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 - 삼국편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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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3세기까지도 삼국은 부족연맹 사회였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은 각기 자신의 군대를 끌고 집결하고, 그들의 서열에 따라 편제되었다."(20) 이런 군대는 국지전에서 강한 단결력을 발휘하지만, 부족 간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국가 규모의 전투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노출한다. 삼국은 군의 편제와 전술을 일원화하기 위해 신분제도와 경제 체제를 포함한 전체 사회의 개조작업을 벌였다. 한반도의 패권이 걸린 임진강, 한강 유역을 놓고 벌어진 "고구려(고국원왕)와 백제(근초고왕)의 공방전은 요동을 두고 벌어진 중국과 고구려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삼국 간에 피할 수 없는 대립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렸다.(80) 


소수림왕의 개혁을 물려받은 광개토대왕이 백제의 북쪽 국경인 예성강으로 치고 내려오자 위기에 몰린 "백제와 신라는 왕실 간의 결혼으로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저항했다." 절대 우위의 고구려가 처한 어려움은 한반도가 너무나 "좁은 반도인데다가 동쪽 땅의 1/3은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 어느 쪽을 치든지 충청도를 경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백제를 공격하면 신라군에게, 신라를 공격하면 백제군에게 보급로가 노출되는 것이다."(97)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대정복전과 장수왕의 (백제) 위례성 함락"이라는 기념비적 성과를 거뒀지만, 고구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수,당과의 치열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불운에 시달렸다.


거센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국가 체제를 정비한 백제(성왕)는 서기 551년 한성과 주변의 5군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한성이 백제에게 점령되자 한강 이남에 진출했던 고구려군"의 배후가 위험에 노출되었고, 결국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기 위해 죽령과 조령 일대에 배치한 부대를 철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땅은 백제의 소유가 되지 못했다." 곧바로 소백산맥을 넘어 진격한 신라군이 "손쉽게 죽령 이북의 10개 군을 차지"하고 넘어와, 한강 하구에서 "성왕을 살해함으로써 신라와 백제는 단단히 원수가 되고 말았다." 백제는 "한강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를 쳐서 괴산, 보은, 충주 지역을 빼앗아야 한다는 피맺힌 교훈을 배웠다."(125-6)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에 돌입하자 백제는 신라에게 맹공을 가했다. 수 양제의 침공이 있었던 진평양 33년(611년)에 요충이던 가잠성(위치 미상)이 백제 수중에 떨어졌고, 46년(624년)에는 함양 등지의 여러 성이 다시 백제에게 넘어갔다."(126) 그러나 신라는 전투에서 더 많이 패하면서도 한강 유역을 지켜냈다. 그 이유는 고구려가 요동에 발이 묶여 남방공략에 전념하지 못하는 사이, 신라는 남한강 수로를 통해 "어떤 나라보다도 한강 전선에 신속하게 병력과 물자를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31) 


7세기는 삼국 항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선덕왕 7년(638년)에는 고구려의 남하 거점인 고량포 지역을 방어하는 칠중성(파주군 적성면)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 신라로서는 "북쪽 대문이 열린 셈이었다."(233) 위기의 때를 맞이하여 신라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진골 내부를 장악한 진골전통과 대원신통, 가야파 세 세력이 김춘추를 축으로 하는 결혼 동맹을 맺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대공세를 자신들의 힘으로 버틸 수 없음을 자각하고, "적극적으로 대당외교에 매달렸다. 그리고 2년 후에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시작된다."(248)


고구려는 수의 맹공을 견뎌냈지만, 대륙을 재통일한 당은 "고구려를 그대로 놓아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180) 5호 16국 시절 대륙을 교란한 이민족 왕조는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처럼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에서 출발"한 세력들이다.(230) 흩어져 있던 북방 유목민이 결집하면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중국 왕조에게,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아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강국 고구려는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서 평양성 전투의 영웅이던 영류왕(건무)을 토막쳐서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자, 644년 당은 이를 구실 삼아 고구려 원정에 나섰고, 고구려를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고구려 공략에 실패하자 당은 신라 무열왕 7년(660년)에 전격적으로 백제 파병을 결정하고,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을 한강 유역으로 보낸다. "신라도 여기에 맞추어 경주와 한산주의 군대 5만을 동원했다."(259) 안타깝게도 "백제에겐 요동방어망에 비견할 만한 요새지대가 없었다. 특히 당군의 진격로였던 서해안에서 부여로 진출하는 길목은 잘하면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낮은 평원지대였다.(272) 예상 외의 위기는 시간을 다투는 싸움이었다. 불운하게도 일본과 지방의 구원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8월 2일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무너졌고, 소정방은 "9월 3일 의자왕 일행을 데리고 당으로 귀국했다."(270)


