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기원 너머의 역사담론 3
존 B. 던컨 지음, 김범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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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성과의 요약(pp.382~397)


# 고려의 관료 제도에서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요소

1. 전통적인 종교(이데올로기)가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 :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한 불교와 풍수지리설

2. 여전히 막강한 전통적인 귀속 집단의 정치력 : 지방 군현의 거의 모든 일상 행정에 관여하던 향리 가문

3. 지배 집단 구조의 연속성 : 지방 사회를 지배한 주요 가문의 세습적 특권이 중앙 관원 가문으로 연결


"고려부터 조선 전기까지 한국사의 중심적 주제의 하나는 중앙집권적 관료 제도를 창출하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흥기하기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관료제도를 만들려는 신라 국왕들의 노력은 골품제 귀족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좌절했지만, "2세기가 넘는 통일신라의 통치는 지속적인 통일을 위한 제도적·문화적 기반을 놓았다."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물리치고 승리했지만, 반도의 장악력은 미약했다. 왕건이 이끈 체제는 대등한 세력 중에서 국왕이 실질적인 수장을 맡은 군사 지도자의 연합이었다. 전국 대부분은 중앙의 군사 지도자와 연합하거나 그 아래에 복속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사병을 지휘하고 독립적으로 지방을 통치하려는 의도를 가진 지방 호족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처럼 고려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통치를 수립하는 데 왕실 자체에 맞서는 권력과 권위를 누린 중앙 연합과 반도 전역에 걸쳐 높은 정도의 지방자치가 지속되었다는 두 가지 주요한 내부 장애에 직면했다."


"새 왕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중앙 연합의 권력을 억제하고 국왕의 권력과 권위를 제고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제2·3대 국왕인 혜종과 정종의 치세 동안 일어난 유혈 사태로 임무는 좀더 쉬워졌지만, 왕권을 견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국왕은 제4대 광종이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의 공포와 과거제도의 시행─연합 세력의 군사적·정치적 지위를 격하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을 비롯한 여러 제도 개혁을 단행한 뒤 마침내 치세 후반 일련의 유혈 숙청으로 연합 세력의 배후를 파괴했다. 광종의 방법은 가혹했지만, 그 후계자가 관료 제도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고려의 제5대 국왕인 경종은 전시과를 시행해 왕조를 안정된 재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제6대 성종은 중국 삼성육부제의 모범을 받아들여 정무 관서인 중추원과 문하성을 정규 조정 안에 편성해 구조적으로 국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함으로써 관료적 정치체제의 창출로 나아가는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고려 전기의 국왕들은 지방 호족의 도전도 해결해야 했다. 광종의 과거제도 시행은 중앙 연합에 대항해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지방 호족의 후손이 중앙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국왕이 지방 호족에게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사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충성을 배양하려는 왕조의 정책은 성종 때 그들의 특권을 축소해 중앙이 지방행정을 통제하는 제도 아래로 복속시키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성종은 지방 사병을 혁파하고 지방 통치 조직을 전국적인 향리 제도로 통합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12개의 지역 거점에 설치된 목牧에 문치 행정을 처음 시행했다. 11세기 전반 현종은 소수의 중앙 관원을 지방에 파견해 그 정책을 계승했는데, 이것은 150년 동안 지방 주요 가문의 강력한 자치적인 통제 아래 있었던 군현에 고려왕조가 직접적인 감독을 시행한 첫 번째 사례였다." 


"다음 한 세기 반 동안 중앙 체제는 지방 주재를 점진적으로 확대했고, 그 결과 12세기 후반에는 전국 군현의 거의 절반이 중앙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관료 제도를 향한 명백한 전진에도 불구하고 국왕들은 고려 사회의 비교적 낮은 분화에서 부과된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10세기 중반 지주의 이해가 해상무역 세력의 이해를 무너뜨리면서 고려 국왕들은 지주 세력 이외에는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대안적 사회계층을 갖지 못했다. 광종은 지방 호족을 이용해 중앙 연합을 상쇄하려고 했지만, 호족 또한 세습적인 지주층이었다. 그 결과 과거제도를 거쳐 등용된 호족 가문의 자손들은 그들의 귀속적 특권을 이용해 자립할 수 있었고 그 후손들은 새로운 중앙 귀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2세기가 시작될 무렵, 중앙에 기반을 둔 이런 가문은 관원의 상층을 장악해 정무 기구의 통제, 토지에서 산출되는 가용 자원과 농민에 대한 접근을 놓고 국왕과 경쟁하게 되었다."


