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워 1945-2005 2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 플래닛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세계 경기 후퇴의 결정적 분기점

1. 닉슨의 고정환율제 포기 선언(1971.8.15)

2. 욤 키푸르 전쟁(1973.10.6)으로 촉발된 석유 파동


1970년대 들어 "서유럽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고 불리는 현상, 다시 말해 임금과 가격의 상승과 경제 침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대표들은 1971년 이래의 높은 인플레이션 비율을 근거로 들며 1973년의 위기가 닥치기도 전에 이미 피로의 징후를 보이고 있던 경제에 더 많은 임금과 기타 보상을 강요했다. 실질 임금은 생산성 증가를 웃돌기 시작했다. 이윤은 하락했고 신규 투자는 감소했다. 과열되었던 전후 투자 전략으로 형성된 과잉 생산 능력은 인플레이션이나 실업으로만 해소될 수 있었다."(752-3) "몇 년 전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굴뚝 산업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철강 노동자와 광부, 자동차 산업 노동자, 방적공의 실직은 지역 경제의 경기가 하향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었고 나아가 석유 파동의 부산물도 아니었다. 서유럽의 유서 깊은 제조업 경제가 소멸하고 있었다."(755-6)


각국 정치인들은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전후의 합의를 고수했다. 다시 말해 가능하면 완전 고용을 추구했고, 완전 고용을 달성하지 못하면 직업을 가진 자들에게는 임금 인상으로, 실직한 자들에게는 사회적 소득 이전으로, 공공 부문이나 민간 부문 공히 허약한 고용주에게는 현금 보조금으로 보충하려 했다. 그러나 70년대가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가들이 이제 인플레이션은 높은 실업률보다 더 큰 위험을 일으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759) 1970년대에 전후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중간 계급은 자신들이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인플레이션, 세금으로 조성된 사양 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 예산과 재정 압박을 해소하기 위한 공공사업의 축소와 폐지 등 그들이 그렇게 느낄 만한 이유는 많았다. 과거에 그랬듯이 인플레이션의 재분배 효과는 현대 서비스 국가 특유의 높은 과세와 맞물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소위 중간 계급 시민들은 이를 가장 뼈저리게 느꼈다."(761-2)


불투명한 전망 속에서도 "서유럽에서 고전적인 형태의 공산주의와 파시즘에는 미래가 전혀 없었다. 시민적 평화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다가왔다."(764) 극단적 테러리즘을 고수한 바더-마인호프 집단에 대한 전반적인 "공감의 한 원천은 문학계와 예술계에서 증가하고 있던 독일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였다. 이 사람들은 독일이 이중으로 '상속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나치가 독일 국민에게서 훌륭하고 '유용한' 과거를 박탈했다면, 연방공화국에 들어와서는 미국이라는 감독이 거짓된 독일의 이미지를 강요했다." "타인의 조작과 이익에 희생된 자는 이제 '독일인'이라는 테러리스트들의 주장처럼, 미국 점령군과 다국적 기업들, '국제' 자본주의 질서를 표적으로 삼은 독일 극좌파 테러리즘의 뚜렷한 민족주의적 색채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라이츠와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들은 "정치적 억압에 맞서 양심으로 투쟁하는 현대의 안티고네로 그려진다."(776-8)


# 1970년대 서유럽을 혼란에 빠뜨린 두 가지 흐름

1. 소수 민족 분쟁(스페인 바스크, 북아일랜드, 코르시카 등)

2.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극단적 테러리즘(서독의 적군파RAF,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BR)


"정치 폭력이 '자기 긍정의 생산력'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은 현대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낯설지 않았다. 네그리가 확인하고 붉은여단과 그 동조자들이 실천했던 것은 파시스트가 찬양한 '폭력의 정화력'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극좌파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반민주주의적 우파의 '프롤레타리아적' 폭력으로 후퇴했다. 1980년이면 좌파와 우파의 테러리스트들은 그 표적과 방법에서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784) "이 시기 좌파 테러리즘이 거둔 단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은 지역의 정치 단체들에 남아 있던 혁명적 환상을 철저하게 지워버린 것이다." 1970년대의 '총탄의 시대'는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허약한지 깨닫게 해주었다. "서유럽의 심장부에서 혁명적 전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시절의 순효과는 테러리스트들이 계획하고 기대했듯이 사회를 양극화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온갖 정파의 정치인들을 중도의 안전 지대에 결집하도록 몰아 댔다."(786)


"당대의 지식인 사회 전체가 매우 폭넓게 공유했던 인간 해방 이론의 밑바탕에는 두 가지 가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첫 번째는 권력의 토대는 계몽 사상 시대 이후 대부분의 사회 사상가들이 가정했듯이 자연 자원과 인간 자원의 통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 다시 말해 자연계에 관한 지식, 공적 영역에 관한 지식, 자신에 관한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 지식 자체가 생산되고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에 관한 지식을 독점하는 데 있다는 가정이었다." "두 번째는 과거의 확실한 사실은 물론 확실함의 가능성 자체까지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혹적인 주장이었다. 모든 행위, 모든 견해, 모든 지식은 정확히 사회에서 비롯되었고 따라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아야 했다. 판단이나 평가가 주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몇몇 영역에서는 당파적인 (그리고 암묵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적 태도의 표현이자 표상으로 간주되었다."(788-90)


# 회의론 : 니체 → 푸코 / 해체론 : 하이데거 → 데리다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가정을 비판하고 계몽된 합리주의와 그 정치적, 인식론적 부산물의 토대에 문제를 제기하는 새로운 관심은 하이데거처럼 근대성과 기술적 진보를 비판했던 20세기 초의 비평가들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몽매에서 깨어난 회의론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하이데거와 그들의 과거 이력을 세탁하게 해주었다." "라캉과 데리다처럼 새로이 대가가 된 이론가들은 대학의 기존 청중에게 언어의 변덕과 역설을 완전한 철학으로, 말하자면 텍스트적 해석과 정치적 해석에 무한정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틀로 승격시켰다." "격세유전적으로 경제적 범주와 정치 제도들에 집착했던 마르크스주의도 그러한 집착으로부터 구제되어 문화 비평으로 거듭났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부르주아를 마지못해 극복해야 하는 불편함은 이제 더는 장애물이 아니었다."(791-2)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굴복시키고 지배하려는 계몽 사상의 기획이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생각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술을 통해 냉전으로 분열된 양 진영의 독자들에게 이미 익숙했다. 특히 1944년에 출간된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 중요했다. 하이데거식으로 뒤틀린 이러한 반성─공산주의는 서구에서 수입한 부정한 것이며 끝없는 물질적 진보라는 지나치게 오만한 환상을 갖고 있다는─은 70년대에 윤리적 반대파와 생태학적 비판자들의 결합으로 등장한 지식인 반대파의 토대를 형성했다." "1973년 프랑스와 영국에서 '생태' 후보들이 선거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서독에서는 녹색당의 선구자인 농민대회가 창설되던 해였다. 서독의 환경 운동은 1차 석유 파동으로 추동력을 얻어 순식간에 주류 정치에 합류했다."(811-2) '복고retro'의 유행과 더불어 "70년대는 스스로 반성하는 걱정스러웠던 시대로서 앞이 아니라 뒤를 바라보았다."(796)


"70년대 초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스가 단지 지리적인 의미에서만 유럽의 주변부였던 것은 아니다. 세 나라 모두 냉전에서 '서방'에 충성했지만 다른 점에서는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다. 경제는 유럽의 남쪽 변두리에 있는 다른 국가들, 즉 유고슬라비아나 터키의 경제와 닮았다." "세 나라 모두 1970년대 초에 서유럽보다는 라틴아메리카에 더 친숙한 성격의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이 다스렸다. 전후의 정치적 변화는 대체로 그 나라들을 비켜간 듯했다.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1932년에서 1970년까지 통치했던 포르투갈과, 프랑코 장군이 1936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1939년부터 1975년에 죽을 때까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은 채 통치했던 스페인에서는 다른 시대에 속한 권력의 위계 제도가 고착되어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군부 도당이 1967년에 국왕과 의회를 내쫓았다. 이후 그리스는 대령들의 혁명평의회가 통치했다. 세 나라의 불투명한 미래 위에는 불안정했던 과거의 망령들이 떠돌았다."(829)


"아이러니한 것은 지중해 유럽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변화들이 문화나 정치의 과격파와 혁신자들이 아니라 구체제 자체의 보수적 정치인들 덕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그리스),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포르투갈), 아돌포 수아레스(스페인)는 몇 년 뒤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처럼 모두 자신들이 해체시키는 데 기여한 구체제의 특징적 생산물이었다." "세 나라는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면서도 '서방'에 그다지 어려움 없이 진입하거나 재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외교 정책이 언제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 유럽경제공동체 회원국들의 외교 정책과 양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통의 반공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냉전의 제도들은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들과 군사 독재나 교권 독재 사이에서 소통과 협력을 증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 나라들의 경제는 다른 서방 국가들의 경제와 본질적으로 유사했으며 이미 화폐와 상품, 노동의 국제 시장에 잘 통합되어 있었다."(861-3)


"1930년대 이래 공공 정책은 많은 사람들이 신뢰한 '케인스주의' 정책에 의존했다. 이에 따르면 경제 계획과 적자 예산, 완전 고용은 원래 바람직하며 서로 지탱해 주는 관계에 있다. 비판자들은 두 가지 논거를 제시했다. 하나는 매우 단순했다. 서유럽인들에게 익숙한 사회 복지 사업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논거는 특히 전후 수십 년 동안 국민경제가 위기로 점철되었던 영국에서 집요하게 주장되었다. 사회 복지 사업을 지속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국가 개입은 근본적으로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 국가가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보험, 주택, 연금, 보건, 교육 등 서비스의 대부분은 민간 부문이 더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사적 전략은 젊은 유권자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견해가 반백 년 전 마지막으로 지적 우월성을 확보했을 때 보여 준 치명적인 귀결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882-3)


"공공 부문이 명백히 제거되었는데도 1988년 영국 총생산에서 공공 지출이 차지한 몫(41.7퍼센트)은 '국가를 국민에 등에서 내려놓겠다'던 대처의 약속과는 달리 10년 전(42.5퍼센트)과 사실상 동일했다. 보수당 정권이 실업 수당으로 전례 없이 많은 액수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철강, 석탄, 섬유, 조선 등 비효율적인 (그리고 국가의 보조를 받던) 산업에서 일하다 실직한 많은 사람들은 결코 다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일생 동안 이름만 제외하면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이 일했던 산업의 고용주들이 몇몇 경우(특히 철강)에 이윤을 내는 사기업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는 사적 소유가 일으킨 기적이라기보다는 마거릿 대처 정권이 높은 수준으로 고정된 노동 비용을 덜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필요 없는 노동자들의 비용을 국가가 보조하는 실업으로 '사회화' 했던 것이다."(891-2)


"대처가 권력에 오르기 전, 영국 공공 정책의 초기 입장은 국가가 정통성과 주도권의 자연적인 원천이라는 점이었다. 대처가 무대에서 떠날 때쯤이면, 이러한 견해는 뿌리 깊이 국가에 얽매인 영국 노동당에서도 소수파의 견해로 전락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전후 합의의 핵심 가정들이 우파 혁명으로 박살났다면, 프랑스에서 정치적 틀을 깨뜨린 것은 비공산주의 좌파의 부활과 변화였다."(898-9) "드골의 적대자와 비판자는 이 장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비민주적' 방식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를테면 프랑수아 미테랑은 1965년에 출간된 소책자에서 드골의 방식을 '영원한 쿠데타'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사실상 무제한적이었던 대통령의 권한은 드골의 후임자들에게는 정파를 불문하고 확실히 매력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독특한 제도는 개별 후보의 정치적 기술과 인성에 의지함으로써 5년마다 실시되는 의회 선거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901)


"전후 유럽의 자기 인식의 전환점은 1973년 12월 28일 파리에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서유럽 최초로 출간되면서 찾아왔다. W. L. 웹은 <가디언>지에 실은 영어 번역본에 대한 서평에서 "지금에 살면서 이 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일종의 역사적 바보이다. 시대 의식의 결정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기이한 것은 솔제니친 자신도 인정했듯이 책이 전하는 전언, 즉 '현실 사회주의'는 야만스러운 사기극이며 노예 노동과 대량 학살의 토대 위에 세워진 전체주의 독재라는 메시지가 전혀 새롭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타이밍이 중요했다. 비판의 영향력은 서유럽에서 수십 년 동안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동유럽에서 1960년대 내내) 무뎌졌다. 국가사회주의가 1917년에 러시아에서 최초로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래 대륙 전역에서 우르릉거렸던 국가사회주의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일말의 빛을 찾으려는 욕구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918-9)


"퓌레의 설명에 따르면 19세기의 자유주의적 낙관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과격한 사회 변혁의 전망이라는 쌍둥이 지주에 의존했던 이 이야기는 땅에 처박혔다. 급진적 변혁을 목적으로 삼은 이 이야기에서 혁명의 상속인으로 추정되었던 소련 공산주의가 반동적으로 유산 전체를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퓌레가 펼친 논지의 정치적 함의는 그 자신도 잘 이해하고 있었듯이 매우 중대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정치로서 실패한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늘 불운이나 환경을 탓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 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의심을 받는 것은 상황이 다르다. 다시 말해 이성도 필연성도 역사 속에서 작용하지 않았다면, 스탈린의 모든 범죄, 국가의 명령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중에 희생된 모든 생명과 자원, 절대적 명령으로써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던 20세기의 과격한 실험이 남긴 그 모든 오류와 실패는 길은 옳았지만 잘못 움직였다는 식으로 '변증법적으로' 설명될 수 없었다."(923-4)


"1945년 이후 권리 담론은 개인에 집중되었다. 이 또한 전쟁의 교훈이었다." "개인 권리의 법률적 수사를 현실 정치의 영역에 밀어 넣은 동력은 동시에 발생한 마르크스주의의 후퇴와 유럽안보협력회의였다."(927) 동유럽 지식인들이 "시민 사회─70년대 중반 이래 동유럽의 지식인 반대파가 널리 채택했던 모호한 어구─를 재건하려는 노력에 담긴 의미는 이들이 1968년 이후에 당-국가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프라하의 후사크나 베를린의 호네커가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권리-담론'의 논리를 인정하고 자국의 헌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리라고는 누구도 진정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이론상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바로 실제로는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며, 국내외의 관찰자들에게 이 사회들이 사실상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반대파는 공산당 당국과 싸우는 대신 의도적으로 그들을 지나쳐 이야기했다."(930-1)


사회주의 경제권에서 생산된 조악한 품질의 상품은 수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사실상 동유럽의 상점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은 서방에서 돈을 빌리는 길뿐이었다. 서방은 확실히 돈을 빌려줄 열의가 있었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민간 은행들 모두 소련 진영 국가에 자금을 빌려주게 된 것을 기뻐했다." "동유럽 전체의 경화 채무는 1971년 61억 달러에서 1980년 661억 달러로 늘었다. 이는 1988년 956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수치에는 루마니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오랫동안 외국의 채무를 갚았고 그동안 국민은 등골이 휘었다. 이 채무는 70년대에 헝가리에서 적용된 것과 같은 가격 결정의 허용 폭이 아니었더라면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공산주의 체제는 차관만이 아니라 빌려온 시간에도 의존하여 생존하고 있었다. 조만간 공산주의 체제는 고통스럽고 사회를 붕괴시킬 경제 조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954-5)


"레닌이 유럽사회에 기여한 독특한 점은 유럽 급진주의의 분권적 정치 유산을 빼앗아 지배력의 독점이라는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권력의 성격을 바꾼 것이었다. 레닌은 권력을 주저 없이 한 곳에 집중시켰으며 강제로 그곳에 존속시켰다. 공산주의 체제는 주변부에서 무한정 부식될 수도 있었지만, 최후의 붕괴를 주도할 자는 중앙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의 붕괴에 관한 이야기에서, 프라하나 바르샤바에서 놀랍도록 번창한 새로운 종류의 반대는 시작의 끝일 뿐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출현한 새로운 성격의 지도부는 끝의 시작이 될 터였다."(957) "철저한 당원이었던 고르바초프는 당이나 당의 정책을 절대로 공개리에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흐루시초프 시대의 오류에 환멸을 느꼈고 이후 브레주네프 시절의 억압과 무기력에 실망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런 의미에서 고전적인 개혁 공산주의자였다."(974)


공식적으로 '자본주의'가 수십 년 동안 격한 비난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사회에서 "경제 개혁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라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1921년 이후 소련의 모든 개혁 정책은 레닌의 신경제 정책NEP을 필두로 똑같이 시작되어 똑같은 이유로 활력을 잃었다. 중대한 경제 개혁은 통제의 완화나 포기를 의미했다. 개혁은 해결하려는 문제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방금 말했듯이 통제력의 상실을 뜻했다. 그런데 공산주의 체제는 통제에 의존했다. 공산주의는 실로 통제 그 자체였다. 경제의 통제였으며 지식의 통제였고 운동과 여론과 인간의 통제였다. 그 외 모든 것은 변증법이었다." "소련은 중앙 통제 경제의 정치적, 제도적 기득권을 지닌 자들이 운영했다. 소련 특유의 작은 모순들과 일상의 부패는 권위와 권력의 원천이었다. 당이 경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 자체를 개혁해야 했다."(976-7)


"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에서 두드러진 측면은 전염 그 자체가 아니었다. 모든 혁명은 그런 식으로 확산된다. 누적된 사례가 기존 권위의 정통성을 침식했다. 1848년과 1919년의 혁명, 그리고 정도는 약하지만 1968년의 혁명도 바로 그러했다. 1989년의 새로움은 몰락 과정의 속도였다." 즉석 정치 교육의 수단이 된 텔레비전 방송이 널리 퍼지면서 "공산주의 체제의 중대한 자산이었던 정보에 대한 통제권과 독점권이 소실되었다. 혼자라는 두려움은, 즉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갖게 되는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졌다. 심지어 루마니아에서도 국영 텔레비전 방송실의 장악이 봉기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1989년 혁명들의 두 번째 현저한 특징은 그 평화로운 성격이었다." "전 세계의 많은 시청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전 국민이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공산당 정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빠졌다."(1026-8)


"동유럽의 군중과 지식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신속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공산주의에서 질서정연하게 탈출한) '제3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이는 단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그들을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1989년 7월 6일, 고르바초프는 스트라스부르의 유럽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청중에게 소련이 동유럽의 개혁을 가로막는 일은 없으리라고 밝혔다. 개혁은 '전적으로 인민들의 문제'였다." "고르바초프의 입장에는 전혀 모호함이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에 미흐니크가 말했듯이, '외교 정책의 성공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제국의 중심이 주변부 식민지를 붙들지 않겠다고, 그럴 수 없다고 너무나 공공연히 인정했기에 또 그렇게 이야기한 데 대해 도처에서 갈채를 보냈기에, 제국은 식민지를 잃었으며 더불어 제국의 지역 내 협력자들도 잃었다. 나머지 결정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몰락 방식과 방향이 전부였다."(1033-4)


"독일의 재통합은 분열의 시기에 특이한 융합의 사례였는데, 그 공은 우선 헬무트 콜에게 돌아가야 한다." 한때 하루에 2,000명에 달했던 서독으로의 주민 유입을 멈추기 위해 헬무트 콜은 동독의 파괴에 착수했다. "1990년 5월 18일, 두 독일 사이에 '화폐, 경제, 사회의 연합'이 체결되었고, 7월 1일에는 그 핵심 조항인 도이치 마르크의 동독 확대 사용이 발효되었다. 동독인은 이제 사실상 무용지물인 동독 마르크를 4만 도이치 마르크까지 1대1이라는 엄청나게 유리한 환율로 교환할 수 있었다." "8월 23일, 동독 의회는 서독 정부와 사전에 체결한 협약에 따라 연방공화국에 가입하기로 가결했다. 한 주 뒤, 통일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 따라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연방공화국에 흡수되었다. 3월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승인하고 1949년의 기본법 23조에 의해 허용된 대로였다. 10월 3일 통일 조약이 발효되었고, 독일민주공화국은 연방공화국에 '가입'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1040-2)


동독 국민들은 자신들의 "괴로운 역사에 관여하기보다는 잊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1950년대 서독의 망각의 시절이 얄궂게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연방공화국 초기에 그랬듯이, 1989년 이후에도 해답은 번영이었다." "서독 유권자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콜은 세금 인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이 거대한 새로운 과제를 이행하기 위해 연방공화국은 그때까지 상당한 흑자를 보았던 재정을 적자로 돌리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연방 은행은 그러한 정책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에 깜짝 놀라 1991년부터 이자율을 꾸준히 올렸다. 1991년은 도이치 마르크가 예정에 따라 유럽 통화에 영원히 연동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자율 인상이 가져온 연쇄 효과인 실업 증가와 경제 성장의 둔화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화폐제도 가입국 전역에서 감지되었다. 헬무트 콜은 자국의 통일 비용을 밖으로 전가했으며, 독일의 유럽 내 협력자들은 부담을 나누어지게 되었다."(1048-50)


