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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평점 :
국가의 흥망성쇠를 분석하는 이론으로는 지리 가설, 문화 요인 가설, 무지 가설 등이 있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에서 농업 생산성이 바닥을 치는 이유는 토양의 품질 때문이라기보다는, "토지 소유구조, 정부 및 제도 때문에 농부들이 인센티브를 기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88) 문화는 인간 자원을 움직이는 내부 동력 중의 하나이지만, 새로운 기술과 제도가 도입되면 쇠퇴의 길을 걷곤 한다. 부유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무지 가설은 "지도자와 정책입안자를 계몽하면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실상 실패의 가장 큰 걸림돌은 그 사회가 직면한 제도적 제약이다.(108) 19세기 이후 심화된 세계 불평등은 농업 생산성의 차이가 아니라 "산업기술 및 생산 기반의 불공정한 분배에서 기인한다."(89) 국가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정치와 정치제도다."(27)
국가의 경제 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착취적 경제제도extractive economic institutions는 충분한 중앙집권화와 다원적 정치제도 중 어느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는 체제이다. "착취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 간의 시너지 관계는 강력한 순환 고리feedback loop를 만들어낸다. 착취적 정치제도 덕분에 정치권력을 쥔 엘리트층은 제약이나 반대 세력이 거의 없는 경제제도를 선택할 수 있다. 또 향후 정치제도와 그 발전 방향도 멋대로 선택할 수 있다."(127) 포용적 경제제도inclusive economic institutions는 시민 사회의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시장이 존재하고 기술 및 교육이라는 번영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충분히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체제를 가리킨다. 다원주의pluralism와 포용적 경제제도가 중앙집권화를 요구하는 이유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과 그에 따른 일정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없다면 정부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 법질서를 강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126)
착취적 정치 체제도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바탕으로 생산성이 높은 활동에 자원을 분배하거나, 엘리트층의 입지가 확고해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는 포용적 경제 제도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경우에는 성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착취적 제도 하에서 지속적인 성장이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정치제도와 경제제도 모두 착취적이라면 창조적 파괴와 기술 변화를 유발할 인센티브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정 기간 정부가 강제로 자원과 인력을 분배해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한계점에 다다르면 1970년대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성장은 멈추고 만다."(143) 그뿐만 아니라 착취적 정치 체제는 막강한 정부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늘 이면에 도사리고 있어서, "그런 분쟁이 내전으로 비화되거나 심지어 정부를 완전히 와해 또는 몰락"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본질적으로 빈약하기 마련이다.(144)
흑사병 발발(1346~ )이라는 역사의 우연은 노동인구의 급감을 가져와 그전까지 억눌려 지내던 농노의 형편을 개선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는 농노를 영속적으로 영주의 토지에 얽어매던 봉건제의 약화를 가져왔고, 그전까지 별다른 차이가 없던 동서유럽의 정치·경제 제도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1600년 무렵이 되면 "서유럽의 노동자는 봉건적 세금이나 벌금, 규제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호황을 맞은 시장경제의 핵심 일원이 되었다. 동유럽 역시 그런 경제 호황을 맞았지만, (이는) 식량과 농산품에 대한 서유럽의 수요를 맞추려고 농노를 강제로 부린 덕분이었다."(154-5) 도시 기반이 미약한 동유럽에서는 농노들이 대지주에 맞서 세력화에 실패했고, 더욱 비참한 재판농노Second Serfdom로 전락했다. 동유럽의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를 수호하는 지배층들은 작은 차이가 쌓여 제도 분화institutional drift가 축적되고, 마침내 결정적 분기점에 이르는 양상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베네치아는 창조적 파괴를 수반하는 포용적 제도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일구었다. 베네치아는 경제면에서 자본을 제공하는 자본가와 무역을 실행하는 여행가로 구성된 합자회사 제도인 코멘다commenda를 발전시켰고, 정치면에서 대평회의Great Council와 도제doge 지명 위원회를 창설하고, 권력을 제한하는 도제의 취임 선서를 도입했다. 신흥 부자들은 기존 엘리트층의 정치권력에 도전했고, 경제 성공의 과실을 나누어가졌다. 그러나 1286년의 헌법 수정은 "이른바 ‘베네치아 폐쇄’의 전주곡이었다." 대평회의는 "외부인에게 문을 닫아걸었고 초기 의원은 세습귀족으로 변모했다. 이 체제는 1315년 확정되었다. 베네치아 귀족의 공식 명부인 ‘황금의 책Libro d’Oro’이 만들어진 것이다." 1324년부터는 "개인이 무역하려면 높은 세금을 물어야 했다. 장거리 무역은 이제 귀족의 전유물이 되었다. 베네치아 번영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229-30)