"1170년의 무신란 이후 정치권력은 문반 귀족으로부터 무신에게 넘어갔지만, 그 반란은 고려 정치체제의 기본 역학을 바꾸지 못했다. 무신 집정은 문반 귀족보다 더욱 많이 국왕을 통제했지만, 무신들은 자신 소유의 농장을 만들고 문반 귀족 가문과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높이려고 했다. 그 결과 무신 집권기 동안 많은 기존의 문반 귀족이 생존할 수 있었고 번창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고려 후기의 국왕들은 12세기의 선왕들을 괴롭혔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에 자신들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고려 후기 국왕들의 상황이 더 나빴는데, 무신 집권기 동안 사유지가 확대되어 가용 자원의 분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단합해 지주 귀족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상인 같은 그 밖의 중요한 사회집단이 없는 상황에서 고려 후기 국왕들과 원元 출신의 왕비들은 외국 신하·환관·노비에게 의존해 정치 운영을 통제하려고 했다."


"국왕이 지원을 의지할 만한(도시都市나 상인 집단 같은) 다른 주요한 사회계층이 없는 사회에서 대토지를 소유한 중앙 귀족의 흥기는 고려 왕권을 약화시킨 주요하고 결정적인 요소였다. 국왕이 의지할 만한 또 다른 사회집단은 신라-고려 교체기 지방 호족의 후손인 향리였다." "국왕은 향리에게 수조권의 특권을 주고 중앙 관직의 획득을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지원을 얻는 정책을 추구했다. 광종과 그 밖의 10세기 국왕들은 지방 향리를 이용해 중앙 연합의 권력을 상쇄하려고 했지만, 대안적 사회집단으로서 향리는 매우 실제적인 한계를 일부 안고 있었다. 향리는 그 자신이 대토지를 소유한 세습적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10세기의 수많은 중앙 연합 세력과 11~12세기의 문반 귀족과 전체적으로 동일한 사회계층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향리 권력의 물질적·사회적 기반은 외침의 파괴와 중앙 귀족 가문의 경제적 이익으로 지방이 수탈되면서 전국적으로 심각하게 침식되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앙의 권력투쟁은 세 가지 주요한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하나는 물적·인적 자원에 접근하는 문제였다. 나라의 경작지는 대부분 농장에 편입되었고, 그 농장의 주인들은 자주 탈세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대부분은 소작농이나 노비로 농장에 편입되었다. 국왕은 토지와 백성의 소속을 결정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특별 기구를 이용해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주장하려고 간헐적으로 시도했지만, 양반이 점점 더 자원을 지배하는 경향을 되돌릴 수 없었다." "훨씬 긴급한 문제는 공전으로 할당된 토지의 분량이 줄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려 후기 국왕들은 일상적으로 신하들에게 토지를 분급하거나 앞서 공전이었던 토지의 수조권을 주어 충성을 사려고 했다. 그 결과 조세수입이 급감했고, 상황은 왜구의 침입으로 더욱 악화되어 국가는 야전군에게 지급할 자금이 부족하고 관원들에게 녹봉을 줄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번째 쟁점은 정치 운영의 통제와 관련된 문제였다. 권위의 부족과 자원에 대한 접근의 제한으로 곤란을 겪고, 양반이 지배하는 조정과 직면한, 고려 후기의 국왕과 원 출신 왕비들은 인사 기구와 정무 관서를 궁중으로 옮기고, 외국 신하·환관·노비 같은 비양반 출신을 임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국왕과 양반이 갈등을 빚은 주요한 원인이었는데, 양반은 정규 관서에서 정치적 권한을 회복하려고 거듭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4세기 중반 원의 패권이 약화된 뒤 공민왕은 이제현 같은 개혁적 양반과 연합해 왕조의 정치제도를 다시 활성화하려고 시도했지만, 제도적 기반과 왕권은 이미 너무 약화되어 공민왕과 그 후계자들은 외척인 남양 홍씨와 이인임 일파 같은 강력한 양반 파벌에 지배되었다." 결국 공민왕과 바로 다음 국왕인 우왕의 개혁 시도는 좌절되었고 "왕조의 마지막 수십 년은 다양한 양반 집단 사이의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특징지어졌다."


