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20세기가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위협에 지배되었다는 가정은 옳지만,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20세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자유주의가 조만간 승리하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정말로 예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p.490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계급대립에 대한 실증적 연구나 프롤레타리아의 근본성격에 대한 정치투사로서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찰을 하거나 정치투사적 경험을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 즉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그 계급적 존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구성하는 역사적 사명을 발견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이 사실에 대해 자주 강조했다. 프롤레테르들을 실증적으로 관찰한다 하더라도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사명을 알 수 없다. 반대로 프롤레테르들의 계급적 사명을 이해할 때 그들의 진실한 존재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프롤레테르들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의식을 갖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른 식으로 말해, 프롤레타리아 존재는 프롤레테르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선험적이다. 프롤레타리아 존재로 인해 프롤레테르들은 올바른 계급노선을 선험적으로 보장받는다."(15)


# 프롤레테르 :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개개인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기독교와 헤겔철학, 과학주의가 통합된 사상이며, 그 중에서도 중심축은 헤겔철학이다. 헤겔철학에서 "역사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 신의 통치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신은 자신들의 선험적 작업의 의미를 여전히 이해 못하는 역사적 인간들을 매개로 자신의 도래를 완성해간다. 그런데 이 역사적 인간들에 대해 신의 작업은 선험적인 변증법을 통해 완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인간들의 의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 변증법의 모태를 알아본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직한다. 개인들의 의식에서 독립해 존재하는 역사의 의미, 그리고 개인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을 얻건 그들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역사의 의미,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그 의미는 헤겔처럼 "허황된 모습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팔과 다리로 실현될 것이다."(18-9)


"마르크스가 (필연성과 실존성의 연결 고리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었던 까닭은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원 개인이 모든 존재가 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명제와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가 동일한 층위의 명제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철학적 층위에 속한다. 마르크스가 헤겔철학을 차용해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의 이상理想으로부터 도출되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세계와 역사의 원천으로서 자신을 의식하는 '노동'을 실천할 보편적 가능성의 존재다. 반대로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는 프롤레타리아화化의 역사적 과정에 대하 분석으로부터 도출되었다(혹은 그러한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명제이기를 바란다). 사실상, 이 분석으로는 앞의 철학적 전제를 정립할 수 없다."(31-2) "마르크스는 전문기술을 지닌 다양한 노동자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이상을 지닌 프롤레테르의 모습을 보았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35)


"계급적 존재로서 프롤레테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노동력을 지닌 다른 인간과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로서 착취를 당하지만, 또한 바로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그 자신과 완전히 동일하게 전적으로 소외된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타자'이기 때문에─다른 모든 프롤레테르들과 힘을 합해 착취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자본에 대해 소외되어 있고 자본의 공무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프롤레테르도 그 동일한 '자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게" 될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소외될 것이다."(47-9) "따라서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한 노동자는 사회를 위해서만 노동한다. 그는 추상적 보편노동의 순수한 제공자이고, 결과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순수한 소비자다."(50)


"이제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는 노동과 관계 맺지 않는다. 노동은 완전하게 규격화되었고, 무기체적 과정이 되었다. 노동자는 스스로 진행되는 작업을 보조하고 이것에 자신을 맞춘다. 그는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는다. 노동이 노동자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에 대해 무관심하다. 월말에 임금이 나오는데, 중요한 일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이런 원한어린 태도가 '자신의' 일을 하는 프롤레테르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다. 그들은 수동적인 프롤레테르를 원했을까? 그렇다면 프롤레테르는 수동적으로 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한 수동성으로부터, 이 수동성을 강요한 사람들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프롤레테르에게서 수동적인 능동성을 원했다. 그런데 그는 능동적인 수동성을 가질 것이다."(52-3)


"프롤레테르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헐벗음을 내면화하며 부르주아 세계의 폐허 위에서 보편적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이루어내는 대신, 자신들의 완전한 의존성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기 위해 헐벗음을 내면화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적 요구가 이런 식으로 대중적 요구로 바뀌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계급적 요구는 (원자화되고 서로간의 연결성이 없는 프롤레테르들로 구성된) 대중의 소비에 대한 요구로 바뀌고, 이 경우 프롤레테르들은 사회로부터, 다시 말하면 권력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다시 말하면 국가기관으로부터 그들이 갖거나 창조하기 불가능한 것을 받고자 한다. 이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권력의 지위에 자신들의 대표자를 앉히기 위한 대중적 행위로 축소된다."(54-5)


"따라서 자신들이 국가에 의지하는 만큼, 역으로 국가도 노동자들에 대해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가 노동계급에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그 계급에 대해 모든 의무를 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도 노동계급이 절대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렇게 실제로는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책임지고 있다. 노동계급과 국가권력 사이에 놓인 모든 장벽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고, 계속 이렇게 된다면 상황은 다루기 쉬울 것이다. 곧 지금까지 존재해온 정치적 중개, 그람시가 말한 의미의 시민사회 고유의 제도, 자율적인 사회적 관계와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은 독점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모든 현실성을 상실했다."(57-8)


"노동자들의 권력에 대한 생각, 혁명적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포스트-테일러리즘 시대에 그 생각들이 부여받던 의미와는 매우 다른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다. 권력의 지위에 오르는 일을 목표로 삼았던 그 노동계급은 비참하고, 탄압받고, 무지하고, 일정하고 안정된 거처나 직업이 없던 민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소유한 전통·엘리트층·문화·조직 때문에 노동민중 한가운데서나 일반적 의미의 사회 내에서 헤게모니를 쥘 잠재성이 있던 계층이었다. 이 계층에게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빼앗은 다음 국가를 경영할 지위에 앉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노동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기생계급인 부르주아지, 그 탄압적 기구의 존재로 인해 부르주아지가 민중의 궐기를 우습게 보는 국가를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66-7)


"생산조직의 자율성을 파괴시킨 그 기술적 전문화·경제적 집중화 과정이 노동자들의 자율성의 원천인 예능적 기술을 파괴시켰다. 테일러리즘으로 인해,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위계와 질서의 자리에 공장의 지휘부에서 고안하고 강제한 경영자 중심의 위계와 질서가 들어앉았다. 치열한 투쟁의 과정들을 거친 다음 예능적 기술의 노동자들은 제거되고, '생산의 하사관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비록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지만 고용주 측에 속하게 됐다. 즉 그들은 지도부에서 교육 받고 선별된 다음, 다른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감시할 권력을 부여받았다. 생산작업은 자율성이나 기술적 권력이 없는 원자화된 노동자들로 구성된 대중에 의해서만 수행됐다. 이런 대중에게 생산에 대한 "권력을 쟁취한다"는 사상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오늘날의 공장에서는 의미가 없다."(69-70)


"권력의 정당성을 이루는 토대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해결되지 않는 커다란 문제 중 하나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따른다면, 항상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지배적 위치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 능력주의는 권력 관계들이 매우 유연하고 쉽게 변화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따라서 사회는 물적으로나 제도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더라도, 사회 내의 이런 유동성을 막아서는 안 된다. 어제의 승자가 오늘, 그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 권력, 자신의 권력을 특정인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는 권력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상, 권력은 지배적 지위를 독점한다는 것이고, 지배적 지위는 필연적으로 특권화되고 희소성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지위들 중의 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이 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84-5)


대다수가 지배적 지위를 추구하지만, "사람들이 갖게 될 모든 지위는 이 지위에 필요한 자질과 함께,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지배적 제도의 경화증은 권력의 관료화와 더불어서 발생한다.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 그는 단지 매우 작은 권력이 부여되어 있는 지위들 중의 한 지위에 오르기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더 이상 권력을 소유하지 않고, 권력의 지위들이 인간들을 소유한다. 더 이상 '자아'의 개성을 확장할 능력을 갖고 있는 개인들이 자신들에 맞추어 그 지위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지위들이 지위를 점하는 인간들을 맞추어 가공해낸다." "이 변화는 개인 자본가가 익명적 집단, 기업가가 '은행', 고용주가 '자본'과 그 공무원들(곧 경영자들)에 의해 대체된 시기부터 현실에 뿌리내렸다. 모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휘·경영 기관이 이윤창출과 자본유통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조화되었다."(86-7)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비록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자본'에 의해 설치되어 있던 지배기구를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 스스로가 기능적 부르주아지가 될 것이다. 지배기구 내에서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이 점하던 자리를 차지하며 그 계급을 축출할 수 없다. 그러한 시도를 하는 계급은 권력을 이양받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지위를 이어받을 따름이다."(99-100) 사회적 생산의 토대가 되는 업무를 담당하는 "기능적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배관계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곧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맡는 것과 같다. 지배관계를 제거할 유일한 가능성은 곧 권력과 지배를 분리시키고 시민사회·정치권·국가 각각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적 권력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정해진 한정된 자리를 그 기능적 권력에 부여하는 데 있다."(101)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의 고유한 행위가 아니다." "노동자는 더 이상 "자신의" 노동에, 생산과정 내 자신의 역할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모든 일이 그를 제외한 채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 자체는 노동자와 마주해 그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어떤 일정량의 물화物化된 행위다." 따라서 노동자가 "노동 가운데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노동의 주인이 되고, 노동을 위해 권력을 정복하는 일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노동의 본성·내용·필요성·방식들을 부정하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만이 문제다. 그런데 노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또한 노동운동의 전통적 전략과 그 조직적 형식들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곧 노동자로서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더 이상 없는 대신, 노동자로서 기능하지 않을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권력이 문제가 된다. 계급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107-8)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非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낙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계급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그리고 새로운 생산기술들의 영향력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들의 해체로 생겨났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를 때 노동계급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부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부정성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 근본화됐다." "실제로 이 비계급은 노동의 소멸과정에 따라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지적 노동의 산업화(즉 자동화와 정보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얻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실제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지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의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노동, 곧 노동의 존엄·가치화·사회적 효용·욕망에 토대를 두었던 구舊사회가 해체되며 나타난 산물이다."(108-9)


"그들에게서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노동계급이나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명칭에서도, 아니면 이와 대칭선상에 있는 '실업자'라는 명칭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이 신新프롤레테르는 은행·관공서·청소서비스업체·공장 등 어디에서 일하건, 무차별한 직무에 일시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비노동자다. 그는 "아무 일이든" 하고, 또한 "아무나" 그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생산관계를 매개로 사회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사회의 전반에 자리한 생산기구가 '노동'을 만들어내고, 우연적이고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인들에게 우연적인 형식으로 그 노동을 강요한다." "젊은 마르크스가 모든 특수한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보편적 가능성을 그 안에서 보았던 프롤레테르는 오늘날에는 기구들의 보편화된 능력에 대항하는 특수한 개인성일 뿐이다."(113-4)


"타율성 영역은 개인들의 생활과 사회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프로그램화하고 계획화해 가장 효율적으로, 곧 가장 적은 노력과 자원을 들여 생산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자율성 영역에서는 개인들이 경제영역 바깥에서 혼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든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이 상품과 서비스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욕망과 취향과 상상력에 따라 만드는 것이다."(156) "사회공간을 (사회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비인격적인 일을 하는) 타율성의 영역과 (모든 것이 진행될 수 있는) 자율성의 영역으로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조직하더라도 두 영역이 어떤 경우든 서로에 대해 닫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평범화된 노동들로 구성된 사회화된 섹터의 존재를 통해 각자가 공동체의 협소한 공간을 벗어날 수 있고, 공동체가 자급자족적 경향 때문에 폐쇄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165-6)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을 없앤다 하더라도, 혹은 각자가 객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일의 완수규칙을 내면화하도록 설정했던 외부적 의무들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해방은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사항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168) "필연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물적으로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량만을 축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일은 또한 직접적인 생산이 필요로 하는 외부의 비경제 시스템과 국가의 활동들을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축소는 생산기구 자체와 이 생산기구가 결정하는 노동의 분할이 조정될 때만 가능하다."(170)


"후기산업사회의 사회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국가의 철폐가 아니라 지배의 철폐다. '법'과 지배, 국가기구와 지배기구는 지금껏 항상 혼동되어 왔지만,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국가기구들은 모든 지배의 원천도 그 최종동기도 아니다. 그 기구들 자체는 지배의 사회관계 때문에(한 계급의 전 사회에 대한 지배 때문에) 존재하고,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지배양식에 자신들의 고유한 지배양식을 추가하며 그 사회관계를 연장하고 강화한다. 국가기구들에 의한 사회의 지배는 자본이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집중화를 통해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이자, 그 지배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지배기구를 걷어내면 나타나는 "국가는 협업과 중앙적 규제 수단들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끝으로 국가는 자율성 영역의 확장을 위해 스스로의 권력과 고유 영역을 축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186-7)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역사의 종말로서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세계 공산주의, 전 지구적 민주주의, 천년왕국 등 종류만 다를 뿐이다.

