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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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흥망성쇠를 분석하는 이론으로는 지리 가설, 문화 요인 가설, 무지 가설 등이 있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농업 생산성이 바닥을 치는 이유는 토양의 품질 때문이라기보다는, "토지 소유구조, 정부 및 제도 때문에 농부들이 인센티브를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88) 문화는 인간 자원을 움직이는 내부 동력 중의 하나이지만, 새로운 기술과 제도가 도입되면 쇠퇴의 길을 걷곤 한다. 부유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무지 가설은 "지도자와 정책입안자를 계몽하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실상 실패의 가장 큰 걸림돌은 그 사회가 직면한 제도적 제약이다.(108) 19세기 이후 심화된 세계 불평등은 농업 생산성의 차이가 아니라 "산업기술 및 생산 기반의 불공정한 분배에서 기인한다."(89) 국가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정치와 정치제도다."(27)


국가의 경제 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착취적 경제제도extractive economic institutions는 충분한 중앙집권화와 다원적 정치제도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는 체제이다. "착취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 간의 시너지 관계는 강력한 순환 고리feedback loop를 만들어낸다. 착취적 정치제도 덕분에 정치권력을 쥔 엘리트층은 제약이나 반대 세력이 거의 없는 경제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또 향후 정치제도와 그 발전 방향도 멋대로 선택할 수 있다."(127) 포용적 경제제도inclusive economic institutions는 시민 사회의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시장이 존재하고 기술 및 교육이라는 번영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충분히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체제를 가리킨다. 다원주의pluralism와 포용적 경제제도가 중앙집권화를 요구하는 이유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과 그에 따른 일정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없다면 정부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 법질서를 강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126)


착취적 정치 체제도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생산성이 높은 활동에 자원을 분배하거나, 엘리트층의 입지가 확고해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는 포용적 경제 제도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경우에는 성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착취적 제도 하에서 지속적인 성장이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정치제도와 경제제도 모두 착취적이라면 창조적 파괴와 기술 변화를 유발할 인센티브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정 기간 정부가 강제로 자원과 인력을 분배해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한계점에 다다르면 1970년대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성장은 멈추고 만다."(143) 그뿐만 아니라 착취적 정치 체제는 막강한 정부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늘 이면에 도사리고 있어서, "그런 분쟁이 내전으로 비화되거나 심지어 정부를 완전히 와해 또는 몰락"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본질적으로 빈약하기 마련이다.(144)


흑사병 발발(1346~ )이라는 역사의 우연은 노동인구의 급감을 가져와 그전까지 억눌려 지내던 농노의 형편을 개선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는 농노를 영속적으로 영주의 토지에 얽어매던 봉건제의 약화를 가져왔고, 그전까지 별다른 차이가 없던 동서유럽의 정치·경제 제도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1600년 무렵이 되면 "서유럽의 노동자는 봉건적 세금이나 벌금, 규제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호황을 맞은 시장경제의 핵심 일원이 되었다. 동유럽 역시 그런 경제 호황을 맞았지만, (이는) 식량과 농산품에 대한 서유럽의 수요를 맞추려고 농노를 강제로 부린 덕분이었다."(154-5) 도시 기반이 미약한 동유럽에서는 농노들이 대지주에 맞서 세력화에 실패했고, 더욱 비참한 재판농노Second Serfdom로 전락했다. 동유럽의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를 수호하는 지배층들은 작은 차이가 쌓여 제도 분화institutional drift가 축적되고, 마침내 결정적 분기점에 이르는 양상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베네치아는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는 포용적 제도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일구었다. 베네치아는 경제면에서 자본을 제공하는 자본가와 무역을 실행하는 여행가로 구성된 합자회사 제도인 코멘다commenda를 발전시켰고, 정치면에서 대평회의Great Council와 도제doge 지명 위원회를 창설하고, 권력을 제한하는 도제의 취임 선서를 도입했다. 신흥 부자들은 기존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에 도전했고, 경제 성공의 과실을 나누어가졌다. 그러나 1286년의 헌법 수정은 "이른바 ‘베네치아 폐쇄’의 전주곡이었다." 대평회의는 "외부인에게 문을 닫아걸었고 초기 의원은 세습귀족으로 변모했다. 이 체제는 1315년 확정되었다. 베네치아 귀족의 공식 명부인 ‘황금의 책Libro d’Oro’이 만들어진 것이다." 1324년부터는 "개인이 무역하려면 높은 세금을 물어야 했다. 장거리 무역은 이제 귀족의 전유물이 되었다. 베네치아 번영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229-30)


1445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모두가 인쇄술을 바람직한 발명품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1485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는 이슬람교도의 아랍어 인쇄 행위를 분명하게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1727년이 되어서야 "뮈테페리카는 인쇄소 설립을 승인받았지만 인쇄하는 책마다 이른바 ‘카디’라고 부르는 종교 율법학자 세 명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 오스만제국에서 "인쇄술은 엘리트층이 지식을 장악하던 기존 질서를 파괴할 위협으로 여겨졌다. 술탄과 종교 집단이 두려워한 것은 인쇄술이 초래할 창조적 파괴였다. 이들의 해법은 인쇄술을 금지하는 것이었다."(312-4) 중앙집권화 과정이 극심한 절대주의 체제를 불러오는 사례도 많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보야르Boyars라는 구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근대 관료주의 정부와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자신을 차르의 자리에 앉혀준 ‘귀족 회의Boyar Duma’마저 철폐했다."(316)


반면 명예혁명(1688)은 구 시대의 유산을 일소했다. "정부는 투자와 거래, 혁신을 꾀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제도를 채택했다. 아이디어에 대한 재산권인 특허권을 부여해 혁신을 추구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등 사유재산권도 단호하게 집행했다. 법질서도 수호했다. 잉글랜드 법을 온 시민에게 적용한 것은 역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의적 과세는 중단되었고 독점은 거의 철폐되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상업 활동을 적극 장려했고 국내 산업 육성에 힘썼다. 이를 위해 산업 활동 확대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한편 잉글랜드 해군을 총동원해 상인의 상업 활동을 보호했다. 사유재산권을 완연히 합리화함으로써 잉글랜드 정부는 도로망, 운하에 이어 훗날 철도에 이르기까지 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사회 기간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토대 덕분에 사람들이 느끼는 인센티브가 완전히 바뀐 것은 물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 산업혁명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157)


잉글랜드의 사례를 보면 "다원주의 및 포용적 제도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사적 우발성과 광범위한 연합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307) 명예혁명은 정치 권력을 국왕에게서 의회로 이동시키는 최종 기착지였고, 무역과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의회 귀족층의 이해관계가 국가 정책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예혁명이 가져다 준 중요한 제도적 변화가 한 가지 더 있다. 의회는 튜더왕조가 불을 지핀 중앙집권화 과정을 지속해나갔다. 정부가 제약만 늘리고, 경제 규제 방식만 바꾸거나 여기저기 돈만 쓴 것은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정부의 기능과 역량이 확대되었다. 이 역시 중앙집권화와 다원주의 간의 상관관계를 증명해준다." 1688년 이후 의회는 "과세를 통해 수입을 늘리는 정부의 역량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1690년 1,211명에 불과하던 소비세 담당 관료가 1780년에는 4,800명으로 크게 불어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변화였다."(285-6)


"에스파냐에서는 잉글랜드의 경제성장과 제도적 변화를 이끌었던 과정이 현실화되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이사벨라와 페르디난트는 세비야의 상인 길드를 통해 새로운 식민지와 에스파냐 간 무역을 주관했다. 이 상인들이 모든 무역을 통제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얻는 부의 일정 지분을 왕실이 차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식민지와의 자유무역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이들이 "무역을 워낙 편협하게 독점한 터라 식민지와 무역 기회를 통해 광범위한 상인 계층이 부상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320) 잇따라 비싼 전쟁을 치르는데 여념이 없던 카를로스 5세는 1520년 잉글랜드 의회와 비슷한 조직인 코르테스에 세금 인상을 요구했다. 도시 엘리트층은 이를 기회 삼아 개혁과 권한 확대를 요구했지만, 카를로스는 왕실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무참히 진압했다. "1664년 이후 코르테스는 개원조차 하지 못하다가 거의 150년이 흘러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고서야 부활할 수 있었다."(321-2)


