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냉전을 뜨겁게 달군 베트남전쟁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으며, 미국의 제1목표는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는 것"이었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베트남의 운명을 떠안은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 대륙을 잃었을 때 불었던 매카시 선풍"(58)이 국내 정치를 유린했던 사실을 떠올리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하면 공산주의가 "중동과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51)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제한전 전략을 채택하여 베트콩을 지원하는 "북베트남을 폭격"했지만, 전면전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59) 


미국이 "제한전을 고려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38선 이북으로 전선을 확대했던 미국은 중국의 참전에 밀려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61) 전선의 확대를 막는다는 명분은 타당했지만, "진격할 목표가 없다는 사실"은 목숨 걸고 싸우는 최전선의 병사들이 전투의 승패보다 살아남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었다.(60) 베트남전쟁은 이데올로기 수호라는 지상목표 외에도 "경제를 위한 전쟁"(53)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확대는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던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로 떠오르고 있던 동남아시아 시장의 축소를 의미했다.(54)


"한국 정부는 1964년 봄이 가기 전에 파병을 결정했다."(23) 박정희 정부가 파병의 근거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주한미군 감축 저지와 한미 동맹 고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였지만, 한일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군축에 따른 군부의 지지기반 붕괴를 막겠다는 속내가 들어 있었다. 여기에 존슨 대통령이 '더 많은 깃발more flag' 정책을 표방하면서, "더 많은 한국군을 시급하게 요청"(40)하자 박정희 정부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체제를 적극 동원했다.


북한은 이에 맞서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 안보 위기를 조장했다. 1968년 1월 21일에 청와대 습격 사건, 23일에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벌어졌다. 1965년과 1966년에 30~40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의 남북간 교전이 "1968년에는 500건으로 급증했다."(30)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공세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제공격을 펼치면서, 한국군 추가 파병이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군사 장비가 [한반도에] 얼마나 제공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44)는 말로 미국을 압박했다. 


베트남에 가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금전적인 요소"는 군대와 기업 모두에게 가장 큰 유혹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사병의 전투 수당(이병의 경우 51.11달러)"은 당시 국내 이병 월급 1달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많은 돈이었다.(154)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파병 군인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전체 수당의 83퍼센트"에 달했고, 정부는 높은 송금 및 환전 수수료를 통해 일부를 거둬들였다. 1975년 10대 재벌에 새롭게 진입한 "현대, 한진, 효성, 쌍용, 대우, 동양맥주, 동아건설, 신동아 등"은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과 건설, 무역 등으로 성장한 기업이었다.(224)


한국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으로 인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1968년 예비군을 창설하여, "병역의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지속적으로 통제,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주민등록제도도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제2경제론은, 광화문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217-8) 전쟁 특수는 한국의 산업구조도 바꾸어놓았다.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과 종합 기계 산업 건설이라는 애초의 계획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독자적으로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쟁 특수"이다.(227-8)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국력을 쏟아부어도 정글의 늪은 깊어만 갔다. 1968년 베트콩의 구정공세는 비록 실패한 전투였지만, 성공을 자신하던 워싱턴을 충격에 빠뜨렸고, 반전 여론의 기폭제가 되었다. 파병국들이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할수록, 미국은 과다한 국방비 지출로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주도하던 미국은 "1968년 3월 금의 이중가격제"를 시행했고, "달러의 가치 하락은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마침내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달러의 금태환이 정지됐음을 선언했다."(186-7) 


미국은 반전 여론과 악화된 재정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베트남에서 철군을 결정했다. 언론과 의회는 "남베트남 정부가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키면서 철군을 지지했다.(318) 닉슨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베트남 주둔 미군의 철수를 결정하자, 전쟁특수가 실종된 아시아의 파병국들은 쿠데타와 계엄령의 포연에 잠겼다. 자유체제 수호라는 임무를 스스로 저버린 미국이 그들의 반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관망'뿐이었다. "1971년 11월 18일 타이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10개월이 지난 1972년 9월 22일 필리핀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리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한국에서 유신이 선포됐다."(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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