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가난과 리더십
피터 브라운 지음, 서원모.이은혜 옮김 / 태학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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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도시 국가부터 후기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연안의 고전 문명은 "부유하고 권세 있는 시민들의 무제한적인 기부"를 공공 덕목으로 칭송하는 삶의 태도가 널리 퍼져있었다. "공적 희사를 통해 '선행을 하려는' 마음(euergesia), '선행을 베푼 자'(euergetes)가 되려는, 즉 공적 희사가가 되려는 열망, '명예를 사랑하는 자'(philotimos)가 되려는 열망, 즉 공적인 자선에 있어서 동료 중에서 탁월하고자 하는 열망"은 상류층과 도시 하층민 모두가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는 행동이었다.(19-20) 이때 "일차적으로 시혜를 받는 자는 항상 도시이거나, 도시가 아니라면 시민 공동체, 즉 도시의 주민/민중(demos 또는 populous)이었으며, 가난한 자는 결코 아니었다."(22)


따라서 고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자선 행위는 "종종 고전적이고 이교적인 형태의 '시민' 공동체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의 시야를 활짝 열었기 때문이다."(24) 로마제국은 동방 지역의 꾸준한 인구 증가로 야기된 가난한 자들을 흡수할 수 없었는데, 이는 "도시와 시골 모두에게 부담을 주었다." 기존의 도시 및 시민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을 '시민'으로 취급할 수도, 그렇다고 오래되어 융통성이 없는 '시민적 형태'의 공동체에서처럼 그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교적 형태의 "가난한 자의 돌봄이 두드러지게 성장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상황과 정확히 일치되었다."(27-8)


바울은 '즐겨 내는 자'(고린도후서 9:7)라는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개념을 창안한다. "바울의 이념은 '균등하게 하는 것'(isotes) 즉 형제들 사이에 자원의 '균등화'였는데, 이는 가난한 교회의 필요를 덜어주기 위해 보다 풍족한 교회가 모은 헌금으로 얻어졌다."(45-6) 이 가난한 자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곤경에 처한 동료 신자가 아니라, "새롭고, 개념상으로(notional) '가난한 자'였다. 그들은 종교에 대한 전적인 헌신 때문에 자신의 생계를 위한 시간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자 중에서 덜 전문적인 평신도 계층(중간 계층)에 의해 제공된 부라는 평범한 나무와 울타리 작업에 의해 지탱되어야 했다."(53)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난해진 동료 신자, 즉 고아, 과부, 병자, 감옥에 갇힌 자, 난민과 극빈자"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구제는 "철저하게 공동체 내부를 바라보는 활동이었다." 신자의 예물을 받은 주교(bishop)와 성직자들은 "생활비에서 남은 것을 다시 과부, 고아, 궁핍한 자에게 재분배해야 했다. 주교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재화에 대한 '청지기'(oikonomos)로 제시되었다."(56-7) 콘스탄티누스 이후로는 교회 소유물이 상당 부분 면세 혜택을 받게 되지만, 황제는 부유한 시민의 성직자 이동을 금지했다.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일정한 정도의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때로는 쓰라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106)


4세기 들어 주교가 빈곤에 처한 교인의 보호자로서 '가난한 자의 돌봄'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바로 주교 법정이었다(episcopalis audientia). 콘스탄티누스는 통치의 초창기에 신자가 주교 앞에 가져온 민사 소송의 최고의 중재자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승인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주장한 것은 소송 사건이 주교 앞에 회부되었다면, 주교에 의해서만 종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어느 누구도 또 다른 중재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139) 이제 "빈곤한 자는 권력자에게 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처럼, 주교 법정을 활용하는 신자들은 정의와 보호가 필요한 때에 그에게 호소하고 의지하였다."(145)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은 주교가 공적인 특권에 대한 보답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공공 덕목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가난한 자'의 대변인, 황제와 지역 당국자를 향해 자신의 도시에서 다양한 취약 계층의 필요에 대한 넓은 의미의 대변인이었던 4-5세기의 주교는 이러한 '주인(지도자) 이미지'를 공적인 담론에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교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마치 사회가 원래 성서상의 근동 형태에 따라 부자와 가난한 자, 약자와 권력자로 나눠진 것처럼 말하는 단순한 과정을 통해서 비고전적인 모습의 사회를 장려했다."(161-2) 그러나 실상 후기 로마제국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넓은 중간 지대가 존재하는 훨씬 분화된 사회였다.


도시와 제국간에 형성됐던 '고전적' 형태의 지배 관계는 "각 도시의 지배 계급이 동료 시민의 유일한 '본래적인' 보호자라는 것을 전제했다." 그들은 "충분히 관료화되지 못한 중앙 정부를 백성들의 탄원 압력"으로부터 방어했고, 도시와 주변 지역의 후견을 독점하였다. 지방 유력자의 "철저한 지배, 즉 시민(demos)에 대한 공적 희사 행위로 표현되고 강화된 지배 방식은 제국 정부가 도시를 순찰하는 비용을 상당히 절약해주었다. 그것은 이상적으로는 '공생하는' 형태의 권력 제도였다. 지방의 지도층은 제국 정부와 이른바 '화기애애한'(cozy) 관계를 수립했다."(168-9) 이러한 공생 관계는 4-5세기 들어 쇠퇴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기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장려된 "보다 솔직한 '수직적인' 형태의 사회" 체제였다. "의존과 자비에 대한 소망 사이의 극적인 긴장을 기록하는 그리스도교적 주인(master) 이미지"가 제국 체제를 '수직적' 경사가 높은 사회로 묘사할수록, 기울어진 비탈에 서 있다는 현실 인식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가난한 자와의 관계는 늘 압도적인 불균형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 찼다. 그것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표현했다. 모든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지와 자선을 베푸는 자와의 관계와 같았다. 전자는 모두 후자의 자비에 완전히 의존한 존재였다."(170-1)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4세기와 6세기 사이에는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의 성경적인 주장이라는 관점에서 보호와 구호를 찾는 탄원의 언어가 발전되었다."(175)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을 입은 성육신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직접 응답한 "겸비(sunkatabasis)의 놀라운 행동"으로 묘사되었다. 그분이야말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극빈자였던 것이다.(185-6)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신의 결합은 우주의 궁극적인 결속에 대한 핵심적 진술"이자, "사회의 이상적인 결속에 대한 상징"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유대를 존중하도록 배워야 하며, 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몸을 '낮춰야' 했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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