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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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실이 엉켜 있는 수레바퀴,

운명의 실이 풀려 있는 미로,

동심원과 네모의 순환,

그 이상은 알 수 없는 이야기(logos)



종교를 위해 죽는 것은 완전히 종교적 삶을 사는 것보다 더 단순하다. 에페수스에서 맹수들과 싸우는 것은(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렇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사도 바울로가 되는 것보다 덜 힘든 일이다. 한 번의 행동은 사람의 전 생애보다 빠른 법이다. 전투와 영광은 '수월한' 것이다. 그러니까 라스콜리니코프의 일은 나폴레옹의 일보다 더욱 지난했다. pp.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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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서진 - 청(淸)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사 역사도서관 9
피터 C. 퍼듀 지음, 공원국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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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패러다임으로 보면 중앙유라시아는 "근대 세계의 주요한 추세들과 격절된, 유달리 고립된 지역"이지만, 고전적인 관점 하에서는 "유라시아의 '교차로'로서 오랜 무역, 정복 그리고 종교적, 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주위를 둘러싼 모든 정주 세계와 연결된 지역"이었다.(75)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을 유목 문명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이후를 쇠퇴기로 보는 관점은 "이미 약해진 시기부터 그 기원으로 역사를 거꾸로 읽음"(30)으로써, "초원의 지배자들이 감행한 혁신"과 우발성을 봉쇄하고, 무대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행위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환경결정론적 명제이다."(34) '중국의 서진'은 이러한 관점을 역사에 성립시킨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말은 기병을 대체할 만한 수단이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전술무기였으며, "유목 경제의 기둥이자, 전쟁의 핵심 요소였다." 정주 문명들은 초지草地가 부족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수요를 충당할 만큼 말을 길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은 초원과 정주 민족들을 연결하는 고정 핀이었다." 농목 문명은 반복해서 마차馬茶 시장을 열었지만, "야만인 약탈자들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굴욕"이라고 역설하는 비판론자들의 공격은 물론, "말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하고, 변경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협정을 강제하는 지도자"(63)의 등장이 강대한 세력 결집을 불러한다는 현실적 난관에 부딪혀, 교역은 수시로 이어지고 끊겼다.  


중국 왕조들은 "평화적인 교역 관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동/서 몽골의 정치 역학 관계를 이용하여 "어떤 통치자가 강해질 때마다 다른 편을 지원해, 몽골이 통합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목"하도록 만드는 "계획적인 분할 통치 정책"(89)을 구사했다. 그러나 "장기적 안목을 지닌 초원의 지도자들은 교역 특권을 이용해 자국의 재원을 조성"하여 대륙을 위협하거나 점령하곤 했는데, "이것은 만주족 국가를 건설한 누르하치가 초기에 추구하던 전략"(104)이기도 하다. 


몽골과의 타협이나 교역을 거부하고 초원을 완전히 점령해야 한다는 강경론자들의 발언은 국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변방에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을 수반하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명이 변경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내륙으로부터 효율적으로 재원을 모으고 이를 변경으로 수송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략물자를 화폐로 구매할 만큼 상업화가 충분하지 않았고, 한족 통치자 및 관료 세계가 초원과 격리되어 있었으며, 발달된 행정 기구가 부족"하다는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 그렇지만 "개중법과 상둔商屯을 통해 상인들의 이윤 동기를 전략적 방위에 동원"하려 했던 시도는 "후계자들에게 귀중한 경험의 보고가 되었다."(111-2)


"청은 18세기 유라시아의 팽창하는 '식민 제국' 가운데 하나였다."(417) "중앙아시아적 요소를 포함한 신층 청나라"는 몽골 원정을 감행한 강희제의 역동적인 개입을 통해 "전무후무한 팽창 프로젝트의 주체"(181)로 거듭났다. 청의 통치 엘리트들은 "안보와 자급"을 목표로 서진을 감행했으며, 이 지역을 "대규모 영구 군사 주둔지를 부양하고, 스스로 꾸려 나갈 수 있는 곳"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여기에 "이미 확립된 사회구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행정 관료들이 새로운 통치 방법을 실험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 변경의 큰 매력이었다. 신장 점령은 "새로 열린 땅에 식민주의자들의 꿈"을 심는다는 "전 세계 제국 건설자들의 기획과 평행한 것이었다."(419-20)