665년 8월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신라의) 문무왕과 (당의) 유인궤는 공주 취리산에서 만나 백제 평정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고 양국 간에 맹약을 맺었다."(286) 이로써 신라가 한강 이남의 패권을 확고히 거머쥐게 되었다.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세 아들 간에 권력다툼이 벌어지는데, "이것은 형제간의 분열이 아니라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이었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맏아들 남생이 "당에 망명할 때 국내성 이하 6개 성, 10만 호가 그의 세력권 아래 있었고, 목저성 등 부여쪽 3개성이 그의 편에 붙었다."(287)


공식적으로 고구려는 668년에 망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흡수하여 물자와 병력 부족을 만회한 신라군은 "백제에 주둔했던 유인궤와 당의 영웅 설인귀의 군대를 혈전 끝에 격퇴하여 어쩌면 평양지역의 총독이 되기를 원했던 설인귀의 마지막 꿈을 좌절시켰다. 동이(東夷)의 땅을 완전히 차지하려면 또다시 엄청난 대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은 신라와 곧 화해하였다." 이민족 군대와 연합했다는 사실 때문에 삼국통일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200년에 걸친 지독한 갈등의 최대 희생자는 백성들이었다. 지친 백성들을 위하여 100년 동안의 평화가 그들에게 주어졌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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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기정 옮김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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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37년 6월 4일 보천보(普天堡) 공격으로 세간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보천보는 호수 308호에 경관 5인이 상주하는 산중의 작은 마을"로서, 이 공격은 경관 2명을 사살하는데 그쳤지만, "이웃에 있는 인구 1만 3,000명의 혜산진"을 통해 전국에 이름을 알리는 뛰어난 선전효과를 거두었다.(31) 최용건, 김책, 김일성은 소련이 조직한 항일부대인 88특별여단의 조선인 최고위 지도자들로서, 최용건과 김책은 나이와 투쟁 경력에서 김일성에 한참 앞섰지만, "조선으로 진공작전을 펼친 김일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41)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조선에 우호적인 정권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자, "국내계를 중심으로 소련계와 만주파 등이 결집하여 북조선의 공산당 중앙 조직이 만들어졌다."(52) 이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기점으로, 박헌영이 장악하고 있는 서울 중앙으로부터 독립을 결심하고,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 공산당 선전부는 김일성이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누가 정말 오늘 조선민주혁명의 지도자인가를 증명한다"(61)고 적었으며, <김일성 장군>이라는 소책자를 간행하여 일찌감치 개인숭배 작업에 착수했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에게 군사적으로 실패를 안겨주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정권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1월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가 해방 전의 전향과 해방 후의 배신을 추궁당해 체포"되었고, 소련계 지도자인 "허가이는 정전협정 성립 직전인 7월 2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민들이 정전협정 조인(1953.7.27)으로 "B-29의 공습이 끝났다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동안 "8월 3일 이승엽 등 남로당계 12명은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그중 10명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졌다."(105)


전후 북한 정권이 야심차게 벌인 농촌 부흥 운동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곡물 매입계획을 달성"하는데 매달린 나머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김일성은 곡물 매입 실패를 "다른 나라 당들의 이론과 투쟁경험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인"(114) 탓으로 돌리면서, 자주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가 주장한 '우리 식 체제'는 "모든 노동자는 당의 요청에 대답하여, 천리마의 속도로 사회주의화를 목표로 전진"(137)하라는 '천리마 운동'으로 발현된다. 당과 국가체제를 동일시하는 북한의 국가사회주의체제가 성립된 순간이었다.


