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새마을운동 - 한 마을과 한 농촌운동가를 통해 본 민중들의 새마을운동 이야기
김영미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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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1932년 7월부터 1940년 12월까지 조선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여 '모범 부락'으로 선정된 마을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승만 정부 하에서도 자발적으로 마을환경을 개선하는 마을을 '모범 부락'이라 칭하며 표창하는 제도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자립마을' 정책은 이전 시기 정부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서, "마을은 전년도의 성과에 따라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구분되었으며 우수한 성과를 낸 자립마을로 선정되면 대통령의 특별하사금과 함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51-2)


전통적인 농촌 마을을 도농 복합 마을로 변모시키고 "국가가 농촌 사회에 지배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마을] 신들이 가진 신성을 전유해야 했다."(38) 국가는 마을의 공존 영역을 해체하여 마을회관이나 정미소, 구판장 등이 들어선 공유재산 영역으로 재배치하고, 동리 이장을 통해 하부 행정을 보조하도록 했다. 이장의 급여는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세를 모아 충당하도록 함으로써, "행정비용을 주민들에게 전가하는 효과"(45)도 거두었다. 


해방 후 농촌 지역의 변모를 이끈 주요 원동력은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다. 농지개혁은 일정한 경제력이 있는 자소작층에게 소작지를 분배하여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해체시키고, 소작권을 매개로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태롭게 했던 마름의 존재를 무력화시켰다."(108) 1950년 12월에 공포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은 "씨족과 지역, 신분 등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군사조직의 편재로 전국민을 통합"하여, 국민은 "국가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116)


그러나 전후 약자가 월북하거나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촌 지역은 이념적으로 단일화되고, 보수성이 짙은 씨족 공동체로 되돌아갔다. "전통적 신분 관념"과 "부계 중심의 위계질서"에 균열을 낸 것은 1960년 이후에 대거 등장한 청년 이장들이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유학하는 것과 도시에서 근대적인 직업을 갖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한 이들로서,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자신과 마을의 생활환경을 도회지와 같은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사업"(160-2)에 쏟아부었다.


부녀회 활동도 씨족 공동체에 균열을 가하고 국가와 주민들을 밀착시켜주었다. "당시 여성들은 이름 석 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출가 후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호명된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회를 매개로 국가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자, 여성들은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이 마을과 국가의 열렬한 투사가 되었다."(210) 부녀회 사업을 통해 마련된 기금으로 진행된 "부녀회 관광은 여성들만의 해방구였다."(214)


국가가 깊숙히 개입한 새마을운동은 필연적으로 정치운동과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당읍면지도장이나 부지도장의 권력은 대단하여, 읍면 사업은 그들과 함께 사전 회의를 통해 결정되었으며, 그들이 마을에 어떤 불편사항이 있다고 말하면 즉각 반영되었다."(215) "도시에서 유신반대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던 때에 농촌에서 박정희 정부의 지지표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지배전략 때문이다."(218)

 

국가주도의 계몽운동은 농민들의 경제적 빈곤을 지배체제와 정책의 한계가 아니라, "농민들 자신의 게으름과 낭비적 생활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책임을 돌린다." 이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사화私事化' 전략"(62)으로서, 새마을운동의 주요 전략이기도 하다. 새마을운동은 "근대화운동의 주체를 마을로 설정"(352)하여 국가가 개인의 결함을 치유해주는 적극적인 시혜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새마을운동 지도자나 마을 이장 역임자들은 그들과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박정희 정부의 지지자로 남아 있다."(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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