변경 점령의 첫 걸음인 둔전 개발은 "순전히 군사적인 원조 아래서 진행되었지만, 민간인들이 곧 뒤를 이었다." 청의 관리들은 "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면 경작에 더 큰 동기가 부여되리라 믿고, 민영화, 사유화 추세를 장려"(426)했지만, 군사적 통제의 약화는 제국 통치를 침식하는 원인이 되었다. 변경의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인구들은 하나의 행정 체계로 포용할 수 없었고, 개발은 오직 힘으로만 버틸 수 있는 긴장들을 야기했다." 자립 기반이 허약한 이 지역은 "19세기 동안 (변경을 지탱하던) 자원들이 내지內地로 돌려지면서 와해되기 시작한다."(444-5)


현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대에서 당의 주둔 도시를 거쳐 지금까지 오아시스에서 중국이 연속적으로 존재했다"(418)고 서술하면서 정복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역사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과는 다르지만, 청의 통치 엘리트들도 자신들의 정복 사업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청의 관료들과 황제는 하늘의 뜻이 (준가르의 지도자) 갈단을 패배시켰고, 황제가 적의 죽음을 예견했으며, 갈단은 절망 속에서 자결했다는 신화를 구성해냈다."(586) 옹정제는 정복사업을 "더욱 넓은 지역으로 계속 확장되는 도덕의식"에 비유하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이 '좁고 지역적이고 이기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질책했다."(599)


청의 서진은 '중국'이라는 영토의 크기와 '한족'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18세기 중국은 민족주의의 시대가 아니었지만, 그 속에서 19세기 말 중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정의定義들이 작동하는 틀을 다져놓았다."(656) 중국 역사가들은 결코 "'정복'(쟁취爭取)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통일'이라는 말"(645)을 사용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통치를 확립하여 비한족 민족들을 종속적인 타자로서 병합하려는 제국의 기획이 포함되어 있다."(656) 유목민들을 역사에 무대에서 영구히 추방한 제국의 기획이 민족국가와 연속성을 갖는 것이다.


"국경이 확정되고 팽창이 멈추었을 때, 제국은 내부의 도전에 직면했고 영광의 시절은 끝났다."(697) 중국의 통치자들은 "러시아와 국경선을 확정하고, 준가르 몽골 국가를 멸망"시킨, 1760년을 국가 계획의 완성기로 보았다. "영세 농민들에게 출구를 마련하여 경작지에 대한 중심부의 압력"(715)을 감소해주던 "변경에서의 군사적인 도전이 종료됨으로써 점차 관료 체계에서 역동성이 빠져나갔다."(699) 그럼으로써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과 평행선을 달리던 중국은 "계속적으로 전쟁에 투자한" 유럽에 뒤쳐지게 되었고, 이들이 남쪽 해안에 등장하자 대륙의 약점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네 가지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들이 청을 19세기 서구의 침투에 노출시켰다. 즉, 몽골을 격퇴한 직후 남부 해안에서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한 것, 초원 유목민들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되던 정책들이 남쪽의 해양 환경에서 실패한 것, 중앙의 이해와 지방 세력가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던 협상을 통한 타협이 탈중앙집권화로 옮아가기 시작한 것 그리고 16세기부터 진행되던 상업화가 중앙에 대한 충성심을 침식한 것이 그것이다."(719-20) 대륙이 초원으로, 정복이 침탈로, 제국이 식민지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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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혼돈 - 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티모시 브룩 지음, 이정.강인황 옮김 / 이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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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세운 "홍무제의 목표는 (자급자족형 농경 국가를 건설하여)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농경지에 묶인 백성들은 최대 20리(12km) 내에서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법으로 정한 최대 범위인 100리(58km)를 통행증 없이 벗어날 경우에는 "장형杖刑 80대에 처해졌다. 만일 신고하지 않고 국외로 나갔다 돌아오면 사형을 당했다." 사회적 신분 이동도 엄격하게 제한받았다.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공장工匠의 아들은 공장이 되어야 했고, 군인의 아들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직업을 바꾼 자에 대한 벌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자에 대한 벌만큼이나 가혹했다."(40)