1967년 김일성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공고히 하면서, "베트남전쟁에 호응하여 남조선혁명을 조직하고, 필요하다면 다시 혁명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전인민이 항일유격대원의 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촉구했다.(161) 이로써 항일유격대원을 모범삼아 "김일성이 유격대 사령관이며 전인민이 유격대 대원"인 '유격대국가' 이념이 선포된다. 그러나 기대했던 남조선의 "혁명적 대사변"은 일어나지 않았고, 군 최고위급 간부들이 실패한 작전에 책임을 지고 전원 해임되었다.(173)


1970년대 들어 북한은 '유격대국가'에서 '극장국가'로 변모한다. 극장국가란 "권력이 의례를 통해 과시되면서 연극화하는 국가"를 말하며,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수령의 아들 김정일"이었다.(181) 1972년 김정일은 영화 <꽃 파는 처녀>의 제작을 지도하고, "조선혁명박물관 건립과 그 앞의 광장에 거대한 김일성 동상을 세우는 작업을 주도했다."(183) 여기에 더해 김정일은 1974년부터 "경제건설의 방식으로 '속도전'을 주창"하고, 생산현장에서 "3대혁명적기쟁취운동을 조직하도록 지도했다."(188) "혁명적 대사변"이라는 목표가 사라지자 국가를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체제로 변모시킨 것이다.


경제위기는 오일쇼크와 대외 차관 감소라는 악재와 중첩되어 커져만 갔다. 여기에 안이한 자연개조사업으로 일관하던 주체농법의 실패는 돌격 일변도의 체제 구조에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위기 타개책은 또다시 정신 무장이었다. 1980년 전후로 "새롭게 '가족국가론'이 제창되어, 유격대국가라는 건물 위에 간판처럼 내걸렸다." 여기서 중심이 된 것은 "어머니 당"이라는 새로운 용어였다. "수령이 아버지이고, 당이 어머니이며, 대중은 그 자식"(198)이라는 가족주의 국가디자인은 1990년대 들어 '충효'를 강조하는 '전통적 국가론'으로 나아간다.


1989년 동유럽 붕괴와 1991년 소련 연방 해체는 내부 동력을 상실한 북한 체제가 자생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북한은 "핵카드를 구사하여 미국을 교섭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벼랑끝전략으로 돌진해갔다."(231) 여기에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은 영생불멸하는 '사회적, 정치적 생명체'의 "뇌수"인 수령 직책 또한 영생불멸이며, 아무도 이를 계승할 수 없다는 논리적 모순마저 야기했다. 인민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은 영원히 북한의 당과 혁명의 수령이라는 감정이 고조되었다."(242)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고민하던 김정일은 자신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244)하여 "삶의 순간순간을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과 효성으로 빛내이는 참다운 진정한 충신, 지극한 효자"(233)가 되자는 구호를 내세워 내부 결속을 다졌다. 김정일은 1995년 대규모 수해로 극심한 식량위기가 닥쳐오자 '고난의 행군' 정신을 천명하면서, 인민군대를 "우리식 사회주의의 기둥이며 혁명의 대학"(255)이라고 규정하여, 군을 당 앞에 내세우는 '선군정치'로 위기를 정면돌파해 나아갔다.  