"세 번째 쟁점은 중앙 조정에서 관직을 가질 수 있는 자격과 관련된 문제였다. 양반은 관직을 지냈다는 전통을 근거로 자신을 증명했기 때문에 관직 획득 자격은 사실상 왕조의 지배층에 포함되는 자격조건 중 하나가 되었다. 국왕이 환관·노비, 그 밖의 비양반 출신을 등용한 것은 이런 쟁점을 조성한 한 가지 요인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중앙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세습 자격을 왕조의 제도적 구조에 따라 보장받았던 향리에 의해 제기되었다. 고려 후기에 지방을 떠나 대거 수도로 옮겨온 향리는 중앙 관인층을 팽창시켰으며 사회질서의 정점에 있던 양반의 지위를 약화시키려고 위협했다. 이런 문제를 다루려는 고려 후기의 노력은 향리를 지방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향리의 숫자를 제한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시도는 뿌리 깊은 전통과 국왕이 향리에게 첨설직을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군직에 배치한 뒤 그 대부분을 등용하면서 좌절되었다."


"13세기 말엽 중앙 관원 가문은 자신을 (비양반 집단이나 지방 향리층 같은) 다른 사회집단과 구별하기 위해 사대부·사족·양반 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에서 보이듯이, 스스로를 차별적인 사회집단으로 파악하는 의식을 발전시켰다." "14세기 후반 무렵 개혁적 양반은 자신의 권력과 권위가 관원의 지위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강력하고 효과적인 중앙 체제에 의존했다. 이런 각성은 외침을 막거나, 관원을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보호하거나, 그들에게 녹봉의 형태로 기초적인 물질적 유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복지를 제공하지 못하던 왕조의 무능력을 포함한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았다. 양반의 태도는 유학의 학습이 다시 활성화된 것에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그런 변화는 부분적으로 원에서 도입된 주희학파의 새로운 사상으로 국왕과 그 재상의 도덕적 지도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사회 변화에서 중앙 조정의 활발한 역할을 강조한 옛 고려와 북송의 고문 전통에서 발원했다."


국가의 사회·정치제도를 재점검하기 시작한 이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추진할 수 있는 권력과 권위를 가진 새로운 지도자에게 충성을 돌릴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이성계가 양반 개혁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개인적 권력과 권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동북면 지방을 고려에 복속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4세기 중반 고려의 수도에 도착한 뒤, 이자춘과 이성계는 평양 조씨·황려 민씨 같은 중요한 양반 가문의 자제와 자신의 자녀를 혼인시켜 중앙 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정책을 추구했다. 또한 이성계의 아들로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이성계를 즉위시키는 데 중심인물이었고, 1400년에 마침내 스스로 국왕이 된 이방원은 과거 급제자로서 개혁자들이 유교 원리에 따라 조직한 새 질서의 전망에 공감했다. 이처럼 이성계는 군사적 지도자였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12세기 후반 조정을 장악한 무신들과는 매우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1391년 과전법은 양반 토지 소유의 기본적 형태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사전을 급격히 줄이고 공전을 크게 늘렸다. 불교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의 몰수와 맞물려 과전법으로 국가는 더 많은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 뒤 국력 신장의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중앙 정치제도의 개혁은 태종이 사병을 최종적으로 혁파하고 모든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켜 새 왕실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게 된 뒤에야 추진되었다. 도당을 혁파하고 몇 개의 독립적인 관서로 신권臣權을 분산한 것은 왕권의 상당한 신장을 보여주며 양반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일부 개혁자들은 전제정치의 성장을 막는 데 유의했지만, 국왕과 신하의 권력균형을 시정하지 않고는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충분히 신장시킬 수 강력하고 효과적인 중앙 체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다수의 양반 세력은 태종의 정치제도 개편을 지지했다."