"홍무제는 상업이 도시지역에 국한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상거래를 금지하거나," 농촌지역에 상업을 위한 장소를 지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100) 그러나 농촌이야말로 가장 실질적인 재화를 생산하는 전진 기지였으며, 생산물의 증대는 소작인과 지주간의 '개인적 유대감'을 "단순한 경제적 계약관계로 변화시켰다."(119) "요역徭役에서 지세地稅로의 전환은 사적 유대가 사라지는 추세를 한층 강화했고, 소작인들은 계약에 명시된 의무 이외의 요구사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120) 


"농작물의 생산이 늘어나자 잉여농작물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고, 잉여농작물이 정기적으로 유통되면서 전적으로 상업을 목적으로 한 작물의 재배가 생겨났다." 여기에 국가가 교통통신 수단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 "일상용품의 유통까지 용이하게 만들 정도로 인프라가 개선되었다."(31) 국가의 정보와 물자를 감당하는 수송 부담이 가중되자, "정부의 배를 부리는 뱃사람들은 제한된 분량의 개인 물자를 함께 싣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들은 직접 팔 물건이나 위탁 받은 화물을 실어, 그것을 거래한 이익으로 비용을 조달했다."(74) 결국 명의 상업화는 "자급자족 경제에서 방향을 돌린 것이라기보다는 (역설적으로) 그 결과"(32)인 셈이다.


"경제 관련 텍스트는 명조 서민문화의 일부였다."(87) 명초에는 과거제를 통한 출세길에 오르지 못한 "수만 명의 글을 아는 사람들(신사층)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어 경제생활의 문서화를 돕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90) 홍무제는 "종교개혁기 유럽의 국가들이 신기술에 직면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특정한 책을 금서"로 지정하는 방식 대신, 책에 부과하는 세금을 면제해주고, 백성들에게 주입하기 알맞은 사상을 널리 배포하는 수단으로 인쇄술을 이용했다. "홍무제의 권고와 수상이 담긴 책은 필독서였다."(94)


이는 상업의 발달이 '개명改名된 이기심'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생성하고, 이 관념이 다시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순환구조를 잘 보여준다. 유학자들 중에서도 추쥔과 같은 이들은 "이런 상황에 고무되어 경제의 운용방식이나 상업활동과 관련한 국가의 역할이 적절히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상품을 재분배하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루는 데는 국가보다 상인이 더 낫다"(140-1)는 점을 역설하면서, 국가의 수공업 공장 운영이나 소금 같은 필수품 전매, 해금 정책 등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조편법 시행과 유럽 상인들의 진출에 힘입어 은銀이 결제수단으로 대중화되면서 상업의 발달이 더욱 촉진된다. 1520년대부터 관료들은 해외무역을 더 강력하게 규제했지만, "대외무역 금지는 비생산적이었고 무역과 관련된 폭력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무역과 해금 사이의 긴장은 "기근으로 고통을 겪었던 1540~1550년대에 '왜구'(倭寇)를 비롯해서 이들과 결탁한 중국인 선원 및 해외상선들이 무역이 허락되지 않는 곳을 습격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67)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유교적 신분 질서도 흔들렸다. "일부 상인은 신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고 일부 신사는 그들을 받아들이며 고전을 연구하여 상업을 합리화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았다." 상업이 촉진한 다양한 물건들은 "신사층의 문화적 소일거리로 흡수되었고, 신사층은 예술품을 놓고 품평과 감상을 하는 동시에 이 같은 상품의 생산을 자극했다."(181-2) 그렇다고 이들이 아래로부터 유입을 마냥 반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사층은 국가 관료의 공식 권력과 발흥하는 상인층 사이에서 자신들의 비공식적인 권력이 사그라들자, "시대의 부패를 한탄하고 스스로를 문명의 마지막 대희망"(188)으로 그려냈다.