...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안내자로서보다는 신념과 정치적 행동의 견인차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과거의 도그마가 더는 우리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처음부터 거대한 속임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의 종언을 "환상의 종언"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분석은 추도사가 아니다. 1945년 직후에 사람들은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악마에 사로잡힌 광기 어린 한 독재자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었던 정치적 병리 현상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 대륙이 받은 상처를 그저 몇몇 정신 나간 인간들의 소행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으며, 그 상처가 남긴 정신적 외상이 히틀러나 스탈린의 정신세계 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좋건 싫건 간에 파시즘과 나치즘 모두 대중 정치·산업화·사회 질서라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다.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나쁜 과거를 내던지고 시간의 망각 속에 묻어버리면서 과거에 좋았던 것만을 우리의 유산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치 체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다른 것들도 존재한다. 유럽의 20세기는 이들 가치 체계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대한 이야기다.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pp.12~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르주아지의 상승세와 귀족계급의 하강세가 어느 시점에서 일정한 균형을 이루어 어느 쪽도 상대방을 누를 수 없는 상태에 들어섰을 때 국왕은 어느 쪽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양자의 대립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왕권을 절대군주권이라고 하며, 절대군주 체제하에서 봉건귀족은 후퇴와 하강을 거듭하면서도 낡은 봉건권을 방어하려고 최후의 몸부림을 친다. 이 같은 상황에 놓인 18세기 프랑스 사회를 앙시앵레짐이라고 한다. 앙시앵레짐하에서 부르주아는 기회 있을 때마다 몰락하는 귀족의 토지를 사들였다.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가 봉건영주의 봉토를 살 경우 국왕에게 프랑-피에프franc-fief라는 세금을 납부하기만 하면 토지에 대한 영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1758년 말에 중농학파 케네의 저서인 <경제표>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출판된 지 약 10년 만이었다. 새로운 경제 이론과 계몽사상은 곧 절대주의에 대한 위험 신호였다. 21-2)


# 18세기 프랑스의 신분구성

1. 제1신분 가톨릭 성직자 : 주교 특권층과 하급 사제와 조제들

2. 제2신분 세속 귀족 : 전통 세습 귀족인 대검 귀족과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 귀족

3. 제3신분 그 외 나머지 : 다수의 농민과 소수의 도시 상공업자


18세기 프랑스의 농민과 부르주아는 "봉건제도하에서는 봉건적 부과를 영주에게만 바치면 되었으나 이제 절대주의 체제에서는 새로 국왕이 부과하는 각종 세금까지 바쳐야 했다. 농민이 부담하는 이 이중 조세 체계야말로 앙시앵레짐의 이중적 성격을 말하는 동시에 그 모순을 잘 보여준다.(32)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재상과 네 명의 대신, 재무 총감은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국가 최고 기간의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통일적인 국가 예산 편성도, 정책의 통일성과 일관성도 없었다." 행정구역과 별개로 "왕국의 통일을 저해하는 문화적 장벽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지방'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역사적·봉건적인 프로방스province이다." 고유의 풍속과 민법, 상법, 도량형 및 방언을 가지고 독자적인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이 지방 공동체들은 대체로 봉건사회의 대제후령大諸候領에 일치하는 것으로서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의 팽창에 저항하는 봉건적 분권주의의 아성이었다."(36-7)


"파리 고등법원은 1239년에 설치되었으며 1614년 이래 삼부회Etats-Generaux의 소집이 중단되면서 정치적인 힘이 유력해졌다. 그들은 본래 왕의 어전 재판에 함께 참석했는데, 삼부회가 소집되지 않는 마당에서는 자신들이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왕권에 대항하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고등법원 제도에 특이한 것이 있었는데, 재판관직의 매매제와 세습제이다. 16세기경부터 왕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관직 매매 관례가 생겼는데 고등법원의 재판관직도 매매되었다. 더구나 17세기 초부터는 매매한 관직을 세습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고등법원 재판관은 왕이라 할지라도 파면할 수 없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들이 주도한 "반왕反王운동은 결코 앙시앵레짐에 대한 반대나 비판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왕권을 약화시킴으로써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더욱 확대하여 국왕과 궁정 귀족의 권력과 재산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39-40)


1775년 이래 불황기에 "프랑스 정부는 최소한 두 가지 중대한 정책적 과오를 저질렀다. 하나는 1778년 미국 독립 전쟁의 참전이고 또 하나는 1786년 영-불 통상조약의 체결이다. 미국 독립 전쟁을 돕기 위해 프랑스가 쓴 돈은 무려 20억 리브르였다. 이 돈은 프랑스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1786년의 영-불 통상조약은 영국 공업 제품을 수입함으로써 프랑스 공업에 타격을 주고, 프랑스 곡물을 수출함에 따라 곡가의 폭등을 가져왔다."(56-7)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무 총감 브리엔은 "특권 신분에 대한 지세 부과안과 인지세를 철회하고, 그 대신 20분의 1세를 모든 신분의 국민에게서 공평하게 징수하는 것으로 타협하는 한편, 삼부회를 1792년에 소집한다는 약속하에 4억 2,000만 리브르의 차입을 승인받았다." 그런데 "1787년 11월 19일 루이의 사촌 오를레앙 공이 4억 2,000만 리브르의 차입금 등록을 명한 왕명을 불법이라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61)


1788년 4월 왕이 고등법원을 무력화하려고 국왕전권 재판소Cour pleniere를 신설하자, "파리 고등법원을 선두로 전국의 고등법원이 이 새 재판제도에 맹렬히 항거하였다. 그들은 새 재판소의 설치를 반대하고, 모든 법원에 파업을 선동하고, 삼부회와 지방 삼부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 일로 지방에서 무질서와 폭동이 일어났다."(62) 네케르가 혼란 수습책으로 제시한 국왕전권 재판소 폐지와 삼부회 소집 요구를 왕이 받아들인 것은 왕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혁명을 시작한 귀족들은 "열기를 뿜으면서 개막되는 개혁을 잃어버린 봉건권의 회복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파트리오트patriote(혁명파)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개혁가들은 그 개혁을 일체의 과거를 태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삼부회의 선거 방법과 구성 문제에서 벌써부터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대립과 충돌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63-4)


우여곡절 끝에 열린 삼부회가 특권 신분과 제3신분 간의 대립으로 이어지자 "6월 12일, 제3신분은 단독으로 대의원 위임장 심사에 들어갔다." "6월 17일 19명의 제1신분 대의원을 포함한 제3신분 회의는 자기들이야말로 프랑스 전체 국민의 대표자임을 선언하여 490 대 90으로 국민의회의 성립을 결의하였다. 이 중대한 역사적 선언과 함께 국민의회는 자신의 결의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해산하지 않는다는 것과,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건 강제로 해산되는 경우에는 전체 국민이 납세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국민의회가 가결한 결의에 대해서는 왕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이제 제3신분 의회는 제3신분이라는 특정 계층의 대표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이라는 일반의지의 대표 기관이 되어 국민의회라는 명칭을 쓰게 된다." "20일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구기관球技館으로 옮겨, 성문 헌법이 제정되고 그 헌법이 확고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결코 흩어지지 않을 것"을 엄숙히 선서하였다.(71-2)


# 테니스코트의 서약


국민의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왕이 군대를 비밀리에 이동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과격한 선동가들의 구호가 남발되자 "7월 14일 무장한 폭동시민이 학정과 봉건제도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였다. 형무소 소장과 파리 시장이 시청 옆 광장에서 폭도에게 처형되었다. 그 후 3일간 폭동은 거리를 휩쓸었다."(76) "사흘 후 이 폭동은 성스런 혁명으로 승화되고 폭도는 영광스런 애국자, 즉 파트리오트patriote가 되었다." "왕은 파리의 폭도가 임명한 새 시장 바이이와 국민 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 후작을 그대로 승인하고 시장 바이이가 건네주는 삼색 휘장을 받아 모자에 꽂았다. 왕의 파리 방문과 일체의 행동은 혁명의 승인이며 재가였다. 왕은 스스로 왕권의 실추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제 혁명은 제1막을 내렸다. 혁명에 굴복한 왕은 자신의 왕위를 보전할 수는 있었으나, 그의 머리 위에는 프랑스 국민─그 대표기관인 국민의회─이라는 새 주권자가 있다는 것을 승인하였다."(77)


"국가의 공권력은 마비되고 폭력과 공포가 전국적인 규모로 번졌다. 이른바 '대공포La grande peur'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 대공포는 귀족 계급에 대한 농민의 증오와 단절을 부추기고 반봉건적 농민 폭동을 격화시키는 동시에 혁명을 지키기 위한 국민의 무장을 촉진시켰다. 농민반란은 그저 불만을 터뜨리는 폭동에 그치지 않고 광범한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였다."(79) 혁명 정부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몰수한 교회 재산을 담보로 아시냐Assignat라는 일종의 정부 보증 지폐를 발행하였다. 1789년 12월 19일에 처음 발행한 액수는 4억 리브르였다. 아시냐는 통화의 기능은 하지만, 원칙적으로 국유화한 교회 재산의 구입에 쓰는 정부 발행 어음이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아시냐를 국유재산 매입 대금과 납세금으로 회수하면 전부 태워버려야 했다. 그러나 일부만 소각하고 대부분 그대로 둔 채 계속 발행함으로써 가치의 하락을 초래하였다."(92)


프랑스 교회는 일찍부터 로마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왕권이 성직의 임면과 교회문제에 깊이 관여하는 등 독립성이 강했다. 그런데 국민의회는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1790년 7월 12일 성직자 민사 기본법을 가결하여, 헌장 준수 서약을 하지 않는 선서 거부자에게 공공 의식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령으로 선서 거부 성직자가 많은 지방에서는 주민의 세례, 결혼, 장례가 일체 거행될 수 없었다. 이것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혼란을 의미하였다." 예상 밖의 큰 혼란에 놀란 국민의회가 1791년 4월부터 선서 거부 성직자에 대한 관용 조처를 취하자, 도리어 "거부 성직자는 종교적 박해에서 승리한 격이 되고 선서 성직자는 마치 종교적 불순이라도 범한 꼴이 되었다." "여기서 선서 성직자들은 당시의 당시의 국민의회를 지배한 라파예트와 그 일파에서 이탈하여 더 과격한 자코뱅파Jacobins로 몰려갔다."(95-6)


1791년 1월 말에 자코뱅 클럽과 혁명파의 코르들리에Cordeliers 클럽에서 왕의 도망 계획이 폭로되었다. 왕의 도망 사건 처리를 두고 "혁명파의 자코뱅 클럽이 둘로 나뉘었다. 의회에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에 반대하는) 바르나브와 행동을 같이한 라메트 일파는 16일 자코뱅 클럽에서 분리하여 라파예트 일파와 함께 이른바 푀양Feuillants 클럽을 따로 만들었다. 이제 자코뱅은 로베스피에르와 페티옹 같은 과격파만의 클럽이 되었다." 푀양 클럽은 17일 샹 드 마르스에서 열린 공화정 요구 집회를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의회를 좌우하는 힘은 이른바 삼두파─라메트, 바르나브, 뒤포르─의 손아귀에 들어갔다."(106) 삼두파는 9월 3일 프랑스 국민을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으로 양분하는 헌법을 제정, 반포했는데, "이것은 푀양파의 보수적 혁명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자코뱅 클럽을 중심으로 한 민주 세력에게 거센 반격의 근거를 제공했다."(107)


# 1791년 헌법의 선거법

1. 수동시민 : 최소 3일간의 노동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내지 못하는 시민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

2. 제2차 선거위원 : 10일간의 노동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한 사람에 한정

3. 제3차 선거위원 : 국회의원, 재판관, 도 평의원, 주교 등을 선출하기 위한 300-800명의 지역 명사들

4. 국회의원 : 1마르크의 은화(약 50프랑)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한 자에 한정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필니츠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프랑스 공화정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8월 3일 드디어 왕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이 일어났다. <모르퇴르>라는 신문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 사령관 브룬스비크의 성명을 보도했는데, 이것이 왕과 적군의 내통을 백일하에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자코뱅과 프랑스의 모든 애국자를 협박하였다." 무장한 연맹병과 국민 방위대, 수동 시민이 봉기한 "8월 10일 사건은 파리 시의회 즉 파리 코뮌을 프랑스의 실권자로 만들었다. 입법의회는 파리 코뮌의 요구대로 왕권의 일시 정지를 선언하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 국회인 국민공회의 소집을 가결했다. 왕권은 우선 잠정적으로 정지되었지만 결국 영원히 폐지될 터였다. 왕은 탕플Temple에 유폐되었다." 이제 봉기를 주도한 노동자, 빈민, 영세 상인으로 구성된 "상퀼로트가 파리 코뮌의 실권자로 나타났다."(125-7)


"자코뱅당은 브리소의 지롱드파와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의 산악파Montagnards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 분열은 왕권의 소멸과 함께 우익의 푀양이 실각함으로써 집권파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 싸움이라는 정치적 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념과 목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사회적·계급적 분열이었다. 지롱드파의 혁명 이념이 부르주아의 경제적 자유와 사유권의 절대를 비롯한 시민적 자유에 있었다면, 산악파의 혁명 이념은, 그런 사유권을 자유로이 행사하려고 하여도 소유한 것이 없는 민중에게도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유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132) 11월 20일 튈르리 궁에서 지롱드파를 포함한 세력들이 왕과 반反혁명을 공모한 비밀문서가 발견되자, 12월 3일 의회는 "누구든지 프랑스에서 왕정의 재건을 제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결의하여 왕정복고의 길을 막고, 의회의 모든 투표를 지명점호제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143)


# 지명점호제 : 모든 의원은 이름이 호명되면 가부可否 의사를 밝히고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 처형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의 반불 동맹이 3월 이후 착실히 형성되어 갔다. 전쟁은 이제 전제군주들과 가톨릭 성직자 및 귀족들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국민 대 국민의 전쟁으로 변질하였다. 따라서 전쟁은 프랑스의 혁명만이 아니라 프랑스의 독립과 국가적 운명을 건 사생결단의 전쟁이 되었다."(147) "의회 안에서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싸움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을 때 사태를 결정한 것은 결국 상퀼로트의 봉기였다." "종래에는 반反혁명 혐의자는 왕당파뿐이었는데, 이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지롱드파도 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누가 진짜 애국자이며 누가 가짜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153-4) 로베스피에르파는 민중 봉기를 선동하는 극좌 에베르파와 과감한 사회정책에 반대하는 우익 당통파를 모두 숙청하고 행정부를 장악했지만, 그 역시 테르미도르 쿠데타에 휩쓸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산악파는 에베르와 당통에 이어 로베스피에르마저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그 과정에서 혁명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힘이 극도로 약해졌다.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는 데 협력한 평원파가 어김없이 간파한 사실도 바로 그것이었다. 평원파는 이제 자체의 힘만으로도 국민공회의 다수당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181) 로베스피에르가 쌓아올린 제도를 공격하는 데 앞장선 "평원파는 부르주아 출신들로서 혁명과 공화국을 왕당파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려는 의사는 강했으나, 방토즈법이 보여준 바와 같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왕정의 회복 못지 않게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서민 계급을 자기들에게 종속시키려고는 했으나 서민 계급과의 연합에 의해 혁명과 공화국을 지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평원파의 이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 '뮈스카댕muscadin'이라는 부잣집 청년 건달패의 반反자코뱅 테러이다."(182-3)


# 방토즈Ventose 법 :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분배하는 법. 무분별한 평등주의가 아니라 재산의 극단적인 불균형을 시정하여 소토지 생산자층을 국가 기반으로 삼으려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1795년 8월, 공회에서 채택된 공화 3년 헌법은) 1789년의 인권선언에 기록된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는 기본 조항을 버리고, "평등은 법이 만인에게 동일하다는 데에 존재한다"고 하여, 평등을 사법적인 것으로 후퇴시켰다. 그리고 인민의 사회적 권리를 거부한 이 헌법은 보통선거제를 폐지하고 재산에 기초한 제한선거제로 뒷걸음질했다."(187) "당시 파리 시민의 생활고와 불만을 충분히 이용한 왕당파는 (테르미도르파가 왕당파의 복귀를 막기 위해 제안한) '3분의 2법'의 불법성을 들어 대대적인 반란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국민공회 의사당인 튈르리 궁을 포위한 폭도는 약 2만 내지 2만 5,000명이었는데 진압에 나선 군인은 4,000명에 불과하였다. 중과부적으로 공회 측이 불리했으나 이를 역전시켜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자가 있었다. 바로 후일의 대영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188-9)