1445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모두가 인쇄술을 바람직한 발명품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1485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는 이슬람교도의 아랍어 인쇄 행위를 분명하게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1727년이 되어서야 "뮈테페리카는 인쇄소 설립을 승인받았지만 인쇄하는 책마다 이른바 ‘카디’라고 부르는 종교 율법학자 세 명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 오스만제국에서 "인쇄술은 엘리트층이 지식을 장악하던 기존 질서를 파괴할 위협으로 여겨졌다. 술탄과 종교 집단이 두려워한 것은 인쇄술이 초래할 창조적 파괴였다. 이들의 해법은 인쇄술을 금지하는 것이었다."(312-4) 중앙집권화 과정이 극심한 절대주의 체제를 불러오는 사례도 많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보야르Boyars라는 구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근대 관료주의 정부와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자신을 차르의 자리에 앉혀준 ‘귀족 회의Boyar Duma’마저 철폐했다."(316)
반면 명예혁명(1688)은 구 시대의 유산을 일소했다. "정부는 투자와 거래, 혁신을 꾀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제도를 채택했다. 아이디어에 대한 재산권인 특허권을 부여해 혁신을 추구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등 사유재산권도 단호하게 집행했다. 법질서도 수호했다. 잉글랜드 법을 온 시민에게 적용한 것은 역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의적 과세는 중단되었고 독점은 거의 철폐되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상업 활동을 적극 장려했고 국내 산업 육성에 힘썼다. 이를 위해 산업 활동 확대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한편 잉글랜드 해군을 총동원해 상인의 상업 활동을 보호했다. 사유재산권을 완연히 합리화함으로써 잉글랜드 정부는 도로망, 운하에 이어 훗날 철도에 이르기까지 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사회 기간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토대 덕분에 사람들이 느끼는 인센티브가 완전히 바뀐 것은 물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 산업혁명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157)
잉글랜드의 사례를 보면 "다원주의 및 포용적 제도가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사적 우발성과 광범위한 연합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307) 명예혁명은 정치 권력을 국왕에게서 의회로 이동시키는 최종 기착지였고, 무역과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의회 귀족층의 이해관계가 국가 정책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예혁명이 가져다 준 중요한 제도적 변화가 한 가지 더 있다. 의회는 튜더왕조가 불을 지핀 중앙집권화 과정을 지속해나갔다. 정부가 제약만 늘리고, 경제 규제 방식만 바꾸거나 여기저기 돈만 쓴 것은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정부의 기능과 역량이 확대되었다. 이 역시 중앙집권화와 다원주의 간의 상관관계를 증명해준다." 1688년 이후 의회는 "과세를 통해 수입을 늘리는 정부의 역량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1690년 1,211명에 불과하던 소비세 담당 관료가 1780년에는 4,800명으로 크게 불어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변화였다."(285-6)
"에스파냐에서는 잉글랜드의 경제성장과 제도적 변화를 이끌었던 과정이 현실화되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이사벨라와 페르디난트는 세비야의 상인 길드를 통해 새로운 식민지와 에스파냐 간 무역을 주관했다. 이 상인들이 모든 무역을 통제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얻는 부의 일정 지분을 왕실이 차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식민지와의 자유무역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이들이 "무역을 워낙 편협하게 독점한 터라 식민지와 무역 기회를 통해 광범위한 상인 계층이 부상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320) 잇따라 비싼 전쟁을 치르는데 여념이 없던 카를로스 5세는 1520년 잉글랜드 의회와 비슷한 조직인 코르테스에 세금 인상을 요구했다. 도시 엘리트층은 이를 기회 삼아 개혁과 권한 확대를 요구했지만, 카를로스는 왕실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무참히 진압했다. "1664년 이후 코르테스는 개원조차 하지 못하다가 거의 150년이 흘러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고서야 부활할 수 있었다."(321-2)
