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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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1941년 5월 19일 "중국 남부의 칭시에 모여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을 결성"한다.(26) 호치민의 게릴라 부대는 2차세계대전의 전세가 기울던 1945년 5월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여,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인도차이나를 재장악하지 못하도록"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아갔다.(32) 그러나 포츠담회담에서 "영국군이 16도선까지 베트남 남부를 점령하고, 영불 합의에 따라 이 지역의 통치권이 프랑스로 넘어가면서"(43) 식민지 베트남의 망령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드골은 프랑스가 라오스를 재점령한 후 "식민지가 없다면 프랑스는 강대국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55)고 말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주권 행사를 천명했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의 효과적인 조직화와 재무장"(61)을 위해 유럽과 연합하는 데 동의했다. 이에 맞서 "1950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이 호치민을 베트남의 유일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소련도 이에 뒤질세라 재빠르게 동일한 조치를 취"하자, 미국 역시 남베트남의 사이공 정부를 인정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의 열기가 타올랐다.(66)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북베트남의 지압 장군은 프랑스에 대한 대공세에 나서 디엔비엔푸(1954.5.7)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공산주의 세력 차단에 집착했던 미국은, 호치민의 희망을 저버리고 고 딘 디엠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프랑스와의 임무 교대를 자원한다. "디엠은 권력을 가졌던 마지막 민간인이었다."(152) 디엠정권의 부패와 학정에 실망한 미국이 군사쿠데타(1963.11.2)를 묵인하자, 남베트남은 "이후 20개월 동안 10번의 정권 교체를 경험"하면서 허수아비로 전락했다.(153)


1964년 가을 무렵부터 북베트남은 "정규군을 호치민루트를 통해 남파하기 시작했다." 케네디의 암살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권력을 이양받은 존슨은 '자유 세계의 경찰국가론'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고 "백악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베트남을 수호해야 했다."(159) 케네디에게 인계받은 보좌관들과 현지 군 관계자들은 미국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남베트남이 붕괴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폭격과 확전이 지상 과제라고 주장"했다.(215) 존슨은 미국이 강력한 무력을 과시하면, 북베트남이 타협을 수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8월 5일 북폭을 시작으로 미국은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을 결행한다.(206)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우세한 화력과 승리는 무관하다는 사실만 입증될 뿐이었다. "군사작전에 동원된 미군 병사들 중 4명당 3명은 비전투요원"으로, "장병들은 공기를 제외하고 전량 미국에서 수입한 물자로 미국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256) 1966년 한 해에만 남베트남 지상군의 21%가 탈영했다. 전면전도 없는 상태에서 게릴라들에 대한 끝없는 수색 작전에 지친 미군은 "기강 해이와 사기 저하"(291)에 물들어갔다. 군부의 모든 사건, 사고가 여과 없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고,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불만과 좌절감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1968년 1월 31일 밤 공산군은 베트남의 명절인 구정에 때를 맞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무모한 화력전은 북베트남군에게 큰 피해를 남긴 채 재빨리 수습되었지만, 승리를 자신하던 미국 시민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안겨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저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347) CBS의 뉴스캐스터 월터 크론카이트가 한 말이다. 마침내 1968년 11월 1일, 존슨 대통령은 "정찰 비행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공습 외에는 북베트남에 대한 공군과 해군의 폭격을 일체 중지한다고 발표했다."(423)


전쟁이 마무리국면에 접어드는 듯 했지만, 존슨 행정부를 계승한 닉슨은 "하노이의 늙은 지도자들이 지쳐서 결국은 정치적 협상을 모색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마저 물려받았다. 닉슨은 54만 3,000명의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는 한편,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비밀리에 "캄보디아에 있는 게릴라 '성역'에 대한 B-52 전폭기들의 공습"(440-1)과 지상군 투입을 승인했다. "명분 없는 싸움만 했다는 좌절감이 깊어진" 미군 병사들의 구호는 "베트남에서 죽는 마지막 미군이 되지 말자"(474)로 바뀌었다. "1971년 전투에서 부상당해 입원한 환자가 5,000명 미만이었으나, 마약 남용으로 치료받는 환자의 수는 이보다 4배가 많은 2만 529명을 가리키고 있었다."(503)


1972년 11월 7일 재선에 성공한 닉슨은 다시 한 번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한 크리스마스 대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북베트남 사람들에게 가능한 많은 피해를 주어 자신의 의도대로 전쟁의 막을 내리게 하자는 '인륜을 파괴하는' 계산"(549)이었지만, 전세계 여론이 악화되는 부작용만 초래하고 말았다. "1973년 1월 23일 파리에서 키신저와 레 둑 토가 확정한 마지막 평화협정안은 1972년 10월에 제시되었던 내용과 동일했다."(552) 


1975년 미국이 더 이상의 직접 개입을 회피한다는 확신 아래 북베트남 정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미국에게 원조 약속을 지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닉슨은 이미 6개월 전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을 사임한 상태였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대답은 '북베트남에 대한 정찰 비행을 복원한다'였다."(567) 미국만 바라보던 티우와 남베트남 장성들은 국가 수호에 미련이 없었다. 북베트남군이 지척까지 다가온 사이공은 여전히 평화로운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지만, 티우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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