"신석기혁명에서 산업혁명까지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나아지지 않은 주된 이유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술혁신은 인류사회에 번영을 가져다주지만, 옛것을 새것으로 갈아치우고 특정 계층의 경제적 특권과 정치권력을 파괴한다." 기술혁신이 "사회에 번영을 가져다 준다 해도 그 때문에 촉발되는 창조적 파괴 과정은 옛 기술을 사용해 일하는 이들의 생계를 위협한다." 더 중요한 측면은 윌리엄 리의 양말 짜는 틀 편물기계(1589)처럼 중대한 혁신은 "정치권력의 판도마저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리에게 특허를 거부한 것은 사실 그의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될 백성이 가여워서가 아니었다. 정치적 패자로 전락할 것이 두려웠던 것뿐이다. 리의 발명품으로 곤경에 처한 백성이 정치 불안을 초래하고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268-9)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가혹한 식민지 정책의 시달림을 받아 발전의 퇴보가 일어났다. 네덜란드는 "1618년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이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원주민들을 학살, 착취하면서 대농장 사회를 건설하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위협을 피하고자 "여러 나라가 수출용 작물 재배를 포기하고 상업 활동을 중단했다. 자급자족 정책을 견지하는 편이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것보다 안전했기 때문이다. 1620년, 자바 섬에 있는 반텐은 네덜란드의 침범이 두려워 후추나무를 죄다 잘라버렸다."(359-60) 아프리카를 강타한 노예무역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나마 유지되던 질서와 정통성 있는 정부당국을 파괴해버렸다. 노예 획득 수단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납치하거나 소규모 공격을 통해 포로로 붙잡기도 했다. 노예를 만들기 위해 법까지 동원하는 지경이었다. 어떤 죄를 짓든 노예로 전락시켜 징벌했다."(365)


19세기 들어 점차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시에라리온에서 노예제도가 마침내 철폐된 것은 1928년이 돼서였다. 애초 수도 프리타운이 18세기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돌아온 노예의 안식처로 마련된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예무역에 기반을 둔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 때문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던 세계의 여타 지역과 달리 경제가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다."(371-2)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13년 ‘원주민 토지법Natives Land Act’을 제정하여,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밖에 안 되는 유럽인에게 87퍼센트의 토지를 주었다."(381) 1913년 이후 "엄청난 수의 아프리카인이 백인이 차지한 자기들 땅에서 쫓겨나 좁은 자치지구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원주민들은 정부가 의도했던 대로 "백인 경제권에서 생계유지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면서 연명했다.(383)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뒷받침하면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포용적 정치제도 덕분에 포용적 경제제도가 마련되면 소득이 더 공평하게 분배되고 힘을 얻는 사회계층이 한층 더 넓어지며 정치면에서도 더 공평한 경쟁의 장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권력을 찬탈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이 낮아지고, 착취적 정치제도를 재창출할 동기 역시 약화시킨다."(442) 선순환 구조 속에서 권리를 자각한 잉글랜드 대중은 "단순히 투표권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의석을 바랐다. 이른바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의 본질이었다."(446) 점진적 변화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무리수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프랑스혁명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첫 실험은 공포정치로 이어졌고, 1870년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설 때까지 왕정복고에 이은 민주주의 복원 과정을 두 차례나 되풀이했다."(454)


"제도적 부동浮動은 작은 차이로 이어지지만, 결정적 분기점을 통과하면서 제도적 확산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제도적 확산은 이어 한층 더 결정적인 제도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다음 결정적 분기점이 도래할 때 그 영향력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열쇠는 역사가 쥐고 있다. 제도적 부동을 통해 결정적 분기점이 찾아왔을 때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610) 결정적 분기점을 만드는 이 역사적 과정은 숙명이나 불가피성을 띠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contingent 사건들이 겹쳐서 나타난다.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패한 국가들의 공통점은 바로 착취적 제도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다원주의의 태동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646) 스스로 잘 돌아가는 제도란 없으며, 집권층의 정치·경제적 실패와 무능에 대한 "정보가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사회 전반의 권한강화를 조율하고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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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서의 철학사 - 존재에 관한 인간 사유의 역사
훌리안 마리아스 지음, 강유원.박수민 옮김 / 유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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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종교는 인간에 의해 수용되고 신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진, 하나의 확실성이다. 그것은 계시된 것이다." 예술 또한 "인간 자신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확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인간은 자신의 삶 전부를 해석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확실성을 스스로 쟁취하거나 직접 만들어내지 않으며, 이 신념 자체를 정당화되거나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기 고유의 증거를 갖지 못한다." 반면 철학은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자율적인 확실성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것은 자신의 타당성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면서 증명한다. 철학만이 입증을 추구한다. 철학은 항상 자신의 확실성의 근거를 갱신한다."(20-1)


"최초의 인간은 주변 사물에 대해 궁금해했으며, 그러고 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궁금해했다." 철학은 인간과 동떨어져 단독적으로 있는 듯한 사물에 대해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 시작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완전히 새로운 태도이며, 신화적인 태도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관상적 태도라 부를 만하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상 처음으로 희랍에서 등장했으며, 그때부터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생겨났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사물만이 참이나 거짓일 수 있다. 사물들의 진리에 대한 이러한 깨우침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 경이驚異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철학의 뿌리다."(23-4)


"철학사는 철학자들의 견해들에 관한 박식한 서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실재 내용을 제대로 상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사는 틀림없이 철학이다." 각각의 철학 사상은 "선행하는 모든 체계들을 필요로 하고 포함"하기 때문에, 철학은 "모든 철학 체계들의 참된 역사로 이루어진다." 다른 관점에서 봐도 "각각의 철학 체계는 최고 실재, 즉 완전한 진리를 오직 자기 자신의 밖에서만, 다시 말해서 그 체계를 계승하려는 철학자들의 사유 속에서만 성취한다. 모든 철학함은 과거의 총합에서 유래하여 미래로 나아가며, 그리하여 철학사를 진척시킨다. 요약하자면 이것이 철학은 역사적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다."(25-6)


희랍인들이 보기에, 세계는 늘 현존해왔고, 따라서 "모든 물음은 이 세계를 상정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출발한다." 자연으로 해석되는 이 세계는 "구체적인 실재가 등장하거나 생겨나는 하나의 근원적인 원리"이자, "변화할 수 있으며 대립자들로 규정되기도 하는 많은 사물"을 담고 있는 양극성의 세계이다. "존재, 이론, 로고스"로 특징지어지는 희랍 사유는 세계를 질서 있고 법칙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이 코스모스cosmos라는 개념이다. 이성은 그 세계의 이러한 법칙적 질서에 편입되어 통제되고 인도받을 수 있으며, 인간사에서 이러한 법칙적 질서의 구체적인 형식은 폴리스에 사는 인간들의 정치적 공존"으로 나타난다.(32-3)