# 3분의 2법 : 새 입법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의석은 반드시 현재의 국민공회 의원들로 채워야 한다고 규정한 법


새롭게 출범한 총재 정부가 재정 파산과 대외 전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자, "자코뱅 잔당이 팡테옹 클럽이라는 과격파 조직을 만들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팡테옹 클럽에는 공화 3년 헌법을 비난하고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을 후회하고 1793년 헌법의 부활을 주장하는 좌익의 모든 세력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끌고 또 총재정부가 가장 무서워한 그룹은 그라쿠스 바뵈프를 중심으로 하는 과격한 평등주의자들이었다."(192)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은 자신의 추방을 결의한 500인회의 자코뱅과 원로원의 공화파를 총검으로 위협하여,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통령정부Consulat의 조직을 공포하였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10년 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207)


"바라스의 생각은 쿠데타가 끝나면 보나파르트를 다시 전장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고, 시에예스의 생각은 보나파르트를 실권 없는 최고권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오산이었다."(208) 12월 15일 공표된 "헌법에는 (시에예스가 구상한 실권 없는 국가원수로서의) 대선거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최고 행정권자인 제1통령에게 독재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세 사람의 통령이 있었으나 나머지 둘은 자문역에 불과한 들러리였다. 두 명의 제2통령에는 캉바세레스와 르브룅이 임명되고 시에예스와 뒤코스는 임시정부에서 밀려나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다."(211) "나폴레옹은 장관들의 연합을 막으려고 각 부에 협의회를 만들고 의장에는 참의원 의원을 앉혔다. 통령정부의 모든 기구와 관직은 제1통령의 독재권을 집행하는 손발이었다." "그는 삼부를 통어하는 독재자였다. 그의 행동은 입법부에도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212-3)


# 종신 통령을 향해가는 나폴레옹의 세 가지 과제

1. 더 많은 군사적 승리 : 이탈리아 재탈환, 영국과 강화협상(아미앵 조약, 1802년 3월 25일)을 맺어 대륙의 패자로 군림

2. 로마 교황과의 화해 : 교황과 종교 협약을 체결(1802년 4월 18일)하여 (왕당파가 다수인) 가톨릭 세력의 지지 획득

3. 입법부의 공화파 잔존 세력 제거 : 1802년 선거에서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반정부 공화파 의원들 축출


1802년 8월 4일, "보나파르트가 직접 기초한 새 헌법이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공화 10년 테르미도르 16일 헌법에 관한 원로원령'으로 공포되었다. 이제 보나파르티슴이라는 특이한 새 정치제도가 국민의 동의 위에 수립되었다."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고 제1통령의 전제를 강화한 "공화 10년 헌법이 수립한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공화제이나 사실상으로는 군주제였다. 그러므로 2년 뒤 제정이 선포되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226-7) "10년 임기 제1통령도, 종신 제1통령도, 이제 또 세습 황제도 국민 동의의 형식을 빌리는 것에 보나파르티슴의 특색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국민의 동의가 아니라 실은 기정사실에 대한 국민의 체념의 표현이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229)


"나폴레옹은 마렝고의 승리에서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1800년 8월 12일 저명한 법학자들로 민법전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 장씩 초안이 될 때마다 토론과 심의를 거쳐서 입법부의 의결로써 확정 공포하였다. 36장을 모두 합쳐서 '민법전Code civil'이라는 하나의 법률로 선포한 것이 1804년 3월 21일이었다. 민법전은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유지했으나 혁명적 입법의 철학적 원리를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혁명의 집약인 동시에 혁명의 수정이었으며, 시민혁명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민법을 종교적 영향에서 해방시키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혁명의 원리를 방어하고, 신분의 세습을 금지하고 상속과 소유에 관한 혁명적 입버의 일반적 원리를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민법전은 가족 관계에서 가장의 우월적 지위와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규정하여 보나파르티슴의 권위주의적 색채를 반영하였다."(235)


"나폴레옹의 군국주의는 많은 농민을 군대로 징발하였다. 따라서 농민은 나폴레옹을 싫어할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혁명을 통하여 새로 얻은 농토를 나폴레옹의 군사력이 안전하게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강력한 군사력이 등장하기 이전에 농민은 항상 자신의 새 토지에 대하여 불안해했는데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토지 문제에 관한 한 혁명의 결과를 철저히 보호하는 데 세심하였다. 그만큼 농민은 나폴레옹에게 고마워했고, 또 그만큼 보수화하였다. 농민의 보수화야말로 보나파르티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나폴레옹은 전쟁에 의하여 흥기하고 전쟁을 통하여 강해지고 전쟁 때문에 몰락하였다. 그의 생애는 전쟁과 함께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도 무의미했다. 따라서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점점 강력해진 그의 권력도 지속적인 전쟁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237-8)


# 아미앵 조약 : 지중해 재해권과 이집트를 영국에 빼앗기고 내정을 정비할 필요가 있던 나폴레옹과 유럽 국가들과 무역 재개를 바라던 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진행된 평화조약.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왕자가 되었다. 1802년 3월 25일 정식 조인


# 아미앵 조약 파기 이후의 전쟁 추이

1.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격파 (프레스부르크 평화조약)

2.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 점령, 홀란드 왕국으로 개조

3. 남부 독일에 라인 연방 창설

4. 1805년 8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 퇴임으로 신성로마제국 소멸

5. 1806년 10월 아우어슈테트와 예나에서 프로이센군 격파

6.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 1806년 11월 21일) 실시와 폴란드 왕국의 농노제 폐지

7. 1807년 5월 단치히 점령, 러시아군 격파(쾨니히스베르크, 틸지트 점령)하고 틸지트 조약 조인


"당시 유럽의 정치사회적 구조에 비추어볼 때 원래 나폴레옹 전쟁에는 두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대륙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시민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키는 면이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군의 진격은 나폴레옹 법전의 진군을 의미하고 나폴레옹은 전제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자로 환영 받았다."(246) 그러나 일찍이 시민혁명을 실현하고 산업혁명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 영국은 사정이 달랐다. 영국을 타겟으로 삼은 "대륙봉쇄를 뒷받침한 두 번째 명분은, 영국 상품을 배척하고 프랑스 산업을 보호하는 보호무역주의의 경제사상이었다. 나폴레옹은 영국 상품을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밀어내고 다음에는 점령 지역에서 몰아내더니, 드디어는 대륙 전체에서 쓸어내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산업의 발달이 대륙의 상품시장을 그만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륙봉쇄를 가능케 한 전제 조건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군사적 지배의 완성이었다."(248-9)


# 대륙봉쇄의 허점

1. 영국 상품의 배제는 종속국가들의 공업을 희생시킨 프랑스 공업의 독점을 의미

2. 공업가들에게는 유리했으나 무역상들은 큰 타격

3. 국가들마다 영국과의 경제 관계가 상이함(수출길이 막힌 농산물 가격 폭락, 수입길이 막힌 공업제품 가격 폭등 등 부작용 속출)


대륙봉쇄 와중에 행해진 "교황령의 점령과 병합은 나폴레옹의 큰 실책이었다. 각국의 가톨릭교도들이 상상 외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가톨릭교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스페인 국민이 받은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스페인 국민은 나폴레옹이 안겨준 새 헌법보다 가톨릭 신앙과 자기 나라 왕실을 더 사랑하였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시민과 농민이 스페인 군인과 함께 프랑스군에게 무서운 피의 반란을 일으켰다.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는 스페인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지배하에 있던 여러 민족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는 발화점이 되었다."(253) 대륙봉쇄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것은 밀, 목재, 대마, 수지의 가장 큰 시장을 상실한 러시아 지주계급이었다. "(마침내)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12월 31일 칙령을 반포하여, 중립국 선박의 러시아 항구 입항을 환영하는 동시에 견직물과 포도주 및 브랜디의 수입관세를 높여서 프랑스의 주요한 수출입품을 배척하였다."(260)


# 이후의 전쟁 추이

1. 1812년,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군 대패(추위, 배고픔, 게릴라전)

2. 1813년 3월 1일, 러시아와 프로이센 칼리슈 동맹 체결

3. 영국의 웰링턴 장군,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에 대승

4.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수상, 러시아 및 프로이센과 라이헨바흐 비밀조약 체결

5. 1813년 10월 16일, 라이프치히 해방전쟁에서 반불 동맹군 승리

6. 1814년 3월 9일, 쇼몽 조약 체결(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나폴레옹과 평화조약을 맺지 않고, 평화조약 이후라도 20년간 상호방위한다는 내용)

7. 3월 30일, 동맹군 파리 입성


나폴레옹이 유폐된 후, "연합국 사이에 최소한의 의견 일치를 볼 수 있고 또 프랑스 국민의 최소한의 합의를 얻을 수 있는 해결책은 사실 부르봉 왕가의 복구 이외에 달리 신통한 길이 없었다." 루이 18세가 반포한 헌장은 "국민대표가 제정한 헌법이 아니라 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흠정헌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나, 왕정의 복구가 혁명 전의 앙시앙레짐의 복구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장하였다."(279-80) 그러나 1815년 3월 1일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유럽과 프랑스에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첫째, 부르봉 왕가가 진정한 통치자의 자격이 있느냐의 문제였고, 둘째는 프랑스 국민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사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연합국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를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이전과 같은 관계에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1814년의 평화조약은 나폴레옹을 징계하기는 했으나 프랑스 국민을 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과연 옳았느냐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290)


# 제2차 파리조약(1815년 11월 20일)

1. 프로이센군이 라인 강 좌안 지방 점령

2. 스위스 접경 위링그 지방의 군사시설 파괴

3. 7억 프랑 배상금 지불

4. 4대 연합국 대사들로 구성된 관리 위원단의 감시와 지시


다시 복원한 루이 18세가 직면한 문제는 혁명과 나폴레옹이 성취한 터 위에 안정된 입헌군주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지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극우 왕당파는 입장이 달랐다. "왕당파는 귀족과 성직자와 지방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였고 또 그 지지를 받았다. 이 당에는 샤토브리앙 같은 저명한 작가나 빌레르 같은 식견 있는 정치가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프랑스 혁명을 광적으로 증오하고 실질적인 반혁명을 노린 극우였다. 왕이 그들을 자기보다 더 왕에게 충성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을 만큼 그들은 왕의 온건한 정책을 괴롭혔다. 특히 왕을 한결 더 괴롭힌 것은 그들의 사실상의 두목이 왕의 아우 아르투아 백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루이 18세가 1824년에 서거하면 샤를 10세로 즉위하게 될 사람인데, 그런 왕위 상속자가 헌장을 무시하는 백색테러의 선두에 서 있었으니 프랑스가 이제 실현해야 할 입헌군주정치의 희망에 먹구름이 드리웠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295)


# 왕당파 이외의 정치세력

1. 독립파 : 망명 귀족의 횡포를 미워하는 도시 부르주아지, 혁명정부에서 매입한 재산의 몰수를 두려워하는 지주, 나폴레옹을 사모하는 군인들의 집합체(콩스탕, 쿠리에 등)

2. 입헌파 : 혁명과 반혁명 모두를 멀리하고 헌장의 기반 위에서 복고 왕정의 안정을 바라는 명사 집단(조르당, 기조 등)


1824년 9월 샤를 10세가 즉위하자, 왕당파들이 추진한 계획은 "교육과 호적 및 혼인 사무를 교회에 위임하는 일, 혁명 기간에 국가가 몰수한 망명 귀족의 재산을 배상해 주는 일, 민법을 개정하여 세습적인 귀족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는 일 등이었다."(306) 앙시앵레짐 부활 음모에 맞서 "1830년 7월 27일부터 파리 시민은 시내 요소요소에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국민방위대는 1827년에 해산되었으나 대원들은 아직도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섰다. 낭만적인 혁명의 물결이 순식간에 전 시가를 휩쓸었다." "샤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군대의 힘으로 의회를 항복시키는 것이었는데, 많은 병력을 아프리카 알제 원정에 투입한 그에게는 그럴 만한 군대가 없었다. 그는 센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왕의 목숨을 노리는 폭도들을 피하여 생애 세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부르봉 복고 왕정은 워털루 이후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311)


의회가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추대한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 대혁명 초기 왕족으로 루이 16세에 반대한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조세프의 아들이었다. 조세프는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한 시해파로서 '평등공 필리프'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나 1793년에 자코뱅파에게 처형되었다."(312) "7월혁명은 부르주아가 내세운 민권 사상의 승리였으며, 대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을 통하여 이미 수립된 바 있었던 부르주아의 정치적·사회적 우월권이 재확립된 사건이었다. 이 혁명으로 이제는 앞으로 망명 귀족이 부르주아의 토지 소유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영원히 사라졌다."(315) "7월왕정 시대의 프랑스에서는 정치적·이념적으로 최소한 네 줄기가 뚜렷한 형태로 각축하기 시작하였다. 극우의 정통주의, 극좌의 공화주의, 그 중간에 입헌군주주의로서의 오를레앙주의, 그리고 현대 프랑스에 특이한 보나파르티슴으로."(319-20)


1831년, 최저임금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리옹의 폭동을 정부가 무력 진압하자 노동자들은 "7월왕정을 극도로 불신하게 하였다. 거기서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스스로 만든 강력한 노동조직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어떤 정치조직도 불신하는 프랑스 특유의 생디칼리슴이라는 노동운동의 씨앗이 이때 배태하기 시작하였다."(322) 1840년 이후 중정 정책을 편 기조 내각이 성립하면서 7월왕정은 나름의 안정과 번영을 누렸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정부 불안이 숨어 있었다. 노동자의 자유는 허위였다. 노동문제는 정부가 조속히 정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심각한 사태를 낳을 만큼 나날이 그 심각성을 더해 가고 있었다." "더구나 1833년 실시된 초등교육법은 글을 읽을 줄 아는 국민의 수효를 늘렸고, 또 인쇄술과 제지법의 발달은 책과 신문 등을 훨씬 염가로 제작할 수 있게 하여 더 많은 국민에게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갖게 하였다."(329-30)


