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과 구성 나남신서 692
승계호 지음, 김주성 외 옮김 / 나남출판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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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든 가능한 경험을 넘어가서 사물들 그 자체일 터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확한 개념도 세울[아무것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참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물들 그 자체에 대한 탐구 앞에서 그것을 전적으로 그만둘 만큼 자유롭지가 못하다. 왜냐하면 경험은 이성을 한 번도 온전히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우리를 물음들에 대한 답변에 있어서 언제나 계속해서 되돌려보내고, 물음의 온전한 해결에 관하여 우리를 불만인 채로 둔다. -Kant, 형이상학 서설, A165


본 저서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이념을 근간으로 공정성을 모색한 롤즈의 이론에 배어 있는 직관과 구성의 포속관계를 단초로, 불확정성과 전달 불가능성을 함유한 직관을 배제하고 절차에 근거한 형식적 구성주의로 나아가려는 일련의 시도가 보여주는 사상사적 한계를 검토하고 있다.

이 물음은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진리 혹은 법칙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하강'의 방법으로 사회체제를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 혹은 법칙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계약에 근거한 부단한 합의를 통해 엄밀하게 구성하는 '상승'의 방법으로 사회체제를 구성할 것인가의 대립이다.

체제를 구성하는 작업은 정당성의 근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며, 이 정당성은 아무리 절차적 엄밀성으로 구축하려 해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가 없다. 만장일치를 이끌어낸 제도라 하더라도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미 그 개념의 '초월성'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형식을 세우는 작업 자체가 초월적인 세계로 올라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보편화를 통해 모든 경우의 수를 포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도식화로 고착되기 십상이다. 실질과의 괴리는 구조의 구축이 필연적으로 배태하고 있는 결함이며, 인간 이성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하나와 여럿 / 이론과 실천 / 자유와 자연 사이의 긴장은 사상의 역사에서 순환하는 주제이다. 문화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이래로 이 주제를 향한 탐구 정신이야말로 절대 불변의 진리요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인은 이 꿈을 절대로 이룰 수 없다는 자각에 사로잡힌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는 다시 순환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정말로 이룰 수 없는 것인지를 하나하나 짚어오르고, 마침내 결단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디오티마의 사다리가 놓여진 자리는 쿠자누스의 '아는 무지'(docta ignorantia)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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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끝났다. 그렇다면 또 누군가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난파에서 한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MobyDick, 김석희 역>, 에필로그, 683p

 

 

그렇다. 연극은 끝났다. 밀항자들이 몰살한 어창의 문이 열렸을 때, 연극은, 끝이 났다.
선원들은 살아 남았지만, 그 삶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뱃사람과 밀항 알선업자라는 엇갈린 정체성은 한 배를 탄 인연의 실타래마저 한 칼에 끊어버렸다.

 

선장 철주(김윤식)에게 배는 모든 것이다. 그에게 배는 삶과 동의어이므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운명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침몰하는 배는 그의 집념과 애착을 닻줄에 묶어 함께 가라앉는다.
그는 괴이하게 피어올라 자신을 꽁꽁 묶어버린 이질적인 존재('해무'와 '홍매')를 이해하지 못한다.

 

1998년 IMF 사태는 한국인들의 현실을 움켜쥐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무대로 추방해버렸다.
협동과 연대는 사전(辭典) 목록에서 정리해고 되었고, 능력주의는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독점했다.
결코 상상하지 않았던 미래로의 항해(航海), 거기에 파국이라는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IMF라는 '해무'를 헤치고 살아남아야 했던 '전진호' 한반도의 알레고리이다.

 

...

 

파국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여전히 누군가는 살아남고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삶을 떠받치는 힘이 레이첼이라는 구원의 손길이든 홍매라는 신기루의 뒷모습이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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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미국, 세계
피터 H. 스미스 지음, 이성형.홍욱헌 옮김 / 까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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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으로 대변되는 영토 확장 및 군사적 개입
2) 달러 외교(dollar diplomacy) 전략을 통한 유럽 세력 제거 및 미국 종속화
3) 불간섭의 선린 정책(Good neighbor)으로 독재정권과 우호적 관계 유지
4) 급진적 정책이나 정권의 등장을 일체 허용하지 않은 냉전시대의 반공주의
5) 워싱턴 컨센서스를 기반으로 한 경제 블록 결성과 마약, 불법이민 문제 심화
6) 9/11 테러와 지경학(geoeconomics)에서 지정학(geopolitics)으로의 이동

라틴 아메리카에 미국이 남긴 발자취는 '이념(理念)과 이권(利權)의 혼재'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은 민주주의 제도의 이식이라는 지루하게 길면서, 뜻대로 되는 바는 적은 난상토론에 지친 온건한 양심이 효율적인 복종 체계를 갖춘 독재정권과 반공주의라는 격렬한 정열의 유혹 앞에 번번이 고개 숙인 결과물이었다.