"고르바초프 시절에는 '러시아적 특성'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강해졌다. 그 이유는 동독이 프리드리히 대왕을 매우 공개적으로 자랑하고 독일민주공화국의 고유한 독일적 특성을 드높이기 시작한 이유와 동일했다. 인민공화국들이 무너지던 때에 애국심은 사회주의를 대신할 유용한 수단으로 재차 등장했다. 바로 이 때문에 애국심은 가장 편하고 위협이 가장 적은 형태의 정치적 반대이기도 했다." "보리스 옐친이 예기치 않게 등장하게 된 배경은 이러했다." "당과 관료 기구가 진정한 변화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지 관찰할 좋은 기회를 가졌던 옐친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러시아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정치적 본능을 발휘했다." "고르바초프가 국내 정치에서 저지른 주된 전술적 오류는 민족을 드러내며 실제적인 권력과 상당한 독립성을 갖는 민족 입법부의 등장을 장려한 것이었다."(1064-5)


# 1991년 6월 12일, 옐친의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대통령 선출 / 12월 31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멸


"체코슬로바키아의 평화로운 분열은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를 덮친 파국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서방 언론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가들이 공공연하게 취한 한 견해에 따르면, 발칸 지역은 희망이 없는 곳으로 불가사의한 싸움과 먼 옛날의 원한이 뒤섞인 가마솥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운명을 타고났다.' 자주 인용되듯이 유고슬라비아는 여섯 개의 공화국과 다섯 개의 민족, 네 개의 언어, 세 개의 종교, 두 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단일 정당이 이 전부를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1989년 이후에 일어난 일은 단순했다. 솥뚜껑이 제거되자 가마솥이 폭발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는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었으며, 이 점에서 다른 공산 국가들의 해체와 유사했다. 유고슬라비아 비극의 압도적인 책임은 독일이나 다른 외국의 정부가 아니라 베오그라드의 정치인들에게 있었다."(1085-6)


종교와 민족을 연결짓는 일은 갈수록 희미해져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투르크의 전진을 막는 중세 세르비아의 마지막 거점이자 1389년 역사에 길이 남을 패전(코소보 전투)의 장소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따라서 지역 내에서 알바니아인이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을 일부 세르비아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인구 측면에서 골칫거리이며 역사적으로도 도발적인 일로 간주했다." "세르비아인들이 자신들과 바짝 붙어 불안을 조성하는 알바니아인들을 싫어한 반면, 유고슬라비아 북부에서는 무기력한 남부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증가했는데 이는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 문제는 민족이 아니라 경제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북부가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남부에 분노하는 동안 "유고슬라비아의 빈부차는 극적인 수준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마침내 지리와 연관되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1091-2)


"민족주의는 (티토 사후의 정치적 공백기에)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를 장악하는 방법이었으며, 1989년 5월 그가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그 효력은 이미 확인되었다."(1095) "발트 국가들이나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체제 이후의 정치인들은 소수 민족들의 존재를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 없이 공산주의라는 과거를 벗어던지고 민족 독립에 호소하면서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민주주의를 즉시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달랐다. 연방이 구성 공화국들로 해체될 경우, 슬로베니아를 제외하고는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각국마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 민족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분열의) 촉매제는 코소보였다." "세르비아의 수정 헌법은 이미 궁핍하고 불우한 최하층민이었던 알바니아인들에게서 자치권과 정치적 대표권을 사실상 박탈했다."(1096-7)


# 코소보 의회 해산과 병합


1992년에 벌어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전쟁, 그리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사이의 전쟁으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창설된 코소보해방군은 코소보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알바니아와 연합하기 위해) 무장 투쟁을 천명했다."(1109) 밀로셰비치의 주된 전략적 목표는 "반대 세력의 패배가 아니라 비세르비아계 시민들을 세르비아인의 영토라고 주장된 곳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어느 편을 막론하고 모두 관여했던 이러한 행위는 매우 오래된 관행으로 새롭게 '민족 청소'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르비아 군대가 단연 최악의 범죄자들이었다.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무렵 약 30만 명이 살해되었고, 수백만 명이 추방되었다. 유럽공동체 보호 시설의 입소 신청자는 1988년에서 1992년 사이 세 배 이상 늘었다. 1991년에는 독일 한 나라에서만 25만 6,000명의 난민을 수용했다."(1101-2) 


# 스레브레니차 학살 : 1995년 7월 11일 국제연합이 정한 '안전지대'(보스니아 동부의 스레브레니차)에 진입한 세르비아 군대가 소년들을 포함한 이슬람계 남자들 7,400여 명을 나흘에 걸쳐 학살한 사건


"90년대 정치의 분열적 기질은 과거에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유럽 나라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도 중앙 집권적 통치의 구속을 벗어던지려는─또한 먼 지방의 가난한 동료 시민들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려는─똑같은 충동이 감지되었다. 스페인에서 영국까지 서유럽의 기존 영토 단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전통적인 국민 국가 형태를 그럭저럭 유지했으나, 대규모의 행정적 지방 분권을 경험했다."(1145) "자치에 대한 욕망은 이를테면 보헤미아보다는 카탈루냐에서 확실히 더 강했고, 플란데런과 왈론 사이의 간극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나 심지어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간극보다 훨씬 더 넓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처럼 분리를 감행하기보다는 국가 내 존속을 택한) 요인은 서유럽 국가들이 이제는 자국 백성에 대한 권위를 독점하는 독립적인 민족 단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점차 다른 무엇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1165)


#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동맹(북부 동맹), 프랑스의 코르시카 섬, 영국의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벨기에(플란데런 지방과 왈론 지방의 갈등)


"유럽연합 회원국들을 일련의 진정으로 새로운 제도적, 재정적 협정으로 몰아넣은 것은 1992년의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5년 뒤에 이를 계승한 암스테르담 조약이었으며, 이 두 조약은 근본적으로 변한 외부 환경의 직접적인 귀결이었다."(1165)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공동 통화의 요구 조건을 엄격히 적용했으며, 가입을 희망하는 모든 나라는 빠르게 늘어났던 유럽연합의 실천 규약인 아키코뮈노테르acquis communautaire를 자국의 통치 체제에 통합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절차가 복잡한 관료적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조약은 북유럽의 신청국들이나 오스트리아에는 어떠한 지장도 초래하지 않았지만, 동유럽의 장래 후보들에게는 대단히 곤란한 장애들이었다. 유럽연합은 자체 헌장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유럽을 품 안에 끌어안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는 가능하면 배제하려 애썼다."(1171)


# 아키코뮈노테르acquis communautaire : '공동체의 경험'이란 뜻으로 현재까지 축적된 유럽연합 법규 전체를 말한다.


#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여파

1. 여전히 체질이 허약한 중동부 유럽 국가들에게 유럽연합 가입 이전 단계로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승인하면서 조약이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후원하게 되었다.

2. 유럽연합과 관련된 의제들이 대중들의 관심권에 들어오면서 익명의 관료 기구들이 조용히 계획하고 결정 내리던 시절이 막을 내렸다.

3. 유럽의 결합(최소한 서유럽만이라도)을 위한 길을 마련했다.


"한 국가의 정부는 자유롭게 세금을 거두어 예상되는 비용에 충당하는 반면, 유럽연합은 스스로 재원을 조달할 능력이 거의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유럽연합의 수입은 고정된 비율의 관세와 농업세, 연합 전역의 간접 판매세(부가가치세), 그리고 특히 국민총소득GNI의 겨우 1.24퍼센트가 상한선인 회원국들의 분담금에서 나왔다." 따라서 유럽연합의 소득은 개별 회원국들 내부의 정치적 압력에 취약했다. "2004년 유럽연합이 동유럽으로 확대된 이후, 19개 회원국이 브뤼셀로부터 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 연합 운영비는 사실상 순기여국인 영국과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독일 등 6개 회원국의 분담금으로 충당되었다. 2003년 12월, 6개국 모두 앞으로는 유럽연합에 내는 국가별 분담금을 국민총소득의 1.24퍼센트에서 1퍼센트로 낮추어야 한다고 집행위원회에 청원했다. 이는 유럽연합의 미래에는 불길한 일이었다."(1181)


"독일은 무임 승차한 나라들의 도덕적 해이와 실질적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성장 안정 협정'을 고집했다. 유로화 체제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나라들은 공채를 국내총생산의 60퍼센트 미만으로 억제해야 했으며 재정 적자도 국내총생산의 3퍼센트 미만으로 운영해야 했다.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나라는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포함하는 연합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의 요점은 유로화 지역의 어떤 정부도 재정적으로 방심하거나 예산을 마음대로 초과하지 못하도록 보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회의론자들이 예견했듯이 '천편일률적' 통화가 주는 부담이 곧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설립된 유럽중앙은행은 처음부터 이자율을 비교적 높게 유지하여 새로운 통화를 지탱하고 인플레이션을 방지하려 했다. 그러나 유로화 지역 국가들의 경제는 발전 수준과 경기 순환 지점이 서로 달랐다."(1183-4)


"그러나 모든 점을 다 고려할 때, 유럽연합은 좋은 것이다. 단일 시장이 가져다준 경제적 이익은 영국의 가장 열렬한 유럽연합 회의론자조차 인정할 정도로 분명했다." "80년대 말부터 유럽공동체와 유럽연합의 예산은 명백히 재분배적 성격을 띠었다. 부유한 지역에서 가난한 지역으로 재원을 이전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격차를 꾸준히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하여 사실상 앞선 세대의 국가별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대체했다."(1193) "유럽연합은 간접 통치 제도로서 갖는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흥미롭고 독창적인 속성을 지녔다. 결정이 내려지고 법률이 통과되는 곳은 초정부적 차원이지만, 이러한 결정과 법률은 각국 정부를 통해서 이행된다. 모든 일은 협정에 의해 시행되어야 한다. 강제 수단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징세 공무원도 없고, 유럽연합 경찰도 없다. 그러므로 유럽연합은 각국 정부에 의한 국제적 통치라는 특이한 타협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1195)


유럽의 최하층이 빈곤과 실업뿐만 아니라 인종과 교리로도 결정되면서 "극우 정당들은 영국 국민당처럼 '소수 민족'에 반대하여 집결했든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처럼 '이민자'를 표적으로 삼았든 이 시기에 많은 소득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세계화된 경제의 취약 계층으로 드러난 많은 노동자들은 더딘 경제 성장으로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경제적 불안정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좌파의 옛 기관들은 더는 그러한 불안정을 계급의 기치 아래 가두고 동원할 만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국민전선이 대체로 한때 프랑스 공산당의 보루였던 구역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소수 민족들이 자신들의 주변에 눈에 띄게 증가했기에, 그리고 동유럽에서 이어지는 수문이 일단 개방되면 훨씬 더 많은 외국인이 복지의 여물통으로 먹고 살거나, '우리의' 일자리를 앗아갈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극우파가 내세우는 주장의 호소력은 강했다."(1208-9)


"새로운 반체제 정당들은 다른 점에서도, 즉 청렴하다는 점에서도 이득을 보았다. 정권에서 배제되었기에 90년대 초까지도 유럽 제도의 토대를 갉아 먹고 있는 듯했던 부패에 오염되지 않았다."(1214) "진정으로 놀라운 일은 새로운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의 출현이 아니라 이들이 1989년 이후의 혼란과 불만을 이전보다 더 잘 이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유럽인들이 정치인들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지라도, 유럽 통치 체제의 핵심에는 가장 급진적인 반체제 정당들조차 감히 정면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지지를 얻은 무언가가 있다. (민주주의나 자유 또는 법치 이념이 아니라) 실제 작동 방식에 이러저러한 결함들이 있다고 심각하게 지적될 때조차 유럽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이것은 바로 '유럽식 사회 모델European model of society'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는 '미국식 생활양식American way of life'과 대비될 때 비로소 그 뜻이 더 분명해진다."(1218)


"돌이켜 보건대 전후 몇 십 년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한때는 이데올로기적 양극화가 고착된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이해되었지만 이제는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 시기는 1914년에 시작된 유럽 내전의 연장된 에필로그였으며, 히틀러의 패배와 그의 전쟁이 미결로 남긴 사업이 최종적으로 해결되기까지 40년간 지속된 휴지기였다." "회복은 냉전을 극복하고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냉전 덕분에 가능했다. 소련 제국의 그림자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위협처럼 유럽을 줄어들게 했지만, 남은 유럽에게는 통합의 혜택을 부여했다. 서유럽 시민들은 동유럽인들이 감금되어 있는 중에 번창했다. 구대륙 제국들을 계승한 국가들의 빈곤과 후진성을 처리해야 할 의무도 없었고,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은 덕택에 직전 과거의 정치적 여파로부터도 안전했다. 동쪽에서 보면 이는 언제나 협소한 시각이었다. 공산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소련 제국이 붕괴된 뒤로는 이러한 시각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1220)


근대 국가가 세금을 걷고 전쟁을 수행하는 두 가지 밀접한 연관 기능을 수행한 것과 달리 "유럽연합은 초보적인 군사적 능력을 갖추는 데에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외교 정책을 마련하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사정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반백 년 동안 불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2001년 9·11 사건의 여파로 더 나은 유럽의 미래를 위한 탈국민국가적 처방의 한계는 명확해졌다. 어쨌든 전통적인 유럽 국가는 외부에서 전쟁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평화를 강요했다. 이는 홉스가 오래전에 깨달았듯이 국가에 유일하고 독특한 정통성을 부여한다. 최근까지 비무장 시민에 대한 격렬한 정치적 전쟁이 만연했던 나라들(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독일)에서 국가의 중요성은, 말하자면 경찰과 군대, 정보부, 사법 기구의 중요성은 잊힌 적이 없다. '테러리즘'의 시대에 국가의 무력 독점은 대부분의 시민에게는 매력적인 재보험이다."(1295-6)


"유럽연합은 경제적 서비스와 기타 서비스의 주요 제공자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시민은 참여자라기보다는 소비자로 규정되며, 따라서 그처럼 야심적인 사업의 전례로는 유망하지 않았던 민주주의 이전의 스페인이나 폴란드, 또는 아데나워 시절 서독의 조용한 정치 문화와 노골적으로 비교될 위험성이 존재했다."(1297) 이처럼 "우리가 탈국민 시대나 탈국가 시대에 살고 있다는 환상은 '세계화된' 경제 발전에 지나치게 주목하고······ 인간의 삶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유사한 초국적 발전이 틀림없이 진행 중이라고 추정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오로지 생산과 교환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유럽은 실로 초국적 물결이 깨끗이 연결된 플로우 차트가 되었지만, 권력이나 정치적 정통성, 문화적 친근성의 장소로 볼 때, 유럽은 여전히 오래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작은 개별 국가들이 모여 있는 익숙한 곳이었다. 민족주의는 대규모로 왔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민족들과 국가들은 여전하다."(129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트워 1945-2005 1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 플래닛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포스트워 유럽사의 주제

1. 유럽의 축소 : 국제적으로 제국의 지위 상실

2. 19세기 역사 담론들의 쇠퇴 : 20세기 유럽에 에너지를 공급한 진보와 변화, 혁명과 변혁 모델

3. 유럽 모델의 (뒤늦은) 등장 : 유럽연합

4. 미국과 유럽의 관계 : 전후 복구의 수호자이자 유럽 쇠퇴의 상징, 거부당하는 모범이나 표준 역할

5. 침묵의 역사 : 전쟁과 점령, 국경 조정, 추방, 종족 학살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사람들은 대체로 살던 곳에 계속 살았던 반면 국경선은 다시 만들어지고 조정되었다. 1945년 이후 일어난 일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 가지 중요한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국경선은 대체로 원래대로 유지되었고 대신 사람들이 이동했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 살아남은 소수 민족들이 실질적으로 국제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면, 그들을 더 편안한 곳으로 보내는 것도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란 용어는 없었으나, 그러한 현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전혀 대대적인 비난이나 당혹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유럽은 그 어느 때보다 민족적으로 훨씬 동질적인 국민 국가들로 구성되었다."(59-61) 고향만 아니라면 지구상 그 어디라도 기꺼이 가겠다는 소련과 동유럽 출신의 난민들은 상당수가 재건 사업에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던 서유럽에 정착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내란들은 유럽의 전쟁이 독일인들이 떠난 1945년에 종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내란이 남기는 깊은 상처 중 하나는 적이 패퇴한 뒤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내전들이 제2차 세계대전─히틀러의 전쟁─을 가장 진정한 의미의 사회 혁명으로 변환시켰다. 우선 외세에 의한 일련의 영토 점령은 불가피하게 현지 통치자들의 권위와 정당성을 침해했다." "독일과 소련 중심부를 제외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최소한 두 번씩 점령당했다. 처음에는 붉은 군대에, 그 다음에는 해방군에. 몇몇 나라들─폴란드, 발트 국가들, 그리스, 유고슬라비아─은 5년 동안 세 차례 점령당했다. 연이었던 각각의 침공 뒤에는 앞선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그 정권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엘리트들은 격하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옛 계급 전체가 의심을 받고 그 대표자들의 명예가 더렵혀져 완전한 백지 상태가 초래되었다."(74-5)


"점령된 유럽에서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은 법의 위반을 뜻했다. 우선은 점령군이 시행한 법(통행 금지, 여행 규제, 인종 법률 등)의 위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습법과 규범의 위반이었다." "특히 폭력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근대 국가의 최종적인 권위는 언제나 극한적인 상황에서는 무력의 독점과 필요할 경우 무력을 배치하겠다는 그 의지에 있었다. 그러나 점령된 유럽에서 권위는 오로지 제한없이 배치된 무력의 함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국가는 바로 이 상황에서 폭력의 독점권을 상실했다. 빨치산 집단들과 군대들이 합법성을 두고 경쟁했는데, 합법성은 주어진 영역에서 자신들이 영장을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결정했다." "폭력은 냉소를 낳았다. 나치와 소련은 둘 다 점령군으로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조장했다. 그들은 앞선 정권이나 국가의 소멸한 권위에 대한 충성뿐만 아니라 개인들 간의 예절이나 유대 의식도 성공적으로 방해했다."(76-7)


"해방된 유럽의 정부들은 정통성을 찾고 올바르게 구성된 정부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먼저 신뢰를 잃은 전시 정권들의 유산을 처리해야 했다." "파시스트 정권들의 활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그 죄를 처벌하는 것이 중요했다.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 근거는 충분했다. 그러나 보복의 열망은 한층 더 강한 욕구의 표현이었다."(83) "해방된 동유럽에서도 무정부적인 보복 폭력 행위가 만연했으나 그 형태는 달랐다. 서유럽에서는 독일인들이 적극적으로 협력자를 찾았으나, 슬라브인들의 피점령국에서는 독일인들이 직접 무력으로 통치했다. 독일인이 지속적으로 조장했던 유일한 부역은 (그들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현지 분리주의자들의 부역이었다. 그 결과 독일인이 퇴각한 뒤, 동유럽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보복의 첫 번째 희생자들은 소수 민족들이었다." 아울러 "자발적인 원한의 해결은 공산주의의 전후 야심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지역 엘리트들과 정치가들을 더 많이 제거하는 데 기여했다."(86)


"점령으로부터 이득을 취했던 사업가들과 고위 관리들은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고초를 겪지 않았다." "그러한 타협들은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1945년의 파괴와 도덕적 붕괴는 엄청났기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미래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벽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해방기의 임시 정부들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무력하고 굶주린 주민들에게 식량과 의복, 연료를 공급하려면 경제와 금융, 산업 엘리트들이 무조건 협력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했다(그들의 협력은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경제적 숙청은 생산을 저해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큰 손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지불한 대가는 정치적 냉소주의와 해방에 대한 환상과 희망의 소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사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독일이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견해가 매우 널리 퍼져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는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최초 희생자'로 선언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독일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99-100)


"단기 기억에 대한 불신과 유용한 반파시즘 신화─독일인에게는 반나치의 신화, 프랑스인에게는 저항 투사의 신화, 폴란드인에게는 희생자의 신화─의 모색은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 남긴 가장 중요한 보이지 않는 유산이었다. 그 유산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티토 원수나 샤를 드골, 콘라트 아데나워 같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 심지어 자랑 가득한 설명을 동료 국민들에게 제시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국민의 회복을 촉진시켰다. 동독조차 1945년 4월에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부헨발트 '폭동' 같은 고귀한 기원을 주장했다. 그것은 대체로 조작된 설화로 일종의 만들어진 전통이었다." "1945년의 상황에서, 폐허 더미로 뒤덮인 대륙에서, 마치 과거는 정말로 죽어 매장되었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얻을 것은 많았다. 대가는 주로 독일에서 선택적이고 집단적인 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특히 독일에서 잊어야 할 것이 많았다."(116)


전후 폐허만 남은 유럽 대륙에는 경제 계획을 주도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정부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모두에게 유용한 목적에 이용함으로써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하게 존재했다."(127) "1940년대의 통념에 따르면, 지난 전간기의 정치적 양극화는 경제 불황과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둘 다 사회적 절망이,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엄청난 간극이 키워냈다. 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려면, '인민의 상태'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복지 국가'─'사회적' 계획─는 정치적 격변에 대비한 단순한 예방책에 머무르지 않았다. 종족, 우생학, '퇴화' 같은 개념들은 20세기 전반에 유럽인의 공적인 사고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의 신체적, 도덕적 상태는 공동의 관심사이며 그러므로 국가의 책임에 속한다는 폭넓은 합의가 존재했다."(132)


