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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세오 다쓰히코 지음, 최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8~9세기는 하나의 종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통일 왕조가 유라시아 대륙의 세 거점을 장악한 시기이다. 크리스트교의 프랑크왕국과 동로마제국, 이슬람교의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 불교의 토번과 당 왕조는 "육로와 해로를 잇는 교통과 정보망의 개혁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일종의 세계 경제 체제를 형성"하였다.(60-1) 당 왕조는 유목 민족을 두려운 적수이자 격퇴해야 할 야만으로 규정하고 장성을 쌓아 분리하는 데 주력한 진한秦漢 왕조의 두려움을 반복하지 않고, 농목접경선에 사슬처럼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농목 접경 지대는 옛부터 농업과 유목이라는 다른 생업이 연결되는 통로 공간이자, "각 지대에서 생산된 산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여 정보와 부가 집적되는 장소"였다.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축적된 정보와 부를 보증하고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접경선을 따라 "많은 도시와 정치권력이 발생"했다.(40) 수 왕조의 수도로 출발한 장안은 대륙의 서북 지역에 위치한 농목접경지대에서 세계 경제 체제의 거점으로 기능했으며, "농목 복합에 기반을 둔 중국 고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43)
중국 역사에서 "내중국(중국 본토)과 외중국(만주, 내/외몽골, 신강, 티벳)을 모두 포괄하는 왕조는 몽골족의 원과 만주족이 세운 청"이 있으며, "몽골, 신강 전역과 만주 남반부를 통치권에 넣은 당"(74)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서 장안과 북경이 가장 오랜 기간 왕도王都로 지속한 근본적인 이유는 두 도시가 농목접경선에 있어 왕도의 기능을 하는 데 꼭 필요한, 내중국의 농경 지역에 대한 통치 기능과 외중국의 유목 지역에 대한 외교적 정치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85)
처음부터 이상理想 도시로 설계된 장안은 "'도시는 대지를 상징하는 네모꼴을 취함으로써 대지를 덮고 있는 둥근 하늘의 중심과 우주축을 통해 연결된다'는 중국의 전통적 도시계획에 기반"(67)하여 네모 형태를 취하였다. 여기에는 "왕도를 하늘이나 신이 정통성을 부여한 도시로 연출함으로써 왕도의 위상을 명확히 나타냄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군사력 집중도가 낮은 상황을 상징의 힘으로 극복"(107)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왕도가 군사력에 바탕을 둔 무력 지배의 한계를 보완하고, 국가 통합에 이바지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현체로 기능한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 전통 사상에는 "지상에 있는 우주의 거울로 왕도를 건설한다는 천문사상, 왕조 의례의 무대로 왕도를 짓는다는 예사상禮思想, 중국 고래로 <주례>가 제시한 이상 도시의 모델,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 왕자王者에게 적합한 토지인지를 감정하는 역경易經 사상" 등이 속한다.(153) 여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세계 종교인 불교가 비한족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기제로 활용되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었다. 전근대에는 극소수의 지배계급을 대상으로 "같은 왕조에 속한다는 공유의식을 형성하면 왕조의 정통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108)
왕조 후기로 가면, 당 왕조의 존재는 기성 사실이 되고 "황제, 관료, 서민 모두 충실한 주거환경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세계의 수도를 수놓은 활발한 상업 활동은 도시 기능을 분화시켜, "성 안팎을 무대로 (백성들의 삶에 밀착된) 민간설화가 널리 유행하였다."(216) 공고한 제국 체제가 이완되면서 장안은 "모든 백성에게 무의미하고 무표정하던 건축 당시의 격자형 도시 공간"에서 "주민이 공유하는 생활 공간"으로 거듭났다. 여기에 "상업 교통로가 안정되고 확대됨에 따라 불교사원을 비롯한 종교 시설로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졌고, 이후 장안은 성지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우주론에 기반을 둔 성스러운 도시가 밟아간 변화의 과정이다."(2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