"퓌시스physis(자연)는 철학의 첫 단계 전반의 주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사상가들을 퓌시올로고이physiologoi(자연철학자들)라 불렀다."(35)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무엇이 참된 사물인지, 다시 말해서 사물은 그것들의 수많은 현상들 뒤에서 영원히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궁금해했다." 즉, 사물의 존재 자체에 스며들어 있는 다수성과 모순을 넘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물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근원들을 탐색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철학의 최초 물음이 '이러한 모든 사물은 참으로 무엇인가' 또는 '모든 사물을 출현시키는 원천인 자연[본성]이란 무엇인가'이다. 희랍 철학의 역사는 이 물음에 대한 다양한 답변들로 이루어져 있다."(37)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철학은 형이상학과 존재론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하게 사물들을 논의하려고 하지 않았고 본질의 측면에서 본 사물들, 즉 '있는 것들'로서의 사물들을 논의하려고 했다. 있음, 에온eon, 온on은 파르메니데스의 위대한 발견이다."(48) 누스Nous(지성)는 '있음'을 대상으로 '있는 것'의 길(진리)와 '있지 않은 것'의 길(막다른 길)을 탐구한다. 감각은 '사물들'을 대상으로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길(의견의 길)을 탐구한다.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유에서 "두 세계의 분리, 즉 진리의 세계와 가상들의 세계의 분리가 시작되었음을 본다. 후자의 세계를 참된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류다. 이 분리는 희랍 사상에서 결정적인 것이 된다."(53)


기원전 5세기 초 새롭게 시작된 철학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한 탐구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의 이상형이 "잘생기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품위 있는 사람, 즉 우리가 칼로스 카가토스kalos k'agathos라고 불렀을 만한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완벽한 시민, 즉 폴리테스polites가 이상형이 되었다." 이제 희랍 사유의 중심에 "퓌시스가 아닌 개인의 본질의 전개라는 의미에서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행복)가 들어섰다." 이 새로운 개념의 결과는 모든 사람이 누스를 가지며 누스는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라는 '민주정'의 수립이었으며,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에서 "파이데이아paideia, 즉 정식 교육"을 수행하였다.(74-5)


플라톤은 "사물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86) 플라톤이 명명한 이데아는 "사물들의 참된 존재를 포함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자들이다." 이데아들은 "전통적으로 있음에 요구되었던 술어들을 가지며, 감각이 지각하는 사물들은 있음을 가질 수 없다. 이데아들은 단일하고, 변화하지 않으며, 영원하다. 이데아들은 비존재를 포함하지 않는다."(90-1) 인간은 이전에 "자신이 관상했던 이데아들에 관한 아남네시스anamnesis(상기)"를 사물들에서 촉발한다. 그러므로 "앎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에로스eros는 "아름다움의 이데아 자체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우리를 이데아의 세계로 이끈다."(92-3)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포이에시스poiesis는 희랍어로 '제작, 생산'을 의미한다. 프락시스praxis는 실행인데, 이 실행의 목표는 실행 자체이지 실행과 무관한 어떤 것이 아니다. 프락시스는 자신 안에 목표를 가지기 때문에 포이에시스보다 우위이며 자기-충족적―아우타르케이아autarchia(자족)―이다."(113) 포이에시스가 본질적으로 자기-충족적이지 않은 것은 "그 목표가 자기 바깥에, 즉 생산물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프락시스는 목표가 생산물, 에르곤ergon이 아니라 활동하는 과정, 활동성 또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이다." 신의 존재 양상인 테오리아theoria(관상)는 프락시스의 한 유형으로서, "사물들의 총체성 속에서 사물들의 존재를 보고 깨닫는 활동이다."(120)


"실체usia는 질료hyle와 형상morphe/eidos이라는 두 요소의 합성물로 해석된다. 질료는 하나의 사물이 무엇으로 구성되느냐에서, 그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며, 형상은 하나의 사물을 그것 자체이게 하는 것이다."(129) 질료와 형상은 잠재태와 현실태의 관계를 보여준다. 잠재태는 자신이 품은 가능성 안에서 현실태로 나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운동이란 '가능한 것인 한에서 가능태를 실현하는 것'이다. 즉, "잠재적인 것이 가능성으로 남아 있지 않고 자신을 실현한다면 거기에는 운동,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성이 있게 된다."(130-1)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세계의 절대적인 계기로서, 운동/생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기독교 사상의) 창조자는 아니다."(133)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는 형이상학 자체에 관한 관심이 사라지고, 윤리학의 물음들에 집중한다. 폴리스의 붕괴와 제국의 도래라는 혼란기를 맞아 고대인들은 "자립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사람, 완전한 평온과 균형 속에서 필수적인 삶을 사는 사람, 철학자의 삶의 방식―아리스토텔레스의 관상적 삶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 삶―을 구현하는 사람을 규정하는 특징들을 발견"하는 데 힘쓴다.(156) 여기에는 행복을 극단까지 몰고 나아가 거기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퀴니코스 학파, 금욕주의와 덕을 통해 일상의 온건하고 평화로운 쾌락을 추구한 퀴레네 학파, 인간 이성을 우주의 본성에 합치하고자 한 스토아주의, 철학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에피쿠로스주의가 있다.


플로티누스는 범신론과 반反유물론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체계의 존재론적 위계질서의 원리는 일자이며, 이 일자는 존재이기도 하고 좋음이자 신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들은 일자로부터 유출된다. 유출된 것 중 첫째는 정신의 세계이자 이데아들의 세계인 누스다. 누스는 자신에 대한 상기, 즉 반성을 전제하며, 그에 따라 이원성을 전제한다. 둘째는 누스의 반영인 영혼이다. 존재의 가장 낮은 층위는 물질이며, 이 물질은 거의 비존재다."(174-5) 세계 존재는 무無가 아니라 일자로부터 산출되는데, 이는 "공空을 수용하지 않고도 창조를 생각해내려는 시도다. 이것은 유대-기독교 사상에 의해 도입된 창조 이념에 맞닥뜨렸을 때 희랍 정신이 보인 특징적인 반응이었다."(176)


"기독교는 세계와 인간의 현존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전적으로 새로운 이념을 도입한다. 바로 창조라는 이념이다."(183) 성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핵심은 '신과 영혼'이다. 첫째, "그의 사변의 핵심은 신이고, 그의 형이상학적 노고들도 신을 향한다." 둘째, 그의 정신 철학은 "내밀함 속에서 스스로를 고백"한다. 셋째, "지상에 살고 있는 이러한 정신이 신과 맺는 관계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신국의 이념으로 이끌고, 이는 역사 철학으로 이어진다."(199-200) <고백록>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려는 최초의 시도"로서, 데카르트가 인도한 "근대의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자아와 함께 혼자 남았을 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심대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207-8)


"9세기가 시작되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성과로서 학교들이 등장하며, 그 학교들에서 일구어낸 특별한 지식으로서 스콜라주의가 함께 등장한다." 중세 대성당들이 막대한 익명의 노동으로 세워진 것처럼, 스콜라주의도 "개별자의 인격이 강조"되지 않고, 중세 말까지 공동의 토대 위에서 진행된다.(216-7) 스콜라주의는 철학과 신학의 복합체이며, 그것은 "추구(quaerere)라는 근본적인 통일 안에서 믿음과 이해가 동등하게 강조되어야만 하는, 안셀무스의 명제인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중세 스콜라주의는 이 두 요소 사이에서 움직이며, 이러한 추구 안에서 결합된다."(219-20)


스콜라 학파에 따르면 "천지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며, 더 정확하게는 무無와 주재자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hihilo sui et subjecti)이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ex nihilo nihil fit)'는 중세 철학의 원리는 "신의 개입 없이는, 정확하게 말하면 천지창조 없이는 무로부터 아무것도 나올 수 없음을 뜻한다."(221-2) 세계는 신에 의해 자신의 현존을 유지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신의 활동은 지속적이며, 계속해서 매 순간 세계를 현존하게 해야 한다. 이는 지속적인 창조와 같다." 그러나 유명론자들은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세계에 부여했던 존재만으로 세계가 자체 존립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223)


12세기까지 널리 받아들여진 실재론은 "보편자들이 사물들(res)이라고 주장했다. 실재론의 극단적 형식을 지지한 사람들은, 보편자들이 그것들의 항목 아래 있는 모든 개별자들 안에 현전하며 그 결과 개별자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고 우연적 차이들만 있다고 믿는다." 13세기에 등장한 온건 실재론자들 역시 개별자가 참된 실재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개별자의 실재성은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에 따라 그 종種으로부터 획득된 것이다. 성 토마스는 "하나의 개별자는 양으로 규정된 질료(materia signata quantitate)"일 뿐이며, 질료를 수량화하는 '개별화의 원리'에 따라 질료 안에 있는 보편적 형상이 개별화한다고 보았다.(226-7)