이권은 강력한 권위자의 억압과 좋은 이웃의 선량한 미소 어느 쪽의 간판을 내세웠는지에 상관없이 결코 저버리지 않고 쉼없이 작동하던, 개인 혹은 집단 권력층의 이기적 욕망이며, 약자의 등허리를 짓누르던 배후의 실체였다.

이념과 이권은 눌어붙은 동전의 앞뒷면이고, 한 배에서 나와 한 몸을 가진 쌍생아이며, 시린 바람을 막아주는 이와 잇몸의 관계로서, 이성과 욕망은 정치적, 경제적 신념의 인도 아래 풀리지 않는 언약으로 맺어진 약혼 관계였다.

과거의 사실을 현재에 되살리는 작업의 전제조건은 역사가의 가치판단과 사실의 정교한 재구성을 엄격하게 분리하여야 한다는 점이며, 감성적인 동사와 형용사보다는 무미건조한 명사의 건축물이 신뢰감을 주기 마련이다.

무색무취한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일방적인 가치 판단을 배제한 채 방대한 사실(史實)을 추적하여 재구조화하는 작업을 탁월하게 수행하고 있으며, 시기별, 주체별로 사태를 분석하는 학문적 서술 역시 정교하다.

분량의 제한과 미국과의 관계라는 변수를 고려하고 있어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미시적으로 펼쳐 보여주지는 않지만, 사태를 압축적으로 담아놓은 문장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라면 진실에 다가서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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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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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지중해 세계와 폴리스 시대

1강
생물학적 진화가 멈춘 4~5만 년 이후로 인간의 행위는 전적으로 학습의 산물이며, 문명을 잉태하는 기술은 도구와 그 도구를 가능하게 하는 관념의 복합물이다. 문명의 요소들은 신석기 농업 혁명 이후에 출현한다.

2강
고대 희랍은 지중해라는 압도적인 생활 조건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배로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 지역들이 발전하였고, 농경만으로는 인구 증가에 대응할 수 없어서 주변 지역에 대한 탐사와 식민지 개척을 벌였다.

3강
강대국 페르시아가 희랍의 폴리스 연합에 패한 페르시아 전쟁은 해전의 주역으로 활약한 경장보병 출신 시민들의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였고, 아테나이의 제국주의를 촉진하여 펠로폰네소스 내전을 불러왔다.

4강
아테나이는 대내적으로는 민주정을 행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행태를 일삼았다. 패권의 강성은 문화와 예술의 탁월한 성취를 이룩한 반면에 희랍 세계의 결속력을 약화시켰고 공통의 심성구조를 파괴했다.

5강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요소는 첫째, 군사력의 우위, 둘째, 시장의 형성, 셋째, 문화의 전파력이며, 에게 해를 장악한 아테나이의 헤게모니는 스파르테 중심의 라케다이몬 동맹 세력에게 구조적 불안감을 심어줬다.

6강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민주정에 대한 자부심을 '헬라스의 학교'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개인적인 이익과 손해와 무관한, 유기적인 공동체로서의 폴리스 사상을 천명했지만, 내전의 장기화는 이를 점차 파괴했다.

7강
역병의 창궐은 아테나이인들의 마음에 극단적 허무주의를 심어, 종교적 정신과 사회적 의례를 무너뜨렸다. 소피스트들은 규범의 상대성을 주장하였고, 생명을 경시하는 세태는 케르퀴라의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8강
투퀴디데스의 정의에 따르면 전쟁은 '잔혹한 교사'이며, 사람의 마음을 그들이 처한 환경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언어의 의미가 변질되고, 권력욕이 규범을 대체하며, 고상함과 순박함은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9강
델로스 동맹의 권위를 무시하는 멜로스 섬의 초토화 작전은 온건한 제국의 종결을 의미했다. 여기서 유능한 지도자와 현명한 다수의 조화 및 현실 정치에 충실하면 제국은 타락 혹은 실패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10강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를 활용한 새로운 전쟁 기법을 도입하여 헬라스를 정복하고 페르시아마저 무너뜨렸다. 플라톤은 존재론적 허무주의의 극복을 주창하지만 대세는 안심과 회의주의로 기울었다.