# 기조의 중정 정책politique du juste milieu : 회복된 자유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주력하는 정책


7월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1847년 7월부터 시작된 개혁 연회 방식의 선거법 개정 운동에서 촉발되고 마침내 무장 봉기로 이어진 1848년 2월혁명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1815년 이래 한번은 보수적인 또 한번은 자유주의적인 입헌군주정을 시도했으나 두 번 다 실패하고 말았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 자체를 부정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자는 프랑스 혁명은 인정하였으나 상층 및 중층 부르주아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실패하였다. 오를레앙 왕가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국민주권의 원리를 시인하면서도 신흥 부르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을 위해 지나친 제한선거를 고집하다가 무너졌다. 복고 왕정은 정통파를 만들어내고, 7월왕정은 오를레앙파를 만들어내어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정치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프랑스의 정치 무대를 차지하는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341)


# 2월혁명의 상황 전개 

1. 파리 제12구의 개혁 연회banquet et reforme를 정부가 금지

2. 개혁파는 1848년 2월 22일로 연회 개최를 연기

3. 22일 군중 시위가 제압당하자 과격파들이 무장 봉기 조직

4. 기조 내각 해산과 국민 방위대의 혁명파 가담

5. 정규군 지휘권 마비와 무장해제

6. 루이 필리프 퇴임


2월혁명으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시민 평등의 원리에 따라 3월 5일 보통선거제를 결정하였다.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반혁명세력은 유권자가 24만에서 갑자기 960만으로 늘게 되는 사실에서 승산의 요인을 발견하고 있었다. 1833년의 초등교육법이 실시되어 문맹률이 많이 낮아지고 대중용 출판물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유권자는 아직 대부분 문맹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농민이었는데 그들의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의식을 좌우하는 것은 교구 신부들이었다."(346) 농민들에게 공화국이란 소란 그 자체였는데, "혁명정부가 새 농지법을 재정하여 개인의 토지를 재분배하거나 국유화할 것이라는 소문에 기절초풍하였다." 결국 총선거의 결과는 "정통파 등 우익 왕정파가 차지한 약 150석과 좌익의 사회주의자가 얻은 약 100석을 제외한 나머지 600석 이상이 중도파에게 돌아갔다. 파리에서조차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인기가 없었다."(347-8)


팔루 일파는 국립 작업장을 폐쇄하여 노동자 폭동을 유도하였고, 그들의 생각대로 6월 21-23일에 걸쳐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투입되어 처참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폭동은 진압된다. "폭동의 와중에서 탄생한 카베냐크의 새 정부는 내각의 형태를 취했는데, 새 정부는 이제 위험한 요인을 일체 단호히 제거하였다. 국립 작업장 폐지, 온갖 종류의 클럽 폐쇄, 폭동 진압에 응하지 않는 공화적인 국민방위대의 무장해제 또는 해산, 신문지법의 부활에 의한 언론 탄압, 하루 열두 시간으로의 노동시간 연장, 온갖 빛깔의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과 감시 등 공화국은 이제 이름뿐이고 반동이 완전히 지배하였다."(352) 이후 12월 10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카베냐크, 라마르틴, 르드뤼 롤랭이 각각 공화주의의 강온파를 대표하여 서로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모두 어이없이 낙선하였다. 당선자는 난데없는 제4의 후보자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었다."(354)


#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당선 요인

1. 영웅 나폴레옹의 전설과 후광

2. 공화주의자를 배격한 농민표 획득

3. 6월 폭동 이후 노동자들마저 공화주의자들을 불신

4. 정통파와 오를레앙파가 공화주의보다 보나파르티슴을 선택


장기 집권을 꿈꾸던 나폴레옹 3세는 1851년 12월 1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는 국민주권을 믿지도 않았고 공화국을 수호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나폴레옹 3세의 권력은 두 차례의 쿠데타에 힘입은 것이었으므로 국민의 자유 박탈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보상은 경제적 번영과 외교의 성공이었다. 쿠데타에 의한 권력이란 합헌성과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언제 전복될지 알 수 없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 존립을 위해서는 항상 뭔가 잘 하고 있다는 갈채를 국민으로부터 계속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런 갈채가 그치는 날이면 권력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국민은 그 권력을 지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경제적 번영과 외교의 성공에서 그런 갈채를 받고 있었다. 특히 외교적 성공이란 군사적 승리와 함께 일반 국민의 눈에 잘 띄는 현란한 것이다. 여기서 나폴레옹 3세는 크림 전쟁 후에도 계속 외교적 성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365-6)


# 나폴레옹 3세의 주요 행보

1. 크림전쟁 : 영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흑해 진출 저지

2. 이탈리아 통일 :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통일 운동을 부추겼지만 교황과 국내 가톨릭 세력의 지지 상실

3. 자유무역 정책 : 영국(1860),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1861), 프로이센(1862)과 자유무역협정 체결

4. 공화파와 타협 시도 : 의회 권한 확대, 노동자 결사법 제정

5.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 휴전 중재 : 비스마르크의 외교 수완에 농락당하면서 독일 통일을 목전에 두게 됨

6. 멕시코 원정 실패 : 미국의 먼로주의와 멕시코 공화파의 저항에 밀려 철수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배경

1. 오스트리아에게 승전하면서 북부 독일연방의 맹주가 된 프로이센이 중부 유럽의 최강국으로 등장. 아울러 프랑스 영향권에 있는 남부 독일까지 정복하여 독일 통일을 완성하려는 야망을 간직

2.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의 레오폴트 공이 스페인 왕에 즉위한다는 소문이 파리에 퍼짐(1870년 7월) : 좌우협공 위기에 빠진 프랑스

3.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레오폴트 사의 표명

4. 프랑스 외상 그라몽이 향후에도 호엔촐레른 왕가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는 확약을 요구하자 레오폴트 왕이 격분

5. 비스마르크가 이를 전쟁의 구실로 삼아 양국 국민을 선동

6. 프랑스 의회 전시 채무 가결, 선전 포고(7월 19일)


"9월 2일 (세당에서) 마크마옹 원수 휘하의 전 부대는 황제 나폴레옹 3세와 함께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의 긴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굴욕적 참패였다. 파리 시민은 이런 참패를 가져온 제정을 더 존속시킬 수 없다고 다짐하였다. 9월 4일 드디어 혁명이 일어났다."(382) 그러나 혁명으로 구성된 임시 국방정부는 "1792년의 공화국처럼 과격하지도 않았고 1848년의 공화국처럼 분열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새 정부는 출발부터 대체로 온건한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385) 파리가 프로이센군에게 포위 당하자 "국민방위대와 일반 시민은 대부분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고 진심으로 독일군의 박멸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이에는 "블랑키보다는 차라리 비스마르크"라는 구호가 점점 퍼져 나갔다. 이 구호는 보수적인 정부의 생각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과격파의 혁명보다 독일로의 항복을 택하려고 하였다. 이런 태도가 과격파의 눈에 반역으로 보였음은 말할 나위 없다."(393)


"(1871년) 3월 18일 파리에서 파노라마처럼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들은 모두 즉흥적인 것이었다. 티에르의 작전 계획 이외에는 미리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작전 계획도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짜여진 것이 아니라 다분히 즉흥적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계획은 오류투성이였다. 새벽의 기습은 파리 시민에게는 청천벽력처럼 너무나 의외의 사건이었다. 거기에 대응한 모든 행동도 순간순간의 상황에 따라 취해진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르콩트와 토마의 처형도, 브뤼넬의 병영 습격도, 비누아의 철군도, 티에르의 정부 철수 결정도 모두 순간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의 돌발 앞에서 취해진 일들이었다. 3월 18일 사건은 본래 의미의 봉기가 아니었다. 파리 주민과 방위대의 폭동은 정부에 대한 피동적인 자연발생적 행동이었다. 어쨌든 현대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세계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가장 논란이 많은 파리 코뮌이라는 미완성 혁명의 불길이 이제 가눌 수 없이 드높이 솟았다."(408)


# 1871년 5월 28일 파리 코뮌 붕괴


"톰슨은 1871년의 파리 코뮌과 그해 봄 거의 동시에 지방 대도시에서 일어난 코뮌들은 1789년 이래로 이어져 온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이 양산한 착잡한 분규들을 뒤돌아볼 때 이들을 매듭짓는 과정 중 최대의 것으로서, 그 후부터 프랑스는 혁명적 전통을 돌아볼 때면 코뮌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폭력에 대한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톰슨은 파리 코뮌을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를 특정지었던 공화적·혁명적 전통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파리 코뮌의 처절한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폭력에 의한 혁명 기도를 포기하게 하여 평화적 타결과 화해의 길을 열게 했다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제3공화국의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한 세력은 혁명적인 공화주의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적 전통에 반대해 온 보수 세력이었는데, 그러한 의외의 현상을 일어나게 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파리 코뮌이었다는 것이다."(432-3) 


# 뷔리의 파리 코뮌 평가

1. 자본과 노동, 수도와 지방 사이의 오해가 빚은 비극으로서, 1789년 이후 줄곧 유지해 온 파리의 정치 주도권 상실

2. 좌익 과격파를 거세하여 폭력과 불안정, 사회적 위기를 동일시하던 관념 불식

3.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 지연

4. 국민방위대를 해체하여 민중 데모크라시의 원천 세력 제거

5. 제3공화국 탄생의 초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코뮌 고려대학교 교양총서 4
가쓰라 아키오 지음, 정명희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1848년 2월혁명의 결과 제2공화정부가 태어나고 보통선거가 선언되었을 때, 부르주아 공화파 임시정부는 노동자 세력을 철저히 진압하고 홀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농민들의 지지를 얻은 루이 나폴레옹이 압승하자 권력의 항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851년 12월 21일의 국민투표는 약 740만 표 대 60만 표라는 압도적인 표 차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추인했고, 이듬해 1월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하여 그 권한을 대폭 확장시킨 신헌법이 발표되었다." 꾸준히 제정 부활을 도모한 끝에 1852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고 제2제국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1852년의 헌법을 약간 수정·보완한 '제국헌법'에 의하면 행정·군사·외교의 전권은 황제에게 집중되고, 도지사prefet, 지방장mairie을 포함하여 모든 관직은 임명제로 바뀌며, 장관은 황제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책임내각제는 완전히 부정되었다."(28-9)


"카를 마르크스는 제2제정의 지배체제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부르고, 그 국가를 보나파르트 국가라고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보나파르티즘이란, 부르주아지가 자체적으로 국가를 통치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노동자계급이 아직 그 능력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시기에, 계급들 사이의 조정자를 표방하여 보수적인 소토지 소유 농민=분할지 농민을 정치권력의 기반으로 삼아 성립된 반동적 독재체제이며,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를 실현한 국가권력의 가장 불순한 형태로 규정된다." "많은 노동자는 황제사회주의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으며, 산업자본주의는 제정권력에 질서 유지와 산업의 보호·장려를 기대했다. 부르봉 정통 왕조주의에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가톨릭 세력도, 정부가 교회의 활동에 편의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제정을 지지했고, 또한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농민의 사대주의적 경향은 보나파르트 가家의 카리스마적 권위가 뿌리 내리기에 훌륭한 토양이었다."(29-30)


"나폴레옹 3세는 권력의 자리에 앉자, 혁명의 재발을 방지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대大부르주아지와 제휴하여 적극적인 경제팽창 정책을 내세웠다." "이 시기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는 것은, 생시몽주의자 유대인 프레르 형제가 설립한 '크레디 모빌리에'(동산은행動産銀行)로 대표되는 거대한 투자은행의 출현과 수도 파리를 시작으로 대도시에서 실시된 대규모 도시계획사업이다."(32-3) 1860년 나폴레옹 3세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영불통상조약을 맺어 자유무역 체제로 돌아서자 "대부분의 산업자본가는 일제히 반대의 불길을 당겨, 황제의 이탈리아 정책에 반감을 갖는 가톨릭 세력과 손잡고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36-7) 황제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기대했지만, 영국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접하면서 "정치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던 노동자는, 이제 황제의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e'의 포로가 되는 것을 감수하지 않게 되었다."(41)


"1867년 공황을 계기로 하여 사회정세에 나타난 가장 현저한 변화는, 도시의 공장노동자가 노동운동의 제1선에 등장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해고, 임금삭감, 노동강화라는 자본 공세에 직면하여 계급의식에 눈떴다. 이들 대다수의 공장노동자들은 산업혁명의 진전과 함께 농촌에서 도시로 급격히 흡수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농민적 성격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며, 어떻든 대자본이나 황제의 가부장적 온정주의적 지배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불황이 심각해지자 도시 직인층이 갖는 혁명의식을 흡수하여, 자본에 대한 임금노동의 해방을 짊어지는 체제개혁 세력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와 힘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노동운동은 여기에서 프루동적인 동업조합의 상호주의의 껍질을 벗고, 동업조합 내부에 설치된 저항조합을 모체로 하여 혁명적 노동조합syndicat을 조직하는 방향성을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49-50)


# 제정 말기 혁명운동의 지도층

1. 자코뱅파 및 프티부르주아적 급진공화파 : 민주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모인 학자, 저널리스트, 변호사, 예술가 집단

2. 블랑키파 : 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독재를 실현하고자 분투했던 블랑키를 중심으로 단결된 집단

3. 제1인터내셔널 지도층 : 순수 프루동주의자에서 혁명적 집산주의자collectivistes로 이행한 집단(생산수단을 공유하는 평등사회를 구상했지만 혁명독재는 반대)


"1870년 7월,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가 발단이 되어 돌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국내에서는 혁명운동에 뒤흔들리고 국제 정세에서는 고립되어, 국내외 양쪽으로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 3세가 제정 연명의 최후 수단으로 시도한 군사적 모험이었다."(65-6) 그러나 1870년 9월 2일, "메스 구원에 실패하고 거꾸로 스당에 몰린 마크-마옹 지휘하의 프랑스군은 황제와 함께 프로이센의 군문軍門에서 투항했다.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이틀 후 9월 4일 일요일, 스당 항복의 보고에 전격적인 충격을 받은 파리 시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봉기하여 약 50만 명의 시민이, 블랑키파를 선두로 하여 임시로 소집된 입법원 회의장인 부르봉 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스당의 항복은 제정 최후의 보루였던 군사권력의 붕괴를 의미했다. 여기에서 지배의 기초가 완전히 파헤쳐져 무너져 버린 제2제국은 파리 민중의 돌풍을 정면으로 받아 썩은 나무가 쓰러지듯이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다."(68-9)