오캄에게 "이성은 인간에게만 관련된 것이다. 이성은 인간의 특성이지 (전능한) 신의 특성이 아니다." 중세 말에 이르면 "신은 더 이상 인간의 중대한 이론적 주제가 아니게 되고, 인간은 신으로부터 분리된다." 이제 인간은 이성의 탐구로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영역들에 관여한다. 그것은 "첫째가 인간 자신이고, 둘째가 당시 놀라운 질서가 발견되고 있었던 세계이다."(232)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의 자연학은 "운동과 원인들 자체를 이해하고자 했으나, 근대 자연 과학은 운동과 원인들에 관한 수학적 상징들에 만족한다." '자연의 책은 수학적 기호들로 쓰인다'고 말한 갈릴레오처럼 우리는 "운동 중의 변화량만을 측정할 뿐, 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은 추구하지 않는다."(229)


아랍 철학(이슬람 스콜라주의)의 "주요 주제는 쿠란에 대한 이성적 해석이며, 서구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철학의 관계들"이다.(254) 아비센나(이븐 시나)가 도입한 지향intentio 개념[영혼 밖에 존재하는 대상을 향하는 제1지향(intentio prima)과, 영혼 안에 존재하는 대상을 향하는 제2지향(intentio secunda)]은 "성 토마스의 철학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256) 아베로에스(이븐 루슈드)는 정신을 "입증의 인간, 개연성 있는 추론들에 만족하는 변증법의 인간, 그리고 수사학과 이미지들에 만족하는 설득의 인간" 세 부류로 구별한다. 따라서 쿠란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하나의 사물은 신학적으로 참이면서도 철학적으로는 거짓일 수 있으며, 이는 역으로도 성립한다."(257-8)


성 토마스는 철학과 신학을 분명히 구별한다. "신학은 신적 계시에 토대를 두며, 철학은 인간 이성의 활동에 토대를 둔다." 다만, "신은 그 자체로 진리이고 그의 계시는 의심받을 수 없지만, 올바르게 사용된 이성 또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 성 토마스는 "믿음의 대상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부분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태도는 "믿음과 신학을 주제로 하는 논제들에 이성을 적용하는 이른바 자연 신학"으로 이어진다. "철학적 이론과 계시된 교리 간의 부조화는 그 이론이 오류"임을 뜻하고,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계시에 종속되지만, "참된 앎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은 철학적 이성 자체다."(278-9)


"성 토마스와는 반대로 스코투스는 의지주의자다." 그는 "의지는 필연성과 관계가 없다"(voluntas nihil de necessitate vult)고 말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의지가 지성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295) 스코투스의 의지주의는, "신과 이성을 분리하고 인간의 이성적 사변의 영역에서 신을 없애는 태도로 전환된다." 여기서 "신의 죽음이라 불릴 만한 여정이 시작되고, 이러한 여정의 국면들은 근대 역사의 국면들이 된다." 아울러, 학문을 "사물들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기호들 또는 상징들에 관한 학문"으로 보는 태도는, "르네상스 시기의 수학적 사유의 정점을 위한 길을 예비한다." 이제 근대 철학은 "진리에 대한 갈망보다는 오류의 두려움에 의해 더욱 고무될 것이다."(296-7)


쿠자누스는 앎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감각senus을 통해 얻는 앎은 이미지들만을 제공한다. 둘째, 독일 관념론자들이 '오성Verstand'이라고 번역한 라티오ratio(이성)는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그것들의 다양성에 따라 이해한다. 셋째, 독일 관념론자들이 '이성Vernunft'이라고 부른, 지성intellectus은 우리를 신의 진리로 이끈다. 그러나 이 진리는 무한자가 불가해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며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알게 된다. 이것이 참된 철학이며, 최고의 앎은 '박학한 무지(docta ignorantia)'다." 쿠자누스에게 "신은 대립자들의 합일(coincidentia oppositirum)로서 나타난다."(324-5)


쿠자누스가 볼 때 "안다는 것은 더 이상 사물 자체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유사한 것을 취하는 것이다." 즉, "인간 정신의 진리는 신의 정신의 진리의 모상이며 닮음이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신에 관심을 갖는다." '신의 전개(explicatio Dei)'인 쿠자누스의 세계에서 "무한자의 단일성은 세계의 다수성과 다양성 안에서 해명되고 현현된다." 이 세계가 최상의 세계라는 쿠자누스의 생각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낙관주의에 차용"되고, 세계는 질서이자 이성이라는 원리는 "헤겔에 의해서 공언"된다. 세계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무한하다는 생각은 "거의-무한적인 것을 자연학적, 수학적 감각 세계로 확장"하면서 근대 형이상학의 토대를 이룬다.(327-8)


데카르트 철학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인 자신의 의심, 즉 깊은 불확실성과 함께 출발한다."(352) 엄밀하게 말하면, "데카르트 증명의 출발점은 신이라는 명석 판명한 개념과 함께 받아들이는 자아의 실재성이다. 나의 유한성 및 불완전함은 나 자신 안에서 내가 발견한 관념인 신의 무한성 및 완전함과 대조된다. 내 안의 긍정적인 것을 무한성으로까지 끌어올리고 모든 한계들을 제거함으로써 나는 지적으로 나 자신을 신에게까지 끌어올린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신의 모상을 가지며, 이 모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적 앎에 도달하게 한다."(358-9) 데카르트 이후로 관념은 실재와 합치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실재 자체로 간주된다."(360)


스피노자는 "실체 또는 신은 현존하는 모든 것이며, 만물은 신의 작용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은 '만물의 근원'인 동시에, '생겨나고 싹트는 사물들 자체'다. 스피노자도 신의 현존을 필수적으로 정초하지만, 신격의 입지도 자연 자체에 귀속된다. "스피노자에게 존재는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신의 존재다."(382-3) 이 세계는 목적론적 결말을 갖지 않으며, "모든 것은 필연적이고 인과적으로 규정적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이 자유롭지 않음을 알게 되지만, 그러한 앎을 가져다주는 '이성은 자유'다. 스피노자에게 "사물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하나의 욕구이자 분투"이며, 인간의 본질은 (지속적인 현존을) "욕구하는 것"이다.(385-6)


영국 철학은 대륙의 사상과 두 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첫째는 "엄밀한 형이상학적인 물음들과 덜 관련되고, 인식 이론(물론 형이상학이 항상 전제되는) 및 국가 철학과 더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둘째는 "선험적이고 수학적인 성향의 이성주의와 대조되는 감각론적 경험주의"의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영국 철학은 "앎의 원천으로서 감각 경험을 가장 우선"한다.(407) 이런 관점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손과 정신'이 동등하며 "물질적, 정신적 도구들"이 거기에 참된 효력을 더해준다고 보았다.(409-10) 홉스는 인간이 자유를 행사하는 방식으로 "권리 행사, 권리 포기, 권리 양도"를 꼽았으며, 권리의 상호 양도 개념에서 "정치 공동체의 이념"을 끌어낸다.(413)


"로크에 따르면 관념들은 대륙의 이성주의가 생각했던 것처럼 본유적인 것이 아니다. 영혼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서판tabula rasa이다." 경험은 "감각들을 통해 얻는 외재적 지각 또는 감각과 심적 상태들에 대한 내적 지각 또는 반성"으로 나뉜다. "어느 경우에나 감각에 의해 들어온 자료들에는 반성이 작용한다." 우리의 정신은 단순 관념들을 결합하거나 연합하는데, 여기서 '추상화, 일반화'가 이루어진다. 로크의 경험주의는 "형이상학의 중대한 전통적 주제들과 관련한 앎을 제한"하며, 흄의 회의주의에서 정점을 이룬다. 훗날 칸트는 이러한 인식론적 불신에 대처하고자 "이성적 앎의 타당성과 가능성의 문제라는 난제를 정식화"한다.(419-20)