2 로마와 중세 가톨릭 제국 시대

11강
포에니 전쟁과 같은 장기전으로 공화정의 기반인 소농이 몰락하고 원로원의 토지겸병이 가속화된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이 실패하자 하층민의 불만을 흡수한 일인자들은 내전을 벌여 제정시대를 열었다.

12강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는 로마가 제국으로 가는 길목에 벌인 정복 전쟁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갈리안인들에게 살육과 식민화였던 이 원정은 카이사르가 수여한 평화와 전공으로 치장되어 그의 위상을 높였다.

13강
팍스 로마나의 오현제를 거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통치의 효율을 위해 동로마 제국을 세웠다. 직업군인 체제의 확립으로 농민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대지주 아래 편입되면서 도시의 몰락과 중세화가 진행된다.

14강
서로마를 점령한 게르만 족의 독립 왕국에서는 지주들이 기존의 로마 제국 시절보다 낮은 세금을 거두어 저항을 막고, 직업군인과 결합하여 농노를 착취하는 지주-전사 연합 체제를 형성하여 중세 봉건제로 나아간다.

15강
<고백록>은 자신의 삶이 하느님이 부여한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임을 안 자아가 과거를 회상하는 기록이며, <신국론>은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하느님의 섭리를 기반으로 한 목적론적 역사 신학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16강
중세는 개인의 삶 전체를 규율하는 교회의 권위 아래 영주와 쌍무계약으로 맺어진 전사조직과 장원과 도시로 구성된 경제체제의 복합물이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희랍의 사유를 전파하여 변화의 기운을 싹틔웠다.

17강
14세기에 속권을 옹호하는 논의가 확대되면서 교황권을 약화시켰다. 소小빙하기와 흑사병의 만연은 농노 확보를 위한 전쟁을 유발하여 전사 계급의 몰락을 촉진하고, 무기의 발달은 중앙 집권적 국가를 예비했다.

18강
화약과 대포는 중앙 집권을 촉진하여 인공물로서의 영토국가 개념을 이끌어냈고, 종교개혁은 국민국가와 민족주의를 고양하였다. 30년전쟁은 종교에 대한 회의를 확산시켜 시대정신의 자리를 과학에 넘겨주었다.

19강
비코는 <새로운 학문>에서 자연학에 대한 형이상학의 우위를 말하면서, 문명 세계에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려 했으며, 부단히 변화하는 '자연법'을 근간으로 신과 영웅 및 인간의 시대가 순환한다고 보았다.

20강
비코는 인간의 역사적 활동(factum)을 통해 만들어진 시대정신인 진리(verum)를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았으며, '자연'탐구 대신에 '인간(사회)'를 연구하여 그 면면에 흐르는 순환법칙인 역사철학을 알고자 했다.


3 근대 국민국가 체제와 세기말

21강
30년전쟁은 국민군을 탄생시켰다. 국민군은 절대왕정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요소로서, 막대한 유지비를 대는 군상 복합체를 구성하여 치안의 안정과 상업의 부흥을 가져왔고, 손쉬운 해외 정복사업에 동원됐다.

22강
종교의 권위(근본 범주, 이론 체계, 미래 예측)를 대체한 자연과학은 세계관을 전환시켰고 계몽주의를 통해 서구 전체로 확산됐다. 이것은 과학의 성과를 긍정하는 사회적 관계망과 제도적 뒷받침 속에서 가능했다.

23강
계몽주의는 사회운동의 원리로서의 이성이며, 과학에 근거를 두고 역사적인 통찰을 시도했다. 관념의 변혁을 원동력 삼아 물질세계를 깊게 탐구하고 보편적 시대정신을 발효하여 체계적 정신학을 수립하고자 했다.

24강
콩도르세는 인간 능력의 '완전가능성'을 확신하여, 공교육을 전인민에게 확대할 것을 주장했으며, 과학적인 원리와 실천으로 인간과 사회를 개조하고자 했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근대 제국주의의 밑바탕이었다.

25강
혈연 엘리트가 폐기되면서 근대 국민국가가 주요한 정치 행위자로 등장하고, 산업혁명이 확산되면서 '기계-사물'이라는 비인간 행위자가 경제 조직의 핵심 요소로 자리를 잡아 19세기 부르주아 전성기를 인도한다.

26강
인클로져 운동과 토지 병합으로 뿌리뽑힌 독립 자영농이 자유로운 노동자로 전환되고, 기술혁신이 가속화하면서 등장한 산업자본주의는 토지, 화폐, 노동을 상품화하고 이윤 추구의 마음을 '계발'하는 과정이었다.