2000년 들어 북한은 푸틴의 러시아와 관계를 정상화하고, 남북정상회담과 북미대화를 성사시켰으며, 2002년에는 북일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남한과는 국지적 도발에 따른 긴장 고조로, 일본과는 납치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미국과는 부시정부의 강경책과 이라크 침공으로, 신통치 않은 결과만을 낳았다. 북한은 점점 더 핵무기에 의존하게 되었고,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은 "자신이 갖고 있던 국방위원회 위원장, 당 총비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최고 군사령관이라는 네 가지 직책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김정은에게 물려주지 않은 채"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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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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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1941년 5월 19일 "중국 남부의 칭시에 모여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을 결성"한다.(26) 호치민의 게릴라 부대는 2차세계대전의 전세가 기울던 1945년 5월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여,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인도차이나를 재장악하지 못하도록"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아갔다.(32) 그러나 포츠담회담에서 "영국군이 16도선까지 베트남 남부를 점령하고, 영불 합의에 따라 이 지역의 통치권이 프랑스로 넘어가면서"(43) 식민지 베트남의 망령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드골은 프랑스가 라오스를 재점령한 후 "식민지가 없다면 프랑스는 강대국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55)고 말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주권 행사를 천명했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의 효과적인 조직화와 재무장"(61)을 위해 유럽과 연합하는 데 동의했다. 이에 맞서 "1950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이 호치민을 베트남의 유일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소련도 이에 뒤질세라 재빠르게 동일한 조치를 취"하자, 미국 역시 남베트남의 사이공 정부를 인정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의 열기가 타올랐다.(66)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북베트남의 지압 장군은 프랑스에 대한 대공세에 나서 디엔비엔푸(1954.5.7)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공산주의 세력 차단에 집착했던 미국은, 호치민의 희망을 저버리고 고 딘 디엠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프랑스와의 임무 교대를 자원한다. "디엠은 권력을 가졌던 마지막 민간인이었다."(152) 디엠정권의 부패와 학정에 실망한 미국이 군사쿠데타(1963.11.2)를 묵인하자, 남베트남은 "이후 20개월 동안 10번의 정권 교체를 경험"하면서 허수아비로 전락했다.(153)


1964년 가을 무렵부터 북베트남은 "정규군을 호치민루트를 통해 남파하기 시작했다." 케네디의 암살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권력을 이양받은 존슨은 '자유 세계의 경찰국가론'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고 "백악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베트남을 수호해야 했다."(159) 케네디에게 인계받은 보좌관들과 현지 군 관계자들은 미국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남베트남이 붕괴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폭격과 확전이 지상 과제라고 주장"했다.(215) 존슨은 미국이 강력한 무력을 과시하면, 북베트남이 타협을 수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8월 5일 북폭을 시작으로 미국은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을 결행한다.(206)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우세한 화력과 승리는 무관하다는 사실만 입증될 뿐이었다. "군사작전에 동원된 미군 병사들 중 4명당 3명은 비전투요원"으로, "장병들은 공기를 제외하고 전량 미국에서 수입한 물자로 미국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256) 1966년 한 해에만 남베트남 지상군의 21%가 탈영했다. 전면전도 없는 상태에서 게릴라들에 대한 끝없는 수색 작전에 지친 미군은 "기강 해이와 사기 저하"(291)에 물들어갔다. 군부의 모든 사건, 사고가 여과 없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고,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불만과 좌절감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1968년 1월 31일 밤 공산군은 베트남의 명절인 구정에 때를 맞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무모한 화력전은 북베트남군에게 큰 피해를 남긴 채 재빨리 수습되었지만, 승리를 자신하던 미국 시민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안겨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저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347) CBS의 뉴스캐스터 월터 크론카이트가 한 말이다. 마침내 1968년 11월 1일, 존슨 대통령은 "정찰 비행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공습 외에는 북베트남에 대한 공군과 해군의 폭격을 일체 중지한다고 발표했다."(423)


전쟁이 마무리국면에 접어드는 듯 했지만, 존슨 행정부를 계승한 닉슨은 "하노이의 늙은 지도자들이 지쳐서 결국은 정치적 협상을 모색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마저 물려받았다. 닉슨은 54만 3,000명의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는 한편,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비밀리에 "캄보디아에 있는 게릴라 '성역'에 대한 B-52 전폭기들의 공습"(440-1)과 지상군 투입을 승인했다. "명분 없는 싸움만 했다는 좌절감이 깊어진" 미군 병사들의 구호는 "베트남에서 죽는 마지막 미군이 되지 말자"(474)로 바뀌었다. "1971년 전투에서 부상당해 입원한 환자가 5,000명 미만이었으나, 마약 남용으로 치료받는 환자의 수는 이보다 4배가 많은 2만 529명을 가리키고 있었다."(503)