"고려와 조선 제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방 통치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개혁자들은 낮은 품계의 지방관이 파견된 허약한 고려의 지방 통치권을, 높은 품계의 지방관이 폭넓은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로 대체했다." "이것은 국가가 토지와 인적 자원을 통제하는 데 중요했으며, 13~14세기에 지방 사회가 붕괴되어 향리가 이탈한 현상 때문에 필요한 측면도 있었다. 지방 통치 제도의 재편은 향리층의 이익을 보호했던 옛 지역적 신분제의 공식적인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조선 건국 이후 수도의 모든 향리는 과거에 급제했거나 특별한 공적을 세운 소수를 제외하고는 강제로 지방으로 돌려보내졌다. 향리는 더 이상 과거 응시를 보장받지 못했으며, 명예직이나 그런 칭호를 받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관원 아래서 근무하는 세습적인 서리의 지위로 격하되었다. 양반은 권력 경쟁의 주요한 근원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회·정치적 질서의 정상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보장하려는 양반의 노력은 향리를 제거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개혁자들은 의관이나 천문관 같은 기술관─그 뒤 '중인'이 된 집단─의 후손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들을 하위 관서에 제한하는 규정을 시행했다. 신분의 범주를 유지하려는 양반의 관심은 천민이나 양인 출신이 많았던 첩의 아들들에 관련된 비슷한 규제에서도 찾을 수 있다. 향리·기술관·서자는 고려에서는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그들의 배제는 지배층의 확실한 축소를 나타냈다. 또한 처음에는 이성계가 약간 반대했지만, 개혁자들은 (고려 말기에 원元 출신의 왕비를 위시한 왕실과 더불어 일군의 정치 세력을 형성했던) 환관을 정권의 핵심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천민·장인·상인 출신이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등용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시행했다. 이런 변화의 결과, 이제 양반은 한국 사회·정치적 질서의 정점에 홀로 서게 되었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건국은 고려 전기 국왕들의 중앙집권적 개혁에서 처음 결과를 맺은 중앙 귀족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정치·사회제도를 재건한 것이었다. 중앙 귀족은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 동안 일정한 좌절을 겪었지만, 고려 시대 전체에 걸쳐 정치를 지배했다. 때로는 일부 가문이 쇠퇴하기도 했지만, 중앙 귀족은 고려 시대 전체와 조선 전기까지도 구조와 구성 모두에서 뚜렷한 지속성을 보여주었다." "이성계와 그의 동북면 연합은 상당한 권력과 내부 결속력을 가진 잠재적인 새로운 집단으로 등장했지만, 중앙 귀족을 대체하기보다는 그들에 동참하는 것을 선택했다." "새 왕조의 정치제도는 왕권을 상당히 신장시켰지만, 세습적인 생득적 권리와 대토지 소유의 특권 인정을 포함한 양보는 궁극적으로 왕조를 통치할 수 있는 조선 국왕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조선 시대 내내 자원과 권력의 통제를 둘러싼 국왕과 양반 사이의 오랜 갈등의 무대를 마련했다."


"양반 권력의 세습적 본질과 대토지 기반은 양반을 귀족으로 보아야 할 필요를 알려준다. 그러나 주요한 중앙 관원 가문은 초기부터 계속 관료적 특징을 가졌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고려에서 과거제도의 중요성은 이미 안전한 중앙 관직에 오른 뒤에도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많았고 최고 품계의 재추 중에도 과거 급제자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고려 시대 전체에 걸쳐 등용과 승진의 이런 양상이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중앙 양반 가문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증거와 맞물려 관료적 귀족층으로서 양반의 기원은 조선왕조의 건국이 아니라 고려 시대인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전반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배층 내부의 상당한 연속성의 맥락 안에서 보면, 1392년의 왕조 교체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10세기의 노력이 4세기 이상 흐른 뒤에 정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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