부르주아 공화파 의원들로 구성된 국방 임시정부는 표면상으로는 "한 치의 토지도, 우리 성채의 돌멩이 하나도 양도하지 않는다"(외무장관 파브르)고 공언하면서 "내심으로는 목전에 닥친 프로이센군보다는 무장한 민중, 즉 국민군 쪽이 훨씬 두려웠다."(82) "당연히 '총출격'을 요구하는 혁명 세력·국민군 병사와 구실을 내세워 결전을 회피하려고 하는 국방정부와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간다. 블랑키파는 이제 확실하게 '국민배신 정부'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정부와 혁명 세력의 협력관계는 열흘 가량 지나자 냉각되고 적대관계로 바뀌었다. 민중의 자주적 관리조직으로서의 '코뮌' 선거를 요망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였다. 이 시점에서 민중이 마음속에 그린 코뮌이란, 무엇보다 대혁명 때의 '혁명적 코뮌'의 이미지였다. 여기에 더해 중세도시에서 쟁취했던 코뮌 자치권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되었다."(85)


1871년 1월 25일부터 26일까지 베르사유에서 교섭이 진행되어, "21일 동안의 휴전, 휴전 기간 중 강화講和의 가부를 묻는 '국민의회' 선거 시행, 쌍방의 점령 지점에서의 전투행위 정지, 파리 성벽의 무장해제, 파리를 지키는 요새의 프로이센군에 의한 점령, 정규군 1개 사단과 국민군을 제외한 파리군의 항복, 프로이센군에 대한 2억 프랑의 전시과세 지불 등의 굴욕적 조항을 짜넣은 휴전조약이 조인되었다."(120) 2월 8일, 파리에서 열린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급진공화파가 대거 승리를 거두었지만, 보르도 국민의회는 티에르를 행정장관으로 지명하여, 노동계급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태 수습을 추진하였다. "3월 17일부터 18일 밤까지 외무부에서는 파리의 국민군에 대한 기습작전을 협의하기 위한 각료회의가 열렸다. 작전의 개략은, 파리의 전 정규군을 동원하여 도시 전체를 점령, 국민군을 일격에 무장해제시키고, 중앙위 전 멤버와 주요 혁명가를 체포한다는 것이었다."(143)


3월 18일 새벽에 감행된 정부군의 기습은 자연발생적으로 봉기한 민중·국민군 병사들의 저항과 정부군 병사들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티에르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자, 즉각 파리를 포기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는 1848년 2월혁명 때 당시 국왕 루이 필리프에게 전술적으로 일단 수도를 철퇴한 다음, 지방의 병력을 재결집시켜 파리를 탈환한다는 작전을 건의했던 일을 떠올렸다."(153) "리옹, 마르세유, 나르본 등 많은 지방도시에서 파리를 모방하여 코뮌 운동이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아울러 떠올리면, 신속한 결단과 행동만이 승리를 가능케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중앙위는 티에르 정부의 도주로 생긴 파리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거저 들어온 정치권력을 즉각 행사하려고 하지 않고,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대신해야 할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주저했다. 그들은 결국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렸다."(158-9)


3월 28일, 정식으로 성립된 파리코뮌의 정책을 살펴보면 "의회식 기관이 아니라, 동시에 입법하고 행정하는 직접 민주주의적 '행동 기관'(마르크스)이 되어 '돈이 덜 드는 정부'라는 구상하에서, 사법관을 포함한 모든 관리는 철저한 리콜제─언제라도 해임이 가능하고, 민중에 대해서 직접 책임을 지는 대표제─에 따르고, 관리의 정치적·직업적 선서 의무는 폐지되며, 그들의 봉급은 노동자의 최고임금 수준을 넘지 않을 것 등이 정해졌다(4월 2일). 또 관리의 겸직에 의한 이중 수당 취득이 금지되었다(5월 4일). 상비군-정규군은 폐지되고 코뮌의 국민군이 시의 치안과 방위를 맡으며, 표현·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과 시민의 자유는 반혁명 세력 단속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충분히 보장되었다. 또한 노동자의 생활개선을 위한 사회정책이나 노동자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이 차례로 나오고, 세속화된 무료 의무교육을 통하여 대중의 교육 수준 향상이 도모되었다."(199)


"노동위나 교육위의 업적과 반대로 코뮌의 약점을 분명하게 노출시킨 것은 보안위원회와 재정위원회다. 국가의 종교예산이 폐지되고 수도회의 자산이 몰수된 것은 코뮌 정신에서 볼 때 당연한 조치였으나, 대혁명 때의 생-쥐스트를 자처하는 블랑키주의자 리고를 '대표'로 하는 보안위는 성직자·반코뮌파에 대하여 종종 필요 이상의 공포정치를 행했다. 특히 교회시설을 제멋대로 접수하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사를 체포한 것 등은 중소 부르주아지들에게 쓸데없이 불안을 조장해, 베르사유 쪽에 '박해'라는 그럴싸한 선전 재료를 제공했다." 또한 재정위원회가 프랑스은행 장악에 소홀한 틈을 타서, 프랑스은행은 "베르사유가 파리와 싸우기 위해 은행 앞으로 발행한 2억 5천 7백 63만 7천 프랑의 어음을 인수"하여 코뮌 반대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엥겔스와 많은 역사가들은 프랑스은행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을 코뮌 패배의 중대한 요인 중 하나로 꼽는다."(207-8)


"티에르는 지방의 소란을 진압하면서, 비스마르크와 교섭하여 휴전조항을 완화시키고, 3월 말까지 약 6만 5천의 정규군 병력을 베르사유로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4월 1일, 국민의회에서 '멋진 육군'을 극구 칭찬한 티에르는 파리 공격 결정을 내렸다." "이날 오후 공격 소식을 들은 파리에서는 비상소집의 북소리가 울리고, 베르사유군의 만행에 격앙된 군중은 즉시 베르사유로 총공격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 시점에서 파리는 현역 국민군 8만 명, 주둔 국민군 11만 4천 명, 여기에 벨기에인 700명, 폴란드인 400명 등 외국인 의용병을 보태면 20만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실시된 총사령관제의 폐지와 징병제의 철폐가 전반적인 군기와 지휘 능력에 악영향을 끼쳐, 실제 전투요원은 약 4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227-8) 더구나 군사권력을 대표하는 국민군 중앙위와 문민권력을 대표하는 코뮌정부 사이의 알력은, 코민 측의 열세를 더욱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코뮌의 이중 삼중의 내분이 베르사유 쪽에 더욱더 허점을 이용할 여지를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티에르는 보르도에 예정되어 있던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국 도시회의 개최를 금지하고 지도자를 체포하여 파리와 지방도시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프로토를 개입시켜 수차례에 걸쳐 이뤄진, 인질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블랑키를 석방시키려는 교섭도 티에르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었다. 다르부아 대주교의 친서를 가지고 파리에서 파견된 인질 중의 한 사람인 라가르드 신부는 굳은 서약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블랑키 한 사람과 인질 전원을 교환하자는 최후의 제안마저 티에르에게 냉정히 거절당하는 것으로 5월 13일의 교섭은 최종 결렬되었다. 티에르는 파리에게 피의 값을 치르게 한다는 구실을 얻어내기 위해, 오히려 대주교의 처형을 바라고 있었다."(250-1)


5월 21일 일요일, "적이 성벽에 바짝 다가와 성문을 살피고 있을 때도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규군이 침입해 와도 3월 18일처럼 민중과 손을 맞잡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공기가 넘치고 있었다. 대부분이 농민 출신인 정규군 병사들은 패전 콤플렉스가 있는 데다가 파리의 반란 때문에 귀향이 늦춰졌다는 원망이 겹쳐, 파리 시민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해 피에 굶주린 흉포한 야수가 되어 있었다." "21일 밤이 되자 두애, 비누아 장군이 인솔하는 베르사유군 본대가 도착하여, 포앵 뒤 주르 지구에서 속속 파리로 들이닥쳤다. 트로카데로, 개선문은 밤 사이에 점령당해 포로의 총살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피의 주간'이라고 불리는 처참한 시가전의 막이 올랐다."(254-5) "23일, 베르사유군은 몽마르트르 고지를 탈취하고 바티뇰, 제1구, 중앙지구도 점령했다. 3월 18일의 한을 풀어줄 때가 이윽고 왔다는 듯이, 사령관은 로제 가街를 시작으로 점령지구에서 연맹병과 일반시민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개시했다."(257)


코뮌의 씨를 말리려는 백색 테러는 5월 28일 베르사유군 사령관 마크-마옹의 파리 정복 선언을 무색케 할만큼 끊임없이 자행되고 나서야 끝났다. "코뮌의 붕괴는 프랑스의 노동운동·혁명운동에 괴멸적 타격을 주고, 그 발전을 10년 이상이나 늦추었다. 인터내셔널을 금압하는 '뒤포르 법'이 제정되어 시민 자유는 대폭 제한되었다. 또한 인터내셔널의 국제조직도 각국 정부의 억압과 영국의 노동조합 운동가의 이탈, 스위스에 망명하여 코뮌 무정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바쿠닌의 분파행동 등 때문에 쇠퇴에서 해체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국제 사회주의의 혁명운동에 준 영향을 별도로 생각해도, 왕당파나 제정파의 군주제 부활 음모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제3공화제 확립에 무시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민주주의적인 공화주의 세력의 끈질긴 운동으로, 1880년 코뮈나르의 전면적 대사면령이 결정되었을 때, 프랑스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새로운 부활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26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 모더니티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848년 튈르리 궁전의 약탈과 바리케이드에서 벌어진 창조적 파괴의 달콤씁쓸한 경험을 겪은 뒤 보들레르가 느낀 근대성이라는 개념에는 모순이 있다. 현재와 맞붙어 싸우고 미래를 창조하려면 전통은, 필요하다면 폭력에 기대서라도 전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통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닻을 빼앗기고 무력하게 표류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1860년에 이렇게 썼다. 예술가의 목표는 근대를 '영원하고 확고부동한 것'을 다루는 예술의 다른 절반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일시적이고 덧없고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플로베르의 딜레마와도 공명하는 어떤 문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충분히 빠르게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종합이 도출되고 그것을 손에 넣기도 전에 우리를 끌고 가던 유령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렵다. 그러나 온통 이렇게 서두르는 바람에 엄청난 양의 인간쓰레기가 뒤에 남겨진다. '뿌리 뽑힌 무수한 인생'을 무시할 수는 없다."(28-9)


발자크는 도시에 충만해 있는 근대성의 신화를 제거하여 부르주아들의 혼탁한 욕망이 연출하는 연극을 꿰뚫어보았다. "발자크는 대개 시골 출신이 파리 생활에 적응해가는 통과의례 장면을 묘사하는데, 상인이든, 야심적인 젊은 귀족이든, 아니면 연줄이 좋은 여자이든 상관없다. 일단 적응하고 나면 그들은 절대로, 설령 자기들이 파리에서 겪은 실패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되더라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골 출신이라는 것, 시골 권력에 대한 격렬한 부정은 이렇게 발전하여 파리 생활의 창립 신화 가운데 하나가 된다. 즉 파리는 독자적인 실체이며, 어떤 면으로든 그것이 그렇게 경멸하는 지방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신화이다."(52) 파리에서 "하층계급이든 중간계급이든 명문귀족이든 온갖 사회적 지위의 사람들은 모두 '필요'라는 무자비한 여신, 돈과 명예와 오락의 필요가 휘두르는 채찍질로 이리저리 달리고 뛰고 법석을 떤다. 이곳을 관장하는 것은 자본의 순환이다."(54)


발자크는 부르주아들이 친밀성이나 내면적 감정을 느낄 능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차가운 계산과 돈 계산을 기준으로 한 이기주의, 의제자본擬制資本과 이윤 추구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70) "시간과 공간의 말살이라는 관념은 숭고함에 대한 특별히 자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해석이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의 정복과 세계(어머니 대지)의 정복은 무수한 자본주의적 환상에서 축출되었지만 숭고한 성적 욕구라는 것으로 표현된다. 부르주아적 근대성의 신화에 관해 뭔가 결정적인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발자크에게서 미래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무너져 현재의 시간으로 바뀌는 때는 바로 희망, 기억, 욕구가 수렴되는 순간이다. "미래에 대한 열망과 과거의 회상을 통해 현재의 더없는 행복을 세 배로 늘린다." 이것은 개인적 계시와 사회적 혁명의 최고의 순간, 발자크가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고상한 순간이다."(78-9)


발자크는 도시를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집합적 기억을 위한 특별한 장소를 상상 속에 구축한다. 이것은 혁명의 순간이 오면 '번뜩이는' 어떤 정치적 감수성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작업 중인 도시를 근거로 한 혁명적 변형으로서의 근대성의 신화이다."(85) 그러나 오스망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이라는 명제로 근대성의 신화를 포장한다. "풍선과 삼각측량용 망루로 무장한 오스망 역시 그것을 땅 위에서 재구성하는 일에 착수하면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파리를 마음대로 처리했다.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발자크는 도시가 자기 속에 있는 하나의 감정적 존재인 것처럼 관련된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지시하고 꿰뚫어보고 해부하고 내면화하는 반면, 오스망은 그 환상적 충동을 전환시켜 표현과 행동의 기술면에서 국가와 자금주들이 선두를 차지하는 확연하게 계급적인 기획을 만든다."(81)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1840년대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개혁가들은 도시를 미래의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할 어떤 것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정치적·사회적·물질적 유기체 형태─하나의 신체정치─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98) 신체정치 하에서 "정신적 권력은 사제의 손에서 지성인들─과학자와 예술가─의 손으로 넘어가야 하며 속세의 권력은 산업인 본인들 가운데서 지도적 인물이 가져야 한다. 후자의 관심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최소비용과 효율적 형태의 행정을 고안하여 직접 생산자들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정부의 기능은 "유용한 업무가 방해받지 않도록" 보장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효율적인 행정이 지시에 의한 통치를 대신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일할 것이다." 생시몽은 1803년에 이미 이렇게 선언했다. 결국 사회체제의 질병이 치유되려면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적절한 생산조직과 유용한 노동이다."(103)