유럽과의 무역 대금으로 받은 방대한 양의 은은 물론이요, 동전의 액면가를 넘어서는 동銅 같은 귀금속을 "그냥 두기에는 경제가 너무나 활력에 넘쳐"(211) 흘렀다. 이 상황에 걸맞는 새로운 규칙이 요구되었지만, 청빈과 자선에서 근면과 이윤으로 방점을 이동한 기독교와 달리 "유교는 눈앞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준비된 이론도 제공하지 않았다."(204) 명대 후기에, 변화의 조류에 올라타는 "가장 인기 있는 방법은 가족의 자산을 부계 [남성] 친족과 함께 모아서 종족宗族의 공동자산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자본을 집약시켜 상업망에 참가한다는 의의뿐만 아니라 종족 내에서 "존경과 의무의 위계를 세워 연장자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장으로 기능했다."(212)


명말의 상인들은 선대제先貸制를 통해 농촌 노동자들에게 "원료의 형태로 자본을 이전시키고, 그들이 생산한 상품을 통제"했던 유럽 산업자본가들과 달리,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된 직물을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판매하는" 이득에 골몰하였다. 다나카 마사토시에 따르면, 생산자를 고리대로 옭아매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할 수 없게 하는 명의 '원료-생산물 교환제'는 "생산관계를 변화시키기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로 가는) 발전의 자극 요인"(260-1)이 되지 못했다. 명대의 활력이 근세 유럽의 상업발전과 다른 길을 간 이유는 자급자족형 인프라 경제 안에서 생산, 소비되는 상품의 일부가 시장 경제를 통해 유통되긴 했지만, "시장 경제가 인프라 경제를 인수하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용해시킬 정도로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262)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정체성의 진화"를 거듭한 신사층은 "교육받은 엘리트와 돈 많은 엘리트라는 두 줄"로 사회를 단단하게 구속했다. 신사층은 겉으로는 향락과 퇴폐를 경고하면서도 상인과의 거리를 "축소하기는커녕 강화하는 방식"(330)으로 문제를 해소해 나갔다. "상업망이 없었다면 많은 신사층은 왕조교체기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청대의 신사층과 상인의 융합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제자리를 고수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가부장주의와 위계, 지배계급의 정의라는 보수적 가치"(341)를 붙들고 중국의 사회구조를 지탱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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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미야쟈키 이치사다 / 신서원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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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시대에 이르면 본래 천자와 신하들 사이에만 존재하던 군신관계가, 효렴孝廉이라는 관료 추천을 통해 관계에 입문한 유학생과 지방관 사이에도 성립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성립된 군신 관계는 "가정도덕인 효행보다도 중요하다고 간주"되었는데, 이것은 "개인이 입신출세하는 것이 일족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설령 불행하게 자신 또는 그 일가가 멸망하는 비운을 당해도, 그의 충성이 조정에 인정되면 나머지 일족이 영예를 받고 특전을 향유했기 때문이다."(24-5) 이는 통일왕조가 무너지면서 보편 원리의 사적 전용轉用이 시대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징후였다.


도의가 무너진 자리를 이윤 추구가 파고들었다. 난세에 이르러 부자들이 동전을 수중에 넣고 시장에 내놓지 않자, "전납錢納으로 부賦를 부담"해야 했던 농민들은 본적지에서 도망하여,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객客으로 떠돌았다. 이들은 "큰 도시로 들어가 날품팔이 인부가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장원에 들어가 예농隷農"(34) 신세로 전락했다. 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이룬 위魏는 구품관인법을 도입하여 재능있는 인물을 등용하고자 했지만, 태평성대를 마음껏 누리려는 귀족층은 이를 문벌 자제들의 출세 수단으로 악용했다.