1972년 11월 7일 재선에 성공한 닉슨은 다시 한 번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한 크리스마스 대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북베트남 사람들에게 가능한 많은 피해를 주어 자신의 의도대로 전쟁의 막을 내리게 하자는 '인륜을 파괴하는' 계산"(549)이었지만, 전세계 여론이 악화되는 부작용만 초래하고 말았다. "1973년 1월 23일 파리에서 키신저와 레 둑 토가 확정한 마지막 평화협정안은 1972년 10월에 제시되었던 내용과 동일했다."(552) 


1975년 미국이 더 이상의 직접 개입을 회피한다는 확신 아래 북베트남 정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미국에게 원조 약속을 지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닉슨은 이미 6개월 전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을 사임한 상태였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대답은 '북베트남에 대한 정찰 비행을 복원한다'였다."(567) 미국만 바라보던 티우와 남베트남 장성들은 국가 수호에 미련이 없었다. 북베트남군이 지척까지 다가온 사이공은 여전히 평화로운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지만, 티우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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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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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을 뜨겁게 달군 베트남전쟁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으며, 미국의 제1목표는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는 것"이었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베트남의 운명을 떠안은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 대륙을 잃었을 때 불었던 매카시 선풍"(58)이 국내 정치를 유린했던 사실을 떠올리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하면 공산주의가 "중동과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51)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제한전 전략을 채택하여 베트콩을 지원하는 "북베트남을 폭격"했지만, 전면전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59) 


미국이 "제한전을 고려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38선 이북으로 전선을 확대했던 미국은 중국의 참전에 밀려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61) 전선의 확대를 막는다는 명분은 타당했지만, "진격할 목표가 없다는 사실"은 목숨 걸고 싸우는 최전선의 병사들이 전투의 승패보다 살아남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었다.(60) 베트남전쟁은 이데올로기 수호라는 지상목표 외에도 "경제를 위한 전쟁"(53)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확대는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던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로 떠오르고 있던 동남아시아 시장의 축소를 의미했다.(54)


"한국 정부는 1964년 봄이 가기 전에 파병을 결정했다."(23) 박정희 정부가 파병의 근거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주한미군 감축 저지와 한미 동맹 고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였지만, 한일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군축에 따른 군부의 지지기반 붕괴를 막겠다는 속내가 들어 있었다. 여기에 존슨 대통령이 '더 많은 깃발more flag' 정책을 표방하면서, "더 많은 한국군을 시급하게 요청"(40)하자 박정희 정부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체제를 적극 동원했다.


북한은 이에 맞서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 안보 위기를 조장했다. 1968년 1월 21일에 청와대 습격 사건, 23일에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벌어졌다. 1965년과 1966년에 30~40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의 남북간 교전이 "1968년에는 500건으로 급증했다."(30)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공세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제공격을 펼치면서, 한국군 추가 파병이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군사 장비가 [한반도에] 얼마나 제공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44)는 말로 미국을 압박했다. 


베트남에 가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금전적인 요소"는 군대와 기업 모두에게 가장 큰 유혹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사병의 전투 수당(이병의 경우 51.11달러)"은 당시 국내 이병 월급 1달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많은 돈이었다.(154)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파병 군인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전체 수당의 83퍼센트"에 달했고, 정부는 높은 송금 및 환전 수수료를 통해 일부를 거둬들였다. 1975년 10대 재벌에 새롭게 진입한 "현대, 한진, 효성, 쌍용, 대우, 동양맥주, 동아건설, 신동아 등"은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과 건설, 무역 등으로 성장한 기업이었다.(224)


한국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으로 인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1968년 예비군을 창설하여, "병역의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지속적으로 통제,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주민등록제도도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제2경제론은, 광화문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217-8) 전쟁 특수는 한국의 산업구조도 바꾸어놓았다.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과 종합 기계 산업 건설이라는 애초의 계획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독자적으로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쟁 특수"이다.(227-8)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국력을 쏟아부어도 정글의 늪은 깊어만 갔다. 1968년 베트콩의 구정공세는 비록 실패한 전투였지만, 성공을 자신하던 워싱턴을 충격에 빠뜨렸고, 반전 여론의 기폭제가 되었다. 파병국들이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할수록, 미국은 과다한 국방비 지출로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주도하던 미국은 "1968년 3월 금의 이중가격제"를 시행했고, "달러의 가치 하락은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마침내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달러의 금태환이 정지됐음을 선언했다."(186-7) 


