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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혼돈 - 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티모시 브룩 지음, 이정.강인황 옮김 / 이산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명을 세운 "홍무제의 목표는 (자급자족형 농경 국가를 건설하여)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농경지에 묶인 백성들은 최대 20리(12km) 내에서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법으로 정한 최대 범위인 100리(58km)를 통행증 없이 벗어날 경우에는 "장형杖刑 80대에 처해졌다. 만일 신고하지 않고 국외로 나갔다 돌아오면 사형을 당했다." 사회적 신분 이동도 엄격하게 제한받았다.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공장工匠의 아들은 공장이 되어야 했고, 군인의 아들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직업을 바꾼 자에 대한 벌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자에 대한 벌만큼이나 가혹했다."(40)
"홍무제는 상업이 도시지역에 국한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상거래를 금지하거나," 농촌지역에 상업을 위한 장소를 지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100) 그러나 농촌이야말로 가장 실질적인 재화를 생산하는 전진 기지였으며, 생산물의 증대는 소작인과 지주간의 '개인적 유대감'을 "단순한 경제적 계약관계로 변화시켰다."(119) "요역徭役에서 지세地稅로의 전환은 사적 유대가 사라지는 추세를 한층 강화했고, 소작인들은 계약에 명시된 의무 이외의 요구사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120)
"농작물의 생산이 늘어나자 잉여농작물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고, 잉여농작물이 정기적으로 유통되면서 전적으로 상업을 목적으로 한 작물의 재배가 생겨났다." 여기에 국가가 교통통신 수단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 "일상용품의 유통까지 용이하게 만들 정도로 인프라가 개선되었다."(31) 국가의 정보와 물자를 감당하는 수송 부담이 가중되자, "정부의 배를 부리는 뱃사람들은 제한된 분량의 개인 물자를 함께 싣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들은 직접 팔 물건이나 위탁 받은 화물을 실어, 그것을 거래한 이익으로 비용을 조달했다."(74) 결국 명의 상업화는 "자급자족 경제에서 방향을 돌린 것이라기보다는 (역설적으로) 그 결과"(32)인 셈이다.
"경제 관련 텍스트는 명조 서민문화의 일부였다."(87) 명초에는 과거제를 통한 출세길에 오르지 못한 "수만 명의 글을 아는 사람들(신사층)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어 경제생활의 문서화를 돕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90) 홍무제는 "종교개혁기 유럽의 국가들이 신기술에 직면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특정한 책을 금서"로 지정하는 방식 대신, 책에 부과하는 세금을 면제해주고, 백성들에게 주입하기 알맞은 사상을 널리 배포하는 수단으로 인쇄술을 이용했다. "홍무제의 권고와 수상이 담긴 책은 필독서였다."(94)
이는 상업의 발달이 '개명改名된 이기심'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생성하고, 이 관념이 다시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순환구조를 잘 보여준다. 유학자들 중에서도 추쥔과 같은 이들은 "이런 상황에 고무되어 경제의 운용방식이나 상업활동과 관련한 국가의 역할이 적절히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상품을 재분배하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루는 데는 국가보다 상인이 더 낫다"(140-1)는 점을 역설하면서, 국가의 수공업 공장 운영이나 소금 같은 필수품 전매, 해금 정책 등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조편법 시행과 유럽 상인들의 진출에 힘입어 은銀이 결제수단으로 대중화되면서 상업의 발달이 더욱 촉진된다. 1520년대부터 관료들은 해외무역을 더 강력하게 규제했지만, "대외무역 금지는 비생산적이었고 무역과 관련된 폭력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무역과 해금 사이의 긴장은 "기근으로 고통을 겪었던 1540~1550년대에 '왜구'(倭寇)를 비롯해서 이들과 결탁한 중국인 선원 및 해외상선들이 무역이 허락되지 않는 곳을 습격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67)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유교적 신분 질서도 흔들렸다. "일부 상인은 신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고 일부 신사는 그들을 받아들이며 고전을 연구하여 상업을 합리화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았다." 상업이 촉진한 다양한 물건들은 "신사층의 문화적 소일거리로 흡수되었고, 신사층은 예술품을 놓고 품평과 감상을 하는 동시에 이 같은 상품의 생산을 자극했다."(181-2) 그렇다고 이들이 아래로부터 유입을 마냥 반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사층은 국가 관료의 공식 권력과 발흥하는 상인층 사이에서 자신들의 비공식적인 권력이 사그라들자, "시대의 부패를 한탄하고 스스로를 문명의 마지막 대희망"(188)으로 그려냈다.
유럽과의 무역 대금으로 받은 방대한 양의 은은 물론이요, 동전의 액면가를 넘어서는 동銅 같은 귀금속을 "그냥 두기에는 경제가 너무나 활력에 넘쳐"(211) 흘렀다. 이 상황에 걸맞는 새로운 규칙이 요구되었지만, 청빈과 자선에서 근면과 이윤으로 방점을 이동한 기독교와 달리 "유교는 눈앞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준비된 이론도 제공하지 않았다."(204) 명대 후기에, 변화의 조류에 올라타는 "가장 인기 있는 방법은 가족의 자산을 부계 [남성] 친족과 함께 모아서 종족宗族의 공동자산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자본을 집약시켜 상업망에 참가한다는 의의뿐만 아니라 종족 내에서 "존경과 의무의 위계를 세워 연장자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장으로 기능했다."(212)
명말의 상인들은 선대제先貸制를 통해 농촌 노동자들에게 "원료의 형태로 자본을 이전시키고, 그들이 생산한 상품을 통제"했던 유럽 산업자본가들과 달리,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된 직물을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판매하는" 이득에 골몰하였다. 다나카 마사토시에 따르면, 생산자를 고리대로 옭아매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할 수 없게 하는 명의 '원료-생산물 교환제'는 "생산관계를 변화시키기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로 가는) 발전의 자극 요인"(260-1)이 되지 못했다. 명대의 활력이 근세 유럽의 상업발전과 다른 길을 간 이유는 자급자족형 인프라 경제 안에서 생산, 소비되는 상품의 일부가 시장 경제를 통해 유통되긴 했지만, "시장 경제가 인프라 경제를 인수하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용해시킬 정도로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262)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정체성의 진화"를 거듭한 신사층은 "교육받은 엘리트와 돈 많은 엘리트라는 두 줄"로 사회를 단단하게 구속했다. 신사층은 겉으로는 향락과 퇴폐를 경고하면서도 상인과의 거리를 "축소하기는커녕 강화하는 방식"(330)으로 문제를 해소해 나갔다. "상업망이 없었다면 많은 신사층은 왕조교체기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청대의 신사층과 상인의 융합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제자리를 고수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가부장주의와 위계, 지배계급의 정의라는 보수적 가치"(341)를 붙들고 중국의 사회구조를 지탱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