"이신론, 자유와 대의 정부를 옹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 관용, 경제 이론" 등의 경험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계몽주의는 "역사와 사회 규범들을 재검토함으로써 기독교 신앙부터 절대 군주정에 이르는 모든 전통적 신념들에 대해 비판"한다. 계몽주의는 "모든 학적 지식을 집성하고자 했으며, 폭넓은 대중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신학적인 문제들을 말할 것도 없고, 엄밀하게 철학적인 문제들은 이차적인 것으로 격하된다."(428-30) 볼테르에 이르러, 역사는 더 이상 "사건들에 대한 단순하고 연대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국민들의 습속과 정신"을 다루게 되며, "국민들은 각기 고유한 정신과 습속을 가진 역사 구성단위로 등장한다."(433-4)


루소는 "국가를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며, 개별자가 사회에 선행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국가를 추동하는 힘은 "모든 개별자들의 의지의 총합"인 '전체 의지(volonte de tous)'가 아니라,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의지의 총합인 '일반 의지(volonte generale)'다. 루소의 사유는 "민주주의의 원리이자 보편적인 참정권의 원리"를 천명하지만,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할 권리가 있는 소수자들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자들이 정치 공동체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일반의지를 수용하는 문제"를 남긴다.(436) 루소의 영향을 받은 독일에서는 계몽주의의 차가운 이성에 대한 반동으로서 "중세와 독일 문화에 대한 새로운 존중의 태도가 출현한다."(438)


칸트는 "앎의 세 가지 양상들, 즉 감성(Sinnlichkeit), 반성하는 오성(Verstand), 그리고 이성(Vernuft)을 구별한다." 순수 이성은 '선험적 원리들'에 근거하며, 개별자의 이성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의 이성"이다. '실천 이성'은 '순수 이성'과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천 이성 또한 순수하며, 사변적이거나 이론적인 이성과 대립"한다. 따라서 칸트의 의도를 "온전하게 표현하려면 '사변적'(또는 이론적) 순수 이성과 '실천적' 순수 이성이라 할 수 있다."(468) 칸트는 전통적 사변 형이상학이 "어떠한 가능한 경험도 넘어서 있는 대상들―영혼, 세계, 신―에 대한 실재적인 앎을 선험적 사유로 얻으려는 시도"이기에 헛되며, 그러한 앎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476)


그러나 형이상학은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본성적 경향으로서 계속 현존한다. 그리고 형이상학의 대상들은 칸트가 이념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러한 이념들은 "직관에 대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규제적인 효용"만을 갖는다. 그러나 이론 이성이 이를 증명할 수 없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영혼이 불멸할 것처럼, 자신이 자유로운 것처럼, 신이 현존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초월적 이념들의 "절대적이고 무제약적인 타당성"은 "실천 이성의 요청들로서 다시 등장한다."(477) 실천 이성이 절대적으로 자명한 요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인간은 "그가 도덕적 인격인 이상 자유로우며, 그의 자유는 실천 이성의 요청"이기 때문이다.(479)


헤겔은 <정신 현상학>에서, "정신이 철학의 시원에 이르는, 정신의 내재적 변증법을 설명한다." 헤겔은 "단순한 서술과, 내가 사물들에 대한 개념들을 가지는(실재적 앎이 있는 학學의 상황) 개념적 앎을 구별한다. 그러나 절대적 앎은 여전히 요구된다. 절대적 앎은 모든 것을 포섭하는 앎이다. 절대적 앎이 되려면 그것은 어떠한 것도, 오류조차도 자기 외부에 남겨놓을 수 없다. 그것은 오류로서의 오류를 포함한다. 역사는 인간 정신의 모든 요소들, 즉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오류로 등장하는 요소들까지도 포함해야 한다."(517) 변증법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필연적인 이행이 있고, 각 단계는 이전 단계의 진리를 포함한다." 각 단계는 "보존됨과 동시에 극복된다."(518)


절대적 시원인 존재는 "순수한 존재, 절대적 존재다." 헤겔에 따르면 "존재는 무규정적 무매개성(das unbestimmt Unmittelbare)이다." 이 존재는 규정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아닌 것과 자신을 구별"짓지 않는다. "내가 존재를 생각하고자 할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無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존재에서 무로 이행한다. 물론 이러한 이행은 존재 자체가 하는 것이지 자아가 하는 것은 아니다."(520-1) 존재는 무로 이행하고, 무는 존재로 이행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차원을 넘어 올라선다(아우프헤벤aufheben). "존재와 무가 서로를 배제하는 이런 방식은, 생성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통일로 보존되고 올라서는 존재 양상이다."(523)


"헤겔에서 체계는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체계는 진리가 현존하는 방식이다. 체계에는 자립적인 진리들이 없고, 그것 자체로 참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진리는 다른 모든 진리들에 의지하고 근거한다. 이런 구조는 선형적 구조―예를 들어 수학적 구조―라 불릴 만한 것과는 대조적인, 철학의 체계적 구조다."(529) 헤겔에서 "철학은 절대자에 대한 사상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자기를 아는 한에서 절대자다. 철학의 역사가 철학 자체의 본질적 부분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철학은 모든 이전 철학들의 성과이며, 모든 원리들은 보존된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고투인가 (Tantae moliserat, se ipsam cognoscere mentem)."(531-3)


낭만주의가 생명을 향한 의지를 물리치면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난 후, "19세기에 철학은 형식적으로도 부정되는데, 이것은 철학함에 대한 기이한 혐오의 증거이다. 이 혐오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한때 아주 성공적이었던 독일 관념론의 마지막 국면들을 특징짓는, 변증법적 방법의 오용에 의해 생겨났다. 인간은 사물들과 실재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고, 실재 자체를 받아들이기 위해 정신적 구축들과 단절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1830년에 유럽의 정신은 철학의 영역으로 들여와야 할 모형을 개별적 학문들에서 발견한다. 물리학, 생물학, 역사학은 앎의 모범적 양상들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실증주의를 불러일으킨다."(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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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 격변의 시대, 영혼의 치유와 참된 행복을 찾아 나선 영원한 구도자
피터 브라운 지음, 정기문 옮김 / 새물결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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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우리는 악을 행하는가'라는 문제에 천착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략 9년 동안 마니교의 '청문자'였다. "이방 도시들에서 마니교도들은 자기 분파원들의 집에서만 머물렀고, 지도자들은 로마 세계 전역에 퍼져있던 '세포'망을 통해서 여행했다. 이교도들은 공포의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고, 정통 기독교인들은 두려움과 증오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4세기의 '볼셰비키'였고 기독교 교회에 침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외국에서 기원한 '제5열'이었으며, 그 시대의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매우 급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들이었다. 그는 마니교도를 만난 후에 그들만이 이 문제에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67-8)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서 선명한 확신을 얻었다. "나는 내 영혼과 그 영혼 위에 놓여 있는 육체를, 그리고 그것들이 세계가 창조된 이래 서로 원수였다는 것을 안다."(72) 그가 마니교에 집착한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오염되지 않는 완벽함이라는 오아시스를 간직하려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다른 본성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 있었기에 ···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한 다른 것을 비난하기를 훨씬 좋아했다." 그러나 사악함을 완전히 부정한 마니교는 그 대가로 "선을 매우 수동적이고 무능력하게 만들어버렸다."(75)


"마니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마니교는 신자가 일단 '깨어나기만 하면' 자신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해방을 보증받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 마니교는 신자의 일부는 항상 오염되지 않은 채 있다고 가르쳤고, 자기 영혼의 축소될 수 없는 선한 재료들의 발생을 더욱 촉진하기 위해서 엄격한 의식儀式을 거행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이 분파 자체의 강력한 신화, 즉 선이 철저하게 버려졌고 악의 공격 앞에 무기력하다는 신화에 의해서 항상 침식당했다. 전혀 더러움이 없는 마니교의 신은 억압당하고, 훼손당하고, 망가져, 위태롭게도 전능함을 빼앗겼다."(77)


