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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구성 ㅣ 나남신서 692
승계호 지음, 김주성 외 옮김 / 나남출판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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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모든 가능한 경험을 넘어가서 사물들 그 자체일 터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확한 개념도 세울[아무것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참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물들 그 자체에 대한 탐구 앞에서 그것을 전적으로 그만둘 만큼 자유롭지가 못하다. 왜냐하면 경험은 이성을 한 번도 온전히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우리를 물음들에 대한 답변에 있어서 언제나 계속해서 되돌려보내고, 물음의 온전한 해결에 관하여 우리를 불만인 채로 둔다. -Kant, 형이상학 서설, A165
본 저서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이념을 근간으로 공정성을 모색한 롤즈의 이론에 배어 있는 직관과 구성의 포속관계를 단초로, 불확정성과 전달 불가능성을 함유한 직관을 배제하고 절차에 근거한 형식적 구성주의로 나아가려는 일련의 시도가 보여주는 사상사적 한계를 검토하고 있다.
이 물음은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진리 혹은 법칙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하강'의 방법으로 사회체제를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 혹은 법칙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계약에 근거한 부단한 합의를 통해 엄밀하게 구성하는 '상승'의 방법으로 사회체제를 구성할 것인가의 대립이다.
체제를 구성하는 작업은 정당성의 근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며, 이 정당성은 아무리 절차적 엄밀성으로 구축하려 해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가 없다. 만장일치를 이끌어낸 제도라 하더라도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미 그 개념의 '초월성'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형식을 세우는 작업 자체가 초월적인 세계로 올라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보편화를 통해 모든 경우의 수를 포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도식화로 고착되기 십상이다. 실질과의 괴리는 구조의 구축이 필연적으로 배태하고 있는 결함이며, 인간 이성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하나와 여럿 / 이론과 실천 / 자유와 자연 사이의 긴장은 사상의 역사에서 순환하는 주제이다. 문화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이래로 이 주제를 향한 탐구 정신이야말로 절대 불변의 진리요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인은 이 꿈을 절대로 이룰 수 없다는 자각에 사로잡힌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는 다시 순환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정말로 이룰 수 없는 것인지를 하나하나 짚어오르고, 마침내 결단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디오티마의 사다리가 놓여진 자리는 쿠자누스의 '아는 무지'(docta ignorantia)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