"신석기혁명에서 산업혁명까지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나아지지 않은 주된 이유는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술혁신은 인류사회에 번영을 가져다주지만, 옛것을 새것으로 갈아치우고 특정 계층의 경제적 특권과 정치권력을 파괴한다." 기술혁신이 "사회에 번영을 가져다 준다 해도 그 때문에 촉발되는 창조적 파괴 과정은 옛 기술을 사용해 일하는 이들의 생계를 위협한다." 더 중요한 측면은 윌리엄 리의 양말 짜는 틀 편물기계(1589)처럼 중대한 혁신은 "정치권력의 판도마저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리에게 특허를 거부한 것은 사실 그의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될 백성이 가여워서가 아니었다. 정치적 패자로 전락할 것이 두려웠던 것뿐이다. 리의 발명품으로 곤경에 처한 백성이 정치 불안을 초래하고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268-9)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가혹한 식민지 정책의 시달림을 받아 발전의 퇴보가 일어났다. 네덜란드는 "1618년 바타비아(자카르타의 옛 이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원주민들을 학살, 착취하면서 대농장 사회를 건설하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위협을 피하고자 "여러 나라가 수출용 작물 재배를 포기하고 상업 활동을 중단했다. 자급자족 정책을 견지하는 편이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것보다 안전했기 때문이다. 1620년, 자바 섬에 있는 반텐은 네덜란드의 침범이 두려워 후추나무를 죄다 잘라버렸다."(359-60) 아프리카를 강타한 노예무역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나마 유지되던 질서와 정통성 있는 정부당국을 파괴해버렸다. 노예 획득 수단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납치하거나 소규모 공격을 통해 포로로 붙잡기도 했다. 노예를 만들기 위해 법까지 동원하는 지경이었다. 어떤 죄를 짓든 노예로 전락시켜 징벌했다."(365)
19세기 들어 점차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현실은 사뭇 달랐다. "시에라리온에서 노예제도가 마침내 철폐된 것은 1928년이 돼서였다. 애초 수도 프리타운이 18세기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돌아온 노예의 안식처로 마련된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예무역에 기반을 둔 착취적 정치·경제 제도 때문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던 세계의 여타 지역과 달리 경제가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말았다."(371-2)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13년 ‘원주민 토지법Natives Land Act’을 제정하여,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밖에 안 되는 유럽인에게 87퍼센트의 토지를 주었다."(381) 1913년 이후 "엄청난 수의 아프리카인이 백인이 차지한 자기들 땅에서 쫓겨나 좁은 자치지구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원주민들은 정부가 의도했던 대로 "백인 경제권에서 생계유지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면서 연명했다.(383)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뒷받침하면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포용적 정치제도 덕분에 포용적 경제제도가 마련되면 소득이 더 공평하게 분배되고 힘을 얻는 사회계층이 한층 더 넓어지며 정치면에서도 더 공평한 경쟁의 장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권력을 찬탈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이 낮아지고, 착취적 정치제도를 재창출할 동기 역시 약화시킨다."(442) 선순환 구조 속에서 권리를 자각한 잉글랜드 대중은 "단순히 투표권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의석을 바랐다. 이른바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의 본질이었다."(446) 점진적 변화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무리수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프랑스혁명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첫 실험은 공포정치로 이어졌고, 1870년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설 때까지 왕정복고에 이은 민주주의 복원 과정을 두 차례나 되풀이했다."(454)
"제도적 부동浮動은 작은 차이로 이어지지만, 결정적 분기점을 통과하면서 제도적 확산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제도적 확산은 이어 한층 더 결정적인 제도적 차이를 만들어내고, 다음 결정적 분기점이 도래할 때 그 영향력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열쇠는 역사가 쥐고 있다. 제도적 부동을 통해 결정적 분기점이 찾아왔을 때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610) 결정적 분기점을 만드는 이 역사적 과정은 숙명이나 불가피성을 띠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발적contingent 사건들이 겹쳐서 나타난다.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패한 국가들의 공통점은 바로 착취적 제도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다원주의의 태동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646) 스스로 잘 돌아가는 제도란 없으며, 집권층의 정치·경제적 실패와 무능에 대한 "정보가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사회 전반의 권한강화를 조율하고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