노동자 자신들이 결성한 독립적 생산조합이라는 구상은 공화주의자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중심 의제였다. 그러나 프루동은 "생산조합이 개별적인 자유와 주도권을 질식시킬까봐 우려했고,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분을 철폐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관계들을 좀더 조화롭고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프루동은 공동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만약 "사유재산이 장물"이라면 "공동체는 죽음"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1840년의 공산주의자 회의에 참가한 많은 연사들은 공동체와 공산주의가 호환 가능한 용어라고 말했으며, 프루동은 중앙집중식 정치권력과 의사결정과정을 혐오했다."(116-7) 하지만 프루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이므로 그들이 생산한 가치에 따라 급료가 지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 노동의 화폐numeraire라는 것을 주창하려고 애쓰다가 풀 길 없는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다."(120)


1848년 6월에 부르주아적 근대성 개념과 맞부딪힌 또다른 근대성 개념은 "인구 전체를 양육할 수 있고, 시골과 성장하는 도시에 사는 프랑스 국민 대다수가 겪고 있던 빈곤과 몰락의 여건을 다룰 능력이 있는 사회공화국social republic의 이상에 기반을 두었다. 그것은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고, 걸핏하면 평등, 자유, 공동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혼란을 빚었지만, 노동과 공동체 활동이 결합된 형태가 보다 적절한 사회관계와 보급 표준의 형태를 위한 대안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라는 데 깊은 믿음을 품고 있었다."(130) 이처럼 당대 파리에서는 도시의 적절한 재건설을 추구했던 유토피아 사상가나 도시 이론가들의 온갖 사상이 들끓었지만, 1848년 이후 "그 도시를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들만의 특별한 이익과 목적에 맞추어 개조하면서 대중에게는 상실감과 허탈감만 남겨준 것은 오스망과 개발업자, 투기꾼, 자금주, 시장의 힘이었다."(133)


"오스망이 업무를 완수한 뒤인 1869년에 출판된 <감정교육>은 그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 없는 사물에 대한 정교한 (그리고 아주 뛰어난) 묘사가 풍부하다. 그 도시는 우리의 감각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파악되지만 '감정을 가진 존재'나 '신체정치'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잃어버린다." 루이 나폴레옹이 그려나간 제2제정의 역사는 "자본의 축적이 가지는 힘에 맞서 황제권력 주위에 신체정치의 감각을 재구축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자본의 축적이 그러한 정치 형태에 적대적이라고 본 클라크의 관찰은 아주 타당하다. 경제적 해방(예전에는 생시몽주의자이던 미셸 슈발리에가 1860년에 맺은 영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으로 시작하는)은 황제 권력을 서서히 좀먹기 시작했다. 제국을 몰락시킨 것은 공화주의자(어쨌든 이들도 대부분 사유재산과 기업의 자유에 이끌리고 있었다)라든가 노동자의 저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도 했다."(133-4) 


1848년에 이미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자본과 노동력의 잉여는 건조환경에 대한 대규모 장기 투자 계획을 통해 흡수될 예정이었는데 이는 공간관계의 개선에 초점을 맞춘 계획이었다. 제국이 선언된 지 1년이 못되어 1,000명 이상이 튈르리 궁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미처 등록되지도 않은 수천 명이 철로 공사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1851년만 해도 한산하던 광산과 제련소는 증가하는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 가동하고 있었다. 아마 자본주의 최초의 대위기였을 사건이 자본과 노동력 과잉을 수송과 교통 시스템의 재편 작업에 장기적으로 채용함으로써 극복된 것으로 보였다."(161) "하지만 자본과 노동의 과잉을 흡수하는 그러한 과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생산적' 고용이란 항상 이윤을 내는 고용을 의미한다는 것이 문제였다."(162)


생시몽의 영향을 받은 페레르 형제는 "오래전부터 신용 시스템이 경제 발전과 사회 변화의 중추라고 생각했다. 홍수처럼 선전을 쏟아부으면서 그들은 소액 저축을 동원하여 장기 프로젝트를 감당하도록 신용기관들을 치밀한 위계 형태로 조직하여 저축을 민간 차원으로 확산하는 길을 모색했다. '자본의 연합'이 그들의 주제였고, 미래의 발전에 대한 거대하고 대담한 투기가 그들의 실천이었다."(175) "위대한 투기자는 파리와 그 도시 형태를 만드는 책임을 질 뿐 아니라 전 지구를 지휘할 열망을 품는다. 그 열망을 달성하는 수단은 자본 연합이다. 졸라가 생시몽주의 원리가 처음 형성된 지 70년 가량 지난 뒤 그것을 극히 자신만만한 형태로 불러내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사실은 프랑스에서 19세기 내내 이 사고 모델이 꾸준히 존속해왔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준다. 졸라가 불러낸 공식, "과학의 도움을 받은 돈은 진보를 만든다"는 공식은 모든 차원에서 공감을 얻었다."(182)


부동산 소유권의 사회적 의미와 방향이 빠른 속도로 바뀌면서 "파리의 부동산은 점점 더 순수한 재정적 자산으로, 자본의 일반적인 유통과정에 통합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의제자본 형태로 평가되었다."(185) "1840년대의 자산 소유자 비율을 보면 점포주와 수공업자들이 지배적(절반)이었고 자유전문직과 대상인이 나머지 1/3을 차지했다. 1880년이 되면 이 유형은 완전히 변한다. 점포주와 수공업자의 비율은 13.6%로 떨어졌고 자유전문직도 8.1%로 떨어졌으며, 오로지 지주이기만 한 사람들 계층(53.9%)이 그 공백을 메웠다. 대상인(특히 '회사'라는 새로운 범주와 결합했을 때)만이 예전 지위를 유지했다." "중하류층과 소부르주아들은 부동산 소유권에서 계속 배제되었고, 그들의 자리는 지주와 대상인들로 이루어지는 상류층 부르주아가 차지했다. 그러한 변화는 수공업과 소생산자와 점포주가 대상인과 금융에 종속되는, 상업, 금융, 제조업 구조의 중대한 변화와 일치한다."(187-8)


"좀더 순수한 자본주의적 노선에 따르는 토지와 부동산 시장이 새로운 신용시스템의 성장에 고무되어 재편성된 현상(좌안에서처럼 전통주의자의 저항 중심지도 물론 있지만)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파리 내부 공간의 재편성이 공간을 장악하려는 여러 다른 사용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격 경쟁에 점점 더 예속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노동 인구의 대다수는 변두리(일터까지 더 먼 길을 가야 하는)로 흩어지거나, 아니면 도심 가까이의 집에서 비싼 임대료를 내면서 비좁게 살아야 했다. 공장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노동 과정을 바꿀 것인가, 근교로 나갈 것인가 하는 선택에 직면했다. 파리의 재건설을 통해 노동과 자본의 잉여를 흡수하는 일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병적이라고 여겼던 온갖 부정적인 결과들─퇴거당하거나 격리되는 일이 늘어나고, 일하러 더 먼 길을 가야 하며, 치솟는 집세와 인구과밀의 환경─을 가져왔다."(205)


"1848년 혁명이 파리를 해체하고 재조직했던 만큼, 수도에서 완전고용의 문제는 절박한 사안이었다. 이 문제는 공공사업의 진행 속도가 빨라지자 부분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1868년 이후 "정치적·경제적 이유 때문에 그랬듯이 공공사업을 주춤거리게 되면 세금 수입의 감소와 건설 분야의 실업사태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 된다. 이것이 부르주아들의 견해와 달리, 일반적인 생각처럼 오스망 반대파가 결코 아니던─그는 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낸 주 원천이었으며 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노동자들을 급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코뮌에 참여한 사람들 중 건설노동자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컸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212) 1860년대에 실질임금이 감소하자 "사회가 진보한다는 주장은 웃음거리가 되고 축제는 노동계급의 비용 부담으로 개최된 소름끼치는 사치처럼 보였다."(218)


오스망은 권력 기반이 허약한 나폴레옹 3세와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도시 안에서 (지주와 상업 자본가, 그리고 노동자 간의) 계급 연대를 꾸려내고, 황제 권력을, 또 그 연장선에서 자신의 권력까지를 좀더 확고한 기반 위에 세우는 일을 도와야 했다."(222) 오스망은 "제2제정기 내내 파리의 국가 기구를 지배했다. 그가 그저 자본의 급속한 축적을 통해 고삐 풀린 사회 세력의 폭풍을 잘 견뎌냈을 뿐이라고 한다고 해서 결코 그의 입지를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폭풍을 절묘한 기술로 타고 넘었고, 놀라운 기술과 전망을 가지고 그 소용돌이치는 힘을 약 16년 가량이나 조율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만든 폭풍도, 길들인 것도 아니었고 프랑스의 경제, 정치, 문화의 진화에 내재하는 깊은 소용돌이였으며, 결국 그것은 중세적 파리를 철거반원demolisseurs에게 내던진 것만큼 무자비하게 그를 내던졌다."(224)


"임대료에 비해 노동자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주거 상황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오스망이 벌인 사업은 도시의 슬럼을 없애기는커녕, 노동자 소득이 정체한 시기에 임대료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데 기여하는 것과 정비례하여 슬럼 형성 과정을 촉진했다." "그러한 암담한 주거 상황이 사회적 영향을 낳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가족 형성에 강력한 장애물이던 상황을 더 확실하게 약화시켰다."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던 콜레라와 티푸스의 위협이 비위생적이고 시설이 부족한 주거 때문이라는 증거도 상당히 있었다. 공간이 워낙 부족하다보니 사회생활은 대부분 길거리로 밀려났고, 요리 시설 부족 때문에 이러한 추세가 심화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을 카페나 카바레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장소가 정치적 선동과 의식 형성의 집단적 중심이 되었다."(286-7)


"가톨릭 우파인 르플레에서부터 사회주의 좌파인 프루동에 이르기까지, 의견의 범위가 워낙 넓다보니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주거 문제를 사유재산의 틀 안에서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주택 소유란 정부 보조금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정부는 정치적 기반으로 점점 더 세력이 커지고 있던 지주들의 강력한 계급 이익뿐 아니라 오스망 같은 사람의 결정적인 행동 원칙이던 시장의 자유에 대한 전반적인 집착과도 충돌했다. 강력한 계급 세력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혼란이 심해져 주거 문제에 관해서는 오스망의 지휘로 이루어진 빈민가 철거 이상의 일체의 행동이 좌절되고 중단되었다. 주거 개혁이 조금이라도 착수되기 시작한 것은 코뮌이 일어나서, 비참한 슬럼과 안마당이 그 어떤 노동자 도시보다도 더 심한 혁명적 행동의 온상임을 개혁가들이 파악한 뒤의 일이었다."(288-9)


"제국이 보여주는 스펙터클은 원래 나폴레옹 전설의 대중추수주의와 제국 권력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순수하게 정치적 측면의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외피를 걸치고 유럽 문명의 심장이자 머리가 되겠다는 파리의 도시계획은 오스망이 위임받은 임무 가운데 일부였다."(301) "상품 그 자체가 스펙터클이 되어 갖는 위력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은 신흥 백화점이었다." "상점의 쇼윈도는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게 만드는 유혹 장치로 꾸며졌다. 백화점 내부에 눈에 띄게 높직하게 쌓인 상품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스펙터클이 되었다. 상점들은 길거리로 열려졌고, 사야 한다는 강제성을 느끼지 않은 채 대중들이 들어오도록 부추겼다. 한 부대는 될 만큼 많은 호객꾼과 영업 사원, 매력적인 젊은 남녀들이 내부 공간에서의 행동을 순찰하면서 동시에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그 속에는 노골적인 관능성이 개입되어 있었다."(308-9)


상품화와 스펙터클은 소비와 외관에 근거한 새로운 계급 차별 감각을 양산했고 이는 부르주아들에게 불안을 안겨주었다. "스펙터클을 통치와 화해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문화 내에서 좀더 불온한 요소가 작동하고 있다는 징후가 있었다." 일례를 들자면 "1848년이나 1851년의 항거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의 장례식마다 무덤 옆에서 열정적인 조문을 읊는 거창한 정치적 행사가 되는 관례가 생긴 것이었다. 1869년에 나폴레옹의 조카가 공화파 언론인인 빅토르 누아르와 언쟁을 하다가 그를 살해하자, 누아르의 장례식에 참가한 인원은 적어도 2만 명은 되었다. 페르라셰즈 묘지나 벨빌에서의 하강이 혁명의 조짐으로서 정권에 불행을 예고하는 위협적인 스펙터클과 융합되면서, 이 모든 상징적 질서가 스스로에게 화근이 되었다. 연극성과 스펙터클은 양편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요인이었는데,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스펙터클의 구심점이 상품화뿐 아니라 정치적인 반대로도 이동한 것이다."(320)


"1870년에도 계급관계의 낡은 패턴─전통적 지주, 수공업 노동자와 장인, 점포주, 공무원─을 여전히 쉽게 식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계급 구조가 그들 위에 더 확고하게 덧씌워지고 있었고, 그들 자체도 다수의 신흥 상층 부르주아가 구사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와, 파리의 소규모 산업과 상업의 넓은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교환관계로 모든 노동이 점점 더 포섭되는 현상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탈기술화는 수공업 노동자가 가졌던 권력을 잠식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경제적 세력은 이러한 틀 안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자금주들은 적어도 파리의 산업과 상업 분야에서는 권력을 공고히 했지만, 노동자 가운데 한 작은 집단은 점점 커져가는 비숙련 노동자와 빈민들의 대집단 내부에서 특권적 노동 귀족의 지위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동은 다분히 긴장감을 발생시켰으며, 그 모든 것들이 1868년과 1871년에 파리에서 벌어진 격렬한 계급투쟁에서 구체화되었다."(332)


"낭만주의와 유토피아주의는 각종 사상이 종교에 복종하는 데 대항하는 최전방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다른 방어와 저항의 수단을 찾아내야 했다. 쿠르베가 돌연히 열어젖힌 사실주의 회화로의 돌파구, 1848년의 폭력에 의해 훨씬 더 비극적인 차원에서 주어진 근대성에 대한 보들레르의 타협 없고 치열한 포용, 그리고 처음에는 혼란을 겪었지만 곧 유토피아적 구도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프루동의 태도가 갖는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쿠르베, 보들레르, 프루동은 제휴할 수 있었고 또 제휴했다. 낭만주의와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그들이 환멸은 1848년에 대한 전형적인 사회적 반응이었고, 그것은 사실주의와 실용적 과학을 인간 감정을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낭만주의자였을지도 모르지만 메스로 무장한 낭만주의자로서, 종교와 제국의 권위주의를 떠나 실증주의와 초연한 과학의 방패 뒤에 아지트를 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364-5)