통일을 이룬 조씨 일가의 위 왕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진晋왕에 봉해진 사마씨 일가는 조씨 일가가 예정된 각본대로 한 왕조를 선양禪讓받은 것을 모방하여 무력으로 왕조교체를 이루었다. 진무제는 위왕조가 일족을 권력의 중심부에서 배척하여 자신들에게 왕조를 탈취당한 것을 거울삼아, "그 반대되는 정책을 취해 대대적으로 봉건을 행해서 일족의 자제에게 영토를 분배했다." 그러나, 사병을 거느린 봉건 제후들은 왕조의 기대와 달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무력에 호소"했으며, 곧 팔왕의 난이라는 일족간의 살인극을 벌인다.(97-8)


팔왕은 장래의 일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당시 진의 영토 안에서 머무르던 이민족들은 "문명화한 숙번(熟蕃, 정부당국에 잘 순응하는 야만인)"이었고, 중국적 교양을 어느정도 체득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자립하자, "부패한 중국정권보다 소박한 이민족 정권"(104)을 선호한 서민은 물론 지식계층이 자진하여 그들의 휘하로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엇이든지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125) 


"이른바 오호五胡시대에는 화북 중원지방에 이민족이 집단적으로 이동하여 우왕좌왕하는 한편, 동시에 새로운 민족이 만리장성 저편으로부터 중국으로 적지 않게 흘러들어 왔다."(207) 격렬한 이민족간의 투쟁을 진압하고 동화 정책을 편 북위의 효문제는 왕조의 안정을 위해 도도한 기세로 한화韓化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합을 모색한 한화정책이 의도와 달리 "중국사회의 산물이던 귀족제도를 되살려 관리 선임에 가문의 등급을 중시"(224)하는 풍토를 되살리자, 왕조 방위에 중심축을 담당하는 선비족 군인집단이 소외되어갔다.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언제 발생할 지 모르는 북방기병의 습격에 대비"하는 무천진의 장군과 사병들은 각별한 동료애를 품은 결속력 강한 집단이었다.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뒤, 북변의 육진은 관계가 끊어져 방치되고 그 지위가 점점 저하"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군벌 투쟁을 종식시키고 대륙을 석권한 것은 수 문제隋 文帝였다. "그는 종래의 구품관인법이 귀족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제도로 타락했다는 점을 간파하고, "중앙 정부에서 시험을 행하고, 급제자에게 고위관직에 오를 자격을 내리는" 과거제를 시행하여 왕조의 안정을 기했다.(258)


수 왕조는 남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진 나라를 손쉽게 멸망시키고, 대륙 통일을 이루었지만, 무리한 토목 공사와 고구려 원정 실패로 막대한 고통에 시달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수 왕조를 대체한 당唐은 한제국의 재건으로 간주되었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한대에는 "귀족과 서민을 하늘로부터 부여된 본질적 차이가 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유품'流品 사상이 아직 발달하지 않아, "서민에서 개인의 실력으로 조정 대신으로까지 출세하여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당대에 재차 성행한 귀족주의는 서민이 관료로 출세하는 길을 원천봉쇄했다.(286)


"보통의 왕조라면, 안사의 난과 같은 대란을 겪고 난 뒤 곧 멸망해 버리고" 대륙은 다시금 혼돈으로 빠져드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당왕조는 거듭된 내란으로 "반신불수와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으면서도 150여 년 정도를 여전히 존속했다." 그것은 당 왕조가 재정국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종래의 왕조가 거의 예외없이 무력으로 지탱되었던 무력국가인 것에 반하여, 재정국가는 소금 전매 같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우선 재원을 확보하고 재정을 충족시켜"(313)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국제 교역에 힘입은 근세적인 상공업 도시의 발달도 한몫을 담당했다.


재정 정책은 왕조의 생명을 이어가는 극단적인 처방으로서, 당왕조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큰 희생을 초래했다. "일상 생활에 필요불가결한 소금에 몇 십배의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억지정책이었다."(328) 국가 전매제가 영속화되자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밀수를 감행하는 집단이 대거 생겨났고, 이들은 곧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비밀결사로 이어졌다. 마침내 주전충이 환관과 관료들을 대량 살육한 후에, 천자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후량後梁을 세운다. "이때부터 중국은 (또다시) 단명왕조가 잇따라 일어나는 오대五代의 분열시대로 접어든다."(336)