진리에 이르는 길이 탐구임을 깨닫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로 향한다. "이제 나는 주교 암브로시우스를 향해 ··· 밀라노로 간다."고 그는 말했다.(105) 암브로시우스는 "사람은 그의 '영혼'이다. 육체는 단지 '누더기 의복'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하느님에게 돌아갈 때 영혼은 금에서 진흙을 떼어내듯이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적은 바로 네 안에 있고, 네가 잘못을 범하는 이유도 네 안에 있으며, 내가 말하건대 우리들 자신의 내면에만 담겨 있다." "구약의 불투명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 '문자' 이면에는 숨겨진 의미인 이 '심령spirit'이 일어나서 다른 세계로 날아가라고 우리의 심령을 부른다는 생각"이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관통하고 있었다.(121-2)


당시 밀라노를 지배하던 교양은 '탈-플로니노스적'인 것이었다. "기독교도들은 플라톤주의자들이 영적 우주의 구조를 훌륭하게 묘사한 것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교도 플라톤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구속救贖 신화(육화,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육체의 부활)를 자신들 스승Master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야만적으로 개작하는 것으로 간주했다."(147)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의 명료한 영성spirituality을 보충할 규율을 찾아나섰다." 그가 "오, 비참한 사람인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누가 그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저술에 눈을 돌린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150-1)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이 헛된 것으로 입증되었기에 계시된 '지혜'로 철학자들의 작업을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161) 그는 '잘 훈련된 영혼'을 통해 "우주 안에 있는 악의 의미"를 탐구하고, "영혼의 불멸을 '감히' 증명"하며, "삼위일체가 갖고 있는 '의미의 풍부함'을 숙고"하는 길로 들어서고자 했다. "회의주의자들이 그림자의 길이라고 주장한 철학하는 삶은 이제 빛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철학은 "가장 진실하고 숨겨진 하느님을 가장 명확하게 입증할 것을 약속하고, 마치 구름을 헤치고 찬란한 빛이 비추듯이 한 단계 한 단계 하느님을 보여"주는 적합한 사유 방법이었다.(175)


고향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 논쟁을 벌이면서 악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했다. "그는 순전히 심리학적 관점으로 인간의 의지 속에 악이 영속함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습관은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서 인간의 기억은 그것의 힘에 이끌려 작동한다. 과거의 행동에서 도출된 즐거움이 기억 속에 '강압적으로 자리 잡고' 영속화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영속화 과정을 직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신비스러운 연약함에 의해' 과거의 모든 행동의 즐거움은 기억되고 반복되면서, 확대되고 변형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강압적인 습관이 이내 굳어진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내적 삶의 지속성에 속박된 존재로 보게 되었다."(213-4)


로마 세계에 안전한 기반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기독교 신자들이 마주한 최대의 적은 "자신의 죄와 의심"이었다. "인생의 정점은 이제 순교가 아니라 과거의 위험한 것들로부터 개종하는 것이었다. 방황, 유혹, 죽어야 하는 운명에 대한 슬픈 생각, 진리 탐구, 이것들이 외면적인 안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훌륭한 영혼의 자서전에 대한 주요 재료였다. 이교도 철학자들이 이런 경향의 '종교적 자서전'의 전통을 이미 만들었다. 4세기 기독교인들이 이 전통을 이었고, 그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정점에 다다른다."(229) 다시 말해 "<고백록>은 자신의 과거를 현재의 직책을 위한 훈련으로 보는 사람이 쓴 바로 그런 책이었다."(232)


우리는 <고백록>에서 "인간 자유의 한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새로운 인식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린 불량배의 '이유 없는 행위'는 자유의지의 서글픈 전형이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오직 "자신을 거꾸로 내던질 뿐이다." 의지의 그런 파괴적인 행위에 의해서 인간은 창조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조차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사람이 선한 것을 선택하고자 원할 때도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을 전심으로 행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전의 행위들이 '습관의 사슬'을 만들고, 이 '습관의 사슬'은 삶을 '다른 사람의 수갑이 아니라 자기 의지의 쇠사슬'에 굳게 묶어버린다."(248)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재를 옭아매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라는 서사에만 주목했다면 <고백록>은 9권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긴 네 권을 더 썼다. 더 이상 개종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자기를 나타내야, 즉 가장 깊은 자아를 고백으로 털어놓아야 한다." <고백록> 10권은 자신을 '먼지와 재'라고 말하는 진부한 시대의 취향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제시했다. 그는 죄와 유혹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본성의 관점에서 자신을 점검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심지어 인간의 영혼조차도 모르는 영역이 있다."(255-6)


당시의 많은 주교들은 기혼자였고, 대토지를 소유했으며, 고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걸었던 기대를 거부했다." 그는 자기 휘하의 사제들을 도시의 삶에서 의도적으로 격리시켰고, 오직 기독교의 성경만으로 교육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경제적 관점에서 도시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 무리는 부에 대한 당대의 의식을 바꾸고자 했다. "후기 로마인에게 부는 과시적으로 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저금을 하는 것은 비천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과시적인 기부의 전통을 기독교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자선으로 유도하고자 노력했다."(281-2)


"311년 이래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이상적인 거룩함과 신도들의 실질적인 자질 사이의 현저한 차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놓고 분열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가톨릭에 반대해 "교회는 거룩함의 유일한 원천이기에 죄인이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완벽함과 거룩함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교회는 '진정한 포도나무'이고, 따라서 포도나무처럼 철저하게 전지剪枝를 해야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속을 흡수할 힘을 갖고 있다고 자신하는 무리의 태도를 대변했다." 이 정체성은 "역사 속에 장엄하게 작용하는 하느님의 '객관적인' 약속에, 그리고 성사의 '객관적인' 효력에 기반한다."(302-4)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신플라톤주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며, 이에 따르면 교회의 거룩함은 주관적인 판단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진실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하늘의 예루살렘'일 뿐만 아니라 또한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의 색채를 깊게 띠고 있는 것이다. 지상에 있는 구체적 교회는 그 실체의 오직 불완전한 그림자일 뿐이다. 따라서 이 의식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자들은 실체의 어떤 그림자를 따라서 그 거룩함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불완전하게' 노력하고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교회의 의식들은 객관적이고 영속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그 의식들은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자질과 무관하게 존재한다."(314)


"410년 8월 24일,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일어났다. 알라릭이 이끄는 고트족 군대가 로마에 입성한 것이다. 지난 2년간에도 두 차례에 걸쳐 고트족은 그 신성한 도시를 포위했고, 기아에 지친 주민들로 하여금 인육을 먹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로마는 사흘간 약탈당했으며 일부가 불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411) 이 사태로 카르타고의 권력 집단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도나투스파를 관용하는 칙령을 성급하게 발표했다. 이 행동이 로마의 약탈 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좌우했다.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권위의 위기에 직면했다. 도나투스파의 폭력이 재개되었고, 그와 함께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서도 종교적 '분열'이 되살아났다."(414)