"프랑스의 지리적 상상력은 오래전부터 과중한 환경주의와 인종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385) "만약 부르주아들이 걸핏하면 묘사하는 것처럼 노동자가 '야만인'이고 '천박한 대중'이고 그저 범죄자이고 '위험한 계급' 밖에 안 되는 존재라면 1848년은 그들이 어떤 위험을 야기하며 어떤 야만성을 발휘하려는지를 지극히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는 노동자들이 '문명의 야만인들'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1871년에 그랬듯이 1848년에도 이러한 연상이 나아가는 전반적인 방향은 역시 '문명'과 '질서'의 힘은 혁명가들을 개 또는 그 비슷한 존재로 추정되던 야만인들처럼 쏴죽일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다고 단정하는 쪽이었다. 파리에서 노동계급의 '타자'가 그렇게 인종차별적인 용어로 표현된다는 사실이 계급전쟁이 어찌 해서 그렇게까지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수행되었는지를 해명해준다."(386)


오스망은 도시를 자본가와 투기꾼과 환전상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그 파티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낀 사람들도 있었고, 모든 과정이 혐오스럽고 추잡하다고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 보들레르가 제시한 창녀라는 도시의 이미지가 특별한 의미를 띠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제2제정은 항상 논쟁 중에 있는 파리의 이미지가 변화를 겪는 순간에 처해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 도시는 여성으로 묘사되었다. 발자크는 그녀를 신비스럽고 변덕스럽고 걸핏하면 타락하지만 또 자연스럽고 구질구질하고, 특히 혁명이 일어나면 예측불가능해지는 존재로 보았다. 졸라가 그린 이미지는 아주 다르다. 그녀는 이제 타락하고 야수 같은 여자가 되었고, "내장이 드러나고 피를 흘리고 있는" 여성이며, "투기의 대상이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탐욕의 제물이 된" 존재이다. 이렇게 야수처럼 변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혁명에서 봉기하는 것 외에 달리 또 있겠는가?"(378)


"부르주아 사유재산권과 계급 지위의 보존이 여성에 대한 통제에 의존하고 있는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이미지를 드 토크빌이 만난 것 같은─그보다도 더 심한, 창녀─무시무시하고 통제불가능한 종류의 여성으로 그리는 것은 틀림없이 부르주아 남성 심리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네가 그린 여성(<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은 바로 그녀가 그다지 순종적이지 않은 눈길을 한 보통의 창녀 모습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허츠는 계급적대감과 혼합된 거세 공포(졸라가 <제르미날>에서 그토록 명백하게 표현한)가 "정치적 압력을 받으면 남성 히스테리"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혁명적 행동에 가담했던 여성에 반대하는 남성들의 수사법에 담긴 지독한 폭력성은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412) "코뮌의 섬뜩한 후유증은 계급과 성별 간의 적대감이 서로 상승작용을 할 때 어떠한 폭력과 참혹함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었다."(415)


"1870~71년 사이의 경험 및 나폴레옹 3세와 제2제정의 퇴폐적인 '축제 물질주의'를 상대했던 경험으로 가톨릭 신도들은 광범위하게 영혼을 탐구하는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그들 대다수는 프랑스가 죄를 범했다는 인식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속죄의 표현이 등장하고, 신비적이기도 하고 거창하기도 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비타협적이고 교황지상주의자인 가톨릭 신자들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권위의 존경에 의거한 법과 질서와 정치적 해결책으로 복귀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 법과 질서의 약속을 내건 쪽은 전반적으로 비타협적 가톨릭 신자인 군주주의자 본인들이었다. 자유주의 가톨릭 신도는 이 모든 것이 마땅찮았지만, 교황부터가 그들을 "사실상 프랑스의 골칫거리"라고 무시하는 마당에 무슨 세력을 동원할 만한 처지는 전혀 아니었다. 군주주의와 비타협적 가톨릭주의 사이에 연대가 강화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건설을 보장한 것은 이 강력한 연대였다."(468-9)


# 프랑스는 회개하노라GALLIA POENITEN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엔나 천재들의 붉은노을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 건축, 현대 음악, 현대 철학,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과거를 통해, 혹은 과거와의 대비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무관한 것으로 규정한다. 현대 정신은 역사에 무관심해졌다." 그러나 역사적 변화는 "개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하도록 강요할 뿐 아니라 사회 그룹 전체에도 죽어버린 신념 체계를 개정하거나 교체하도록 강요한다. 역사의 멍에를 떨쳐버리려는 시도는 모순적이게도 역사 과정의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과거와의 모든 관계에 무관심해진 탓으로 상상력이 해방되어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구조가 마구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때 연속성이 지배하던 곳에 복합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현재하는 역사의 신속한 변화에 대한 의식은 관련성 있는 과거로서의 역사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사회적·정치적 해체의 진동이 날카롭게 느껴지던 세기말의 비엔나는 무역사적인(a-historical) 우리 세기의 문화를 싹틔운 가장 비옥한 온상 가운데 하나였다."(18-9)


신비평(New Critics)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문학계를 주도하던 문학적 역사주의 연구자들을 무시간적·내면주의적·형식적 분석에 몰두하는 학자들로 교체했다. 정치학계에서는 뉴딜정책이 퇴조함에 따라 전통적 정치철학의 규범적 관심과 공공정책의 문제에 대한 실용주의적 관심이 행동주의자들의 무시간적이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배에 밀려났다. 경제학에서도 수학적 취향의 이론가들이 사회적 성향의 제도학파와 정책 지향적인 케인즈주의자들을 밀어내고 세력을 확장했다. 음악 분야에서도 쇤베르크와 솅커에게 영감을 받은 새로운 명망가들이 음악학의 역사적 관심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 자체의 역사적 성격과 연속성에 대한 높은 자각을 본질로 하는 철학에서도 분석철학파가 전통적 문제의 타당성에 도전했다. 새로운 철학은 언어와 논리라는 제한적이고 순수한 기능성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역사 일반과 그 학과 자체의 과거와의 연결을 모두 단절해버렸다."(21-2)


"프로이트의 도시에 있는 새로운 문화 제작자들은 거듭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일종의 집단적 오이디푸스적 반항이라는 용어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의 반항 대상에는 자기들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들이 물려받은 가부장적 문화의 권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폭넓은 전선을 형성하여 공격한 대상은 자신들을 길러낸 고전적 주류 자유주의 체제의 가치였다." "자유주의 이후 시대의 특징인 문화에서의 '현대성(modernity)'이라는 문제는 프랑스에서는 1848년 혁명의 후유증으로, 일종의 부르주아의 아방가르드적 자기비판으로 발생했고, 제2제국 때부터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이르기까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서서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는 1890년대에 대부분의 현대적 운동이 나타났으며, 그 후 이십 년만에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다.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고급문화는 온실에서 자라듯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그 온실의 열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 위기였다."(29-30)


# 오스트리아의 정치 상황

1. 귀족정치와 절대주의에 대항하던 영웅적 자유주의가 1848년의 충격적인 패배로 퇴장

2. 구질서가 무너지면서 순화된 자유주의자들이 어부지리로 권력 획득, 1860년대 입헌 체제 성립

3. 제한된 참정권을 바탕으로 의회 권력 유지 (도심 중산층에 국한된 취약한 지지 기반)

4. 농민, 도시 기술자, 노동자, 슬라브족 등의 참정권 요구 : 1880년대에 대중 정당을 결성하여 자유주의 체제와 대립

5. 반유대주의, 교권주의敎權主義,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현대의 대중운동의 물결 속에 1900년 무렵 자유주의 권력 몰락

☞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무기력, 불안, 사회적 생존의 무자비함에 대한 자각 등의 분위기 형성


"오스트리아 부르주아를 프랑스나 영국 부르주아와 구별해주는 기본적인 사회적 사실 두 가지가 있다. 그들은 귀족정치를 없애버리지 못했고 완전히 그들에게 용해되지도 못했다. 또 그러한 취약성 때문에 황제를 경원하면서도 아버지-보호자 같은 존재로 여기고 그에게 의존했으며 깊은 충성심을 보였다. 독점 권력을 쟁취하지 못한 탓으로 부르주아는 항상 뭔가 국외자 같은 존재였고 귀족계급과 통합하고자 애썼다. 수도 많고 부유한 비엔나 거주 유대인 세력은 동화하려는 성향이 강했으므로 이 같은 추세를 더욱 강화할 뿐이었다." 오스트리아 귀족계급은 "속속들이 가톨릭적이고 관능적이며 감수성을 중시하는 문화였다. 전통적인 부르주아 문화는 자연을 신성한 법칙에 따르는 질서를 부과하여 장악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본 반면, 전통적인 오스트리아 귀족 문화는 그것을 즐거움의 무대, 예술로 찬미되어야 할 신성한 은총의 현현으로 보았다."(41-2)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비엔나 중산계급 사회에서 예술이 발휘하던 기능이 변했고, 이 변화에서는 정치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비엔나 시민들이 처음에는 귀족계급으로 동화하는 대신에 그 대체물로 예술의 신전을 후원하는 길을 택했더라도 결국에는 예술을 하나의 도피처, 점점 더 위협적인 정치적 현실의 불유쾌한 세계로부터의 피난처로 삼게 되었다." "귀족이 되고 싶은 허세꾼으로서든 예술가 또는 정치가로서든 부르주아란 결코 자신의 개인주의적 유산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존재이다. 호프만슈탈이 "미끄러짐(das Gleitende)"이라 부른 것, 즉 세계가 슬며시 사라져버린다는 느낌이 커짐에 따라 부르주아는 자신에게 적절한 미적 문화를 내면으로 돌려 자아를 갈고 닦으며 자신의 개인적 특이성을 더욱 연마했다. 이런 경향은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정신적 생활에 몰입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그것이 예술에 대한 헌신과 정신에 대한 몰두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된다."(43-4)


"호프만슈탈과 슈니츨러 두 사람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즉 고전적 자유주의 인간관이 무자비한 오스트리아의 현대 정치 앞에서 해체된다는 것이었다. 둘 다 낡은 문화의 폐허에서 심리적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슈니츨러는 비엔나 자유주의 전통의 도덕적·과학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접근했다. 사회에 대한 그의 직관은 호프만슈탈보다 더 탁월했지만, 죽어가는 문화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는 가을 같은 분위기의 염세주의에 빠져 작품에서 비극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호프만슈탈은 "예술 원리를 정치에 적용했다. 그는 감정의 비합리적 힘을 억누르기보다는 물꼬를 틔워주는 형식을 찾으려 했다. 전체의 제례에 참여한다는 그의 정치학은 시대착오에 물들었고, 그 때문에 비극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적 권리뿐만 아니라 비이성적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정치적 사고와 실천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증언은 포스트자유주의 시대의 중심 이슈가 되었다."(60)


건축 분야로 눈을 볼려보면 "유용성이 아니라 문화적 자기 선언이 링슈트라세를 지배했다. 1860년대의 거대한 프로그램을 묘사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된 개념은 '쇄신'이나 '재개발'이 아니라 '도시 이미지의 미화(Verschonerung des Stadtbildes)'였다."(69) "전체적으로 링슈트라세의 기념비적 건물들은 주류 자유주의 문화가 내세우는 최고 가치를 훌륭하게 표현했다. 자유주의의 열성적 지지자들은 연병장의 폐허에서 입헌국가의 정치제도를 양산해냈고, 자유 시민의 엘리트를 교육할 학교를 세웠으며, '신인간(novi homines)'을 저열한 출신성분으로부터 구원해낼 모든 문화를 문화를 한데 모으는 박물관과 극장을 지었다." 이 기관들은 옛 문화와 제국적 전통의 연결을 강화하는데, "상승하는 부르주아들은 그곳에서 사회적·경제적 권력의 새로운 형태를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귀족계급과 만난다. 그곳은 승리와 패배가 사회적 타협과 문화적 종합으로 변형되는 '메자닌(mezzanine)'이다."(87)


# 링슈트라세 : 비엔나 중심부에 위치한 순환 도로


지테는 1875년에 비엔나 바그너 동호회에서 연설하면서 현대 자본주의 세계를 반대하고 수공업적 가치를 옹호하는 "자기 자신의 지적 사고틀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음악가) 바그너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밝혔다. 지테에 의하면, 현대인의 존재에서 근본적 사실은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일관된 가치의 조합이 없다는 점이다. 현대 세계를 만든 사람들은 갈릴레오에서 다윈에 이르는 과학자이거나 개척자-정복자와 상인 모험가였다." 그는 "실제 세계 바로 곁에, 그 위에" 서서 현재 인간의 파손된 가치를 응집력 있는 미래의 이미지로 주조해낼 새로운 이상을 주문했다. "지테는 예술가의 특별한 임무가 이 구원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작업임을 인식한 천재로서 바그너를 찬양했다. 과학과 무역의 뿌리 없는 탐색자들이 세계를 파괴하여 고통 받는 민중이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중요한 신화를 박탈했으므로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114-5)


지테가 <도시건설>을 출판한 4년 뒤인 1893년에 건축가 오토 바그너는 지테와는 아주 판이한 전제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비엔나 개발계획 경연에서 우승했다. 바그너는 링슈트라세 계획을 지배했던 '표상'과 '도시 이미지의 미화'라는 목적을 폐기하고 "필요만이 예술의 주인(Artis sola domina necessitas)"이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지테가 역사주의를 확대하여 인간을 현대 기술문명과 효율성에서 구원하려한 데 반해 바그너는 한결같이 합리적이고 도시적인 문명의 가치에 유리하도록 역사주의를 격퇴시키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지테가 "현대 도시주의의 아노미 현상을 상대하기 위한 시각적 모델을 공동체적인 과거에서 불러오는 동안 바그너는 자신이 기쁘게 끌어안은 분방하고 합목적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도시성의 진리를 표현할 새로운 미적 형태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건축가이자 논쟁가이며, 교사이자 도시이론가인 바그너는 링슈트라세 문화를 벗어나 최고의 모더니스트로 등장했다."(119-21)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자유주의자들이 상류 계급에 대항하여 고안해낸 프로그램이 낳은 결과는 하층 계급의 폭발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저항 에너지는 그들의 숙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향해 폭발했다. 귀족계급의 국제주의에 맞서기 위해 게르만 민족주의를 고안했지만, 그들이 받은 답변은 슬라브 애국주의자들의 자치권 요구였다. 자유주의자들이 다민족 국가에 유리하도록 게르만주의의 어조를 완화하자 반자유주의적인 게르만계 프티부르주아는 그들을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경제를 과거의 족쇄로부터 풀어놓기 위해 고안된 자유방임주의는 미래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을 불러들였다. 귀족계급 압제의 시녀라는 죄목으로 학교와 법정에서 발본색원되었던 가톨릭교는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종교로 복귀했는데, 그들 생각에 자유주의란 곧 자본주의였고 자본주의란 유대인을 의미했다."(172)