저자는 후한 말부터 송 왕조 이전까지를 중국 중세로 정의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운명과 이유 없는 재앙"(348)이 끝없이 이어지는 '대분열'과 '혼돈'이다. "힘이 만사를 결정하고, 권력관계만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잣대였기 때문에, "강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포악하고, 일단 권력을 잃으면 이제까지의 응보를 일시에 받는" 비극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이 때마다 몇 십배 몇 천배의 사람이 죄없이 희생자가 되는 구조가 짜여져 있었다."(349) 송 왕조가 문치文治를 내세운 것이 우연이 아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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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세오 다쓰히코 지음, 최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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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8~9세기는 하나의 종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통일 왕조가 유라시아 대륙의 세 거점을 장악한 시기이다. 크리스트교의 프랑크왕국과 동로마제국, 이슬람교의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 불교의 토번과 당 왕조는 "육로와 해로를 잇는 교통과 정보망의 개혁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일종의 세계 경제 체제를 형성"하였다.(60-1) 당 왕조는 유목 민족을 두려운 적수이자 격퇴해야 할 야만으로 규정하고 장성을 쌓아 분리하는 데 주력한 진한秦漢 왕조의 두려움을 반복하지 않고, 농목접경선에 사슬처럼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농목 접경 지대는 옛부터 농업과 유목이라는 다른 생업이 연결되는 통로 공간이자, "각 지대에서 생산된 산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여 정보와 부가 집적되는 장소"였다.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축적된 정보와 부를 보증하고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접경선을 따라 "많은 도시와 정치권력이 발생"했다.(40) 수 왕조의 수도로 출발한 장안은 대륙의 서북 지역에 위치한 농목접경지대에서 세계 경제 체제의 거점으로 기능했으며, "농목 복합에 기반을 둔 중국 고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43) 


중국 역사에서 "내중국(중국 본토)과 외중국(만주, 내/외몽골, 신강, 티벳)을 모두 포괄하는 왕조는 몽골족의 원과 만주족이 세운 청"이 있으며, "몽골, 신강 전역과 만주 남반부를 통치권에 넣은 당"(74)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서 장안과 북경이 가장 오랜 기간 왕도王都로 지속한 근본적인 이유는 두 도시가 농목접경선에 있어 왕도의 기능을 하는 데 꼭 필요한, 내중국의 농경 지역에 대한 통치 기능과 외중국의 유목 지역에 대한 외교적 정치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85) 


처음부터 이상理想 도시로 설계된 장안은 "'도시는 대지를 상징하는 네모꼴을 취함으로써 대지를 덮고 있는 둥근 하늘의 중심과 우주축을 통해 연결된다'는 중국의 전통적 도시계획에 기반"(67)하여 네모 형태를 취하였다. 여기에는 "왕도를 하늘이나 신이 정통성을 부여한 도시로 연출함으로써 왕도의 위상을 명확히 나타냄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군사력 집중도가 낮은 상황을 상징의 힘으로 극복"(107)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왕도가 군사력에 바탕을 둔 무력 지배의 한계를 보완하고, 국가 통합에 이바지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현체로 기능한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 전통 사상에는 "지상에 있는 우주의 거울로 왕도를 건설한다는 천문사상, 왕조 의례의 무대로 왕도를 짓는다는 예사상禮思想, 중국 고래로 <주례>가 제시한 이상 도시의 모델,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 왕자王者에게 적합한 토지인지를 감정하는 역경易經 사상" 등이 속한다.(153) 여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세계 종교인 불교가 비한족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기제로 활용되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었다. 전근대에는 극소수의 지배계급을 대상으로 "같은 왕조에 속한다는 공유의식을 형성하면 왕조의 정통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108)


왕조 후기로 가면, 당 왕조의 존재는 기성 사실이 되고 "황제, 관료, 서민 모두 충실한 주거환경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세계의 수도를 수놓은 활발한 상업 활동은 도시 기능을 분화시켜, "성 안팎을 무대로 (백성들의 삶에 밀착된) 민간설화가 널리 유행하였다."(216) 공고한 제국 체제가 이완되면서 장안은 "모든 백성에게 무의미하고 무표정하던 건축 당시의 격자형 도시 공간"에서 "주민이 공유하는 생활 공간"으로 거듭났다. 여기에 "상업 교통로가 안정되고 확대됨에 따라 불교사원을 비롯한 종교 시설로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졌고, 이후 장안은 성지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우주론에 기반을 둔 성스러운 도시가 밟아간 변화의 과정이다."(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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