 자유'에 대한 신념과 민주주의의 이상이 그 토대가 되었다."(492-3)


# 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

1.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

2. 신앙의 자유

3. (경제적)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4. 공포로부터의 자유(전세계적 군비 축소)


"여러 중요한 방면에서 살펴볼 때, 루스벨트의 대통령 재임은 곧 엘리너의 대통령 재임이기도 했다. 엘리너는 루스벨트를 보완하는 역할을 맡아서 그가 착수하길 주저하는 문제들에 대해 결정을 내린 뒤에 그를 압박하여 자신의 주도를 따르게 했다." "루스벨트가 후대에 전해줄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면, 엘리너는 후대들이 프로그램으로 전환할 수 있는 명분과 쟁점에 흥미를 보였다." "엘리너는 각종 의제에 흑인들 같은 그룹을 포함시킴으로써, 뉴딜의 다원주의적 목적의 명맥을 지켜나갔다. 또한 민권을 옹호함으로써, 전시에 진보주의를 경제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로도 재정의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1964년에 공민권법(인종·피부색·종교·출신국에 따른 차별을 철폐할 목적으로 제정된 연방법)이 제정되면서 마침내 1965년에 그녀의 사명이 성취되었지만,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이 순간을 목격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494-6)


"폴 애플비의 이론에 의거하면, 민주적 제도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그 제도의 관료들은 협력적이었다. 또한 민주적 제도는 유권자들과 화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점으로서, 민주적 제도는 공익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었다. 애플비의 이론체계에는 다소 미해결의 문제가 있었다. 즉, 공익이란 것이 공개적이고 유연하며 상호작용적이고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제도의 필연적인 결과인지, 아니면 그 조직에서 공익이 목적임을 늘 염두에 둠으로써 비롯되는 결과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위대한 민주주의의 목적은 단순한 부분의 합을 뛰어넘는 전체라는 것이 애플비의 신념이었음은 분명하다. 애플비의 이론체계는 루스벨트가 행했던 다원주의적 행정과 정치에 대한 전형적인 이론체계였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의 뉴딜정책과 전시 행정에 대한 지적 소산인 셈이다. 루스벨트가 남긴 교훈들 가운데 이 부분이야말로 최고의 가르침인 것 같다."(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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