27강
엥겔스는 1844년이라는 시간, 노동자계급이라는 행위자, 장소의 맨체스터를 엮어 산업혁명이 가져온 근대 산업도시의 실상을 해부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한 삶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제시한다.

28강
대도시의 공간 배치는 계급 구조에 대응하여 노동자계급과 중간, 상층계급이 서로 만나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으며, 일련의 구획은 이윤이라는 말에 담긴 체계적인 배제와 은폐의 결과이다.

29강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1) 임금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2) 계급간, 계급내 투쟁에 시달리며 3) 부작위에 의한 사회적 살인에 노출되어 있고 4) 질병과 죽음이 곁에 떠돌아 5) 냉혹한 계산에 따른 탈도덕화 현상을 보인다.

30강
근대화의 기본 심성구조는 '경쟁'이며 실존적 불안을 동반한다.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는 사상이 '온화한 상업론'이며, 인간의 정념이 파괴적인 방향으로 발현되지 않도록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상업활동을 장려하였다.

31강
프랑스 대혁명은 산업혁명과 함께 19세기를 부르주아에게 헌정했다. 제3계급은 혁명적 심성을 집단적 정체성으로 체현한 제4계급의 등 위에서 혁명을 일궜고, 주권의식과 역사적 주체성을 지닌 국민이 탄생했다.

32강
버크는 영국의 기성 체제를 지키려는 의도에서 혁명의 경거망동을 지적했고, 칸트는 혁명 이전에 보편사에 기여하는 세계시민 개념을 제시했다. 일련의 논의는 혁명의 성과를 제도화하는 헌법 논쟁으로 이어진다.

33강
인간의 주체적인 역사 활동을 강조하는 역사철학이 성립하면서,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기계적 인과관계를 강조하였고, 헤르더의 인류의 도야를 위한 학교로서의 역사라는 관점은 헤겔의 세계정신으로 이어진다.

34강
<공산당 선언>은 계급을 역사의 행위자로 내세워 부르주아 혁명은 희비극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비희극으로 도식화한다. 대호황 속에 역사를 장악한 부르주아는 혁신을 지속해야 하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35강
부르주아는 신분 질서의 신성한 후광을 지우고 유능한 개인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세웠다. 철도와 전신은 시공간을 압축하고, 기술에 지체된 의식은 대량 살상 무기의 위험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36강
부르주아 헤게모니는 경제력, 합법적 폭력, 이데올로기적 설득력으로 구성된다. 1870년대에 독점기업이 등장하고, 청교도 정신을 강조하던 부르주아가 상속에 의존하는 유한계급으로 변질되면서 소비가 중요해졌다.

37강
대호황과 규모와 직종에 따른 노동자들간의 구분과 차별, 문화적, 민족적, 종교적 차이는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방해했다. 부르주아의 유산계급화와 러시아혁명은 계급적대를 낳았지만 수정주의 논쟁으로 귀결됐다.


4 제1,2차 세계대전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38강
19세기 말, 국가가 주체적 행위자로 부상하면서 제국주의적 다툼을 전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싹튼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극적으로 소모된 것은 인간 생명이었으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퇴장했다.

39강
제1차 세계대전은 군사력, 경제력, 프로파간다가 집약된 총력전의 양상을 보였다. 전쟁의 목표는 무역이나 영토 획득이 아니라 군사력을 과시하는 전쟁 그 자체에 있었고, 국가 교육을 받은 대중은 국민으로 거듭났다.

40강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는 미합중국의 세계 패권이 관철되는 과정이다. 마셜플랜을 기반으로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여 자본주의 황금시대를 열었고, 미합중국이 전 세계를 관리하는 신식민주의 체제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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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연구 -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역비한국학연구총서 26
정병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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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한말•개화기 : 성장•교육•개화운동

1 가계와 왕족 의식
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조선 왕조에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면서도, 대외적인 활동에서 왕족 의식을 드러내는 이중적 의식을 보여 훗날 제왕적 대통령을 예비했다.

2 학업과 독립협회 참여
과거제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와 서구식 문화, 기독교를 습득한 그는 협성회 활동을 통해 언론의 중요성을 체득했고, 독립협회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3 미국 유학과 망명
민영환의 개인 밀사 자격으로 도미한 이승만의 외교 활동은 가쓰라-테프트 밀약 체결로 무산됐지만, 미 고위관료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일방적인 대미 외교의 근간이 됐다.