"삶이 여전히 진실로 고단하고 물자는 극도로 부족했을 때, 유럽 국가들은 왜 그렇게 많은 자금을 보험과 기타 장기적인 복지 공급에 기꺼이 투입하려 했을까? 첫째,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후 복지 제도는 최소한의 정의나 공정함에 대한 보증서였다. 복지 제도는 전시의 레지스탕스가 꿈꿨던 정신적, 사회적 혁명은 아니었지만, 전쟁 이전 시기의 절망과 냉소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둘째, 서유럽의 복지 국가는 정치적인 분열을 야기하지 않았다. 복지 국가의 전반적인 취지는 사회적 재분배였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다." "즉각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느낀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장기적으로 실질적인 수혜를 입은 자들은 전문직과 상인들로 구성된 중간 계급이었다." "유럽의 복지 국가는 사회 계급들을 분열시켜 상호 간 적대하기 만들기는커녕 이전보다 더욱 긴밀하게 결합시켰고, 따라서 복지 국가의 보존과 방어는 공동의 관심사가 되었다."(138-9)


"마셜의 제안은 (까다로운 조건으로 집행된 차관이나 채무국의 경제 정책 개입 같은) 과거의 관행과 깨끗이 단절하자는 것이었다. 우선 몇 가지 기본적인 조건 외에는 미국의 원조를 받을 것인지, 받으면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유럽인들에게 맡겨졌다." "둘째, 원조는 수년 간에 걸쳐 이루어질 예정이었고, 따라서 재난 기금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복구와 성장을 위한 전략적인 계획이었다. 셋째, 원조금의 규모는 실제로 매우 컸다. 1952년 마셜 원조가 종결되었을 때, 미국이 지출한 액수는 약 130억 달러로 그 전까지 외국에 지원한 총액보다 많았다."(162-3) "마셜 플랜의 논리는 독일의 생산물에 대한 모든 규제의 제거를 요구했다. 독일이 다시 한 번 유럽의 경제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국무장관 마셜은 자신의 계획이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아 내려는 프랑스의 희망을 종식시키는 것이었음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혔다."(175)


동유럽에 이어 독일마저 소련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되는 사태를 우려한 "미국과 영국은 되살아나는 독일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겠다고 장담할 수 있었으며, 미국의 정책은 독일의 경제 회복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으로도 독일의 물자와 자원을 프랑스가 특권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의 확보라는 프랑스의 오랜 딜레마는 해결되지 못했다." "이후 몇 달 동안 프랑스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해결책은 독일 문제의 '유럽화'였다." "요컨대 독일을 파괴할 수 없다면 일종의 유럽 체제에 합류시켜 독일이 군사적으로 해악을 끼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큰 이득을 가져오게 하라는 얘기였다."(203-4) 반면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까지 영토를 확장한 "소련의 관점에서 볼 때 서쪽의 '제방', 즉 외부에서 특히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려 할 때 지나야만 하는 넓은 띠 모양의 지역은 안전에 지극히 중요했다."(206)


# 독일을 둘러싸고 벌어진 서방과 소련의 관점 : (민주주의) 체제이식과 (유럽 전체를 위한) 경제부흥 vs (공산주의) 체제이식과 (소련 경제를 위한) 물자약탈


"소련은 서쪽 이웃 국가들의 내정에서는 위압적인 군대 주둔 외에 다른 수단을 거의 갖지 못했다." "따라서 신중하기 이를 데 없고 어쨌거나 여전히 서방 강국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스탈린은 처음에는 스페인 내전기에 쌓은 공산당의 경험과 30년대 인민전선 시기를 거치면서 이미 친숙했던 전술을 추구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여타 '반파시스트' 정당들의 제휴를 독려한 이 전술은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신중하고 '민주적'이며 개혁적이었다." "연립은 공산당이 역사적으로 허약했던 지역에서 권력에 이를 수 있는 길이었다. 연립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224-5) "공산당은 (대개는 더 큰) 사회주의 정당들에게 좌파 '통합'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반드시 공산당의 후원을 통해 통합이 이루어져야 했다. 해방 이후 동유럽이 처한 상황에서 이러한 방법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합리적인 제안으로 들렸다."(227)


"공산당은 주요 정적들을 살해·투옥하거나 동화시킨 후에 1947년과 그 이후의 선거에서 정말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잔존한 정적들에 대한 폭력적 공격, 투표소에서의 위협, 명백한 개표 부정도 선거에서의 승리에 일익을 담당했다."(229) "돌이켜 보건대 1945년 이후 민주주의적 동유럽을 기대하는 일은 언제나 절망적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는 토착 민주주의 전통이나 자유주의 전통이 부재했다. 전간기에 이 지역 정권들은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잔학하게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과거의 지배 계층은 흔히 돈으로 매수되었다. 전간기의 진정한 지배 계급은 관료였다. 관료를 배출한 사회 계급은 공산 국가에도 행정 간부를 공급하게 된다. 권위주의적 후진국에서 공산당의 '인민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사회주의'의 그 모든 수사에도 불구하고 매우 짧은 기간에 쉽게 이루어졌다. 역사가 그렇게 방향을 바꾼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234)


1948년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추방당한 뒤 "티토와 그의 추종자들은 '비열한 반역자들과 제국주의자의 고용인들', '전쟁과 죽음 진영의 재난의 사자, 위험한 전쟁광, 히틀러의 장한 상속자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밀정, 앞잡이, 살인자들의 패거리', '제국주의자들이 던져준 뼈를 갉작거리며 미국 자본을 얻으려 짖어 대는, 미국의 가죽끈에 묶인 개들'로 비난받았다. 티토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공격이 스탈린 개인숭배의 만개와 다가오는 숙청과 시범 재판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탈린이 티토에게서 진정으로 위협과 도전을 보았으며 다른 공산주의 정권과 정당들의 충성과 복종을 침식하는 효과를 두려워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에 이르는 모든 '민족적' 길이나 '특수한' 길은 거부되었고 '경계의 배가'가 요구되었다. 스탈린주의의 제2빙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247-8)


사전에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각본이 짜여진 헝가리의 러이크와 불가리아의 코스토프에 대한 공개 재판은 "동유럽 지역 공산당 정권이 티토주의자를 사냥하기 위해 도발한 비밀 재판과 비밀 법정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헝가리에서만 약 2,000명의 공산당 간부들이 즉결 처형되었고 15만 명이 다양한 형기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약 35만 명이 당에서 축출되었다(축출은 종종 직업과 아파트, 각종 특권, 고등 교육을 받을 권리의 상실을 의미했다)."(301-2) 스탈린은 전쟁 기간 동안 시온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민족들을 동부로 추방했고, 유대인에 대해서도 확실히 유사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는 분명 정권에 불리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이는 대중의 반유대주의를 성공적으로 이용한 히틀러에 대한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반유대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306)


"스탈린의 편견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반유대주의는 보상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숙청과 기소, 자백, 재판의 완전한 연극을 상연한 스탈린의 의도다." 공산 국가 진영에서 시범 재판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재판은 본보기에 의한 일종의 대중 교육이었다." "시범 재판은 대중에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말해 주었고, 정책의 실패를 비난했으며, 충성과 복종을 칭찬했고, 심지어 대본을 쓰기도 했다."(314) "자백은 상징적으로는 책임을 전가할 핑계로 이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교리를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었다. 스탈린의 세계에서 의견 차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이단뿐이었다. 비판자는 없었고 오직 적뿐이었다. 실수도 없었고 오로지 범죄뿐이었다. 재판은 스탈린의 덕을 예증했고 스탈린의 적의 범죄를 확인하는 데 이용되었다."(316)


"스탈린이 동유럽에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또 거듭하여 주장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대체로 스탈린이 독일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스탈린이 베를린을 봉쇄한 목적은 (포츠담 의정서에서 연합국의 지상 접근이 문서로 보장되지 않은) 서방으로 하여금 도시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별개의 서독 국가 수립 계획을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베를린을 협상의 수단으로 활용한) 스탈린이 진정으로 원한 바였으나, 결국 그는 둘 중 어느 것도 확보하지 못했다." "서방 연합국은 그들 몫의 베를린을 고수했다. 또한 소련의 봉쇄는 프라하 쿠데타에 뒤이어 서방 연합국들로 하여금 서독을 위한 계획을 더 단호하게 추진하도록 했으며, 독일인들이 나라의 분할을 더 잘 받아들이도록 했다. 1949년 4월 프랑스가 2국 공동 지구에 합류하여 (소련 지구의 1,700만 명에 대해) 4,900만 명을 포괄하는 단일한 서독 경제 단위가 창출되었다."(248-50)


# 베를린 봉쇄의 여파

1. 두 개의 독일 국가 탄생

2. 미군이 독일에 대규모로 주둔

3. 서방의 군사 계획 재검토 → 미국의 NATO 참가


독일의 재무장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른 바로 그 순간에 우연의 일치로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인들과 서유럽인들은 즉시 한국이 주의를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한 기만 전술 또는 전주곡에 불과하며 독일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발터 울브리히트는 신중하지 못하게 다음으로는 독일연방공화국이 몰락하리라고 떠벌임으로써 이러한 추론을 조장했다. 소련은 8개월 전 원자폭탄 시험을 성공리에 마쳤고, 이 때문에 미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소련의 전쟁 대비 상태를 과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인들의 자신감을 진작하기 위한 심리적 부양책이었던 나토는 중대한 군사적 서약으로 바뀌었다."(257-8) 예상 밖으로 미국이 유럽 군사 동맹에 참여하자,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은 환영을 표했다. 1952년 나토의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이즈메이 경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목적이 "러시아를 막고, 미국을 붙들어 두고, 독일을 억누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1945년의 영국은 지불 불능 상태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최대 채권국에서 최대 채무국으로 전락한 영국은 "급격하게 감소한 수입으로 엄청난 달러 채무를 변제하려 분투했다. 마셜 플랜이 영국에서 산업의 투자나 근대화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한 가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충자금의 97퍼센트가 국가의 대량 채무를 지불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전히 해외 식민지를 많이 거느린 상황에서 "빚지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례 없이 엄격한 자제와 자발적 궁핍을 자청하는 것이었다."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 (즉 필수적인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 거의 모든 것이, 이를테면 고기, 설탕, 의복, 가솔린, 외국 여행, 심지어 사탕까지도 배급되었다. 1946년에는 빵도 배급되기 시작했다." "그 통제들 중 여럿은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재차 강요되었고 영국에서 기본 식량 배급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한참 늦은 1954년에 가서야 종결되었다."(273-4)


"동유럽과 서유럽의 중간 계급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의 미래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 열광에는 프롤레타리아, 즉 육체 노동자 계급에 대한 독특한 열등감 콤플렉스가 수반되었다. 종전 직후에는 숙련 노동자의 수요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집단적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생생한 대공황 시기와는 현저히 대조적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산업 노동과 산업 노동자의 전반적인 지위 상승으로 나타났다.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당들에게는 명백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자신들의 사회적 기원을 알고 당혹스러웠던 중간 계급 출신의 교육받은 좌익 성향 남녀들은 공산주의에 투신함으로써 불편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새로운 시작에 전념하고, 실제든 상상의 산물이든 노동자 공동체를 숭배하고, 소련(그리고 모든 것을 정복하는 붉은 군대)을 찬양함으로써 전후의 청년 세대는 자신들의 사회적 기원과 국민적 과거에서 떨어져 나왔다."(334-5)


"프랑스에서 폭력적 해결에 대한 호소는 단지 근래의 경험을 전방으로 투사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유산의 흔적이기도 했다. 부역과 내통과 반역의 고발, 처벌과 새로운 출발의 요구는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서 깊은 프랑스의 전통을 재현한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서유럽의 어느 국민 국가보다도 더 지식인 계층이 폭력을 공공 정책의 도구로 인정하고 나아가 숭배하기까지 한 나라였다." "사르트르와 당대인들이 공산주의 폭력은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이요 '역사의 산파'라고 역설했을 때, 그 사람들은 스스로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관습적이었다."(353-4) 공산당들은 '반파시즘'이라는 도덕적 수단을 활용하여 반대파를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파시스트, 나치, 프랑코 당, 민족주의자)은 우파이고, 우리는 좌파다. 그 사람들은 반동이며, 우리는 진보다. 그 사람들은 전쟁을 대표하며, 우리는 평화를 대변한다. 그 사람들은 악의 세력이며, 우리는 선의 편이다."(360)


"스탈린의 사망으로 대부분의 동유럽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품었던 열정은 그 열정이 가장 강력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수정 공산주의'나 '개혁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몇 년 더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공산 국가들 내부의 분열은 이제 공산주의와 그 적 사이의 분열이 아니었다. 중대한 차이는 당국과 다른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냉전의 단층선은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가 아니라 동유럽과 서유럽 각각의 내부에 생겼다."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 체제와 얼마나 친밀한가에 따라, 다시 말해 공산주의 덕분에 이러저러한 형태로 실질적인 사회적 이익을 맛본 사람들과 공산주의 때문에 차별과 실망과 억압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었다. 서유럽에서도 동일한 단층선에 따라 지식인들이 양 편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이론상의 공산주의에 대한 열광은 실제 공산주의의 직접 경험과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었다."(338-9)


1950년대 들어 서유럽은 "스탈린이 사망하고 한국 전쟁이 종식되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정치적으로 대단히 안정된 시기에 진입했다." "서유럽인들이 새로이 누린 안녕은 냉전의 불확실성 덕분이었다. 정치적 대결이 국제화하고 그 결과 항상 미국이 개입하게 됨으로써 국내의 정치적 갈등에서 가시를 빼내는 일이 가능해졌다. 과거였다면 거의 확실하게 폭력과 전쟁으로 이어졌을 정치 문제들─해결되지 못한 독일 문제,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 사이의 영토 분쟁, 피점령국 오스트리아의 미래─이 모두 강대국의 대결과 협상이라는 맥락 속에서 억제되고 적절하게 처리되었다. 강대국들의 논의에서 유럽은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403)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핵 무장과 유럽 대륙의 안정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소련의 전략적 관점에서도 중부 유럽과 서유럽에서 재래식 무기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점차 관심사에서 멀어졌다."(412)


# 미국의 유럽 철수가 무산된 이유

1. 영국과 프랑스가 핵무기 통제권을 유럽의 통합 방위 기구에 양도할 의향이 없었다.

2. 양 진영을 연결하는 베를린을 관리, 통제해야 했다. 소련은 베를린에서 의도적으로 긴장을 조성하여 서독의 재무장을 저지하고 자신의 동유럽 지배권을 보장받고자 했다. (1961년 8월 19일, 베를린 장벽 건설 시작)


"개혁적인 기독교민주당, 의회의 좌파, 물려받은 이데올로기적 분열이나 문화적인 분열을 정치가 양극화되고 불안정해질 때까지 밀고 나가지는 말자는 폭넓은 합의, 시민의 비정치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 정착된 현상의 뚜렷한 특징이었다."(437) 대표적으로 전후 독일에서 "중앙 정부의 권한은 이전 시대와 비교할 때 상당히 제한되었다. 프로이센 전통의 권위주의적 정부에 히틀러 등장의 책임을 돌렸던 서방 연합국이 재발 방지를 위해 중앙 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반면 연방 하원은 선출된 수상과 그 정부를 아무 때나 내쫓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이 보장될 만큼 의회의 지지를 충분히 얻는 차기 후보를 미리 준비해야만 했다. 이러한 제약은 지난 시절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징이었던 정치 불안과 허약한 정부의 반복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콘라트 아데나워와 그를 뒤이은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같은 강력한 수상의 장기 집무와 권위에 기여하기도 했다."(439-40)


"아데나워 시대의 독일이 좋아한 자기 이미지는 희생자였다. 말하자면 세 번이나 희생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첫 번째는 히틀러에게 당했다." "두 번째는 적들의 손에 당했다. 폭격에 망가진 전후 독일의 도시 풍경은 전장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도 독일인은 적들의 손에 끔찍한 고초를 당했다는 생각을 부추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후 선전의 악의적인 '왜곡'에 당했다. 전후의 선전은 의도적으로 독일의 손실은 축소한 반면 범죄는 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고 있었다."(446-7) 동유럽 각지에서 추방당한 독일인들과 퇴역군인들이 희생자 정서를 옹호하는 주요 세력이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아데나워의 태도는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신중하게 침묵을 지키는 편이 진실을 공개하여 대중을 자극하는 것보다 낫다는 점을 명백하게 인식했다. 그 세대의 독일인들은 도덕적으로 지나치게 많이 타협했기 때문에 침묵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없었다."(449)


붉은 군대가 아니라 "서방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데 대한 초기 안도감이 서서히 약해지자 숨어 있던 다른 감정들이 드러났다. 힘들었던 전후의 연합국 점령기는 나치 시대의 생활과 불리하게 대비되었다. 냉전기에 일부 사람들은 미국이 소련과의 갈등은 '자신들의' 몫인데도 독일을 그 중심에 두어 위험에 노출시켰다고 비난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 특히 가톨릭이 우세한 남부의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가 등장한 원인을 서방이 끼친 '세속화'의 영향에 돌렸으며, 독일이 근대의 세 가지 악, 즉 나치즘과 공산주의와 '아메리카니즘' 사이에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서독이 서방 동맹의 동쪽 변경에서 점점 더 두드러짐에 따라 나치 독일이 소련의 아시아 대군에 맞서 유럽의 문화적 보루로서 자임했던 역할이 은연중에 상기되었다."(453) "귄터 그라스 같은 사람들은 독일이 정치에서 개인의 재산 축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사실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민적 책임에 대한 부정을 읽어냈다."(457)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국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동, 아메리카에 보유한 식민지와 제국의 재산은 유럽 전쟁에서 당한 피해와 굴욕을 진정시키는 진통제였다."(460) 그러나 "전후 첫 번째 프랑스 공화국은 다른 무엇보다도 식민지에서 벌인 싸움 때문에 몰락했다." "제4공화국은 (알제리를 포기하는 데) 불만을 품은 군대가 없었더라도 역사상 최악의 군사적 패배와 수치스러웠던 4년간의 점령을 겪은 지 꼭 10년 만에 맞이한 그러한 도전을 견뎌 내느라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478) "드골이 선택한 영역은 외교 정책으로서 개인의 취향과 국가 이성이 똑같이 강조한 영역이었다. 그는 프랑스가 연속적으로 겪은 굴욕에 오랫동안 과민했는데, 1940년에 적국 독일에 당한 굴욕보다 그후 동맹국 영미에 당한 굴욕에 더욱 민감했다."(480) "드골이 20세기로부터 배운 교훈은 프랑스는 유럽의 사업에 투자하고 그것을 프랑스의 목적에 유리하게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483)


"수에즈 위기에서 얻은 첫 번째 교훈은 영국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영국은 군사적 자원과 경제적 자원이 부족했고, 그 한계가 너무나 명백하게 증명된 뒤라서 더 강화된 독립 요구에 대면할 가능성이 높았다." "1950년에 겨우 여덟 개 국가였던 영연방 회원국은 1965년에 스물한 개 국가로 늘었고, 향후 더 늘어나게 된다." "영국 사회의 절대 다수가 보기에 수에즈 위기가 준 두 번째 교훈은 영국이 다시는 워싱턴의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미국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중요한 순간에 미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전략의 재조정은 영국과 유럽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492-4) 이제 영국의 정치가들에게 "나라의 미래는 어떤 식으로든 영국 해협 건너편에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영국이 유럽이 아니라면 다른 어디에서 국제적 지위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498)


한편 같은 시기에 벌어진 헝가리 봉기는 "이후 세계의 형성에 파괴적인 충격을 가져왔다. 우선 헝가리 봉기는 서방 외교관들에게는 실례로 배우는 교훈이었다. 그 때까지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동유럽의 위성 국가들을 소련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저항 정신'을 꾸준히 격려했다." "1953년 베를린 폭동 이후, 소련이 확고하게 장악한 동유럽에 대한 '불개입'은 서방의 유일한 동유럽 전략이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반란자들은 이런 내막을 알 수 없었다."(525) "크렘린이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헝가리 당이 권력의 독점, 즉 '당의 지도 역할'을 포기했다는 사실이었다(폴란드의 고무우카는 이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소련의 관행에서 그처럼 이탈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끌어들일 날카로운 비수로서 여러 곳의 공산당에 저주를 퍼붓는 행위였다. 다른 위성 국가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너지의 퇴위를 결정한 흐루시초프에게 쉽게 동조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526-7)


"공산주의는 이제 혁명이 아니라 탄압과 영구히 결부되었다. 서방의 좌파는 40년 동안 볼셰비키의 폭력을 혁명적 자신감과 역사의 진보를 얻는 비용으로 용서하고 심지어 찬양하면서 소련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서방 좌파의 정치적 환상을 그럴듯하게 보여 주는 거울이었다. 1956년 11월, 그 거울은 박살났다."(530)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공산주의 체제의 동유럽 주민들이 이제 침묵했고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흐루시초프 시대의 소련 지도부는 조만간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지역에─기이하게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 헝가리에─일정 정도의 자유화를 허용했다." "누구에게도 공산당을 신뢰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 지도자들을 신뢰하라는 요구는 더욱 없었다. 다만 최대한 반대 표명을 자제하라는 요구만 있었을 뿐이다. 국민의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등장한 '굴라시 공산주의' 덕에 헝가리는 안정을 되찾았다."(531-2)