"고트족의 포위는 도시 내에서 이교도들의 과시적인 반응을 야기했다. 반면에 가톨릭 주교는 잘못된 신들을 맹종하며 믿고 있는 로마인들은 단순히 그들이 받아야 할 대접을 받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제국의 관리들이 이교도 신들의 대신전을 말끔하게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전히 서 있었다." 주교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온갖 비난을 반박하면서, 그가 "시민 사회의 진정한 기반이라고 믿었던 것, 즉 가톨릭 교회를 유지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부의 적들에 맞서, "신의 권위를 통해 계시되고 적극적으로 강제되어야 하는 법"에 기반한 기독교 제국을 옹호했다.(415-6)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극단론자들처럼 "로마의 약탈을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문명의 붕괴라고 여기면서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수동적이기를 거부했다. 그는 파괴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압착'은 긍정적인 결과를 목표로 하는 적극적인 과정이었다. 압착을 통해서 좋은 올리브가 자유롭게 큰 통으로 흐르게 된다." "이 세상은 짓누르는 재앙으로 인해 흔들리고, 옛 사람은 뿌리가 뽑힌다. 육체가 압착되고, 영혼은 깨끗하게 흐르는 기름으로 변한다."(418) 그는 제국의 회복력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다. 그의 성숙한 견해에 따르면 로마는 "벌 받은 것이지 대체된 것은 아니다."(420)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개의 이질적인 개념, 즉 권위와 다이몬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과거의 도덕사를 종교적인 역사로 변화시켰다. 따라서 로마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힘입지 못한, 그리고 인간 덕성의 부서지기 쉬운 조각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인해 표류하게 된 공동체 이야기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국론>이라는 장대한 드라마를 서술했다. "<신국론>은 '영광'에 관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의 과거로부터 영광을 끌어내서 인간의 손이 결코 미칠 수 없는 곳, 즉 '가장 영광스러운 신국'으로 투사했다.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영웅들에게 돌렸던 덕목들은 다른 국가, 즉 신국의 시민들에게서만 실현될 것이다."(442)


<신국론>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에 관한 책이 되기는커녕 '모두가 공유하는 죽어야 하는 삶 안에서 우리의 일'이라는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책이 되었다. 즉 신국은 이 세상 내에서 저 세상적이 되는 것에 대한 책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완벽을 추구했지만, 펠라기우스주의의 지독한 완벽주의를 혐오했다.(460) "아우구스티누스는 '오점이나 결점'이 없는 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파의 새로운 주장은 자신들만이 그런 교회에 속한다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영향 하에서 시실리와 그 밖의 지역에서 생겨난 '완벽한' 기독교인 무리들을 관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494)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본성(자유의지)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펠라기우스파가 가톨릭 교회와 선량한 이교도 사이의 차별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했다."(497) 그들의 주장대로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완벽하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으며, 주교의 축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너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특별히 하셨던 기도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문서들(밀레비스와 카르타고 종교회의 문서들)은 펠라기우스파를 용인해주면 가톨릭 교회는 인간을 인간들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구로서 행사하기 시작했던 거대한 권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509)


429년 말경 "반달족의 대규모 군대가 에스파냐에서 서서히 마우레타니아 해안을 따라서 접근해왔다. 다음 해 그들은 누마디아를 약탈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들에게 "양떼들 곁을 떠나지 말라고 요청했다. 반달족이 히포 근처로 다가옴에 따라 그는 그와 그의 회중들이 직면한 이 사태를 견뎌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인내의 은총'은 하느님이 개인에게 주는 가장 큰 은총이라고 말했다."(575) 그러나 "가톨릭 주교들은 분열되었으며 사기를 잃었고, 그들의 양떼들은 수동적이었다. '로마 세계의 정복자'들에 직면해 그들은 순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평생의 업적이 폭력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을 살아서 보았다."(6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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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의 로마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로버트 냅 지음, 김민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로마의 지배 계층은 세 단계의 서열로 나뉘었다. 첫째는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신분이 높은 원로원 계급이고, 둘째는 서열과 권력에서 원로원 계급에 뒤지는 대신 재산 축적에 몰두한 기사 계급이며, 셋째는 십인대十人隊 계급으로, 제국 전역에 걸쳐 마을과 도시의 관리를 책임졌다. 이들 아래에는 로마인의 99%를 차지하는 평민, 빈민, 노예 등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엄청난 부자를 호네스티오레스honestiores [더 고귀한 자]라 부르고, 나머지 자유민을 휴밀리오레스humiliores [덜 고귀한 자]"라고 불렀는데, 이는 로마인들 스스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사회경제적 단절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5)


중간계층에 속한 평민들은 "같은 계급의 사람은 대등하게 대하고,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용하며, 자신보다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생존 전략으로 체득했다.(16-7) 로마인들은 사람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으며, 초자연적인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비결"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의 은혜를 입기 위해 지켜야 할 교리나 도덕률"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33) 로마의 법체계는 지배계층에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평민층은 법률 시스템에 적대적이었다."(56)


"폭력은 당시의 평민 남자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이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언제라도 자신들의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67) 평민 남자들은 "자신 (혹은 다른 누군가)의 노예를 때리고 강간했으며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또 자식 위에 철저하게 군림하여 마음대로 체벌을 가했다. 아내도 남편의 폭력 앞에서 달리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집 밖에서 개인 간에 분쟁이 벌어졌을 때는 대개 결투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모욕을 당했을 때는 결투와 같은 강력한 형태의 자기주장이 허용되었다."(63) 따라서 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종교 의식, 대중 오락, 사형 집행 등이 행해졌다.


평민 여자가 갖추어야 할 핵심 덕목은 "정절과 순결, 근면"이다. 여자는 "남자가 재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자식을 낳아 주는 존재"에 불과했고, 법적 지위가 없었다. "여자는 투표를 할 수 없었고, 모든 고등교육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89-90) 예외적으로 "세 명의 자녀(해방노예의 경우 네 명)를 둔 여자"는 법적으로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죽는 일이 흔했고 여자들은 법률적 권리에 무지했으며 남자들은 청원서를 엄격하게 처리했다."(94-5) 지배층의 여자들은 "동반자가 아닌 장신구"로 취급되었고, 평민층의 여자들은 "집안 살림을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혹은 가족들 끼니를 굶기지 않기 위해 일손을 보탰다."(147)


로마인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남녀 자유민"인 빈민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0) 노예와 자유민을 합친 빈민의 숫자는 약 65퍼센트에 달했다. 러시아의 농업경제학자 알렉산더 차야노프의 '고된 노동 이론theory of drudgery'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은 일을 더 해 본들 그에 따른 수고를 상쇄할 만한 이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 이처럼 "빈민층의 '게으름'은 자신의 가능성 없는 미래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태도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170-1) 빈민층은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예속적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간혹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불공정한 처사"에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181)


노예의 수는 비교적 적었고, 그마저도 도시의 부유한 거주 지역에 집중되었다. 노예의 주 공급원은 전쟁 포로, 노예의 자식, 버려진 아이들, 강도나 해적의 인신매매 등이었으며, "노예들은 대부분 신체적 조건과 문화적 배경이 비슷했고 주인과 같은 언어를 쓰는 경우가 흔했다." 피부색이나 외형으로 노예를 구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다른 시대와 달리 "고대 로마의 노예들에겐 이런저런 가능성들이 더 많이 열려 있었다."(198-9) 노예 반란은 로마 제정 이전에 막을 내렸는데, 전통적인 의미의 반란이 일어날 조건을 애초에 차단하고 노예들의 결속을 약화시킨 주요인은, "노예들 사이에서 질서 유지 책임을 맡은 또 다른 노예들"인 사일렌티아리silentiarii였다.(218)


해방노예는 "노예와 마찬가지로 '유한계급'인 귀족의 삶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들은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 지배계층이 거느린 노예 가운데 가장 성공한 노예의 본보기였다. 해방노예는 도시의 가정과 시골의 농장에서 집안일과 공적인 업무를 책임졌고, 장사나 사업에서는 주인을 대신해 재정적인 일을 처리했다."(257) 해방노예의 의무로는 "후원자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관습적 불문율인 옵세퀴아obsequia와 오피시아officia, 그리고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이후 주인의 사업이나 다른 사무를 관리하는 방식을 구체적인 계약으로 정한 오페라에operae가 있었다.(267-8)