2부 일제시기1 : 외교독립노선과 외교 활동

4 외교독립노선의 형성과 특징
1)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이후 미국에 한층 경도되어 유화적인 대일관을 견지하였고, 미일전쟁이 수반되지 않은 무력투쟁과 해방 후 한국민의 자치 능력에 회의적이었다.
2) 그는 문호를 개방하여 통상의 자유를 누리는 교역상의 한반도중립화론을 주장하고, 임시정부 수립과 대미외교, 자치정부론을 내세운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모방했다.

5 1910~30년대 외교 활동
1) 재미 한인 지도자들로는 무력투쟁의 박용만, 실력양성의 안창호, 외교노선의 이승만이 있었고, 박용만과 안창호는 최일선에서 죽음을 맞은 반면 이승만은 후방에 남았다.
2)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임된 이승만은 곧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직에 임명되자 대통령을 자임하여, 통합 상해 정부 출범시에 자신의 대통령 취임을 관철시켰다.

6 태평양전쟁기 전시 외교 활동
1) 1세대 이민자의 노령화와 동지식산회사의 파산으로 조직력이 약화되었고, 상해 임정과의 갈등도 해소되지 않은 채 주미외교부를 설치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2) 김구의 후원으로 중경 임정과의 관계를 회복한 이승만은 얄타밀약설을 주장하며 반소•반공 노선을 강화하여 미 군부의 지지 속에 해방 정국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3부 일제시기2 : 국내 연계와 지지 기반

7 1910~20년대 국내 민족주의 세력과의 관계
3•1운동을 전후하여 강화된 국내의 이승만 지지 세력은 독립협회 활동 경험과 기독교로의 개종, YMCA 핵심 멤버 및 기호 출신으로 연결되며 흥업구락부 조직을 주도했다.

8 이승만의 국내 지지 기반 흥업구락부(1925~38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창립한 동지회의 국내버전인 흥업구락부는 실질적 활동이 미약했고 다수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민족주의 계열내에 이승만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9 태평양전쟁기 단파방송 사건과 국내의 이승만 인식
전시 정보 통제 속에서 입소문으로 전해진 이승만의 단파 방송은 실제보다 과장되어, 그는 민족 해방을 염원하는 좌우파 지도자들에게 국외 민족운동의 중추로 각인되었다.

4부 해방 직후 : 정부 수립 노선과 활동

10 조기 귀국과 동경 회합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신탁통치를 염두에 둔 국무부와 달리 미 군정은 공산주의자들과의 거래를 반대하고 자유정부의 확대를 구상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의중과 일치했다.

11 정계 부상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
1) 인민공화국은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미 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이승만을 회유하기 위해 주석으로 추대했지만, 그를 민족 지도자로 선전하는 효과만 가져왔다.
2) 독촉중협은 좌우를 포괄한 명목상 한국 정부 역할을 하면서 총선거를 실시한 후 북한 지역으로의 확대를 꾀했으나, 친이승만적인 우익 일변도의 구성으로 통합이 무산됐다.

12 1946년 지지 기반 강화와 단독정부 수립 제안
1) 반탁운동의 기세를 등에 업고 군정을 접수해 정부를 세우려던 임정의 시도는 미군정의 신뢰를 잃는 계기가 되어 비상정치회의의 주도권을 이승만에게 일임하게 됐다.
2) 광산 스캔들에 휘말려 민주의장직을 사임한 뒤 시작한 남선순행은 지방 우익들을 결집시켜 군중을 동원하고, 경찰력으로 좌익을 예비검속, 억압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13 1945~47년 정치자금 조성과 운용
1) 그에게 대규모 정치자금을 조성해 준 대한경제보국회는 친일 경제인 단체로서, 이들은 친일 행위에 대한 보험 및 일제가 남긴 자산과 생필품•공산품의 이권을 노렸다.
2) 조성된 정치자금은 46년 9월의 총파업을 분쇄할 우익 청년 단체의 동원과 반탁 시위의 지원에 사용됐고, 자신을 지지하는 언론 매체의 확보와 사설 고문비로 쓰였다.

14 1947~48년 우익 진영의 분화와 단독정부의 실현
1) 좌우합작에 기반한 임시정부 수립이 제2차 미소공위의 진전으로 가시화되고 미군정과 한민당마저 등을 돌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격렬한 반탁시위와 테러를 조직했다.
2)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여운형이 암살되자 이승만의 남한 단독 총선거 주장이 힘을 받았고, 장덕수 암살로 임정과의 통합도 물거품이 된 후 49년 6월 김구마저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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