"서유럽 전역에서 정부와 고용주, 노동자는 서로 협력하여 정부의 대량 지출, 누진세, 임금 인상 억제라는 선순환을 만들어 냈다. 앞서 보았듯이 이러한 목표는 이미 전시 또는 전후에 계획 경제와 어떤 형태로든 '복지 국가'가 필요하다는 합의가 도출됨으로써 분명해졌다. 따라서 그 목표는 정부 정책과 집단적 의지의 합작품이었다. 그러나 그 미증유의 성공을 촉진했던 조건은 정부 활동의 직접적인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유럽 경제의 기적과 뒤이은 사회적, 문화적 격변을 촉발시킨 것은 유럽 인구의 급속하고 지속적인 증가였다."(543) 이와 더불어 "단기 체류자와 국내 이주자, 국가 간 이주자, 해외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이주자의 수를 전부 합하면 약 4,000만 명에 이른다. 유럽의 대호황은 이처럼 취약하고 대체로 조직되지 않은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자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간 부문은 저임금의 말 잘 듣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유입된 까닭에 대단히 큰 이익을 보았다."(554)


"유럽에서 (경제 호황과 맞물려 나타난) 미국 경제의 존재감은 직접적인 경제 투자나 여타 경제 수단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 똑같이 영향을 미쳤던 소비자 혁명에서 감지되었다. 유럽인은 이제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던 전화기, 백색 가전, 텔레비전, 사진기, 청소 용품, 포장 식품, 화려하면서도 저렴한 의류, 자동차와 차 부속품 등 엄청나게 많은 제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러한 풍요와 소비는 생활양식, 즉 '미국식 생활양식'이었다. 젊은이들에게 '미국'의 매력은 그 과감한 현대성에 있었다. 미국은 추상명사로서 과거의 반대말을 뜻했다. 거대했고 개방적이었으며 번영했다. 그리고 젊었다."(578) "미국 문명과 그 모든 표현을 원칙적으로 불신하고 혐오하는 반미주의는 전형적으로 문화 엘리트에 국한되었다. 문화 엘리트의 영향력 때문에 반미주의는 실제보다 더 넓게 확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580)


# 풍요의 시대(1950~1973)

1. 농업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 하락

2. 정부와 기업, 노동자들의 협상과 타협

3. 포괄적인 공공 복지 혜택

4. 출생율 급증과 영유아 사망률 하락 : 청소년이 별개의 소비자 집단으로 등장(다양한 의상, 대중음악 산업 활성화)

5. 완전고용에 가까운 실업률 

6. 국경을 넘는 대규모 노동력 이동 : 점차 비유럽 이민 억제

7. 소비혁명 : 가처분 소득 증가로 상품 구매 증가와 슈퍼마켓 급증

8. 냉장고, 세탁기,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대중화(TV는 1960년대 이후 대중화)

9. 운송 혁명 : 자동차 급증(철도 노선 감축)과 교통체증 심화

10. 관광 사업 : 유급 휴가와 여가 선용(휴양지, 야영)

11. 미국 문화와 생활양식 수용


"그때는 완전 고용의 시절이었다. 실제로 완전 고용의 유지는 이 시기 모든 영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목표였다. 따라서 인력과 장비가 놀아 썩어 갔던 1930년대의 끔찍한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단호한 결의는 성장이나 생산성, 효율성 등 모든 고려 사항을 제압했다. 노동조합은 그리고 특히 노동조합의 지역 대표자인 공장 대표자는 전후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했다. 노동 계급의 전투성의 징표인 동시에 경영진의 무능함의 징표였던 파업은 전후 영국 산업 생활에서 고질적인 현상이었다." "직물, 광업, 조선, 강철, 엔지니어링 공장들은 모두 전후에 개혁과 구조 개편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산업들이 비효율적인 작업 관행을 공격하기보다는 노동조합의 편의를 도모하기로 결정했듯이, 영국의 공장 관리자들은 새로운 시장에서 새로운 제품으로 새로이 출발하기보다는 차라리 적은 투자, 연구 개발의 제한, 저임금, 고객층의 감소라는 악순환 속에서 움직이기를 선택했다."(588-9)


"전후 유럽의 일반적인 합의 속에는 독특한 시각, 즉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시각이 존재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언제나 잡종이었다. 실제로 좌우의 적들이 한가지로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면서 제기했던 논거가 바로 잡종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론상 끝없는 탐색의 실천이었던 사회민주주의는 20세기 초 유럽 사회주의자들 세대에 허용된 통찰력의 결과였다. 즉 현대 유럽의 심장부에서 19세기의 사회주의 몽상가들이 예언하고 계획한 근본적인 사회 혁명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폭력적인 도시의 변란이라는 19세기의 모범은 산업자본주의의 부정의와 비효율을 해결하는 방책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도 없었다. 또한 폭력적 변란은 차고 넘쳤다. 모든 계급의 현 상태는 점진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진정 개선될 수 있었다."(595) 사회민주주의는 지향점은 다다를 수 없는 경제적 이상향이 아니라 다다를 수 있는 좋은 사회의 건설이었다.


196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유산 중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도덕적 파멸과 구분되는 학문적 부분에 관한 관심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하여 "룩셈부르크와 루카치, 그람시, 기타 잊혀진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술이 발굴되면서 마르크스 자신도 재발견되었다." 구좌파가 소유한 "'옛' 마르크스는 레닌과 스탈린의 마르크스, 즉 민주 집중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미리 내다보고 그 정당성을 인정해 준 신실증주의적 저술을 남긴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과학자였다." 반면 신좌파는 "청년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 즉 1840년대 초의 형이상학적 논문과 초고에서 그 전거를 찾았다." 그들이 보기에 청년 마르크스는 "'소외된' 의식을 바꿔서 인간을 자신의 진정한 조건과 능력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 자본주의 사회의 우선순위를 역전시키고 인간을 자기 존재의 중심에 두는 방법, 간단히 말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에 몰두해 있었다."(660-1)


"마르크스와 같은 19세기 초 낭만주의자가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인간성을 빼앗는 산업 사회의 충격에 맞서 제기했던 불평은 탈산업 사회의 서유럽 현대인들이 '억압적 관용'에 맞서 보인 저항에 매우 적합했다. 번영하는 자유주의적 서구의 일견 무한했던 유연성, 즉 스펀지처럼 열정과 차이를 흡수하는 능력은 비판자들을 격분시켰다. 비판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억압은 부르주아 사회에 고유한 특성이었다. 억압은 진정으로 사라질 수는 없었다. 거리에서 없어진 억압은 분명 '어디론가' 옮겨갔음에 틀림없었다. 억압은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특히 그들의 신체 속으로 이전되었다." " 마르쿠제의 설명에 따르면 서구 소비 사회는 이제 더 이상 가진 것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경제적 착취에 직접 기대지 않았다. 대신 인간의 에너지를 충족(주로 성적인 충족)에서 상품과 환상의 소비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성과 정치의 융합이 "집단 투쟁보다 개인의 욕구를 강조한 것은 객관적으로 반동적이었다."(661-3)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작업을 멈춘 "수백만 명의 남녀는 적어도 한 가지는 학생들과 공유했다. 자신들의 특수한 지엽적 불만이 무엇이었든,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생존의 조건에 좌절했다. 이들은 일터에서 더 나은 계약을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서 무엇인가 변하기를 원했다." "프랑스는 번창했으며 안전했고, 따라서 몇몇 보수주의 평론가들은 저항의 물결이 불만이 아니라 단순한 권태 때문에 생겨났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르노 작업장처럼 노동 조건이 오랫동안 불만스러웠던 공장들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진정한 좌절감이 존재했다. 권력을 한 곳에, 소수의 제도에 집중시키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프랑스의 관습이었는데, 제5공화국은 이를 한층 더 강화시켰다. 프랑스는 극소수 파리 엘리트가 운영했고 또 그렇게 보였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배타적이었으며 문화적으로 특혜를 입었고 거만했으며 계급 조직을 이루었고 냉정했다. 심지어 그 속에 있는 자들도 숨이 막히는 것처럼 느꼈다."(672)


"반군국주의는 독일 학생 시위에서 연방공화국과 나치 전임자를 싸잡아 비난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융합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가 강해지면서 서독의 군사적 스승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소수 급진파의 수사에서 늘 '파시스트'였던 미국은 이제 훨씬 더 폭넓은 권역의 적이 되었다. 실제로 베트남에서 범죄적 전쟁을 벌였다고 '아메리카Amerika'를 공격하는 것은 독일의 전쟁 범죄에 관한 논의의 대용물이었다." "더 불길했던 것은 이를 통해 급진 좌파가 진정한 희생자는 독일인 자신이라는 주장을─이제까지는 극우파와 동일시되었던 주장─재차 끌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파시스트 미국을 비판하는 구호 속에서 나치 강제수용소는 단지 제국주의 범죄의 편리한 은유로 활용되었다. 1966년 일단의 과격파는 다하우 수용소 담벼락에 이런 구호를 긁어 놓았다. "베트남은 미국의 아우슈비츠다."(684-5)


공산주의 사회 혁명의 물결이 도달한 체코에서는 신중한 기다림 끝에 "공적인 복권과 스탈린이 저지른 과오의 조심스러운 시인, 온건한 경제 개혁의 가능성 등이 서로 결합되어 당의 공적 생활 통제에 훨씬 더 심각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63년에 시작된 경제 개혁을 작업 현장의 노동자들이 누구나 다 환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족쇄가 완화될 가망성이 엿보이자 작가와 교사, 영화감독, 철학자들 사이에서 비판과 희망, 기대가 눈사태처럼 쏟아져 나왔다."(715)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건설 시기'였던 이 기간은 이제 지식인들의 비난을 위한 공정한 시합장이 되었으며, 1967년 여름에 개최된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쿤데라와 바출리크, 시인이자 극작가인 파벨 코호우트, 그리고 젊은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당시의 공산당 지도부가 물질적, 도덕적 파멸을 초래했다고 공격했다."(717)


1968년 1월 당 제1서기로 선출된 두브체크는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여 같은 해 3월, "당 강령에서 '민주공산주의에서 유례 없는 실험'이라고 칭한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바로 사람들이 즐겨 부르듯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다."(721)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가들은 1956년 헝가리의 교훈을 오해했다.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 임레 너지의 실수는 바르샤바조약기구에서 탈퇴하고 헝가리의 중립을 선언한 데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굳건히 머물러 있고 확실하게 모스크바와 연합하고 있는 한, 레오니트 브레주네프와 그의 동료들은 분명 자신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었다. 그러나 1968년 소련은 군사적 안정보다는 당의 권력 독점 상실을 더 걱정했다. 일찍이 3월 21일 소련 정치국 회의에서 우크라이나 당 지도자 페트로 셀레스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가 자국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불평했다."(724)


프라하의 봄을 좌절시킨 "1968년 이후 소련 지역의 안전은 필요하면 무력을 이용하겠다는 모스크바의 의지가 새롭게 평가됨으로써 확고하게 보증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기초가 대중의 동의나 개혁된 공산당의 정통성, 나아가 역사의 교훈이라는 주장은 이때 이후로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개혁할 수 있다는 환상, 스탈린주의는 잘못된 길로 들어섰으며 여전히 교정될 수 있는 실수라는 환상, 민주적 다원주의의 핵심적 이상이 마르크스주의의 집산주의 구조와 양립할 수 있다는 환상. 이러한 환상들은 1968년 8월 21일에 탱크에 짓밟혔고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730-1) "1960년대가 정치 의식이 고양된 시기였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자기 기만이었다." "그러나 60년대는 실제로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 반대 이유로 극히 중요했던 10년이었다. 반으로 나뉜 대륙의 양쪽 유럽인들 모두가 이데올로기 정치에서 결정적으로 이탈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73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 30년 세계화가 남긴 빛과 그림자
브랑코 밀라노비치 지음, 서정아 옮김, 장경덕 감수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전 세계 소득 분포의 약 40분위에서 60분위에 이르는 사람들은 1988~2008년 사이에 실질 소득이 80% 가까이 중가했다. 세계화의 수혜자라 해도 무방한 A그룹은 대부분 아시아 신흥국가의 국민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글로벌 신흥 중산층emerging global middle class'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 중산층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따라서 소득과 교육 측면에서 고소득국가의 중간계층을 칭하는 중산층이라는 용어는 이들을 가리키기에 적합하지 않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실질소득이 거의 증가하지 않은 B그룹은 OECD 회원국인 고소득국가 국민이다. 이들은 대체로 그 나라 소득 분포의 하위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을 '고소득국가의 중하위층lower middle class of the rich world'이라 부르기로 한다. 단연코 세계화의 승자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정치가들이 사회보장제도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이점이 크다며 설득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바로 세계화의 패자가 된 것이다."(30-1)


압도적으로 고소득국가 국민이 많은 세계 최상위 1%는 같은 기간 동안 실질소득이 상당한 폭으로 증가했다. "C그룹의 사람들을 '글로벌 금권집단global plutocrat'이라 부르자." B그룹과 C그룹 간의 격차는 "고소득국가에서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간의 소득 격차가 확대됐으며 고소득국가에서 이미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세계화로 이득을 취했다는 것을 시사한다."(33) 실질소득의 증가분을 상대적 변화(백분율 증가)가 아니라 절대적 변화(달러 증가액)로 따지면 결과는 더욱 뚜렷하다. "1988년부터 2008년까지 전 세계 소득 증가분을 100이라 치자. 이러한 절대적 증가분 중 44%가 세계 상위 5%의 손에 들어갔다. 또한 약 20%가 최상위 1%의 차지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앞서 우리가 세계화의 수혜자로 간주한 신흥국의 '글로벌 신흥 중산층'이 얻은 것은 (20분위로 나눌 때) 분위별로 전체 소득 증가분의 2~4%에 그치며, 모두 합해도 약 12~13%에 불과하다."(44)


"쿠즈네츠 가설은 소득 수준이 매우 낮을 때는 심하지 않던 불평등이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증가하다가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다시 감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고소득국가의 소득 불평등 증가는 쿠즈네츠 가설을 부정한다.(75) "피케티는 (1918~1980년 사이의 소득) 불평등 감소가 전쟁이라는 정치적 힘,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조세, 사회주의 이념과 운동, 경제적 수렴(임금 증가율이 재산소득 증가율을 상회) 등으로 촉발된 특수하고 드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피케티가 보기에 (1차 세계대전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정상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불평등 증가를 낳는다. 이러한 이론으로 쿠즈네츠 곡선의 하강부분과 상승 부분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 피케티는 쿠즈네츠 곡선이 쿠즈네츠가 제안한 역U자가 아니라 U자 형태라고 본다." "그러나 시야를 훨씬 더 이전인 18세기와 19세기까지 확대하면 피케티의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소득 불평등 증가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77)


"평균소득이 매우 낮은 사회가 전쟁에 관여하게 되면 그 결과는 두 가지 가능성뿐이다. 첫째, 부유층이 비용 대부분을 부담함에 따라 불평등이 감소한다. 둘째, 저소득층의 소득이 최저 생계수준 미만으로 떨어지면서 인구가 감소한다. 그런데 지배층이 제아무리 착취를 일삼고 저소득층의 운명에 무관심한 사회라 하더라도 두 번째 해결책을 감행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추정하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또한 인구가 감소하면 징집할 수 있는 신체 건강한 남성의 숫자도 줄어든다는 점에서 두 번째 해결책은 자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첫 번째 해결책이 선호되며 우리가 산업혁명 이전 시대의 사회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흔히 불평등이 감소했을 것으로 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산업혁명 이전에는 불평등이 (쿠즈네츠 가설을 확장 보완한) 쿠즈네츠 파동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고 본다."(81)


"산업혁명이 소득 불평등의 추이에 시사하는 바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총 소득이 증가하면 다른 사람의 소득이 최저 생계수준 아래로 떨어지지 않더라도 인구 가운데 일부의 소득이 급증한다. 그 결과 불평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화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적어도 최저 생계 소득 이상을 벌어야 한다고 볼 때 총 소득 증가는 그 자체로 불평등이 증가할 '여지'를 남긴다." "둘째, 산업혁명 이후 불평등과 평균소득 사이에는 그 이전처럼 평균소득이 고정되었던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상관관계가 성립되었다. 나는 쿠즈네츠 가설과 마찬가지로 산업혁명 직후에 증가하기 시작한 불평등이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 고소득국가에서 절정에 이른 원인을 (한층 더 다각화된 제조 부문으로의 이동 등) 구조적 변화와 도시화로 본다. 그 이후로는 쿠즈네츠가 제시한 대로 좀 더 숙련된 노동력이 공급되었고 재분배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자본수익률이 낮아짐에 따라 불평등이 감소했다."(82-3)


"1차 세계대전 이후 불평등을 완화시켰던 요인은 1980년대에 들어 효력을 잃었다." "불평등이 심화된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고숙련 근로자가 저숙련 근로자에 비해 신기술로 훨씬 더 많은 보상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유층 친화적 정책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었다. 그러한 정책들이 기술혁명과 세계화와 상관없이 외생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잘못된 시각이다." "오늘날에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보다는 그와 정반대로 자본과 자본가들에게 조국이 없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자본을 통제하고 자본에 세금을 부과하기가 전에 없이 어려워졌다. 그 때문에 불평등이 크게 심화되고 말았다."(84-6) "평균소득의 증가는 경제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대리지표에 불과하다. 우리가 관찰하는 불평등의 변화는 경제적 요인과 (뉴딜 정책, 노조의 협상력, 세율 변화, 세계화 등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다."(108)


"고소득국가에서 1980년대 무렵에 시작된 불평등 상승 국면은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불평등이 감소하고 낮은 수준에 머무른다는 쿠즈네츠의 원래 가설에 부합하지 않는다. 내가 쿠즈네츠 순환이나 파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선진국이 현재 보이고 있는 불평등 상승 국면을 제2 쿠츠네츠 파동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제1 쿠즈네츠 파동과 마찬가지로 제2 쿠즈네츠 파동을 유발한 요인은 기술혁신과 변화, 자본의 노동력 대체가 빚어낸 '제2의 기계시대', 부문 간 노동력 이동이다. 제1 쿠즈네츠 파동이 나타났던 시기에는 노동력이 농업 부문에서 제조 부문으로 이동했으며 따라서 농촌지역에서 도시지역으로 인구가 이동했다. 제2 쿠즈네츠 파동의 경우 제조 부문에서 서비스 부문으로 노동력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경제정책이 부유층 친화적인 노선으로 바뀐 것도 제2 쿠즈네츠 파동을 유발한 요인이다."(130-1)


# 제2차 쿠즈네츠 파동의 상승(불평등 심화) 요인

1. 정보 기술의 발달(2차 기술혁명)

2. 서비스업의 노조 조직율 하락

3. 세계화로 가용 노동력 급증과 수월한 자본 이동 → 노동의 협상력 약화

4. 기타 : 동류혼homogamy 증가, 도덕규범, 임금규범 변화


# 쿠즈네츠 파동의 하강을 이끄는 양성 요인

1. 세율 인상과 누진 과세 같은 정책 변화

2. 교육과 숙련도 간의 경주

3. 기술 혁명 초기 단계에 발생한 지대의 소멸

4. 글로벌 차원의 소득 수렴 (저소득국가의 부상)

5. 저숙련 편향적 기술 진보 (저숙련 노동자의 생산성 향상)


"19세기 초반만 해도 지니계수로 측정한 글로벌 불평등과 미국의 불평등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쳐 뉴딜 정책이 시행된 이후에는 글로벌 불평등과 미국의 불평등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글로벌 불평등은 속도는 전보다 느려졌지만 계속해서 증가한 반면에 미국의 불평등은 상당한 폭으로 감소했다. 특히 자본주의 황금기로 간주되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그랬다. 두 가지 불평등이 갈림길을 걷는 양상은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지만 이번에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1980년대의 두 번째 전환기 이후 글로벌 불평등은 중국의 성장에 힘입어 정체상태로 돌아섰다가 감소하기 시작한 반면에 미국의 불평등은 증가하기 시작했다."(171-3)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까지 "가장 큰 소득 평준화 역할을 한 것은 중국이었으며 2000년 이후로는 인도도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169)


미국내 불평등 증가라는 부정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역 요인이 어떤 사람의 생애소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좋은 지역(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시민권 프리미엄citizen premium'을 누리고, 그렇지 못한 지역(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시민권 페널티citizen penalty'를 감수해야 하는 세상이다."(178) "나는 세계 최빈국인 콩고를 '누락'된 나라로 보고 회귀분석을 했다. 다시 말해 각국의 시민권 프리미엄을 콩고에 비해 얼마나 더 많은 소득을 얻고 있는지로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국가 평균 시민권 프리미엄을 산출한 결과 미국은 9,200%, 스웨덴은 7,100%, 브라질은 1,300%이며, 예멘은 300%에 불과하다. 이러한 결과는 (회귀분석의 관점으로 볼 때) 국가 백분위 전반의 소득 변동 가운데 2/3가 넘는 부분을 거주국이라는 단일 변수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음을 뜻한다."(183-4)