미국은 반전 여론과 악화된 재정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베트남에서 철군을 결정했다. 언론과 의회는 "남베트남 정부가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키면서 철군을 지지했다.(318) 닉슨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베트남 주둔 미군의 철수를 결정하자, 전쟁특수가 실종된 아시아의 파병국들은 쿠데타와 계엄령의 포연에 잠겼다. 자유체제 수호라는 임무를 스스로 저버린 미국이 그들의 반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관망'뿐이었다. "1971년 11월 18일 타이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10개월이 지난 1972년 9월 22일 필리핀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리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한국에서 유신이 선포됐다."(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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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새마을운동 - 한 마을과 한 농촌운동가를 통해 본 민중들의 새마을운동 이야기
김영미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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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1932년 7월부터 1940년 12월까지 조선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여 '모범 부락'으로 선정된 마을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승만 정부 하에서도 자발적으로 마을환경을 개선하는 마을을 '모범 부락'이라 칭하며 표창하는 제도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자립마을' 정책은 이전 시기 정부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서, "마을은 전년도의 성과에 따라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구분되었으며 우수한 성과를 낸 자립마을로 선정되면 대통령의 특별하사금과 함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51-2)


전통적인 농촌 마을을 도농 복합 마을로 변모시키고 "국가가 농촌 사회에 지배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마을] 신들이 가진 신성을 전유해야 했다."(38) 국가는 마을의 공존 영역을 해체하여 마을회관이나 정미소, 구판장 등이 들어선 공유재산 영역으로 재배치하고, 동리 이장을 통해 하부 행정을 보조하도록 했다. 이장의 급여는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세를 모아 충당하도록 함으로써, "행정비용을 주민들에게 전가하는 효과"(45)도 거두었다. 


해방 후 농촌 지역의 변모를 이끈 주요 원동력은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다. 농지개혁은 일정한 경제력이 있는 자소작층에게 소작지를 분배하여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해체시키고, 소작권을 매개로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태롭게 했던 마름의 존재를 무력화시켰다."(108) 1950년 12월에 공포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은 "씨족과 지역, 신분 등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군사조직의 편재로 전국민을 통합"하여, 국민은 "국가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116)


그러나 전후 약자가 월북하거나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촌 지역은 이념적으로 단일화되고, 보수성이 짙은 씨족 공동체로 되돌아갔다. "전통적 신분 관념"과 "부계 중심의 위계질서"에 균열을 낸 것은 1960년 이후에 대거 등장한 청년 이장들이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유학하는 것과 도시에서 근대적인 직업을 갖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한 이들로서,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자신과 마을의 생활환경을 도회지와 같은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사업"(160-2)에 쏟아부었다.


부녀회 활동도 씨족 공동체에 균열을 가하고 국가와 주민들을 밀착시켜주었다. "당시 여성들은 이름 석 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출가 후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호명된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회를 매개로 국가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자, 여성들은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이 마을과 국가의 열렬한 투사가 되었다."(210) 부녀회 사업을 통해 마련된 기금으로 진행된 "부녀회 관광은 여성들만의 해방구였다."(214)


국가가 깊숙히 개입한 새마을운동은 필연적으로 정치운동과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당읍면지도장이나 부지도장의 권력은 대단하여, 읍면 사업은 그들과 함께 사전 회의를 통해 결정되었으며, 그들이 마을에 어떤 불편사항이 있다고 말하면 즉각 반영되었다."(215) "도시에서 유신반대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던 때에 농촌에서 박정희 정부의 지지표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지배전략 때문이다."(218)

 

국가주도의 계몽운동은 농민들의 경제적 빈곤을 지배체제와 정책의 한계가 아니라, "농민들 자신의 게으름과 낭비적 생활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책임을 돌린다." 이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사화私事化' 전략"(62)으로서, 새마을운동의 주요 전략이기도 하다. 새마을운동은 "근대화운동의 주체를 마을로 설정"(352)하여 국가가 개인의 결함을 치유해주는 적극적인 시혜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새마을운동 지도자나 마을 이장 역임자들은 그들과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박정희 정부의 지지자로 남아 있다."(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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