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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서진 - 청(淸)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사 ㅣ 역사도서관 9
피터 C. 퍼듀 지음, 공원국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4월
평점 :
근대화 패러다임으로 보면 중앙유라시아는 "근대 세계의 주요한 추세들과 격절된, 유달리 고립된 지역"이지만, 고전적인 관점 하에서는 "유라시아의 '교차로'로서 오랜 무역, 정복 그리고 종교적, 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주위를 둘러싼 모든 정주 세계와 연결된 지역"이었다.(75)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을 유목 문명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이후를 쇠퇴기로 보는 관점은 "이미 약해진 시기부터 그 기원으로 역사를 거꾸로 읽음"(30)으로써, "초원의 지배자들이 감행한 혁신"과 우발성을 봉쇄하고, 무대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행위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환경결정론적 명제이다."(34) '중국의 서진'은 이러한 관점을 역사에 성립시킨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말은 기병을 대체할 만한 수단이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전술무기였으며, "유목 경제의 기둥이자, 전쟁의 핵심 요소였다." 정주 문명들은 초지草地가 부족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수요를 충당할 만큼 말을 길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은 초원과 정주 민족들을 연결하는 고정 핀이었다." 농목 문명은 반복해서 마차馬茶 시장을 열었지만, "야만인 약탈자들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굴욕"이라고 역설하는 비판론자들의 공격은 물론, "말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하고, 변경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협정을 강제하는 지도자"(63)의 등장이 강대한 세력 결집을 불러한다는 현실적 난관에 부딪혀, 교역은 수시로 이어지고 끊겼다.
중국 왕조들은 "평화적인 교역 관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동/서 몽골의 정치 역학 관계를 이용하여 "어떤 통치자가 강해질 때마다 다른 편을 지원해, 몽골이 통합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목"하도록 만드는 "계획적인 분할 통치 정책"(89)을 구사했다. 그러나 "장기적 안목을 지닌 초원의 지도자들은 교역 특권을 이용해 자국의 재원을 조성"하여 대륙을 위협하거나 점령하곤 했는데, "이것은 만주족 국가를 건설한 누르하치가 초기에 추구하던 전략"(104)이기도 하다.
몽골과의 타협이나 교역을 거부하고 초원을 완전히 점령해야 한다는 강경론자들의 발언은 국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변방에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을 수반하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명이 변경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내륙으로부터 효율적으로 재원을 모으고 이를 변경으로 수송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략물자를 화폐로 구매할 만큼 상업화가 충분하지 않았고, 한족 통치자 및 관료 세계가 초원과 격리되어 있었으며, 발달된 행정 기구가 부족"하다는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 그렇지만 "개중법과 상둔商屯을 통해 상인들의 이윤 동기를 전략적 방위에 동원"하려 했던 시도는 "후계자들에게 귀중한 경험의 보고가 되었다."(111-2)
"청은 18세기 유라시아의 팽창하는 '식민 제국' 가운데 하나였다."(417) "중앙아시아적 요소를 포함한 신층 청나라"는 몽골 원정을 감행한 강희제의 역동적인 개입을 통해 "전무후무한 팽창 프로젝트의 주체"(181)로 거듭났다. 청의 통치 엘리트들은 "안보와 자급"을 목표로 서진을 감행했으며, 이 지역을 "대규모 영구 군사 주둔지를 부양하고, 스스로 꾸려 나갈 수 있는 곳"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여기에 "이미 확립된 사회구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행정 관료들이 새로운 통치 방법을 실험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 변경의 큰 매력이었다. 신장 점령은 "새로 열린 땅에 식민주의자들의 꿈"을 심는다는 "전 세계 제국 건설자들의 기획과 평행한 것이었다."(419-20)
변경 점령의 첫 걸음인 둔전 개발은 "순전히 군사적인 원조 아래서 진행되었지만, 민간인들이 곧 뒤를 이었다." 청의 관리들은 "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면 경작에 더 큰 동기가 부여되리라 믿고, 민영화, 사유화 추세를 장려"(426)했지만, 군사적 통제의 약화는 제국 통치를 침식하는 원인이 되었다. 변경의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인구들은 하나의 행정 체계로 포용할 수 없었고, 개발은 오직 힘으로만 버틸 수 있는 긴장들을 야기했다." 자립 기반이 허약한 이 지역은 "19세기 동안 (변경을 지탱하던) 자원들이 내지內地로 돌려지면서 와해되기 시작한다."(444-5)
현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대에서 당의 주둔 도시를 거쳐 지금까지 오아시스에서 중국이 연속적으로 존재했다"(418)고 서술하면서 정복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역사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과는 다르지만, 청의 통치 엘리트들도 자신들의 정복 사업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청의 관료들과 황제는 하늘의 뜻이 (준가르의 지도자) 갈단을 패배시켰고, 황제가 적의 죽음을 예견했으며, 갈단은 절망 속에서 자결했다는 신화를 구성해냈다."(586) 옹정제는 정복사업을 "더욱 넓은 지역으로 계속 확장되는 도덕의식"에 비유하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이 '좁고 지역적이고 이기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질책했다."(599)
청의 서진은 '중국'이라는 영토의 크기와 '한족'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18세기 중국은 민족주의의 시대가 아니었지만, 그 속에서 19세기 말 중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정의定義들이 작동하는 틀을 다져놓았다."(656) 중국 역사가들은 결코 "'정복'(쟁취爭取)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통일'이라는 말"(645)을 사용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통치를 확립하여 비한족 민족들을 종속적인 타자로서 병합하려는 제국의 기획이 포함되어 있다."(656) 유목민들을 역사에 무대에서 영구히 추방한 제국의 기획이 민족국가와 연속성을 갖는 것이다.
"국경이 확정되고 팽창이 멈추었을 때, 제국은 내부의 도전에 직면했고 영광의 시절은 끝났다."(697) 중국의 통치자들은 "러시아와 국경선을 확정하고, 준가르 몽골 국가를 멸망"시킨, 1760년을 국가 계획의 완성기로 보았다. "영세 농민들에게 출구를 마련하여 경작지에 대한 중심부의 압력"(715)을 감소해주던 "변경에서의 군사적인 도전이 종료됨으로써 점차 관료 체계에서 역동성이 빠져나갔다."(699) 그럼으로써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과 평행선을 달리던 중국은 "계속적으로 전쟁에 투자한" 유럽에 뒤쳐지게 되었고, 이들이 남쪽 해안에 등장하자 대륙의 약점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네 가지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들이 청을 19세기 서구의 침투에 노출시켰다. 즉, 몽골을 격퇴한 직후 남부 해안에서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한 것, 초원 유목민들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되던 정책들이 남쪽의 해양 환경에서 실패한 것, 중앙의 이해와 지방 세력가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던 협상을 통한 타협이 탈중앙집권화로 옮아가기 시작한 것 그리고 16세기부터 진행되던 상업화가 중앙에 대한 충성심을 침식한 것이 그것이다."(719-20) 대륙이 초원으로, 정복이 침탈로, 제국이 식민지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