# 미국의 불평등 가속화 시나리오

1. 생산의 자본 집약도가 높아지면서 자본과 노동의 대체탄력성 상승으로 자본의 몫 증가

2. 자본소득 집중으로 개인 간 소득 불평등 상승

3. 높은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점점 일치하는 현상 심화

4. 3번 집단 내 동류혼 증가

5. (금권정치가 심해지면서) 저소득 친화 정책 폐기, 공공 투자 감소


"국민의 노력이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글로벌 불평등이 발생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에 따르면 고소득국가의 국민이 저소득국가의 국민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경우 그 두 나라 간의 소득 격차는 환경의 차이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민권 지대의 산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이 요인이라는 주장은 두 가지 이유에서 실증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첫째, 우리는 오히려 저소득국가 국민의 근로시간이 더 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둘째, 동일한 노력을 들여야 하는 동일한 직종을 각 나라마다 비교해 보면 국가 간 실질임금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191-2)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중심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가장 포괄적으로 해석한다면 세계화는 생산요소, 상품, 기술, 세계 각국의 아이디어가 단절 없이 이동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도 자본, 상품 수출, 상품 수입은 물론 서비스 무역에도 적용되지만 노동력에는 해당하지 않는다."(196)


# 국제 이주의 네 가지 특징

1. 조국을 떠날 권리와 가고자 하는 나라로 마음껏 이주할 수 없다는 현실의 충돌

2. 생산요소, 상품, 기술,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이동과 달리 노동자의 이동권은 엄격하게 제한

3. 소득 극대화라는 경제학의 원칙이 개별 국민 국가 내부에만 적용되는 관행

4. 국민의 발전이 자국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과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면 장소는 상관없다는 입장의 충돌


"자본주의는 자본소득과 근로소득이 철저히 분리된 형태에서 이 두 요소 사이에 음(-)의 상관관계가 성립되는(근로소득자가 자본소득을 거의 올리지 못하는) 변종으로 변화했다가 양(+)의 상관관계가 성립되는 '신新자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253) "이러한 경향은 능력주의meritocracy처럼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뒤엎는 데도 크나큰 정치적 고충이 따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신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의 주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원칙으로 하는 고전 자본주의와는 판이하다. 신자본주의에서는 부유한 자본가와 부유한 근로자가 일치한다. 이러한 구조는 부유층이 일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회적으로 널리 용인된다."(255) 여기에 부유층의 막대한 정치 자금 기부와 부유층 친화정책이 상호 작용하면서 "개인의 정치적 중요성이 소득 수준에 비례하며 1인 1표 시스템이 '1달러 1표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 사실 1달러 1표 시스템은 기존의 소득 분포를 정치 차원으로 가져온 데 불과하다."(258)


"제2 쿠즈네츠 파동의 상승 곡선을 탄 고소득국가에서 불평등 증가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중산층 공동화와 부유층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이 그에 대한 인과응보로 나타날 대중의 계급적 저항과 겹치면 포퓰리즘과 자국민 우선주의nativism('토착주의'라고도 한다)를 낳는다. 포퓰리즘도, 금권정치도 고전적 의미의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불평등이 서구의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위협을 끼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259) "중산층의 숫자 감소와 경제권력 약화는 경제와 정치에 다양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교육이나 의료같이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 서비스에 대한 지원이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유층은 사회 서비스의 공공 지원을 중단하기를 바랄 것이다." "부유층은 공교육보다는 치안 강화나 마르크스가 말한 감시 노동guard labor에 공공 재정을 사용하는 편을 선호할 것이다."(267-8)


"부유층의 민주주의 억압 전략 가운데 두 번째는 마르크스식으로는 허위의식의 주입이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으로는 헤게모니의 창출과 비슷하다." "여기에서 허위의식이란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어떤 의도에 휘둘려 스스로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따지기보다 사회, 종교, 다른 사안에 관심을 쏟는 것을 뜻한다. 그러다 보면 서로 불화할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투표를 할 때 경제 사안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으며 때로 이민, 종교, 낙태 등과 같은 사안도 중시한다. 그러나 정치와 언론에 투입되는 사적인 자금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 두 가지 투자가 매우 비슷한 목적을 띤다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허위의식은 이념적 '마트라카주'(matraquage, 곤봉으로 머리를 때린다는 뜻의 프랑스어로 언론을 통한 집중 공세나 세뇌를 뜻함)로 창출된다." "다시 말해 문화 전쟁에는 경제권력이 부유층으로 이동하는 실제 현상을 눈가림하는 기능이 있다."(272-3)


"국민건강서비스 삭감, 공교육 축소, 정부서비스 이용료 인상, 은퇴 연령 상향 조정, 0시간 일자리zero hour jobs(출근은 해야 하지만 노동과 수입을 보장받지 못하는 직종) 도입에 따른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 등 사회보장제도가 받은 수많은 공격은 결국 중산층에 대한 공격이다."(279) 이와 더불어 금권정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면서 "유럽에서는 포퓰리즘의 부상과 더불어 세계화에 대한 노출 정도가 줄어들고 있다. 각국이 이주 장벽을 세우고 물밀듯이 밀려드는 자본 유입이나 상품과 서비스의 수입에 대항해 보호조치를 시행하는 한편, 시민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재정의[기본권이 신성불가침의 권리가 아니라, 국민 다수의 동의 여부에 좌우되는 권리라는 식의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금권정치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세계화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이고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면모는 유지하되 세계화에 대한 노출 정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다."(283)


우리가 '자율성, 존엄, 자유, 권리 등의 불평등'을 뜻하는 "실존적 불평등의 해소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적어도 세 가지는 있다. 첫째,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곧바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변화를 일으켜야 유리한 집단끼리 뭉쳐 국민이 분열될 수 있다. 다양한 집단이 스스로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춤에 따라 공동 전선이 무너지는 것이다." "둘째, 실존적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면 근본적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가령, 성매매 합법화 논의의 관건은 "성 불평등 해소에 치중하기보다는 성매매의 경제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데 있다." "셋째, 실존적 평등은 정치적으로 비교적 손쉽게 추구할 수 있는 일이다(물론 보상도 크지 않다).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조건의 전반적인 평등화를 이루어내려면 다양하게 분화된 집단 간의 법적 평등을 달성해야할 뿐 아니라 소득과 부의 평등을 크게 확대해야 한다."(30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과 전쟁
아자 가트 지음, 오숙은.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현존하는 대부분의 수렵채집인은 거주 환경의 낮은 생산성 때문에 인구 밀도가 매우 낮았다. 1제곱마일당 1인보다 낮은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그보다 훨씬 낮은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자주 이동했고 소유물이 극히 적었으며, 따라서 굉장히 평등주의적이었다. 노동과 지위는 주로 성과 연령에 따라 구분되었다." "농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렵채집인은 생태학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환경을 포함해 전 세계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하에서 수렵채집인의 인구 밀도, 생존양식, 이동성, 사회질서 등은 그 이후의 수렵채집인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34) "인구 밀도가 낮고 산출이 적은 땅에서 꽤나 옮겨다니며 살았다는 사실이 곧바로 경쟁과 텃세가 없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종들은 자신들의 서식지를 금세 채우고 곧 그 경계를 넓혀나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빈 공간이란 없다. 이동과 방랑 생활은 국한된 한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39)


"루소파 인류학자들이 상상했던 자유로운 방랑과는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그린란드 에스키모와 비슷하게) 사실 '제한받는 방랑자' 또는 '중심 기지가 있는 방랑자'로서 조상들의 고향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이런 영역은 토템과 신화로써 승인되었고 무단 침입은 중대한 범죄로 여겨졌다. 낯선 이들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침입시에는 쫓겨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40-1) "야생의 가장 풍부한 틈새는 주로 늪이나 호수, 삼각주, 강 하구, 해안 등지와 같은 비옥한 물가에 있었다. 그런 몇몇 틈새에서 이른바 복합 수렵 채집 사회가 진화했다. 이는 인구 밀도가 더 높았다는 뜻이다. 또한 지역 집단 내에서 대가족 집단이 더욱 가까이 모여 살고 있었고, 사람들이 전보다 한곳에 더 오래 정주하면서 식량을 보존하고 계절별로 식량을 저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단순한 '징발자'라기보다 '수집자'였다는 얘기다."(50)


"결핍과 굶주림이 전쟁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풍부함과 결핍은 먹여 살릴 입의 수에 상대적일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계속 커질 뿐 만족을 모르는 인간적 욕구와 욕망에도 상대적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경쟁은 결핍은 물론 풍요와 함께 증가하고, 풍요로워질수록 경쟁의 형태와 표현이 복잡해지고 사회적 격차가 벌어지고 계층화가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부유한 남자는 더 많은 아내를 부양할 능력이 있으며 따라서 더 많은 아내를 둘 수 있다." "여성을 둘러싼 경쟁은 치명적인 폭력을 부르는 주된 원인, 때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더욱이 단순한 생계형 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양은 근본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해도, 남들보다 세련되고 풍족한 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양은 사실상 끝이 없다. 그저 고급품 시장으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이른바 과시적 소비가 시작되는 것인데 복합 수렵채집 사회는 이를 경험한 최초의 사회였다."(59)


전쟁이 인간 본성에 내재한다는 관념은 오랜 계보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 성서에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창세기 8:21)이라고 쓰여 있다. 프로이트는 문명이 인간의 원시적 충동이라는 위태로운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이 너무도 어리석고 비이성적이고 자멸적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이론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성생활의 충동과 나란히 파괴적이며 사실상 자멸적인 충동, 다시 말해 '죽음 본능'이 있다고 주장했다."(64-5) 그러나 학계에서 공격성은 "음식이나 성에 대한 근본적 충동과는 전혀 다른 생리학적 메커니즘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진화론적 계산법에서 양분과 성은 으뜸가는 생물학적 목적으로, 전자는 유기체의 존속과, 후자는 번식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반면에 공격성은 으뜸가는 생물학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전술, 그것도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66)


"공격성은 기본적인 욕구라기보다 가능하지만 매우 위험한 하나의 전술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격성을 조절하는 감정 메커니즘들은 정반대로 언제든 껐다 켰다 할 수 있다. '켜짐' 위치에서 공격성을 촉발하는 주요 동기와 충동 뒤에 놓인 감정 요인이 단지 두려움과 적대감 같은 느낌만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이 경쟁하며 정신력과 체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느끼는 전율과 즐거움, 심지어 잔인성과 피에 대한 갈망, 살해의 희열이 싸우는 행위 자체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런 것이 모두 공격성을 부채질하고 지탱하기 위한 감정 메커니즘이다. 한편 '꺼짐' 위치에서 공격성을 억지하고 단념시키는 감정 요인은 두려움, 정신적·신체적 피로, 연민, 폭력에 대한 증오, 유혈극에 대한 혐오 등이다. 그 밖에도 협력과 평화적 행위에 대한 엄청난 감정 자극이 있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해, "공격성은 하나의 기술, 잠재성, 성향, 또는 성질로서만 존재한다."(68-9)


"종내 싸움과 살해가 일어나는 이유는, 비용 대비 효과적인 어떤 방법으로든 낯선 개체의 유전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는 개체들의 노력이 바로 진화적 경쟁의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동물이 같은 종의 개체들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특히 사회적 동물의 경우에는, 같은 종인 집단 내의 성원들이 있는 편이 사냥은 물론 특히 방어에서 그 자신의 성공을 위해 중요하다. 더 일반적으로 모든 동물의 경우를 보면 같은 종의 나머지 성원들 또한 강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제거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의 비용이 진화론적으로 비생산적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요점은 이런 행동 패턴이 파리, 생쥐, 사자, 심지어 인간의 의식적 결정과 복잡한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개체는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는 데 실패해왔고 그들의 부적응 행동을 유발한 부적응 유전자는 선택에서 제외되어 왔다는 것이다."(73-4)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러 등장한 "언어 기술의 발달과 공유 문화 덕에 수백 명을 아우르는 지역 집단이 진화할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지역 집단 자체가 여러 가지 중요한 진화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은 이른바 '낯선 사람들'인 아주 먼 친족보다 중거리 친족(지역 집단)을 편들기에 유리했다. 더 중요하게는 대가족 집단보다는 지역 집단이 훨씬 더 힘이 셌을 것이다. 지역 집단은 힘의 총량이 훨씬 더 컸다. 이는 지역 집단 내에 살지 않는 경쟁자와 무장 분쟁이 벌어졌을 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확실한 이점을 주었을 것이다."(86) "지역 집단은 그들과 달리 지역적으로 집단화되지 않은 사람들(아마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이전의 인류들)과 싸울 때는 분명한 이점을 갖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역 집단을 이루게 되었을 때에는 그만큼 결정적인 이점을 갖지 못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바로 이것이 모든 '군비 경쟁'의 본질이다."(90)


"자원을 둘러싼 투쟁은 대부분 진화론적으로 비용 효과가 높았다. 싸움의 이점도 가능한 대안들(굶어죽는 것을 제외하고)과 나란히 놓고 저울질해봐야 한다. 그런 대안 가운데 하나가 접촉을 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물론 적이 훨씬 강할 때에는 종종 그러는 편이 나았지만 그 전략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이동해갈 '빈 공간'이 대체로 없었다." "더구나 이동이란 집단 성원들에게 매우 익숙한 자원과 위험이 있는 서식지를 떠나서 미지의 환경으로 여행한다는 것을 뜻했다. 수렵채집인들에게 그런 변화는 무거운 형벌이 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외부 압력에 굴복하다가는 희생 패턴이 생길 수도 있었다. 성공에 고무된 외부 집단은 그 압력을 반복하고 심지어 증대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분쟁의 전략은 현재 분쟁이 되는 대상뿐 아니라 미래 관계의 전반적 패턴까지 고려한다. 자립한다는 것은 사실 미래의 분쟁 발생을 줄인다는 것을 뜻한다. 103)


"수렵채집인들의 전쟁에는 그렇게 여성 납치와 강간이 흔히 수반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여성 때문이었을까? 여성 납치와 강간은 수렵채집인들의 전쟁에서 원인이었을까, 부작용이었을까?"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동기 복합체는 어떤 사회의 사람들이 폭력적 경쟁을 벌여 얻고자 하는 희소한 것들이 다양하게 혼합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체 요인과 번식 요인 두가지 모두 있을 것이다."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여성은 대개 전쟁의 강한 동기였고 대개 주요 동기이기도 했지만, 유일한 동기였던 경우는 드물다. 물론 여성이 아주 두드러진 동기가 되는 까닭은 번식의 기회가 실로 매우 강력한 선택 압력이기 때문이다."(108-9) "여성 희소성과 남성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요인은 또 있다. 모든 수렵채집인들(과 농경민들) 사회에서 여女유아살해는 주기적으로 행해진다. 부모는 사냥할 수 있고 (혹은 들판에서 일할 수 있고) 방어능력이 있는 사내아이를 선호한다."(114)


# 분쟁의 2차 원인들 (1차 원인 : 자원과 번식)

1. 지배 : 서열, 지위, 위신, 명예

2. 복수 : 제거와 억지를 위한 보복

  2-1) 안보 딜레마 : 군비 경쟁 가속화

  2-2) 주술 : 초자연적인 믿음, 성스러운 의례, 마법 행위

  2-3) 카니발리즘 : 안보 딜레마와 주술에 대한 두려움의 혼합

3. 순전한 호전성 : 놀이, 모험심, 사디즘, 황홀경


"국가 이전 사회에서 복수 원리는 목숨, 재산, 그리고 훗날 국가가 지배하게 된 것들까지 보호하는 데 훨씬 폭넓게 적용되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의지할 곳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친족, 동맹뿐이었다. 해를 입었을 때 앙갚음 하는 것은 가해자를 절멸시키거나 억지력을 재확립하는 주된 방법이다."(139) "서로에게 이로운 상호협조를 강제하거나 적어도 사람들의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개 그들의 유일한 합리적 선택은 보복의 순환뿐이다. 보복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적인 방책이라 해도, 보복은 최적의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다. 보복은 매우 무거운 비용 부담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보복은 계속될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에서처럼, 무엇보다도 적과의 의사소통이 없거나 잘못되면─적대자 사이에 흔한 악의와 두려움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보복의 순환을 끝낼 거래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143)


상호 증폭되는 복수 원리는 경쟁 및 잠재적 분쟁 대상이 될 수 있는 상대방을 향한 의심과 불안을 부추긴다. 이와 같은 안보 딜레마는 '군비 경쟁'을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군비 경쟁은 참으로 역설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도 많다. 경쟁자를 앞서기 위해 단계적으로 세력을 계속 확대해나가는 노력이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이 경우 상대방은 파멸하거나 크게 약해지고 승자는 이익을 챙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쪽이 한 걸음 나아가면 상대편이 한 걸음 따라잡는다. 결과적으로 그 분쟁에서 서로가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익을 얻지 못한다. 이는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겪은 사건의 이름을 따서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라고 불린다. 양쪽 모두 더 빨리 달려봐도 결국은 서로가 한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147)


"안보 딜레마로 인한 군비 경쟁의 특징은 양쪽 모두의 근본 동기가 방어적이라는 것이다. 양쪽 모두 상대를 두려워하지만, 한쪽이 안보를 강화하려고 내딛는 한 발짝 한 발짝이 상대를 겁주어 비슷하게 나아가게 만들고, 다시 그 역이 성립하면서 상승하는 나선형을 그린다. 다시 한번 이것은 서로에 대한 의심을 연료로 삼는 '죄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 나선을 중단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이번에도 서로의 의심을 줄일 방법을 찾는 것이다. 혼인 연대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전근대 사회에서 사용한 고전적인 방법이었다."(147) "공동의 초자연적인 신앙, 신화, 숭배, 의례는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고 따라서 결속을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자원 면에서 이것들의 직접적인 비용이 얼마가 됐든, 그 비용은 간접적이되 매우 적응적인 '방어비용'으로 여길 수 있다. 더욱이 신앙, 숭배, 의례는 문화의 나머지 요소들과 비슷해서, 어릴 때 사회적 학습으로 내면화된 후에는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152)


"왜 인간은 상호억지를 위협하는 선제공격 능력을 나머지 동물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을까? 인간에게는 가장 두드러진 능력, 바로 도구 제작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욱 치명적이 되며, 도구가 근육과 뼈, 치아를 대신하기 때문에 체격이 더욱 호리호리해진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에렉투스보다 몸이 더 가냘프며,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 또한 대형 유인원들보다 근육이 적다. 한마디로, 인간 공격력의 성장은 자연적 방어력의 꾸준한 쇠퇴와 연관되어 있었다."(186) 분쟁 상황에서는 매복과 기습 같은 비대칭 선제공격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상위 권력의 통제와 같은 안보 메커니즘이 없는 상태에서 당사자들은 다시금 '죄수의 딜레마'의 변형인 '안보 딜레마'에 빠진다." "분쟁 상황 자체가 적대자들로 하여금 원래의 경쟁 동기를 넘어서 주기적으로 분쟁을 확대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다."(191)


"생물학에서 복제자는 유전자로, 세포핵 안에 저장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문화에서 복제자는 행위와 관념─리처드 도킨스의 용어로는 '밈meme'─으로, 살아 있는 두뇌에 축적되며 학습을 통해 두뇌에서 두뇌로 전달된다. 이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주요 차이점 하나가 분명해진다. 전자는 자녀에게만 전해지는 '선천적' 복제자와 관련이 있지만, 후자는 원론상 어떤 두뇌에도 '수평적으로' 복제될 수 있는 획득 형질과 관련이 있다." "문화적 진화가 도약했던 근본적 이유는 생물학적 진화의 최신 기교 가운데 하나가, 다름아닌 크게 향상된 교습과 학습 능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적 진화가 아무것도 없는 빈 서판 위에서 작용해온 것은 아니다. 문화적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에서 하나의 능력으로서 기원했을뿐 아니라, 오래도록 진화한 선천적 성질이 깊이 새겨져 있는 인류의 생리학적·심리학적 '풍경' 위에서 작용해왔다. 212-4)


"끊임없는 진화적 '군비 경쟁'에서 주로 선택에 의해 가동되는 두 진화 형태 모두 시간이 흐를수록 더 복잡한 '설계'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학습과 문화 생성 능력은 그 자체가 생물학적 진화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혁신' 중 하나다. 그후 문화적 진화는 온갖 유형의 복제자들이 번식하고 증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경쟁의 영향력 때문에 더욱 복잡해지면서 생물학적 진화를 계속해왔다. 참여자들이 경쟁에 더욱 능해지고 더욱 '전문적'이 됨에 따라 전체 경쟁은 갈수록 가속화되고 치열해진다. 그들의 적응뿐 아니라 적응 가능성까지 향상되는 것이다." "복잡성의 발생은 그 과정의 점진적 성격에 의해 제한받기도 하지만, '설계 공간'─물리적, 화학적, 유기적, 또는 문화적인─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성향에 의해서도 제한받는다. 따라서 각기 다른 수많은 세계가 진화할 수 있음에도, 비슷한 '제약'으로 인해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비슷한 구조들이 독립적으로 등장해왔다."(216-8)


신석기시대의 농업기술 개량과 확산은 "또다른 진전을 위한 전제조건을 계속 재생산하는 자기강화 과정이었으며, 후퇴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일방통행로가 되었다. 생산적인 재배는 더욱 가치 있는 활동이 되었다. 재배의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더 조밀한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인구가 조밀해지고 재배가 집약적으로 변할수록 인간이 사냥하는 야생동물이, 결과적으로는 수렵채집 활동이 축소되었다." "정주생활은 더욱 광범위한 물질적 소유를 가능하게 했고 엄청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다양화와 정교화를 위한 토대를 서서히 다져갔다. 그렇지만 농업 집약화 과정이 산업화 전야까지 제 갈 길을 가는 동안, 세계 인구의 80~90퍼센트는 중노동, 질병, 영양실조, 높은 사망률에 시달리면서 집약적 재배가 이루어지는 조그만 땅에서 빈약한 생계수단을 뽑아내기 위해 싸워야 했다. 어떻게 이런 역설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이번엔도 개괄적인 답은 인구 성장, 그것도 극적인 인구 성장이다."(225-6)