고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로마 병사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군대가 의식주를 해결해주었고, 일 년 내내 봉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 지원하려는 사람은 늘 넘쳐났다."(295) 로마 공화정 초·중기에는 농부를 군인으로 활용하였다. "농부는 쟁기를 내려놓고 집과 가족을 떠나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거나 때로는 오랫동안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고 돌아와 다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장기간의 원정을 마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기 위해 장군 곁에 남는 농부들이 많아졌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의 내전들"을 거치면서 군대는 "공동체를 떠받치는 근간이 아니라 분열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 갔다."(320)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군대는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정기적인 대규모 징병으로 시민 가정이 해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 복무 기간을 20~25년으로 늘리면서 매년 로마 시민 가운데 뽑아야 할 신병이 7천 500명으로 줄었다. 신병의 충성심은 오로지 황제만을 향했다. 예상 가능한 진급의 유형을 정해 놓은 다음 그에 따른 보상 체계와 고정적인 봉급, 제대 보너스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특별 보상을 기대하는 병사들의 심리를 원천봉쇄했다." 군대는 지역사회와 격리되었고, "군인들은 종종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되어 수년간 복무했는가 하면,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322)


로마 시대 매춘은 "합법적인 행위였으며, 매춘부는 자신의 직업 때문에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352) 자유인 신분인 검투사의 삶은 위험천만했으나, "그런 위험은 검투사라는 직업의 매력과 명성, 부를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노예 신분의 검투사는 타의에 의해 검투사가 된 경우지만, 검투사 경력을 발판 삼아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었다."(423) 갈레노스는 "검투사들의 부상을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체해부학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기도 했다.(416) 준법 시민과 무법자의 경계에 걸쳐 있던 산적과 해적은 재산을 추구하는 '일종의 사업가'였으며, 자신들의 "은신처에서 평등주의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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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가난과 리더십
피터 브라운 지음, 서원모.이은혜 옮김 / 태학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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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리스 도시 국가부터 후기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연안의 고전 문명은 "부유하고 권세 있는 시민들의 무제한적인 기부"를 공공 덕목으로 칭송하는 삶의 태도가 널리 퍼져있었다. "공적 희사를 통해 '선행을 하려는' 마음(euergesia), '선행을 베푼 자'(euergetes)가 되려는, 즉 공적 희사가가 되려는 열망, '명예를 사랑하는 자'(philotimos)가 되려는 열망, 즉 공적인 자선에 있어서 동료 중에서 탁월하고자 하는 열망"은 상류층과 도시 하층민 모두가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는 행동이었다.(19-20) 이때 "일차적으로 시혜를 받는 자는 항상 도시이거나, 도시가 아니라면 시민 공동체, 즉 도시의 주민/민중(demos 또는 populous)이었으며, 가난한 자는 결코 아니었다."(22)


따라서 고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자선 행위는 "종종 고전적이고 이교적인 형태의 '시민' 공동체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의 시야를 활짝 열었기 때문이다."(24) 로마제국은 동방 지역의 꾸준한 인구 증가로 야기된 가난한 자들을 흡수할 수 없었는데, 이는 "도시와 시골 모두에게 부담을 주었다." 기존의 도시 및 시민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을 '시민'으로 취급할 수도, 그렇다고 오래되어 융통성이 없는 '시민적 형태'의 공동체에서처럼 그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교적 형태의 "가난한 자의 돌봄이 두드러지게 성장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상황과 정확히 일치되었다."(27-8)


바울은 '즐겨 내는 자'(고린도후서 9:7)라는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개념을 창안한다. "바울의 이념은 '균등하게 하는 것'(isotes) 즉 형제들 사이에 자원의 '균등화'였는데, 이는 가난한 교회의 필요를 덜어주기 위해 보다 풍족한 교회가 모은 헌금으로 얻어졌다."(45-6) 이 가난한 자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곤경에 처한 동료 신자가 아니라, "새롭고, 개념상으로(notional) '가난한 자'였다. 그들은 종교에 대한 전적인 헌신 때문에 자신의 생계를 위한 시간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자 중에서 덜 전문적인 평신도 계층(중간 계층)에 의해 제공된 부라는 평범한 나무와 울타리 작업에 의해 지탱되어야 했다."(53)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난해진 동료 신자, 즉 고아, 과부, 병자, 감옥에 갇힌 자, 난민과 극빈자"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구제는 "철저하게 공동체 내부를 바라보는 활동이었다." 신자의 예물을 받은 주교(bishop)와 성직자들은 "생활비에서 남은 것을 다시 과부, 고아, 궁핍한 자에게 재분배해야 했다. 주교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재화에 대한 '청지기'(oikonomos)로 제시되었다."(56-7) 콘스탄티누스 이후로는 교회 소유물이 상당 부분 면세 혜택을 받게 되지만, 황제는 부유한 시민의 성직자 이동을 금지했다.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일정한 정도의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때로는 쓰라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106)


4세기 들어 주교가 빈곤에 처한 교인의 보호자로서 '가난한 자의 돌봄'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바로 주교 법정이었다(episcopalis audientia). 콘스탄티누스는 통치의 초창기에 신자가 주교 앞에 가져온 민사 소송의 최고의 중재자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승인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주장한 것은 소송 사건이 주교 앞에 회부되었다면, 주교에 의해서만 종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어느 누구도 또 다른 중재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139) 이제 "빈곤한 자는 권력자에게 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처럼, 주교 법정을 활용하는 신자들은 정의와 보호가 필요한 때에 그에게 호소하고 의지하였다."(145)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은 주교가 공적인 특권에 대한 보답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공공 덕목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가난한 자'의 대변인, 황제와 지역 당국자를 향해 자신의 도시에서 다양한 취약 계층의 필요에 대한 넓은 의미의 대변인이었던 4-5세기의 주교는 이러한 '주인(지도자) 이미지'를 공적인 담론에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교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마치 사회가 원래 성서상의 근동 형태에 따라 부자와 가난한 자, 약자와 권력자로 나눠진 것처럼 말하는 단순한 과정을 통해서 비고전적인 모습의 사회를 장려했다."(161-2) 그러나 실상 후기 로마제국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넓은 중간 지대가 존재하는 훨씬 분화된 사회였다.


도시와 제국간에 형성됐던 '고전적' 형태의 지배 관계는 "각 도시의 지배 계급이 동료 시민의 유일한 '본래적인' 보호자라는 것을 전제했다." 그들은 "충분히 관료화되지 못한 중앙 정부를 백성들의 탄원 압력"으로부터 방어했고, 도시와 주변 지역의 후견을 독점하였다. 지방 유력자의 "철저한 지배, 즉 시민(demos)에 대한 공적 희사 행위로 표현되고 강화된 지배 방식은 제국 정부가 도시를 순찰하는 비용을 상당히 절약해주었다. 그것은 이상적으로는 '공생하는' 형태의 권력 제도였다. 지방의 지도층은 제국 정부와 이른바 '화기애애한'(cozy) 관계를 수립했다."(168-9) 이러한 공생 관계는 4-5세기 들어 쇠퇴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기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장려된 "보다 솔직한 '수직적인' 형태의 사회" 체제였다. "의존과 자비에 대한 소망 사이의 극적인 긴장을 기록하는 그리스도교적 주인(master) 이미지"가 제국 체제를 '수직적' 경사가 높은 사회로 묘사할수록, 기울어진 비탈에 서 있다는 현실 인식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가난한 자와의 관계는 늘 압도적인 불균형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 찼다. 그것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표현했다. 모든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지와 자선을 베푸는 자와의 관계와 같았다. 전자는 모두 후자의 자비에 완전히 의존한 존재였다."(170-1)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4세기와 6세기 사이에는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의 성경적인 주장이라는 관점에서 보호와 구호를 찾는 탄원의 언어가 발전되었다."(175)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을 입은 성육신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직접 응답한 "겸비(sunkatabasis)의 놀라운 행동"으로 묘사되었다. 그분이야말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극빈자였던 것이다.(185-6)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신의 결합은 우주의 궁극적인 결속에 대한 핵심적 진술"이자, "사회의 이상적인 결속에 대한 상징"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유대를 존중하도록 배워야 하며, 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몸을 '낮춰야' 했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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