"자유주의가 실패하자 유대인은 희생양이 되었고, 그 희생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민족의 고향으로 도피하는 시오니즘이었다. 다른 민족들은 혼란이라는 무기로 오스트리아 국가를 위협했지만 시오니스트들의 무기는 분리 주장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위쪽에 있는 옛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대중을 다시 불러모으기는 커녕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전반적인 해체의 힘을 불러냈다. 자유주의는 낡은 정치질서를 해체하기에는 힘이 충분했지만, 그 해체 덕분에 풀려나서 관대하지만 융통성 없는 자유주의의 후원 하에서 새로운 지방분권적 운동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세력을 장악할 능력은 없었다. 새로운 반反자유주의적 대중운동─체코 민족주의, 범게르만주의, 기독교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시오니즘─은 아래로부터 솟아올라 교육받은 중산 계급의 신탁통치권에 도전하여 그 정치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역사의 합리적 구조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훼손하기 시작했다."(173)


"건조하고 합리적인 자유주의 정치와 대조적으로 이런 운동의 강력한 지도자들은 '더 예리한 조성(調性)'(the sharper key)이라 알려지게 된, 즉 자유주의자의 신중한 스타일에 비해 더 무모하고 더 창의적이고 감정의 삶을 더 만족시키는 정치적 행동양식을 개발했다. 새로운 조성의 대표적 대가 두 명─범게르만주의의 게오르크 폰 쇠너러(Georg von Schonerer, 1842-1921)와 기독교사회당의 칼 뤼거(Karl Lueger, 1844-1910)─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영감을 주고 그의 정치적 모델이 된 인물이었다. 세 번째 인물인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은 히틀러의 희생자들을 위해 이교도의 공포정치에 맞서는 가장 설득력 있고 강력한 정치적 답변을 제공하게 될 분야의 개척자였다. 그리하여 비엔나의 지식인들이 20세기의 고급문화로 이어지는 길을 개척하기도 전에, 그 문화의 자식 세 명은 합리주의 이후의 정치를 개척해나가기 시작했다."(174-5)


"민족주의 학생연대가 범게르만주의자 쇠너러를 고대했다면, 사회주의적 반유대주의자 쇠너러는 수공업자 운동이 고대했던 존재였다."(185) "유대인은 오스트리아에서 누구보다도 더 '국가적 국민'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 단위를 이루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슬로바키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처럼 소위 비역사적인(unhistoric) 민족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는 시민적이고 경제적인 것으로서, 게르만인이나 체코인처럼 하나의 민족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런 지위를 획득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다민족 국가의 초超민족적 국민"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비극적이게도 "자유주의 신조 그 자체의 운수가 유대인들의 운명과 뒤엉켜버렸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왕국의 핵심 권력을 약화시키려 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유대인들은 모든 나라의 이름으로 공격당했다."(186)


"칼 뤼거는 로제나우 기사(쇠너러)와 공통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자유주의자로 출발했으며, 둘 다 자유주의를 처음에는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다가, 결국에는 반자유주의 신조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배교자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반유대주의를 이용하여 주민들 가운데서 똑같이 불안정한 분자인 기능공과 학생층을 동원했다. 그리고─우리의 논의 목적에는 이것이 결정적인데─두 사람 모두 의회 바깥에서의 정치 기술, 폭도와 오합지졸의 정치 기술을 개발했다."(191) "가톨릭은 뤼거에게 민주주의, 사회 개혁, 반유대주의, 합스부르크 충성심이라는 제각기 상반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던 서로 이질적인 반자유주의 요소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거꾸로, 뤼거는 그 산산이 부서진 구성요소들을 한데 끌어 모아 현대의 세속 세계에서 제 갈 길을 찾을 만큼 강력한 조직으로 만들어낼 정치적 지도력을 가톨릭교에 줄 수 있었다."(199)


"자유주의의 정치적 토대가 부식되고 여러 사건들로 인해 그 사회적 기대치가 실현되지 못함에 따라 자유주의 문화에 몰두했던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가치를 구해내기 위한 새 토대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테오도어 헤르츨이 있었다. 그는 슈멜링의 합리주의적 전제("지식이 자유롭게 하리라") 위에서가 아니라 창조적 환상, 욕구와 예술의 꿈 위에서("욕구가 자유롭게 하리라") 자기 민족을 위한 자유주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방법을 찾았다. 헤르츨은 시오니즘을 제창하여, 자유주의 주도권의 시대에 좀 얄궂게 어울리는 기념비이자 쇠너러와 뤼거가 시작한 창조적 파괴의 위압적 작업에 어울리는 속편을 구축했다." "그가 자유주의를 뛰어넘는 환상의 정치학에 도달한 것은 쇠너러와 뤼거 같은 사회적 적대감과 정치적 기회주의가 아니라 개인적 좌절과 심미적 절망감을 통해서였다."(207)


"알렉스 바인은 헤르츨이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점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드레퓌스 대위의 고발이 그 절정이었음을 밝혀냈다. 여러 사건─반유대주의 연극, 장교가 유대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하다가 죽은 사건, 반유대주의 시위, 명예훼손 소송, 파나마 스캔들─을 차례차례 겪으면서 헤르츨은 보도하고, 성찰하고, 점점 더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헤르츨은 프랑스에 있으면서 뤼거와 반유대주의자가 오스트리아의 모든 선거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 각각의 자유주의 질서의 운명에 대한 그의 우려는 한 점에서 만났다. 그 과정에서 그의 사고 속에서 유럽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한 징후─이교도들의 좌절감을 배출하기 위한 벼락─이던 '유대인 문제'는 이제 희생자들이 생사가 달려 있는 문제로 변했다."(220-1)


헤르츨은 "꿈과 백일몽과 무의식과 예술을 분열적 사회 현실을 극복하고 형성하는 힘의 근원으로 긍정했다."(228) 헤르츨이 생각하는 정치 운동의 개념에서는 목표의 내용이 아니라 행동의 형태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국가의 이념은 이와 유사한 심리적 추상주의를 반영한다. 거기에 유대적인 것은 전혀 없었다. 모든 국가는 똑같이 "아름답다"고 그는 결론짓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가진 개별적 장점 때문이 아니라 모든 국가가 국민에게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덕목 때문이다. 모든 국가는 "개인들의 최고의 어떤 것[자질]으로, 즉 충성심, 열정, 희생의 기쁨과 이상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태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적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집단적 에너지를 조직하는 수단일 뿐이다."(231) 헤르츨이 구상하는 약속의 땅은 사실은 유대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유주의 유토피아였으며, "헤르츨의 시온은 현대 자유주의 유럽의 문화를 환생시켰다."(240)


"<꿈의 해석>은 저자의 이성과 감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자신의 업적 전체의 정초석이 되는 가장 중요한 과학적 작업이며,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고통스러운 삶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 저작으로 간주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신국> 속에 엮어 넣는다거나, 루소가 <참회록>을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부수적 플롯으로 통합시킨다고 상상해보라.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의 구조를 엮어나가는 과정이 바로 그런 식이다. 외견상 드러나는 과학 논문 방식의 구조에서, 그는 독자들을 위쪽으로, 체계적인 장을 따라 인도하여 심리학적 분석의 더 복잡한 수준으로 끌고 올라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인적 서술에서는 독자를 아래쪽으로, 중요한 꿈을 차례로 이으면서 파묻힌 자신의 자아의 지하 후미진 곳으로 끌고 내려간다."(255-6)


오이디푸스 신화를 다룰 때도 프로이트는 그가 왕이라는 사실에 무관심하다. "니체 및 다른 현대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프로이트도 오이디푸스의 모색을 도덕적이고 지적인 것으로 보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은 그 제왕적 주인공이 행동하는 동기가 테베에서 재앙을 물리친다는 정치적 임무가 아니라면, 즉 공화국이라는 무대가 없다면 구상할 수 없는 작품이다. 오이디푸스의 죄책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처벌하려는 노력은 공적인 문제이고 공화국의 질서를 재건할 책임에서 나온다. 그에 비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는 왕이 아니고 자신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모색하는 사색가이다. 정치를 해체하여 개인의 정신적 범주로 들어감으로써 그는 개인적 질서를 재건하지만 공적 질서는 손대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헝가리 꿈에서 죽은 아버지의 유령을 왕으로까지 승격시켰지만, 여전히 정치라는 재앙으로 괴로워하는 테베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275-6)


"고전 문화와 고고학적 발굴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던 프로이트처럼 클림트도 본능적인 삶, 특히 에로틱한 삶의 발굴지로 건너가는 은유적 다리 역할을 고전적 상징에 맡긴다." "클림트는 여성을 관능적 존재로 보았고, 여성의 쾌락과 고통, 삶과 죽음의 잠재력을 철저하게 개발했다. 끝없이 그려댄 소묘에서 클림트는 여성성의 느낌을 포착하려고 애썼다."(307) "클림트는 현대 인간에게 거울을 들이대면서도 쾌락을 부여하는 에로스의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오히려 도덕주의적 문화의 구속으로부터 관능성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에 수반된 심리학적 문제들을 노출시켰다. 에로스를 탐험하며 즐거워하던 남자는 '촉수를 가진 여자(la femme tentaculaire)'에게 휘감겨 버렸다. 새로운 자유는 불안의 악몽으로 변하고 있었다."(310) "니체의 시인처럼 클림트의 지혜도 삶의 신비스러운 전체성을 긍정하기 위해 고통을─더 나아가서 욕망 그 자체를─꿈속으로 흡수해들인다."(316)


클림트는 후반기에 "우의적 그림이나 인물화로 방향을 돌렸을 때,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서 고뇌하는 요소를 약화시키거나 심지어는 치장하기까지 했다. 혹은, 자신의 성취를 좀더 긍정적으로 단언하기 위해 심미적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그 작품들이 가진 고통의 잠재력을 중화시켰다." <다나에>에서 클림트는 "다시 한번 그리스 신들을 불러내 현대 인간의 상황을 표현한다. 클림트의 이 마지막 그리스 여성은 선배들인 아테나, 니케, 히게이아 혹은 복수의 여신들, 자웅동체적인 남근 같은 여성들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클림트는 여성 공포증을 극복한 것 같다. 충족된 욕망의 모습이 <다나에>만큼 현란하게 표현된 경우는 드물다. 그녀의 살은 제우스의 황금빛 사랑의 빛줄기에 물들어 벌꿀 같은 금빛으로 가득 차 있다. 클림트는 이제 더 이상 욕구불만 때문에 위협적으로 변한 여성이 아니라 감각이 충족되어 더 없이 행복하게 웅크리고 있는 여성에게서 평화를 찾았다."(365)


"심리적-철학적 전복자로서 사회와 교류하려다가 상처 받고 움츠러든 클림트는 1908년에는 이미 링슈트라세에서 처음 경력을 시작할 때와 같은 화가-장식가의 역할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의미의 연원으로서의 역사 및 표현의 올바른 양식인 육체적 사실주의로부터의 단절은 역사와 자연에 대한 기대를 배반당한 계급과 그에게 영원한 사실로 남았다. 그는 역사, 시간의 영역은 이미 지나쳐버려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심미적 추상과 사회적 체념의 영역으로 들어가려고 투쟁했다. 하지만 흔히 그리스 신화를 도상학적 안내자로 삼는 분리파의 내면 항해(voyage interieur)에서 클림트는 심리적 경험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혔다. 클림트가 심미적인 차원에서 비엔나 상류층 세계의 섬약한 둥지 속으로 물러나면서 포기한 탐험을 새로운 깊이까지 끌고 나가는 과제는 더 젊은 정신인 표현주의(Expressionist) 운동의 몫으로 남게 된다."(367)


'교양과 부'를 지닌 비엔나 신흥 상류계급을 대변하는 "새로운 정원 숭배는 정원을 자연의 세련된 적용으로 보는 영국식 낭만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급진적 고전주의로 방향을 돌렸다. 정원은 건축으로, 집의 연장으로 구상되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 경향은 자부심 강한 자수성가형 인간을 이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쇠퇴하고, 전前산업시대의 사회적 모델을 선호하는 추세와 결부되어 있다. 그 모델은 18세기의 귀족이거나 비더마이어 시대의 시민이었다. 미적 측면에서 보자면, 형식주의와 새로운 정원 숭배 현상이 아르누보로부터 아르데코로, 유기체적이고 유동적인 형태에서 결정체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이행되었다. 1890년대에는 '분리파'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본능적 진실을 찾는 역동적 탐구에 참여하던 예술가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발견한 불안정한 보물에서 눈길을 돌려 엘리트들의 일상생활과 가정환경을 미화한다는 더 소박하지만 소득이 많은 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436)


유토피아적 아름다움의 대체물인 정원을 멀리하고, 혼란스럽고 무차별적이지만 포용적인 황무지의 진실을 추구한 코코슈카와 쇤베르크는 "서로가 똑같이 위험하고 외로운 작업, 해방이면서 동시에 파괴인 작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았다. 두 사람 모두 자기들이 자라난 심미적 문화와 세기말의 첫 비엔나 모더니스트들의 작업에 반대하여 저항했다. 이들은 그 문화가 결정적인 추진력을 잃은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쿤스트쇼에서처럼 그것이 상류 부르주아의 지배적 관습 문화가 되는 그 순간에 그런 저항을 벌였다. 미술에서의 클림트, 문학에서의 호프만슈탈, 건축에서의 오토 바그너는 교육받은 상류 중산계급이 그 미적 문화를 확장하면서 씌운 정치적 권력의 고삐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계급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러나 젊은 예술가들, 코코슈카나 쇤베르크 같은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을 현실의 본성을 은폐하는 문화적 화장술로 사용하기를 거부한 합리주의 비평가들과 연대했다."(4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