"서서히 농업 집약도와 인구 밀도가 증가했다. 무장한 전사들의 기습은 더 격하고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가담한 무리가 클수록 전투 범위는 더 커졌다. 그리고 마을에 주민이 많을수록 기습으로 효과를 보거나 비밀 작전을 펼칠 가능성은 낮아졌다." 부족(연합)이 대규모 이주를 감행하면서, 이런 이동은 연쇄 반응과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얻게 될 전리품이 더 많고 중요할수록 양측 모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공개 전투를 벌이며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땅 자체가 걸렸을 때는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았을 것이다." "본격적인 공개 전투가 도입된 곳에서는 이따금 매복이나 계략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부족 집단끼리 통솔 대형이나 전술적 지휘를 동원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지휘자들은 대개 솔선수범하며 병력을 영웅적으로 이끌었다. 전쟁 지도자가 선두에 서고 부하들이 뒤를 따르는 게르만족의 유명한 '쐐기' 대형은 이런 영웅 유형 지도력의 표현일 것이다. 257-8)


"농업 확산으로 수렵채집인이 꾸준히 축소되던 단계는 이제, 경작에 부적절하더라도 가축을 사육할 수 있는 주변부의 땅을 언제 어디서든 목축민이 차지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이처럼 신석기시대인들 내에서 처음 일어난 중요한 경제 다각화로 인해 농경 사회에는 새로운 유형의 이동성 반半유목민 이웃이 생겼는데, 이들은 군사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수렵채집인들보다 훨씬 중요했다." "목축민들의 인구 밀도와 절대 수는 농경민들보다 훨씬 낮았음에도, 개별 사회집단의 크기는 농경민 집단과 대체로 같았다."(260-1) 정주 공동체들은 목축 부족민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시와 국가 조직을 갖추었지만, "목축민들은 허약한 도시경제의 기반을 이루던 취약한 농경 배후지를 야금야금 잠식함으로써 도시를 상당히 빠르게 쇠퇴와 몰락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과정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일종의 '체제 붕괴'를 일으키는 일상적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272)


신석기시대와 초기 청동기시대의 동유럽-서아시아 스텝지대에서는 말이 큰 무리를 이루어 번성했다. "기원전 제4천년기에 현지 거주민들은 야생마를 대거 사냥하고 또한 가축화하고 있었다."(275) 가축화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지난한 과정이다. "말의 생물학적 민감성을 인간의 필요에 맞추기 위해서는 천 년에 걸친 점진적인 선택 교배 과정이 필요했다. 아울러 시간이 흐르면서 방법론과 하드웨어의 문화적 혁신이 일어나면서 가축화된 종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말타기가 아주 일찍 시작된 것 같다는 점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효과적인 말타기, 그리고 군사적 목적의 말타기가 문제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군마의 진화는 수천 년 동안 점진적인 여러 단계를 거쳤다. 이 과정의 마지막 주요 발전 가운데 하나─서기 500년경부터 시작된 등자의 발명과 확산─가 군사 기마술을 완성해냈다는 점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278-9)


"기마 목축과 기마 전투의 진화는 목축민의 위협을 크게 증대시켰다. 그러나 기마 목축 사회가 진화할 때쯤에는 농경 사회의 상황도 전과 같지는 않았다. 부족들과 작은 정치체들이 사라지고 국가와 거대 제국이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286) "권력과 권력관계는 더이상 친족 관계에만 기반하지 않았다. 족장과 '빅맨'은 이제 무장 종사, 종속민, 피호민을 이용해 사회적 거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개 지도자의 씨족이나 친척 씨족 출신이었지만 다른 씨족, 심지어 완전한 외부인일 수도 있었으며, 후원자와는 혈연을 능가하는 경제적·사회적 이익과 의무로 묶여 있었다. 엘리트 간의 유대도 부족과 혈연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서로 다른 부족 공동체의 족장들과 '빅맨'들은 서로를 습격하기도 했지만 귀한 물건과 굳건한 동맹, 신성한 우정을 교환하면서 제삼자에 맞서기도 했고, 종종 '부족의 이익'을 배반하면서까지 서로를 지원해 자기 부족 내의 경쟁자와 적수에 맞서기도 했다.(289)


"국가의 진화는 농업으로의 이행과 농업 성장으로 촉진된 과정에 따른 거의 '필연적인' 정점이자 결실이었다─적어도 적당한 조건이 주어진 곳에서는 그랬다. 이는 지구상에서 국가가 처음 등장했던 네 곳인 근동, 중국 북부, 중앙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이 하나같이 농업 혁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로 명백하게 입증된다."(314-5) "무장 세력은 국가 형성과 관련해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든 특징들을 빚어내는 힘이었다. 독립적이던 예전의 족장들을 강압과 영입을 통해 하나의 종주 체제에 통합함으로써 국가의 중핵을 확대하고, 새로운 범凡엘리트 내의 친족 유대 및 친족을 초월한 제도라는 두 가지 장치로 국가 통치를 강화하고, 종주가 군대·사법·종교의 최고 권한을 장악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관료제화와 문화 융합, 공동의 정체성 형성을 통한 영토의 통합에 의해 더욱 통일된 국가로 바꾸는 일은 모두 무장 세력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322-3)


# 국가 등장의 토대들

1. 농업의 집약화

2. 인구 성장

3. 경제적·사회적 계층화의 심화

4. 주술과 공동 의례

5. 무장 종사단을 거느린 빅맨과 족장의 권력


"무장 집단은 국가 구조 밖에서도 계속 중요했다. 일단 '국가 구조' 자체가 매우 느슨한 개념이었으므로, 지역 권력자들은 자기 수하들과 지역 주민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정당한 실권자로 여겨졌다. 더욱이 소국가와 패권적인 종주국뿐만 아니라 새로 등장하던 국가 간의 체계 자체도 실상은 대체로 작고 분열되어 있어서, 국가들 주변과 사이에는 많은 '변경지'가 있었다. 부족/야만인 경계지 외에도, 국가 영토 안팎의 무인지대에서는 특정 부족이나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무장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법이나 피의 복수를 피해 달아난 탈주자, 폐적되거나 버려진 서출, 장자가 아닌 이들, 망명한 귀족, 채무자, 도망 노예, 또는 단순히 노략질과 모험적인 생계방식을 택한 빈농들로 잡다하게 구성되었다. 소국가는 작았고 큰 국가의 경우에도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무장 집단─수백 명에 이르는─은 규모가 클수록 지배 권력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었다."(356-7)


"도시국가에서 놀라운 점은 도시가 주변 시골 인구의 많은 부분, 아니 대부분을 융합하고 그 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도시국가를 탄생시킨 과정이다. 수메르인 도시국가 인구 가운데 무려 80~90퍼센트가 도시들 안에 살았다고 추정되는데, 이들 도시를 그렇게 만든 것은 기원전 제4천년기 말과 제3천년기 초에 있었던 시골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었다. 이 특이한 데이터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산업사회 이전 사회의 경제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구의 80~90퍼센트가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일부 도시국가가 시골에서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공예 및 원거리 무역 중심지가 되었을 때에도 인구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했다. 도시 인구 대부분이 농민으로서 날마다 가축을 끌고 들판과 농장을 오갔던 것이다." "농민의 도시생활양식이라는 역설이 생긴 이유는 방어적인 제휴 때문이었다."(368-9)


"대체로 도시 요새 진화의 순서는 전 세계에서 거의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흙과 자갈과 목재 구조물에서 시작해서, 갈리아 도시들에서 보듯 돌 외장을 덧붙인 '중간적 형태'를 거쳐 벽돌과 돌 구조물로, 그리고 마침내 순전한 돌 구조물로 진화했다. 이와 나란히 방어용 울타리를 두른 도심 공간은 대개 요새화된 큰 시민 중심지를 거쳐 완전히 에두른 성벽으로 진화했다." "이것은 투자와 정치적 협력이 필요한 대공사였다. 종전의 느슨한 농촌 겸 맹아적 도시의 친족-부족사회를 통합하는 국가 권력의 성장은 이 모든 과정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였다."(384-5) "어디서 등장했든 간에 맹아적 도시국가─흔히 말하는 코뮨─는 지역 귀족의 지배를 뒤흔들려고 했고, 어디서든 그렇게 하기 위한 수단은 시민들, 주로 지역·자치구·길드에서 조직되고 직공과 농민으로 구성된 대규모 보병대였다."(389)


"도시국가들 사이의 아주 가까운 거리와 작은 영토, 단기 군사작전 등으로 인해 인력 동원은 전에 없이 쉬워졌다. 국가 이전의 부족사회, 족장사회, 계층화된 환절 사회나 여타 정치체의 경우와 달리 가까이 있는 작은 밭, 과수원, 목초지를 지키기 위한 집단 협력은 확실히 사리 추구의 성격이 강했고, '무임승차'와 수동적인 '이반' 형태를 강력하게 좌절시키는 집단 제재를 통해 친밀한 도시국가 공동체 안에서 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적의 무리가 도시국가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목격되면, 그 즉시 도시의 남자들에게 무기를 들라고 알려서 적에 맞서고 약탈을 중단시키기 위해 진군할 수 있었다."(398)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결집된 민중의 강한 세력만이 아니었다. 이웃 도시국가에서 민중 기반의 대규모 보병대가 등장하자, 귀족이 이끄는 군소 정치체들은 이런저런 형태로 민중을 포섭해 군대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그래서 불가피하게도 정치적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국가 간 분쟁에서 생존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도시국가 형성은 다시 자기강화와 확장─'전염'─과정을 걸으면서 정치체 내부와 정치체 간의 상호작용을 일으켰다."(402)


"로마 체제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특이한 요소는 그것이 창조해낸 거대한 시민층이었다." "국내 시민 인력의 규모와 패권으로 동원할 수 있는 종속적 '동맹'의 인구 규모에는 뚜렷한 관계가 있으므로, 로마의 방대한 시민층은 거꾸로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패권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번 인력을 동원할 때 이처럼 인력 가운데 상당하지만 한정된 일부만 동원함으로써 로마는 몇 년씩이고 전쟁을 지속하면서 적을 지치게 만들어 쓰러뜨릴 수 있었고, 군사적 역전을 당하거나 재난이 닥쳤을 때마다 새로 모병할 수 있는 엄청난 인력 자원에 늘 의존할 수 있었다."(419-20) "오랜 군사작전, 장기간의 포위, 수비대 복무가 표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큰 도시국가는 복잡해진 투입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채택했다. 병참, 재정, 조직─모두 도시국가의 전성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초보적이었거나 또는 시민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책임졌던─은 이제 훨씬 복잡한 국가의 일이 되었다."(423)


"말의 가슴과 어깨에 거는 마구가 동물의 목과 복부에 걸어서 숨통을 조이는 단점이 있던 고대의 비효율적인 마구를 대체하며 제1천년기 동안 유라시아를 통해 퍼져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수레와 쟁기를 끄는 일은 황소의 몫이었다. 게다가 말을 먹이는 것은 전문적이고 값비싼 일이었다. 따라서 정주 사회에서 말은 엘리트의 소유물이었다. 말은 실용적이기보다 비싸고 사치스러운 소유물이었고, 그런 이유로 위신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435) "마력馬力은 나머지 사람들과 비교해 귀족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귀족을 정예 기마병력으로 바꿈으로써, 국가 중앙권위와의 관계에서도 엘리트층의 입지를 강화했다." "중앙 관료제화가 반대쪽 극단으로 흐를 경우 지역 지도자들이 권력을 위임받고 전유하여 결국 권력이 조각나기도 했고, 더 나아가 중앙의 권위가 사실상 무너지기도 했다. 마력은 이런 중앙집중화-파편화 긴장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438)


"봉건제와 관련해 무엇보다 유의할 점은 봉건제가 한결같이 국가 구조의 산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의 완전한 해체로 귀결되지 않는 한 분절적 형태로나마 국가 구조의 한 형태로 남았다는 것이다. 봉건제는 완전히 지역화된, 친족에 기반하는 족장사회와는 융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봉건제는 큰 국가들에서 특징적으로 진화했다." "봉건제는 중앙권위로부터 토지 수여를 바탕으로 존속하는 기마전사들과 영주들 쪽으로 지역-지방의 정치권력과 사법권력을 끌어당기는 중력이었다." "여기서 핵심적이지만 충분히 인정되지 않는 요인은 모든 전근대 국가의 예산에서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항목, 흔히 예산을 대부분 차지한 항목이 군사비였으며 기병이 가장 비싼 병과였다는 것이다. 기병이 가장 중요했던 곳에서는 국가의 운영과 기병을 육성하고 유지하는 능력이 거의 같은 의미일 정도였다. 이 엄청난 과제가 봉건제를 낳았다."(440-1)


# 봉건제 등장의 세 가지 요건

1. 말을 소유한 사회

2. 전쟁 도구로서 말을 선호하는 환경

3. 소규모 농업경제 국가가 값비싼 기마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귀족층에게 군역의 대가로 토지를 수여하고 조세 대신 지대를 받는 상황

※ 주왕조 시대 중국, 중세 유럽, 중세 일본


"봉건제의 쇠퇴를 초래한 것은 외부 요인이나 내부 요인 때문에 영주-장원 '생산양식' 안에서 발생한 특수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도시생활양식이라는 하부구조의 발달이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봉건제가 절정에 이르는 동안, 도시가 성장하고 교역이 되살아나면서 통치자들은 수입원을 얻고 행정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영주들이, 중세 후기에는 군주들이 근위대(갈수록 봉급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를 확대하고, 외국 용병을 고용하고, 현금 지급을 바탕으로 봉건적 소집군을 더 오랫동안 유지하고, 자유민들로 이루어진 민중 보병대를 도시와 시골에서 되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봉건화만큼이나 자기강화적인 과정을 따라 봉건 귀족을 상대로 꾸준히 권력을 키웠다. 그 결과 13세기부터 유럽의 체제는 더는 '순수' 봉건제 모델에 가깝지 않게 되었고 '준봉건제' 모델이나 국가적 영역통일체corporate state 모델로 전환되었다."(461)


말타기는 가축 떼를 데리고 목초지와 물을 찾아 훨씬 먼 거리를 이동해서 스텝지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었다. "그 결과 스텝지대의 강변과 오아시스 주변에서 반정주-반목축 생활방식에 따라 거주한 인구와 구분되는, 줄곧 이동하며 생활한 완전 유목민 집단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집단이 농사를 짓는 이웃들과 관계를 완전히 끊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전 유목민은 처음부터 농산물과 기타 물품을 얻기 위해 정주 인구와의 교환을 필요로 하는 공생적 존재였다." "말타기에는 전문적 장비가 필요하지 않았고, 목축-유목 경제와 생활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바로 그 말을 비할 바 없는 전쟁 수단으로 겸용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승용마乘用馬는 스텝지대와 농경지대 간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광대한 목초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말을 다수 이용할 수 있었고, 사실상 부족의 성인 남성 전원을 포함하는 기마 군단을 창설할 수 있었다."(495-6)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 닫혀 있고 바위투성이인 서유럽의 지형에는 유목민의 말과 가축을 먹일 넓고 탁 트인 목초지, 즉 그들의 특수한 존속양식과 생활방식의 토대가 없었다. 스텝지대 유목민이 이주할 수 있는 최서단 경계는 언제나 헝가리 평원이었고, 여기서 그들은 중부유럽과 서유럽을 습격해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게다가 유목민 부족들은 정주형에 가까워질수록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수레와 달구지에 더욱 의존했고, 그 결과 약탈 역량은 극대화되었지만 기동성은 떨어졌거니와, 적군에 가로막혀 꼼짝 못할 위험성이 커졌다. 다시 이 과정은 아틸라의 훈족, 마자르족, 크림반도의 타타르족에게 차례로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군사적 우위를 깨뜨렸다. 오스만 튀르크족은 아나톨리아 서부와 발칸 반도의 정주 사회들을 점점 더 직접 통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보병대와 공성병기를 만들어내는 한편 부족과 유목생활의 유산을 대부분 포기했다."(511)


"서양에서는 기병 역시 동양의 경무장 사격 전술과 반대로 중무장 충격 전술로 기울었는데, 그 이유는 앞서 보병과 관련하여 언급한 이유와 거의 같았다. 닫힌 지형과 가까운 군사작전 거리, 고르게 분포한 정착 거주지를 포함하는 반면 이동생활 인구와 넓은 개활지가 없는 조건에서는 치고 빠지기, 사격, 경기병 전술을 실행할 여지가 훨씬 적었다. 이런 조건에서 중무장한 충격기병 병력은 더 가볍게 무장한 적군을 훨씬 쉽게 따라잡고 격파할 수 있었다."(520) "동양에도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귀족 사이에서 육성된 완전무장 창기병(카타프락트cataphract) 같은 중무장 충격기병이 있었고, 서양에도 사격 경기병이 있었다. 그러나 상이한 조건으로 인해 서양에서는 중세의 기사騎士로 정점을 찍은 중무장 충격기병이 우세했다. 그렇다 해도 중무장 충격기병은 유럽사의 대부분 동안 중무장 충격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경기병, 그중에서도 특히 궁기병이 우위를 점했다."(523)


"근대성은 기술과 사회조직의 점진적 진화를 토대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문턱을 넘어가기도 했다.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이루어진 농경으로의 이행/혁명과 마찬가지로, 느리고 누적적인 과정이 도약 지점에 도달하자 전면적인 전환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부와 권력은 상호작용을 낳았는데 "첫째로, 이제 생산능력과 군사력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1500년 이후부터 "군사적 하드웨어─특히 화기─가 전쟁의 성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적 하드웨어를 생산하려면 발달한 기술적 하부구조가,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면 고도로 조직된 사회정치적 하부구조가 필요하게 되었다." "근대적 형태를 갖춘 부와 권력의 둘째 측면은 둘 다 극히 효과적인 복제기로서 모든 것을 정복하며 끊임없이 퍼져나갔다."(582-4)


"커다란 정치 블록은 경제적 복잡성과 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등 의심할 나위 없이 몇 가지 이점이 있었지만, 이런 이점은 독점적·전제적인 중앙권위와 숨 막힐 듯한 제국 행정으로 인해 상쇄되었다. 예를 들어 제정 중국의 눈부신 성취와 지속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맹렬히 경쟁하는 '전국戰國'들로 국토가 쪼개졌던 시기(기원전 5세기부터 221년까지)에 중국의 문화적 유산이 대부분 형성되고 진화와 기술 혁신이 가장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분열된데다가 다양한 국가들 사이에 권력이 더 고르게 분산되었던 까닭에 혁신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기가 더 어려웠다. 더욱이 정치체들 간의 격렬한 정치적·경제적 경쟁이 만연한 유럽의 체제에서 혁신을 받아들인 정치체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반면 혁신을 억압한 정치체는 불리한 위치에 설 공산이 컸다." 상대적 비효율성을 용납하지 않는 "이런 경쟁은 진화의 속도를 크게 높인 요인이었다."(588)


"1980년대 이래로 종족과 민족주의는 순전히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대다수 일족들이 받아들이는 깊은 정서─그들 각자가 공통 혈통이나 조상을 공유한다는─순전히 신화라는 주장이 유행해왔다." 그러나 유전적 현상과 문화적 현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려는 시도와는 달리 "대다수 종족들은 근대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자기 주위로 형성된 근대 민족주의의 핵을 이루었다. 별개 집단들이 뭉쳐서 형성된 종족이라 해도(대개 종족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충분한 시간 동안 두루 통혼하고 나면 새로운 유전적 표지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여기에 문화적 특성이 더해지면서, "민족적 공동체들은 유전적으로 연관이 있든 없든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특성 때문에 서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기능한다. 집단정체성을 형성하는 이런 복잡한 정신적 메커니즘의 원천과 작동을 외면할 경우, 인류 역사를 형성하는 가장 강한 유대의 일부를 필연적으로 오해하게 된다."(560-1)


"민족-영역 국가의 성장에 관한 학자들의 인식을 왜곡한 유럽 특유의 또다른 현상은 봉건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서유럽·중부유럽·북유럽의 민족-영역 국가들은 제1천년기 후반에 이 지역이 문명권으로 들어서자마자 곳곳에서 등장했지만, 중기병에 대한 선호와 부실한 국가 하부구조가 결합한 결과, 훗날 이들 국가의 중앙 정치권위는 봉건적 해체로 귀결되었다. 이처럼 중앙권위의 공백기가 있었던 까닭에 학자들은 1200년경부터 국왕의 권력이 부활하고 서로 비슷하게 기능하는 국가들이 등장한 현상을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으로 해석했고, 13세기에 민족-영토 국가가 탄생했다고 추정했다. 민족-영토 국가가 실은 유럽에서 나타난 새로운 발전이 아니라 1200년경 유럽에서 재등장한 발전이었음을 감안하면, 민족-영토 국가가 진화한 원인으로 훗날 나타난 근대성의 새로운 요소들, 이를테면 베이컨이 말한 세 가지(화약, 대양 항해, 인쇄기)를 꼽아서는 안 된다."(592)


수백 년간 진행된 '군사혁명'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인 육군 규모의 확대에 이바지한 요소는 "보병의 부활과 급증이었다. 대다수 육군들의 절대적 규모가 커진 것은 비용이 기병의 절반 밖에 들지 않는 보병 때문이었다. 이 과정 역시 1500년경에야 널리 쓰인 보병 화기가 사용되기 한참 전부터, 그런 화기와 무관하게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점을 입증하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14세기와 15세기에 기병대에 맞서 압승을 거둔 잉글랜드의 장궁 대형과 스위스의 장창 대형이었다." 보병의 확대를 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군사혁명'의 또다른 주요 요소인 "화기 방어시설의 도래다. 화기가 야전뿐 아니라 포위전의 양상까지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의 예리코부터 역사시대 내내, 방어시설(기본 건축술은 놀라울 정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의 정점은 적의 습격을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높은 장막벽curtain wall이었다. 화력은 이런 유형의 방어시설에 종지부를 찍었다."(597-8)


'군사혁명'의 주된 비용은 병력에 지급하는 급료와 물품 비용이었다. "분명히 높은 수준의 분쟁은 전쟁에 동원하고 할당하는 자원을 늘린다. 그러나 중요한 이권, 특히 가장 중요한 이권을 둘러싼 투쟁에 휘말리거나 군비 경쟁에 갇혔을 때, 적대하는 세력들은 대체로 무력을 최대한 동원하려 분투하고 으레 자기 역량의 한계를 넓힌다. 서로를 능가해야 하는 그들의 상호적 '필요성'은 방어시설이 중요한 역할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더 많은 투자, 무엇보다 더 큰 군대에 대한 투자로 나타난다. 역사를 통틀어 분쟁 수준이 높을 때면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점에서 근대 초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필요성은 무한할지라도 자원은 그렇지가 않다. 근대 초기 유럽 육·해군의 규모와 전비가 꾸준히 증대했다 해도, 그것은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강국들이 이전보다 자원을 더 많이 동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군비 경쟁이 단계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611-2)


국가 통치자들은 "13세기부터 전쟁에 자금을 대기 위해 신용거래에 의존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원천이 있었다. 하나는 유럽의 커다란 무역 도시들에 축적된 막대한 자본이었다. 국가 통치자들은 전제 권력이 없었고 여하튼 무역과 은행업 중심지 일부는 그들의 국경 바깥에 있었으므로,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금융 시장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비가 급증하면서 국가의 채무 불이행 위험이 높아지자 융자는 예전보다 드물어졌다. 이를 보완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국가는 주로 민간과 군대의 직위를 팔아서 이 자원을 이용했다. 현금을 투자해 직위를 구매한 개인들은 다년간 때마다 국가 급여를 받는 방법뿐 아니라 이익을 얻을 기회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를테면 국가가 연대와 중대 병사들에게 급여와 물품을 지급하라며 할당한 금액과 같은 공금을 횡령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투자금을 환수했다. 여기서도 신용거래라는 손쉬운 유혹은 비용의 악순환을 낳고 비효율성을 배가했다."(632-4)


"그러나 유럽의 일부 국가 엘리트층에게 부를 얻는 방안으로 상업적 폭리 획득이 강제 징수보다 갈수록 유망해졌다 해도, 그리고 국가 리바이어던이 전 영역에서 평화로운 자유무역을 보호할 수 있었다 해도,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줄곧 폭력 분쟁이 경제적 경쟁과 마구 뒤섞였다. 역사를 통틀어, 무역상들은 그들이 충분히 강하기만 하면 자원 및 시장을 공개 경쟁하여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대신 물리력으로 독점하려고 분투했다. 그렇지만 이제 게임은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경쟁자들은 규제와 관세 때문에 타국의 국내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그들에게 상업적 양보를 강요하고 그들을 약화시키고 식민지와 외국시장에서 몰아내려는 의도로 벌어지는 전쟁의 압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중상주의라는 딱지가 붙은 이 상업-군사 복합체는 17세기와 18세기에 대서양과 북해, 발트 해 연안에 자리잡은 강국들 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 이면에서 작동한 주요 추동력이었다."(638-9)


"전쟁을 위해 이처럼 막대한 자본 축적을 이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고도로 전개된 적자재정 정책이었다. 몰수나 과세와 달리 이 방법은 부자와 사회 유력자들이 자본을 감추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몰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투자한 민간 자본을 국가가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외국의 자원까지 유인했다. 그렇지만 쉽게 빌린 돈을 지금 이용하려면 미래를 저당잡혀야만 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 신중한 투자였고, '자본 차입'에 기초한 모든 투자와 마찬가지로 고위험-고수익 투자였다. 신용 대부를 받으려는 다윈주의적 경쟁이 점점 더 강국들의 군비 경쟁을 지배했다. 모든 강국이 한계와 그 너머까지 돈을 빌려 막대한 빚을 졌다." "영국이 '자본 차입' 경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유일한 이유는 승리를 거두어 식민 제국과 국제적 무역을 주도하는 위치를 차지했고, 이로써 경제가 크게 팽창하는 시기에 국내 경제 또한 부양했기 때문이다."(639-40)


"새로운 의회 체제이자 무역 제국인 잉글랜드의 전쟁을 외국 용병들과 함께 수행할 토착민 직업군대는 17세기 후반에 생겨났다. 이들은 군사 원정을 수행하는 정규군이기도 했다. 그러나 젠트리 엘리트층을 국가에 끌어들인 의회제 잉글랜드는 여전히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 민중이 선거권 없이 억압당하는 사회였다. 그 결과, 민족 감정과 자긍심이 결코 없진 않았음에도 사회적으로 하층민이고 풀이 죽은 정규병들─이들과 함께 나폴레옹을 물리친 웰링턴 공은 무례하게도 이들을 가리켜 '인간 쓰레기'라고 말했다─은 싸우려는 의욕이 별로 없었다. 구체제의 다른 군대들과 마찬가지로, 이 정규병들을 군대와 전선에 묶어두기 위해 엄한 규율과 체형이 마련되었다." "근대 초기 유럽에서 국군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1630년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와 함께 독일에 상륙한 스웨덴군이었다." "스웨덴은 봉건제가 거의 자리잡지 못한 나라이자 국회Riksdag에 농민 대표가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648-9)


# 국민군은 미국(대륙군과 민병대 조합)을 거쳐 혁명기 프랑스와 나폴레옹 제국(대규모 국민개병제)에서 절정에 이른다. 


"산업-기술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는 기술 혁신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까닭에, 한 세대에서 최고의 무력이라 해도 다음 세대의 중무장한 병력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란 불가능하게 되었다."(684) "그렇지만 이 모든 혁명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특히 육지에서 더욱 그랬다. 경제 분야에서 그랬듯 군사 분야에서도, 증기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활동 영역은 육체를 필요로 했으며 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육군은 전장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전신을 통해 쉽게 통제받으면서도, 일단 전장에 도착하고 나면 첨단 통신이라는 정점에서 나폴레옹 시대로까지 추락했다. 육군의 군사작전과 전술적 기동성은 여전히 인간 근육의 제약을 받았고, 육군의 포와 보급품은 말이 끌었다. 제1차세계대전 기간에 강대국들의 육군에는 말이 수만, 수십만 마리씩 있었다. 미리 전신선을 설치할 수 없는 야전에서 지휘와 통제는 걷거나 말을 타는 전령병을 이용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686)


"게다가 화력은 10배 이상 증대한 반면, 병사들은 개활 전장에서 산개하여 은폐하는 동안 강철 폭풍을 막아낼 방편으로 여전히 자기 피부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그 결과, 1차대전 기간에 서부 전선은 살인적인 교착 상태로 빠져들었다." 1880년대부터 일어난 2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지배한 것은 "화학 물질과 전력, 내연기관이었다. 화학산업은 새로운 폭발물들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고 오래지 않아 화학전을 야기했으며, 전기 또한 무선통신을 비롯한 다양한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내연기관이었다." 내연기관은 기계화된 공중전은 물론 "해전 일반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기를 이용하는 내연기관의 이중 추진 덕분에 1900년 최초로 운용 가능한 잠수함이 등장했고, 반면 포를 탑재한 전함은 항공기 출현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잠수함과 항공기 역시 1차대전 기간에 군사적 데뷔를 하여 2차대전 기간에는 해전을 완전히 지배했다."(686-8)


# 3차 산업혁명(정보혁명) : 전자공학 기술 적용(레이더)


19세기를 어지럽힌 강대국 간의 전쟁 원인은 무엇일까? "안보를 이유로 일어난 크림 전쟁(1854~56년)을 빼면, 이 전쟁들은 이탈리아의 통일로 귀결된 1859년 전쟁, 미국 남북 전쟁(1861~65년), 독일 통일 전쟁(1864년, 1866년, 1870~71년)이었다. 분명 이 전쟁들 모두 다양한 동기들로 인해 일어났지만, 가장 깊고 가장 격앙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민족 통일, 민족 독립, 민족 자결, 민족 정체성 같은 쟁점이었다. 유럽 전역의 일반적인 군사적 분쟁도 마찬가지였다. 폭력 분쟁이 빈발한 지역들의 특징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민족적 봉기가 되풀이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지역으로는 정복당해 분할된 폴란드, 외세의 지배를 받은 파편화된 이탈리아, 분열된 독일, 잠시 네덜란드에 속했던 훗날 벨기에의 영토, 억압당한 아일랜드,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된 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발칸 반도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을 야기하는 원인은 "경제가 전부는 아니었다."(695)


# 민족주의가 근대에 와서 널리 퍼지게 된 요인

1. 철도와 통신 기술이 발달하여 지리적, 시간적 친연성이 강화되면서 언어와 생활양식 등이 융화됨

2. 공동사회가 이익사회(를 넘어 대중사회)로 전환되면서 친족 간의 유대감은 약화되고 민족 개념이 그 자리를 대체

3. 국가 교육제도와 언론 매체, 징병제가 민족의 에토스를 촉진


특히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식민지 쟁탈전은 "영국이 방어를 위해 팽창하면서 다른 국가들의 '안보 딜레마'를 촉발하고, 이후로 더욱 팽창하면서 관련된 모든 국가에서 민족주의 추세를 강화하고 독점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기 시작한 사태였다. 자유무역을 하던 영국은 갈수록 공식 제국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기울었다. 공식 제국이 제한된 전략적 지역들에서 안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필요했고, 다른 보호주의 열강이 저마다 공식 제국을 팽창하기 시작하자 더 일반적인 선제 정책으로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국은 자유무역을 지키기 위해 공식 제국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보호주의 열강에게 토지 강탈의 선제적 측면은 분명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714) "바로 여기에 강대국들이 벌인 양차 대전의 씨앗이 있었다. 산업적-상업적 세계 경제가 개방되지 않고 분할될 것이라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압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717)


"좌파 계열이든 우파 계열이든 전체주의는 과거의 역사적 전제정들과 다른, 20세기 들어서야 등장할 수 있었던 명백히 새로운 유형의 체제였다. 전체주의는 19세기 말부터 당대인 누구나 자신의 시대를 규정하는 특징이라고 날카롭게 의식했던 발전,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발전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 발전이란 바로 대중사회의 등장이었다."(720) "어떤 요인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 우위를 선사했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어떤 강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미국의 현존이었다. 20세기 민주주의의 승리에 관한 연구들은 이 '미국 요인'을 대체로 간과했다. 달리 말해 미국이 없었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20세기의 대규모 투쟁들에서 십중팔구 패했을 것이다. 이 생각으로 정신을 차리고 나면, 대규모 투쟁들에 의해 창출된 세계를 단선적 발전 이론들과 휘그적 역사관 및 진보관을 믿을 때보다 훨씬 더 우연적인─그리고 허술한─산물로 바라보게 된다."(731)


"19세기의 어떤 국가가 자유주의 또는 민주주의 국가인지 결정하는 작업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가령, 노예제가 있었던 남북 전쟁 이전 미국을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국가로 간주할 수 있는가? 19세기에 대다수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선거권은 보통선거권이 아니었다. 이들 국가는 노예와 여성을 선거에서 배제했을뿐더러 재산과 교육을 기준으로 투표하고 선출될 권리를 제한했고, 이 기준을 단계적으로 조금씩만 완화했다."(745) "몇몇 경우, 전쟁을 피하도록 결정하기까지 더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것은 서로 공유하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통적인 세력 균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 내내 체제가 비슷한 국가들은 서로 곧잘 싸웠다. 그렇지만 때로는 분쟁 상황에서 국내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경우에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비슷한 국가들은 중대한 사안 때문에, 그리고 국내의 적들에 맞서 서로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대 진영에 대항해 동맹을 맺곤 했다.(747-8)


"페인 및 칸트의 논리와 반대로 고대 민주정 아테네에서 민중은 줄곧 가장 호전적인 요소였다. 정치이론가들은 오히려 민주정들과 공화정들이 평화롭기보다 호전적이었고 흄의 말마따나 '경솔한 결기imprudent vehemence'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대중은 고전 고대 이래로 위기시에 변덕스럽고 무모하다는 평판만 얻었던 것이 아니다. 민족의 명예와 영광 같은 문제로 그들을 쉽고도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드러났다. 이 경향은 프랑스혁명기에 전쟁을 치르는 동안 다시 나타났으며, 훗날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3세, 비스마르크를 비롯해 혁명적 지도자들과 보수적 지도자들 모두 이 경향에 의존했다." "자유주의 국가 영국을 크림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주로 대중의 압력이었다. 쇼비니즘적이고 호전적인 대중의 광란을 뜻하는 '징고이즘jingoism'이라는 말 자체가 민주화를 강화하고 있던 19세기 후반의 영국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751-2)


"그렇다면 아테네와 로마의 시민들은 어째서 거듭 전쟁에 찬성했고 손실과 파괴, 궁핍, 전쟁 피로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수 년간 참혹한 지구전을 감내했는가? 근대 사회들보다 아테네와 로마가 덜 민주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 나라가 살아간 농업 시대에는 전쟁을 통해 엄청난 물질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 사이의 균형은 산업화가 도래하고 나서야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부는 더이상 한정되지 않았고 되레 어리둥절할 정도로 급증했다. 농업 생산, 즉 토지는 더이상 부의 주요 원천이 아니었으며 국내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한 산업 생산에 의해, 그리고 훗날 서비스-정보 경제─이 경제에서는 원재료의 중요성이 급감했다─에 의해 대체되었다. 또한 생산이 다른 무엇보다 시장을 지향하게 되면서 교환 이익이 증가하고 상호의존도가 높아졌다. 예전과 달리 이제 적의 경제적 파탄은 자국의 번영에 해가 되었다."(760-1)


# 그 밖의 독립적인 연관 요인들

1. 부富와 안락함

2. 대도시의 서비스 사회 (육체노동 감소)

3. 성 혁명 (젊은 미혼 남성의 공격성 해소 방편)

4. 젊은 남성 수의 감소

5. 가족당 자녀 수의 감소? (자녀 생명에 더 민감)

6. 여성의 선거권

7. 핵무기


세계의 모든 국가가 풍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고 집단 안보가 대체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전략적 정책은 전형적으로 한 가지 패턴을 따랐다. 고립주의에서 유화로, 유화에서 봉쇄로, 봉쇄에서 냉전으로, 냉전에서 제한전쟁으로, 그리고 피치 못할 경우에만 제한전쟁에서 전면전쟁으로 한 단계식 대응 수준을 높이는 패턴이었다."(790) 자유주의 국가들이 탈식민 전쟁에 휘말리는 동안 "비자유주의 열강은 토착민을 억압하는 제국 전쟁에 덜 관여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아주 효과적으로 억압한 까닭에 저항이 반란으로 확대되지 못했고 또 반란이 불타오르기 전에 진압했기 때문이다. 호전성에 관한 연구들은 비민주주의 제국의 평화가 성공적인 억압과 테러에 달려 있었음을 잊곤 한다. 과거 독일과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패권 영역은 억압과 테러로 유지되었다. 이는 '짖지 않은 개'처럼 자칫 간과하기 쉽지만 중요한 측면이다."(808)


"반란군들이 얻은 불굴에 가까운 이미지는 대개 변변찮았던 그들의 군사적 효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들이 적의 정규군을 무력으로 물리친 경우는 아주 드물었고, 적에게 입히는 손실보다 그들 자신이 입는 손실이 훨씬 컸다." "사실 양차 대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소모전을 전략으로 선택한 쪽은 민주주의 국가들이었고, 이에 반해 독일과 일본은 번개 같은 군사작전으로 승패를 빠르게 판가름하고자 했다." "메롬이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한참 뒤진 사회들에서 전개된 장기간의 반란 진압전에서 패배하는 경향을 보였다. 민간인 인구에 대한 폭력을 스스로 제한한 탓에, 대개 성공을 거두었던 군사작전도 결국엔 무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국민들 상당수(의 자유주의자)가 깨닫고 나서야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전쟁 지속을 포기했다."(814)


19세기 후반에는 테러가 한층 효율적인 방법으로 등장한다. "고성능 폭탄과 자동화기는 개인과 소집단에게 그들의 수에 비해 손상을 많이 입히는 능력을 주었다. 또한 열차와 그 이후의 자동차는 그들에게 국경을 가로지르는 기동력을 주었다. 그리고 전보와 대중 신문은 그들의 활동을 전국에 알리고 반향을 일으킴으로써 어쨌거나 아주 제한된 행위인 공개적 '테러'의 효과를 엄청나게 확대했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정치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것이 19세기 후반에 러시아나 여타 유럽에서 등장한 무정부주의 테러리즘과 20세기에 등장한 반식민주의 테러의 물질적 토대였다. 테러에 휘둘리기 제일 쉬웠던 쪽은 이 경우에도 자유주의 국가들과 구식 권위주의 국가들이었다."(822-3)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낙후된 지역에서 횡행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비공식 제국주의', 비개입 공존, 직접 경제 원조, 유화, 봉쇄 등 서로를 강화하는 접근법들을 결합하는 편을 선호한다."(838)


그렇지만 민주주의 평화론은 몇 가지 중대 요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윌슨과 그의 후계자들이 군사 개입─멕시코,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과테말라에서─을 비롯한 개입을 통해 민주주의를 수립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민주주의는 모두가 바라는 것도, 무조건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는 단계적인 과정일 것이며, 지나치게 압박할 경우 적정한 다원성을 근근이 유지하며 근대화중인 국가-사회들의 안정을 위협해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대체로 민주주의의 채택은 한낱 의지의 행위가 아니라 경제·사회 근대화와 병행하여 전국 규모로 진행된 일이었다. 경제 근대화, 사회 전환, 민주화는 줄곧 긴밀히 얽혀 있었다." 둘째로 "민주주의 평화 현상은 자유화, 민주화,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 훨씬 약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아랍과 무슬림 국가들의 민주화로 인해 이들 사회의 호전성이 감소할 것인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841-3)


종족과 민족을 적절히 통제하고 번영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처방전은 그 효과가 제한적이다. "종족들이 분열된 나라는 민주화를 통해 종족들에게 자결권이라는 선택지를 주고 나면 쪼개지는 경향이 있다. 종족성과 민족주의는 19세기와 마찬가지로 20세기에도 분쟁과 전쟁의 주된 원인이었다."(85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와 20세기에 강대국들이 서로 싸운 햇수는 그 이전 세기들에 비하면 3분이 1 수준이었다. 전쟁을 저지한 주된 요인은 전비가 아니라(상대적인 인구와 부를 고려하면 전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맬서스의 덫이 부서지고 나자 극적으로 증가한 평화의 이익이었다. 이처럼 평화에 따르는 이익이 늘어남에 따라 시장을 지향하며 경제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독립성을 높여가던, 산업화중이거나 산업화된 사회들(체제와 무관하게)에 유리한 쪽으로 전쟁과 평화의 전반적 균형이 기울어졌고, 부의 획득이 더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게 되었다."(849)


국가 전쟁이 특히 치명적·파괴적이라는 그릇된 인상과 달리 인간 싸움에 따른 사망자 수는 국가 치하에서 줄어들었다. "첫째, 국가 치하에서 인간의 치명적 폭력은 국내와 국외에서 확연히 구분되었으며, 국가 영역 안에서 비국가 폭력은 불법화되고 국가의 권위에 의해 대부분 제압되었다. 그래도 환상은 금물이다. 사회 안에서 폭력적 죽음의 비율이 낮아진 까닭은 대개 폭력이 승리했기 때문이지 어떤 평화로운 합의 때문이 아니었다." 무력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된 국가사회들은 비록 무력의 산물이기는 해도 "비교적 평화로운 민간생활, 인구가 조밀하고 복잡하고 질서 잡힌 사회, 분업이 발달한 규모의 경제, 그리고 문자문명에 필수인 전제조건을 만들어냈다." "선진 산업-기술-자유주의 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전쟁은 국가와 문명의 성장에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기도 했으며 놀라운 문화적 도약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858-9)


"전쟁의 근원을 개인이나 국가, 국제 체제의 본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이 세 '수준들' 각각에 있는 전쟁의 원인은 불가피하지만 불충분한 원인이며, 전체를 조각들로 쪼개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폭력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는─뿐 아니라 그 결과로 나타나는 권력 추구, '안보 딜레마'를 부채질하는 상호 불안 상태까지도 모두 인간 본성에 따라 주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조되는 것은 인간들이 지질학적 시간 동안 필요와 욕구, 권력 추구, 상호 불안이 말 그대로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던 생존 투쟁 과정에서 진화의 압력을 강하게 받으며 형성되어왔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전쟁은 인간 동기체계 전반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 욕구의 대상들과 동일한 대상들을 얻기 위해 수행해온 것이다. 전쟁이란 정치의 연속이라는 유명한 표현대로, 정치는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들의 목적들과 동일한 목적들을 국내 '수준'과 국가 간 '수준'에서 성취하려는 활동이다."(8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4
리처드 D. 앨틱 지음, 이미애 옮김 / 아카넷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 빅토리아 시대 : 1830년이나 1832년(제1차 선거법 개정안 통과) 혹은 1837년(빅토리아 여왕 즉위)에서 1901년(빅토리아 여왕 서거)까지를 가리킨다.


"1830년대의 영국에서 조지 4세(웨일스 공) 섭정 시대의 오만한 사치는 새로운 산업화로 초래된 불결하고 비참한 상황과 나란히 존재했다." "디즈레일리의 소설 <무녀>(1845)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여왕의 나라,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나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국가"가 실제로는 "두 나라이고, 그 두 나라는 교섭과 공감이 전혀 없어서 다른 지역에 거주하거나 혹은 다른 혹성에 살고 있듯이 서로의 습관과 사고, 감정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으며 양육되고 다른 음식을 먹고 서로 다른 관습에 지배되고 동일한 법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 그것은 바로 부자와 빈자이다."라고 묘사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해마다 넓어져갔고,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당대의 큰 난제였다."(38-9) 여기서 등장한 것이 이성의 시대를 대변하는 합리주의였으며, 벤담주의자과 계몽적 합리주의자들은 새로운 권위와 막강한 실제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두 개로 나뉜 나라 중에서 영광의 시대를 대변한 것은 1851년에 개최된 수정궁의 축전(제1차 세계박람회)이었다. 수정궁 축전은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 혹은 역사학자 W. L. 번이 표현했듯이 '평형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했다. 그 시대는 15년이나 20년에 지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우리가 빅토리아 시대의 이미지를 마음에 떠올릴 때 가장 쉽게 연상하는 시절이고,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적용될 수 있는 상투적인 문구를 적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였다." "굶주린 40년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온 후에 경제는 큰 도약을 이루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는 영국이 과거에 그 비슷한 풍요도 누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린 시절이었다. 대영제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세계의 선두에 선 은행이자 선적회사였고 제품 공급자였으며, 해군을 통해 상선들의 항로에서 평화를 유지했다."(40-1)


과거 영국에서 "인쇄물과 정치활동의 관계는 비교적 소수에 불과한 권력자들을 상대로 저술된 논쟁적인 팸플릿과 서적을 통해서 주로 형성되어 왔었다. 변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력은 "공적 의견"─실은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표명하는 정선된 집단의 의견에 불과한─의 지지를 받은 사적인 세력이었다. 그러나 토리당의 지주들과 교회의 저항을 극복하며 1832년에 통과된 선거법 개정법안은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중산층의 대변인이었던 휘그당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것은 신문과 잡지가 유통시키고 형성한, 전례 없이 엄청난 규모의 여론이었다."(119) "1832년과 다시 (곡물법 폐지에 성공한) 1846년에 기치를 올린 주장, 즉 "민중이 승리했다"는 주장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집합의지'라고 부른 것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인쇄물이 그 의지를 표현하는 주요한 도구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21)


빅토리아 시대의 출판물이 보여주는 "다방면에 걸친 다양한 목소리 덕분에, 서로 다른 계층들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서로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출판물들이 논쟁의 도가니를 계속 끓어오르게 하는 한, 국민의 마음은 침체될 수 없었다. 또한 동시에 이 출판물들이 해를 끼치지 않고 계급적 증오심과 잠재적으로 위험한 의견 차이를 터뜨려놓을 수 있는 안전밸브가 되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계급투쟁을 피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신문과 잡지가 설교단이나 대포보다 더 강력하다고 믿었고, 이치에 맞는 인쇄된 활자로 인해서 병든 사회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은 손상되지 않은 온전한 형태로 번영을 누리면서 20세기에 들어섰고, 그 마음이 활력적이며 그 자유가 축소되지 않았으므로, 출판에 대한 믿음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124)


당대의 번영을 상징하는 철도와 도시는 "문명의 최고의 승리이자 동시에 가장 큰 재앙을 불러온 문명의 과오였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든지 간에 도시는 압도적이었다. 젊은 시절의 디킨스와 여러 해 후의 헨리 제임스 같은 사람들은 도시가 복잡하고 대조적인 광경들과 사람들로 활기를 돋워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도시의 만화경 같은 움직임, 끊임없이 들떠 있는 분위기, 부수는 사람과 건설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변화들, 곧 영국에서 오랫동안 익숙했던 변화와 달리 규칙적으로 순환하거나 반복되지 않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 광경이 매혹을 느끼게 했다면, 그것은 또한 소름이 돋아나게도 했다. 도시의 밀도와 확장은 속박감, 무기력증, 폐소공포증과 같은 감정을 일으켰다. 도시의 꼴사나운 모양새가 그 장엄함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대다수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은 소수의 사치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132)


프랑스 혁명 이후로 페인 같은 급진파들을 선두로 평민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무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노동자들 대다수는 아직 정치권력이라는 유혹적인 환영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소음이고, 이 소음은 그것을 들은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많은 중도파의 가슴에도 두려움을 일으켰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자코뱅주의와 동일시되었고, 영국이 처음에는 혁명을 치르고 있는 프랑스와, 나중에는 프랑스 제국과 몇 십 년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실로 역모의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해협 너머에서 일어난 격동적인 이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슬로건을 퍼뜨리는 선동가들이 대중을 일깨우면 내란이 일어날 수 있고 심지어 무정부 상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140-1)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는 1860년대 말의 어딘가에서 막을 내렸고, 1870년대 중반 이후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빅토리아 시대 중반의 황금기를 후기와 구분하는 한 해를 꼽는다면, 의심할 바 없이 제2차 선거법 개정안으로 도시 노동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어 유권자의 수가 두 배로 확대된 1867년일 것이다. 그 법안으로 말미암아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지난 수십 년간 서서히 쌓여왔지만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논쟁거리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제 평민이 점유하게 된 권력이 영국의 정치구조 및 그보다 더욱 중요한 영국의 문화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지난 몇 십 년간 중산층은 영국 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왔다. 이제는 육체노동자의 차례였다. 민주주의의 도래를 몹시 한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떻든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42)


"제1차 선거법 개정(1832)은 영국과 웨일스의 유권자 수를 43만 5000명에서 65만 2000명으로 늘렸고 대략 50퍼센트가 증가한 것이지만 이는 성인 남자 여섯 명 중에서 아직 다섯 명이 투표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147) "1867년에 중산층의 나머지 절반은 도시 노동자들 대다수와 더불어 투표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남자들이 선거인 명부에 첨가되었다. 이에 따라 의석을 재배분하면서 대도시들은 1832년에 얻지 못했던 의원 선출권을 갖게 되었다. 1884년의 세 번째 마지막 선거 개정안으로 투표권은 200만 농업 노동자들에게 확대되었고 그리하여 시골 지역에서 지방정부의 선거가 가능해졌다." 투표함의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 자유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가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은 것은 새로 투표권을 받은 노동자들이 옛 양당 체제 내에서 움직이는데 얼마간 만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156-7)


이처럼 영국에서 변화의 물결은 온전히 체제 내 개혁으로 이어졌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에드먼드 버크의 정치국가와 사회에 대한 유기체론적 사상을 물려받았다. 국가는 인위적인 수단과 혁신으로 방해되어서는 안 되는 내적 성장 원칙을 가진 유기체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몇 백 년의 전통이 살아 있는 결정체로서 명확히 규정된 사회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거의 신비스러운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습된 특권에 기반을 둔 계층구조에 신성함이 있다는 믿음은 사회적 유동성이 증가하고 있는 시대에도 존속했고,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들만이 그런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 내내 하위 계층민들은 '윗사람들'에 대한 상당한 원한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며 중대한 시점에서는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관습적인 존중심 덕분에 이런 감정들이 계급 전쟁과 같은 것으로 점화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50-1)


"남자들의 세계가 유용성(utility)이라는 이념을 최고 가치로 삼고 그 이념에 지배되고 있었던 때에, 상류층 여성의 세계가 거의 모든 행위의 시금석으로 삼은 것은 무용성(uselessness)이었다."(94-5) 여자는 가정을 "헌신적으로 수호하는 여사제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여성의 농노 상태는 정당화되었다." 인습적으로 여자는 "연약한 존재여야 했고, 시골의 오솔길을 함께 걷거나 정찬 식탁으로 인도하는 신사의 팔에 늘 기대야 했다."(98) "19세기 마지막 몇 십 년까지 점잖은 집안 출신이지만 생활 형편이 어려운 여자들에게 개방된 거의 유일한 직업은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처럼) 학교 교사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제인 에어처럼) 개인 가정의 가정교사가 되는 일이었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일은 고되고 사회적 지위는 그녀가 받는 보수만큼이나 낮았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가정교사의 지위는 상급 하인들과 같은 수준이었다."(102)


물질주의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빅토리아인들은 현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과거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향수'라는 단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분위기에서는 혁신적인 것, 진보적인 것, 합리적인 것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들은 낭만적 기질과의 친화력으로 말미암아 오래된 것, 보수적인 것, 감정적인 것에 대한 공감도 똑같이 키워나갔다."(165) 빅토리아인들이 "중세 시대를 되풀이하여 환기한 데에는 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빅토리아 시대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안정되고 더욱 공정한 사회를 중세 시대에서 찾으려는 욕구, 의혹이 없는 더욱 통합된 지적 분위기를 찾으려는 욕구였다.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자신들의 방향성이 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질수록 확고한 질서를 갈망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중세 시대는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그처럼 정신적으로 '굳은 땅'을 제공했다고 그들은 믿었다."(169-70)


"기계는 자연을 굴복시키고 이용한 그 시대의 두드러진 상징이었고, 그 비유를 자유로이 확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또한 사회적·정치적 혁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새로 발명된 기계가 아무리 독창적이거나 인상적이더라도 그 자체가 선善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낳은 산물이었다." "이와 같은 근거에서, 더 사려 깊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변화(과정)와 향상(진보)의 동일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이들은 목적지와 무관하게 과정이 직선적으로 끝없이 전진한다는 가정을 거부했다. 대신에 그들은 다른 종류의 움직임들이 있다는 역사적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진보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았다."(177) 앨프레드 월리스의 이론과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이론(1858)으로 대표되는 지질학과 고생물학 연구의 진전 역시 "자신만만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줄 메시지를 전했다."(178)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이데올로기는 공리주의와 복음주의다. 이 중에서 공리주의는 "제러미 벤담 주위에 몰려든 교조적 열광자들이 주장한 철학의 순수한 형태를 가리킨다. 벤담주의자인 국회의원들과 그 추종자들의 신조를 가리키기 위해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또 다른 명칭은 '철학적 급진주의'이다." "이 명칭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층이 신봉한 사회-경제-정치 이데올로기와 일련의 가치들을 가리켰고, 또한 그 시대를 지배했으며 이 강령을 채택하여 행동과 목적, 습관과 편견을 정당화했던 기업가 정신을 가리킨다."(187)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의 행동이나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요소는 '좋은' 결과가 '나쁜' 결과보다 우위라는 것이 입증되는가의 문제였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수학적 계산이었는데, 벤담의 용어로 말하자면 "행복을 가져오는 계산법" 혹은 "도덕적 산수"를 통해 얻어졌다."(191)


벤담주의는 뉴턴의 기계장치를 윤리학에 적용한 것이었다. "공리주의와 떼어낼 수 없었던 것은 고전주의 경제학─대체로 실용적인 목적에서 그 두 학파는 1830년경에 하나로 융합되었다─이었고, 혹은 공리주의의 또 다른 동의어로 종종 부정확하게 사용되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일반적인 명칭을 사용하자면 "정치경제학"이었다. 정치경제학자들, 즉 칼라일이 "음울한 과학"이라고 불렀던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그 분야에도 물리학에서의 중력의 법칙이나 벤담주의 윤리학의 쾌락/고통의 원칙처럼 최고의 경제적 법칙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체계는 확고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었으며,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경제학은 철학적 권위뿐 아니라 수학적 권위로 공식 인가된 표시를 달고 있었다. 정치경제학이 의존한 철의 법칙 가운데 첫 번째는 토머스 맬서스 목사가 그의 <인구학 개론에 관한 소고>에서 상술한 것이었다."(194-5)


애덤 스미스와 달리, 벤담은 "현재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식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선호만 고려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동료들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스미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과 사회 이익이 동일하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혹은 직관적으로 갖게 된다고 주장했다."(208) "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다른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벤담주의의 목소리가 기여한 바가 거의 없었다면, 그것을 주장하도록 여론을 형성한 점에서는 벤담주의의 노력이 공헌하 바가 상당히 컸다. 대개의 획기적인 사회개혁 법령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제가 필요한 상황을 대규모로 조사하는 작업이 선행되었는데, 과학적 성향을 가진 일부 선도적인 벤담주의자들은 지칠 줄 모르고 전문적으로 사실을 수집했다. 그들이 속해 있었거나 간부로 봉사한 위원회에서 발간한 "청서"는 구제 입법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12)


# 벤담주의의 긍정적 유산

1. 입법부와 법률 개혁 주도(특히, 형법 개정)

2. 당파를 초월한 전문가가 주도하는 공공 행정체계 수립

3. 약자를 보호하고 부양하는 국가의 역할 강화


"복음주의는 프로테스탄트 경건파의 한 형태로서 교리와 예배의 형식보다는 인간들이 살아야 하는 방식에 더 관심을 두었고, 더욱이 삶 그 자체를 위해서보다는 내세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삶에 관심을 두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온갖 도덕적 오점을 찾아내고 영혼의 모든 움직임을 기록한 "영원한 현미경"을 언제나 근심스러운 눈길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복음주의에 공감하지 않은 칼라일은 그것을 "병적인 자기 성찰"이라고 불렀다."(250) "복음주의는 1790년대부터 1830년대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격변이 종교적 무관심과 이신론적 합리주의, 철저한 무신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면서 이전에 유행하던 입장을 배격하고 다시 근본주의적 종교와 유사한 것으로 달아났다." 복음주의와 공리주의는 개인의 성격 안에 융합되어 있었는데, "평일에는 사업가인 사람이 주일에는 복음주의자라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 역사에서 진부한 말에 불과했다."(253-4)


"공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의 속세의 운명을 이행하는 최고의 수단이 노동이라는 윤리에 똑같이 동의했고, 복음주의자들은 또한 노동이 천국의 보상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다."(255) "맬서스주의와 신빈민구제법의 냉혹한 사상이 기독교가 설파하는 자선과 엄밀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의문시한 사람들에게 복음주의는 개인적 곤궁을 해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은 노동이고, 그와 관련된 금욕의 실천이라고 대답했다. 훈련된 노동자는 결국에 노동자로서 성공했다. 가난이 게으름과 낭비 습관의 결과라는 것은 거의 자명했다."(257)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으로 분열된 국가에서 도덕적 복음주의의 원칙이 널리 수용되면서 화해를 추구하도록 영향을 미쳤고, 윤리적 민주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 계층을 결합시켰다. 이따금 마찰을 일으킨 계층들 간의 관계는 공동의 도덕을 소유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할 수 있었다."(263)


"과학이 성서의 역사적 확실성과 성서에서 유래한 유대교/기독교적 인간관을 어떻게든 입증해주리라는 희망이 얼마나 남아 있었든지 간에, <종의 기원>은 그러한 희망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조물주가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서 인간을 본래 완벽하게 창조했고 인간의 욕구에 각별히 맞춰서 우주를 만들었다는,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신의 섭리론은 끝나고 말았다."(340) 그러나 진보에 대한 빅토리아인들의 신념은 대단히 뿌리 깊은 것이었기에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이제 인간은 "신의 중재에 의존해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으려면 스스로에게 의지해야 한다.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깨닫고 사용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실증주의 윤리학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자조自助라는 테마가 더욱 숭고한 표현으로 등장한다."(351)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전진은 '컬쳐'(교양/문화)라는 단어의 의미로 집약된다. 19세기 이전에 "컬쳐(culture)는 기본적으로 '자연 생장물의 재배'를 뜻했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유추하여 인간의 (특히 개인의) 수양 과정을 뜻했다. 그러나 보통 어떤 자질의 수양을 뜻했던 이 후자의 의미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수양 자체, 그 자체로서의 어떤 것을 가리키도록 달라졌다. 그것은 처음에 '마음의 전반적인 상태나 습성'을 뜻했고 인간의 완벽함이라는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두 번째로 그것은 '한 사회 전체의 전반적인 지적 발달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예술의 총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네 번째로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그 단어는 '물질적, 지적, 정신적 삶의 총체적 방식'을 뜻하게 되었다." "사회가 더 이상은 그저 인간들이 공동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공존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질 수 없었다. 그에 덧붙여서 이제 사회는 그 구성원의 개별적 삶을 향상시킬 책임을 져야 했다."(357-9)


이러한 문화적 이상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널리 만연되어 있는 중산층의 심리 구조와 사회적 민주주의의 확산, 인간의 삶을 저하시킨 공장 체제의 존재였다."(360) "공장과 슬럼가의 생활이 빚어낸 최악의 결과들 가운데 한 가지는 개인이 대중에 융합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는 가장 큰 사회집단이라고 해봐야 가족과 인접한 공동체에 불과했던 농촌과 시골 마을의 생활조건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자선을 받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개체個體였다. 그러나 이제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공장과 제조소와 광산 근처에 음침하게 줄줄이 늘어선 집들을 꽉꽉 채우면서 그들의 정체성은 대체로 상실되고 말았다. 그들은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구성원들로 전환되었다."(363) 개인성과 더 나아가 인간성이 박탈되는 가운데 "무기력과 단조로움이 삶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자각은 공장 체제 덕분에 얻어진, 극소수에 불과한 사회적 이득 가운데 하나이다."(367)


문화의 성장 지체에 대한 답은 교육이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다 같이 구원의 희망이 없는 노동에 구제할 길 없이 종속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낭만주의의 사회적 비전을 신봉하며 그 정신에 따라서 모두 그렇게 주장했다. 교육을 문화적 진보는 아니더라도 대중적인 사회적 진보의 동인으로 간주하며 그토록 신뢰했던 경우는 서구 역사상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 보통교육을 실시하려는 추진력이 대부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초기에 벤담주의적 개선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친숙한 유행어는 '마음의 행진'이었다. 이 표현은, 과학과 기술로 인해서 물질적 환경이 변화되고 국가의 부가 증식되고 있던 그 시기에 진보가 지속될 수 있으려면 오로지 '유용한' 지식이 끝없이 증가하고 축적되며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그 지식을 이용하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368-9)


"철학적 입장에서 예술에 반대한 공리주의적 저항은 광범위한 인도주의적인 문화를 도덕적, 사회적 근거에서 불신하는 경향을 강화시켰다."(399) "복음주의자들은 공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예술을 거부했고, 몇 가지 동일한 이유에서 그러했다.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아니 적어도 더없이 엄격한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예술에 가장 헌신적인 낭만적 옹호자들의 진술을 어떤 입장에서 살펴보면 예술이 종교만큼이나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하는 듯이 보였으므로, 복음주의자들은 그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택은 명료했고,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택은 불가능했다. 내세의 주장은 현세의 주장을 무가치한 것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므로 시詩는 복음주의자들이 저항하려는 세속적 혼란을 일으키는 한 가지 요소라고 간주되었다."(403)


"공리주의와 복음주의의 시대에 수용될 수 있었던 예술의 기준은 대개 '도덕적 미학'이라는 용어로 요약될 수 있었다."(404) 그러나 러스킨과 모리스가 보기에 예술에는 훨씬 더 중요한 기능이 있었다. 예술은 "현대사회를 구제할 수 있고 세계를 인간이 노동하면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417)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철제 다리나 과도하게 장식된 공공 건물, 대량 생산된 실내 설비들, 개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보기 흉한 벽돌 공장들은 "사회의 질병이 외적으로 드러난 징후이며 그 원인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대인들이 "주위의 도덕적 추악성을 각성하고 아름다움이 어떻게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인식하도록 지적하는 것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최고로 "유용한" 것이었지만, 그 유용성이란 그들을 주로 몰아세운 정치경제학자들이 결코 생각해보지 못한 의미에서의 유용성이었다."(419)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당당한 정설들에 대항하는 강력한 조류가 187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건하고 시험적으로 보였지만 이전과 비교해볼 때 혁신적으로 확장된 국가 권력 앞에서 경제적, 사회적 개인주의는 물러나고 있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에 의해서 도덕적 심미주의는 전도되고 말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명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이 중산층이 대경실색하도록 충격적인 언행을 일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습적인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키웠던 일체의 교리와 금언들은 여왕이 서거하기 오래전부터 공격받았다. "빅토리아 시대의"라는 형용사 자체도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롱조의 미묘한 어감을 띠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공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제 빅토리아인들의 마음의 속성이라고 간주된 답답함과 두루뭉술함, 그릇된 진리, 억압과 금기로부터의 해방이었다. "(44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